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5일 ‘우신회’ 모임에서 대천해수욕장으로 바람을 쐬러 간 적이 있다. 그때 P 회장님으로부터 외국여행을 가자며 갑작스런 제의를 받았다. 그동안 외국여행은 여러 번 하였지만 막상 가까운 이웃나라는 가 본 일이 없다고 한다. 모두 쉽게 동의를 하였다. 그런데 날자 잡기는 좀 쉬운 일인가. 갑론을박 끝에 잡은 날이 11월25일이었다. 대천의 바닷바람은 빨리도 흘렀다. 찬바람이 옷깃을 스미고 낙엽도 어지간히 기운 계절 굼뜬 아내가 준비를 서두는 걸 보니 때가 온 것 같다. 드디어 11월25일, 총무님의 문자 시간에 맞추어 코아 터미널에 나갔는데 여유 있게 모두 나와 있다. 기대와 설레 임이 역력하다. 인천국제공항행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출발 시각은 11시, 버스가 시가지를 벗어나 교외에 다 달으니 가을걷이 끝난 들녘이 한가로이 누워있고 차창 넘어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도 찬란하다. 대대손손 물려줄 유산이로다. 어느덧 여행의 진수(眞髓)에 빠져들었다.
잠시 ‘우신회(又新會)’ 소개인데, 현직 시절 전주시 소재 농수(農水)관련 직장 장모임으로 ‘농수회’ 조직이었는데, 분위기가 돈독한지라 퇴직하고서도 유지하게 되었고 다시 만났대서 그 이름을 ‘우신회’라고 하였다. 그간 아쉽게도 두 분이 이승을 떠났고 한 분이 고소공포증으로 불참하여 여섯 부부가 출발하게 되었는데, 나이는 70세 전후로 돌아보니 황혼 여행이로다. 그런데도 아직은 건강이 이만하기 안심이 되었다.
차중에서 총무 내외분이 준비해온 김밥과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잖아도 아침을 걸러 출출하던 차 잘 된 일이었다. 시간이 어중간하여 걱정이었는데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혀끝에 녹아든다. 12시30분, 천안휴게소에서 잠시 하차 심신의 여유를 풀었다. 다시 김포공항과 여의도를 거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시각은 15시15분, 공항에 들어서니 여행객들로 붐볐고 분위기가 왁자하다. 안내소를 거쳐 소화물 발송시각은 16시, 마일리지 적립하고 출국심사대를 거쳐 17번 게이트에 도착시각은 16시40분이었다. 서둘러 온 탓에 출국까진 아직 1시간 반이나 남아있다. 마음이 여유롭고 넉넉하다. 대기실에서 대기 중인데 나이 지긋한 구릿빛 여인네들 행색이 남다르고 체구까지 작은 게 남방사람 분명한데 먼 이국여행 필시 사연이 있으리라. 봄 여행 땐 젊은이에게 출구를 물었다가 외국말로 답변해오는 통에 무안해, 한 일이 있다. 외모가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공항의 이색풍경이요 나라 안에서 느껴보는 이국 풍경이었다.
땅거미 짙어가던 18시, 캄보디아 프놈펜행 대한항공 689호기에 올랐다. 유도로를 서서히 빠져나와 활주로에 도착,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순간 출력을 받아 굉음과 함께 힘차게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그때 시각 18시30분, 군산, 목포, 제주 상공을 지나 동중국해에 이를 즈음 기내식이 나왔다. 곁들여 아내와 나눠보는 맥주 맛이 시원하다. 금주맹세 7년째 되었지만 모처럼 해금의 외도에 젖어들었다. 20시33분, 타이베이 상공을 지날 때인데 우연히 내려다본 야경, 매우 크고 아름답다.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이를 보며 문득 지난봄 성지순례를 다녀오며 모스크바 상공에서 내려다본 야경이 떠올랐다. 사방팔방으로 쭉 뻗은 방사형 불빛을 보며 얼마나 크고 아름다웠던지 탄성을 질렀는데 그때 일천만 도시의 크기를 실감한 바 있다. 끝과 끝이 추정이 안 되었는데 야광의 효과로 더 크게 느껴졌으리라. 거기에 비하면 260만 인구 타이베이, 크기가 어지간히 시야에 잡혀왔다. 조금 전의 제주시 야경은 손안에 들 듯도 싶었는데, 그래서 불빛만 보고도 저곳은 촌락이요, 읍면 크기이며, 또 도시가 인접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여행 때면 좌석 위치에 관심이 많다. 좌석에 따라 여행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낭 상공 통과 프놈펜 공항에 도착시각은 23시55분, 약 6시간 걸렸는데 현지시각으로는 21시55분, 입국수속 후 짐을 찾아 공항 밖 대기버스에 탑승시각은 22시25분, 시내 중심가 ROYAL PALACE호텔에 도착 하여보니 22시55분이었다.
