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두 번째)
<부산 기장→울산 정자해변, 2017. 3. 25∼26>
瓦也 정유순
기장군 장안읍 임랑해변 해파랑 길! 파도는 여전히 일렁이고 갈매기도 춤을 추는데 해는 구름에 가린다. 춘분이 지난 지 닷새가 지났지만 가끔은 동장군이 시샘을 한다. 옛말에 “춘분 추위에 노인들이 동사(凍死)한다”는 말이 있듯이 옷깃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 끝은 살을 찌르기도 한다. 그러나 밤새 철∼얼석 거리며 어둠을 삼킨 파도가 살며시 발밑으로 다가와 봄을 실어오고 매화는 우리를 향해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다.
<해파랑길 매화>
기장군 장안읍은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 불광산(659m) 자락에 창건한 장안사(長安寺)라는 절이 있어서 기장군 장안읍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해안에 접해 있으면서도 야산이 많아 농업이 주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고리원자력발전소(古里原子力發電所)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리원자력발전소>
임랑해변에서 해파랑길 4코스를 시작하여 몇 걸음만 옮기면 월내항이 나온다. 월내항의 방파제 입구 등대는 경기장 성화대 같고, 멀리 해변 끝으로 원자력발전소의 상징 같은 돔형 건물이 보이며, 전력을 실어 나르는 초고압 철탑들이 하늘에 그물을 쳐놓은 것 같다. 해안 길을 잠시 걷다가 봉태산 산길로 접어든다. 국가보안시설이라 해안 쪽으로는 길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내항>
<송전 철탑>
원자력발전소 앞을 지날 때 사진을 찍었더니 멀리서 경비원이 달려오며 촬영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봉태산 자락 너머 원전 주변에는 신고리원전이 들어서는지 주변이 좀 어수선 하고, 공사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신고리원전교차로>라는 안내판도 나온다. 오솔길 옆 한적한 배 밭에는 하얀 배꽃을 피우기 위해 봉우리망울마다 봄을 한 아름씩 품고 서생면 명품 배(梨)를 만들고 있다.
<배밭>
<서생 명품배>
고리원자력발전소는 총 4개의 원자로로, 1호기는 1978년 첫 가동하기 시작하였으며, 2호기는 1983년, 3호기는1985년, 4호기는 1986년에 가동하였다.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은 수입에 의존하던 에너지원(源)의 다원화로 안정된 장기(長期)에너지 확보의 길을 열었고, 원자력산업과 관련된 연관 산업의 육성을 위한 기술축적과 고급기술인력 양성 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수원 정문>
원전주변에는 어민들이 생계의 터전인 바다를 지키기 위한 현수막도 보인다. 원전은 소중한 에너지원(源)인 전력을 우리에게 제공하여 여러 가지 편리함을 주는 대신 발전할 때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해 사용하는 뜨거운 냉각수를 바다에 유출하여 바다생태계를 위협하는 것도 사실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 우리에게 큰 이익을 주는 만큼 그것과 비례하여 우리도 모르게 큰 손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원전 항의 현수막>
서생면 신리마을에는 벚꽃을 비롯한 꽃들이 봄 채비하기에 바쁘다. 신리포구와 나사해변(羅士海邊)의 방파제 안에 있어야 할 많은 배들은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에 봄이 되어 파릇파릇 쑥이 고개를 들 때, 도다리쑥국 한 그릇이면 죽어 있던 기가 쑤∼욱 솟아난다”고 하더니 도다리 건지러 만경창파(萬頃蒼波) 해치고 조업(操業)을 나갔는지 한가롭다. 춘백(春栢)과 목련이 봄바람과 속삭이는 나사해수욕장 육각모래도 분가루처럼 곱기만 하다.
<춘백>
<목련>
나사해변을 따라 간절곶까지 숙박업소와 펜션 등이 줄을 서듯 늘어선 것을 보니 찾아오는 손님이 꽤 있는 것 같다. 간절곶소망의 길은 벽마다 시구(詩句)를 적어 놓았고, 바위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많다. “바위 가운데는 작은 물결무늬가 거품처럼 여러 개 동글동글 모여 있다”하여 <거품바위 길>이 되었고, “진짜 효(孝)는 어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손바닥 자국이 있는 바위가 있어 <효바위 길>이 되는 등 스토리텔링을 하였다.
