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불안과 차분함 두가지 감정을 사람에게 안겨준다. 보통은 전자인 경우가 많다. 도대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빛의 물도, 별빛만을 반짝이는 칠흑의 하늘도. 하지만, 곁에 사람이 있고, 그를 믿고 있다면, 후자일 경우가 많다.
지금 아첼리나의 상황은 전자라고도, 후자라고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언제나 조용히 뒤를 돌봐주는 피니언, 항상 곁에서 기분을 띄워주는 하실리아, 조용히 말없지만 일행 모두를 보살펴주고 있는 아델. 그리고 이 모두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차분한 상태는 아니다.
모두들 자고 있다. 당연하다. 자정을 넘긴 시간, 아무런 깨 있을 이유 없는 그들이 자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첼리나에게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기다란 나무를 들고, 모닥불을 뒤척여대며, 그녀는 앉아 있었다. 조용히, 한차례씩 나뭇가지를 모닥불 속에 넣었다 꺼낼 때 마다, 빨갛고 노란 불티들이 분분히 날렸다.
한참이나, 의미없는 이런 행동을 하고 있던 아첼리나는 돌연 강하게 나뭇 가지를 꽂으며 중얼거렀다.
-그렇습니다, 라고?
아첼리나는 지금 한 사내를 생각하고 있었다. 몹시 밝은 금발은 빛나는 듯 했고, 얼굴은 목석이라도 되는 듯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다. 초생달 형의 장식이 달린 기다란 지팡이를 든채 온 몸은 망토로 뒤덮고, 하는 말이라고는 예, 그렇습니다, 뿐이다.
처음에는 그의 그런 모습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그의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언젠가, 등산에 자신 없다고 하자, 무리해 가면서 까지 자신을 데리고 날아 올라 간 일. 레카르도가에 들르고 싶다고 하자 군말 없이 자신의 청을 들어준 일. 수많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구해 준 일. 얼마전 자신의 옛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일. 그리고, 마족들과의 싸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가 왜 그렇게 갑자기 입을 다물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귀찮은 사람에게 자신의 옛 이야기도 들려준단 말인가? 어째서, 자신의 의무가 아닌 수많은 일들을 해 주었으면서, 정작 별 것 아닌 몇마디 물음에 귀찮다고 까지 말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이해 할 수 없는건, 그를 생각하며 이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는 자신 이었다.
아첼리나는 그대로 뒤로 누워 버렸다. 모든 것이 귀찮은 듯, 팔을 뒤로하여 베게 삼고, 그대로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정말 내가 귀찮은걸까?.... 왜 나는 그가 귀찮아 할 정도로 그에게 말을 거는 거지?...
이 몇마디를 중얼거리며, 아첼리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이 날 이후 삼일간, 아첼리나는 고의로 베르몬을 외면했다. 말을 거는 일도, 심지어는 단 한차례 시선을 주는 일도 없이 아첼리나는 하실리아 등과 더불어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어느샌가 위다의 수도 카타를 지나쳤고, 행로를 북동쪽 미리아 호수로 향하게 되었다. 테에이산은 서쪽으로 높다랗게 솟아 있었고, 가을이 깊어감에 들판 역시 서서히 푸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10월 중순쯤 부터 각 대륙은 수확철에 접어든다. 수확기까지는 아직 보름 가까이나 남았으나, 바쁘기는 매한가지 였다. 일행이 지금 지나고 있는 들판도 많은 사람들이 농작물을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위다는 마법이 처음 부활된 곳인데, 생각보다 그리 마법사의 수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카타시에서도 그랬고....
아첼리나가 돌연 아델에게 이렇게 물었고, 아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전 마법사 조합원중 절반 가까이가 이 위다에 살고 있습니다. 일곱 대륙을 통틀어 다섯명 밖에 되지 않는 대현자중 두명 역시 위다가 고향 이고요.
아델의 말에 하실리아가 나서 물었다.
-대현자 다섯명, 어떤 사람들이지요?
-다섯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정령계 마법을 세가지나 익힌 프란체 라아하 라는 중년의 사내로, 현재 마법사 조합 총 조합장 일을 맡고 있죠. 둘째가 바로 우리 주인님이십니다. 마법사 조합 레냐부의 장 및 전체 조합 부장직을 맡고 계시지요.
이야기가 앙리에 미치자, 아첼리나는 잠시 얼굴이 침울해 졌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아델은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갔다.
-다른 세 사람의 마법 실력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가 없다고 합니다. 한명은 세니르프 르케미 로 이곳 위다 남부 대륙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한때, 프란체님을 도와 위다 마법 조합의 일을 보고 있었는데, 나이를 핑계로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나이가 다섯중 가장 많아 저보다 열살은 더 많지요. 엔하임트 운제스 는 현재 에노사의 국교인 에아의 교주 입니다. 나이를 60가량 먹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실제로 그를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실리아가 말을 끊고 말했다.
-모두들 나이가 많군요. 아첼리나의 어머니를 빼놓고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나이가 가장 어리지는 않습니다.
아델의 말에 하실리아는 놀라며 물었다.
-그래요? 누구인가요?
-음.... 이름은 라키아토 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는 마법사 조합에 들지 않은 유일한 현자 이상의 마법사 입니다. 성도 알려진 바가 없고, 이름 역시 본명인지 여부는 알 수 없어요. 나이는 아무리 많게 잡아도 30대 중반가량? 게다가 검술 실력 역시 대단하다고 합니다.
-마법검사로군요. 그런데 어떻게 검사가 대현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거죠? 게다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하실리아의 물음에 아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타고난 재능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이죠. 어떤 곳에도 속해 있는 것을 싫어해 가족은 물론, 집도 없다고 하더군요.
하실리아는 이상하다는 듯 재차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대현자 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이름 조차 알지 못하는데.... 게다가 조합에 가입한 것도 아니고.
-그건,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죠. 그는 비록 싸움을 즐긴다거나 하는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로 싸움을 피하는 성격도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악인들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그런 소문을 통해 그의 실력을 추측할 따름 입니다. 어쩌면, 단지 술법사 일지도, 아니면 프란체님 이상 가는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인된 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특히 그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주가 되어 그를 5대 대현자 위치에 올려 놓았습니다.
-대단하군요....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요.
아델은 하실리아의 말에 한차례 미소를 띌 뿐이었다.
아첼리나는 곁에서 줄곧 듣고만 있었다. 어려서 부터 익히 들어온 이야기여서인지 그리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시선은 베르몬의 뒷모습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록 고의로 그를 외면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의 였다. 하루에 몇차례라도 그의 곁으로 달려가 말을 걸고 싶었고, 또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였다.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귀찮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될까 두려워서,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첼리나는 뒤를 돌아 피니언에게 말을 건냈다.
-언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무얼 할 생각 이에요?
아첼리나의 돌연한 물음에 피니언은 곧바로 대답을 못한채 되물었다.
-무슨.... 무얼 말인가요? 아가씨.
피니언이 되묻자 아첼리나는 별 실없는 것을 물었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얼버무렸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보다, 세첼타에서도 한창 추수준비에 바쁘겠죠? 농사가 잘 되었어야 하는데....
-잘 됐겠죠. 본래 레냐는 농작물이 잘 자라잖아요.
-올해 수확제에는 참가하지 못하겠군요....
아첼리나의 시무룩한 목소리의 이 말에 피니언은 더 이상 대꾸치 않았다.
아첼리나는 노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다. 수확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아첼리나는 귀족임에도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떠들며 놀곤 했다. 아첼리나의 부모님이, 라아나가 태어난 후, 혹시 사실일지도 -이미 사실이 된- 모르는 가혹한 운명을 생각하며 아첼리나를 자유롭게 키운 탓이었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됐건, 아첼리나는 벌써 3년째 축제의 여왕이다. 세첼타시의 수확제가 시작된 이래로 삼년이나 연속으로 여왕 자리에 등극(?)한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라 한다.
올해 수확제에는 참가 못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쓸쓸함이 담겨 있음은 누구보다도 피니언이 잘 알고 있었다.
아첼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참. 라아나에게, 내 뒤를 이어 여왕 자리에 오르라고 말해 두었어야 했는데. 내가 없는 지금, 그녀는 당당히 마을 최고의 아가씨 자리에 오를 수 있을텐데.
농담기 잔뜩 섞인 그녀의 이런 말 조차도,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만약 작은 아가씨가 대회에 참가했었다면, 아가씨는 그리 쉽게 수학제 여왕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껄요?
피니언은 부러 밝게 아첼리나의 말을 받았다. 일순 그녀는 하실리아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 듯 싶었다.
평소 진지한 편이던 피니언의 농담에 아첼리나는 살짝 웃어보였다.
-글세요? 혹시 언니가 참가했더라면 몰라도, 라아나는 아직 어려요.
-제가 어디 두 아가씨들의 상대나 되나요?
-무슨? 마을 아저씨들의 말에 의하면.... 아니, 말하면 않돼.
아첼리나는 하실리아의 말에 무슨 말을 꺼내려다 멈추었고, 피니언은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마을 사람들의 말이라니요?
피니언의 물음에 아첼리나는 헤 웃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않돼요.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피니언은 우리 마을의 장미인걸. 가시가 유난히도 매서운....
피니언은 아첼리나의 마지막 이야기에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본래 아버지와 이렇다할 정을 쌓지 못한 그녀였고, 그런 아버지가 일찍 죽어 버린 후로는 버려졌다는 느낌에 증오에 가까운 마음을 가졌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그런 마음은 점차 누그러 들었으나, 여전 정을 표현하고 받아 들이는 대에는 몹시 서툴렀다. 그녀가 사심없이 웃어 줄 수 있는 사람은 겨우 아첼리나나 라아나 정도였다.
-아가씨, 그런 쓸 때 없는 이야기나 하는 사람과는 상대하지 마세요.
피니언은 별다른 역양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으나, 아첼리나는 한귀로 흘려 들어 버렸다.
아첼리나는 다시 한차례 베르몬을 바라 보았다. 여전 그는 단 한차례도 뒤돌아 보지 않고 있었다.
꼬박 닷새를 걸어, 일행은 미리아 호 북쪽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미리아호는, 대륙 전체에서 가장 큰 호수였다. 둘레만도 120여 휴하(1휴하는 약 1 킬로미터)에 이르렀고, 가장 긴 너비는 50 휴하나 되었다. 전체적인 모양은 남북으로 긴 세모꼴을 하고 있었고, 호수 주변에는 유난히 숲이 울창했다.
수원은 테에이산에서 흘러오는 미리아 강이고, 호수의 물은 남북으로 갈라져 각각 동북, 동남으로 흐른다. 동북으로 흐르는 강의 이름은 세노테로, 카노 평야와 카세 평야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남으로 흐르는 강은 세소테로, 카세와 카타 평야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날이 이미 저물어, 일행은 미리아 호수의 풍경도 감상치 못한채 호수 주위의 숲 동쪽의 한 작은 마을에서 묶었다. 라카라는 마을로 별달리 특별한 것 하나 없는 그런 마을 이었다.
그간, 베르몬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본래, 누군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한, 거의 입을 열지 않는 그이기에, 그리고 그런 그에게 아첼리나가 입을 다물어 버렸기에, 말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그런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첼리나는, 나날이 우울해져 갔다. 겉모습은 오히려 조금 쾌활해 진 듯 싶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그와 베르몬이 걷는 거리는 언제와 마찬가지로 두 세 걸음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그 전과 비교해 배나 더 멀어져, 아첼리나는 이제 베르몬에게 말을 걸 용기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아첼리나는 하실리아와 별 내용 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피니언과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입을 열어 말을 할고,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첼리나는 베르몬과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이렇게나 큰 고통일줄은 생각하지도,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대답도 해 주지 않는 그에게 그렇게나 이것 저것을 묻던, 그런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막상 그와의 대화가 끊어져 버리자,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려왔다.
하루에 몇차례나 입을 열어 그에게 말을 걸려 했으나, 막상 무미하고, 그가 말했듯 단지 의무일 뿐인 상투적인 몇마디 말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었던 것은, 그녀로써는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비록, 얼마전 집에 들렸을 때 몹시 힘든 시간을 보냈으나, 마음의 고통 한가지만을 놓고 이야기 한다면, 지금이 훨씬 더한 것 같았다.
누가 정하지도 않았으나, 언제나 그러했듯, 두 개의 방을 얻어 아첼리나와 하실리아, 피니언이 한방,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른 한 방을 사용했다. 경비가 넉넉치 않은것도 아니었으나, 처음부터 이런 형상을 띄게 되었고, 아직까지도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베르몬은 눕지 않았다. 아델은 벌써 그와 다섯달 이상이나 한 방을 사용했고, 그의 잠자는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누워 잠을 자는 경우가 없었다. 책상에 앉아 한참동안 창밖을 내다 보다가는 스르륵 눈을 감는다. 그리고, 아델이 다시 잠에서 깨 보면, 그는 지난밤 그대로 그곳에 앉아있다. 가끔 잠에서 깨어도, 그는 언제나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실지로 누워 자지 않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으나,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논리적이었다.
아델은 대강 짐을 한켠에 내려놓고, 몇몇 마법 장신구들을 풀어 놓았다. 언젠가, 마법사 대회에서 상으로 받은 벨트와, 마법력 증가의 효과가 있다는 장갑. 그외에 손자가 만들어준 조그만 펜던트. 이것은 사실 잠잘때 풀어 놓고 싶지 않았으나, 어린아이가 만든 물건인지라, 하룻밤 목에 걸고 다음날 일어났을때의 모습을 장담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풀어 놓고 잠자리에 든다.
베르몬은 그런 그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지팡이를 조심히 한켠에 세워 두고, 의자를 창가로 끌어 망토를 입은채로 단정히 앉는다. 시선은 창밖으로. 어느곳을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선의 높이는 언제나 일정하다.
베르몬은 조용히 침대에 앉아 그런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델은 60세 가까이 살았다. 그 정도 나이를 먹으면 보통, 사람의 표정을 살펴 그 사람의 기분을 어느 정도 읽어 낼 수 있다. 비록, 베르몬은 표정에 거의 변화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전혀는 아니었다. 게다가 표정 이외에 행동 따위의 그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자면, 지금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베르몬은, 나이는 200세 가까이나 됬지만, 사회적 경험은 오히려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사람들 만도 못했다. 20세의 나이에 궁에 들어가 단 둘이서만 180년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아델은 베르몬의 마음을 읽는대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아주 대강,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정도지만....
마족과의 싸움 이후, 베르몬의 기분을 최악인 듯 싶었다. 눈동자는 그전과 같이 고요하지 못했고, 몸동작도 약간은 거칠어져 있었다. 그런 그의 기분은, 아첼리나와 한차례 말다툼, 아델은 그때의 일을 말다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말다툼이 있은 이후로, 더더욱 나빠져 갔다.
-자신에게 솔직하세요. 마음을 닫는 것 만으로는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답니다.
아델은 한참이나 베르몬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베르몬은 아델의 말에 그답지 않게 과민히 고개를 돌려 아델을 한차례 보았다. 하지만, 입을 열지도, 표정을 변화시키지도 않은채 다시 전에 있던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다음날 아침.
아첼리나는 일찍 잠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그녀는 여관방안 한켠에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몸단장 하는데 사용하라는 뜻에서인지, 그곳에는 큰 거울도 놓여져 있었다.
아첼리나는 자신의 짐에서 빗을 집어들고, 천천히 머리를 빗어 넘겼다. 별 의미없는 그러한 손동작을 반복 하는 사이, 피니언이 잠에서 깨 아첼리나 뒤로 조용히 다가왔다.
아첼리나는 거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고, 피니언은 한차례 웃어 보이며 아첼리나의 손에서 빗을 집어들었다.
-빗겨드릴께요.
아첼리나는 거울을 통해 웃어 화답했다.
피니언은 천천히 아첼리나의 머리를 빗겨 주었고, 아첼리나는 그런 피니언과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흡사, 남의 일인양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첼리나는 돌연 피니언에게 이렇게 물었다.
-언니.... 제가 예쁜가요?
왠지 어린아이 같은 질문에 피니언은 풋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물론이죠. 세첼타가의 아가씨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답니다. 그리고, 아첼리나 아가씨는 역대 주인님들 중에 가장 예쁘지요.
