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기
[2001. 8. 7. - 8. 17.]
1. 시베리아를 그리며
여행은 나를 버리고 떠나는 것, 나를 얽어매고 있던 일상사를 훌훌 털고 나선 길에서 그 동안 죄어왔던 숨통이 트인다. 나를 버리면서 떠나지만 결국 나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 돌아옴을 전제로 한 단순한 구경꾼(tourist)이 아니라 어떤 곳에도 뿌리박지 않고 다만 이동이 있을 뿐인 나그네(traveler)가 되는 것은 여행을 업으로 하는 여행가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꿈조차 꾸지 못할 일이라손 치더라도 단순한 구경꾼조차 되지 못하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일상의 반복과 관습에 젖어 하루하루의 시간 돌리기를 해야만 하는 것은 유한한 삶에서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어쨌든 여행에서 얻는 삶의 향기와 충만함을 어디다 비길 수 있으랴! 텅 빈 충만함! - 이것이 바로 여행이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묘미이고 즐거움이다.
올 여름에는 히말라야 트레킹으로 떠남의 구상을 거의 맞추어 놓았다가 인터넷 서핑 중에 우연히 시베리아 횡단여행에 관한 기사를 보고 바로 시베리아 횡단을 결심하였다. 전에 아프리카 여행을 함께 하였던 C형에게 이를 알리고 함께 동행하기로 하였다. 한겨레투어에서 국내 처음으로 시베리아횡단 상품을 내놓은 모양이다. 패키지여행이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광활한 대지를 달리며 대자연을 호흡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이다.
원래 간음, 전쟁과 마찬가지로 여행은 행위자 본인에게는 흥분되는 일이지만 제3자에게는 별 흥미가 없는 것이어서 남들이 쓴 여행기라는 것이 별로 재미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이트를 뒤져보았다. 인터넷사이트의 관련기사와 이문열이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철의 실크로드」시베리아 횡단기를 찾아 읽었고(조선일보 2001. 3. 15. ∼ 5. 22.), 박종수가 쓴「러시아와 한국 - 잃어버린 백년의 기억을 찾아서」(백의 : 2001)와 강형주가 쓴「문화로 본 러시아」(두리 : 1997) 등 러시아 관련 서적 몇 권을 구입하여 읽어 두었다. 버리기 위해서 채워야하지 않겠는가. 버림은 채운 다음에 이루어지는 행위일 저, 채운 것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버리는가?
시베리아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동토의 땅이고 유형의 땅이라는 것, 북극곰으로 상징되는 응큼한 모습 그리고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폭설 속을 헤치며 달려가는 열차의 모습,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연상되는 스산한 분위기 등이고, 근래의 러시아는 70년의 공산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과거의 영화와 시장경제가 혼재되어 새로운 걸음을 하고 있으리라는 정도의 느낌만을 가지고 시베리아와 러시아를 바라보기로 하였다.
시베리아란 러시아어 ‘시비르’의 영어표현으로 ‘잠자는 땅’을 의미하는 타타르어가 기원이라고 한다. 시베리아는 동서 7,000㎞, 남북 3,500㎞, 총면적 1,276만 5,900㎢로 우랄산맥에서 태평양 연안 극동지역에 이르는 북아시아 지역을 포함하고 아시아대륙의 1/4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김정일의 시베리아횡단으로 우리에게 시베리아란 이름이 낯설지 않게 인식되고 있다.
러시아는 면적(1,700여만㎢)이 남한(9만9,400㎢)의 173배에 이르고, 크다고 하는 미국과 중국의 영토를 합한 면적에 육박한다.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11개의 시간대를 갖고 있으며, 인구는 1억 5,000만명에 다양한 민족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구 소련이 해체된 지 10년이 된 지금 러시아의 전통인형인 마뜨료슈까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인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현장에서 느껴보는 것은 별다른 여행의 묘미를 줄 것임에 틀림없다.
2. 블라디보스톡과 옛 소련의 영화
2001. 8. 7.(화) 떠나는 설레임을 안고 호텔 롯데월드에서 아침 5시 40분에 출발하는 인천공항행 첫 리무진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1시간여 만에 공항에 도착하였다. 인천공항이 개항된 후 처음 이용하는 터라 우리나라만의 개성 있고 독특한 공항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치식 철구조물을 이용한 다른 나라의 공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아니하여 웅장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다소 실망하였다.
매주 2회 대한항공이 블라디보스톡을 운항하고 있다. 예정시간인 09:55 보다 30여분 지연 출발하는 대한항공 KE981편에 탑승하였다. 국제선을 운행하는 기종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MD-82로 기내가 비좁아 불편하였으나, 이 나라를 떠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울릉도 상공을 지나고 1시간 30분여를 비행하던 비행기가 블라디보스톡 현지 기상악화로 공항이 폐쇄되어 그곳에 착륙하지 못하고 인천으로 회항한다는 안내방송에 그만 망연자실하였다.
도대체 2시간여 거리의 기상상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비행기가 이륙하고 회항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탑승 중인 러시아인들은 아무 동요가 없었으나 우리 여행객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웅성거렸고, 혹시 비행기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하였다. 비행기에 탔다가 목적지에 내리지 못하고 회항하는 것은 말로만 들었지 이번이 첫 경험이다. 항공사로서도 승객들의 숙박을 책임져야 하니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탑승객들이 인천공항에 회항한 비행기에서 내리자 면세점에서 구입한 물품을 모두 원상복구시키라고 한다. 기껏해야 술이나 담배 같은 물건들인데 구입한 면세점을 찾아가 반환하고 환불받았다가 다시 구입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항공사에서 이들을 맡아 두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비행기에 다시 실어주면 될 것이 아니냐는 승객들의 항의로 이를 항공사에서 보관해주기로 하였다.
출국을 VOID하고 세관을 나가는 승객들에게 혹시 면세품을 숨겨 가지고 나가는지 세관원이 심하게 짐을 수색하는 것을 보고 이 나라의 관료주의가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항공사는 승객들에게 목동 근처의 단체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전부 여의도호텔에 투숙시킨 후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다시 출발하기로 하였다. 어쨌든 여행일정이 하루 줄어들게 되었으나 다음날이라도 출발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2001. 8. 8.(수) 아침 호텔에서 일찍 일어나 인천공항으로 출발하였다. 호텔 종업원이 아침부터 방을 돌아다니며 칫솔 하나 쓴 것까지 요금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어떻게 칫솔 값까지 챙기는 호텔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아침 7시 55분 비행기는 블라디보스톡을 향하여 이륙하였다. 기내에서 무료함을 달래며 『러시아혁명-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시공디스커버리 총서(1998)를 꺼내 읽었다. 이 책은 제정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914년부터 300년 로마노프의 왕조를 붕괴시킨 1917년 2월혁명을 거쳐 그 8개월 후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혁명의 동인 측면에서 미시적으로 그리고 있다.
비행기는 이륙 후 불과 2시간여 만에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착륙하였고, 시차는 한국보다 2시간 빠르다. 블라디보스톡이 이렇게 가까운 곳인지는 미처 몰랐다. 공항은 초원 한 가운데 있으나 음산한 모습이고, 비행기들의 모습이 날개가 동체 밑에 있는 서구의 비행기와는 달리 날개가 동체상단에 달려있는 구소련에서 제작한 비행기들이 눈에 띤다. 입국심사의 과정이 비행기를 타고 온 시간과 맞먹을 정도로 지루하게 기다려야 하는 점에서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 어떤 유학생은 4년 전 러시아에 입국하면서 7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관리들이 심사대에 앉아서 무엇을 하는지 천하태평이고 일을 빨리 하나 늦게 하나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모습이다. 푸틴 대통령처럼 생긴 입국심사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그냥 뭉개고 있으니 자기가 답답했던지 통과시켜준다. 단순히 입국심사와 세관검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주증명까지 다시 받아야 하는 점에서 러시아는 아직도 주민들의 거주이전에 대한 통제가 심한 모양이다.
고려인인 마리아의 안내로 일본 중고버스에 탑승하여 공항에서 40㎞ 정도 떨어진 블라디보스톡 시내로 들어간다. 버스의 승강구에 '自動扉'라고 쓰여져 있고, 운전석옆에 '出發前 もぅ一 度車と心の再点檢'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채로 그대로 운행하고 있다. 한국의 중고차들도 한국말 상호가 붙어있는 그대로 운행하고 있고, 근래 들어 한국의 중고차가 많이 수입되고 있다고 한다. 버스의 운전대가 우측에 있는데 우측통행을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여기서 자동차는 우측통행을 하면 되고, 운전석이 어느 곳에 있든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에서 들여온 자동차는 운전석이 전부 우측에 있고, 한국에서 들어온 자동차는 운전석이 좌측에 있는 그대로 운행하고 있다.
어저께 비가 엄청나게 많이 내려 도로가 많이 침수되었고, 직원들이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톡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자작나무숲이 이어지고 중간 중간에 ‘다차’라고 불리는 주말농장과 요양소 같은 것도 보인다. 건물들은 주황색계열의 우중충한 모습이고 곳곳에 LG의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다.
블라디보스톡은 ‘동쪽을 지배한다(征東)’는 말이고 러시아의 동진정책과 맞물려 부동항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개발되었다. 연해주의 인구는 230만명 정도이고, 블라디보스톡의 인구는 70만명 정도이다.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의 인구가 20만에 이를 정도로 이 땅에도 우리 한민족이 터를 잡고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이 기회의 땅으로 탈바꿈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을 대비하여 우리의 기업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가 연결되어 철의 실크로드가 완성되는 경우 물류비용의 절감뿐만 아니라 교역이 확대되어 우리들의 지평을 넓게 열어줄 것이 틀림없다.
오후 3시 반쯤에 현대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고 시내관광에 나섰다. 현대호텔은 한국의 현대백화점에서 직영하는 호텔로 현대그룹 계동사옥을 그대로 재현하였고,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한다. 현대의 시베리아진출의 전초기지로 현대호텔을 세웠다고 하는데 어쩐지 현대의 영화가 사라지고 있는 모습이어서 아쉽다고나 할까. 호텔 환전소에서 100불을 러시아화인 루블로 환전하였다(1USD = 28.87루블).
