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선생 유적을 찾아서,,,, 지난해 12월 전남 남도여행 중에서 해남을 지났습니다. 강진에서 영랑 김윤식 생가, 백련사, 다산초당을 둘러보고 늦은 시간에 카페에서 뵌 강진(‘다지원’ 오재학 사장님)의 회원님의 저녁을 초대받고 늦도록 농사 얘기를 나누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밤 기온이 차가운 저녁 해남에서 하루를 묶기로 하고 밤에 이동하여 국도 2호선 옛길을 달려 고개를 넘으니 불빛이 찬란하고 별천지 큰 도시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해남에 도착을 하니, 밤 기온은 차갑고 겨울의 매서운 바다 바람이 불어서 더 춥게 느껴졌습니다. 전날부터 기온이 내려가서 밤에도 그랬었습니다. 해남은 남도의 넓은 들과 따뜻한 기온으로 겨울에도 밭에서 배추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넓은 들에서는 자연의 먹거리가 넘치도록 생산되는 곳입니다. 해남읍의 크기는 타 지역 읍에 비하여 작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다음날 해남군청을 방문하여 여행일정과 안내를 받아서 군청에서 동남쪽으로 길을 따라 고산선생의 유물관과 공재 윤두서, 어초은의 해남 윤씨의 유적지 녹우당을 답사하였습니다. 답사후 시장끼가 들어 해남의 이름난 음식점을 찾아서 점심의 여유도 가졌습니다. 해남의 먹거리로 갈치찜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여기서는 해남윤씨의 선행과 윤선도, 윤두서의 대단함, 규한록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많은 사료와 위대함을 시골농부로서 부족한 촌놈이 어찌 다 올리겠습니까,,,부족하지만 양해의 말씀 올립니다. 윤선도에 못지 않은 분으로 윤두서를 말씀 드릴 수 있지요. 또한 규한록에 대한 얘기는 가슴 벅찬 감동, 찡하게 하였습니다. 고산 윤선도선생 유적을 찾아서,,, 조선조 문신이며 시조시인으로 자는 약이, 본은 해남, 호는 고산 또는 해웅이다. 고산선생은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광해 4년(1612)에 진사시에 합격이 되었습니다. 4년 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권신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벽지로 유배되었습니다. 광해 15년에 인조반정이 일자 석방되어 의금부도사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인조 6년(1628) 별시문과의 초시에 장원한 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고 한성서윤과 예림정랑을 역임하는 등 수차례에 나라에 중용되었습니다. 병자호란 후에는 주로 완도와 보길도와 해남의 수정동 및 금쇄동에 은거하여 자연에 들어 원림을 경영하고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불후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 및 국문학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습니다. 51세 2월에 보길도에 입도하였습니다. 고산선생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 박인로와 함께 조선 3대시가인으로 불리웁니다. 효종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많은 파란을 겪었습니다. 71세까지 활동하며 의금부도사, 공조좌랑, 예조정랑, 예조참의 동부승지를 지냈으며 남인의 거두로서 당쟁에 휘말려 인생을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습니다. 52세 6월에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 74세에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어 81세에 풀렸습니다. 현종 12년에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8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해남군 현산면 문소동 금쇄산성하에 묻히다. 숙종 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이라 하였습니다. 고산 유적지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고 작은 마을이 있으며 주위는 넓은 들이 있으며 남도 특유의 자연경관 모습이다. 뒤에는 덕음산 크게 펼쳐져 있으며 마치 절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남도의 특이한 전경이다. 녹우당은 천문과 풍수가 녹아든 길지라고 한다. 들의 크기를 보아 해남 윤씨의 터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초은 해남 윤씨의 첫 번째에 윤효정은 500년 해남 윤씨의 기틀을 마련하신 분으로 어려운 지경에 처한 백성들을 3번이나 구제해 주어 ‘삼개옥문적선지가’라는 칭호를 얻은 분이다.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여 옥에 갇히는 경우가 많아 옥안이 가득 찼다. 어초은 윤효정이 미곡을 내어 관부에 대신 받쳐 풀어 주었는데, 3번이나 그렇게 하였다 한다. 지금도 녹우당 해남 윤씨의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는 것이 ‘삼개옥문적선지가’이다. 이는 소학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으로 해남 윤씨의 가학의 밑바탕이다. 소학을 가학으로 정립시키고 후대에게 까지 전하도록 한 분이 고산 윤선도이다. 소학을 가학의 학문으로 가법으로 삼았다. 고산이 74세에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을 때, 아들 인미에게 보낸 편지속에 ‘적선과 근검’이 집안을 융성하게 하는 최고의 덕목임을 내세웠다. 이러한 소학정신은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는 그대로 잇고 있다. 후손들에게도 이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였다. 윤두서는 한양에서 내려와 해남에서 현산면 벽포 사람들의 자활의 길을 열어 주었다는 기록이 ‘해남 윤씨문헌 공재공행장‘에 있다. 해일이 일어나 고을에 곡식이 떠내려가고 텅빈 들판은 황토물로 벌겋게 물들고 인심이 매우 흉흉하고 조석간에 불안하였다. 관청에서 구제책을 쓰기는 하였으나 별다른 혜택이 없었다. 벽포의 장에 별로 사람이 없었다. 나무를 기른지 오래되어 나무가 무성하여 공재는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합동으로 나무를 벌채하고 소금을 구워 살길을 찾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한 마을 수백호의 주민이 도움을 받아 굶어죽지 않고 살아났다. 