농담반, 진담 반으로 피니언은 이렇게 답하며, 아첼리나의 웃는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기대는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아첼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다. 얼굴 가득 그늘이 드리워진채 쓸쓸히 미소지으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아마 이슬과 같은 아름다움일 꺼에요.... 이슬은.... 단지 풀잎에 맺힌 별다를 것 없는 물방울 이지만.... 곧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또 송시를 바친 것이겠지요.... 만약, 내가 아름답게 보인다면....
아첼리나의 말에 피니언은 입을 다문채 계속해 머리를 빗겨 내렸다.
잠시동안의 침묵 후, 아첼리나는 내뱉듯이 한마디 했다.
-그렇기에, 곧 사라져버릴 나 이기에, 그가 관심을 두지 않는 걸까요?...
아첼리나의 말에 피니언은 잠시 멍 해졌다. 머리를 빗기던 손을 멈추고, 아첼리나가 한 말을, 그리고 말 가운데 그, 라는 단어를 한참이나 골똘히 생각했다.
아첼리나는 피니언의 손이 멈추자 몸을 일으켰다.
-언니, 그만 됐어요. 앉아요. 내가 머리를 빗겨 줄테니까.
아첼리나의 말에 피니언은 잠시동안 잠겨있던 생각의 호수에서 몸을 빼 내며 대꾸했다.
-아니에요. 워낙 결이 좋지 않아서.... 그냥 이렇게 묶으면 돼요.
피니언은 이렇게 답하며 언제나 머리를 묶는데 사용하던 붉은빛나는 끈으로 자신의 빨간 머리칼을 묶으려 했다.
아첼리나는 그런 피니언의 손을 잡아 끌어 의자에 앉혔다.
-앉아요. 결이 좋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피니언은 못이기는척, 아첼리나가 시키는데로 따랐고, 아첼리나느 부지런히 피니언의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언니가 결혼 하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결국 그 소원은 못 이루는 군요.
피니언은 아첼리나의 이러한 말에 얼굴조차 붉히지 않았다.
-죄송해요.
도저히,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피니언을 통하자 어느정도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아첼리나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게 무슨 언니가 사과할 꺼리인가요?
하실리아는 여전 자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 만나던 때의 모습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레카르도 검술 강습소에 배겨내지 못한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늦잠자는 검사, 아마 세상에 하실리아 한명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아침 일찍 마을을 벗어난 일행은, 점심때를 조금 넘겨 미리아 호숫가에 도착했다.
-성녀십니까?
40세 가량? 복장은 어부의 그것에 가까웠고, 그의 집 역시 그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어부였다.
비록, 이 미리아호수가 호수라고는 했지만, 그 크기가 엄청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기잡이를 해 생계를 꾸려 가고 있었다. 바닷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여 마을을 이루지 않고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 역시 그러한 어부들중 한명인 듯 했다.
어부는 허리를 깊숙히 숙여 아첼리나를 향해 인사했고, 아첼리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예를 다해 인사를 받았다.
-프리시아님의 땅에 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 프리시아님의 신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키타이트 프리시아 라고 합니다.
아첼리나는 그의 말에 살짝 웃어보이며 일행을 소개했다. 이곳에만 박혀 세상을 등지고 사는 듯, 파소가 조차도 모르는 사람 이었다.
-모두들 어서 집 안으로 드십시오.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나무로 지은 판자집으로, 중간 기둥을 중심으로 부엌과 거실, 방을 나누어 놓았을 뿐이다.
집에는 아첼리나보다 한두살쯤 어려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어려서 부터 그녀의 아빠와 고기를 잡아서인지, 몹시 건강해 보였다.
그녀는 아첼리나를 보자 역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요.
그 소녀는 아첼리나의 말에 환히 웃어보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시이라 프리시아라고 해요.
그때, 키타이트가 아첼리나에게 물었다.
-잠시 쉬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아첼리나는 한차례 고개를 가로 저었고, 키타이트는 곧바로 베르몬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베르몬은 대답을 하는 대신 걸음을 옮겨 비좁은 집안에서 빠져 나왔다.
아무말 없이 밖으로 향하는 베르몬의 뒷모습을 보며 키타이트는 시이라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시이라, 잠시 어머님땅의 분과 성녀를 궁 입구로 안내해 드리고 올테니, 그동안 이분들께 마실거라도 내어 드려라.
-네, 아빠.
시이라는 키타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갔고, 키타이트는 곧바로 걸음을 옮겨 베르몬과 아첼리나를 안내했다.
프리시아궁의 입구는 꽤나 평이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저 숲안 어느 커다란 바위의 틈 사이에 있는 동굴로, 지금까지와는 달리 누구나 접근 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키타이트가 입을 열었다.
-이곳입니다.
아첼리나가 물었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입구가 방치 되어 있으면.... 않좋지 않나요?
아첼리나의 말에 키타이트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수신사들과 성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 장소에 도달 할 수 없답니다. 이 주위에는 괴이한 결계가 쳐져 있어 사방 40휴리하(1휴리하=약 1미터) 정도의 공간이 외부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아첼리나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땅의 분이시여, 어서 성녀를 안내 하십시오.
베르몬은 그의 말에 살짝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더니 앞장서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아첼리나 역시 그를 따라 안으로 향했다.
동굴안은 몹시 깊었다. 다행히, 베르몬이 마법으로 빛의 구를 만들어 길을 밝혀 걷는데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언제나 그렇듯, 이런 동굴은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아첼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서운 감이 일어 베르몬 뒤로 바짝 붙어섰다. 한참을 그렇게 걷던 도중, 아첼리나는 돌연, 이 안에 자신과 베르몬 둘 뿐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었다. 베르몬은 평소 거의 말이 없다가도 자신과 단 둘이 되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아첼리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베르몬님....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요.
묵묵부답. 하지만, 아첼리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제가 싫은가요? 정말 귀찮은가요?
베르몬은 여전 입을 열지 않았고, 아첼리나는 베르몬의 지팡이를 집지 않은 팔을 잡으며 말했다.
-확실히 대답해 주시기 전에는 한걸음도 옮기지 않겠어요.
베르몬은 아체리나의 약간은 대담한 행동에 약간 당황한 듯 했으나, 끝까지 한차례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옮기지도, 억지로 팔을 잡아 채지도 않았다.
-왜죠? 왜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닫아 버린거죠? 정말 제가 귀찮아서인가요? 귀찮았다면, 왜 그렇게 저에게 잘해준거죠? 의무라는 핑계는 대지 말아요. 의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쯤은 저도 알 수 있으니까요.
-의무 였습니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그이 목소리인가. 아첼리나는 그가 입을 연 것에 용기를 얻어 계속해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의무라면 어째서 베르몬님의 과거 이야기를 해 주셨던 거죠? 왜, 왜.... 신의 구슬을, 내 운명을 깨 주겠고 말해주셨던 거죠? 이런 것 까지 의무는 아니잖아요.
-성녀를,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안정되게 하여 켈리시온님의 신전까지 무사히 호송하는 것, 그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베르몬이 이렇게 말하자, 아첼리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첼리나가 입을 다물자, 베르몬은 그제서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첼리나는 한걸음을 크게 내딛어 베르몬의 팔을 다시 잡았다.
-그럼, 어째서 사에이시온님의 궁에 갈 때, 산 아래서 부터 힘들게 저를 그런식으로 산 위까지 데려다 주신거죠? 그건, 제가 육체적으로나 건강적으로 불안정하게 되는 것이라는 관계 없을텐데요.
-판단을 잘못 내렸었습니다.
베르몬은 또다시 건조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고, 아첼리나는 다시 말 할 거리를 찾았다.
-또.... 또.... 어째서....
하지만, 베르몬이 조금 전과 같이 답한다면, 그녀로써도 반박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더듬거리기만 할 뿐, 아첼리나는 적당히 말할 꺼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개숙인채 생각에 잠기던 그녀는 돌연 한가지를 생각해 냈다.
-제가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머물게 할 의무를 가지고 계시면서, 제가 귀찮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신거죠?
베르몬은 그녀의 말에 잔인하리 만큼 곧바로 답했다.
-성녀의 물음에 솔직히 답하는 것 역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베르몬의 말에 아첼리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어느새인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요? 지금까지 베르몬님이 제게 해주셨던 모든 배려가.... 모두 의무였기 때문 이었단 말인가요? 정말 단지 의무 때문이었단 말인가요? 나는.... 나는 베르몬님이 저를 특별히 대하고 있다고 생각 했어요. 모두의 물음에는 관심조차 내보이지 않다가도, 제가 물을때는 간단하나마 대답해 주던 것이, 저에 관한 작은 일들과 지나가며 내뱉었던 말 까지도 모두 기억했던 그런 베르몬님의 모습이, 그리고 그런 것들을 기억해 배려해 주시던 그런 것들이.... 정말 이런 것들이 의무감 때문이었나요?
베르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렇게 변한 건가요? 그때, 그 마족들에게 패해 다친....
아첼리나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었다. 돌연 베르몬이 뒤돌아 서더니 입을 열었다.
-패하지 않았습니다.
아첼리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금방이라도 흘러 넘치려던 눈물도 한 번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를 뿐, 더 이상 솟지 않았고, 슬픔에 떨리던 몸이 순간 경직됬다.
-예?....
아첼리나는 엉겁결에 이렇게 되물었고, 베르몬은 다시 한차례 천천히 말했다.
-패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당신들은 내가 패했다고 생각 하는 거지요? 왜 모두들 나를 동정하는 거지요?
베르몬은 일단 입을 열자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이 하나, 둘 터져 나왔다.
베르몬은 결코 아첼리나를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때, 자신의 운명도 모른채 설쳐대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180년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베르몬은 처음 신전에 끌려가듯 들어갔다. 비록 그곳에서 자신을 끌고 온 상대가 악의를 품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으나, 사랑하는 모든 것들로 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자신을 그곳으로 데려온 38대 수신사는 바로 그곳을 떠났고, 베르몬은 39대 수신사에게 그 증오를 전이 시켰다. 수신사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이런 운명을 안겨준 신 역시도 그가 증오하는 대상 안으로 포함 되었다.
그는 본래 환영왕의 신관이였다. 그가 전에도 말했듯, 환영왕은 현세류왕 시온 다음으로 태어난, 신도 마도 아닌 존재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가 테미시아의 눈밖에 나 몸을 하나의 존재로 묶어주는 결정을 파괴당하였고, 그대로 세상에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베르몬은 환영왕의 신관 이기에 당연히 환영왕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다. 하나는 샤이튼 이라는 것으로, 증폭마법 이었고, 또 하나는 데스틴 더 비 라는 것으로 캐릭팅 마법(속성화 마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 둘 모두 세 마족과 싸움을 벌릴 적에 사용했었다. 데스틴 더 비 는 처음 지팡이에 사용했던 검은 기운 이었고, 샤이튼의 경우에는 플레임 스피어와 함께 사용 했었다. 하지만, 데스틴 더 비는 빛의 속성을 가진 테미시아의 지팡이와의 반발 때문에, 그리고 후자의 것은 상대가 막는 바람에 제 위력을 발휘치 못하였다.
아무튼, 그가 이렇게 어두운 마법을 익힌 덕에, 신전에서 신계 마법을 익힐적에, 그는 배나 힘을 들였다. 그러나 그는, 전대 수신사에게 복수 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마법을 익혔고, 그렇게 20년 가량 마법을 익혔을 때, 전대 수신사의 능력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강해진 데에는, 그가 열심히 한 탓도 있지만, 현세류왕 시온이 주관하는 허무의 마법과, 환영왕 엘디마이어가 주관하는 혼돈의 마법이 상호 작용을 일으킨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복수에 대한 감정은 누그러들었다. 만약, 전대 수신사와 격리된채 였더라면 복수심을 키워 갈 수 있었겠으나, 20년을 한결같이 성심껏 대해주는 그의 모습에 베르몬은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를 죽일 경우, 일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먼저, 황금용, 마이다티아가 걸렸다. 용은, 그것도 4000년이나 산 용은 인간과 비교할 수도 없는 힘을 지녔다. 그뿐만 아니라, 수신사는 분명 신을 모시는 자로, 그런 그를 죽였다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 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그는, 복수는 단념해 버렸지만, 그렇다고 증오심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과 말에 몹시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렇게 180년간을 지내던 사이 어느덧 그쪽이 더 편하게 되어 버렸다.
그는 이런 이유로 신 마저도 증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과 똑같이 신의 횡포에 피해를 입은 아첼리나에게, 그는 커다란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갈수록 커지고, 또 그 궤를 바꾸어 갔다. 동정 내지 연민으로 시작한 감정은, 사랑, 혹은 그와 비슷한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감정에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180년간의 그런 생활에 그의 심성을 몹시 왜곡되게 만들었다.
마족과 싸움에서 패했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가 받은 이 심적 충격은 육체적 상처 따위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환영왕의 신관은, 그리고 환영왕을 섬기는 사람들은 아주 철저히 마족을 무시해 왔다. 그것은 첫째로, 환영왕이 마왕으로 불리우는데 대한 반발심리에서였고, 둘째로는, 실제 환영왕의 마법은 마족과도 겨룰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환영왕을 섬기는 사람중 우두머리격인 신관이었다. 그런 자신이 마왕의 혼도, 혼의 수하도 아닌 혼의 수하의 신관, 장군 따위에게 당했으니, 이것은 그에게 있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이런 생각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비록, 마왕의 수하의 부하이고, 마족중 중상 클래스에 속하는 존재이기는 했으나, 결코 인간이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베르몬이 지난번 아르르망을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현세류왕의 마법이 원래 강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그 일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자괴심이 일기 시작하며, 주위 사람들의 반응 모두를 왜곡되이 받아 들이기 시작했고, 평소 자신이 가장 많은 관심을 쏟고 있던 아첼리나의 말과 행동의 경우에는 좀더 민감히 반응했다.
그는 방금도 말했듯이, 자신이 마족에게 패한 것을 모두가 동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마족과 그렇게 까지 싸운 사람을 동정 하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의 사고 속에서는 중상급 마족도 이길 수 없는 환영왕의 신관은 한심한 존재였다.
-동정 같은건 하지 않아요.
-글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행동은 이미 저를 동정하고 있습니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의 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어쩌다 그가 이런 오해를 했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그건 오해에요. 도대체 누가 마족가 싸워 상처입은 사람을 동정하겠어요? 정말이지, 베르몬님의 실력에는 경탄해 마지 않고 있어요.
아첼리나는 패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베르몬이 싫어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베르몬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아첼리나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아첼리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왜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그마한 희망이 보였다. 그가 자신을 귀찮다고 한 말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베르몬님. 싸움에서 패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게다가, 그때에는 우리가 곁에 있었잖아요. 그 마족들도 자신들의 입으로 이야기 했어요. 우리를 인질로 잡지 않고는 베르몬님을 이길 자신이 없다고.
베르몬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나, 아첼리나는 계속해 말을 했다.
-그때, 베르몬님이 상처를 입었을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그리고, 그 후 제 말에 아무 대꾸도 해 주지 않아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아세요?
아첼리나는 혼자 여기까지 말한 후, 괜히 부끄러워져 얼굴이 조금 붉어졌으나, 베르몬은 앞서 걷고 있어 그런 아첼리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첼리나는 한참이나 얼굴을 붉힌채 그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아첼리나가 다시 몇마디 말을 하려는 순간 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은은한 보랏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분위기는 왠지 나투이시아 신전과 비슷했다. 커다란 호수가 있었고, 그위로 돌로 된 길이 하나 놓여 있었다. 사방벽은 모두 은은한 보라빛 나는 반짝거리는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덕에 물빛까지 보라색으로 보였다.
아첼리나는 방금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잊어 버린채, 한 번은 바닥과 깊은 호수를 바라보았고, 다시 한 번은 베르몬의 뒷모습 너머에 있는 신전을 바라 보았다.
다른 신전 모두가 그러했듯, 이 신전의 모습 역시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통 남성신의 것이 날카롭고 단단했다면, 여성신들의 것이 섬세하고 우아했는데, 이 프리시아의 신전은 그런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었다.
베르몬을 따라 잠시동안 넋을 놓다시피 걷던 아첼리나의 앞을 막아서는 거대한 보랏빛 물체가 있었다. 흰빛에 가까운 보라색의 비늘과 진한 보라색의 갈기를 가진 용으로, 아마 이 신전의 수신수인 모양 이었다.
용은 몸을 깊히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입을 열지 않은채 말을 했다.
-성녀시여. 프리시아님의 땅에 오신 것을 환녕합니다. 이곳을 지키는 아스테리아라고 합니다.
아첼리나는 용에게 조용히 답례했고, 아스테리아는 곧이어 베르몬에게 말했다.