잠시 착륙 시점으로 되돌아가 보는데, 착륙 직전 하늘에서 본 프놈펜 공항은 초라하여 마치 학교건물처럼 느껴졌고 주변은 다소 어둡고 침침했다. 건물에 들어서고서야 좀 밝고 넓었는데 공항건물은 전에 포첸통 공군기지였던 것을 공항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으로 나와 보니 안내원 김상원 씨가 ‘노랑풍선’ 피켓을 들고 맞이해 주었다. 집결해보니 모두 20명, 우리 회원 외에 서울에서 온 두 팀 8명이 합류가 되었다. 모두 40대 중반쯤의 여성들이었는데, 뒤늦게 알았지만 모두 자녀가 수능시험을 치렀다는 게 위로 겸 자축여행 같았다. 인상들이 좋고 마음 씀씀이가 좋아 부담감 없이 여행기간 내내 함께 해 주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30분간 달려오며 차중에서 안내원으로부터 들은 기본정보인데, 국명은 캄보디아 왕국, 수도는 프놈펜, 정치는 입헌군주제, 면적은 남한의 약 1.8배, 인구는 약 1,400만 명에 프놈펜은 140만 명이라고 했다. 기후는 평균기온 27℃, 건기와 우기로 나누며 그중 건기는 12~4월까지인데 이 기간은 비 한 방울이 오질 않아 먼지가 매우 많다고 한다. 1인당 GDP는 380$인데 프놈펜에서 생활하려면 월 100$은 가져야 하며, 세계에서 135번째로 가난한 나라. 전기가 부족하여 가정에서는 저녁 8~9시면 불을 끈다고 하는데 그제 서야 공항 주변이며, 시내야경이 어두운 이유를 알았다. 그런데도 공공기관 전력사용은 무료라고 한다. 이를 미끼로 부정행위가 발생한다는데 그래서 6․ 25전쟁 후 어렵던 시절, 전등 쓸 형편이 못되어 동네에서는 전선에 선을 늘여 도용했던 생각이 났다. 마치 우리나라 60년대 상황 같았는데 아직 이런 나라도 다 있구나, 듣고 보니 착잡하다. 그나마 다행한 건 1993년 민주국가로 되었고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언론자유가 보장된다고 한다. 호텔에서 방을 배정받아 518호실에 투숙시각은 23시10분, 아내와 함께 여독을 풀었다.