어초은 윤효정, 고산 윤선도의 소학속의 위민사상은 왕도정치에서 국가존재의 기본이 민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이 보민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실학자 성호 이익의 사상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유교적 덕목으로 나눔을 통해 인심을 얻고 존경받는 집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소학에서 주장하는 실천사상이기도 하다. 고산선생의 작품으로는 어부사시사 40수, 산중신곡 19수(오우가 6수), 고산유고 등 시조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으며, 공재 윤두서는 동국여지도(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51년 앞선 지도), 일본여지도(300여년 전에 48명의 첩자를 일본에 보내 일본의 지형과 거리는 물론 각 지방의 부호들의 집까지도 상세히 파악해 표시하고 있다), 방성도, 백마도 등 조선 후기의 3재(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의 한 사람이다. 문인화가이다. 규한록에 대하여,,, 규한록은 고산 8대손 종부인 광주이씨 부인이 남긴 한글로 쓴 것으로 고산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순조 34년 3월 초사일에 탈고한 순 한글로 쓴 규한록은 광주이씨 부인이 잠시 친정집에 가 있을 때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소회를 궁체상서로 쓴 것으로 두루마리처럼 말려져 있는 것을 펼치면 약 13m에 이른다. 규방문학으로 조선후기 한글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배경은 나라도 흥망성쇠가 있듯이 가문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해남 윤씨 가문도 19세기에 이르러 기운이 급격하게 기울게 된다. 윤덕희 아들 윤종 때부터 종통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종가의 장손이 없으면 대를 잇기가 힘들어졌다. 윤광호는 신행길에 처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죽고 만다. 절손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후손이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절손되어 가는 지경에 이른 때에 가산은 쇠락하게 되고 윤광호는 전남 보성(대곡)에 살고 있는 광주이씨와 혼인을 약속하나 남편이 일찍 죽자 남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댁에 와서 평생을 홀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광주이씨는 광원군 이극돈의 후손으로 전남 보성군 대곡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광주이씨 부인은 신행도 하기 전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교적 사회윤리가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효부이지만 시어머니와 숙부의 만류로 죽음을 선택할 수 가 없었다. 광주이씨 부인은 남편의 얼굴, 사랑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시가에 들어가 종가의 살림을 맡아 43년간의 파란 많은 일생을 살게 된다. 조선사회의 여성들이 유교 윤리 속에서 얼마나 억압받고 살았는가를 알 수있을 것이다. 17세에 결혼하여 홀로된 광주이씨는 자신의 한많은 인생을 규한록을 통해 수필형식으로 쓴 것이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종부의 생활이 힘들고 어려웠을 것이다. 시어머니, 인척들 사이에 여자의 몸으로 이겨내야 하는 생활의 고단함은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자식이 없어서 대를 잇기 위해 충남 서천에서 친히 공재 윤두서의 3째 아들인 덕훈의 l5대손을 양자로 데려온다. 가까운 일가들의 압력 속에 똑똑한 종손을 데려오려고 외아들을 데려오게 된다. 그것도 외아들을 데려오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겠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광주이씨 부인은 명문사대부가의 규범과 예의범절을 갖췄을 뿐 아니라 대쪽 같은 성격에 남자 못지않은 대담성과 용단, 비상한 기억력과 슬기가 있는 여인이었다. 근친들의 간섭과 시숙부들의 섭종도 정당치 않으면 용납지 않았으며 강인함으로 종가의 침체해 가던 해남윤씨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하였다. 양자 윤주홍은 후에 선공감의 감역이 되었으며 3남 4녀를 두어 해남윤씨가 다시 일어서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광주이씨 부인은 가문중흥의 영부로 존경 받고 있다. 또한 일제 한일합방 격동의 시기에도 고산 12대손인 윤정현과 부인인 광주이씨의 한 통의 한글 유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아들에게 한글형식으로 남긴 유서에는 한 여인의 고단한 삶의 여정이 묻어 있다 한다. 유서에는 재산의 분재기 내용도 있다하니 한 여인의 삶과 재주로서의 역할도 볼 수 있다 한다. 여기서 광주이씨와 해남윤씨와의 관계는 같은 남인계로 양반가의 혼인을 통하여 당파적 관계를 이어온 느낌도 있어 뵌다. 아무튼 해남윤씨가의 종부의 덕인지 6.25 동난 속에서도 가문의 가업을 이어오는 것을 보면 어처은 윤효정의 적선과 고산 윤선도가 남긴 가훈(적선과 근검)은 후세에 까지 이어지리라 본다....
고산 윤선도 내 버디 몃치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달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구룸빗치 조타 하나 검기랄 자로 한다 바람 소래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난 믈뿐인가 하노라 고즌 므스 일로 퓌며셔 쉬이 디고 플은 어이 하야 프르난 닷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산 바회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곳 피고 치우면 닙 디거 솔아 너난 얻디 눈서리랄 모라난다 구천(九泉)의 불희 고단 줄을 글로 하야 아노라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뎌러코 사시(四時)예 프르니 그를 됴하 하노라 쟈근 거시 노피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듕의 광명(光明)이 너만하니 또 잇나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벋인가 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