-어머니땅의 사람이여 어서 성녀를 안으로....
베르몬과 아첼리나는 용의 말을 따라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고, 이내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신전 밖의 모습이 천양지차였던것에 반해, 이 안의 모습은 대게가 비슷했다. 다른 것은, 겨우 천정과 지저를, 사실 천정이라고, 지저라고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곳을 꿰뚫는 광주光柱의 수, 그리고 신전 안으로 발을 들여 놓자 마자 밟게 되는 반투명 바닥의 빛깔 정도 였다.
바닥의 빛깔은 은근한 보라색이였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바닥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기둥의 개수는 세개였다.
-희망. 행운. 그리고, 타인으로 부터의 분리 입니다.
베르몬의 말이었다. 아마 눈앞에 솟아있는 세 기둥이 의미하는 바 인듯 했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의 말에 몹시 즐거웠다. 자신이 묻기도 전에 대답해 준 것이다. 이건 그에게 있어 몹시 예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아첼리나는 왠지 희망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을 바라보았고, 베르몬 역시 때맞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얼 해야 하는거죠?
-세개의 기둥, 그리고 어둠속을 울려퍼지는 빛의 방울. 이것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걸음 앞으로 향하며 처연히 이 말을 내뱉었다.
-드리시온님의 신전이였더라면.... 더 격에 맞았을텐데....
몇걸음 옮기지 않아 기둥들 사이에 도착 할 수 있었고, 아첼리나는 그곳에서 방울과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베르몬이 방울 이라고 미리 이야기 했기에, 그녀는 그것이 방울인지 알 수 있었으나, 만약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전혀 알 수 없을뻔 했다. 투명한 구체에 여러 기괴한 장식이 달려있고, 그나마 방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인지, 그 구체 안에는 또다른 투명한 구슬이 들어가 있었다. 잡고 흔들면 분명 소리는 날 듯 싶었지만, 그렇다고 방울을 떠올리기에는 보통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첼리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방울을 만졌다.
왠지 꽤 오래간만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레냐 대륙의 현세류왕 신전 에서는 이런 느낌만의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았었다.
포근한 느낌이었다. 자극적인 보라색이 아닌, 옅은 그리고 환한 보라빛이여서 느낌이 아주 좋았다.
-봉인을 맡은 자인가요?
-예.
목소리는 경쾌했고, 듣고 있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 했다.
-몹시 우울하군요.
느껴져 오는 목소리에 아첼리나가 대꾸했다.
-네.... 우울해요.
-왜죠?
상대의 물음에 아첼리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잘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그리고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게 왜 우울해야 할 일이죠?
-글쎄요.... 좋아하는 모든 것들과 헤어져야만 하니까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요?
-예.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많은 우리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리테가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피니언 언니, 그리고 마을 사람들.... 저는 이 모두를 좋아해요. 그리고....아침에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내 이 두 뺨을 스치는 상쾌한 바람도, 조용히 하늘위를 떠가는 구름도, 밤하늘 무수히 빛나는 별도, 그리고 달도, 또.... 봄이면 들판을 아름답게 수놓는 꽃들도.... 이 모든 것들을 좋아하고, 또 사랑해요.
-좋아하는 것이 아주 많군요.
상대는 아첼리나의 말에 활달히 답했다.
-그런가요?....
-희망과 행운, 그리고 타인으로 부터의 분리라는 이 세가지 감정을 주관하고 있는 자,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리시아님 이시군요.
상대가 자신을 소개하자, 아첼리나는 공손히 이렇게 대꾸했고, 상대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맞아요. 저와 드리시온님은 한가지 모습의 두가지 면을 다루고 있는 존재에요. 그를 이해했다면, 나 역시 이해한 것 이지요.
프리시아의 말에 아첼리나가 말했다.
-하지만,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어요. 타인으로 부터의 분리, 라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
-희망 같은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은가 보군요.
프리시아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런 말을 했고, 아첼리나는 처연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저와는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에요. 고작 6개월도 남지 않은 제게 희망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벌써, 드리시온님의 이야기를 잊었군요. 절망은 희망을 부른답니다.
프리시아의 말에 아첼리나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수긍하지도 않았다.
-타인으로 부터의 분리에 대해 물었죠?
프리시아는 더 이상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화제를 아첼리나의 질문으로 옮겼다.
-예.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은 존재하나요?
프리시아의 물음에 아첼리나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었다.
-음.... 물론 그렇지만....
-앞서 제 물음을 예상할 필요 없어요.
프리시아의 말에 아첼리나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프리시아의 말 그대로, 아첼리나는 그녀가 앞으로 할 질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었다. 신의 의도를 추측하는 것은 분명 불경에 속할 것이었다.
프리시아는 다시 질문을 했다.
-무엇으로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 물음 아체리나가 예상했던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세상을 볼 수 있고, 또....만질수 있고, 이야기 할 수 있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것과 어떻게 다르죠?
-예?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의 기억을 가지고 있나요?
프리시아의 물음에 아첼리나는 돌연 무언가를 깨닳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기 자신은 알 수 없었다. 프리시아의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던때의 기억이 있어, 그때와 비교해 존재 여부를 알 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밖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제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건가요?
-그건 나도 모른답니다.
프리시아의 말에 아첼리나는 놀랐다.
-모른다니요?
-나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로 존재시와 존재하지 않을 때 모두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이 존재하고 있는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방법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없답니다.
-....
아첼리나는 신들 역시 그런 것을 모른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것을 아는 존재는 이 세상에 셋 뿐이였습니다. 지금은 어머님 한분만이 남았지만....
프리시아의 말에 아첼리나는 얼른, 테미시아와 시온을 떠올렸다. 하지만, 제 삼의 존재는 얼른 떠올르지 않았다. 그러던중, 돌연 베르몬이 해 주었던 이야기에 생각이 미치었고, 제 3의 존재가 환영왕 엘디마이어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모두 알고 있군요. 인간으로선 드문 일인데.... 하지만, 그것은 절대 입밖에 내서는 않돼는 일입니다. 어머님의 분노를 사게 되니까요.
프리시아는 아첼리나의 생각 하나 하나를 모두 읽고 있는 듯 싶었다.
-그런데, 그것과 타인으로 부터의 분리와 무슨 상관이죠?
아첼리나는 잠시 후, 이렇게 물었고, 프리시아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존재한다고 느끼고 있지요. 왜 일까요?
-그야.... 그렇지 않다는 증거 역시 찾을 수 없잖아요. 그리고, 다른 존재물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런 그들을 만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요. 그런것들로 추측할 뿐이죠. 그리고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대에는, 나 이외의 존재들이 반드시 필요하죠.
-그것이 타인과의 분리라는 것이 필요한 이유인가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아첼리나의 물음에 프리시아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선후가 바뀐지도 몰라요. 타인과의 분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스스로가 스스로이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아닌 것이 필요 하답니다. 아와 피아의 구분, 그것이 바로 타인과의 분리 입니다.
아첼리나는 프리시아의 말을 듣고 한참을 고개숙여 생각한 끝에 이렇게 한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했을까요? 꼭, 다른 존재와 헤어져 지내야 했을까요?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더라면.... 내가 죽는일 따위도 없을텐데....
프리시아는 그녀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어머니의 뜻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와 피아의 개념의 무의미성을 깨닫고 존재하지 않는 바로 돌아간 분이 시온님 이시지요.
-아....
아첼리나는 이렇게 탄성을 내 뱉었고, 프리시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봉인을 맡은자여. 그리 슬퍼하지 마세요. 존재 저편에 가 본 존재는 아무도 없답니다. 그곳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미리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답니다.
아첼리나는 그런 프리시아의 말을 들으며, 쓸쓸한 미소와 함께 그 공간을 빠져 나왔다. 언제나 그러하듯, 신들의 말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베르몬은 언제나 처럼 그런 그녀를 안내해 신전을 벗어났다.
아스테리아와 간단한 인사를 작별 인사를 나누 후, 아첼리나는 베르몬과 함께 다시 신전 입구로 향했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을 따라 올라가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 신들과의 대화 이후에는 생각할 것이 많았다. 게다가, 베르몬에 관한 것들도.
그렇게 한참을 올라 입구가 어렴풋이 보일 때쯤 이었다. 아첼리나가 돌연 걸음을 멈추며 베르몬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베르몬님. 제게 두가지 약속을 해 주세요.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이 걸음을 멈췄다.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뒤를 돌아 보는 것이 조금전 아첼리나의 말에 어느정도 마음이 누그러든 모양 이었다.
-첫째로는.... 음, 절대 마족에게 패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게다가 공정한 싸움이 아니었잖아요.
아첼리나는 그와의 사이에 있던 모든 껄끄럽지 못한 감정이 마족들과의 싸움 이래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한차례 더 못밖아 둔 것이었다.
-둘째는, 앞으로는 절대 저를 피하거나 제게 차갑게 대하지 마세요. 그 의무라는 말도 하지 마시고요. 고의로 상냥하게 하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전과 같이 대해 주세요. 요 며칠 사이에 제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잘 모르실 꺼 에요.
아첼리나는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 정도로, 그녀는 남녀관계에 숙맥이었다. 거의 애정고백에 가까운 이런 말을 흡사 먹을 것을 요구하기라도 하는 듯 자연스럽게 내뱉은 것이다. 본래가 남녀 관계에 있어 밝지 못했던 데다, 생사까지 도외시한 지금 이런 것이 대수이겠는가?
베르몬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알겠다는 듯, 고개를 한차례 끄덕여 보였다.
베르몬의 이런 대답은, 아첼리나에게 있어서 아릅답게 꾸며 호언장담하는 여느 사람들의 말보다 백배는 더 믿음직스러웠다.
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첼리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키타이트와 베르몬의 뒤를 따라 일행에게로 돌아왔다.
-날이 저물었으니, 저희 집에서 하룻밤 묶었다 가십시오. 성녀께는 저의 딸의 방을 그리고 수신사님과 리테가의 분께는 제 방을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집 근처에서 야영을 하겠어요. 노숙이 이제는 몸에 익어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키타이트의 말에 아첼리나는 이렇게 답했고, 키타이트가 곧이어 겸양했다.
-아닙니다. 수신사들은, 아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성녀께 충심을 다해야 합니다. 성녀를 위해서는 목숨마져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우리 수신사들에게 하룻밤 잠자리 쯤이야 별것도 아닙니다.
아첼리나는 키타이트의 이런 태도에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우리는 밖에서 자겠어요. 목숨은 바치기 쉬어도 말은 따르기 힘든가요?
키타이트는 그제서야 아무말 없이 아첼리나의 말을 따랐고, 아첼리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드려요. 대신, 내일 아침이나 맛있게 차려 주세요.
밤이 되어, 호수는 조용하고 잔잔해 별을 비추어낼 정도였다. 천계의 셀 수 없는 별들과, 그마만큼의 별이 잠기어있는 호수를 바라보며 일행은 조용히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호수는 또다른 모습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덮었던 이불은 이슬에 온통 축축해졌고, 호숫가의 초목 가지하나 이파리 하나에 까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안개는 자욱하니 있어, 반대편은 물론이거니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숫가의 괴석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면에서 피어오르듯, 수면위를 흐르듯, 뿌옇게 호수와 숲 그리고 일행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일행은 한참이나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산위에서 내려다 볼때의 웅장함도, 내리치듯 떨어져 내려오는 폭포와 폭포수를 바라볼때의 굉장함도,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볼때의 압도적인 모습도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는 모습은 흡사 어머니 품에라도 안긴 듯, 타지에서 한참만에 고향에 들린 듯, 그러한 느낌을 일행에게 안겨주었다.
-정말 좋은곳에 살고 계세요.
때마침 나온 시이라를 향해 아첼리나가 이렇게 말했고, 시이라는 웃으며 아첼리나의 말에 대구했다.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키타이트님은요?
-일찍 고기잡으러 나가셨어요. 그보다,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셨나요?
시이라의 물음에 아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어요.
그때, 찌꺼덕 거리는 노젓는 소리와 함께, 물안개 사이로 어두운 물체가 어릿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나 봐요.
일행은 키타이트가 아침 일찍 잡아온 물고기로 한 몇가지 요리를 먹은 후, 일찍 다시 여행을 나섰다.
미리아호에서 노마티아로 가려면, 북쪽 카노 평야를 건너 헤도콘 항으로 가야 했다.
일행은 미리아호변을 따라 천천이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 급할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으나, 조금이라도 더 이 아름다운 호수와 그 주변의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베르몬은 그런 일행의, 아니 정확히 이야기 한다면, 아첼리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걸음을 천천히 했다.
반나절 가까이 지나자, 호변과 일행의 갈 길이 각각, 동북과 서북쪽으로 나뉘었다. 일행은 아쉬운 작별을 미리아 호수에 건내며 북쪽으로 걸음을 돌렸고, 언제나 처럼 호수를 감싸고 있는 숲 사이를 지나게 되었다.
숲 중간쯤, 아니 숲을 거의 벗어날 무렵, 일행이 지나는 길 바로 곁으로, 다홍빛 나는 꽃이 한무더기 피어 있었다. 나리꽃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네장의 기다란 꽃잎을 가진 그 꽃은 언뜻 보기에도 몹시 아름다워 일행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혹시 이 꽃 이름 알아?
하실리아는 무릎에 손을 얹고 몸을 숙여 쫓을 자세히 바라보다 아첼리나에게 물었고, 아첼리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 혹시 알아요?
-모릅니다.
하실리아는 한참동안 자세히 살펴보다, 돌연 한가지에 생각이 미치었다. 가끔 우울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첼리나에게 그 꽃을 선물하면 조금 기분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었다.
하실리아는 이런 생각이 들자 지체않고, 그 꽃은 한송이 꺽어 아첼리나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약간, 화려한 꽃이여서 아첼리나의 수수한듯한 복장에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아첼리나의 자태를 어느정도 돋아 주기에는 충분했다.
-자. 선물이야.
아첼리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하실리아가 머리에 꽃을 꽂아주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왠지 창피한걸.... 하실리아 너도 꽂아줄게.
아첼리나의 말에 하실리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일행중, 공주님은 한명으로 족해. 자 어서 가자.
아첼리나는 더는 강요치 못한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베르몬의 뒤를 쫓아 갔다. 아첼리나는 머리에 꽃을 꽂는다는 행동이 유치한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부끄러워 떼어버리고 싶었지만, 하실리아의 정성을 생각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그렇게 저녁무렵 까지 걸어, 일행은 호수 북편 숲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일행은 하룻밤을 묶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첼리나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두 뺨은 붉어진채 몸에선 열이 났고, 의식이 없는지 아무리 흔들어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피니언이 깜짝 놀라 이렇게 외치며 아첼리나를 흔들었으나, 아첼리나는 끄응 하는 신음만 내뱉을 뿐, 대답이 없었다. 하실리아는 피니언 뒤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놀라 입을 다물어 버렸고, 뒤늦게 피니언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아델은 헐레벌떡, 그리고 베르몬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델은 아첼리나의 모습에 무언가 집히는 바가 있어 침대 곁으로 달려가 아첼리나의 손을 잡았다. 비록, 의학에 대해 아는바는 적었으나, 치료계 마법을 적지 않게 알고 있었기에 아델은 급히 마법력을 운용해 아첼리나 몸에서 이상한 점을 찾기 시작했다.
-아델님. 아가씨가 왜 이러시는지 아시겠어요?
피니언이 잠시 후 아첼리나에게서 손을 떼는 아델에게 이렇게 물었으나, 아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 독이라도 당하신 것이 아닌가 했는데.... 적어도 마법으로 고칠 수 있는 종류의 병은 아닌 듯 싶어.... 피니언, 어서 의사를 불러 와.
피니언은 아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잽싸게 몸을 날려 방 밖으로 향했다.
그때 베르몬이 앞으로 몇걸음 나서며 아첼리나의 이마 조금 떨어진 곳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한참동안이나 그런 상태로 정지해 있었다.
-수신사님, 무슨 아시는 바라도?
아델의 물음에 베르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베르몬이 손을 떼자 마자 아첼리나의 정신이 돌아왔다.
-아.... 여기는 어디죠?
아첼리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고, 하실리아가 앞으로 나서 답했다.
-어제 도착한 마을이야. 어때, 몸은 조금 괜찮아?
-아니.... 더워. 더워 죽겠어.... 창문을 좀 열어 줘.
아첼리나는 하실리아의 물음에 이렇게 말했고, 하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여 응 하고 답하며 창가로 향했다.
