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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규장전 |
만복사저포기 |
주제 |
삶과 죽음을 넘어선 소망과 사랑 |
삶과 죽음을 넘어선 신비로운 만남과 사랑 |
구성 |
위기와 해결이 되풀이되면서 운명과의 갈등이 더 심각하게 전개됨 |
뜻밖의 신비로운 만남 뒤에 슬픈 이별이 닥쳐옴 |
인물 |
재자가인, 진실된 사랑을 지닌 남녀 |
재자가인, 한을 남기고 죽은 여인과 사랑이 깊은 청년 |
■ 학습 활동
‘이생규장전’은 중세 전기 서사 문학의 흐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인 ‘소설의 출현’을 이해하기 위한 제재로 선정되었다. ‘이생규장전’은 김시습이 지은 한문 소설로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소설집 ‘금오신화’에는 ‘용궁부연록’, ‘취유부벽정기’ 등의 다섯 작품이 실려 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에 이 같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원초적인 설화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어온 문학사적 전통과 함께, 조선왕조의 새로운 지도 이념에 부합하는 주리론적 통치이념이 대두되자 여기에 대항하여 나타난 주기론이라는 철학 사상이 등장하였다는 사상사의 새로운 전개를 들 수 있다. 여기에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의 영향 등 외래적 요인도 작용하였다. 학습 활동에서는 이 작품이 최초의 소설로 평가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활동과 이 작품의 전기 소설적인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활동 등이 마련되었으며, 또 모둠 활동을 통해 이 작품과 같이 초현실 세계를 끌어들인 환상적인 이야기가 현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도록 하였다.
1. 서사 문학에서 갈등은 인물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흔히 인물의 욕망 충족 과정에는 그것에 대응하는 장애가 발생한다. 서사 문학에서 이야기란 곧 등장인물이 이러한 장애와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생'과 '최처녀'의 욕망은 무엇인지 말해보자.
작품의 전반기에서 이생과 최처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성취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작품의 후반기에서 이생과 최 처녀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거역하며 함께 사랑하고 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2) 두 사람의 애정 성취를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인지 말해보자.
두 사람에게 애정의 성취가 욕망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유교적인 관습에 얽매인 부모의 반대와 최 처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전쟁이다. 후반부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길이 갈려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이 장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3) 장애 요인에 대해 두 인물이 각각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아보자.
작품의 전반기에서 이생은 최 처녀보다는 소극적이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최 처녀와 결혼하려 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사회적 상황에서 이생은 가족을 데리고 궁벽한 산골에 숨어사는 대응을 한다. 후반부에서 이생은 죽은 최 처녀의 환신과 함께 살 것을 기꺼이 수용하는 대응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최 처녀의 대응은 이생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최 처녀는 이생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부모를 설득하여 결혼을 이루었다. 그리고 홍건적에게 잡혀 정조(貞操)를 잃을 뻔한 상황에서도 이생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 반항하기도 한다. 또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거스르면서 귀신이 되어 나타나 이생과 함께 살기도 하였다.
(4) 작품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당대의 선비나, 규수 유형과 비교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해보자.
이생과 최 처녀는 당대의 선비와 규수의 전형적인 상과는 달리 사회적 질서와 이념에 순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들의 사랑은 부모가 정해 준 배필을 자신의 상대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당시의 연애 관습에서 일탈적인 것이다. 이생과 최 처녀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로 자유로운 연애와 사랑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선비와 규수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5) 이러한 인물 유형을, '조신몽'에 등장하는 인물과 비교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해 보자.
'이생규장전'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계와 맞선다. 이해 비해 '조신몽'의 인물은 꿈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주어진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아가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조신은 사랑하는 여인과 애정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처님 전에 빌었을 뿐, 현실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꿈 속에서도 삶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다.
(6) 앞의 활동을 바탕으로 이 작품이 설화가 아니라 소설로 분류되는 이유를 말해보자.
이 작품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작자 자신의 현실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세계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두 사람의 애정 성취를 제약하는 장애물은 봉건 사회의 제도라든가 전쟁이나 운명과 같은 세계의 횡포이다. 두 사람은 이러한 세계의 횡포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한다. 이 작품이 설화가 아니라 소설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7)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로 엮은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현실에서 발생한 욕망을 현실에서 풀 방법이 없을 때 초현실적인 세계에서 해결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치열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현실에서 마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초현실로 사건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인 조건이 개인의 욕망을 현실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하게 하였음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8) 이 소설을 전기 구조에 따라 분석해 보자.