블라디보스톡의 하늘은 청정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한여름을 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는 곳이 서울에서 불과 2시간 떨어진 곳에 있다니 서울에서 강릉까지 10여 시간씩 걸리며 탈진하느니 다음의 여름휴가는 블라디보스톡을 이용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되었다. 거리의 건물들은 제정러시아 시대의 건물모습 그대로였고, 거리에는 고물전차가 덜커덕거리며 다니고 있다.
시내관광은 러시아 극동대학교 한국학과에서 한국경제를 공부하고 있는 이고리 군이 맡아 주었다. 러시아인으로서는 큰 키에 상당히 미남이고, 더듬거리기는 해도 한국말을 곧잘 한다. 블라디보스톡역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시발역(정확히는 종착역)이고,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총길이는 9,288㎞로 6박 7일의 여정이 필요하다.
역 앞 광장에는 레닌 동상이 건재해 있다. 러시아 곳곳을 다녀보면 같은 모양의 레닌 동상이 그대로 서 있고, 거리의 이름 중에는 레닌 거리가 반드시 있다(고리끼의 거리와 칼막스의 거리도 있다). 공산주의실험이 끝나고 구소련이 해체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러시아 곳곳에 여전히 레닌은 살아 있다.
왕년의 태평양함대사령부는 이제 고색창연한 건물로만 남아 있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함정들도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11대의 독일 잠수함을 침몰시킨 C-56잠수함은 이제 박물관으로 관람객들의 돈을 끌어들이고 있다. 잠수함 내는 생각보다 넓었고 당시의 전투상황을 보여주는 각종 장비들과 승무원들의 모습 등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다. 잠수함의 출구 부근에는 소련 해군 수병의 옷과 모자를 빌려주고 사진 1장을 찍게 하고 1달러씩을 받고 있다. 잠수함 뒷편의 벽면에는 위 잠수함 승무원들의 이름들이 장군과 사병의 순으로 동판에 박혀 있다. 그 강대했던 옛 소련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자본주의의 돈 냄새만이 몰려오고 있다.
아무르 만은 우리나라의 진해항과 같은 항구로 태평양함대의 함정들이 정박하던 곳인데 이제 옛 항구의 모습은 사라지고 왠지 을씨년스러운 모습이고, 아무르 만에 연한 언덕의 요새에는 각종 포와 탱크 등 왕년에 세계를 제패했던 소련 시대의 군 병기와 장비들이 전시되고 있다. 구소련의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던 병기들은 이제 관람객의 눈요기일 따름이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모습이다. 다만 늘씬늘씬한 미녀들의 모습만이 이방인의 시야를 혼란시킬 뿐이다. 아무르 만 부근에 있는 해양수족관은 다른 곳에서 많이 봐서 그런지 별로 감흥이 없다.
혁명광장에서는 늘씬한 미녀들이 지나는 것만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가는 줄 모른다. 여자만 쳐다본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으려면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 좋겠다. 러시아의 3대 명물이라고 하는 흑빵. 보드카, 여자 중에 단연 여자가 으뜸이다. 블라디보스톡 미녀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조화유의 『이것이 미국 영어다』에 등장하는 “Get a load of that girl. She is an eyeful(저 아가씨 좀 봐. 정말 미인인데.)” 정도가 아니라 “She is leggy, bosomy, curvacious, everything. She is gorgeous. Period!(미끈한 다리, 빵빵한 가슴, 멋있는 곡선미하며 다 갖췄군. 멋있는 아가씨야. 끝내주는데!)” 바로 그것이다. 이곳은 나이 어린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다. 어떤 젊은이가 구소련의 군복과 군모를 사라고 조르지만 그렇게 집요하지는 않다.
이곳의 시원한 날씨에 이불을 푹 덮고 잠을 청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피서라 생각하면서 러시아에서의 첫 밤을 보낸다. 비행기의 회항으로 1박을 손해보는 바람에 연해주지역에 있는 발해 유적지와 한인촌 등을 둘러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3. 이르쿠츠크와 바이칼호수
2001. 8. 9.(목) 아침, 현대호텔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 공항으로 간다. 비행기로 이르쿠츠크로 가기 위해서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4,000여㎞는 비행기로 skip하면서 하바로프스크 등 시베리아 동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어쨌든 시베리아의 동쪽 끝을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으리라.
공항까지의 안내는 극동대학교 한국학과에 재학중인 옥산나가 맡아주었다. 옥산나는 작년에 한국 경희대학교에서 4개월간 연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역시 러시아 여성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남자들이 옥산나에게 러시아의 이것저것을 물어보는데 여자들은 괜히 심통이 나는 모양이다. 옥산나에게 고르비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더니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레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자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한다.
오전 11:15 블라디보스톡을 이륙한 시베리아항공(S7 3274)의 고물 비행기는 이르쿠츠크 현지시간 오후 1시 30분경에 이르쿠츠크 공항에 도착하였다. 얼마 전에 국내에서 이루크츠크 부근에서 러시아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어 이 비행기도 그런 비행기가 아닌지 적이 염려스러웠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비행시간은 4시간여이고, 시차는 한국시간과 같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시베리아는 그냥 대평원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고 이르쿠츠크로 다가옴에 따라 바이칼호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기내에서 김학준이 쓴 『러시아史2』(대한교과서주식회사 : 2000) 중 제정러시아 시대까지의 역사를 읽었다.
이르쿠츠크에서의 가이드는 이르쿠츠크 경제대학 강사인 한민숙 박사가 맡는다. 세계 곳곳에 한국인이 없는 곳이 없으니 한국도 대단한 나라이다.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하는 이루크츠크는 도시가 건설된 지 300년이 되었고, 인구가 70만명에 남북 1,500㎞, 동서 1,300㎞로 한반도의 3배에 이르며, 규석, 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이르쿠츠크 주 자체의 부는 쿠웨이트에 버금간다고 한다. 고려인 700여명이 거주하고 있고, 고려인으로 성공한 이르쿠츠크 주 3선 의원인 정홍식이라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수리공사가 한창인 선느쇼뇩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이칼호수로 떠난다. 바이칼호수로 가는 길은 잘 닦여진 편도 1차선 도로이고, 이 도로는 1950년경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바이칼호수를 보고 싶다고 하여 소련 당국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건설한 것인데 한국전쟁으로 아이젠하워는 바이칼호수를 방문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바이칼호수로 가는 길은 전나무, 잣나무, 자작나무숲으로 이어지는데 자작나무는 그 껍질로 신발이나 생활공예품을 만드는 것 이외에는 땔감으로나 쓸모가 있을 뿐 목재로서의 활용가치는 없다고 한다. 자작나무가 비를 먹으면 쉽게 휘어진다. 길가에 널려있는 것이 고사리인데 이곳 사람들은 고사리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어린 고사리 싹을 데쳐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 줄도 모르고… 제주도 같았으면 고사리 꺾기 대회라도 함직도 한데 역시 문화권이 다름이다.
바이칼호수는 남북으로 636㎞로 폭이 긴 곳은 71㎞, 좁은 곳은 28㎞이고, 둘레가 2,000㎞, 최고 수심이 1,637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담수호이다. 세계지도를 보고 다같이 육지 안에 있는 호수인데 어떤 곳은 카스피아 해(Caspian Sea), 아랄 해(Aral Sea), 흑해(Black Sea)라고 부르고, 바이칼은 Lake Baycal로 부르는지 의아해하다가 바로 담수호는 Lake라 부르고, 염분이 있는 곳은 육지 안에 있는 호수도 Sea라고 부른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이곳은 수심이 200m 이하인 곳에서는 연중 4℃ 로 물개 10만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물개들은 가을부터 얼음에 숨구멍을 뚫어 겨울을 이긴다. 4월에는 물개사냥을 허가한다고 하는데 바이칼에서 언제 한번 물개사냥을 해봤으면 좋겠다. 호수 안에는 26개의 섬이 있고 - 호수 중간에 있는 아리온 섬에 칭기즈 칸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있어 발굴조사를 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 2,6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 중 80여 종은 바이칼에서만 서식한다.
336개의 강이 바이칼호수로 몰려들어 거대한 호수를 이루고 이곳 바이칼 호수에서 뱅뱅 돌다 400년 만에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앙가라 강 하나 뿐, 이곳에서 다시 1,770㎞를 흘러 강물은 북극으로 빠져나간다. 앙가라가 시작되는 부분은 물이 급속히 방향을 틀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바이라는 말은 '풍요로움'을 칼은 '바다'를 의미한다는데 11월 말경에 얼기 시작하여 다음해 5월경에 해빙이 되고, 호수가 결빙되면 교통 표지판이 설치되고 그 곳으로 12톤 이하의 차량이 무시로 통행할 수 있다.
바이칼호수는 그냥 호수가 아니라 수평선이 아득하게 펼쳐진 거대한 바다이다. 선착장입구에는 바이칼의 명물인 ‘오물’을 연기에 구어 팔고 있고 오물을 굽는 연기 냄새가 물씬 풍긴다. 유람선에서 오물을 먹어봤으나 비린내 비슷한 것이 나고 별로 나의 구미에는 맞지 않아 소주가 없으면 먹지 못하겠다.
유람선으로 1시간여 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따라 가면서 울릉도 해안을 유람선으로 돌 때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물은 깨끗하고 양동이에 호수의 물을 그대로 떠서 마셔본다. 호수에서는 추울지도 모른다는 말에 잠바를 준비하고 왔으나 잠바를 입어야 할 만큼 춥지는 않다. 바이칼을 제대로 느끼려면 적어도 1주일 이상 한 달 가까이 바이칼을 종주하면서 머무르고 싶은 곳에 머무르면서 자연 속에 동화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이 평생에 꿈으로만 남지 않기를…
유람선에서 내려 바이칼 박물관으로 가서 바이칼에 관한 모든 것을 한 박사의 통역으로 듣고 보았다. 바이칼 호수는 동식물뿐만 아니라 지질학적, 생태학적 연구까지 상당히 체계적인 연구가 쌓여 있다. 1905년까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차가 바이칼 항까지 와서 쇄빙선에 실려 바이칼을 건너 이동했다고 하는데 러일전쟁 후 쇄빙선이 가지 못하여 얼음위로 레일을 깔아서 기차가 지나갔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레일이 깔려져 있는 당시의 쇄빙선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갈라미양까’라는 지방질뿐인 조그만 고기가 기압 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심 1,000m를 수직상승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뼈까지 보이는 그 고기는 물개의 밥이다.