그때 베르몬이 지팡이로 그녀를 막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환자의 몸을 차갑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베르몬은 장문의 연설을 토해냈고, 하실리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히 우기지 못하였다.
그리 오래지 않아 피니언이 마을 의사를 데리고 왔다. 의사는 곧바로 아첼리나가 있는 침대로 향하더니, 아첼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첼리나 침대 곁에 놓여있던 한송이의 꽃을 바라보더니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 꽃은, 도대체 어디서 가져온거지?
그 꽃은 바로 하실리아가 아첼리나의 머리에 꽃아 주었던 것이었다.
-미리아호 북쪽 숲에서요.... 무슨 잘못 이라도?
피니언이 이렇게 되묻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것 때문이군.... 이 꽃은 암흑나리 라는 꽃이야. 이것은 평소에는 아무 독성이 없어. 보아도, 만져도 그 위에 누워 잠을 자도 상관 없지만, 꽃을 절대 꺽어서는 않돼. 이 꽃은 꺽이는 순간부터 강한 독성을 절단 부위로 내보내지. 그 독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 오지는 않지만, 그 독에 당한 사람은 독을 당한지 반일이 지나면 열이나 정신을 잃게되고, 만 하루가 지나는 순간 목숨을 잃게 돼.
하실리아는 그 말에 털썩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모두가 자신으로 비롯된 이이 아닌가.
피니언은 그런 하실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며 위로해 주었고, 곧바로 의사에게 물었다.
-그래서, 치료는? 어떻게 하면 이 독을 제거할 수 있죠? 마법으로도 가능하나요?
피니언의 물음에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독은 마법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것들중의 하나로, 마법으로 치료 할 수 없는 독들 중 가장 강력한 독성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치료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해. 이 꽃은 본래 호수 주면의 낮고 따듯하며 습한 기운을 좋아하기에, 그 반대의 환경을 가진 곳에서 자라는 라이 라는 꽃만 있으면 간단히 치료할 수 있어. 극성이거든. 그 꽃은 몹시 높은 산 정상 부위에 자라는데 색은 빨갛지. 일년 내내, 그것도 고산의 눈 사이에 피어있어 설염雪炎이라는별명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하지만 이라니요?
피니언이 다그치자 의사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했다.
-워낙 라이는 귀하고 비싼 꽃이여서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어. 마곡의 메아가나 에노사의 리브르가에서라면 구할수도 있겠으나, 워낙 멀어 소용 없지. 그리고, 그 꽃이 자라는 가장 가까운 산이 바로 카타성 북쪽의 테에이산 인데.... 여기서 그곳까지 아무리 빨리 가 보아야 하루 이상 걸려. 하지만, 이 아가씨의 목숨은.... 고작 반나절 남았을 뿐이니....
의사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모두들 침울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으나, 일행 모두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은 한곳으로 향했는데, 바로 베르몬에게 였다.
베르몬은 모두의 시선을 채 다 받기도 전에 사라졌다. 당연히 그는 아첼리나를 치료할 라이라는 꽃을 가지러 테에이산으로 향했다.
의사는 갑자기 사라진, 그가 있던 장소를 망연히 바라보다, 굉장히 이상한 사람들이군, 하는 생각을 하며 일행 한사람 한사람을 다시 바라 보았다.
베르몬은, 온 마법력을 다 동원해 테에이산으로 향했다. 순간이동을 하기도, 그저 날기도 하며 한시간이 채 못되어 산 중턱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이동했으나, 산 중턱쯤에서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한 마리 마물을 발견했다.
거대한 곰의 몸에 숙주하는 녀석으로, 꽤나 밥맛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긴것과 실력과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었고, 베르몬은 신경도 쓰지 않은채 몸을 날려 앞으로 향하다 지팡이를 한차례 휘둘러 그 곰의 골통을 쪼개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또 한녀석의 마물이 나왔고, 베르몬은 급한 마음에 다시 한차례 지팡이를 휘둘러 그 마물을 부숴버렸다.
테에이산에는 마물이 굉장히 많았다. 아니, 어쩌면 이날 따라 특히 많은 마물들이 이 산에 모여 들었는지도 몰랐다. 베르몬은 이런 생각을 하며 보이면 보이는데로 머리통을 부수고 몸을 반으로 가르기도 하며 거칠 것 없이 위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마물들의 방해를 받자 이동 속도는 절반으로 떨어져 버렸고, 마음이 점차로 조급해 졌다.
그러던 중, 무슨 악기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베르몬의 귀에 들려왔다. 분명 그것은 악기 소리였다. 일정한 박자가 있고, 음의 고저가 있었으며, 들리는 바는 분명 자연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참을 듣고 있자, 어느것이 바람소리이고, 어느것이 숲의 소리이며, 또 어느것이 그 악기의 소리인지 구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보니, 분명 현재 악기를 다루고 있는 자의 연주 실력은 범인의 것을 훨씬 초월하는 듯 했다.
베르몬은 그런것에 신경쓰지 않은채 계속해 산 정상을 향해 달렸다. 그러던 중, 어느 시점에서인가 부터, 그를 가로막던 마물은 마족으로 변해 있었다. 비록 아르르망이나 아르카이제에는 비교할 수는 없는 하급 마족 이었지만, 마물과는 차원이 틀렸다.
한차례 지팡이를 가로로 휘둘렀으나, 그 마족은 어느샌가 피해 버렸다. 하지만, 베르몬의 목적은 그 마족을 해치는 것이 아니었고, 마족이 곁으로 피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몸을 날렸다.
마족은 베르몬을 쫓아 오는 듯 했으나, 베르몬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베르몬의 움직임은, 아르르망이나 아르페오네 정도의 마족과 비슷한 것으로, 결코 그 마족이 따를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정상 부위에 다달았을 무렵이었다. 그 사이 쫓아오는 마족의 수는 일곱 가량으로 늘었고, 언젠가 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악기소리도 점점 또렷해졌다. 베르몬은 마음이 급하여 앞으로 질주했다. 그러던중, 갑자기 무언가가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흡사 벽 인 것 같기도 했으나, 베르몬은 무시한채 그것을 뚫고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뒤를 쫓던 마족들은, 그 벽을 뚫을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래서는 않돼서인지 그곳 밖에서 멈춰선채 베르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엔클레이브, 이군.... 일부러 펼친 것은 아닌데.... 꽤 대단한 마족이 위에 있는 모양이군. 이녀석 때문에 이렇게 많은 마물들이 이 산에 모여 들었군.
베르몬은 더 이상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않은채 멈춰 한차례 숨을 골랐다. 무리해 나아가다 기습이라도 받을 경우에는 타격이 그리 작지 않을 듯 싶었기 때문이다.
한걸음 한걸음 그리 느리지 않은 발걸음으로 위로 향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던 베르몬 앞에 한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산이 높아 나무들은 거의 없었다. 그 남녀가 있는 곳은 바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뒤로 하늘만이 보이는 것을 보아 정상인 듯 했다.
남자는, 얇은 면옷과 용병들이 걸치는 바지를 입은채,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4현금 브세리아를 퉁기고 있었고, 여자는 반보쯤 뒤에서 그의 모습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모두 베르몬이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 아니 마족들 이었다.
아르카이제와 아르페오네. 바람이 몹시 부는 산정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엔클레이브로 막을 수 있건만 그들은 흩날리는 머리칼을 돌보지 않았다. 아르카이제의 길지 않은 보랏빛 머리칼은 미친 듯 흩날렸고, 아르페오네의 옅은 푸른빛의 머리칼은 세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베르몬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비록 마족 이었지만, 아르카이제의 사현금 탄주솜씨는 정말이지 대단했다. 바위에 정좌한채 미친 듯 손가락을 놀리는 그의 모습에는 사악한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베르몬이 마족을 경시하는 마음이 조금 사그러듬을 느낄 정도로 그의 모습은 대단했다. 아르페오네 역시 비록 바라보고만 있었으나, 그녀가 빠질 경우, 그의 금음이 배나 탁해질 듯 그곳에 서있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르카이제의 연주를 크게 돕고 있었다. 수수하면서 조용한, 표정 하나 없는 얼굴은 주위의 바위와도 같았으나, 눈빛만은 정이 듬뿍 담긴채 아르카이제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베르몬은 조심히 자신의 엔클레이브를 풀었다. 그것 덕분에 한올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흰 금발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엔클레이브를 푼 이유 따위는 없었다. 다만, 하늘과, 땅과, 바람과 함께 있던 그들의 모습에 무언가 느낀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몬은 조심히 한발 한발 다가갔다. 흡사 연주를 방해 하지 않으려는 듯.
한차례 호호탕탕하고 활활하게 연주를 마친 아르카이제는 고개를 들어 베르몬을 바라보았다.
-음을 아는 자는, 모두 저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르카이제의 말에 베르몬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음 같은건.... 모릅니다. 다만, 당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베르몬이 마족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물론,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존칭을 사용해 왔다. 다만, 마족만이 예외였으나, 이제는 그 태도를 바꾼 듯 싶었다.
만약 이 자리에, 아르트레스나 아르르망이 서 있었다면, 분명 아르카이제에게 다가서는 베르몬의 앞을 막아섰을 것이다. 그토록 강하고, 마족에게 적대적인 존재가 자신의 상관이며 자신을 만든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아르카이제 앞에 다가 섰을 때, 그들이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르페오네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것을 아르카이제에 대한 실례라 생각 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막을 수 있는 적 따위가 과연 아르카이제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는가? 이런 것까지 생각 할 수 있다면, 그런 행동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페오네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아르카이제와 베르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음을 아는 것입니다.
아르카이제의 말에 베르몬은 대답하지 않았고, 아르카이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이카르트 라고 합니다. 떠돌이 용병이며, 이 사현금은 취미 입니다. 그리고 뒤, 새를 기르고 있는 여자는 제 친구로, 세이피나 라고 합니다. 한 작은 사원의 여사제 이지요.
베르몬은 그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카르트나 세이피나 라는 이름은 인간세에서 사용하는 그들의 가명일 것이다. 아르카이제 같이 잘 알려진 이름을 사용 할수는 없었기에, 마족들은 인간세상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가명을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태도를 베르몬은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베르몬은 고개를 들어 웃고 있는 아르카이제를 한차례 더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테미시아님의 수신사인 베르몬디아 라고 합니다.
아르카이제, 아니 이카르트는 베르몬이 이렇게 답하자 환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제, 서로 이름을 밝혔으니, 친구가 된 것 입니다. 축하의 의미에서 한곡 올릴까 하는데요.
베르몬은 순간 자신이 놀림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약간의 힘을 손에 모으며 아르카이제를 살펴 보았으나, 도무지 악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순간 후의 아르카이제의 말에서 그의 저의를 알 수 있었다.
-친구를 구하는데 시간은 넉넉치 않습니다. 제가 당신을 쉽게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너시간 정도 이곳에 가두워 두는 일은 가능합니다. 금음을 들으며 친구로 해어지겠습니까? 아니면, 한차례 피를 이 하얀 설원에 뿌리시겠습니까?
베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이제의 말뜻을 이해했다는 표시였다.
아르카이제는 다시 한차례 웃으며 손을 들어 한쪽을 가르켰다.
-저 꽃이 바로, 인간들이 설염, 라이라고 부르는 꽃입니다.
아르카이제의 손끝이 가르키는 곳에는 정말 눈 속의 불꽃 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빨간 작은 꽃이 몇송이 있었다. 베르몬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며 꽃을 챙겨 들었다.
-세상의 소멸은 우리 마족들도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럼....
아르카이제는 인사 비슷한 이런 말을 남기며 다시 금을 탄주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금은 모두 네 종류가 있었다. 단현금 파욧, 메세리아와 이현금 에세리아, 사현금 브세리아, 팔현금 오크세리아로, 이중 단현금은 탄주법이 실전됐고, 이현금은 음유시인들의 휴대용 악기였다. 사현금은 지금 아르카이제가 연주하는 것으로, 주로 남성들이, 팔현금은 여성들이 주로 연주하였다.
사현금은 음이 강맹하고, 현도 굵고 단단해 연주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본래는 쇠나 가죽으로 된 연주용 골무를 사용해야 했으나, 아르카이제는 맨손으로 그것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족에게 그런 것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베르몬은 꽃을 얻은 후, 몸을 날려 아첼리나가 기다리고 있는 마을로 향했다.
아르페오네는 그가 사라지자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꽃을 가지러 온줄 아셨나요?
아르페오네의 물음에 아르카이제는 한참동안 답하지 않았다. 아르페오네는 조금도 독촉하는 빛을 내보이지 않으며 천천히 대답을 기다렸고, 아르카이제는 연주를 한차례 끝내 손이 멈춘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가 데리고 다니던 일행중 성녀가 계신다. 수신사는 성녀를 지키는 것이 그 임무중 첫째인데, 그런 그녀를 두고 혼자 이런 곳까지 찾아 온 것을 보면, 분명 성녀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강 추측해 보았던 것이다. 운이 좋아 맞춘 것이지....
아르페오네는 이런 아르카이제의 대답에 적지않게 놀랐다. 비록, 잠시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추리 가능한 것이었으나,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런 것에 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페오네는 칭찬 따위를 늘어 놓지 않았다.
자신의 주군이 그따위 말에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한편, 꽃을 구한 베르몬은 올때보다 배나 빠른 속도로 자신이 묶고 있던 마을로 향했다. 산위에서 뜻하지 않은 방해를 받은 덕에 시간이 많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절반 가량 왔을 무렵, 돌연 상처가 욱쑤셔 오기 시작했다. 비록 상처를 입은지 보름 가까이나 흘렀으나, 워낙에 큰 상처 였기에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평소 여느 정도의 힘을 사용하는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으나, 지금처럼 서너시간에 걸쳐 마법을 최고로 끌어 올리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듯 싶었다.
베르몬은 이렇게 혼자 몇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150여년전 복수를 포기한 이래 이렇게 까지 무언가에 빠져있는 자신을 본적이 없었다. 비록, 세첼타가의 봉인녀를 무사히 호송하는게 자신의 임무이긴 했지만, 지금의 마음은 임무의 실패를 걱정하는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답답했다. 자신의 속도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 더없이 답답했다. 점점 고갈되어 가는 힘을 느끼며 자신의 마법력이 이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심스러웠다.
자신에게, 그녀는 무어란 말인가? 그녀가 자신에게 무어길레 이렇게까지 필사적이란 말인가?
정신이 조금 흩트러 지자, 갑자기 몸이 크게 울리며 피를 한모금 토해냈다.
도대체 자신에게 그녀가 무어란 말인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속도를 떨어뜨렸다. 갑자기, 이렇게 필사적인 자신이 괴이쩍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한명이 죽어 간다고 피까지 토해가며 날아가는 자신이 이상했다. 목숨에 대한 욕심 같은 것은 크지 않았다. 이 세상이 멸망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아쉬울 것 하나 없었다. 모든 행복을 강탈당한채 살아온 지옥같은 180년이다. 이제와서 죽는다고 새삼스러울것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까지 필사적으로 그녀를 호송하고, 또 지키는 자신은 무어란 말인가?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멈춰섰다. 이대로, 이대로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한다. 봉인녀가 죽은 이 세상에, 봉인봉을 켈리시온의 신전에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봉인의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전, 봉인녀가 하지 않는다면 동생이 한다, 라고 했던 베르몬의 말은 허언이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봉인녀 뿐이다.
이대로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던 그 잘난 신들이 애지중지하는 이 세상은 사라져 버린다. 어짜피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중, 지금가지 살아있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한다. 자신의 살고 싶은 마음은 180년전 이미 잃어버렸다. 다만, 죽고 싶다는 마음 역시 그리 강하게 들지 않아, 그리고 신전 안에서는 죽음 조차 용납되지 않아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온 것이다.
꽤나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동안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흡사 미치고 얼빠진 사람처럼, 그는 들판 한 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 따위는 망해도 좋다. 하지만, 단 한사람만은....
말은 의사 전달만의 도구가 아니라며 밝게 웃어보인 한 여자. 자신의 운명은 신의 구슬 따위가 아니라며 울먹이던 한 사람.
사랑?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다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던 그때, 그는 몇차례나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단 한차례 만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아첼리나가 베르몬의 대답을 기다리는 만큼, 그 역시 아첼리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었다. 그리고, 아첼리나가 베르몬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던 것 만큼, 베르몬 역시 아첼리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몬은 몹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단 한가지 만은 확실했다. 자신을 움직이는 힘은 의무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단 한명, 자신을 마음으로 부터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존재는 테미시아가 아닌 아첼리나 라는 것을.