▷현실 : 최 처녀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
▷초현실 : 최 처녀의 환신과 재결합과 이별
▷현실 : 최 처녀를 장사지내 주고, 이생도 죽음
(9) 오늘날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있는지 찾아보고, 이러한 문화적 현상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둠별로 조사한 다음 이를 정리하여 발표해 보자.
오늘날 귀신 혹은 영혼과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는 가끔씩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사랑과 영혼', '천녀유혼'과 같은 외국 영화나. ‘은행나무 침대’와 같은 한국 영화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가 최첨단 문화를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먼저, 언제나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시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라는 점이다. 현실은 인간의 욕망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쾌락이 현실에서 허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상적으로라도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사랑이 파국을 맞은 사람이 상상 속에서 사랑의 완성을 그려 보기도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는 어느 시대에도 몽상적인 기법을 활용한 문학 작품이나 예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런 류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를 인간의 인간다움을 억압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타락해 가고 세상은 불순해져 간다. 그러나 인간은 이에 맞서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게 된다. 세상이 불순해지는 한편으로는 순수함을 추구하게 되고, 인간이 타락해 갈수록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함을 갈망하게 된다. 순수하지도 순결하지도 않은 사랑으로 인간 관계를 맺는 현실 생활의 이면에서. 순수하고 순결한 사랑을 꿈꾸는 욕망이 이러한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영화들이 ‘이생규장전’과 같이 주로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작품 읽기 ■
송도(松都)에 이(李)씨 성을 가진 서생이 낙타교(駱駝橋) 앞에 살고 있었다. 나이는 열여덟인데 얼굴은 말쑥하며 재주가 뛰어났었다. 일찍부터 국학(國學)에 다녔는데 길을 가면서도 글을 읽었다.
그 때 선죽리(善竹里) 귀족집에 최(崔)씨 처녀가 살고 있었다. 나이 열대여섯쯤 되었는데 맵시는 아리땁고 자수에 능하며 시부(詩賦)에도 뛰어났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칭찬했다.
풍류 재자 이 수재(秀才)야, 반달 같은 최 처녀야.
너희 재주 너희 얼굴, 한 번 보면 배부르다.
이 서생은 일찍부터 책을 끼고 학교에 갈 때는 언제나 최 처녀의 집 앞을 지나다녔는데 그 집 북쪽 담 밖에는 수십 그루의 수양버들이 운치있게 둘러쳐져 있었다.
이 서생은 어떤 날 그 나무 밑에서 쉬다가 문득 담 안을 엿보았더니 이름있는 온갖 꽃들은 활짝 피어 있고 벌과 새들이 그 사이를 요란하게 날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누각이 꽃숲 사이에 은은히 보이는데, 구슬로 만든 발은 반쯤 가려 있고 비단 휘장은 나지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속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수를 놓고 있다가 손을 잠시 멈추고 아래턱을 괴더니 시를 읊는다.
사창(紗窓)에 기대 앉아 수놓기도 느리구나,
활짝 핀 꽃떨기에 꾀꼴새는 지저귀고,
살랑이는 봄바람을 부질없이 원망하며,
가만히 바늘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네.
저기 가는 저 총각은 누구 집 도련님고,
푸른 깃 넓은 띠가 버들 새로 비쳐 오네.
이 몸이 화신하여 대청 안의 제비 되면,
죽림을 사뿐 걸어 담장 위를 넘어가리.
이 서생은 그녀가 읊은 시를 듣고는 자기의 재주를 급히 시험하고자 안달이 났다. 그러나 그 집의 담장은 높고 가파르며, 안채가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다만 서운한 마음으로 학교로 갔다. 그는 돌아올 때에 흰 종이 한 폭에다 시 3수를 써서 기와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져 보냈다. 최 처녀는 시비 향아를 시켜 주워 보니 이 서생이 보낸 시였다.
무산(巫山) 열두 봉에 첩첩이 싸인 안개,
반쯤 들난 봉우리는 붉고도 푸르러라.
이 몸의 외론 꿈 수고롭게 하지 마오,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陽臺)에서 만나 보세.
사마상여(司馬相如) 본받아서 탁문군 꾀어 내려니,
마음 속 품은 생각 벌써 흠뻑 깊어지네.
담머리에 피어 있는 요염한 저 도리(桃李)는,
바람에 흩어지며 고운 봄을 앗아가네.