역시 인간이 많이 모이면 오염과 훼손을 피할 수 없는 법, 이곳 바이칼도 많은 사람이 찾게 되면서 오염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인근에 있는 셀룰로이지 공장의 폐수 때문에 생기는 호수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공장을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이칼호수에서 이르쿠츠크 시내로 들어오면서 니콜라이 성당에 들어가 보았다. 처음으로 러시아정교회의 모습을 본다. 러시아정교는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에 의하여 동방 기독교인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러시아의 국교로 수립되어 세속권력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종교를 압제하던 소비에트 시절에도 러시아인들의 마음에는 러시아정교의 의식이 남아있었고,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정교는 복원되었다.
러시아정교는 공동생활과 집단적 가치를 중시하고 공동소유와 노동의 정신적 동기를 우선시하는 점에서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와 구별된다고 한다. 러시아정교회의 내부에는 의자가 없어 서서 예배를 보아야 하고,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3개월 상용비자가 있으면 호수주변에 있는 집을 1만 달러 내지 1만 5,000달러 정도로 개인이 구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결혼할 때 반드시 세 곳을 들른다고 한다.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전사자 추모의 탑에 들리고, 샤먼언덕에 들러 그곳 나무에 헝겊을 묶고, 바이칼호수에 들러 그들의 결혼을 마음에 새긴다고 한다. 특히 불의 사람이라고 하는 브랴트 민족은 동양과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어서 샤마니즘 전통이 있다고 한다. 마침 샤만 언덕에 올라갔을 때 신혼부부 한 쌍이 와서 나뭇가지에 헝겊을 묶고 있었으나, 그곳에 주렁주렁 달린 헝겊조각들이 이곳 신혼부부의 결속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님은 이곳 사람들의 높은 이혼율에서도 나타난다.
이곳은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라서 결혼식을 하려면 국가기관인 식장에 결혼신청을 하여야 하는데 하루에 100쌍이 혼인을 신청하고, 75쌍이 이혼신청서를 제출한다고 한다. 이혼원인은 남자는 알콜 중독이 많고 여자는 바람을 피우는 부정행위가 많다고 한다. 이혼 기준으로서의 알콜 중독이라 함은 혼자 술을 마시되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자는 많지 않을까?
하긴 우리나라의 이혼율도 선진국의 50%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미 30%를 넘어섰고 이혼이 일상화하고 있다. 러시아 여자들은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어 이혼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이혼하는 경우 아이의 양육비가 남편의 지갑에서 자동으로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이곳의 이혼법은 우리와는 달리 파탄주의를 따르고 있는지 이혼이 너무 쉽게 행해지는 것 같다.
대저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 우리나라 남성들이 러시아 여성들과 결혼했다가 며칠 뒤 이혼하고 위자료를 챙겨 도망해버리는 러시아 여성들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보도를 보면 미모만 보고 쉽게 러시아 여자를 믿을 것은 못된다. 특히 이곳 남자들의 알콜 중독은 심한 것 같다. 길거리를 가다가 보면 유독 술병을 들고 다니거나 대낮인데도 술 취한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보드카에 만취한 사람이 쓰러져 잠들었다가 동상에 걸려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교회근처에서 구걸하고 있는 모습은 러시아의 장래를 우울하게 한다.
저녁식사는 앙가라 강변의 통나무집에서 마련되었다. 맑은 강과 푸른 숲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러시아 전통의상을 입은 다섯 명의 남녀가 러시아 민요를 부르면서 우리를 맞는다. 민속쇼라는 것을 무대 위에서 벌이는 대단한 것으로 상상했으나 너무나 조촐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식사하는 곳 옆 통나무집에서 놀고 있던 몇몇의 사내(러시아인인지 다른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다)들이 발가벗은 채 그대로 강물로 뛰어 든다. 자연과 동화되기를 원해서인지, 아니면 햇빛을 받지 못한 몸에게 햇볕을 쪼이기 위함인지는 모르나 이쪽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옷을 잘 벗어 던지는 것만은 틀림없다. 갑작스런 신기한 모습에 같이 갔던 여자분들이 돌연 활기를 띠면서 ‘생쇼’를 즐긴다. 하긴 한국 여자들이 어떻게 '백마'들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나 있겠는가.
4. 데카브리스트 - 그 처연한 삶
2001. 8. 10.(금). 아침, 선호텔을 출발하여 이르쿠츠크를 떠나기 전에 몇 군데 시내관광에 나섰다. 투숙했던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군 야전병원의 침대를 연상케 하는 침대며 우리나라 여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곳이다. 러시아정교회인 스파스카야 교회와 러시아에서는 보기 힘든 카톨릭교회인 폴스키 교회를 둘러보고 즈나멘스키수도원으로 갔다. 이 수도원 경내에는 데카브리스트의 묘가 있다.
옛날에 세계사를 공부할 때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는 말을 들어왔으나 그 반란이 어떠한 반란인지도 모르고 그저 귀족장교들이 차르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난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가 그들의 발자취를 보고 그들의 처연한 삶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러시아는 1812년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1812년을 1917년과 같이 러시아역사에서 중요한 해로 기억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은 그 전쟁에 참가했던 러시아의 귀족 및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 자유주의사상을 이식하게 되고, 아직도 절대군주 하에 고통 받는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그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입헌군주제와 농노의 해방 등 사회의 변혁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민중이나 농민과는 동떨어진 선민 내지 선각자 의식 같은 것을 갖고 있었고, 알렉산더 1세의 사망에 뒤이은 니콜라이 1세의 즉위에 맞추어 1825. 12. 14. 소위 '위로부터의 혁명'인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만다. 데카브리스트는 영어로 Desembrist라고 하듯이 ‘12월 당원’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12월에 난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이들의 난은 일반 민중과의 연계를 무시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들의 난은 차르의 전제정치에 대하여 러시아의 역사상 최초로 중대한 일격을 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마 이들은 우리나라 근세에서 근대혁명을 꿈꾸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박영효와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그들의 뜻은 가상했으나 혁명의 주, 객관적 요건과 내외의 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때 암담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그들이 몰랐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실패한 데카브리스트들은 처형되거나 혹한의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비운을 맞는다. 유배지로 가는 데카브리스트들은 1년간을 걸어서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내몰리게 된다. 요새같이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있는 때도 아니고 교통편이나 모든 여건이 열악했을 당시에 유형지로 걸어가는 그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의 조선조 선비들같이 유배가면서도 황제를 향한 충성심을 간직하지는 아니했으리라.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함께 유형지로 가는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이다. 귀족 청년들의 부인들은 황실로부터 국가에 반역한 남편을 버리고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재가를 하든지, 아니면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든지 선택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부인들은 남편을 따라 죽음과도 같은 유형의 길을 나선다. 러시아판 순애보라고나 할까, 님 향한 일편단심이 모든 안락함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나서서 불모의 땅 이르쿠츠크에서 새로운 귀족문화 내지 유럽문화를 꽃피운다.
이 부인들은 요새의 러시아 여자와는 아주 딴판의 일부종사하는 우리 조선조 여인들과 같은 모습이다. 그때의 유배객 발콘스키의 집이 현재 데카브리스트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고,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갖가지의 일상모습들도 전시되어 있다. 안내인 할머니가 열심히 발콘스키와 데카브리스트들에 관하여 설명을 한다.
발콘스키의 부인 마리아의 그림을 보니 분노할 만도 한데 분노하는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포기한 모습도 아니며 어딘지 모르게 달관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귀족생활에 길들여진 그녀가 뜨개질 등 서민생활의 모든 것을 새로이 배우면서 생을 초탈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어디 쉬웠을까. 마리아는 일기에서 “나와 남편의 진정한 삶은 시베리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실로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요새 세상에 흔하게 읊조리는 우리 젊은이들의 감각적인 사랑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모스크바에서 사면되어 돌아온 발콘스키를 만난 톨스토이가 발콘스키와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를 모아 소설로 엮었고 이 소설이 바로 『전쟁과 평화』라고 한다. 최근 국내에도 톨스토이의 최초의 판본인 『전쟁과 평화(1, 2, 3)』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이룸 : 2001).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읽을 요량으로 『전쟁과 평화』를 구입하였으나 책 세 권의 부피가 두꺼워 그냥 집에 두고 왔으나, 이곳에서 느낀 감흥을 가지고 『전쟁과 평화』를 읽어보리라.
즈나멘스키 수도원의 뒤뜰에는 1776년 알레스카를 발견한 셀리 호프의 부조상이 있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동방으로 진출하던 알렉산더 2세가 1867년 알레스카를 720만 달러에 미국에 팔아넘긴다(한 박사는 예카테리나 2세가 팔아넘긴 것으로 설명했으나, 김학준의 『러시아史』에는 알렉산더 2세가 팔아넘긴 것으로 되어 있다). 국제법적으로 영토를 팔고 사는 것의 법적 성격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당시의 화폐가치를 어림잡을 수 없지만 이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러시아인의 어리석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기념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던 알렉산더 3세의 동상이 세워졌던 앙가라 강변에는 오벨리스크 같은 탑이 세워져 있다. 시베리아 철도는 알렉산더 3세에 의하여 1891년부터 철도건설이 추진되어 1898년 첫 열차가 바이칼이 있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으며, 1901년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어 이제 시베리아 철도건설 100주년이 되었다. 시베리아철도는 러시아가 극동지역에 대해 적극 개입하는 결과에 이르고 러일전쟁 등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5. 바이칼호 탑승 - 시베리아횡단의 지리한 여정
이르쿠츠크시내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이르쿠츠크역으로 갔다. 우리나라와 이르쿠츠크사이에 직항로 개설을 앞두고 있다는데 직항로가 개설되면 이르쿠츠크와 바이칼지역의 관광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역 앞에서 술 취한 남자들과 미끈미끈한 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본다. 세계최고의 과학기술과 왕년에 세계를 제패했던 나라의 젊은이들 모습치고는 눈에 총기도 없어 보이고 빠릿빠릿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공산주의시절 모든 것을 국가가 마련해주는 것을 받기만 하다가 시장경제의 냉혹함에 삶의 방향을 잃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르쿠츠크 시간 13:55 - 모스크바 시간 08:55. 이르쿠츠크를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인 고양이가 담비를 물고 가는 그림이 그려진 “바이칼호” 16호 열차에 탑승하였다.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의 시차는 6시간이나 일광절약시간(섬머타임)의 적용으로 5시간의 차이가 난다. 열차의 진행에 따라 시간을 맞추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열차에서는 모스크바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5,152㎞, 3박 4일을 내리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열차의 객실을 보고는 그 좁고 답답함에 그만 앞이 캄캄하다. 어떻게 이와 같이 좁은 공간에서 3박4일을 갈 수 있단 말인가. 창문은 열 수 없게 되어 있고, 열차가 정차중이라 에어컨이 가동되지 아니하여 덥고 답답한 기분에 본의 아니게 창문의 커튼을 뜯고 말았다.
