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미의 극치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구십삼춘(九十三春)에 짜 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서 녹음방초를 승화시(勝花時)라 허든고
[버드나무 가지는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천을 만들 때 쓰는 베틀 부속품)이 되어
석달 봄 내내 짜내느니 나의 시름뿐인데,
누가 흐드러진 녹음을 꽃보다 아름답다 하는고]
고운 목소리로 부드러운 명주실 자아내듯 엮어 가는 여창 가곡 이삭대엽(二數大葉)의 노랫말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슬픈 사랑의 노래로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의 가슴을 저미지만 이 곡은 그보다 더 가슴 저미지 않는가? 그러나 가곡의 독특한 선율은 이런 애달픔을 담담하게 만든다. 비유하자면, 조용한 달밤의 정적과 어우러지는 가락, 매미가 한적하게 울어대는 시골의 정자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가락, 천지가 조는 듯 조용하게 흐르는 물결 같은 선율을 들 수 있다.
가곡(歌曲) 하면 대부분은 홍난파나 슈베르트를 떠올리겠지만 원래 가곡은 시조를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성악곡으로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이라고도 불리었다. 우리 음악은 선에서 시작하여 선으로 귀결되는 음악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선율의 흐름을 중심으로 발달해 왔다. 가곡은 그 가운데서도 유장한 선율의 극치를 이룬다. 가곡은 고려 말엽에 처음 생겨 선비가 익혀야 할 교양의 하나로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할아버지들이 ‘동창이~ 밝았느냐~’ 하며 한없이 늘여 빼며 부르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곡에서 파생한 시조(時調)인데, 시조와 가곡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본다면 가곡이 어떤 음악인지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눈에 띄는 가장 큰 차이는 반주이다. 시조는 장구 반주 하나로도 족하고, 그도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무릎 장단도 상관없지만, 가곡은 세피리ㆍ대금ㆍ가야고ㆍ거문고ㆍ해금ㆍ장구 등 정식으로 관현악 반주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시조는 초ㆍ중ㆍ종장의 3장을 기본 단위로 하지만, 가곡은 같은 노랫말을 모두 5장으로 나누고 두 번의 간주가 있다. 두 번의 간주는 노래를 시작하기 전의 전주나 노래가 모두 끝난 후의 후주 역할을 하는 대여음(大餘音), 3장과 4장 사이의 간주곡 중여음(中餘音)을 말한다. 또 다른 차이는 시조가 평시조(平時調) 혹은 사설시조(辭說時調) 하나로 완결되는 음악이라면, 가곡은 5장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시조가 평시조의 일정 가락에 아무 시조나 대입해서 노래하는 것이라면, 가곡은 조금씩 다른 선율을 갖는 각 잎이 모인 것이다. 대개 속도가 느린 초삭대엽(初數大葉), 이삭대엽으로 시작해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언롱(言弄), 편락(編樂) 등으로 진행하다가 태평가(太平歌)로 끝을 맺는다.
시조는 여러 사람이 가사만 바꾸어 돌려가면서 부르거나 즉흥적으로 시조를 지어 서로 화답하던 음악이지만, 가곡은 남창이면 남자 한 사람, 남녀창일 경우에는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가며 한 바탕을 계속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가곡 악보로 가장 오랜 것은 1572년 간행된 『금합자보(琴合字譜)』의 평조 만대엽(慢大葉)이다. 이 곡은 세조(1417~1468년, 재위 1455~1468년) 때의 음악을 기록한 『대악후보(大樂後譜)』(1759년)에도 수록되어 있어 만대엽이 그 이전부터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가곡을 수록한 악보를 살펴보면 느린 만대엽, 중간 속도의 중대엽(中大葉), 빠른 삭대엽(數大葉)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1) 이들 기록을 살펴보면 가곡의 원형은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으로 압축된다. 양덕수(梁德壽)가 편찬한 『양금신보』(1610년)의 다음 기록은 가곡의 연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요새 연주되는 대엽(大葉)의 만(慢)ㆍ중(中)ㆍ삭(數)은 모두 정과정(鄭瓜亭) 삼기곡(三機曲) 중에서 나온 것이다.