예쁜 인연 되려는지 궂은 인연 되려는지,
부질없는 이내 시름 하루가 삼추 같네.
넘겨 보낸 시 한 수에 가약 이미 맺었나니,
남교(藍橋) 어느 날에 고운 님 만나질까.
최 처녀는 그 시를 읽고 또 읽은 후 마음 속으로 기뻐하면서 자기도 종이쪽지에다 짤막한 글귀를 적어서 담장 밖으로 던져 주었다.
“도련님은 의심치 마십시오. 황혼에 뵙기로 합시다.”
황혼이 되자 이 서생은 최 처녀의 집을 찾아갔다. 문득 복숭아 꽃나무 한 가지가 담 밖으로 휘어져 넘어오면서 간들거리기 시작했다. 이 서생은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넷줄에 매달린 대광주리가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이 서생은 그 줄을 타고 담을 넘어갔다. 때마침 달이 동산에 돋아오고 그림자가 땅에 깔려 맑은 향기가 사랑스러웠다. 이 서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오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은 은근히 기뻤으나 몰래 숨어들고 보니 모발이 곤두섰다. 그가 좌우를 살펴보니 최 처녀는 벌써 꽃떨기 속에서 시녀 향아와 함께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 서생을 보자 방긋 웃으며, 시 두 구절을 먼저 읊었다.
도리(桃李) 나무 얽힌 가지 꽃송이 탐스럽고,
원앙새 베개 위엔 달빛도 곱고나.
서생도 곧 뒤를 이어서 시를 읊었다.
이 다음 어쩌다가 봄소식이 샌다면,
무정한 비바람에 또한 가련하리라.
최 처녀는 곧 낯빛이 변하면서 말했다.
“도련님 저는 애당초 도련님을 끝내 남편으로 모셔 오래도록 즐겁게 지내려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오나 조금도 걱정함이 없는데 대장부의 의기를 가지고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뒷날에 규중의 비밀이 누설되어 부모님께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말을 마친 후 그녀는 향아를 시켜 방에 들어가서 술과 과일을 가져오게 했다. 향아가 떠나버리자 사방이 적막하며 인적이라고는 없었다. 이 서생은 물었다.
“여기는 어떤 곳입니까?”
“이 곳은 저희 집 뒷동산에 있는 작은 누각 밑입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무남독녀이므로 여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따라 이 연못가에 누각을 지으시고 시비와 더불어 화창한 봄을 즐기게 해 주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여기서 떨어진 깊숙한 곳에 계시기 때문에 비록 웃으며, 큰소리로 얘기해도 쉽게 들리지 않습니다.”
여인은 좋은 술을 따라 이 서생에게 권하면서 시 한 편을 읊었다.
부용못 푸른 물은 난간에서 굽어보고,
못가 꽃밭에서 정든 님들 속삭이네.
안개는 부슬부슬 봄빛은 화창한데,
새 가락 지어 내어 백저가를 불러 보세.
꽃그늘엔 달빛 비쳐 털방석에 스며들고,
긴 가지 잡아보니 붉은 꽃비 쏟아지네.
바람 속의 저 향기는 옷 속에 스미는데,
첫봄 맞은 저 여인은 흥겹게 춤만 추네.
비단 적삼 가벼이 해당화를 스쳤다가,
꽃 사이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어라.
이 서생도 곧 시를 지어 회답했다.
잘못 찾은 선경에는 복숭아꽃 만발이네.
하많은 이내 정회 어찌 다 속삭일꼬.
구름 같은 쪽진 머리 금비녀 낮게 꽂고,
시원한 모시 적삼 새로 지어 입었어라.
나란히 핀 꽃꼭지를 봄바람이 피워 주니,
저 많은 꽃가지를 비바람 부지 마오.
나부끼는 선녀 소매 땅 위에 살랑살랑,
계수나무 그늘 속엔 항아 아씨 춤을 추네.
좋은 일엔 언제나 시름이 따르나니,
함부로 새 곡조를 앵무새에 가르치랴.
이 서생이 읊기를 마치자 최 처녀가 말했다.