그녀와 함께한 다섯달 가량의 시간동안에도 깨닫지 못한 사실을, 그는 지금 이 한순간에 모두 알게 된 것이다.
세상 따위는 망해 버려도 좋았다. 하지만, 단 한사람, 그녀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건 의무였다. 수신사로서가 아닌, 베르몬으로서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 그는 하얀 직선이 되어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도착했다. 머리가 어질어질 하고, 배속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옮겨 여관 안으로 향했다.
-수신사님. 돌아 오셨군요.
피니언이 기쁜 듯 소리쳤고, 모두들 베르몬에게로 다가왔다. 베르몬의 옷 앞자락에 묻은 붉은 색에 대해서 그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다만, 그가 들어 올리는 붉은 꽃을 반갑게 낙아채며 뒤에 있던 의사에게 건냈다.
돌아서 아첼리나에게 다가가는 모두를 잠시 바라보다, 베르몬은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났다. 돌연 목구멍으로 한차례 비릿한 액체가 넘어와 다시 한차례 입가를 물들였다.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묶던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조용히 몸을 기대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분명 사랑 이었다. 자신은 지금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이미 오래전 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피를 토하는 자신의 몸보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안위가 더 걱정스러웠다. 일전, 자신의 실력이 복수 라는 것을 할 만한 정도에 이르렀을 때보다, 지금 꽃을 무사히 가져 올 수 있었던 것이 더 기뻤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향했다.
아첼리나는 세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몸의 열도 다 내렸고, 정신도 제대로 돌아왔다.
-아가씨, 이제 괜찮은가요?
-아첼리나, 몸은 좀 어때?
아첼리나가 눈을 뜨자 마자 곁에 서 있던 피니언과 하실리아가 동시에 이렇게 물었고, 아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힘이 하나도 없어 나른 하지만....
아첼리나는 고개를 들어 방을 살피다 물었다.
-베르몬님은? 조금전 까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의사가 나서 입을 열었다.
-그래, 몸은 좀 괜찮나? 어디 다른 아픈 곳은 없고?
아첼리나는 그가 누군지 몰라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고, 피니언이 곁에서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세요. 아가씨의 중독을 풀어주신 분이죠.
아첼리나는 피니언의 말에 환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몸은 괜찮아요.
의사는 아첼리나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구했다.
-감사할 사람은 따로있어. 난 한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흰 망토를 입은 사람이 테에이산까지 가서 약초를 구해 왔어.
아첼리나는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내지르며 중얼 거렸다.
-베르몬님이.... 피니언 언니, 베르몬님을 좀 불러 주세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곁에서 하실리아가 한마디 했다.
-뭐, 그럴 것 까지 없잖아. 어짜피 너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그런 것 뿐인데.
아첼리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감사할 일임에는 틀림 없어.
하실리아는 아첼리나의 말에 갑자기 자신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생긴 것을 생각해 내고는 말했다.
-아첼리나.... 정말 미안해.... 정말.... 나 때문에.... 내가 괜한 짓을 해서....
히실리아의 사과에 아첼리나는 잠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으나, 곁에서 피니언이 설명해 주어 모두를 알게 되었다.
-아.... 하실리아. 괜찮아. 신경쓰지 마. 고의로 그런것도 아닌데.... 게다가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아첼리나는 이렇게 하실리아에게 말했고, 곧바로 피니언에게 입을 열었다.
-언니, 어서 베르몬님을 데려다 주세요.
피니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향했고, 오래지 않아 베르몬과 함께 돌아왔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을 향해 감사의 말을 하려 입을 열다, 그의 입가와 옷 앞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보았다.
-베르몬님. 무슨 일이세요? 피를 토하신 건가요?
아첼리나의 말에 모든 일행이 베르몬을 향해 시선을 옮겼고, 이내 그들도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앗, 정말이네.
하실리아 역시 놀라 이렇게 말하긴 했으나, 아첼리나의 그것만큼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무리하신 모양이군요. 그렇게까지.... 아무튼 감사해요....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본래, 이런 상황이라면, 그의 말투로, 의무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했을 터이나, 전에 아첼리나와 약속한 바가 있어 이렇게 답했다.
베르몬은, 왠지 모르게 기뻤다. 방금 전, 네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정면으로 자신을 보았음에도 발견하지 못한 핏자국을, 아첼리나, 그녀는 단번에 발견한 것이다.
-쉬십시오.
베르몬은 이 한마디를 남긴 후, 다시 방을 빠져나왔다.
다시 다음날 일찍, 일행은 다시 북쪽으로의 여행을 서둘렀다.
그렇게 열 이틀 가량이나 일행은 별다른 일없이 카노평야를 가로질러 위다-노마티아 해협의 위다측 항구인 헤도콘에 도착했다.
본래, 노마티아와 위다의 사이는 그리 좋은편이 못되었었다. 군사적으로 강맹한 노마티아와 여러 가지 면에서 노마티아를 훨씬 앞지르는 위다 사이에는 개국 초부터 적대적인 감정을 서로에게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것이 100여년전 레냐의 중재로 완전히 화해를 하게 되었다. 당시 레냐의 통수권자는 여왕 로샬리 였는데, 선대에 노마티아에 망한 레냐를 독립 시키며 레냐 제 7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레냐는 독립한지 10년이 채 못되어 멸망하기 이전의 두배 가까운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튼 그녀는 내정 뿐만 아니라 외교에도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 덕에 평화 협정을 맺은 위다-노마티아 두 나라는 지금까지도 별다른 싸움 없이 지내고 있다.
이런 덕에, 100여년전 까지만 해도 군사도시처럼 되어있던 이 헤도콘 항은 지금은 노마티아와의 무역으로 몹시 번성한 도시중 하나이다.
아첼리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래간 만에 보는 바다에요.
베르몬 곁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멀리 간신히 보이는 노마티아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제가 마지막을 맞이할 땅이군요.
그녀는 이제 이런 말을 서슴치 않고 내 뱉을 수 있었다. 그녀의 지금 심정은, 언젠가 레냐 땅에서 만났던 셀리나의 엄마의 그것과 비슷했다. 초월은 아니지만, 거역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인정, 내지 수용 정도에 해당됐다.
베르몬은 곁에서 대답은 하지 않은채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듣고 있었다.
돌연 휑하니 찬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왔다. 11월 초순. 추수철이 막끝나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무역 철이었다. 게다가, 북쪽 노마티아의 근처에서는 이쯤 부터 이미 겨울이 시작되었다.
아첼리나는 비록 초겨울의 옷으로 갈아 입었지만, 바닷가에서 에리듯 불어오는 찬바람에는 당해낼 수가 없어 한차례 몸을 떨었다.
-베르몬님. 춥지 않으세요? 제가 사드린 그 옷은 봄, 가을용인데....
-괜찮습니다.
아첼리나와 베르몬의 사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제 겨우 마족과의 사움 이전으로 돌아간 듯 싶었다. 이것 저것을 이야기 하고 묻는 아첼리나와 열 개중 하나 혹은 그 이하의 비율로 간단 간단한 대답을 하는 베르몬,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심적 변화는 그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돌연히 아첼리나에 대한 마음을 깨닫게 된 베르몬과, 은근히 마음속 깊은곳에서 부터 쌓아 올린 베르몬에 대한 마음을 알게된 아첼리나, 이 두 사람은 이별이라는 정해진 앞날 앞에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고 있었다.
일반의 사랑과는 그 모습이 확연히 달랐다. 밀어를 주고 받지도, 서로의 시선을 응시하며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단지,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이런 저런 일상적 대화를 주고받고, 한쪽은 웃고, 한쪽은 입을 다문채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의심하며 확인 하려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다. 한쪽은 경외심에서 오는 절대적이다 할만한 믿음을, 다른 한쪽은 희생에 가까운 일방적 사랑을 품고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쌓아올린, 짝사랑에 가까운 애정을 서로에게 가지고 있다 이야기 할 수 있다.
다른 일행은 이런 미묘한 변화 까지는 알 수 없었다. 워낙, 베르몬이라는 사람은 변화가 적었고, 아첼리나는 요즘의 이 짧은 시간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많은 성격의 변화를 보여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겉모습으로는 결코 그들의 마음을 추측 할 수가 없었다.
헤도콘의 건너편은 타이르항이다. 헤도콘과 타이르사이의 해협은 일곱 대륙 사이의 그것들중 가장 좁다. 그덕에 물살이 조금 빠르기는 했지만, 이곳을 건너는데 결코 하루 이상의 시간은 걸리지 않는다.
비록 무역철이지만, 일행은 그리 어렵지 않게 배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채 바다 밑으로 잠기기도 전에 반대편 항구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헤도콘항이나 타이르항 모두 그리 특이한 편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규모가 큰편인 항구 들이었다.
항에서 하룻밤을 묶은 일행은 북쪽으로 향했다.
노마티아의 남부지방은 꽤나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구릉군 이라는 점에서는 소피카 남부 평야지대와 비슷했으나, 소피카의 그것에 비해 배나 거칠었다. 게다가, 불규칙 하기 짝이 없어 파도라고 불리우는 소피카와는 달리, 이곳의 언덕들은 흡사 일부로 쌓은 성이라도 되는 듯, 일렬로 쭉 늘어서 있다. 학자들은 다중파상구릉열多衆波狀丘陵列이라고 이름 붙여 부르기를 즐기고 있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아킬라이아(노마티아의 신)의 성채 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런 엉망 진창의 지형은 농업이라는 이시대의 국가 기반 산업을 불가능 하다시피 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농사를 짓고 있다는, 노마티아 서부의 토노 평야도 황량하고 거칠기 짝이 없어 단위면적당 작물 소출량이 레냐나 위다 같은 곳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킬라이아의 성은 노마티아에게 한가지 커다란 선물을 안겨다 주었다. 노마티아가 강대하기로 일곱 대륙 최고인 위다와 백 수십년간 싸워 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아킬라이아의 성채 덕으로, 요소 요소를 지킨채 장기전을 유도하면 지키는자 열배 이상의 적이 공격해 오더라도 그리 힘들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실례로, 백 십여년전, 레냐가 노마티아에 패해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을 때, 위다는 레냐를 공격한 죄를 물어 3만이나 되는 대병을 몰고 노마티아를 공격해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노마티아에서는 겨우 1만에 불과한 병사로 그들을 맞아 싸워 1만 가까운 적병을 베었었다. 그때도 장기전을 유도해 위다의 병사들이 지친틈을 이용해 승리할 수 있었다.
아첼리나 일행은, 이곳을 좋아할 수 없었다. 황량하고 황폐한 언덕들은, 바라 볼때 아름다움을 주기는커녕 이동하는데 불편만을 안겨주어 하루에 채 15휴하(1휴하= 약 1킬로)를 걷지 못하였다. 울퉁 불퉁한 바닥은 걷기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비록 수레가 다니는 길이긴 했지만, 고저차가 몹시 심했다.
-역시, 노마티아는 저주 받은 땅이군....
하실리아는 연일 투덜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말, 이곳 사람들이 듣기라도 하면, 꽤나 골치 아플걸?
하실리아의 말에 아첼리나가 이렇게 대꾸했고, 곧이어 아델이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농사짓기에는 몹시 불편하지만, 대신 광물이 풍부하니까요. 하르야, 원래 흔한 금속 이지만, 그밖에 철이나 구리 따위의 것들 역시 다른 대륙에 비해 매우 많이 납니다. 아, 금속에 대해서는 저보다 잘 알겠군요.
아델의 말에 하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길이 나빠서야, 어디 수레나 제대로 다니겠어요?
하실리아의 말에 피니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실리아가 내뱉듯 말했다.
-뭐, 어쨌건 나와는 상관 없지만....
막 일행곁을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가 지나갔다. 곡물을 하나 가득 실은 마차를 끄는 말들이 지쳤는지 비틀거렸다.
일행은 길을 비켜 마차가 다 지나가길 기다렸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수도가 아마 하야 이지?
하실리아는 아첼리나를 향해 이렇게 물었고, 아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얀 거인들에게 둘러싸인 도시.
-눈덮인 언덕?
하실리아는 언제 어디선가 들은 듯 하여 이렇게 아는척을 했고, 아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뭐 그래봤자 별거 없겠지.... 여기가 이런데, 뭐 그곳이라고 다를 것 있겠어?
하실리아의 말에 아델이 당치않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야는 정말 커다란 도시지요. 동서로 뻗어있는 게미아 산맥의 남편 정 중앙의 분지에 있는 도시로, 그 규모만으로는 레냐의 수도 위카와 맞먹습니다. 본래 성이나 마을이 들어설만한 좋은 땅이 적은 노마티아는, 대신 굵직굵직한 도시들이 몇몇 있습니다. 토노 평야 중간쯤 있는 트라금이라던지, 게미아 산맥 너머 북쪽에 있는 켈토 다위의 도시가 모두 인구 5만 이상이나 되는 큰 도시들이지요.
-그렇게나?
의외라는 듯, 하실리아가 이렇게 말했고, 아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데로 북쪽으로 계속 갈 경우 도착하게 되는 비아그라는 도시 역시 인구가 2만이나 된답니다. 우리가 막 떠나온 타이르항구와 맞먹는 수죠.
-뭐 그래봤자, 우리 소피카의 아드라르가 8만여명, 그리고 수도 마기아의 인구가 10만에 이르는데 비한다면, 별 것 없잖아요.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카야 본디 남방의 거국 이니까요. 노마티아에 비한다면 총 인구수만 해도 두배 이상이니....
아첼리나가 곁에서 한마디 했다.
-하지만, 도시 규모 같은 것을 이야기 할 때에는 뭐니뭐니해도 위다를 빼놓을수는 없잖아요.
-맞습니다, 아가씨. 위다의 수도 카타의 경우 성과 그 주위에 모여사는 주민이 15만 가까이 된다 하더군요.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숫자지요. 세이아국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 입니다.
아첼리나와 하실리아, 피니언은 꽤나 놀라 이렇다할 말도 하지 못했고, 베르몬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 앞으로의 걸음만을 서둘고 있었다.
지긋 지긋한 오르내림을 이레나 계속한 끝에, 일행은 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아그 라는 곳으로, 아킬라이아의 성채들 이라고 불리우는 곳과 수도 하야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도 하야는 이곳 비아그에서 서편으로 삼일 가량 더 가야 있었다. 하지만, 일행은 하야가 아닌 하야얌산이 목표였기에, 이곳 비아그에서 북쪽으로 가야 했다.
아직, 11월 중순이었지만, 이미 게미아 산에는 첫눈이 내렸다.
이곳 비아그에서 북쪽을 향해 시선을 옮기면 그리 멀지 않은곳에 거대한 산들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파란색에 가까운 산의 몸채와 그 머리부분을 뒤덮고 있는 흰빛의 눈이 꽤나 아름다웠다. 산은 단독으로 삐죽 솟아 있기도, 여러 봉우리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는 등 천차만별로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모든 여행객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산들의 모임 뒤쪽으로 보이는 하야얌산 이었다. 멀어 흐릿하니 신기류처럼 보이는 이 산은 다른 산들에 비해 배는 높아 보였다. 하늘빛과 비슷한 푸른빛으로, 맑은날 안력을 돋와야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다행히 날이 맑아 일행은 어렵지 않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직, 하얀 거인들 이라 불리울 만큼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았으나, 차라리 산을 타기에는 편할 듯 싶었다.
일행은 간단한 등산 장비를 이곳 비아그에서 구입했다. 정상부, 설원위를 걷기 위한 설피와 눈바람을 막아줄 두터운 외투, 그리고 그외의 몇몇 비상 식량 등.
베르몬은 그중 어느것도 필요 없었지만, 아첼리나의 강권에 못이겨 가죽 외투와 설피를 구입했다.
다시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낸 일행은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여정에 올랐다.
게미아 산맥은, 산들중 험하기로 이름났다. 모두들 비록 무를 닦고, 마법을 익힌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인간들 이었지만 몹시 힘든 걸음을 옮겼다.
사실, 비아그시를 떠나 첫 번째 산을 오를 때 만 해도,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본래, 비아그시 북쪽으로 난 산길은 게미아산맥 북쪽의 켈토시까지 근근히 이어져 있다. 즉, 비아그시에서 켈토시로 산맥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인 것이었다.