가곡의 뿌리는 고려 시대에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중대엽과 삭대엽은 전해지지 않았다. 중대엽은 17세기 전반부터 부르기 시작해 17세기 후반에 제1ㆍ제2ㆍ제3의 파생곡을 낳았지만 18세기 전반부터 차츰 인기가 시들었다. 1800년대에 편찬된 『구라철사금자보(歐邏鐵絲琴字譜)』(1800~1834년)와 『현금오음통론(玄琴五音統論)』(1886년) 등 악보에는 중대엽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세기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듯하다. 삭대엽은 17세기 후반부터 점차 성행하기 시작해 18세기 전반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익(李瀷, 1681~1763년)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국조악장(國朝樂章)」조에도 영조 무렵에 삭대엽이 성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나라 가사에 대엽조(大葉調)가 있는데, 형식이 모두 같아 장단의 구별이 없다. 그 가운데 만(慢)ㆍ중(中)ㆍ삭(數)의 세 조가 있는데, 이것은 본래 심방곡(心方曲)이라 하였다. 그러나 만은 너무 느려 사람들이 싫어해 폐지된 지 오래고, 중은 약간 빠르긴 하나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적으며, 지금 통용되는 것은 삭대엽이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삭대엽이 성행한 까닭은 느린 노래보다 빠른 노래를 좋아했던 사람들의 취향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록에도 나타난다. 『영조실록』 권 107에 “악사 장천주(張天柱)에게 악공(樂工)을 잘 가르쳐 빠른 음악이 되지 않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늦게까지 남은 삭대엽이 현행 가곡의 직접적인 모체가 된 셈이다. 17세기 삭대엽이 실린 거문고 악보2) 가운데 특히 『양금신보』에는 삭대엽 악보는 없고 대신 “무도지절(舞蹈之節, 춤장단)에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의 삭대엽은 춤곡이었던 듯하다. 비슷한 시기의 『현금동문류기(玄琴同文類記)』에 삭대엽 악보가 있는데 평조 삭대엽, 우조 삭대엽, 허사종(許嗣宗)이 연주한 삭대엽이 실려 있어 17세기 이후에 삭대엽에서 두 가지 변주곡이 파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의 삭대엽이 실린 거문고 악보3)에서는 삭대엽의 네 가지 파생곡이 더 나타난다. 『한금신보(韓琴新譜)』 우조 삭대엽에 제1ㆍ2ㆍ3ㆍ4가 나오는데, 이것들이 각각 제1은 초삭대엽, 제2는 두거, 제3은 삼삭대엽, 제4는 이삭대엽으로 발전했다. 비슷한 시기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서는 만대엽은 아예 없어지고 농(弄)ㆍ낙(樂)ㆍ편(編)이라는 변주곡이 새로 등장했다.
『삼죽금보(三竹琴譜)』(1841년), 『현금오음통론(玄琴五音統論)』(1886년)이나 박효관ㆍ안민영의 『가곡원류(歌曲源流)』(1876년)와 같은 19세기 가곡의 악보를 살펴보면 중대엽(中大葉)이 없어지고4) 삭대엽(數大葉)이 한층 더 발전하여 현행 가곡의 체계로 잡혔다.
19세기의 대표적인 가곡집 『가곡원류』에는 우조와 계면조의 이삭대엽에서 중거(中擧)ㆍ평거(平擧)ㆍ두거(頭擧)가 차례로 파생하고, 언롱에서 언편이 나와 농ㆍ낙ㆍ편의 곡조에 각각 ‘엇’의 형태를 지닌 곡이 확립된다. 17~19세기의 가곡은 이렇게 발달했는데,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곡의 역사적 발전 단계
『금합자보』, 『양금신보』 등 초기의 가곡 악보를 살펴보면 가곡이 처음 생겼을 때는 그 빠르기에 따라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의 세 가지 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대엽과 중대엽은 너무 느려 18세기 전에 모두 사라지고 가장 빠른 삭대엽만 남았다가 농ㆍ낙ㆍ편이 새로 등장하고 조선 말기에 중거ㆍ평거ㆍ두거가 생기고, 언롱에서는 언편이 파생해 오늘날의 가곡 한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삭대엽의 ‘삭(數)’은 ‘빠를 삭’이다. 초기에는 삭대엽이 만대엽이나 중대엽보다 빠른 음악이었다. 요즘 삭대엽은 무척 느리다. 우리나라 사람의 음악 심성은 느린 음악으로 시작하여 빠른 음악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앞의 느린 만대엽ㆍ중대엽을 부르지 않게 되자 삭대엽을 여러 곡으로 변주시켜 이것을 다시 느림-중간 속도-빠른 속도의 음악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삭대엽은 이름은 빠른 음악이지만 실제 음악은 무척 느리다.