<나사해수욕장>
<거품바위 길>
<벽시(壁詩)>
“간절곶(艮絶串)에 해가 떠야 한반도에 아침에 온다. (艮絶旭肇早半島, 간절욱조조반도)”는 말처럼 한반도에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우리나라 해맞이 명소가 되었고, 해마다 찾아오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 이길봉대(爾吉烽臺)라는 봉수대가 있어서 이길(爾吉)로도 불렸던 간절곶을 일제는 우리나라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간절갑(艮絶岬)으로 명칭을 바꾸어 부르기도 했으나, 먼 바다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긴 간짓대처럼 보인다 해서 간절곶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유채꽃과 간절곶등대 앞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창랑(滄浪)과 끝없이 달려와 포말을 일으키는 창파(滄波)를 바라보며 무슨 소원이든 간절(懇切)하게 소망하면 이루어질 것 같은 곳이어서 아주 큰 소망우체통을 세웠나 보다. 신라의 명신(名臣) 박제상은 왕명으로 왕의 아우를 구하러 아내 몰래 왜(倭)로 건너간 것을 알고 두 딸과 함께 무사귀환을 간절하게 빌며 동쪽바다를 바라보는 모녀상이지만, 바다로 일 나간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간절하게 비는 것 같다.
<간절곶 공원>
<소망우체통>
<모녀상>
오전 중에 잠깐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씨도 오후에는 비가 그친다. “길을 걸으면 만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간절곶 소망 길을 따라 풍차가 있는 공원에서 몇 걸음 옮기면 한가한 요트계류장이 나오고, 모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찍었던 자리는 카페로 변한 것 같으며, 해변에는 왕관모형의 사각정자가 파도소리에 귀를 쫑긋한다. 가수 김상희가 불러 울산을 크게 알렸던 <울산 큰 애기(작사 탁소연, 작곡 나화랑)> 노래비는 아직도 짝을 찾고 있는 것만 같다.
<풍차>
<왕관 사각정>
<울산큰애기 노래비>
데크로 된 해안바위 길을 몇 고비 오르내리는데 송정방파제 안에 있는 유료낚시터가 휴일을 맞아 성업을 이룬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갯바위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는 태공들의 손놀림이 더 바쁘다. 임금님에게만 진상한다는 미역을 따는 <상납돌>, 왜가리들이 때를 지어 놀았다는 <왜갈돌>들에 빠져 길을 걷다가 아직 데크 길이 준공이 되지 않아 길이 아닌 길로도 접어들면서 <대바위공원>을 지나쳐 오늘 새벽에 늦게 도착하여 토막잠을 잔 <진하해변>에 다다른다.
<송정해안 유료낚시터>
<갯바위 낚시>
<공사 중인 데크길>
진하해변은 서생면에 있는 해변으로 백사장 96,000㎡(약3만평), 길이 1㎞, 너비 300m로 수심이 얕으며 바닷물이 맑아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백사장과 조화를 이뤄 사진작가 등 애호가들이 많이 찾아오고, 북쪽으로는 화야강의 하구로 담수욕도 즐길 수 있으며, 간만의 차가 커 썰물 때는 바다 앞에 있는 명선도에 걸어 들어 갈 수 있는 ‘모세의 기적’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대바위공원>
<진하해변 원경>
아침에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백사장에서는 굴삭기 여러 대가 모래를 바다에서 퍼내고 바다 위에는 바지선 두 척이 모래를 가득 싣고 작업을 한다. 궁금하여 주민에게 여쭤봤더니 여름에 찾아오는 피서객들을 위하여 바다 속의 모래를 퍼내어 백사장을 고르는 작업이라고 한다. 이런 작업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예산이 소요될지 모르나,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라면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일이다. 바다의 모래는 자연의 힘에 의하여 쌓여야 하는데, 혹시 해변의 건물들이 바닷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을 막아버려서 생기는 일이 아닌지…?
<백사장 작업하는 굴삭기>
<모래가 쌓여 있는 진하백사장과 모래실은 바지선>
다시 발길을 돌려 서생포에 있는 왜성(倭城)으로 올라간다. 서생면 진하리 성내마을 뒷산에 위치한 서생포왜성(울산시문화재 자료 제8호)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해인 1593년(선조26년) 5월부터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휘하여 돌로 쌓은 일본식 산성이다. 해발 133m의 산정(山頂)에 내성을 쌓고,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2단·3단의 부곽(副廓)을 두었다. 내성은 성벽이 무너져 흐트러져 있는데, 언제 심어졌는지 모르는 벚꽃만 망울망울 봉우리를 맺은 채 터질 날만을 기다린다.
<서생포왜성>
<서생포왜성 벚꽃봉우리>
의병장 사명대사는 1594년(선조27년)부터 4차례에 걸쳐 평화교섭을 하여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며, 1598년(선조31년) 명나라 장군 마귀(麻貴)의 도움으로 성을 찾았고, 그 후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53명의 충신들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파괴되어 없어진 창표당(蒼表堂)을 왜성 입구에 복원하고 있다. 그러나 성벽을 쌓기 위해 동원되어 모진 고생을 다하다 가신 영령들의 한이 깃들었는지 이곳 곳곳에 피기 시작한 진달래는 핏빛으로 더 붉게 보인다.
