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 外-
화정리에는 배밭이 있습니다 응달에는 잔설이 기웃거려 아직 겨울이 그대로인 배밭에서 중년의 내외가 가지를 치고 있습니다 헐린다는 소식에도 울분 삭이듯 거친 손을 바삐 움직입니다
노을은 쭈그러진 노인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다 끝내 쓰러지고 맙니다
들이마신 담배연기가 상념의 하루를 추스립니다
-봄-
꽃을 잃어 서러운 잎만 무성한 검은 산 비개인 하늘이 다가오고 안개가 걷히면 산은 의연히 일어선다
산비탈 밭가에 홀로 핀 복사꽃 살구꽃 부드러이 고개 떨구면 저녁 산은 그 넓은 가슴으로 일몰을 잠재운다 송아지가 잠들고 개구리 울음이 창호지에 걸리면 봄밤은 별을 안고 그으기 지샌다
-임진강 1-
얼어 붙은 강 낯선 발자국 길게 늘인 강가 자갈 허물어지는 소리 노을 반사되어 충혈의 강이 되어버린 임진강 지나는 바람 기척에 가까스로 일어서는 메마른 풀들
흐르다 만 강이여 나뭇가지에 걸린 시련의 흔적들 세월 지나도 추스릴 이 없어 그림자 사그러 들고 되올 길 어두운데도 차마 발걸음 못 떼어 주저 앉는다
동면의 강이여 오가는 바람 기척 들리거든 살아있음 아래웃녘에 전해다오
1995년 계간 시와 시인 "봄호" 등단
<심사평> - 작가가 신작을 쓸 때에는 늘 신인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장구한 세월을 두고 작품생활을 해온 사람에게도 불변할 진리이기만 하다. 만일에 이같은 명제를 망각하고 작품을 썻을 경우에는 그 창작품의 세계는 이미 정성에 찌들어 참신한 생명성은 커녕 소위 메너리즘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살아있는 시인은 늘 고뇌하고 번민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의 작품성을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그는 주제와 함께 내용을 두고 , 숙면적인 표현수단으로서의 시어를 세계를 두고, 모름지기ㅣ 다시 신인이되어 무섭게 매달리는- 자신에 대한 엄숙한 "형의 집행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신인상 응모작품"의 당선작을 내세우면서 정작 당사자의 작품선정과 그 작품심사평에 앞서 이처럼 "신인정신"을 강조해 두는 까닭인 즉, 이로부터 시단에 나서서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할-명실이 함께하는 신인시인들에게는 물론이요, 일컬어 "기성시인"이란 일종의 기득권(?)을 갖고 시작품을 창출하는 필자와 우리나라의 숱한 시인들에게도 어쩌면 되칲어 봐야 할 "성찰의 명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모든 예술가는 신작에 들수록 더욱 신인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전제하면서, 이춘우씨의 시 "가지치기"외 몇편의 작품을 선정해 문단에 내보내기로 한다. - 심사위원 정 공 채 시인-
<당선소감>-
어릴적 먼지나는 신작로를 걸으며 길옆 오래된 미루나무를 늘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그 높다란 곳에 집을 짖고 사는 까치들. 인간에 대한 경계 내지 혐오 때문일까. 아니면 푸른 하늘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함일까)> 유월 보리이랑 더운 김에 숨 막히던 일도 떠오른다. 얼마전 고향 다녀오던 길에 회양목 몇 그루 뽑아다 심었더니 신통치가 않다. 나무도 제 고향을 그리워하나 보다. 오늘따라 많은 생각들이 교차된다. 앞으로 글쓰기가 더욱 힘들 것 같다. 현상에 대한 단순한 베끼기가 아닌 진정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움을 전하리라. 분노가 아닌 용서를 전하리라. 갈등보다는 화해를..... 못난 글을 뽑아주신 정공채 선생님께 진정 감사드리며, 장석향 선생님, 서청학 시인님께도 아울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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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날은 고독하다
이춘우
살아있는 날은 고독하다 불안을 감추고 그리움에 뒤척이던 고독의 날들
샛강 멁은 물살에 가냘픈 손길들의 슬픈 이별을 뒤로하고 더밀려온 종이배
어두워지는 한낮 후두둑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다가오는 그리움
내 고독한 날은 언제 지워질까 그리움도 고독의 연장일까 그리움의 끝이 고독일까 아니면 시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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