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의 첫 번째 길인 1코스 심도역사문화 길은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의 길이다,
강화산성 동문을 시작으로 강화성공회한옥성당, 용흥궁, 강화문화원, 고려궁지, 강화향교를 둘러보고 북문에서 북장대 터에 올랐다가 아늑한 대산마을 벌판을 보며 연미정으로 가는 길은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고향 같은 길이다.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터미널에서 출발하여 풍물시장 사거리에서 왕의 길로 접어든다. 왕의 길은 1849년 조선 25대 철종의 재위를 모시러 오는 왕실의 강화도 행렬을 그린 역사 기록에 나타난 가로 형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성된 강화산성 안 마을의 가로 형태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 형태와 가로를 중심으로 하여 곳곳으로 연결된 골목과 장소를 연결하는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였다는 왕의 길에는 강화를 빛낸 역사 속에 10명이 소개되고 있다.
강화대로에서 선택코스로 견자산 능선 코스를 포기하고 강화산성 동문으로 오르는 언덕길을 오른다. 강화산성은 강화읍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석성으로 조선 숙종37년에 확장되어 축조되었다.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는 총 연장길이 7,122미터의 산성으로, 성문 4곳과 남문 안파루·북분 진송루·서문 첨화루·동문 망한루 등의 문루, 암문·수문·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강화읍 동쪽의 성벽은 없어졌지만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다. 몽골군의 침입,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동문 망한루를 통과한다. 나들길은 동문에서 북쪽으로 골목길을 걷다보면 수령 약 400년의 느티나무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이 느티나무는 본래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가 아니고 성곽의 축조와 관련되어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원불교 교당과 주택들이 인근에 자리하여 길목의 쉼터가 되었다. 나무의 형세가 매우 왕성하면서도 균형을 갖추고 있어 아름답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에 들어선다. 강화성당은 동서양의 미를 조화시킨 한옥 성당이다. 토착화 선교를 지향했던 성공회 정신이 담겨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특이하게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
1900년 11월 퓨전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동서양 건축법이 조화를 이룬다. 내부 구조도 독특하여 외삼문, 내삼문은 사찰의 구조와 같다. 성당 안에 십자가가 새겨진 범종은 절의 범종과 흡사하고, 본당에 걸린 ‘천주성전’이라는 편액도 사찰의 양식이다. 그러나 천장이 높고 중앙부 양쪽에 날개가 달린 것은 바시리카 양식으로, 기독교 예배공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축조이후 증측 등을 하지 않아 더욱 의미 있는 곳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뒤로 잠시 내려서면 용흥궁이 반긴다. 용흥궁는 비운의 임금이 된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 임금이 19세까지 살던 잠저이다. 잠저란 법통을 이어받지 않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을 말하는데 용흥궁은 원래 세 칸짜리 초가였다.
철종의 본명은 이원범으로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사도세자다. 현재 건물은 내전과 외전 그리고 별전이 각각 1동씩 남아 있고,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라는 잠저구기비각이 서 있다. 창덕궁의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살림집의 유형을 딴 소박하고 질박한 기풍이 있다.
용흥궁을 뒤로 먼저 김상용 순절비를 찾아본다. 이 순절비는 병자호란 당시 청에 대항하다 순국한 김상용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비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청국과의 화의를 반대한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문과를 급제한 후 우의정을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용은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청군이 강화들을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서 그는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하였다. 숙종 때 증손인 김창집이 세운 구기가 후대에 발견되어 순조 때 유수 김매순이 건립한 신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리고 만나는 강화군이 1994년에 세운 3ㆍ1운동 기념비다. 강화지역의 3ㆍ1운동은 3월 18일에 읍내 장터에서 1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로 시작되었다. 이후 모든 면과 리로 확산되어 4월초까지 지속되었다. 시위 규모에 있어서 저국정으로 손꼽히는 사례에 속한다.
강화문학관에 들어선다. 강화출신의 수필가 故 조경희 선생의 유지에 의하여 건립한 강화문학관은 조경희 선생께서 2005년 8월 타계하시며 강화군에 기증하신 소장품 팔천 여 점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아울러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신 고인의 수필문학에 끼친 업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층 전시실에는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규보와 정철, 정제두 등 강화도와 관련이 있는 옛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며, 2층 수필문학관에는 조경희 선생의 육필원고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안경 등과 미술품 40여 점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강화문학관을 뒤로 고려궁지로 오르는 길 좌측으로 강화성당이다. 1896년 개교 강화초등학교가 말걸음을 붙잡는다. “그땐 그랫지!” 추억의 사진첩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궁지에 들어선다. 고려궁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으며 사적 제133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든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으며, 1234년 궁궐과 관아를 완공하였다. 1270년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곽은 무너졌다고 한다.
