포르투갈을 어찌어찌 돌려세운 후, 일리치 우아니는 못다한 멕시코 지역 정벌을 마무리짓기로 하였다. 남아있는 적대 국가인 코콤 정벌은 그 시발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전염병은 후아스텍 각지로 퍼져나갔다. 자체적으로 연구하거나 포르투갈 사람들로부터 천연두 치료를 위한 방책을 받으려 했지만, 천연두를 이길 만한 수단이 신통치 않았다.
한편 포르투갈인들은 틀라파넥을 자기네 땅으로 완전히 선포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일리치 우아니는 이렇게 조용히 말했을 뿐이다.
"실컷 즐거워하며 우리의 뒤를 칠 궁리를 하여라. 그 날이 너희의 마지막이리니."
내부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기 위한 코콤 정벌은 성공적이었다. 코콤은 구석의 에캅을 제외한 모든 곳을 빼앗겼다. 이제 후아스텍은 나후아틀을 무너뜨리고 마야 연합을 단결시킨 단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초칠이나 시우같은, 후아스텍과 다른 국가들이 남아있었다. 일리치 우아니는 이들을 천천히 병합하기로 했다.
다사다난한 세월이 지나가고 17세기에 접어들었다. 세계무역이 서서히 전 세계 사람들의 뇌리에 전파될 즈음, 후아스텍의 실력은 개발도에 비해 처참한 수준으로 저평가되었다. 역시 시대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기회를 보아 개혁을 마무리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리치 우아니였다.
"좋다! 이제 때가 되었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예전의 굴욕을 반복할 수는 없는 법! 포르투갈에게서 배울 것은 배워, 빨리 우리의 현 상태를 일신해나가자!"
1608년 8월 1일. 드디어 후아스텍은 염원하던 개혁을 마무리지었다. 이제 행정, 외교 기술은 완전히 일신되었다. 군사 기술 또한 예전에 비해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일리치 우아니와 그를 따르는 성직자들은 이리 저리 파편화된 마야 신앙과 역사를 성문화, 일원화시켜 해석에 차이를 보이는 종교와 관련된 법을 정립, 쉽고 빠르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마야도 서구 세계처럼 이념을 세우기 시작했다. 종교, 외교, 공격과 방어 이념을 채택한 그들은 기회가 되는 대로 차근차근 이념을 올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서구세력과 비슷한 군사 체계를 정립하여, 예전에 맛보았던 굴욕을 몇 배로 갚을 계획을 세웠다.
개혁이 정착하자 그간 혼란했던 사회 체계도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신대륙의 절대자인 후아스텍은 열강으로 인정받는데 성공했다.
서구화의 결과 생산과 무역, 조세 체계가 발전하여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제 어지간한 문제는 늘어난 재정 수익으로 커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 이제 가치가 다한 시우와의 동맹을 파기하였다. 후아스텍으로서는 종속국이 되려는 것을 거부하는 시우를 살려둘 하등의 이유가 더 이상 없었다.
한편 정치 개혁 또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서구식 플렌테이션 농장을 건설하였다. 타마울리파스의 설탕 농장은 서구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 것이다.
그리고 절대주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하지만 포르투갈과의 전쟁 시절을 연상했던 프랑스 군대가 후아스텍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예상 밖의 일에 일리치 우아니는 당황하였지만 괜찮았다. 예전과는 달리, 후아스텍은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기 때문에 작전만 잘 세우고 싸우면 이길 가능성은 충분했다.
전쟁이 계속 벌어지는 와중에 초칠과의 병합이 완료되었다. 그런데 왠지 손해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아득바득 모은 군사력으로 육군 사기를 올리는 군사 훈련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육군 깡패 프랑스와의 전투에서도 든든히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제 후아스텍의 든든한 군사력은 식민지의 군사력 따위야 순식간에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아스텍에게는 열받게도,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동맹인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웃한 강대국 카스티야를 동군연합으로 묶어버렸다. 이 사실은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또한 전쟁에 참여한다는 뜻이었다.
한편 이 때 일리치 우아니는 아들을 보았다. 그 들의 이름은 이츠코아틀이 될 것이다. 그 아이는 군재 빼고 다 뛰어난 아이었다.
한편 어려운 가운데서도 군사 기술은 꾸준히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어찌어찌 승세를 확보하는 김에 종전을 맺었다. 포르투갈은 결국 틀라파넥을 할양해야만 했고, 프랑스 또한 소정의 금액을 후아스텍에게 지불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후아스텍의 강성함을 검증받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후아스텍은 시우를 완전히 밀기로 하였다.