열차 1량에는 4인실 객실(꾸페) 9개가 있고, 가운데 식당차를 기준으로 앞뒤로 30여개의 객차가 연결되어 있다. 객실은 안쪽으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고, 남녀 구분 없이 탑승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한 객실에 타게 된 서로 모르는 젊은 남녀가 안으로 문을 잠그고 무슨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객실에서는 C형과 중학교 교사인 현 선생 그리고 반도체 엔지니어 Mr.박이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나와 Mr.박이 나이가 어려 2층 침대를 이용하게 되었고, 대충 짐이 정리되는 대로 열차출발을 지켜보았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어컨이 작동되는지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열차 1량당 2명의 여자 차장이 24시간 교대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들은 여객을 관리하는 차장의 역할뿐 아니라 객실과 복도를 진공청소기로 깔끔하게 청소하는 청소부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차장 예나는 이루크츠크출신 32세의 여성이다. 이들이 영어를 쓰지 아니하고 러시아말만 하는 통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아니하여 이만저만 불편이 아니다. 그들이 일부러 영어를 쓰지 않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기차내의 모든 안내문에도 러시아어로만 되어 있고, 영어 한 자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의 이곳저곳을 다녀 봐도 마찬가지다. 미국을 싫어하여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 프랑스 국민들처럼 자기들 언어의 우월성을 맹신하여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행객들로서는 간단한 러시아어를 익힐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러시아 알파벳들이 영어알파벳이 뒤집어진 듯한 것도 있고 앞뒤가 바뀐 것과 요상한 것도 있어서 그 해독에 애를 먹는다.
차창 밖은 그야말로 드넓게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 그대로다. 지평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들판의 야생화와 자작나무숲이 연이어 지나간다. 손대지 않고 자연 그대로 골프장을 해도 될만한 곳도 스쳐간다. 사람의 흔적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있다. 이 드넓은 땅이 있음에도 러시아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다. 어떤 사람은 농민이 자신이 일구는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을 그 원인으로 들고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일년에 반 이상이 매서운 추위와 동토라는 자연환경적인 요인이 많을 것 같다. 혹독한 자연환경으로 인한 경작상의 애로 때문에 개인적 분업보다 미르라고 불리는 집단적 농업체제가 정착되었다는 견해가 맞을 것 같다.
물론 이러한 협업체제가 구소련의 집단농장체제와 결합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노출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시베리아평원을 농지나 목축지로 쉽게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시베리아평원을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인류를 위해서는 유익한 것이 아닐까.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면서 지구의 허파가 잘려 가는 모습이 안타깝지 아니한가.
열차는 정해진 역에 길게는 20분, 짧게는 2분간 정차한다. 열차 복도에 걸려있는 시각표에는 모스크바까지 5,152㎞를 가는 동안 20분 정차하는 역은 지마, 이란츠카야, 마린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페르미, 바레치노, 블라디미르 역 등 7개역이고, 옴스크, 스베르드로프스크(예카텐부르크)는 15분, 노보시비르스크는 18분간 정차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러시아어 지명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열차 정차 30분전에는 차장이 열쇠를 가지고 화장실문을 잠가버린다. 차장들은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낮이나 밤이나 승강구 손잡이를 걸레로 깨끗이 닦고 바이칼호 표지판도 열심히 닦는다. 어찌 된 일인지 차장들은 복도 차창의 커튼을 가리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이 차창을 열거나 커튼을 열어 제치면 와서는 다시 닫아버리고 짜증을 낸다. 아마 어디쯤에선가는 우리들이 탄 바이칼호가 김정일이 탄 특별열차하고 교행할 것임에 틀림없다. 햇반과 사발면으로 저녁식사를 때운다. 앞으로 3일간 라면만으로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끔찍한 일이다. 보드카를 소주처럼 마시고 잠을 자기 위하여 2층 침대로 올라갔다.
2001. 8. 11.(토) 아침에 일어났으나 시간 감각이 없다. 모스크바시간하고 현지시간이 맞지 않아서 몇 시에 자고 일어나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영 감이 잡히지 않는다. 좁은 객실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대충 지낼만하다. C형이 준비해간 스타킹과 볼펜으로 차장들을 구워삶아서 그런지 우리 객실은 청소도 잘해주고 객실이용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복도를 지나가는 물품판매원(우리의 홍익회와 같은 것으로 우리는 그를 홍익회라 불렀다) 불러 카트에 실려 있는 맥주 전부를 사겠다고 하자 그만 넋이 나갔는지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아마 이 열차에서는 승객들이 맥주나 술 같은 것을 많이 사지 않는 모양이다. 홍익회가 술값을 900루블로 계산하여 현 선생이 하나하나 계산한 대로 300루불이 아니냐고 종이에 적어주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계산기를 몇 차례 두드리더니 300루블이 맞다고 하면서 겸연쩍은 얼굴이다.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순진한 모습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우리를 아는 척 하고 장난을 걸어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사다리를 조작하여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올라 다녔으나 이제는 2층 침대 양끝을 손으로 잡고 평행봉하는 식으로 단숨에 능숙하게 2층 침대로 올라가게 되었다. 김학준의 『러시아史』중 읽지 못한 소비에트러시아 이후의 역사를 읽기 시작하였다.
열차는 시베리아의 수도라고 하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정차한다. 열차가 정차하는 동안 소위 보따리 장수들이 플랫폼으로 몰려와 간식과 과일 같은 것을 판다. 장거리 열차여행에 필수품인 팔도도시락은 없는 곳이 없다. 열차에서는 항시 뜨거운 물이 제공되고 있으므로 물만 부어 쉽게 요기할 수 있는 도시락면이 안성맞춤이다. 술안주로 스낵 같은 것을 샀는데 러시아로 포장이 되어 있어 러시아 제품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 빙그레의 깡 종류이다. 사과는 우리나라의 옛날 국광사과와 같이 크기가 작고, 산딸기 같은 것도 팔고 있어 산딸기 한 봉지를 샀는데 맛이 달콤하다.
횡단열차 여행 중에 제일 불편한 것은 머리를 감지 못한다는 것이다. 샤워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머리를 감을 수 있어야 할 것인데 3박을 하는 동안 머리를 감지 못하여 그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페트병 두어 개에 물을 담아 아쉬운 대로 머리를 감는 모양이나 화장실 구조상 그게 쉽지는 않다.
식당차는 열차 중간에 위치해 있는데 손님들이 별로 없다. 식당차에는 관리인인 듯한 할머니와 시중을 드는 젊은 여인이 있고, 홍익회도 있다. 라면만 먹는 것에 식상하여 몇 가지 요리를 시켰는데 먹을 만 하다. 식당차를 오가면서 보니 객실 대부분이 여객으로 차 있었고, 체스를 두는 사람, 책을 보는 사람, 잠을 자는 사람 등 여러 인종들이 각양각색이다.
변함없는 바깥 풍경에 지루해지고, 자작나무숲이 시야를 가려 자작나무가 그야말로 짜증나무다. 아마도 구소련 당시 철로변 보안림으로 조성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열차 여행객들의 시야를 가려 답답함과 짜증을 더해 준다. 앞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여행이 활성화되려면 자작나무숲을 베어버려야 할 것 같다. 차창 밖을 내다봐야 이제 감흥도 적어졌고 가져온 책이나 읽으면서 지겨운 여정을 달랜다.
2001. 8. 12.(일) 다시 해가 밝았다. 한여름의 이곳은 백야현상이 나타나 밤 9시가 넘어야 어두워지고 아침 일찍 해가 뜬다. 차창 밖으로 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여명속의 평원을 보는 것도 괜찮다. 새벽은 새벽에 눈뜬 자만이 볼 수 있고, 새벽이 오리라는 것을 알아도 눈을 뜨지 않으면 여전히 짙은 밤중일 뿐이라는 말은 진리다. 계속 열차를 타야 만 하는 것이 변화도 없고 지겨워진다.
블라디보스톡에서부터 열차여행을 시작했다면 지겨움으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시베리아 횡단여행을 함에 있어서는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옴스크나 유럽과 아시아의 접점 예카텐부르크 등 중요한 역에서는 내려 1박 정도는 하면서 그곳의 풍물을 보고 다시 열차에 탄다면 지루함을 덜해질 것으로 보인다.
일행 중 여성팀 4명이 객실을 바꾸고 있는데 이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으면 차장들이 이들에게 멀리 떨어진 객실로 이동하도록 명령했을까. 사실 이번 일정의 우리 일행 중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몇 있다. 자칭 박사임을 주장하는 말이 많은 비디오맨, 자신의 정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꼼짝 않고 바깥 풍경만을 감상하는 크레믈린, 골반구조가 잘못되었는지 걸음걸이가 특이한 왕언니, 옷차림이 슈퍼에 물건 사러 가는 모양인 슈퍼아줌마, 별로 말이 없는 공주 등 각자의 개성이 확연하게 들어 난다. 어디선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여행이 편하고 즐거우려면 차장들과 친해두어야 한다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 방은 C형이 이미 많은 투자를 해 놓은지라 별무리가 없다.
열차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예카텐부르크역에 정차했다가 우랄산맥을 넘는다. 열차가 경사지역을 넘는 것 같으나 그리 산이 높지 않다. 말로만 듣던 우랄산맥을 열차로 넘고 유럽과 아시아를 어우르는 유라시아지역 중 이제 유럽으로 들어선다. 삶에 지친 고단한 러시아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우랄산맥을 넘으면서 김학준의 『러시아史』를 완독하였다. 이 책은 러시아의 역사를 고대 루시로부터 모스크바 대공국까지의 러시아, 제정 러시아,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연방공화국으로 나누어 시대별로 집권층의 변화에 따른 사회상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서적으로서는 매우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해도 역이름이나 길거리 간판이라도 읽기 위해서는 러시아 알파벳을 읽혀야 될 것 같아서 러시아 알파벳을 몇 번씩 연습을 하고 몇 가지 길거리 언어를 외우기로 했다. 러시아 말을 아는 것은 스키로 끝나는 사람이나 도시이름, 그리고 찌라시 같은 말 정도이고 나로서는 러시아어를 처음으로 접하는 말이라 너무 생소하여 쉽게 혀가 돌아가지 않는다.