11월26일(일) 프놈펜 구름. 새벽 4시, 잠자리를 뒤척이다 눈을 떴다. 화장실에 다녀나오는데 꼬끼오 닭 울음소리가 호텔방까지 들려온다. 처음엔 귀를 의심하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지척에 전구 불빛이 보였고 천막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이 분주하다. 꼭두새벽에 이럴 수가, 궁금했지만 날이 밝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속이 더부룩하다 하여 소화제를 먹었다. 잠이 더 오질 않아 내부를 살펴보니 출입문에 주의사항이 붙어 있다. 5개 국어로 표기가 되었는데 맨 먼저 한국어로 되어있고 영어, 캄보디아어, 중국어, 일본어 순인데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구나! 생각이 들었다. 수수한 내부시설에 호텔방은 왜 그리 넓은지. 침대 2개, 소니 TV, 소형냉장고, 응접 대, 그리고 전화기가 놓여있다. 시간이 되어 TV를 켜니 채널은 모두 9개, 그런데 채널을 돌려 보니 우리나라 YTN뉴스가 실시간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랐다. 기상정보에, 나라 안팎 소식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06시쯤 어둠이 걷혀오고, 06시50분 아침식사. 곧바로 바깥구경에 나섰다. ‘담코마켓시장’ 호텔에서 불과 50m 거리였는데 품목은 주로 채소, 과일에 간간이 좌판에 생선도 놓여있다. 시장통에 들어서니 붐비는 인파에 비켜가기도 힘이 들고 퀴퀴한 냄새가 스멀스멀 코끝에 스며들었다. 이 광경을 사진에 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변을 돌아보니 채소를 싣고 온 농민인지, 상인인지 오토바이와 자전거에 걸터앉은 채 이방인의 행동을 유심히 들보고 있다. 혹시 찍었다가 카메라를 뺏기거나 봉변당하는 건 아닌지 반신반의하면서, 그러나 어찌 이 귀한 장면들을 놓칠 수 있으랴, 아내를 세워놓고 찍고 일행을 세워놓고 찍었다. 별것도 아닌 시장거리, 그런데도 꼭두새벽부터 부산을 떨어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뒤에 알았는데 더위 때문이라고 한다. 운반수단은 주로 오토바이와 자전거였는데 안장 양옆으로 고리 같은 걸 달아 거기에 과일을 걸치듯 실었는데 몸체보다도 더 크게들 실었다. 호텔은 7층 건물로 되어있고 바로 시장을 끼고 있었으면서도 간밤에는 늦은 시간에 드느라 주변 환경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새로운 사실은 호텔은 우리 교포가 임대하여 운영한다고 한다. 방출입문 주의사항 5개 국어 표기 중 우리말이 맨 먼저 나와 있음도 그제 서야 짐작이 갔다. 이게 바로 나라 사랑 아닌가,
호텔을 출발하여 프놈펜 남서쪽 15㎞ 거리에 있는 킬링필드 위령탑에 도착시각은 08시40분, 위령탑은 1975~1979년까지 4년 동안 공산당 지도자 폴포트가 정권유지를 위해 약 200만 명이나 되는 국민을 별다른 이유 없이 무참하게 학살하였다는데, 그 대표적인 곳으로 여느 농촌과 다름없는 들판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인근에는 무더기로 매장되었던 흔적도 같이 보존이 되어있다. 위령탑 내부는 15계단으로 철골시설이 되어있고 계단마다 두 골을 꽉 차게 안치를 하였는데 모두가 무고한 양민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앞잡이라고 죽이고, 안경을 썼다고 죽이고, 외국어를 안다고 죽이고, 피아노와 기타를 칠 줄 안다고 죽이고, 손이 보드랍다고 죽이고, 학생이 있는 가족이라고 죽이고, 키가 크거나 뚱뚱하다고 죽이고 했단다. 참으로 슬픈 역사를 간직한 나라였다. 신발을 벗고 내부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학살에 사용된 도구와 유품도 같이 전시가 되어있어 이를 보며 섬뜩한 마음에 식은땀이 다 났다. 위령탑 바로 옆에는 이 같은 '킬링필드'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안내소가 있는데, 이렇게 크고 작은 죽음의 들판이 캄보디아 전체에 약 130군데나 있었다고 설명되어있다. 당시 800여만 명 인구 중 학살 양민이 200만 명이라…,그래서 이 나라는 과부가 많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우리 정도의 노인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식인이 없으니 나라 발전인들 기대할 수가 있었을까. 오가며 보고 느낀 시가지 전경인데 불과 15㎞ 거리였는데도 일부 구간은 도로포장이 안 된 채 황토먼지가 부옇게 시가지를 덮었다.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주류였고, 시내버스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대신 소형 트럭이 시내버스 역할을 하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다. 