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충비각(表忠碑閣)
송운대사(松雲大師) 영당(影堂)의 비각(碑閣)으로 구 표충사(舊表忠寺)의 신도(神道)인 삼강동 어귀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있는데 당초에는 삼비(三碑)라고 하였다. 비석의 정면에는 [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를 세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과 [표충사사적기(表忠司事蹟記)]를 음각(陰刻)하였으며 사방에 격자(格子)살로 에워싼 아름다운 단청비각 속에 보존되어 있다. 정면 비문의 내용은 송운의 한평생 행적(行蹟)과 함께 임진왜란 때에 빛나는 구국의 충.열을 찬양한 것으로 英祖(1724~1776)때 상신(相臣=삼정승을 일컬음)인 도곡(陶谷) 이선현(李宣顯)이 글을 짓고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이 글씨를 썼으며 영상(領相)을 지낸 지수제(知守齊) 유척기(兪拓基)가 전액(篆額=전자(篆字)로 쓴 비갈(碑碣)이나 현판의 제액(題額) 을 썼다. 뒷면에는 청허당(淸虛堂) 서산대사의 찬연한 공덕과 기허대사의 사적을 기린 글을 새겼는데, 비문은 십탄(十灘) 이우신(李雨臣)이 지었고 글씨는 사휴당(四休棠) 윤득화(尹得和)가 썼으며 전액(篆額)은 담운(澹雲) 조명교(曺命敎)가 썼다. 옆면에 새긴 [표충사사적기(表忠司事蹟記)]는 영조 때 문형(文衡)인 西堂 李德壽가 지은 것으로 비문 글씨를 주항 서명균(徐命均)이 썼고 조명교(曺命敎)가 전자(전자(篆字=한자(漢字) 서체의 하나 예서(隸書). 이후(以後)에 여러 체가 발명(發明)되기 전의 가장 오랜 서체임.)를 썼다. 이 비는 1738년(영조 14, 戊午)에 송운의 5代 법손(法孫=한 스승에게서 불법(佛法)을 이어받아 대를 이은 제자(弟子)들 )인 태허당 남붕이 표충사의 영당(影堂) 건립과 함께 추진한 사업으로 관계 요로에 건의하여 상당한 보조도 얻고 당대의 명류들을 찾아다니며 비문과 글씨를 빌었으나 같은 승가(僧家)인 합천 해인사측의 반대에 부딪쳐 많은 장애를 받기도 하였다. 그것은 해인사측이 송운의 시적(示寂=보살(菩薩)이나 높은 중의 죽음 ) 사찰에 영당(影堂=한 절의 개조, 또는 덕이 높은 중의 화상을 모신 사당(祠堂) )과 석장비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이에 맞서 온 고을의 관민은 물론 특히 유자(儒者)와 승인(僧人)이 단합하여 그 반대를 물리쳤는데, 그때 향유(鄕儒)인 자운(紫雲) 이선한(李宣翰)과 박세구(朴世矩) 등은 밀양의 유림을 대표하여 정부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남붕(南鵬)의 문도(門徒) 들이 각기 일을 분담하여 전국을 순력한 끝에 경주에서 그 석재를 구득하였으니 빗돌(비석)은 새까만 대리석이며 죄대석(座臺石)과 리수(螭首=건축물(建築物)이나 공예품(工藝品)에서 뿔 없는 용의 서린 모양을 아로 새긴 )는 화강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영정사 중인 범윤(梵玧)이 각자(刻字)와 시공을 감독하였고 4월 만인 1742년 (영조 18, 임술)에 완공하니 지상으로부터의 높이 380cm, 비신의 높이 275cm, 두깨 56cm나 되는 비석으로 그 모양이 거대하고 장중하였다. 이어 구획을 확정하여 환경을 정비하는 한편 아름다운 비각을 건립하였으며 1805년(순조 5, 을축)에 주지 경명(頃明)이 비각을 보수하여 단청을 하였는데 1807년 봄에 원임(院任)을 맡은 구연당(九淵堂) 정명(鼎馹)이 비각중수기를 남겼다. 1839년(헌종 5, 기해)에 월파당(月坡堂) 천유(天有)가 표충사의 영당(影堂)을 비롯한 사우(祠宇)를 영정사(靈井寺=표충사)로 이전하면서 표충비각으로 이름하고 이를 독자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비각 오른쪽에 쪼그마한 원당(原糖)과 그 아래쪽에 3간 요사(寮舍)를 지었으며 주위에 토담을 설치하고 남향으로 삼비문(三碑門)을 건립하여 정문으로 삼았다. 그 후 비각의 관리는 표충사 승려가 번갈아 파견되어 담당하다가 일제 때에는 허물어진 원당(願堂=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그 원주의 명복을 빌든 법당)과 요사(寮舍)를 모두 헐고 현대식 법당(法堂)과 승사(僧舍)를 새로 지어 포교당(布敎堂)으로 삼고 대처승(帶妻僧)이 기거하며 비각을 보존하였다. 