중거니 평거니 하는 것은 가사와 상관없이 음악의 성격을 지칭하는 말인데, ‘가운데를 든다’는 중거는 노래 중간 부분을 높게 부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초삭대엽은 가장 먼저 부르는 빠른 노래, 이삭대엽은 두 번째로 부르는 빠른 노래라는 의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가곡은 가사 전달보다 음악적인 표현을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삭대엽이 빠른 곡이라고 하지만 서양 음악에 비하면 엄청나게 느리다. 이삭대엽의 경우 모두 50여 자에 불과한 가사를 노래하는 데 14~15분의 시간이 걸린다.
가곡 한 바탕은 평조(우조)와 계면조, 두 가지가 섞인 것 세 선율로 구성된다. 우조 음계로 된 곡을 10여 잎 부르고, 이어서 계면조로 된 곡들을 부르는 식이다.
우조와 계면조의 음악 특징을 옛 가곡집인 『해동가요(海東歌謠)』나 『가곡원류』에서 언급했는데, 우조는 청장격려(淸壯激勵) 또는 청철장려(淸澈壯勵), 즉 소리가 맑고 굳세고 씩씩한 남성적인 느낌, 계면조는 애원격렬(哀怨激烈) 또는 애원처창(哀怨悽篩), 즉 슬프게 원망하는 듯한 애처로운 여성의 슬픔으로 표현하였다.
가곡을 부를 때는 가운데에 가객이 앉고, 반주자들이 빙 둘러앉아 반주를 한다. 남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부르는 남녀창 가곡일 경우에는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에 앉는다. 남자는 그냥 책상다리 자세로, 여자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모아 다소곳이 세운 무릎을 잡고 노래한다. 가곡을 부를 때는 아무리 높은 소리를 내더라도 고개를 흔들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법이 없다. 정좌한 자세 그대로 단정하게 앉아서 계속 불러 나간다.
가곡의 발성은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무게가 있어야 한다. 가곡은 판소리의 발성과도 다르고, 민요 부르는 형식으로 불러도 안 된다. 즉 단전으로부터 소리를 밀어 올려 확 열린 목을 통해 시원하고 품위 있게 불러야 한다. 간드러진 소리를 써서는 안 되며 자연스러우면서도 품위 있게 해야 한다. 가곡을 부르는 방법의 이런 엄격함은 이 노래가 선비 문화와 밀접한 점과도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에 음악은 선비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교양 중의 하나였다. 선비가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교양을 육예(六藝)라고 불렀는데,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악은 물론 음악을 말한 것이다. 선비들은 서재에 거문고를 마련해 두었다가 책을 읽다 쉬는 틈틈이 거문고를 연주하곤 했다. 이때의 거문고 연주는 독서를 쉬는 동안 마음에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자기 수양의 연장이었다.
선비들의 이런 음악을 바른 음악 곧 정악(正樂)이라고 하는데, 이는 감정 표출을 절제하는 음악으로 중용(中庸)을 목표로 하였다. 『시경(詩經)』이나 『논어(論語)』에서 말하는 ‘불음(不淫)’과 ‘불상(不傷)’은 이와 같은 유교적 음악관을 대변하는 말로, 군자의 음악은 즐거움이 지나쳐 음란해서도, 슬픔이 지나쳐 마음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음악을 말하는 것일까.
금화 소씨가 말하였다. 오직 군자만이 음악을 안다. 그러므로 애절하고 힘이 없는 소리를 살펴서 그 뜻이 쇠약하고 슬프고 나약한 음이 될 줄을 알고, 명랑하고 여유 있는 소리를 살펴서 너그럽고 조화롭고 느슨하고 평이하고 꾸밈은 번잡하지만 절도는 간단한 음이 될 줄을 안다. 이 같은 부류는 이른바 소리를 살펴서 음악을 아는 것이다. 너그럽고 여유 있고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마음의 움직임이 온화한 그런 음을 살펴서 화락한 악이 일어나게 될 줄을 알고, 넘치고 편벽되고 사악하고 산만하며 소리가 빠르고 속도가 난잡한 음을 살펴서 음란한 악이 일어나게 될 줄을 아는 이 등은 이른바 음을 살펴서 악을 아는 것이다.······ 진실로 능히 악을 알 수 있으면 예에 가까운 것이다. 대개 예란 사물의 이치이고, 악은 인륜의 도리에 통하기 때문에 예에 가까운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예와 악이 어찌 두 가지 이치이겠는가.