러시아어 「PECTOPAH」이 레스토랑으로 발음된다. (즈드라스트부이쩨 : 안녕하십니까.), (쓰바씨버 : 감사합니다.) 정도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배웠지만 (다바이떼 스빠따그라삐루엠샤 브메스떼 : 함께 사진을 찍지 않겠습니까?) 등 몇 가지 말을 메모지에 적고 무턱대고 외웠다. 러시아 사람들은 사진이 찍히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이댔다가는 외면을 하거나 무안을 당하기 쉬우므로 러시아어로 양해의 말을 해주는 것이 좋다. 발음이 잘 나오지 않아 메모지를 보면서 “다바이떼…” 운운 더듬거리면 쉽게 포즈를 취해준다.
2001. 8. 13.(월). 오늘 오후에는 드디어 횡단열차여행을 마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마지막 잠을 자고 대충 짐을 정리한다. 고리끼역과 블라디미르역에 정차하고 모스크바를 향해 열차는 마지막 힘을 낸다. 『어머니』라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고리끼와 시인 푸쉬킨은 아직도 러시아인들의 가슴에 남아있고 거리의 이름으로, 동상으로 러시아 곳곳에 산재해 있다. 블라디미르는 989년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여 러시아정교를 확립한 사람으로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불린다.
외국을 다니다 보면 사람이름을 딴 지명이나 건축물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남에 대한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 이름이 별로 없다. 무슨 무슨 대학역 등으로 명명되는 서울지하철 역 이름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역사교육을 위해서나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도 지명이나 도로, 건축물 등을 명명할 때 우리 삶의 지표가 되어준 사람이름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열차에 들어왔는지 유리컵 같은 것을 파는 아줌마가 객실로 들어왔다. 6개들이 컵 세트를 250루블에 판다고 하여 깍자고 하는데 옆방 슈퍼가 자기들은 150루불에 샀다고 하자 아줌마는 할 수 없이 150루불에 판다. 우리돈 6,000원 정도. 컵이 깨지지 않는다고 하여 컵을 열차바닥에 내동댕이쳐 봤으나 깨지지 않는다.
모스크바가 가까워 올수록 집모양은 규격이 일정한 집단농장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집의 크기도 작다. 동부 시베리아쪽 보다는 활기가 있어 보인다. 횡단열차 탑승기념으로 컵받침대를 가져가기를 원하였으나 그리 비싼 것 같지는 않은데 성깔이 있어 보이는 차장은 하나에 10불을 내고 가져가란다.
모스크바 도착시까지 남는 시간에 최인호의 『달콤한 인생』(문학동네 : 2001)을 읽었다. 달콤한 인생은 파우스트와 같이 선과 악의 2분법적 세계관의 바탕위에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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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후퇴 때 피난길에서 한 여인이 아이를 낳고 죽는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수호천사와 악마가 대결을 벌인다. 악마는 아이에게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주고 그 대신 아이의 영혼을 소유하여 아이에게 허무와 절망을 키워주고 마침내 아이가 자살하도록 만들겠다고 한다. 수호천사는 아이를 지키고 아이를 반드시 영원한 천국으로 이끌겠다고 한다.
아이는 인정 많은 아낙네의 손에 의하여 박순택으로 자라고 아낙네의 딸과 오누이가 되어 자란다. 박순택은 여섯 살에 엄마와 함께 미군기지에서 코크스를 훔치다가 엄마는 열차에 치여 죽는다. 아버지는 순택을 고아원에 맡겨버리고 고아원에서 자라던 순택은 열다섯 살에 고아원을 도망쳐 나와 서울로 간다. 소매치기 패거리에 이끌려 기술자가 되고 전과 5범이 된 순택은 면회 온 누나와 16년 만에 만나고 출소하면서 소매치기와는 손을 끊을 다짐으로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로부터 출생의 비밀을 듣고 친모의 신분증을 받는다.
친모의 고향을 찾은 순택은 외조부를 만나고 서울에 있는 친부를 만난다. 친부는 아버지의 성에 따라 순택의 이름을 한선우로 바꾸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선우는 아버지공장의 공장장이 되고 정치가의 딸과 결혼하여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일시적으로나마 누리게 된다.
그런데 우연하게 옛 소매치기 동료를 만나면서 선우의 인생항로는 뒤틀린다. 한선우가 박순택으로 불려졌던 소매치기라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선우의 가정은 깨지고 사업도 쇠퇴하고,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지방 소도시로 내려가 과거를 잊고 살았으나 마지막 남은 아들이 백혈병으로 죽자 허무와 절망 속에서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선우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자살하려고 기다리다가 한 아이 엄마의 비명을 듣고 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고 자신은 들어오던 열차에 치여 죽는다. 자살 직전 아이를 구함으로써 수호천사의 승리로 귀결되지만 악마의 예언과 같은 삶을 산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과연 달콤한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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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을 읽고 몇 년 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우리 선조들의 짧은 인생> 후반부가 생각난다. 우리들의 인생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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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승리할 때 선은 숨는다.
선이 나타날 때에는 악은 숨어서 기다린다.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억압할 수는 없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서로 밀어낼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기쁨이 있더라도
이면에는 불안이 있고,
절망속에서도
항상 조용한 희망은 있는 것이다.
삶은 길다고 하더라도
항상 짧은 것이다.
새로이 무엇인가 하기에는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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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모스크바 - 영광과 혼돈의 도시
예정시간을 30분쯤 지연하여 오후 3시 50분경에 시베리아 횡단열차 바이칼호는 지리한 여정을 마무리하고 모스크바 야로슬라브역에 도착하였다. 중앙아시아, 북경, 평양 등에서 들어오는 열차나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바로 이 역이 시발점이자 종점이다. 김정일도 이 역을 통하여 모스크바에 들어왔다고 한다. 모스크바에는 9개 철도역이 있고, 종착지의 이름으로 역이름을 짓는다.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역이 없다. 역광장에는 역시 레닌 동상이 서 있다. 블라디보스톡의 미녀들을 상상하고 모스크바에 내렸다가 거리의 여자들이 상상한 모습과는 천양지차라 C형의 실망은 대단한 모양이다.
모스크바에서의 가이드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강평기 박사다. 모스크바는 북위 49도에 위치하고 있고, 크레믈린궁을 과녁으로 하여 원형도로가 중첩된 과녁의 도시다. 모스크바주의 인구가 1,200만명이고, 그 중 모스크바시의 인구가 870만명. 서울의 2배의 면적이고, 세계에서 서울, 베를린에 이어 물가가 비싼 도시다. 뿌친(우리나라에서는 푸틴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곳에 와 보니 뿌친이라고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예카테리나 2세도 여기서는 예까째리나 2세로 부르고 있다)이 집권한 후 개혁을 줄기차게 추진하고 있고, 뿌친 자신을 포함하여 외무장관을 제외한 각료의 나이가 전부 40대라고 한다.
종래의 공산당 집권시절 서기장 등 당 간부의 나이가 대체로 고령이었던 것에 견주어 보면 괄목할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러시아는 석유, 가스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휘발유가격도 1ℓ에 9루블(우리 돈 400원 정도)로 상당히 싸다고 한다. 러시아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보드카 등이 특히 유명하다. 코카콜라, 맥도날드, 피자헛 등이 빠른 속도로 모스크바 거리를 잠식하고 있다.
모스크바시내에서 눈에 띠는 건축양식이 있다. 외무부, 모스크바대학 본부, 우크라이나 호텔 등 하늘 높이 첨탑을 세우고 좌우 대칭을 이루는 고딕식의 건물군이 그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힘을 과시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세칭 스탈린 고딕양식이라고도 하는데 모스크바에 비슷비슷한 7개의 건축물이 있다. 건물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까불지 말라는 듯 지나치게 웅장하고 권위주의적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원래 독재자들은 자신의 힘의 징표로 거대한 건축물을 지어 과시하는 것이 천성인가 보다. 아마도 북한의 김일성도 이에 못지않은 구조물을 평양 곳곳에 세워 놓았겠지. 모스크바는 대도시치고는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져서 공기가 청정하고 생활환경은 쾌적할 것 같다. 대기오염도 심하지 않고 버스가 전차형태로 운행되고 있어서 우리와 같은 대기오염의 주범인 버스로 인한 오염은 없을 듯하다. 모스크바강 중심부에는 서구를 향해 러시아의 문을 연 표트르 대제 동상이 증기선 한 척과 함께 서 있다.
모스크바강을 따라 시내도로를 오가면서 보니 한국의 삼성과 LG의 광고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고, 버스나 전차의 광고도 이들 회사의 것이 유독 많다. LG는 냉장고나 에어컨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고, 삼성은 휴대폰 등의 판매에서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도 우리 기업들의 부침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왕년의 현대와 대우의 모습은 보기 어렵다. 시내의 차들은 유럽 또는 일본차이고 우리의 차는 잘 보이지 않는다. 대우가 우크라이나에서 만들고 있는 넥시아(르망과 비슷한 모형)가 간혹 눈에 띨 뿐이다.
러시아 국민의 10% 정도는 신흥부자(노보이루스키)로서 모든 안락함을 누리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민은 월 평균 급여가 70달러에서 100달러 정도(뿌친의 월급은 314달러라고 한다)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경찰관의 월급이 70달러이나 보이지 않는 돈 50달러 정도의 수입이 있고, 교사의 월급도 70 내지 100달러이나 물론 보이지 않는 돈이 생긴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검은 돈, 마피아는 러시아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돈만 있으면 한 달에 200달러 정도 주고 사경찰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보통사람들은 모스크바 근처의 다차로 휴가를 떠나고, 부자들은 터키나 지중해로 휴가를 갈 정도로 빈부의 격차가 크고, 휴가기간은 1개월이고 요즘은 바로 휴가시즌이라고 한다. 잘 살지도 못하면서 1년의 ⅓이 휴가라고 한다. 주 5일 근무제는 오래 전에 확립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주 5일 근무제를 생각해본다. 여러 가지 논란이 있으나 1주일에 2일을 쉰다고 하여도 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쉬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라 고역이 될 수도 있다.