광복 후에는 구연운(具蓮耘)화상(和尙=수행을 많이 한 중)이 입주관리를 맡아 여러 차례 비각과 법당을 중수(重修)하면서 환경보존을 하였으며 수십 년 동안 삼대사의 충혼(忠魂)을 받들어 왔다. 또 이 비석은 한비(旱碑) 라고도 하여 국가의 큰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 비면에 자연현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마치 구슬땀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이곳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송운대사의 영험(靈驗)이라 하여 신성(神聖)시하고 있다. 때로는 비석의 사면에서 여름날 농부의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처럼 맺혀서 며칠씩 계속해서 많은 량이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앞면과 옆면 혹은 한 면과 두 면에서만 잠깐씩 흐르다가 그치기도 하는데, 이상한 것은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좌대에서는 물기가 비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러는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 현상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비석 자체의 함염(含鹽) 현상에 기인한 것이라고도 하여 과학적인 해명을 하고 있지만 땀 흐르는 환경을 목격해 온 이곳 사람들은 그러한 과학적인 설명을 믿지 않고 오로지 송운대사(松雲大師)의 나라 걱정하는 충성(忠誠)의 영적(靈的)인 발로(發露)로서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관리를 맡고 이곳 포교당(布敎堂) 승려(僧侶)들이 근세 100년 동안에 관찰(觀察) 측정(測定)한 땀 흐른 기록을 참고삼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1894년(갑오)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기 7일 전 2. 1910년(경술) 경술국치(庚戌國恥)일 17일 전 3. 1923년(계해) 일본국동경대진재 때 4. 1945년(을유) 8.15 조국광복 14일전 5. 1946년(병술) 10. 1 폭동(暴動)사건 3일 전 6. 1948년(무자) 초대 대통령 취임 당일 7. 1950년(경인) 6.25동란 발생 23일 전 8. 1952(임진) 미국 대통령 방한 5일 전
1972년 경상남도 지방(地方)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제15호로 지정 등록되었다.
그럼 여기서 영당비 전문을 공개합니다. 이 비문은 저자 신학상의 원문 그대로를 발췌하여 전혀 본인의 가감없이 게시되었슴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
|
첫댓글 국란이 있을때 때맞춰 비각에서 땀을 흘린다는 비각.몇번 가 보았습니다만.언제 보아도 숙연해 지는 표충비각.올려주신 민석님 감사합니다.
현송님은 국사(國史)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영(英), 수(數), 국어(國語)에 치중 하다가 사무관 시험에서 국사(國史)가 필수과목으로 포함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또 한 번역사를 공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석님 수고하셨습니다.땀 흘리는 장면을 몇번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표충비각에 대한 상세한 향토사료를 수집 게재해 주신 민석님 감사합니다.수고 하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명대사..임진왜란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속에서 나라를 구한 외교관으로서..표충비각에서 땀을 흘린다는 신비의 비석그 곳에 저도 몇번 가 보았습니다..민석님! 감사합니다..
절제절명의 위기(絶體絶命의 危機)에서 나라를 구하신 또 한분 충무공 이순신에 버금갈만한 큰 인물입니다. 감사합니다.
민석님 덕분으로 표충비각에 대하여 귀한 공부 하고 갑니다.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