-『예기(禮記)』, 「악기(樂記)」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군자의 음악은 느리고 부드럽고 여유 있는 음악이다. 가곡은 성정을 바르게 기른다는 예악 정신에 잘 맞는 음악이다. 중인 이상의 식자 계층이 즐겼던 음악이기에 가곡은 노랫말을 담은 책이 많이 전하고 고악보 대부분에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가곡은 고려 말 정과정부터 19세기까지 끊임없이 변해 왔다. 즐기는 사람들의 취향이 바뀌면서 이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자꾸만 변주곡을 만들어 낸 것이다.
처음 만대엽(慢大葉)에서 중대엽ㆍ삭대엽으로, 삭대엽은 초삭대엽ㆍ이삭대엽ㆍ삼삭대엽으로 변했다. 이삭대엽은 중거ㆍ평거ㆍ두거로, 삼삭대엽은 농ㆍ낙ㆍ편으로, 다시 농은 우롱ㆍ평롱으로, 낙은 계락ㆍ편락ㆍ언락으로 점점 곡수가 늘어났다. 그만큼 가곡이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며 자주 연주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전통 가곡은 변주를 멈추었다. 일반 청중은 말할 것도 없고 전공자도 아주 적으니 참 안타깝다.
가곡의 아름다움은 독특한 선율에 있다. 우리 음악은 대부분 화성 없이 선율의 흐름에 중점을 두었는데, 가곡이 특히 그렇다. 그래서 선에서 시작하여 선으로 귀결되는 음악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같은 선적인 아름다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 민족의 강인하고 끈질긴 정신이 음악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긴 선율이 배의 힘이 필요한 긴 호흡에서 나오듯, 유약하게 흐르는 듯한 음률 밑으로 힘과 정신이 흐르는 것이다.
가곡은 사람의 목소리가 주가 되는 음악이다. 그렇지만 판소리나 일반 잡가처럼 간단한 반주에는 부르지 않는다. 대금(젓대), 가야고, 거문고, 해금 등의 관현악이 갖춰져야 한다. 이 가운데 거문고는 가곡 반주에 절대 빠지지 않는 악기다. 다른 악기가 없더라도 거문고만은 갖춰져야 가곡을 부를 수 있다.
이렇게 거문고를 중심으로 가야고, 해금, 대금 등이 주가 되는 편성을 흔히 줄풍류 혹은 세악(細樂)이라고 부른다. 현악기가 근간이 되는 만큼 비교적 음량이 적고 실내에 알맞은 음색을 낸다. 원래 세악은 고취악의 전부고취(前部鼓吹)와 후부고취(後部鼓吹) 가운데 전부고취에 비해 음량이 적은 후부고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1930년대에 거문고, 가야고, 양금, 세피리, 대금, 해금, 단소, 장구 등의 악기로 소규모 합주를 하면서 실내악 중심의 소규모 관현악 편성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세악 편성은 항상 같지 않고, 거문고ㆍ가야고ㆍ양금ㆍ세피리ㆍ대금ㆍ해금ㆍ단소ㆍ장구 가운데 선택한다. 때로는 가야고ㆍ거문고ㆍ양금으로만, 때로는 대금ㆍ세피리ㆍ해금으로만 이루어지지만 일반적으로 가야고ㆍ거문고는 빠지지 않고 선율을 담당하는 피리 종류가 섞인다. 이러한 편성의 가장 큰 특징은 음량이 적고, 섬세하다는 것이다. 세악은 가곡 반주 외에 지금은 현악영산회상 연주에도 쓰인다.
고려 말 정과정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가곡이 오늘에까지 전해진 데는 금하 하규일(琴下 河圭一)의 공이 크다. 하규일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863년 음력 6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눈앞에 둔 변혁기였다. 하규일은 6세 때부터 11년 간 집안에서 한문을 배우고, 14세에 관례를 치르고, 34세 때부터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주로 관계에서 활동하였다.
하규일이 음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세 무렵이었는데, 집안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숙부였던 하준권(河俊權)과 사촌 하순일(河順一)이 모두 당대의 이름 높은 가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서 가곡을 처음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준권에게서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믿기 어렵다. 하준권은 박효관과 쌍벽을 이루는 당대의 대가였으므로 처음부터 그에게 배웠다기보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을 때 다시 배웠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하규일과 숙부 하준권에 관한 다음 일화도 후자의 가설을 뒷받침해 준다.
“너, 노래 배운다지?”
“네”
“그럼 내 앞에서 한 번 불러 보아라”
“지금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한 숙부이며 가곡의 대가가 노래를 부르라니 당황했다.