일찍 크레믈린궁의 문을 닫는다고 하여 서둘러 크레믈린궁으로 들어갔다. 세계 공산주의의 심장이었던 곳,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러시아의 꿈을 모색하는 러시아의 중심이고 모스크바의 핵이다. 시간이 없어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기에 급급하다. 병기고 앞에는 나폴레옹전쟁 당시 노획된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고 아이들이 포신 위에 올라가 놀고 있다.
뿌친 대통령이 집무하는 건물에는 러시아의 삼색기 중간에 황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러시아의 삼색기는 옐친 이후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이 그려진 붉은 기를 폐지하고 러시아의 새로운 국기로 제정된 것인데 백색은 평등을, 청색은 돌진을, 빨간색은 통합을 상징한다는 이야기다. 러시아까지 대통령이 집무하는 공간을 볼 수 있게 공개하는 마당에 우리나라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경호상의 문제로 청와대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한심스럽다. 미국이나 러시아는 경호문제가 없어서 최고권력자의 집무공간을 공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백악관이나 크레믈린궁이 관람객들이 오고가는 동안 우리나라의 청와대 앞길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세계에서 가장 구경이 큰 대포와 황제의 종, 이반의 종탑, 우즈펜스키사원 등을 간단히 둘러봤다. 우즈펜스키사원 내부에는 러시아정교 십자가 밑에 무덤(묘)이 있고,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고 미사도 집전하는 등 3가지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러시아 사절단인 민영환 일행이 1896. 5. 26. 이곳 우즈펜스키 사원에서 열렸던 니꼴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원내부의 마리아상은 아기볼이 붙어 있고 예수가 아시아안임을 암시하는 듯한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관계로 크레믈린 궁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오는데 경호요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강 박사에 의하면 김정일은 모스크바에 와서 상당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다른 국가원수급은 크레믈린궁에서 떨어진 영빈관에 묶는 것이 상례인데 김정일만큼은 엄청난 경호는 물론 크레믈린궁내의 예카테리나궁에 투숙하였다고 한다. 16년 전에 아버지 김일성이 갔던 길을 똑같이 갔고, 세계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무언으로 과시하는 듯하기도 하지만 요새 세상에 일국의 최고 통치자가 24일이라는 긴 시간을 유유자적하며 철도여행을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하여튼 전 세계에서 어느 권력자도 김정일만큼 제멋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정일은 붉은 광장의 레닌묘에 헌화하면서 자신이 정통 레닌주의를 고수하는 것처럼 과시했으나 냉철히 바라보면 그는 정통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제정러시아시대의 차르 이상의 절대 전제군주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레닌을 회상하며 세계사의 시계의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은 흘러간 강물을 되돌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된 이후 모스크바를 방문한 국가원수 중 중국의 강택민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레닌묘에 헌화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미 레닌은 박제된 유물일 뿐이다. 물론 러시아 경제가 시장경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워지면서 과거의 소련시절을 동경하고 공산당의 지지율이 높아간다고 하지만 일단 사람들이 자유의 맛에 길들여진 이상 과거로의 회귀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모스크바에는 우리 유학생 1,300명과 비즈니스를 하는 600여명 등 2,000명이 살고 있으나 북한 사람은 보기 어렵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북한이라면 사회주의 종주국인 러시아 모스크바에 많은 사람들을 보낼 만 한 데 북한사람들은 별로 없고 대사관만 모스크바에서 제일 크다니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카레이스키라고 하는 고려인들은 30만명 정도가 된다고 하니 이들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이들 중에는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내몰린 고려인도 많을 것이다. 고려인인 빅토르 최의 추모열기는 아직도 이곳에서 대단하다.
모스크바는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인형 등 발레 특히 볼쇼이 발레가 유명하나 표를 구할 수 없다. 나의 상식으로는 공산주의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창의성을 말살하는 국가정책으로 체제수호의 문학이나 예술은 논외로 하고 치열한 자기성찰과 혼을 불사르고 문학, 예술의 꽃을 피운다는 것이 쉽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제정러시아나 소비에트시대에 이것이 가능했는지 아이러니다. 내가 공산주의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문학과 예술이 자유로움 속에서보다 고난 속에서 더 그 혼을 발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저녁을 먹고 아이스피겨와 서커스를 결합한 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1인당 60달러의 관람료이고, 1,000여석이 객석은 관광객 등으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북한의 서커스는 딱딱하고 기능적인 면에 치중하는 듯하나, 러시아의 서커스는 아이스링크 위에서 자유자재로 묘기를 보이는데 딱딱하지도 않고 예술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2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마지막 묘기로 한 단원이 지상으로 천장 꼭대기까지 줄을 타고 40∼50m 수직상승하더니 갑자기 몸에 줄 하나 걸치지 않고 밑으로 자유낙하 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밑에 있는 그물에 포즈를 취하고 서있는 것을 보고 그만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한국인이 많이 투숙한다고 하는 코스모스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4일 만에 머리를 감았다. 횡단열차를 타는 동안 머리를 감지 못하여 이루 답답한 것이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머리를 감았더니 한결 개운하다. 호텔 로비는 시장통을 방불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보인다. 박동섭 변호사님 일행도 보인다.
그런데 놀란 것은 이 여자들이 소위 ‘인터걸’이라고 불리는지 모르지만 러시아 미녀들이 자신들의 자태를 들어내고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가 슬슬 여행객을 유혹한다. 아마 이곳 호텔 소속의 매춘부인지 알 수 없지만 술을 먹고 있는 남자에게 어김없이 다가와서 섹스마사지를 권유하며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다. 그 여자들은 백에 들어 있는 콘돔을 보여주기까지 하고 방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는데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5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C형에 의하면 그 때는 로비가 삭막했을 뿐 아니라 30분 단위로 여자들이 호텔의 객실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그 때보다는 많이 달라졌고 이곳도 자본주의의 돈맛에 젖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긴 러시아의 보통사람의 한달 수입이 100여 달러에 불과한데 이곳에서 간단하게 돈 100달러를 벌 수 있다는 경제적 유인이 러시아 처녀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에서는 얼굴이 예쁜 러시아 여자들에게 한국행 비자를 발급해주지 아니하여 돈을 좇아 한국으로 가려는 러시아 여자들이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불법입국을 노린다고 한다. 현지시간으로 밤 1시(우리와는 5시간의 시차로 한국시간 아침 6시가 된다)에 처음으로 집에 카드를 이용하여 전화를 걸어봤다. 공중전화기 있는 곳까지 여자들이 따라와서 흥정을 요구하는 데는 그만 질리고 말았다.
7. 쌍뻬째르부르크
[네바강변의 아름다움]
2001. 8. 14.(화)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모스크바에서 734㎞ 떨어진 러시아 문화, 예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위해서이다. 모스크바에는 5개의 공항이 있고, 우리는 국내선이 있는 불코바 1공항으로 향하면서 고르바쵸프연구소를 지난다. 고르비는 매일 이 연구소로 출근하는데 개혁, 개방의 실패 때문인지 국민들 1%의 지지율밖에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종전 국민소득이 1만불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개혁, 개방을 한답시고 현재는 국민소득이 2,790달러(한국은 8,700달러)로 실업율이 12%에 이르고, 남자 60세 이상, 여자 55세 이상이 월 20∼40달러로 연금생활을 하고 있다는데(모스크바의 경우), 러시아 평균인들의 삶 자체가 피폐해져 왕년의 향수를 그리는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제가 엉망이 되면 민심이 쉬이 돌아선다는 것은 우리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독재자로 평가받던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적 업적을 이유로 재평가를 받고 있으나 나름대로 민주주의의 발자취를 남겼다는 김영삼 대통령이 IMF 환란을 초래한 자로 평가절하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러시아가 넓은 땅덩어리, 다양한 민족구성과 기질 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지만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러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며 세계사의 진운에 기여한 고르비에 대하여 후일 재평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70년간의 공산주의 실험에서 인류가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 러시아를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고르비 때문이 아닌가.
오전 11시, 모스크바를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여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에 도착하였다. 북위 60도에 위치하고 있고, 인구는 500만명 정도. 공항건물 상단에 걸려있는 1703-2003이라는 표지판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도시는 러시아수도 천도 300주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보수 및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도시에서의 가이드는 국립음악원에서 연주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윤호진씨다. 전공이 전공이니 만큼 음악, 예술에는 일가견이 있어 이 부분에 관해서는 훌륭한 가이드다.
상트페테르부르크(St.Petersburg)는 Peter Ⅰ(피터, 페트로 표트르) 대제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도시다. 표트르는 1703년 스웨덴전쟁 후 습지대인 네바 강변에 서유럽으로 나가는 창인 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고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는데, 이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부르크이다. 영어식 발음 상트페테부르크는 이곳에서 쌍빼째르부르크로 불리고 있다.
이 도시는 200년간 로마노프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뾰뜨르 대제는 러시아의 개혁을 위해 우리나라 대원군의 단발령과 같이 턱수염깍기를 단행하는 바람에 ‘이발사 짜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근대사는 바로 표트르 대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t.Petersburg는 St.Petersgrad로 바뀌었다가(grad는 도시라는 뜻) 1917년 10월 혁명 후 러시아의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진 후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었다가 구소련이 해체된 후 레닌이 비판받으면서 St.Petersburg로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러시아 역사에서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2세, 레닌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다. 예카테리나 2세는 폴란드 피를 가지고 독일에서 살다가 남편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라 폭정을 일삼았다고 하지만 에르미따쥬 건설등 러시아 문화의 꽃을 피운 사람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핀란드 만 해변가에 위치해 있는 여름궁전으로 가는 길에 레닌의 주거정책으로 건설된 조립식 아파트를 볼 수 있고, 17∼18세기의 바로크양식의 건물들이 도시의 고색창연함을 더해 주고 있다. 300만평에 이르는 여름궁전에 들어서면서 어떻게 한국 사람들임을 알았는지 악사들이 ‘고향의 봄’을 연주한다. 표트르 대제의 명령과 그의 원래의 계획에 따라 그의 여름 저택 가까이 신설된 여름궁전에는 수많은 조각상과 분수대, 흉상 등으로 채워져 있고, 조각상은 황금빛으로 덧칠해 놓아 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표트르호프의 대궁전과 대폭포 및 금빛으로 치장한 조각상들은 그 화려함과 앙상불에 있어서 가히 압권이다. 러시아의 전통 귀족의상을 입은 여인이 1달러를 받고 함께 모델이 되어 준다. 모델료 수입이 만만찮을 것 같다.