산 중턱쯤 오르면서 부터, 아첼리나는 걷는 시간보다 쉬어가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지만, 결코 힘든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러했다가는 베르몬이 순간이동으로 자신을 산 정상부 까지 데리고 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만약 평소 같았으면, 차라리 그러하길 원했을 아첼리나였다. 그녀는 어느 정도 이상의 힘을 사용하는 움직임을 몹시 싫어했고, 등산은 그런 것들중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먼저 베르몬의 몸이 정상이 아님을 걱정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후는, 조금이라도 더 일행과, 그리고 베르몬과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챘는지, 베르몬 역시 무리해 그녀를 데리고 올라가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채 정상부분에 다다르기도 전에, 어느덧 해가 서편 산사이로 기울고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 해가 짧아진 탓도 있었으나, 본래 산중에서는 해가 빨리 지는 법이었다.
일행은, 산중의 노숙은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등산 도구를 파는 곳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 하니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럭 저럭 자리를 잡아 일행은 휴식에 들어갔다. 평소 노숙때와는 달리, 커다란 천으로 지붕을 만들어 밤에 내릴지도 모르는 눈에 대비했고, 그 때문에 아첼리나는 별을 볼 수 없었다.
산에서의 노숙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새벽무렵, 일행 모두는 추위에 잠을 깨 이불을 어깨위로 뒤집어 쓴 채 모닥불 주위로 옹기 종기 모여 앉았고, 누구 하나 말도 열지 않은채 이빨 부딪히는 소리만 계속해 들려왔다.
따듯한 스프로 아침을 간단히 한 일행은 다시 하야얌 산을 향한 행진을 계속했다.
어느덧, 정상 이었다. 물론, 하야얌산의 3분의 2 선에도 못미치는 산의 정상 이었지만, 만 하루만에 도착했다. 정상부를 뒤덮은 눈은 햇빛에 반짝였고,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니 수많은 산들의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듯한 높이로 죽 둘러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야얌 산을 바라보니, 과연 대륙 제일의 산 다웠다. 능선이 유난히 날카로와 산이 유달리 높아 보였고, 정상 부위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일행이 서 있는 곳의 높이가 하야얌산의 절반 이상 되는 곳이어서, 두세개의 봉우리를 더 넘으면 곧바로 하야얌산 중턱에 닿을수가 있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능선은 흡사 평야와도 같았다. 대륙 최대의 산맥 답게, 산의 높이뿐만 아니라 너비도 대단해 눈덮인 능선은 능히 서너채의 커다란 집을 지을만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
비아그시에서 구입한 설피 덕에 일행은 한결 쉬운 걸음을 하고 있었으나, 역시 산위에서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힘들어요.... 조금 쉬었다 가요.
역시 아첼리나가 가장 먼저 이렇게 쉴 것을 요구했다. 아첼리나는 적당히 앉을 만한 곳을 찾아 털썩 주저 앉았고, 베르몬은 그대로 멈춰선채 멀리로 시선을 향했다. 피니언과 하실리아 역시 약간 높은곳으로 가 이곳 저곳 경치를 살피었다.
온통 흰빛을 띄고 있어 단조로울 만도 하건만, 이곳에서 바라다본 주위의 풍경은 몹시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아래로 골짜기에, 여름에는 그 푸르름을 자랑했을 숲, 그리고 나무들이 앙상한 뼈다귀에 눈이 쌓인채 옹기 종기 모여 있었고, 멀리로 시선을 돌리면 서로 뒤엉켜 어느것이 봉우리이고 어느것이 구름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그런 곳도 있었다.
온통 산과 하늘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첼리나는 모두가 넋놓고 바라보는 풍경이 궁금해 몸을 일으켜 베르몬 곁으로 갔다.
-뭐, 볼만한 거라도 있어요?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은 잠시 아첼리나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옮겨 멀리 하늘이 끝나는 곳으로 향하였다. 울렁거리는 산들과 이가 맞물리듯 물려있는 하늘은 맑디 푸르렀다.
아첼리나는 그의 시선을 쫓아 한참이나 그곳을 바라 보았고, 이내 우울히 한마디 뱉었다.
-이제, 저런 모습 더는 보지 못하겠죠?....
베르몬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이 살짝 씰룩거렸으나, 끝내 말을 거내지는 않았다.
-그만 가요. 이런곳에서 밤을 맞이할 수는 없잖아요.
아체리나는 다시 한참동안 더 서있다 이렇게 말했고, 베르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전날에 비해 배나 추위에 대한 대비를 해서인지, 새벽 추위에 잠을 깨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첼리나의 경우에는 다른 이유로 잠을 깼다.
무릎을 접어 가슴 앞으로 끌어 당기고, 두 팔로 조용히 그것을 감쌌다. 시선은 조용히 져가는 모닥불을 응시했고, 입은 굳게 닫힌 채로였다.
-베르몬님.
아첼리나는 조용히 베르몬을 불렀다.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자신이 이렇게 부르면 그는 대답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베르몬은 고개를 들어 아첼리나에게로 향했다.
-무서워요.... 하루 하루 하야얌산에 다가감에.... 정말 저는 죽게 되는 건가요?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은 답하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가져선 않되겠죠? 성녀는.... 모두를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 하는건, 성녀로써는 실격 이겠죠?
아첼리나는 굳이 베르몬이 답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모양 이었다.
-한번 더, 한번 더 모두가 보고 싶어요. 엄마, 아빠, 라아나.... 그리고.... 하지만, 무리겠죠? 지금 집에까지 갔다 오기에는....
아첼리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무릎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보고 싶어요....
아첼리나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베르몬은 그런 그녀에게 단 한마디도 건내지 않다가,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잦아지자 입을 열었다.
-상심하지 마십시오.
아체리나는 베르몬의 말에 고개를 숙인채 몇차례 끄덕거렸다.
-맞아요.... 이런 마음을 가져선 않돼요....
아첼리나는 이렇게 말하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고, 이내 고개를 들어 베르몬을 바라 보았다.
-앞으로 몇일이나 걸릴까요?
-길어야 삼사일 정도 걸릴겁니다.
-삼사일....
베르몬의 말에 아첼리나는 삼사일이라는 말을 한차례 되새겼고, 다시 입을 열었다.
-베르몬님께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어요.... 만약, 베르몬님이 없었더라면, 내 이 마지막 몇 달은 정말 재미 없었을 꺼에요.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이 무미건조히 내뱉었다.
-재미 있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첼리나는 그런 베르몬의 말에 베시시 웃었다.
-거봐요. 재미 있잖아요. 좋아요, 그러면 즐거웠단 말이 정확할까요?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은 답하지 않았다.
-베르몬님. 이제 저를 호송하고 나면 무슨 일을 하나요? 그냥 테미시아님의 신전으로 돌아가나요?
아첼리나의 물음에 베르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42대 수신사를 찾아야 합니다.
-그 후에는요?
-그녀를 무사히 신전에까지 호송해야 합니다.
베르몬의 말에, 아첼리나의 목소리에 약간의 긴장이 실렸다.
-여자 인가요?
-예. 이제 곧 태어날겁니다. 그리고, 17년 후에 위다의 수도 카타에서 만나게 됩니다.
베르몬의 말에 아첼리나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그 모든걸 알 수 있죠? 그것도 테미시아 수신사의 능력인가요?
베르몬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신탁이 내려졌습니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쁠까요? 그 42대 수신사....
난대없이 불거져나온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신탁에 의하면 암갈색 머리칼의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아첼리나가 다시 물었다.
-저보다요?
베르몬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첼타가의 사람들은, 1천년만의 희생을 위해 신으로 부터 세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첫째가, 절대로 대가 끊어지지 않는다, 이고 두번째가 보통사람에 비해 엄청나다 할 만한 마법 소질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받은 축복이 바로 완벽한 신체 입니다.
베르몬의 말에 아첼리나가 풋, 하고 웃었다.
-제가 완벽하다는 말인가요? 지나친 칭찬인걸요....
베르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입니다.
아첼리나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가로저을뿐 더 이상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요?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 아첼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베르몬은 아첼리나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없었다는 뜻인가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르몬의 대답에 아첼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요? 저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행복하지 않나요?
베르몬은 아첼리나의 말에 그녀를 정면으로 한참동안 응시했다. 붉은 빛이 어른거리는 아첼리나의 미소에 아름답다 따위의 말은 쓸모가 없었다.
-어떤 것이 행복 이지요?
한참 후, 베르몬은 도리여 이렇게 물어왔고, 아첼리나는 주저않고 답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좋아하는 물건을 선물 받았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이 행복 이라고 생각해요.
아첼리나의 대답에 베르몬은 별다를 대꾸를 하지 않았고, 아첼리나가 다시 물었다.
-베르몬님은 어떤 것을 행복이라 생각 하세요?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잘 하는 것 세가지가 정치正致할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잘 하는 것.... 세가지가 정확히 일치할 때 라고요? 정말 그렇겠군요....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할 수 없다면, 사람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겠죠....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하지 못한다면 역시....
아첼리나는 잠시 더 생각해 보더니 계속해 말을 꺼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도 행복해지는 중요한 조건 이겠어요.... 할수 있는 것이 있고, 그것을 잘 한다 하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정하지 못한다면 행복 이라는 것을 생각할 기회 조차 없을테니까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아첼리나가 베르몬을 향해 물었다.
-베르몬님은 이 세가지 조건 중, 무엇 때문에 스스로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으신가요?
베르몬은 아첼리나의 물음에 천천히 자신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분명 자신은 두 번째 것의 결여로 모든 행복을 빼앗겼다. 운명에 이끌려 휩쓸리다시피 살아온 일평생 이기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던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생각해 보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도 알기 힘들었다. 도대체 자신은, 자신이 살아가는 목표는 무어란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한참의 생각 끝에 베르몬이 낸 결과였다. 하지만, 아첼리나는 만족할 수 없는 듯, 뾰루퉁히 말했다.
-또다시 대답하지 않기로 한건가요?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은 답하지 않고 고개를 한차례 가로 저었다. 그제서야 아첼리나는 상대가 진지하게 답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말했다.
-정말 모르시나보죠?.... 그럼 제가 한가지 할 일을 만들어 드릴께요.
아첼리나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말을 멈추며 베르몬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여전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아첼리나는 살짝 귀밑을 붉히며 말했다.
-3일 동안 제 애인이 돼 주세요.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느낌 이었다. 이런 베르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첼리나가 말했다.
-애인은 보통 동료와 달라요. 예를들면.... 그 한사람만을 바라 보아야 하고, 그 한사람만을 생각해야 하고, 그 한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다른 어떤 시간보다 많아야 하고, 그리고....
아첼리나의 말에 베르몬은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첼리나는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런 것은 무리겠죠?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베르몬님은 테미시아님의 수신사이시니, 이런 장난 비슷한 것은 해선 안돼잖아요. 하지만, 저 꼭 갖고 싶었어요. 누구라도 좋으니, 마음 놓고 사랑할 만한 사람을.... 얼마 남지 않은 내 시간의 절반을 공유할 사람을....
베르몬은 아첼리나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부터 몇차례나 생각해 보았던 일이었다. 지금 대답을 망설이는 것은, 단지 자신과 더 이상 친해졌을 때 그녀가 받을 충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 그것이 걱정 되어서 였다. 나중에 있을 어떤 일에....
하지만,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감히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대답을 하는 대신 마법력을 운용해 손안에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의 손이 빛나기 시작하자 무엇을 하나 궁금해 하던 말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법이 완성 되었을 때, 베르몬의 손바닥에는 자그마한 한 물체가 놓여있었다.
-반지....
아첼리나는 조그맣게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반지, 얇은 금테가 아첼리나의 눈빛을 닮은 조그마한 담청색 보석을 감싸고 있었다. 수수한 듯 한 모습이 베르몬의 성격과도, 아첼리나의 기호와도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그런 물건 이었다.
아첼리나는 조심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잡으려 했는지, 아니면 베르몬이 건내주기를 바랬는지는 몰랐으나, 아무튼 베르몬은 조용히 반지를 아첼리나의 오른손 약지에 들이 밀었다.
둘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아첼리나는 환히 미소 지은채, 언제나 글썽이던 눈물을 한줄기 흘리었고, 베르몬은 약간 어색한지 황급히 손을 거두고 아첼리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그럼, 앞으로 삼일간, 우리는 애인 인가요?
아첼리나는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으나, 베르몬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때에는, 말하지 않는 그가 더 어울렸다.
천하에 가장 재미없는 연인들, 아마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별명일 것이다. 모닥불이 있고, 하늘에 별이 있다. 선선히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은빛의 눈발이 달빛에 희게 빛난다. 그리고, 느즈막한 밤이다. 그러나, 이들은 1휴리하 가까이나 떨어진채 마주보고 있을 뿐이다. 다가와 어깨를 기대지도, 또 어깨를 감싸안지도 않는다.
새 연인의 탄생을 축하하려는 듯, 길디 긴 늑대의 울음소리가 산중을 메아리 쳤다. 1휴리아나 떨어진채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는, 이 연인들을 위해.
경악.
차라리, 하늘과 땅의 위치가 뒤바뀌었더라면, 아니면 바다에 눈이 쌓였더라면 이렇게 까지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여기 한 여인이 있다. 금발을 뒤로 길게 늘어뜨린 어여쁜 아가씨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가늘고 세련된 매우 아름다운 반지다.
다시 한 사내가 있다. 흰빛에 가까운 금발을 한차례 묶은 가냘픈 턱선을 가진 사내다. 그 여자의 반지는 이 사내가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은 하실리아는 입을 벌린채 그 둘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볼 분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는 허리를 굽힌채 웃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 나이 먹도록 듣고 본 이야기중 가장 재미있는 것이기라도 되는 듯, 숨이 막혀 캑캑 거리면서까지 웃어댔다.
피니언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하실리아의 웃음 소리에 그녀를 제지하기 바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하실리아 이상으로 어색함을 느꼈고, 그녀는 하실리아 처럼 웃는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델은, 어쩌면 이미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추측하여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것과, 막상 그것이 현실화 되어 나타나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그저 시선을 딴곳으로 돌릴 뿐이었다.
-정말 재미있는걸.... 그렇게 되어버렸단 말이지?
하실리아는 묻고 또 물었다. 대답을 바라는 것도, 또 뒤따라올 대답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해 물었다.
아첼리나의 손에서 반지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하실리아였다. 한참 부산하고 정신없던 아침이 지나고, 하야얌산으로 걸음을 옮긴지 오래지 않아서 였다. 그녀는 아첼리나의 손에서 어릿하는 빛을 발견하곤 곧바로 아첼리나의 손을 끌어 당겼었다. 당연히 반지의 출처를 물었고, 아첼리나는 엷은 홍조를 띄며 꾸밈없이 답하였다.
-그만 해. 아가씨께서 무안해 하시잖아.
하실리아를 저지하며 피니언이 말했고, 그제서야 하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 이해는 가지 않아.... 언제 그런 사이가 된거지?
하실리아의 물음은 아첼리나를 향한 것이었고, 아첼리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답했다.
-어제부터. 어쩌면 훨씬 이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당당하며, 힘이 없을지언정 부끄럼을 탄 적이 거의 없는 아첼리나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이렇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천하의 하실리아도 베르몬을 놀리거나 할 배짱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덕에, 베르몬은 몇걸음 앞서 조용히, 평소와 같은 걸음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얼마간을 더 북으로 향하던 일행은, 다른 일행과 맞닥뜨렸다. 이 일은 그들로써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이런 첩첩 산중에서 사람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더없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현재 일행이 걷고 있는 그 길은 비아그와 켈토를 잇는 지름길로, 꽤 많은 상이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비록, 수레가 다닐 수 없었고 길이 험했으나, 수송시간을 3분의 1 정도로 줄일 수 있어 작은 물건이나 급히 수송해야 할 것을 운송할 때, 상인들은 이 길을 이용했다.
상대쪽 역시 아첼리나 일행을 만난 것에 적지않게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놀란 이유는 이편과는 달라, 눈앞에 보이는 일행을 두려워 하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런 산중은 경비병이나 다른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으니, 이들 눈앞에 보이는 아첼리나 일행이 좋지 못한 마음이라도 품고 있다면 막아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실리아가 나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머뭇거리며 그들중 가장 앞서 걷던 사람이 답했다.
-안녕하세요....
아마 그들은, 차라리 자신들을 모르는척 했더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산속에서, 뭐하세요?
하실리아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저희는 상인 입니다. 하찮은 물건 몇가지를 비아그시로 가져가고 있죠.
방금전의 사내가 이렇게 답했고, 곁에 있던 그보다 배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물었다.