“왜 사죽(絲竹, 관현악 반주)이 없어서냐?”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되었다. 스스로 장단을 치면서 불러보아라.”
하규일은 숙부 앞에서 가곡 우조 초삭대엽을 공들여 불렀다. 음악을 다 듣고 난 숙부는 매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헛수고야, 헛수고!”
숙부는 말했다.
“자세히 들어 두어라, 일청 이조(一淸二調)라는 말을 너도 들어 알고 있겠구나. 잡가(雜歌)도 그렇지만 고상한 노래는 첫째 목이 좋아야 하는 법이야. 그런 목으로 잡소리면 몰라도 가곡은 아니 된단 말이야.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 그런 말이다. 일찌감치 단념하는 게 좋아. 미리 나에게 알렸으면 쓸데없는 고생을 아니했을 것을······, 헛애만 쓰지 않았니?”
그렇지만 하규일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얼마나 더 공부하면 되겠습니까?”
“남이 한 번 하면 너는 백 번, 천 번을 연습해야 한다”
이 말을 듣고 하규일은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노래에 매달렸다. 마치 고행과 같은 맵고 혹독한 공부였다고 한다. 하규일은 늘 ‘살기를 기약하면 죽고, 죽기를 기약하면 산다.’를 되뇌곤 했다는데, 목이 터지는 듯싶다가 목에서 선지 같은 피가 쏟길 여러 차례, 그렇게 ‘여러 동이의 피를 쏟고’서야 비로소 비단같이 아름다운 소리가 실 꾸러미 풀리듯 흘러나왔다. 이처럼 피를 토하는 수련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나라가 망하자 하규일은 관계에서 물러나 1911년 문을 연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학감에 취임했다. 정악전습소란 1909년 발족한 조양구락부(朝陽俱樂部)가 발전한 것으로 동호인들이 여유 있는 이들의 사랑에 모여 음악을 즐기는 ‘율방’을 근대화한 것이다. 이들이 자기들끼리 음악을 즐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옛 음악과 새로운 음악을 가르칠 목적으로 개편한 것이 바로 조선정악원(朝鮮正樂院)이다. 정악전습소는 이 조선정악원 내에 의습부(懿習部)와 교수과(敎授科) 두 과정을 묶어 이르는 말인데, 의습부는 이미 음악을 배운 사람들이 기량을 닦는 과정이고, 교수과는 초보자를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하규일은 학감으로 있으면서 여악분실장(女樂分室長)을 겸하였다. 여악분실은 궁중에 소속되어 있다가 물러 나온 기생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이다. 궁중에는 궁중 의원에 소속되어 평상시에는 간호사 역할을 하며 가무를 익히다가 행사가 있을 때 동원되는 약방기생(藥房妓生)과 바느질 일을 겸하던 상방기생(尙房妓生)이 있었다. 궁중에서 나온 이들을 모아 기생 조합을 만들고 여악분실에서 가곡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26년 이왕직아악부에서 하규일을 초빙하였다. 이왕직아악부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음악의 연주를 맡았던 음악 기관인데, 국가 기관이었던 장악원이 아악과 궁중 정재만을 전해 온 반면, 이곳에서는 가곡ㆍ가사ㆍ시조 등의 음악도 두루 가르쳤다. 여기서 하규일은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하루에 두 시간씩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하규일의 가곡은 라디오를 통해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었다. 1927년부터 일본은 경성방송을 일본어 방송과 함께 우리말 방송을 하는 2중 방송으로 운영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우리 음악이 방송에 자주 나가게 되었다. 하규일의 가곡은 새해 첫날 신년 축하 음악으로 방송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어 방송이 가부키의 독특한 곡조인 기다유부시(義太夫節度)를 방송하는 데 대한 맞편성이었으나, 어느 사이엔가 관례가 되었다. 하규일은 우조 초삭대엽 가운데 ‘동창이 밝았느냐’ 또는 ‘남훈전 달 밝은 밤’을 불렀는데, 고상함과 격조로 새해의 정감을 표현하는 데 적격이었다.
하규일은 음반도 취입했다. 1928년 당시 이왕직아악부에서 아악 전반에 걸친 음반을 제작했는데, 이때 제자인 이병성ㆍ이병호와 함께 녹음했다. 반주에는 대금 김계선(金桂善), 피리 고재덕(高在德), 양금 김상순(金相淳), 해금 민완식(閔完植), 장구 김일우(金一宇)가 담당하였다. 제대로 된 가곡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당시의 음반이 3분짜리여서 짧은 노래로 축약해 담는 바람에 가곡의 참모습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쉽다.