여름궁전에서 나와 네바 강으로 가면서 마르스광장에 있는 2월 혁명을 기리는 '꺼지지 않는 불'에는 젊은 남녀가 결혼 후 친구들과 뒤풀이를 하러 나와 있다. 러시아인들이 결혼 후에는 반드시 ‘꺼지지 않는 불’에 들른다는 것은 이루크츠크에서 들은 바 있다. 현란한 모자이크 양식으로 눈길을 끄는 ‘구원자의 피’성당은 알렉산더 2세가 살해된 곳이라고 하는데 내부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만 찍었다. 여름 햇살을 받은 겹겹의 모자이크 지붕이 눈부시게 빤짝거린다.
네바 강 유람은 좋은 날씨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취를 한 층 더해 주었다. 네바 강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철분이 들어있다는 깨끗한 강물은 참으로 훌륭했고 이 도시가 파리를 능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파리의 세느강은 네바강에 비하면 개울 정도로 생각되고 도시의 모든 정취도 유럽의 어느 도시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란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음산한 도시라고 했는지 그런 음산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고색창연함과 화려함을 간직한 도시에 파란 하늘과 네바강의 조화는 앞으로 파리 이상으로 엄청난 관광수요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범행동기가 페테르부르크의 음산한 기후를 들었고, 10월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 왕비는 날씨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혁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나로서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물론 내가 바라보는 시점이 백야가 이어지는 한 여름이라서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네바 강을 오르내리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인간의 힘으로 늪지대에 이러한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기만 하다. 물론 도시 건설을 위해 수많은 민초들이 희생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네바강에 있는 여러 개의 다리들은 화물선 통행시 일제히 다양한 방법으로 다리를 들어올린다고 한다.
유람선에서는 러시아의 남녀 악사와 가수 다섯 명이 나와 러시아 전통악기로 러시아 민요를 연주하고, 여행객들에게 동참을 유도한다. 여가수가 남자들과 얼굴 맞추기 게임을 하다가 남자들의 뺨에 그녀의 루즈를 듬뿍 묻힌다. 가이드가 ‘만남’ 등 우리 가요의 악보를 주었는지 러시아 전통악기로 우리의 가요를 연주하는데 색다른 느낌을 준다.
저녁에 러시아의 민속공연을 관람하였는데 공연자들의 의상과 춤이 우리와 같은 동양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남자들도 몽골풍을 연상케 하는 의상인데 아마 러시아가 과거 1240년부터 1480년까지 24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어 그 문화적 채취가 배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인들이 몸을 돌리며 추는 춤은 우리나라의 전통무용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몽골의 침략으로 러시아의 몸에는 몽골의 피가 많이 섞이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데 사실인가 보다. 러시아인들은 몽골을 지옥을 뜻하는 '타타르'라는 말로서 경멸했지만 오히려 몽골의 지배를 거치면서 강력한 군주권을 부러워하고, 또 세계의 광대함을 인식하고 역참제를 도입하여 육로를 확충하는 등 국가의 기반을 닦아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쌍뻬째르부르크의 밤과 요정들]
모스크바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특이한 것은 호텔 복도의 길이가 200여m에 이르는 긴 길이다. 여행을 가면 반드시 그곳의 밤문화를 보고 가야 한다는 C형의 지론에 따라 가이드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제일 미녀들이 나온다고 하는 곳을 가보기로 하였다. 러시아의 밤거리는 무섭다고 하고 극단적인 경우는 경찰관이 강도로 돌변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강도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요령 등 몇 가지를 들었으나 괜히 여권과 수첩을 들고 다니다가 잘못 되면 큰일 날 것 같아 여권과 수첩 등을 모두 호텔에 두고 달러와 루블 얼마만 가지고 호텔을 나섰다.
러시아에서는 일반 택시는 잘 보이지 않고 자가용운전사와 잘 흥정을 하고 타고 가면 된다. 자가용들에게 알아서 돈을 받도록 영업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가용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도로인 냅스키도로를 따라 가다가 골든 돌(Gollden Dolls)이라는 나이트클럽 앞에 내려 그곳으로 들어가는데 건장한 청년들이 서 있다가 우리가 공항에서 보안검색을 하는 식으로 우리들의 몸을 수색한다. 보안검색을 받으면서 술집에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다.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짧은 팬티 한 장만 걸친 미녀들이 간이 테이블 위 막대를 잡고 온갖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입장료 500루블을 내고 들어오면 이곳은 술을 마시는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을 감상하는 것이 주테마인 것 같다. 러시아의 최고 미녀들이 다 모였다고 하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미인들이고 밤의 요정들이다.
미녀들은 손님들에게 프라이빗 룸(private room)으로 가는 경우 70달러 선불을 요구하고 그 곳에서 쇼를 보여준다고 한다. 아마 이곳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곳에 자주 올 수는 없을 것 같고, 돈 많은 부자들이나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이 들릴만한 곳이다. 볼코바항공의 기내 잡지 『review』에도 골든 돌의 광고가 실려 있고 인터넷 사이트도 있다(www.gollden-dolls.ru).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은 적막하고 냅스키도로의 텅 빈 거리를 자가용택시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파울성당과 권주(勸酒) 문화]
2001. 8. 15.(수) 오전 네바 강변의 로스트랄 등대를 거쳐 피터폴(페트로파블로스크) 요새로 들어갔다. 이 곳에는 표트르 대제를 희화화한 어느 외국인 제작의 동상도 있다. 이곳은 스웨덴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네바 강 한가운데 삼각주에 축조되었으나 이후에 감옥으로 이용되어 한번 들어가면 시체로 나오는 죽음의 문 등이 있다. 죽음의 문에 들어서면 네바 강의 범람흔적이 표시되어 있고, 죽음의 문 밖에는 백사장도 있고, 네바강이 두 갈래 강으로 나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새의 중앙에 있는 파울성당의 첨탑 높이는 121.8m,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해발 70m의 산이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하니 이 첨탑의 높이가 이곳에서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성당이 완성된 이후 종루에 피뢰침이 없어서 몇 번의 화재를 입었고, 1756년의 화재에서는 첨탑과 네델란드제 시계가 불타 버렸다.
1830년에는 첨탑 끝에 있는 십자가를 든 천사의 상이 기울어 추락하자 당시의 왕은 이를 수리하는 자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주기로 하였다. 한 목수(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가 무료로 수리를 자청하고 발판이나 사다리도 없이 그물망 하나로 탑 꼭대기에 있는 상을 수리하였다. 왕은 목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자 아무 것도 필요 없고 그저 술이나 마음대로 먹고 싶다고 하였고, 왕은 ‘이 사람이 술을 먹고자 하는 경우에는 술을 주라, 계산은 내가 한다 ’는 내용의 ‘쯩’을 목수에게 써 주었다. 목수는 이 쯩을 가지고 술을 마음대로 먹고 다녔는데 어느 날 쯩을 잃어버리고 술을 못먹게 되자 다시 왕을 찾아가 다시 쯩을 받았다. 목수는 다시 쯩을 제시하고 술을 먹는데 또 다시 쯩을 분실하였다. 여러 차례 쯩을 잃어버린 목수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왕은 쯩을 자주 만드는 것이 불편하니 목수의 턱에 쯩과 같은 내용을 적고 황제문양까지 문신을 해준다. 목수는 술이 먹고 싶으면 분실의 염려 없이 자신의 턱을 쳐들어 보이고 술을 마음대로 먹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술을 마시자고 할 때 오른 손으로 잔을 쥔 모습으로 위로 손목을 꺽는 모습을 취하는데, 오늘날 러시아인들이 술을 한 잔 하자고 할 때 오른 쪽 턱을 오른손 셋째 손가락으로 툭툭치는 것은 바로 이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인지 모르나 가이드가 이곳의 러시아 역사교수로부터 확인한 이야기라고 하니까 그렇게 믿을 수밖에. 버스에서 기사에게 술을 마시자는 뜻으로 턱을 쳐들고 오른손 셋째 손가락으로 툭툭 쳐보자 역시 안된다는 뜻으로 이내 손을 내젓는다. 술 한 잔 하자고 하는 우리의 문화는 직설적이고, 러시아문화는 역사적이고 은유적이다.
[문화유적의 보고 - 에르미따쥬와 이삭성당 등]
개관시간에 맞추어 겨울궁전인 에르미따쥬 박물관에 가보니 관람객들이 이미 긴 줄을 서고 있었다. 조그만 가방을 제외하고는 소지품을 휴대할 수도 없고 카메라나 비디오를 갖고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것도 통제한다고 한다.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거처였던 이 곳은 궁전이 네바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졌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는데 250만점의 유물을 1점당 1분씩 보는 경우에도 관람시간만 5년이 걸릴 정도라고 한다.
우리의 예술이 이곳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못하는 것인지 그 수많은 작품 중에는 우리나라의 김수라는 작가의 승무 한편만이 이 곳에 걸려 있는데 그것도 전시실이 아닌 복도에 걸려 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곳저곳 전시실의 작품들을 건성건성 둘러볼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는데 언제 한 번 시간을 느긋하게 갖고 찬찬히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기를 기대한다.
그나마 이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오로라함대에서 발사하는 대포소리로 개시된 10월혁명으로 차르정권의 최후임을 알려주는 시계가 10월 26일 새벽 2시 10분을 가리키면서 니콜라이 2세의 집무실에 멈춰있는 것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그 역사의 순간을 보는 것 같다. 10월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신력을 채용하여 구력과 13일의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1917년 10월 혁명은 신력에 의하면 1917. 11. 7.에 일어난 것이 된다. 궁전 광장의 중앙에서 있는 높은 원기둥의 알렉산더상은 보수를 하느라고 그물망이 둘러쳐져 있다.