강화 유수부 동헌이다. 강화 유수부는 1627년(인조 5)에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설치한 것으로 종2품 관청으로 삼았다. 1638년(인조 16)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명명하였다. 현재는 명위헌과 이관당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송나라 미남궁체를 잘 쓰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윤순(1680∼1741)의 필적이다.
건물규모는 정면 8칸, 측면 3칸, 건평 24칸이고 구조는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현재에 이른 것인데,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건물로서 여러 차례에 걸친 개조로 원형은 남지 않았다고 한다.
유수부 동헌 왼쪽으로 외규장각있다. 외규장각은 조선시대 왕립 도서관격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왕실 서적의 안전한 관리를 목적으로 1781년 정조가 강화도에 설치하여 왕실 관계 서적 1,000여 종, 6,000권 가량을 보관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국보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일부 서적이 약탈되고 나머지는 소실됐다고 한다.
외규장각을 내려서면서 만나는 수령 약 400년의 회화나무가 아름답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인물이 난다 하여 궁궐이나 양반가에 많이 심었던 상서로운 나무라고 한다.
이 회화나무는 13세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로 천도해 왔을 당시의 나무는 아니고, 17세기 강화유수부 뒤편 행공과 외규장각, 강녕전, 만년전 등 강화부의 조선궁구궐을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회화나무는 강화의 가장 중심부에 있으면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등 영욕의 세월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어 강화부종각이다. 보물 11-8호 강화동종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강화동종의 균열이 심해져서 타종할 수 없게 되자, 1999년 10월에 강화동종과 같은 모양의 종을 만들어 강화부종각에 설치하고, 강화동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겼다.
이 종각은 원래 강화산성 남문 동쪽에 있었고 강화산성의 사대문을 열고 닫을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고려궁지로 옮겼다고 한다.
강화부종각에서 조금 더 내려서면 유수부 이방청있다. 이방청은 강화 유수부 내 육방(六房:예·병·공·이·호·형방) 중의 하나로서 1654년(효종 5) 유수 정세규(:1583∼1661)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한 건물인데, 1783년(정조 7) 유수 김노진(1735∼1788)이 내부를 개수하여 계홀당이라는 당호를 게시하였다고 한다.
이방청을 뒤로 고려궁지에서 나들길은 한옥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이 은행나무 보호수는 칠백 살이 넘는 품이 넉넉한 나무다.
한옥마을 골목길로 들어선다. 한옥마을이라고 하지만 새로 단장한 한옥 한 채가 골목길을 지키고 있다. 고불고불 골목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자칫 놓치기 쉬운 '북관제묘’ 를 만나는 곳인데 북관제묘가 예전 모습이 아닌 것 같다.
북관제묘는 이름은 관우(關羽)요 자(字)는 운장(雲長), 관운장은 소설 삼국지에서 보듯이 출중한 무장이었는데 중국 송나라 시대에는 무신 및 재신으로 모셔졌다. 우리나라에는 임진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군사들의 요청으로 서울에 동관묘가 세워진 이래 관우신앙이 퍼져나갔으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관아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고종 때에는 나라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더욱 관우 숭배를 강화했기에 서울 동서남북에 관왕묘가 서고 지방에도 많은 관왕묘가 세워졌다. 이곳에 세워진 관제묘도 그 시기인 1892년(고종 29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그 뒤로 관우숭배는 종교나 무속의 영역으로 남아 무가에서는 장군으로 모시고 있다. 중국에는 부자되고 싶은 이들이 관운장상 앞에 향을 올리려 줄을 서고 있다고 한다.
문이 굳게 닫은 강화향교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국립교육기관인 강화향교는 성현들엑 제사를 지내고 교육을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강화향교는 고려 1127년(인종 5)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강화향교는 1232년에 갑곶리로 옮겼다가 몽골의 침입으로 서도면으로 이건하였다.
그후 강화군으로 옮겨왔으며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이 소동문 밖의 송악산(지금의 북산) 옆에다 복원하였으며 1629년에는 명륜당을 세워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1731년 강화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1766년에 유수 이은이 중수하였는데, 이때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강화여자고등하교 정문을 보며 왼쪽으로 들어서면서 은수물이 마중 나온다. 은가루를 풀어놓은 듯 은빛을 띈다 해서 은수물이라고 불리는 우물이다. 강화향교 서편에 있는 은우물은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이 물을 길어다 썼다고 한다. 우물 아래쪽에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수도시설이 생기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 심도역사문화길은 은수물을 뒤로 북산 산책길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