-여러분은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그의 물음에 하실리아는 솔찍히 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이며 아첼리나를 바라보았다.
-하야얌산으로요.
-수행중이신가 보군요.
아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노인은 약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만 두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늦게나 내일쯤, 엄청난 눈이 내릴 것 같으니....
그 말에 아첼리나는 곧바로 베르몬을 돌아 보았다. 하지만, 베르몬은 상관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첼리나는 형식상 감사를 표했고, 상인들은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가던길을 계속 했다.
다시 베르몬을 따라 북으로 향하던 중, 하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베르몬, 그런데 정말 괜찮은거야? 이렇게 무작정 가도? 눈이 오면 꽤 골치아플텐데....
베르몬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하실리아는, 나름데로 생각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불안했다. 하지만, 계속 묻는다고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니기에 더 이상 그에 대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아니나 다를까, 하늘이 점차 어둑해져 갔다. 짙은 회색의 구름이 손에 다을 듯 내리깔려 있었고, 바람도 심상치 않게 거셌다.
일행은 커다란 바위 사이 적당히 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 야영을 준비했고,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
눈은, 후려치듯이 불어대는 바람에 뒤섞여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보통, 바람이 세면 눈발이 가늘어지는 법인데, 전혀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았았다. 게다가 원래 쌓여있던 눈들까지 바람에 들고 일어나 눈보라를 일으키기까지 하니 그 기세가 몹시 험악했다. 그들은 왜 그 상인들이 햐야얌 산행을 그만둘것을 권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일행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비록 좌우로 지붕처럼 버티고 있는 커다란 바위덕에 바람이 그리 강하지 않았으나, 그리고, 일행 주위로는 눈이 싸이지 않았으나,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그 두려움을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다시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잔뜩 졸린 눈을 해가지고, 하실리아가 불평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아까 그 사람들 말대로 돌아갔어야 하는데.... 베르몬 당신은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도 예상 못한단 말야?
아첼리나가 곁에서 말했다.
-베르몬님이 예언가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 사람들의 말은 무시한거야?
-아무튼, 이렇게 아무일 없이 쉴 수 있잖아. 만약 우리가 포기하고 하산했었더라면, 산 위의 폭풍이 이렇게나 거센지 어떻게 알겠어?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야.
하실리아는, 아첼리나가 말끝마다 베르몬을 감싸는 것이 재미있었다. 만약, 하실리아가 이전의 하실리아였고, 아첼리나가 운명을 알기 전의 그녀였더라면, 하시리아는 분명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기 보다는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은, 그것도 약속으로 연인이 되기로 한 아첼리나가 이런 식으로 베르몬을 감싸자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실리아로써는, 이들의 이런 감정이 서서히 쌓여오다 어느 한순간을 계기로 봇물터지듯 터져 버렸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다.
하실리아는 베르몬을 감싸는 아첼리나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 부러 이렇게 말했다.
-아첼리나, 네 말이 억지라는건 알겠지? 나는 이런 경험은 쌓고 싶지 않아. 무섭잖아. 너는 무섭지 않아?
하실리아의 물음에 아첼리나는 베르몬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지 않아.
하실리아는 몇마디 더 해 놀려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잘못하다가는, 아첼리나의 이런 좋은 기분을 깨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 때문이건, 그녀는 아첼리나가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적지않은 기쁨을 느꼈다. 그것이 요 몇 달동안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던 하실리아였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이런 눈폭풍이 불지 않지요?
아첼리나는 하실리아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시선을 베르몬에게로 향했다.
-예.
베르몬의 대답은 짧막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도 이런 정도로 심한 눈은 내리지 않아요.
흔히, 친해진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같은 모습을 찾아내려 애쓴다. 그렇기에, 아첼리나도 이런 별 것 아닌 것 까지, 서로의 경험을 하나로 맞추려 하고 있었다.
-그나 저나, 내일은 떠날 수 있으련지 모르겠군.... 이렇게 눈이 많이 오니.
아델이 조금 떨어진곳, 이 바위틈사이의 공간 입구를 막아서고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되게 하면 됩니다.
베르몬이 입을 열었고, 모두는 그를 쳐다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하실리아가 이렇게 묻자, 베르몬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순간, 일행 모두는 괴상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어라 딱히 말할수 없는 그런 느낌으로, 베르몬을 중심으로 밖으로 퍼져 나가는 무언가에 몸이 닿은 듯 했다.
갑자기, 바위 틈새로 불어오던 시린 바람이 멈추었다.조금전까지 심심치 않게 나부끼던 머리칼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모닥불도 조용히 타올랐다.
-이것이.... 엔클레이브.
아델은 놀라 이렇게 중얼거렸고, 베르몬이 말을 받았다.
-마족들의 것에 비한다면 형편 없지만, 비바람 정도는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력으로는 엔클레이브를.... 이렇게 실체화 시킬 수는 없는데....
아델은 그저 놀랍기만 한 모양 이었다. 대현자라 하더라도, 엔클레이브는 그저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원하는 데로 전개하고 불러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 자연적으로 생겨나 통제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일행 모두가 다시 한차례 그 느낌을 받는 순간, 거짓말처럼 멈춰있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잠시 바람이 불지 않았어서인지,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하자 배나 추운 듯 했다.
하실리아는 몸을 조금 앞으로 당겨 모닥불로 다가갔으나, 아첼리나는 오히려 몸을 옆으로 옮겨 베르몬 곁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추위에 덜며 일행은 새벽녘에야 간신히 하나 둘 잠이 들었고,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잠을 깨었다.
폭풍은 밤새 많이 누그러 들었다. 이제는, 폭풍이라기 보다는 그저 눈이 많이 내린다 정도로 이야기 할수 있게 되었고, 일행은 부담없이 몸을 훌훌 털고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처음 산에 올랐을때에만도, 비록 눈이 쌓여 있었다고는 하나 이정도는 아니었다. 온통, 앞 뒤 좌우도 구분 못할 정도로 쌓여있는 눈은, 틈 하나 남겨놓지 않고 모두를 뒤덮고 있었다.
나무였던 것 같은 어떤 물체는, 흡사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처럼 눈에 뒤덮여 서 있었다. 그뿐 아니라, 무언가 서있던 자리는 예외없이 눈사람 같은 형상을 띄게 되었다. 숲이였던 곳은, 눈기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바위들이 잔뜩 있었던 곳은, 울퉁 불퉁 눈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일행은 더더욱 신기한 광경도 많이 보았다. 강한 바람에 바닥에 쌓였던 눈이 튀어 오르며 흡사 안개처럼 사방을 뒤덮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길게 늘어붙은 괴상한 모양의 흰 얼음도 눈에 띄었다. 수십, 아니 수백의 눈덩이들이 흡사 생물과 같은 모양으로 덩이져 있는 모습은 신기하다 못해 무섭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눈발도 점차 가늘어져, 이제는 거의 멎어가고 있었고, 눈쌓인 고산의 설원에서 일행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종종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은 어제 약속한 데로 베르몬이 막아 주었기에 일행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하야얌산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점심무렵, 일행은 하야얌산의 중턱에 이르를 수 있었다. 비록 중턱이라고는 했지만, 다른 산의 정상부에서 능선을 타고 도착한 곳이어서, 실상은 기슭에 도착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하실리아는 자신의 앞을 걷고있는, 자칭 연인들을 굉장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베르몬은 가장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아첼리나는 조금 떨어진 곳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모습은 분명 자신이 알고 있던 연인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팔짱을 끼고, 손을 맞잡은채 끊없이 웃고 속삭이며.... 분명 그들은 그래야만 했다, 아니 하실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산행에서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 하겠는가? 길은 갈수록 험해져, 도착한지 반나절이 지나는 동안 움직인 거리가 다른곳 한두시간을 이동한 거리에도 못미쳤다. 게다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행동을 할 두사람은 아니었다. 한명은 지나칠 정도로 정을 표현하는 것을 어색해 했고, 다른 한명은 상대를 지나치게 공손히 대했다.
일행은 산을 오르며 입을 다문채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입을 열어 잠시만 이야기 해도, 입안은 바짝 마르고 목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기관지가 욱쑤셔오고.... 말많은 하실리아 역시 몇마디 하다 도저히 않되겠느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시 하룻밤을 보내고, 하루중 반나절을 오른 끝에 일행은 정상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아니, 적어도 이들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구름은 저 아래 있다. 날이 맑아 일행은 주위 모두를 살펴 볼 수가 있었다. 끝없이, 땅끝까지 볼수 있을 듯 싶었다.
바람이 드세어, 옷 겉에 두르고 있던 가죽 망토가 바람에 세차게 나부꼈다. 하지만, 일행은 맑아지는 정신에 차가운 공기를 한숨 그득 폐에 들이켰다. 춥다는 느낌보다는 상쾌하다는 느낌이 더했다.
피니언은, 일행중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신전 비슷한 것은 없었다. 다만, 한켠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서있을 따름 이었다.
피니언은 다가가 그 돌을 바라 보았고, 그 돌에는 글자가 세겨져 있었다.
-일곱대륙중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 본다. A & O.
피니언은 그 글귀를 한차례 읊었고,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들 모여 그 글을 살펴 보았다.
-A & O 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하실리아는 마지막 두 글자를 보며 이렇게 중얼 거렸고, 아델이 곁에서 한마디 했다.
-혹시 이 글을 적은 사람의 이름이 아닐까?
피니언이 고개를 그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들이 누구일까요?
아첼리나 역시 다가와 한차례 그 바위를 바라 보았으나, 전혀 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베르몬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누구인지 아세요?
베르몬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니언이 말했다.
-그보다, 신전이 어느곳에 있지요? 우리는.... 이곳에 있을테니, 아가씨를....
피니언은 말을 하기 힘들어 띄엄 띄엄 이렇게 말했으나, 베르몬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두 함께 가야 합니다.
베르몬의 말에 마지막 신전은 그래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베르몬은 따라 걸음을 옮겼다.
베르몬은 막 정상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돌아 아래로 내려갔다. 눈이 많이 쌓여 길이 아닌 것을 밟으면 산 아래로 그대로 구를 상황이었으나, 베르몬은 주저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게다가, 마법으로 눈을 다지고, 또 쓸어주어 일행의 걸음을 도와주고 있었다.
세상에, 베르몬이 아니라면 그와 같은 곳에 이런 길이 있을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게다가, 어떤 용기있는 사람이 길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길을 따라 이곳을 내려갈 수 있을까? 비록 보통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은 아니었으나, 어찌보면 불가능 하기도 했다.
베르몬의 뒤를 조심히 밟아 아래로 향하던 일행은 오래지 않아 한 너른 공터에 도착했다. 산 안쪽으로 움푹 패인 곳으로, 공터 뒷편에는 거대한 신전이 서 있었다.
피니언과 아델은 테미시아 신전 이래로, 그리고, 하실리아의 경우에는 나투이시아의 신전 이래로 두번째 보는 모습 이었다. 비록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여전 그 놀라움은 감출 수 없었다.
아첼리나는 그 모습을 보자 마자 숨조차 제대로 잘 쉬어지지 않았다. 흡사, 자신을 해치려는 괴물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한 듯, 아첼리나는 몸이 오들 오들 떨려왔다. 그녀는 조심히 몸을 베르몬에게로 기대었고, 베르몬은 자세를 조금 바꾸어 그녀가 편하게 기대도록 배려해 주었다. 아마, 이정도가 그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애정 표현인 듯 싶었다.
오래지 않아, 한 사람과 한 마리의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은 나이가 몹시 많아 보이는 남자였고, 용은 그림자보다도 검을 것 같은 흑룡이었다.
아첼리나는 한차례 베르몬은 쳐다보았고, 베르몬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첼리나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몇걸을 더 다가섰고, 베르몬이 곧바로 그 뒤를 쫓았다. 다른 일행들 역시 베르몬의 뒤를 따라 얼마간 더 앞으로 나아가서 멈추었다.
-성녀시여, 켈리시온님의 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노인과 용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첼리나에게 예를 올렸고, 아첼리나도 따라 답례했다.
-저는 이곳 켈리시온님의 궁을 지키고 있는, 케이타 켈리시온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궁의 수호수로 아킬라이아님 이십니다.
노인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자신들을 소개했고, 아첼리나는 차례로 자신의 일행을 소개했다.
다른 여느때 였다면, 이쯤, 아킬라이아나 켈리시온의 수신사가 아첼리나가 궁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을 터였으나,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곳이었다. 어느 누가 감히 그녀에게 그런 것을 독촉할 수 있을 터인가?
아첼리나는 처연히 일행을 돌아다 보았다.
마지막인 것이다. 자신의 여덟달에 걸친, 이 여행도 마지막인 것이다. 아니, 18년에 걸친 기나긴 여정이 끝나는 것이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입을 손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끝내 눈물을 멈출수는 없었고, 한줄기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턱에 고였다.
-모두들.... 고마웠어요.... 하실리아도.... 피니언 언니도.... 아델 할아버지도....
아첼리나는 이렇게 흐느끼며 몸을 돌렸다. 동시에, 피니언과 하실리아가 뛰어 나오며 아첼리나를 부둥켜 안았고, 아첼리나 역시 그녀들을 끼어 안았다.
-절대 잊지 않을꺼야. 아첼리나, 너란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하실리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피니언은 그저 자신의 아가씨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 이렇다할 말을 하지 않았다.
아첼리나는 천천히 그들의 손을 풀며, 품에서 벗어났다. 억지로, 눈물로 범벅된 얼굴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럼, 안녕.
아첼리나는 몸을 돌려 반보쯤 앞서 걷는 베르몬의 뒤를 따라 신전으로 향했다.
피니언과 하실리아는 반사적으로 몇걸음 더 따라가다 발을 멈추었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히 그녀를 보내주는 것도,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일 듯 싶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델은, 코끝이 아려옴을 느꼈다. 비록 나이를 먹어 감성이 많이 쇄했으나, 결국 그는 한방울 눈물을 떨구었다.
신전 안.
언제나와 같은 흰빛의 무한의 공간에, 어두운 반투명의 바닥이 있었다. 그리고 빛으로 된, 네 개의 기둥과 반쯤 잘려나간 하나의 기둥.
막상 이곳에 도착하니, 차라리 아첼리나는 마음이 차분해 짐을 느꼈다.
두터운 외투를 벗어 버리고, 그녀는 소매로 한차례 눈물을 닦아냈다.
-베르몬님. 이제 무엇을 해야 하죠?
아첼리나의 물음에 베르몬이 천천히 답했다.
-다섯개의 기둥, 그리고 그안에 빛나는 완전한 구체, 이것이 해야 할 일입니다.
-봉인의 의식은요?
아첼리나는 다시 한차례 물었고, 베르몬이 말했다.
-그 후의 일입니다. 우선 다녀 오십시오.
아첼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둥들 사이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중앙에 놓여있는 투명한 구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마지막이다. 이러한 공간에 발을 들여 놓는것도.... 아니,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이러한 공간에 머물에 될지도 모른다.
아첼리나의 이런 저런 생각을 깨버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아첼리나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 켈리시온의 목소리가 어떠할까 생각해 보았다. 왠지 무서울 것 같았으나, 막상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봉인을 맡은 자인가?
-예.
아첼리나의 대답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죽음, 불, 얼음, 번개를 맡은 자. 그것이 바로 나이다.
-켈리시온님 이시군요....
아첼리나느 뻔한 말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뒤로 한참동안, 켈리시온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참만에 이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와 나투이시아는 한가지 모습의 두가지 형태. 그녀를 이해했다면 나 역시 이해한 것이다.
그동안 익히 들어왔던 말이다. 아첼리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켈리시온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새까만 느낌만이 전해져 오는 공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자 아첼리나는 돌연 겁이 났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세요?
아첼리나의 물음에 켈리시온은 이렇게 답했다.
-하고 싶은말도 할 말도 없다. 나의 몸중 일부를 봉인하러 온 자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첼리나는 그의 이 말에 돌연 화가 났다. 자신이 누구 때문에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한단 말인가?
아첼리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저도 켈리시온님을 봉인 한다거나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하지 말아라.
-무책임 하시군요. 이 모든 일의 근원은 바로 켈리시온님 이시잖아요. 어째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시는 거죠? 제가 봉인을 하지 않으면, 이 세계가 멸망하게 되잖아요.
아첼리나의 말에 켈리시온이 답했다. 아첼리나의 발언이 무례하다는 사실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의 목소리는 심드렁 했다.