옛날부터 전우였던 시우. 하지만 이제 시우는 후아스텍과 하나가 되었다.
남방 국경은 차차 안정되어갔고, 북방의 개척지는 점차 늘어갔다. 소정의 돈을 대가로 코아윌라 개척지의 인구가 증가해갔다. 이것은 확실히 반가운 일이었다.
점령지에 나후아틀 종교는 엄연히 건재하였다. 하지만 종교 이념을 탄데다 마야의 성지인 소루타를 점령한 덕에 성직자 수가 3명으로 늘어난 터. 그들은 아무 부담 없이 전도에 전념했다.
한편 후아스텍의 일리치 우아니는 그놈의 강박관념 때문에 비용 부담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곳에 공장을 건설하라고 지시하였다.
해군 교리도 설립하였고...
국가 이념도 하나하나 정립시켰다.
1623년, 이제 최후의 마야 국가인 코콤을 공격하였다.
마야 통일의 마지막 전쟁은 213:8000명이라는 기적의 교환비를 내면서 후아스텍이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 사망자 213명. 공성시 사상자 594명. 이것이 마야 문명 통일의 마지막 피해였다.
코콤 정벌 이후, 일리치 우아니는 후아스텍이 다른 나라에 못지 않게 문명화되었고 유럽인들도 퇴출되었다고 당당히 승리 선언을 하였다. 이는 후아스텍으로 하여금 자신감과 함께 새로운 사상에 대한 신념 또한 생기게 만들었다.
이후 후아스텍은 아래쪽에서 떠돌아다니면서 곰팡내를 풍기는 미스키토를 정벌하기로 했다.
미스키토 정벌이야 껌처럼 쉽게 씹어서 끝냈다.
비록 근대화가 되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식 피의 공양은 이어졌다. 톨루칸 사람들의 안정이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리치 우아니인 약스 쿡 목은 과감히 고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여기서 그레이트 브리튼은 후아스텍을 경쟁국으로 선택했고, 그리고 나아가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레이트 브리튼은 도통 육군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후아스텍은 해양 봉쇄를 견디면서 해군을 짤라먹으면서 군사 훈련만 시켰는데도 승세를 잡아나갔다.
아예 수도 지역을 개발하여 세계무역을 받아들이는데 집중해도 될 정도였다.
결국 브리튼은 병력을 보내지 않은 대가로 기껏 설립시켰던 구아네와 터크스 제도, 바하마 식민지를 내줘야 했다. 뭇 서양 세력들은 이를 보고 '바보 브리튼', '해군만 사랑하는 자들', '섬나라의 멍청함'을 마음껏 비웃어댔다.
뭇 시련을 이겨낸 후아스텍은 드디어 마야 연맹의 재통합을 선언했다. 지금까지 마야 '문명'은 있었지만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지 못했던 마야가, 멕시코 전 세력을 통합한 강력한 국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마야가 제국으로 재편성됨에 따라, 마야의 모든 문화가 수용되었다. 이제 후아스텍은 마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이는 신대륙에 있는 유럽의 기득권에 심각한 변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번외. 1634년 당시 지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프랑스, 브리튼이 조금씩 신대륙에 마수를 뻗쳤고, 마야는 이제 그것을 막기 위해 한창 힘을 기르고 있었다. 한편 구 대륙에서는 오스만과 러시아, 무굴, 명 등이 세력을 떨쳤고 프랑스가 약진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첫댓글 마야가 부활하였다!이제 다음은 아메리카의 모든 영토를 코쟁이들한테서 '해방'시켜주는 것이겠지요?
힘을 더 키워야지요. 그리고 마야는 통합된 적이 없으니 이제 첫 '통합'이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콩키스타도르vs아즈텍.
만약 하나에 붙을수 있다면 어느쪽에 붙으시겠습니까?
아즈텍이 아니라 마야입니다. 아즈텍은 없어졌습니다.
@요녀석 ......
@박팽년과박원종 원 역사의 콩키와 아즈텍을 말한 것입니다.여기서야 당연히 마야지만요 ㅎㅎ.
@요녀석 아즈텍: 무한 전쟁+심뽑
콩키: 처음에는 원주민에게 좀 잘했으나 이후 무한 착취.
둘 다 걸러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