화물칸으로 부족하여 포장 위에까지 사람이 올라타 교외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며 생명을 저래 내맡겨도 되나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질주도중 급브레이크라도 걸리면 포장 위 승객은 길바닥에 순간 나가떨어질 것이었다. 도로변엔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이 더러 뜨였는데 식장은 대개는 노변이나 건물에 붙여 천막 시설을 하였다. 결혼식장은 주황색으로 밝고 크고 화려하게, 장례식장은 검은 천에 보통크기로 되어있다. 특이한 건 장례식 문화인데 국민의 약 95%가 불교를 신봉하여 화장을 한다고 한다. 독경은 새벽 4시면 시작되어 밤 8시가 넘도록 지속을 하는데 그것도 3일간이나 스피커 독경이 되어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다고 했다. 한번은 안내원 주거지역에 6일간이나 계속되어 하도 시끄러워 알아보니 동네에서 연거푸 초상이 난데다가 독경은 스님이 하는 게 아니고 테이프를 계속 틀어놓았더라고 해서 웃었다. 객사(客死)는 무조건 집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다음은 결혼 풍습인데 남자가 1,000~5,000$(약95~480만 원) 은 지참해야 한단다. 여자는 몸만 가면 되는 데 대신 모든 일은 여자가 맡는다. 남자는 그때부터 논다는데 그래서 하릴없이 TV만 본다고 했다. 실제 도심을 달리다 보면 노변 개방형 건물 안쪽엔 TV와 의자가 놓여 있는 상가들이 많았고, 남성시청자가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일도 목격이 되었다. 특이한 건 남자가 구실을 못할 경우 아내가 가방을 싸서 대문 앞에 놓으면 되고, 남자는 두말없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안 나가면 깡패까지 동원사례가 있다 해서 놀랐다. 결혼 지참금은 10년 넘게 벌어야 한다고 했는데…, 결혼 후엔 남자 세상으로 알았는데 그것만도 아니었던가 보다. 수도 프놈펜 시가지 건물은 대부분 낮고 초라하다. 왕궁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이라는데 그래서 더 높은 건 오직 사원뿐이라고 한다. 왕국이 무엇이고 왕권이 무엇인지, 꼭 그래야만 하는지 세계화의 물결은 언제 탈지 궁금하다. 경제는 화교가 장악했다는데 이곳 주민과 스스럼없이 결혼도 하고 이곳 생활 관습을 쉽게 따른다고 한다. 그만한 연유가 있으리라. 인천에서 프놈펜에 왔을 때 서울에서 온 여자 한 분 짐 미착 사건으로 공항 근처를 돌아 나올 일이 생겼다. 킬링필드에서 공항까지 가느라 자연 시내 중심가를 관통하게 되었는데 보니 교통신호 불이행 차들이 다수 목격이 되었다. 적색 신호등이 들어와도 그대로 내 달리는 것이었다. 단속하는 교통경찰관도 없고 설령 단속한다 해도 권위도 없다고 한다. 그럴 테면 신호등 시설을 아예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던 차 오늘 도착 예정지인 씨엠립 사례라며 안내원이 들려주는데 인구 20만 도시, 지난해 처음으로 신호등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첫날 교통사고가 140건이 발생했다고 했다. 신호 받고 정차 경우 뒤따라오는 차량에 의해 추돌사고였다는데, 그래서 교통신호를 모두가 지키든지 아니면 말든지, 애물단지가 되지 않도록 통일이 되어야 하리라. 이 나라 교통사고 통계가 궁금하다.
중심가 십자로 대로변을 지나는데 3층 건물 상단 벽에 대단히 큰 액자가 걸려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 사진이었는데 사진 밑에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의 캄보디아 국빈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글귀와 함께 상단 좌우 측에 양국 국기가, 하단에는 현대와 기아마크가 나란히 그려져 있다. 노 대통령이 나흘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숙소까지 노변에 10만 인파가 환영했다고 한다. 국빈이라곤 찾아올 일 없는 나라여서인지 환영 열기가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다음날 ‘앙코르 왓’에 갔을 때도 도롯가에 시설된 가로등이 보였는데, 노 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24시간 밤잠 안자 가며 시설 했다고 한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라 캄보디아, 그런데 밤잠 안자 가며 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고 해서 웃었다.
