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리뷰, 강영환, 달 가는 길(책펴냄열린시, 2021))
얼굴의 기록
물에 젖으면 무언가가 가려지거나 드러나기도 한다. 경계가 발생하기도 하고 경계가 지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물의 표면은 희미해지면서 사라지거나 오히려 보이지 않던 것이 더 선명히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물은 다면적이다. 경계를 만들기도, 삭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이 만들어 낸 경계는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가 아니다. 이쪽과 저쪽이 숨겨지게 하거나 혹은, 스스로 숨거나 또는 드러난다. 어떤 경우는 섞이기도 한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흘러간다.
2009년 산복도로와 2014년 집산 푸른 잿빛에 이은 강영환의 세 번째 ‘산복도로 시집’이 달 가는 길이다. 이 시집의 산복도로는 물기로 가득하다. ‘출렁거리는 파도’(「옥탑방」-산복도로 102), ‘작은 욕조 속에 그대로 산다’(「용 그림-산복도로 121」), ‘눈이 젖는다’(「잃어버린 얼굴」-산복도로 135), ‘우물을 찾지 못한 낙타’(「방황 낙타-산복도로 138」), ‘골목에 나앉은 아이가 운다’(「하얀 민들레-산복도로 144」)와 같이 물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 물기는 단지 슬픔을 은유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달 가는 길은 ‘물’에 의해 숨겨진 것과 숨은 것, 죽음과 고통을 기록한다. 풍경으로 대상화된 공간으로서의 산복도로가 아닌 물기 가득한 산복도로의 이웃을 전경화 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이웃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는가가 아니라 왜 기록하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에 집중하면 슬픈 이웃들은 연민의 대상에 머물 위험에 놓인다. 굳이 니체의 연민에 대한 비판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연민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시적 기록이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저물 무렵 집을 나서는 여인은
얼굴에 다져진 그늘을 숨기기 위해
비를 막아주는 우산으로 골목을 숨긴다
굽어간 길이 먼저 젖고
우산 안에서 나비 날개가 젖는다
감추고 싶은 얼굴은
미소가 피어나는 안개 속이다
지워지지 않는 화장기 아래
웃고 있는 아픔을 누가 말하랴
사랑으로 젖어 드는 한쪽 어깨는
어제 내리던 비에 모퉁이를 돌아서 왔다
짙은 화장 뒤에서 나비는
날개에 얹힌 물방울을 털어내고
꽃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눈이 젖는다
-「잃어버린 얼굴-산복도로 135」 전문
‘저물 무렵 집을 나서는 여인’과 ‘우산 안에서 날개가 젖은 나비’는 이 시의 중요한 두 축이다. 이 두 축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여인’은 ‘얼굴의 그늘을 숨기’려 하고 ‘나비’는 ‘날개에 얹힌 물방울을 털어내’려고 한다. 숨기는 행위와 털어내는 행위 주체는 둘이 아니다. 숨기는 행위는
‘얼굴 감추지 못해 애쓰며 살아온
흔들리는 어깨가 숲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중략)
숲에서 낯익은 눈물이 몰려온다
’(「비에 젖은 풍경-산복도로 148」).
물로 감추어도 사라지지 않고 낯익은 것이 몰려온다. 이는
‘날개에 얹힌 물방울을 털어내고
꽃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눈이 젖는’
것과 같다. 물방울을 털어내도 다시 눈이 젖는다. 여기서 나비는 ‘장자가 변신한 나비가 아니’고 ‘나비가 변신한 장자가 아닌’(「나비를 줍다-산복도로 126」) 이웃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숨기려는 여인은 ‘골목을 숨긴다’. 여인은 골목이자 나비이고 이웃이다. 얼굴을 감추어도 숲에서 낯익은 눈물이 몰려오는 것과 겹친다.
이 여인과 골목, 나비와 이웃은 숨겨지거나 숨는다.
‘그늘 속으로 구부러져 가는 골목은
손 안에 감겨드는 숨바꼭질이다
뒤따라가도 곧 갈라져 숨는 길
(중략)
가야할 길도 꺾여져 숨기는 마찬가지
이웃은 숨바꼭질 속으로 길을 끌고 간
’(「골목을 따라서-산복도로 103)
공간, 숨겨지거나 숨는 공간에서 시를 쓴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보고 겪은 공간을 파고들면서 연민이 아닌 연대를 꿈꾸는 일이다.
‘어깨동무는 아니라도 나란한
두 사람이 산허리 길을 따라간다
길은 구부러져 자주 넘어지고
언덕을 숨겨가지고 있지만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고 더 가까이
숨길을 나누어 갖는
’(「두 사람-산복도로 109」)
행위, 바로 강영환의 기록은 이러한 ‘숨길을 나누어 갖는’ 연대를 꿈꾸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울어야 할 일과 그러지 말아야 할 일로/ 나뉜다면 나는 눈이 시원해지는/ 눈물이 사는 골목으로 가겠다’(「눈물-산복도로 143」)는 강한 연대 의지와 방법을 보인다. 고통에 대한 관조와 대상화는 고통을 오히려 은폐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눈물이 사는 골목으로 가’야지만 고통은 은폐되거나 삭제되지 않고 구원의 희망을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시를 쓰는, 시로 기록하는 일은 바로 고통스러운 공간과 삶을 대면하고 사유하는 일이다. 시를 통해서, 시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이 질문이 빠지면 고통스러운 공간과 현실은 관조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어진 이웃과 이웃 사이가/ 몇 겹 종이에 가려져 있다가/ 봉인된 고분마냥 발굴’(「벽지 속으로-산복도로104」)을 통해 끊임없이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꽃잎은 떨어져 돌무덤을 덮어주고/ 바람이 쓸어주고/ 꽃잎으로 떨어져 흙이 된 아가// 까치가 눈 파먹기 전에/ 애장터 드는 날짐승을 향해/ 돌아 날아라/ 어쩔거나 다 쫓을 수 없으니/ 네가 날아올라라 꽃잎처럼/ 날아가는 나비를 보고싶’(「까치고개-산복도로 106」)은 고통과 슬픔의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기를, 망각이 아니라 ‘발굴’을 통해 더 이상 ‘기록’되지 않기를, 기록되지 않아도 되는 삶과 공간을 희망한다. 어떤 것을 기록하고 드러내면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고,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꿈꾸는 것. 이것이 이웃의 얼굴을, 골목의 얼굴을 기록하고 시를 쓰는, 숨겨진 혹은 숨는 것들을 기록하는 이유이다.
이이후. 2017년 계간<ASIA>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