-어짜피, 내가 태어났을 당시, 이 세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게 어쨌단 말이냐?
-당신은 신이라면서, 존재물의 존재에 대한 애착을 알지 못하시나요?
-존재하고 싶지 않은자가, 그렇게 되지 못할때의 괴로움은 알고 있느냐?
아첼리나의 물음에, 오히려 켈리시온이 이렇게 물어왔다. 존재하고 싶지 않은 자라니, 그건 켈리시온 자신을 가르키는 말인가?
아첼리나는 그의 말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마음은 아첼리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그건....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강한 혼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본래부터 신들에게 허락된 일이다. 어째서 파혼만은, 그것만은 소유를 금하는 것인가?
켈리시온의 말에 아첼리나는 떠듬떠듬 답했다.
-너무 강하잖아요....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째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를 용서하지 않는단 말인가? 홀로, 홍염왕 압그랑 같은 녀석을 찢어 놓았는데, 그런데도 왜 나의 죄는 용서되지 않는단 말이냐? 두 개의 혼을 잃어가며 얻은 파혼을 왜 봉인해 두느냔 말이다.
켈리시온은, 아첼리나를 흡사 자신의 어머니인 존재로 착각하는 듯 했다. 이런 말들을 아첼리나에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첼리나는 켈리시온의 계속된 말에 대꾸할 말을 잃었다.
-봉인을 맡은 자여.... 나를 원망하라.... 하지만, 원망하는 마음의 열중 하나는 어머니에게 향하기 바란다.
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아첼리나는 그 공간에서 떠밀리듯 빠져나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첼리나는 신이 아닌, 엄마에게 혼나고 투정부리는 어린 아이와 만난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아첼리나는 정말 마지막이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
막연히 생각해 왔던 최후였다. 정확히 언제 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언제나 그 시간을 손꼽아 왔었다. 막상 그때가 닥치자, 아첼리나는 머릿속이 텅 비는 듯 했다.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흰 망토를 걸친 베르몬이 서 있었다. 무표정 했다. 자신이 마지막을 맞이하는 이 순간에도 그는 무표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인가? 그는 자신이 소멸하는 것이 슬프지도 않단 말인가?
아니다.
아첼리나는 이렇게 속으로 대답하며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봉인봉을, 저 잘려진 기둥으로 가져 가십시오. 그리고 그곳의 단 위에 올려 두십시오.
베르몬은, 아첼리나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어째서 이렇게 까지 목소리가 차분한걸까? 아첼리나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보다, 차분한 베르몬의 목소리가 더 슬펐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베르몬 역시 조금의 재촉함도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 보았다.
베르몬은 눈동자 까지도 차분했다. 비록, 본래 그의 표정에 변화가 거의 없다고는 했지만, 눈동자는 약간씩 감정을 내보이곤 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눈동자 마저도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아첼리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베르몬을 향해 말했다.
-베르몬님....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제 부탁 한가지만 들어 주시겠어요?
베르몬은 아첼리나의 말에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눈을 감아 주세요.
베르몬은 아첼리나의 부탁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첼리나는 조용히 발 뒤꿈치를 들어 베르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베르몬은 자신의 입술에 와 닿는 아첼리나의 입술에 조금 놀라며 눈을 떴고, 아첼리나는 부끄러운지 곧 한걸음을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베르몬님.... 정말 고마웠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에 베르몬님에게 했던 부탁, 취소해야 겠어요.... 베르몬님은, 3일동안이 아닌, 제 평생의 애인 이에요. 만약, 죽은 후,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신의 뜻이라 하더라도, 저는 그 뜻을 따르지 않을꺼에요.... 비록, 죽어야만 하는 이 운명은 거역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은 따르지 않을 꺼에요.... 테미시아님도, 그 정도는 용서해 주시겠지요?
아첼리나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들고 있는 봉인봉에 눈물이 떨어져 빛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아첼리나가 몉걸음 더 나아갈 동안, 베르몬은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아첼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도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아첼리나는 베르몬의 말에 흠칫 놀라며 천천히 뒤돌아 섰고, 베르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한 번 불러보고 싶습니다.
아첼리나는 거의 웃음이 나올뻔 했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만난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아무 거리낌 없이 해낸 일을, 마지막 부탁 이라고 까지 말하며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다니....
아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첼리나.... 양.
베르몬은 이름만 부르기는 어색했는지, 이렇게 끝을 맺었고, 아첼리나는 밝게 웃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한걸음, 한걸음. 아첼리나는 부러 하지도 않았는데, 보폭이 점차 좁아졌다. 그러나, 서있던 곳에서 봉인의 의식을 행하는 곳 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결국은 그곳에 도착했고, 아첼리나는 조용히 봉인의 식을 행하는 단을 내려다 보았다.
무어라, 기괴하고도 괴이한, 문자인듯도 그림인듯도 한 도형이 그 안에 세겨져 있었다. 신화시대의 문자도, 아라하시 시대의 글자도, 지금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빛의 기둥의 단면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형은 너무도 찬란하게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금빛은 테미시아의 상징이다. 아마도 그 글을 세겨 넣은 존재는 테미시아인 듯 싶었다.
아첼리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을 정리 하려는 듯, 한참동안이나 그러하고 있었다.
많은 것이 생각났다. 엄마, 아빠, 동생, 5년전 실종된 할머니, 피니언, 하실리아, 아델, 그리고 그간 알아왔던 많은 사람들.... 마지막으로 베르몬.
아첼리나는 두서없고 갈피없는 이 생각들에 한참이나 잠겨 있다 눈을 떴다.
손을 내밀어 이 봉을 저곳에 올려 놓기만 하면 자신은 사라진다. 하지만,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몇차례나 그것을 가져다 놓았으나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 손을 다시 자신에게로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아첼리나는 다시 한차례 베르몬을 바라 보았고, 손을 뻗어 봉을 내려 놓았다.
봉은, 단 위에 올려지자 마자, 금빛이 한란하게 빛나더니, 단 안으로 가라앉듯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빛이 그곳으로 부터 뿜어져 나와 아첼리나와 그 주위의 공간을 감쌌다.
아첼리나는 그 빛이 자신의 몸에 다가오는 것을 보며 놀라 몇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달아나려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그녀는 베르몬에게 생각이 미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달아나도 살 수는 없는 이런 상황에, 몸을 돌려 두려움에 떠는 모습 따위는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첼리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을 감싸는 빛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 뜨거워졌다. 아니, 실지로 타는지도 몰랐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아첼리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수많은 생각이 쉴새없이 떠올랐다.
생각에 집중하다 보니,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뜨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뜨겁지 않았다. 아니, 정말 뜨겁지 않았다.
아첼리나는 놀라 눈을 떴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빛을 막아선채, 지팡이를 가로로 들고, 자신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한 사내가. 희디 힌 금발과 주위를 온통 감싸고 있는 빛중 어느것이 환한지도 잘 구분이 가지 않는 그 사내는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리면서도 끝끝내 지팡이를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아첼리나는 그 사내에게 다가가려 했다. 조금전의 빛으로 옷이 모두 사라져 알몸이 되어 있었으나, 그런 것은 상관 없었다. 부끄럽지 않았다.
한걸음도 채 걷지 않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연분홍빛의 막을 발견했다. 앞뿐만이 아니었다. 뒤도, 옆도 모두 연분홍 빛의 막이 자신을 막아서고 있었다. 아첼리나는 앞으로 한걸음 크게 내딛어 그 막을 강하게 밀었다. 하지만, 단단한 벽이라도 되는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단지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눈앞에서 베르몬이 사라져 가는데, 자신은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친 듯이 실드를 두드렸다. 아픈지도, 그렇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아첼리나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채, 실드만을 두드렸다. 두 눈은 베르몬을 향해 고정된채, 그리고 입으로는 그의 이름을 쉴세없이 부르며....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실드는, 소리마저도 차단하고 있었다.
베르몬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채, 서서히 사라져가는 자신의 힘을 느끼며 차분히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녀에게 해 줄수 있는 마지막 일 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처음 그녀가 그렇게나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며, 이미 생각해 왔던 일이다. 게다가 꼭 알맞는 마법도 있다. 쓸모없는 자신의 몸뚱이를 불살라, 신의 권위에 대항할 수 있는 마법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모시던 신 시온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한부분씩, 한부분씩, 빛으로 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베르몬은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자학에서 오는 쾌락 따위는 아니었다. 다만, 오래전 부터 꿈꿔왔던 일과, 얼마전부터 원했던 일, 이 두가지가 이루어짐에서 오는 기쁨 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고싶은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의 미칠 지경으로 실드를 두드리던 아첼리나는 천천히 몸을 허물어 뜨렸다. 시선만은 베르몬을 향했으나, 끌리듯 내려오는 두 팔과 힘없이 접혀버리는 다리에 그녀는 바닥에 꿇어 앉듯 앉게 되었다.
두 팔은 여전 벽에 기대어 있었으나,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순간, 베르몬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첼리나는 그의 모습에 오열을 터트렸다. 닦아도, 닦아도 쉴세 없이 솟아나오는 눈물이 눈앞에 아른거려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더더욱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차례 눈물을 닦아 그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빛에 휩싸여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마지막 얼굴만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살짝 위로 치켜 올려진 것이,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분명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아첼리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있는 힘껏 환히 웃어 주었다. 웃었다. 그리고, 베르몬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가 선물한 반지가 사라져 갔다.
아첼리나는 재빨리 왼손을 뻗어 오른손을 움켜 쥐었다. 그가, 그가 준 단 하나의 선물이 사라져 간다. 반지를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베르몬이 친 실드는 사라져 버렸다. 마법의 주체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아첼리나는 망연히 앉아 있다가, 조심히 손을 펴 보았다. 사라진 실드처럼, 사라졌을 반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첼리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알몸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다시, 자신의 앞에 떨어져 있는 테미시아의 지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넋나간 듯, 몇걸음 앞으로 옮겨 아첼리나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몸을 숙이자, 눈물이 몇방울 떨어져 바닥에 원을 그렸다.
아첼리나는 지팡이를 집어 올려 조용히 감싸 안았다.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베르몬의 체온을 느끼려는 듯, 강하게 지팡이를 안았다. 하지만, 전해져 오는 것은 차가운 지팡이의 감촉 뿐이었다.
눈을 들어, 베르몬이 서 있던 곳을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그와 자신이 첫 입마춤을 했던 곳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었다.
망토. 흰빛의 망토가 가만히 그곳에 놓여 있었다. 베르몬은 자신을 위해 한가지 선물을 더 남겨 놓았다. 아첼리나는 조심히 그것을 들어 올려 알몸의 자신을 휘감았다.
말은, 이런 상황에 그다지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첼리나는 모든 행동을 입을 다문채 하고 있었다. 자신의 것을 버려둔채, 베르몬이 걸쳤던 두터운 털외투를 망토 겉으로 한차례 더 두르곤, 아첼리나는 지팡이를 든 채 한참동안 멍히 멈춰 서 있었다.
망연.... 자실.... 분명 아첼리나 자신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산발적으로 툭툭 튀어나올 뿐, 그리고 어지러운 영상을 만들어 낼 뿐, 한참을 생각해 보아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소멸하지 않았다.... 신의 구슬은 깨어져 버렸다. 그가.... 그가 깨뜨려 주었다. 왜지? 그는.... 그는 나를,... 나를 그 정도로 생각했던 것일까? 목숨을 버릴 정도로?.... 단지, 3일 동안의 애인을 위해.... 그리고, 나는.... 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한거지? 내, 나의 그에 대한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 이라고.... 진정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어째서 익히 들어왔던 이야기와는 달랐던 거지? 그는 내게 단 한차례도 사랑한다는 말을 건내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이름 조차도 다정히 불러주지 않았다. 어째서 익히 들어왔던 이야기와는 다른거지?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불운한 사람이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목숨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조차 마음을 열 수 없는, 웃어 보일 수 없는 불운한 사람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채, 쓸쓸히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웃는 방법 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왜 알지 못했던 거지?.... 나는 왜 그를 조금 더 다정히 대해주지 못한거지? 입을 다문채 바라만 보는 것이, 떠들며 있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왜 그런 그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거지?
이제.... 그는 없다. 흔히들, 가슴속에 묻는다고 이야기 한다....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은.... 그것은, 나를 몹시 슬프게 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없다.
죽음은 단지 헤어짐일 뿐이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듯 싶다. 헤어짐.... 일생동안 얼마나 만은 헤어짐을 겪을까? 왜, 단지 알고 있던 사람을 볼 수 없을 뿐인데.... 이렇게 슬픈걸까? 알고 있던 사람을 볼수 없게 된 경우는.... 적지만은 않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생각해 보아도,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훗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슬픈걸까?
눈물.... 흐르는 것은 당연하다.... 귀찮을 정도로 쉴새없이 흐른다.... 눈물때문에.... 주위가 울렁거린다. 이런 상황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계속 닦아낸다. 그가 보이지 않아서.... 눈물을 계속 닦아낸다.
평소 그가, 나의 우는 모습을 좋아했는지 아닌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니, 그것뿐이 아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왜 그는 그렇게 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걸까? 내게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더라면.... 그에대해 훨씬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을텐데.... 훨씬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텐데.... 어째서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이렇게나 적은거지? 그는 내 금발을 좋아 했을까? 옷은? 색은? 음식은? 좋아하는 책은? 좋아하는 여성상은?....
억지로, 그를, 그에 대한 느낌을, 그리고 그의 모습을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점점 기억들이 희미해져 간다. 추억이 적다. 내가 그를 떠올릴 만한 추억이.... 그를 잊고 싶지 않다....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를.... 언제나 그에게 둘러쌓여 지내고 싶다. 그와, 그리고, 그와의 추억과.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시 한차례 고개를 휘 둘러 그를 찾는다. 어디엔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선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그를....
하지만, 고요했다. 자신의 숨소리를 제한 어떤 소리도 이 공간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다시, 슬픔이 울컥 솟는다.
그러나....
그는 웃어보였다. 그는, 내게 웃어보였다. 짧지만은 않았던 그와의 시간중에, 단 한차례 내게 지어보인 표정에서, 그는 웃었다.
웃었다.... 웃어라.... 명령?
아첼리나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신전 밖으로 향했다.
둘이 들어가, 한 명이 나올 것은 정해진 사실 이었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남자가 아닌 여자이자, 일행은 몹시 놀랐다. 게다가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들 가까이에 다다를때까지, 모두들 멍청하다 싶은 표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말을 거낸 것은 피니언이었다.
-아.... 아가씨. 어떻게 된 거에요?
아첼리나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가로 저어 대답하기 싫다는 뜻을 표했다. 그리고, 모두들 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첼리나의 웃음은 몹시 어색했다. 실제 웃는 모습도, 그리고 지금의 분위기도.... 결코 웃어서는 않될 분위기였다. 눈물을 그렁거리며, 미소짓는 아첼리나의 모습은 보기에도 딱했다.
하실리아가 소리쳤다.
-그따위 어색한 웃음은 짓지 마. 차라리.... 차라리 이럴땐 울어버리란 말이야.
아첼리나는 하실리아의 말에 차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웃어야 해.... 살았잖아.... 그가 되찾아 주었어.... 그가.... 즐겁게.... 웃으며 살아야해.... 그도 마지막에는 웃어주었어.... 내게.... 웃어 주었어....
미친듯도 보였다. 하지만, 아첼리나의 정신은 맑았다.
그때, 용 아킬라이아가 나서 아첼리나에게 말했다.
-성녀여.... 이제, 어머니땅을 지키는 자가 해야 할 일을 그대가 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맡으시겠습니까?
아첼리나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고, 용은 계속해 말을 했다.
-17년후, 위다의 카타성에서 만날 담갈색 머리칼의 아스레하 아레미온 이라는 아가씨를 어머님의 땅에 대려다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도....
아첼리나는 다시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은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첼리나는 모두를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이제 돌아가요....
어디로? 아첼리나는 일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갑자기 핑하고 눈물이 돌았다. 웃어야 한다고 하던 그녀의 강변도 더 이상은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하였다.
눈물이 조심스럽게 손에 떨어졌다.
그가 끼워준 푸른 보석이 밖힌 반지 위로....
아첼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눈물에 젖어버린 반지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들을 수 없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벗어나기 힘들군요.... 운명 이라는 것.
거짓말장이.
나에게 부술수 없는 운명이라는 신의 구슬을 깨 준다고 하고서....
당신은 당신의 기억 이라는 더욱 깨뜨리기 힘든 운명을 남겨놓고 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