거리는 행인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유순해 보였고 표정들이 그림자가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내원 하는 말이 이 나라는 사람들이 착해서 소매치기가 없다고 한다. 대신 자존심은 무척 강하다고 했다. 흥미로운 건 옷차림이었는데 여인들이 잠옷 차림으로 거리를 스스럼없이 활보하는 것이었다. 전보다 줄었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꽤 눈에 뜨였다. 잠옷을 입었다는 건 생활 정도와 능력이 있다는 표시라고 한다. 그래서 문득 궁핍하기 그지없던 시절, 중2 때였는데 나는 처음으로 팔 없는 러닝셔츠를 사 입고 좋아서 읍내를 활보했던 생각이 났다. 생활 정도가 그러하니 잠옷의 본뜻을 알아차리기나 할까. 이해가 되었다. 프놈펜엔 공장이 없다고 한다. 생업이라야 서비스업인데 주로 점원이나 가정부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도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꽤 많이 거리를 달렸다. 오토바이 가격을 물으니 130cc가 약 1,200$(약 110만 원), 휘발유는 리터당 우리 돈으로 약 1,000원이라고 했다. 공사장 여자임금이 하루 2$(약 1,900원)이라던데 너무 비싼 건 아닌지, 하긴 대중교통이 미흡하여 휘발유 값이 좀 비싸기로서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일 것 같다. 택시조차 없는 수도 프놈펜, 자가용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고 했다.
공항 근처를 돌아 나오는 길인데 차가 가다 서다 한다. 운전기사가 내려 점검을 하고 올라와서야 겨우 시동이 되었다. 조금 가더니 이번엔 제동장치가 고장이 났다. 도심 대로변, 서자니 제동장치가 안 듣고, 섰다 하면 시동이 우려되는 상황, 속도를 줄여가며 기다시피 커브 길을 돌아 골목길 정비 업소에 가까스로 대었다. 기사 안면을 보니 창백하다. 그때 시각 10시, 정비공이 차체 밑으로 들어가 고쳐보지만 시간만 흘렀다. 버스를 교체해줄 것을 건의하니 이곳엔 관광회사가 없단다. 멀리 씨엠립에서 와야 한다고 했다. 수도에 관광회사가 없다니 기가 찼다. 이국 멀리 날아와 천금 같은 시간이지 않은가. 아득한 생각이 들었다. 차종은 우리나라 기아차였는데 수십 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의자 폭이 좁고 등받이가 낮은 낡고 낡은 차였다. 무료하게 대기 하던 중인데 다행히 정비가 되었는지 승차신호를 보내온다. 그때 시각 11시10분, 식당을 향해 떠나는데 ‘대한통운 택배’ 차량이 스치듯 달려간다. 한글 표기 중고차였다. 내 나라 향기가 느껴져 반갑다. 이 나라는 주택사정만은 괜찮다고 한다. 더운 나라여서 의식(衣食)은 거의 자동해결이 되고, 주거환경도 남자가 소변을 대충 처리할 정도면 된다 하니 악착 떨며 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모계사회라 해서 여아를 선호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랜 전쟁과 학살로 남자가 귀해서란다. 단, 여자아이를 낳으면 ‘서방을 열이나 백이나 가져라.’ 덕담이 오간다 해서 웃었다. 서방을 많이 둘 수 있다는 건 능력의 징표여서 그렇단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중인데 노변 간이 상가에 중고 물품들이 쌓여 있다. 외국에서 들어온 구호품이라는데 실수요자에게 분배되는 일이 없고 일단 고급관리의 손을 거쳐 시중에 유출된 것이라고 한다. 월급이 적다 보니 부정이 일상화된 것 같다. 보통 보수수준은 40~50$ 선(45,000원 내외)이라고 하였다. 