<복구 중인 창표당>
<서생포왜성 진달래>
오늘의 대미는 태화강 십리대숲길에서 장식한다. 태화강을 따라 대나무 숲이 십리(4㎞)에 걸쳐 있다고 해서 십리대숲이라고 부른다. 고려 중기의 기록과 1749년 울산읍지에도 기록이 나오지만, 일제 때 큰 홍수로 태화강변이 수몰되었을 때 한 일본인이 땅을 헐값에 사들여 대숲을 조성하였고, 그 후 주민들의 참여로 대나무 숲이 되었다. 한때는 이곳이 주택지로 개발될 위기였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철회되고, 친환경조성사업을 벌여 지금은 울산을 대표하는 강변 생태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십리대밭 숲>
<십리대밭 숲길>
<태화강>
사람만 통행이 가능한 태화강 십리대밭교는 울산시민의 뜻에 따라 고래와 백로를 형상화한 비대칭형 아치교로서 역동적인 울산의 미래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여 생태도시를 표현한 것이란다. 또 십리대밭교 부근에는 <처용팽나무>가 서있다. 이 나무는 원래 온산읍 처용리에서 300여 년 동안을 자생하던 팽나무로, 이 지역이 산업단지 조성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쳐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심어 또 하나의 태화강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십리대밭교>
<처용 팽나무>
아침의 하늘은 흐리다. 어제보다 일찍 서둘러 처용암으로 이동한다. 처용암은 울산 남구 황성동에 있으며 울산시기념물(제4호, 1997년 10월)로 지정되었다. 신라 헌강왕 때 개운포에 와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안개와 구름이 심해 앞을 볼 수 없자,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용(龍)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한다고 하자, 왕이 곧 명을 내려 근처인 청량면에 용을 위한 망해사를 세우도록 했다. 그러자 운무는 걷히고 해가 떠올라 지역 이름이 개운포가 되었고, 일곱 왕자를 거느린 용왕이 올라와 춤을 추었는데, 그 아들 중 하나인 처용이 경주로 가서 급간이란 벼슬과 아내를 얻어 나랏일을 도왔다. 처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이 바위가 처용암이다.
<처용암>
처용암에서 방어진항의 옆에 있는 슬도(瑟島)로 간다. 슬도는 바위구멍 사이로 넘나드는 파도소리가 거문고 소리처럼 구슬프게 들린다고 하여 거문고 슬(瑟)자를 써서 슬도라고 한다. 방어진은 태화강 하구의 동쪽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때는 왜(倭)의 군사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방어진항은 천연의 항구로 울산만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울산시민들의 휴식처로 각광 받고 있다.
<슬도와 방어진 등대>
소리체험관 해변 나팔에서는 파도소리에 맞춰 음악이 흘러나오고, 슬도에서 등대를 뒤로하고 해변으로 난 길을 따라 대왕암공원으로 빠져 들어간다. 해안에는 모래 대신 자갈이 차지하고 있고 파도는 바위에 부서지며 추억을 만들어 준다.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하여도 내 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 서러워라∼♬♩” 안다성이 부른 <바닷가에서(박춘석 작사 작곡)> 노랫말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해변의 소리체험관 나팔>
울산 대왕암은 문무왕 왕비의 수중릉이란 설이 구전되어 왔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 한다 하여 경주에 수중릉을 만들었고, 왕비도 세상을 떠난 뒤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이어받아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하늘을 날아 울산의 큰 바위 밑으로 잠겨 용신(龍神)이 되었다고 한다. 울산의 대왕암은 쪽빛 바다 위로 솟은 황색바위와 그 틈새로 자란 곰솔들이 자연의 질긴 생명을 웅변한다.
<대왕암 가는 해변과 대왕암 >
<대왕암>
기암절벽(奇巖絶壁)들을 오르내리며 혼이 반쯤 빠져 나간다. 바다 건너 조선소(造船所)의 타워크레인들은 하늘을 향해 받들어 총! 자세를 취하고 있고, 대왕암공원 북단의 야외무대에서는 즉석 음악회가 열린다. 대왕암공원에는 수령(樹齡) 100년 이상이 된 곰솔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일제가 1906년 이곳을 울산의 끝이라는 의미로 울기(蔚埼)공원으로 이름 지었으나, 일제청산 차원에서 2004년 대왕암공원으로 바꿨다고 한다.