당시는 가곡이나 가사 등을 즐기는 사람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런 만큼 죽을 때까지 가곡 전수에 애썼던 하규일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자칫 사라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규일은 정악전습소와 이왕직아악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곡과 가사, 시조 전반의 노랫말을 망라한 『가인필휴(歌人必携)』(1931년)라는 저서를 남겼다. 현재 전승되는 하규일 전창의 노래에는 남창 가곡 89곡, 여창 가곡 71곡, 가사 8곡, 시조(중허리시조, 평시조, 지름시조) 등이 있다.
가사(歌詞)는 가곡과 시조의 중간 성격을 띤다. 가곡이 아악 형태의 격조 높은 예술 음악이고 시조가 대중적인 음악이라면, 가사는 아악과 민속악 특히 서도 소리의 중간에 위치하는 세미클래식 음악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열두 노래를 한 틀로 삼아 부르기 때문에 12가사라 부른다.
가사는 하규일, 임기준(林基俊)의 유음(遺音)에 의해 겨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하규일은 백구사(白鷗詞)ㆍ황계사(黃鷄詞)ㆍ죽지사(竹枝詞)ㆍ춘면곡(春眠曲)ㆍ어부사(漁父詞)ㆍ길군악ㆍ상사별곡(相思別曲)ㆍ권주가(勸酒歌)의 8곡을 전수(傳授)하였고, 임기준은 수양산가(首陽山歌)ㆍ처사가(處士歌)ㆍ양양가(襄陽歌)ㆍ매화타령(梅花打令) 4곡을 전수하였다.
하규일은 1926년에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취임하여 1937년 5월 돌아가기 직전까지 가곡과 아울러 위에 든 8곡의 가사를 전수하였다. 그는 의식적으로 이 여덟 곡만 부르고, 수양산가 이하 4곡은 격조가 낮다는 이유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왕직아악부에서는 1939년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 동안 임기준을 임시 촉탁으로 초빙하여 나머지 4곡의 가사와 사설지름시조를 전수받았다.
하규일 전창인 백구사나 황계사와 같은 일부 가사의 요성법에는 폭 넓은 전라도의 요성 방법이 약간 도입되었고, 임기준 전창의 4곡 가사와 춘면곡ㆍ어부사 등 일부 가사는 기음(基音)에서 4도 위의 음을 격렬하게 흔드는 서도적인 창법이 도입되었다. 일부 가사와 서울 지방의 12잡가 창법은 남도(특히 전라도)보다 서도(황해도, 평안도) 소리와 공통되는 점이 많다.
가곡은 반드시 관현악 반주로 연주하나, 가사는 반주가 없어도 무방하다. 가사는 시조와 같이 장구 장단에 맞추어 혼자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반주를 할 경우에는 피리나 대금 등 단(單)잽이에 장구를 곁들이거나, 범위를 넓혀 피리ㆍ대금ㆍ해금ㆍ장구로 편성한다.
가사나 노랫가락을 따라 가는 수성(隧聲)가락으로 반주하면 되는데 이마저도 제대로 할 줄 하는 이가 드물다. 가곡창(歌曲唱)을 잘 이해하고 노래 부르는 사람과 호흡이 잘 맞아야 완전한 가곡 반주가 이루어지듯이, 수성가락이라 하더라도 반주하는 사람이 가사 가락을 익히고 있어야 좋은 가사 반주가 이루어진다.
우리 음악에는 6박자 음악은 많으나 5박자 음악은 그리 흔하지 않다. 영산회상의 삼현도드리[三絃還入]ㆍ하현도드리[下絃還入]ㆍ염불도드리[念佛還入]와 도드리[尾還入]와 같은 곡은 한 장단이 4분의 6박자이고, 시조 장단에는 4분의 5박자가 있다. 12가사는 한 장단이 6박자로 된 곡과 5박자로 된 곡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대부분 느린 6박자의 곡이며, 상사별곡ㆍ양양가ㆍ처사가는 5박자이다. 12가사의 6박자 장단과 5박자 장단은 장구 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매화타령 장단은 빠른 6박자로 장단 치는 방법이 12잡가와 같이 제5박인 ‘채’를 갈라침으로써 경쾌한 느낌을 준다. 권주가는 잔치 때 부르는 노래로서 절차나 동작의 느리고 빠름에 따라 서로 맞추어야 하므로 박자와 장단이 일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