러시아식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러시아식은 먼저 샐러드가 나오고 다음에 국수같은 면이 나온 다음에 메인 메뉴가 나오고 다음에 차나 커피가 나온다. 표트르의 청동기마상은 표트르 대제가 탄 말이 앞쪽 다리를 번쩍 들어올리고 있는 모양의 조각상이다. 도시 곳곳이 표트르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표트르가 이 도시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거대한 황금빛 돔 형식의 이삭성당은 수리중이서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이삭성당은 1818년부터 40여 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늪지대인 이 곳에 엄청난 규모의 석조전을 짓는 것 자체가 제정러시아의 압제가 아니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성당을 피의 성당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아치형의 까잔성당은 94개의 콜린도 양식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순수한 돌이 아니라고 하여 다소 실망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가 설립했다고 하는 여성교육기관인 스몰리 수도원은 파란색이 가미되어 있어 이곳에서는 다소 이색적으로 보였다.
러일전쟁에도 참전하였고, 1917. 10. 볼셰비키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순양함 오로라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니콜라이성당을 둘러보고 국영상점이라고 하는 곳에서 스카프 몇 점과 기념품을 샀다. 러시아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쇼핑이라고 할까. 디스카운트가 안되고 일률적으로 10%를 깍아 준다고 하는데 물건값이 그리 싼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모스크바로 돌아가기 위하여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다시 가는데 길가의 경비가 삼엄한 것을 보고 알아보니 푸틴 대통령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을 통하여 온다는 것이다. 푸틴의 출신지가 이곳이니 이곳을 자주 찾는 모양이다.
저녁 7시 40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을 이륙한 불코바항공의 비행기는 1시간여 만에 다시 모스크바에 내렸다. 하루 전에 투숙하였던 코스모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호텔 지하의 나이트클럽에 들어가 봤는데 이곳 역시 보안검색을 하고 들어가도록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골든 돌에는 미치지 못한다.
8. 붉은 광장과 레닌묘
2001. 8. 16.(목)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여정이다. 아침 붉은 광장에서 레닌 묘를 보기 전에 들러 본 무명용사 묘에는 러시아 군인 2명이 부동자세로 지키고 있다. 이곳에 오기 전 김정일이 이곳에서 헌화하는 사진을 국내에서 본 기억이 있다. 사진기와 가방 등을 모두 맡기고 레닌 묘를 보게 된다.
재수가 좋아야 레닌 묘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개관시간인 10시가 가까워지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줄을 서서 들어가는데 우리는 레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관람임에도 군인들이 모자를 벗도록 한다. 군인들이 박제된 밀랍인형처럼 서 있는 곳을 따라 들어가 보니 과연 유리막 안에 살아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넥타이를 맨 채 누워있는 레닌이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다. 그리 크지 않는 키로 보인다. 이 자가 세계의 역사를 진동시키고 우리들의 삶의 일부에까지 영향을 미쳤단 말인가.
레닌 사후 80여 년 동안 계속 누워있으면서 조금씩 몸이 수축되어 알콜을 주입하여 원형을 유지시킨다고 한다. 공산주의 붕괴 후 레닌을 매장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푸틴이 살아있는 교육을 위하여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사람은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데도 어떻게 된 것인지 공산주의자들은 모택동, 호치민, 김일성 등과 같이 살아있는 모습으로 사체를 전시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래야 알 수가 없다. 러시아의 우수한 인간복제팀이 레닌을 복제하기로 하는 연구에 들어갔다는데 다시 그런 사람을 만들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레닌묘를 나와 크레믈린궁 벽을 따라 나오니 스탈린, 브레즈네프 등 역대 소련의 최고지도자의 묘와 흉상들이 차례로 세워져 있다. 구소련의 최고지도자 중 유일하게 후르시쵸프만은 이곳에 묻히지 못하고 노보데비치수도원에 따로 묻혀져 있다. 아마도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현직에서 실각된 후르시쵸프에 대한 대접의 일면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고르바초프나 옐친이 죽으면 이곳에 묻힐지 어떨지는 두고 볼 일이다.
붉은 광장에 서면 크레믈린궁과 국립역사박물관, 굼백화점, 성바실리성당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원래 러시아인은 공산주의 이념과 상관없이 붉은 색을 좋아하고 장미꽃을 좋아한다. 러시아어로 끄라스나야라 함은 붉은(red)이라는 뜻이고, 끄라스바야는 아름다운(beautiful)이라는 뜻이다. 우리들에게는 공산주의 하면 빨간색, 빨갱이가 연상되나, 러시아인에게 빨간색은 원래 아름다운 것이다. 붉은 광장은 빨간 곳이 아니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사실. 공산주의가 사라지더라도 붉은 광장은 붉은 광장일 뿐이다.
러시아 최대의 국영백화점인 굼백화점은 베이지색으로 길게 세워진 건물이다. 안에 들어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박제된 호랑이의 가격을 물어보니 미화 6,000달러라고 한다. 살아있는 호랑이 값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상당히 비싸다는 느낌이고 이런 제품은 사더라도 통관 자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붉은 광장에서 눈길을 끄는 성바실리성당은 여러 가지의 색체와 무늬를 자랑하는 여러 개의 양파형 돔 지붕의 모습인데 그 아름다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구원자의 피 성당과 견줄만하다. 이 성당은 이반 3세가 지긋지긋한 몽골의 칸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여 지은 것으로 이반 3세는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여 더 이상 이와 같은 성당을 짓지 못하도록 설계자의 두 눈을 뽑아 버렸다는 것인데 이곳도 수리중이라 제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붉은 광장을 나오는데 돈을 달라고 하는 집시들이 유독 많이 보인다.
아르바트거리로 가는 도중 들어가 본 러시아의 지하철은 100여m 지하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다는 것 뿐 전차나 내부모습이나 별다른 느낌은 주지 않는다. 어쨌든 이 지하철이 1930년대에 스탈린에 의하여 건설되었다고 하니 대단하다. 지하철역사의 벽면에는 1612년, 1812년, 1917년, 1945년을 주제로 간단한 조각이 되어 있는데, 이 해들은 러시아 역사에서 의미 있는 중요한 해이다. 1612년은 러시아·폴란드전쟁을, 1812년 나폴레옹전쟁을, 1917년은 10월 혁명을, 1945년은 2차대전 승전을 의미한다. 나폴레옹을 격퇴한 꾸투조프 장군은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 이상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서울의 대학로와 같은 아르바트거리에는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 푸쉬킨과 그 연인의 동상이 있고, 빅토르 최를 기념하는 낙서벽에는 이곳 젊은이들 몇이서 꽃을 바치고 앉아 있다. 아마 우리나라의 서태지의 팬들과 같은 빅토르 최의 팬들인 듯하다. 어제(8. 15.)가 빅토르 최의 10주기라고 하는데 그 추모 열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빅토르 최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고, 이쪽 방면에는 무식하여 버스에서 가이드가 틀어주는 빅토르 최의 음악도 잘 모르겠다.
태극기가 걸려있는 한국대사관 부근의 음식점에서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러시아정식으로 하였다. 러시아는 서울 정동의 금싸라기 땅에 거대한 대사관을 짓고 있는데 이에 비하면 우리의 대사관은 너무 초라하다. 우리나라가 러시아에게 대사관부지의 제공을 거부하자 러시아는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의 부지에 대한 고종의 땅문서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가 우리나라에게 공사관 부지의 반환을 요구하여 1,000억대의 정동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반면에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공사관 부지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기념관으로 가는 도중에 1991년 8월 24일 옐친이 대포를 쏘아 쿠데타를 진압했다는, 지금은 연방정부청사 건물로 사용되는 당시의 소비에트최고회의 의사당인 백색건물을 보았다. 당시 옐친이 의회 건물 앞의 탱크 위에서 국민들에게 쿠데타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는 장면이 국내에도 보도된 바 있다. 그 때 옐친의 정열은 대단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전쟁기념관은 141.6m의 천사의 탑을 중심으로 기념관과 광장, 사원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국립묘지도 보지 못하고 외국의 국립묘지를 보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의 전쟁기념관도 관람하지 못하고 외국의 전쟁기념관을 관람하는 맛이 개운치 않다.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는 전쟁기념관내의 침묵의 홀에는 어떤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안고 회생을 기원하는 상이 있고 엄숙함을 자아내고 있다.
러시아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레닌언덕을 거쳐 모스크바 대학 구내를 둘러봤다. 참새의 언덕으로 불리는 레닌언덕에서는 모스크바시내 전경을 조망할 수 있고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장사꾼들이 얼마나 한국말을 잘 하는지 한국 사람이 많아 다녀가는 것 같다. 러시아 전통인형 마드로슈까 2개를 샀는데 별로 크지도 않은 어미인형 속에는 무려 15개의 새끼인형들이 차곡차곡 들어가 있는데 기가 막힐 지경이다.
모스크바대학은 사과밭 과수원에 온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가로수와 숲이 사과나무로 조성되어 있다. 농약이나 비료를 할 필요도 없고 그냥 내버려도 사과가 주렁주렁 달리고 학생들이 종종 술안주로 따먹을 수 있다는데 우리나라의 개량사과와는 달리 크기도 작고 맛도 그리 좋지 않다. 본부 건물은 스탈린양식의 고딕건물이고 대학건물이 너무 위압적이라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보니 아파트 등 건설공사가 한창이고 북한대사관의 모습도 보인다. 버스에서 눈 깜작할 사이에 교통사고로 길가에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러시아를 떠나는 길에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보드카 두 병을 사고 저녁 5시 45분 모스크바를 출발하는 대한항공 보잉747기에 몸을 실었다. 보드카는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액을 따라 먹는 것이라는데 그 동안 아무 것도 모르고 소주처럼 보드카를 마셨으니 한심할 수밖에.
9. 러시아횡단을 마치며
이제 10일간의 러시아 횡단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간에 비행기를 이용한 구간이 있으나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만여km를 횡단했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러시아 여행 중에 『러시아사』 등 관련서적을 읽고 현지에서 러시아의 분위기를 느껴본 것은 나름대로 소득이다. 물론 짧은 시간에 러시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 오류도 있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80여 시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하면서 조급함을 버리고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80시간을 탔는데 모스크바에서 인천공항까지 7시간 30분의 여정은 아무 것도 아니다. 기내에서 최인호의 『몽유도원도』를 읽고 잠이 드는 둥 마는 둥 바로 영종도 상공이다.
2001. 8. 17.(금) 아침 7시 10분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신공항의 입국절차는 생각보다 신속하고 세관의 휴대품검사도 없다. 오후 2시에 있는 공사중지가처분의 현장검증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날씨는 무덥고 다시 복잡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 끝 -
첫댓글 헉.. 이젠 시베리아까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