<야외무대에서>
<현대중공업 조선소>
곰솔은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해송(海松)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잎이 곰 같이 억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한 수피(樹皮)가 검다고 하여 검은소나무, 먹솔, 흑송(黑松)이라는 여러 이름을 같이 가지고 있다. 초기의 성장속도는 일반소나무 보다 훨씬 빠르게 자라지만 나중에는 성장속도가 느려 일반소나무에 뒤진다고 한다.<정유순의 “태안해변길을 걸으며”에서 인용>
<대왕암공원 곰솔밭>
대왕암솔밭공원을 지나면 울산 동구 일산해변의 백사장이 펼쳐진다. 마치 시위 줄이 팽팽하게 매여진 활처럼 곡선을 이룬 해변은 벌써 여름을 부른다. 조반을 일찍 한 탓인지 벌써 오전이 훌쩍 지나간다. 미리 예약한 식당에 조금 이르게 갔더니 다른 예약손님 때문에 준비가 덜 되었다고 주인은 짜증부터 부린다. 약속시간을 칼 같이 맞춘다면 서로 불편이야 없겠지만 사정에 따라 다소 이르거나 늦을 수도 있을 수 있거늘 먼 길 걸어온 나그네에게 얼굴을 붉히며 너무 나무란다. 이곳 인심이 다 그런 것인가?
<울산 동구 일산해변 원경>
<일산해변의 식당>
일산해안 북쪽 끝 고개를 넘으면 현대중공업 조선소(造船所)가 나온다. 조선 경기의 세계적인 불황으로 다들 힘들어 하지만, 고 정주영(1915년11월∼2001년3월)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과 울산 미포만의 모래밭 사진 한 장, 5만분의 1 지도 한 장, 그리고 영국의 스코트 리스코우 조선소에서 빌린 26만 톤급 유조선 도면 한 장을 들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유조선 두 척을 첫 수주한 후 불과 10여 년 만에 한국을 세계 1위의 조선강국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현대조선소>
현대조선소를 지나 봉대산(190m) 아래로 지나가면 하기해수욕장이 나오고, 해안을 따라 걸어가면 주전항이 나온다. 주전돌미역은 산모(産母)에게 효과가 좋다고 소문난 미역이라고 한다. 깊은 바다 속에서 매일 반복되는 썰물과 밀물을 견디며 자라는 돌미역을 해녀들이 직접 물질을 하여 채취하는 미역으로 파도가 거세면 채취하는 량이 줄어들어 값이 오른다고 한다. “주전 돌미역 지정판매점”이란 표찰이 문패처럼 집집마다 걸려있다.
<주전 돌미역 지정판매점 간판>
해변마을 <몽돌여인 김순연 시인의 집> 담벼락에는 시들이 전설처럼 주저리주저리 열렸고 주전항의 빨간 등대는 절마당의 불탑마냥 바다를 지키며, 가지가 무성한 곰솔 한 그루도 거리의 수호신인양 마을을 지킨다. 주전항을 지나면 바로 동해에서는 보기 드문 검정 몽돌들이 약1.5㎞의 해변에 깔려 있다. 울산시는 남구의 주전몽돌해변과 북구의 강동해변까지 포함한 자갈밭을 울산 12경 중 하나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몽돌여인 김순연시인의 집>
<주전항의 탑모형 등대>
<곰솔>
<주전 몽돌해변>
주전몽돌해안을 벗어나면 울산 북구 구암마을이 나오고, 당사항 직전에는 뱀과 거북이가 이전투구(泥田鬪狗)하다가 뱀만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용바위가 있다. 당사항은 울산 북구에 있는 작은 어항이다. 주전몽돌해안에서 정자항까지는 길이 편안하여 발걸음도 가볍다. 주변의 갯바위 낚시꾼은 놀래미를 낚았다고 자랑한다. 정자항은 지나오면서 보아온 다른 어항들보다 배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고, 막 들어온 배에서는 물고기를 하역(荷役)하느라 바쁘다.
<용바위의 용>
<정자항>
곡선이 완만한 정자해수욕장은 물빛이 투명하지만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초록빛이 오늘은 덜한 것 같다. 하늘과 바다사이가 수평선이라면 동으로 한없이 뻗은 동해바다는 분명 하늘과 맞닿을 것 같다. 수평선 너머 눈길이 갈 수 있는 곳까지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그곳에 이번 여정의 끝이 있었다. 문화쉼터 몽돌과 함께……
<정자해수욕장>
<문화쉼터 몽돌>
첫댓글 아!,
봄꽃이 먼저 피는 쪽으로
봄 마중 가셨군요,
서해와는 또 다른 맛을 풍기더군요.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