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속도첩(女俗圖帖)은 혜원(慧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3이후)의 대표적인 풍속화첩 중의 하나이다.
이 화첩은 1908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으며 모두 6면이다.
이 중 3면은 기녀(妓女)를 그린 것이고, 나머지 3면은 조선시대 일반 부녀자를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 화첩은 조선후기 풍속화 중 당시 번화한 수도 한양의 유흥 풍속을 보여주는 도시풍속도로서, 조선후기 기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드문 그림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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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유기공방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200여명이나 되는 공원들은 저마다 맡은 일에 매달려 땀을 흘리느라 부산하고,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는 용광로엔 시뻘건 쇳물이 끓고, 방짜 그릇을 두드리는 망치 소리는 귀를 찢는다.
콧수염에 쑥 들어간 눈이 반짝거리는 주인은 주판 두드리는 낙으로 살아간다.
그는 빈틈이 없어 일전 한푼만 틀려도 집사의 목을 날렸다.
이 큰 부자에게도 모자라는 게 있었으니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애 못낳는 본처는 진작에 돈보따리를 싸 주고 내쫓았지만 새로 들여온 둘째, 셋째도 역시 자식을 못 가져 삼사년씩 살다가 쫓겨났다.
넷째가 들어왔다.
스물넷에 자색이 빼어난데다 머리 회전도 빨라 유기주인 영감님을 치마폭에 쌌다.
뿐만아니라 그 드넓은 집안의 수많은 사람들을 쥐락펴락 한손에 움켜쥐었다.
저녁이 되면 뒤뜰 우물가엔 유기공장에서 하루 종일 땀을 흘린 유기공들이 불알을 덜렁거리며 멱을 감느라 왁자지껄하다.
어느 날~
주인 영감님이 공장 문을 닫고 소 잡고 돼지 잡고 잔치를 벌였다.
넷째 마누라가 입덧을 한 것이다.
다음해 초여름에 마누라는 달덩이같은 아들을 낳았고 유기공장 주인영감님의 입이 찢어졌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아이는 제 어미 젖꼭지 빨 때를 빼놓곤 하루 종일 영감님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감님이 유기공장 가는 발걸음도 뜸해졌다.
영감은 유기공장 명의를 아이에게 넘기고 집문서 논·밭문서도 모두 아이 이름으로 바꿨다.
호사다마라던가.
해소천식으로 콜록콜록하던 영감님이 급살을 맞아 이승을 하직했다.
장례를 치르고 넷째부인은 상복을 입은 채 유기공장을 이끌었다.
뭇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공장은 더 커졌다.
영감님의 삼년상을 치르고 나자 서른이 가까워진 부인은 상복을 훌훌 벗어던지고 화사하게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
안성 저잣거리에 안성유기 판매점이 크게 문을 열었다.
점장은 공장에서 일하던 스물일곱 총각 상덕이가 맡게 되었다.
원래 허우대가 멀쩡하던 상덕은 점장이 되면서 한결 훤해졌다.
밤이 되어 판매점이 문을 닫으면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가게 뒤에 딸린 방으로 스며든다.
촛불이 꺼지면 상덕이는 여인의 옷고름을 풀고 와락 끌어안았다.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번개가 치며 비를 쏟았다.
아직도 가쁜 숨으로 쌔근거리는 여인을 한팔로 안고 상덕이 물었다.
“임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찍은 이유가 뭐유?”
“가장 성실하게 일했고 가장 잘 생겼고….”
여인은 상덕의 양물을 꽉 쥐며
“또 서방님의 양물이 가장 대물이어서지요”
라고 킬킬거렸다.
“내 양물을 어떻게 봤소?”
“뒤뜰 우물가에서 모두들 멱을 감을 때 안방 들창구멍으로 봤지요.”
양물이 또다시 화를 내 한번 더 운우가 지나갔다.
그 여인은 바로 죽은 안성유기 주인 영감님의 넷째부인이다.
아이는 자라며 상덕이를 빼다 박았다.
첫댓글 ^ ^ ~
ㅋ ㅋ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