“오늘 일은 결코 작은 인연이 아닙니다. 도련님은 저를 따라 오셔서 두터운 정의를 맺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략>
한편 이생은 황폐한 들에 숨어서 목숨을 보전하다가 도적의 무리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살던 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은 이미 병화(兵禍)에 타 버리고 없었다. 다시 아내의 집에 가 보니 행랑채는 쓸쓸하고 집 안에는 쥐들이 우글거리고 새들만 지저귈 뿐이었다.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작은 누각(樓閣)에 올라가서 눈물을 거두고 보니, 완연히 한바탕 꿈만 같았다. 밤중이 거의 되자 희미한 달빛이 들보를 비춰 주는데, 낭하(廊下)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먼 데서 차차 가까이 다가온다. 살펴보니 사랑하는 아내가 거기 있었다. 이생은 그녀가 이미 이승에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으나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에 반가움이 앞서 의심도 하지 않고 말했다.
“부인은 어디로 피난하여 목숨을 보전하였소.”
여인은 이생의 손을 잡고 한바탕 통곡하더니 곧 사정을 얘기했다. <중략>
서로 쌓였던 이야기가 끝나고 자리에 드니 지극한 정이 옛날과 같았다.
이튿날 여인은 이생과 함께 옛날 개령동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금․은 몇 덩어리와 재물 약간이 있었다. 그들은 두 집 부모님의 유골을 거두고 금․은과 재물을 팔아서 각각 오관산(五冠山) 기슭에 합장(合葬)하고는 나무를 세우고 제사를 드려 모든 예절을 다 마쳤다.
그 후 이생은 벼슬을 구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살게 되니, 피난갔던 노복들도 또한 찾아 들었다. 이생은 이로부터 인간의 모든 일을 전혀 잊어버리고서 친척과 귀한 손의 길흉사(吉凶事) 방문에도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으며, 늘 아내와 함께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즐거이 세월을 보냈다.
어느덧 두서너 해가 지난 어떤 날 저녁에 여인은 이생에게 말했다.
“세 번째나 가약을 맺었습니다마는,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즐거움도 다하기 전에 슬픈 이별이 갑자기 닥쳐왔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목메어 울었다. 이생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여인은 대답했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와 낭군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악도 없었으므로, 하느님께서 이 몸을 환신(幻身)시켜 잠시 낭군을 뵈어 시름을 풀게 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산 사람을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
하더니 시비(侍婢)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는 옥루춘곡(玉樓春曲)에 맞추어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이생에 술을 권했다.
도적떼 밀려와서 처참한 싸움터에
몰죽음 당하니 원앙도 짝 잃었네.
여기저기 흩어진 해골 그 누가 묻어 주리
피투성이 그 유혼(遊魂)은 하소연도 할 곳 없네.
슬프다 이내 몸은 무산(巫山) 선녀 될 수 없고
깨진 거울 갈라지니 마음만 쓰라리네.
이로부터 작별하면 둘이 모두 아득하네,
저승과 이승 사이 소식조차 막히리라.
노래 한 가락씩 부를 때마다 눈물에 목이 막혀 거의 곡조를 이루지 못했다. 이생도 또한 슬픔을 걷잡지 못했다.
“나도 차라리 부인과 함께 황천(黃泉)으로 갔으면 하오. 어찌 무료히 홀로 여생을 보내겠소. 지난번에 난리를 겪고 난 후에 친척과 노복(奴僕)들이 각각 서로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임의 유골(遺骨)이 들판에 버려져 있을 때, 부인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능히 장사를 지내 주었겠소. 옛 사람의 말씀에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예절로써 섬기고 돌아가신 후에도 예절로써 장사 지내야 한다 했는데, 이런 일을 모두 부인이 실천했소. 그것은 부인의 천성(天性)이 순효(純孝)하고 인정이 두터운 때문이니 감격해 마지 않았으며,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였소. 부인은 이승에서 함께 오래 살다가 백 년 후에 같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어떻겠
소?”
여인은 대답했다.
“낭군의 수명(壽命)은 아직 남아 있으나, 저는 이미 저승의 명부(冥府)에 이름이 실려 있으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굳이 인간 세상을 그리워해서 미련을 가진다면, 명부의 법에 위반됩니다. 그렇게 되면 죄가 저에게만 미칠 것이 아니라 낭군님께까지 그 허물이 미칠 것입니다. 다만 저의 유골이 아직 그 곳에 흩어져 있으니, 만약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면 유골을 거두어 비바람 맞지 않게 해 주십시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미구(未久)에 여인은 말했다.
“낭군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말을 마치자 점점 사라져서 마침내 종적을 감추었다. 이생은 아내가 말한 대로 그녀의 유골을 거두어 부모의 무덤 곁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이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절개를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금오신화, 이재호 옮김>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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