충격적이었던 건 이 나라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데 선생이 없어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공부를 하고, 심지어 격일제 수업사례까지 있다는데 월급이 적어 교직을 피하여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앞으로 교육이 괘도에 오르려면 10년도 더 걸릴 것이라고 해서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나누는 중 훈센공원과 임페리얼 호텔경유 ‘V.I.P 한일가든’ 도착시각은 11시30분, 한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훈센공원은 깨끗했고 임페리얼 호텔은 우리나라가 500만$을 투자했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나오며 종업원 아가씨에게 ‘어꾸운’ 하고 목례를 하였더니 순간 상기된 표정과 함께 미소 지으며 ‘어꾸운 찌란’ 한다. ‘어꾸운’은 ‘고맙습니다’ ‘어꾸운찌란’은 ‘대단히 고맙습니다‘ 현지 어인데 익힌 말이라야 고작 그뿐이지만 이심전심 눈빛까지 나누며 환하게 웃었다. 말 한마디, 표정만으로도 이렇게 따듯이 마음이 오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인지 와 닿는다. ’토이암 팔레스 왕궁‘도착시각은 12시10분, 식당에서 차편으로 채 5분도 안 된 거리, 아쉬운 건 왕궁 문이 굳게 닫혀있다. 문을 두드리니 14시 이후라야 관람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주변은 한적하고 깨끗했다. 이 나라 특유의 건축 양식이며 용마루 끝마다 하늘로 치켜 올린 뱀 꼬리 형상은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마치 곰이 우리나라 건국설화에 전해내려 오듯, 이 나라는 신화에 나오는 게 뱀이라는데 그래서 건축물마다 뱀 꼬리형상을 건축 기본양식으로 정착시켜왔나 보다. 뱀 꼬리를 건축물에 접목시키다니 바로 민족정기 고양 책이 아닌가. 우리는 5000년 배달민족이라면서 도 생활 속에 깊숙이 형상화된 조형물 어디 하나가 있던가, 부러웠다. 길 건너 빠사 강변으로 이동하여 합동사진을 찍었다. 강은 꽤 크고 넓었다. 메콩 강으로 흘러간다는데 왕궁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도시는 역시 강을 끼고 있어야 윤기가 흐르고 제 맛이 난다.
12시35분, 다시 찾은 곳은 독립 기념탑, 10분 거리인데 잔디 광장이 매우 크고 넓었다.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9일 프랑스로부터 정식으로 독립을 했는데 앙코르 왓 중앙 탑을 본떠서 기념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갈색 빛이 나는 이 기념탑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단다. 저녁이면 마땅한 놀이공간이 없는 프놈펜 시민들에겐 휴식처가 된다는데 주변은 정원수와 주변 건물이 조화를 이루어 깔끔하다. 노변 정 중앙 위치에 2층 양옥 북한 대사관이 있는데 인공기가 나부꼈다. 한국대사관을 가자고 하면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는데, 문맹이 70%가 넘는 나라. 우리나라 위치를 제대로 알고 분단 현실을 알기나 하는지 듣고 보니 착잡하다. 아내와 북한대사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프놈펜 관광을 마치고 씨엠립을 가고자 독립기념탑 출발시각은 12시40분, ‘프싸트머이 시장(중앙시장)’을 거쳤는데 외곽으로만 한 바퀴 돌았다. 1960년대 초라던가 소련에서 지었다는데 규모가 컸다. 건물 중앙은 돔 형식으로 9층이나 될 것 같다. 외양이 마치 딱정벌레 껍데기 같기도 하고 거북선 모양 같기도 한 게 특이하여 사진에 담았다. 기이한 건 시장 내부보다 시장 외곽 텐트상가가 더 많을 성싶었다. 텐트가 건물을 빈틈없이 에워싼 게 마치 건물 숨통을 쥐어짤 것만 같았다. 노변엔 금남 고속버스 한글표기차량이 서 있었다. 시가지를 벗어나 빠사강 일본 브리지를 건넌 시각은 13시05분, 일본사람들이 놓았대서 붙여진 다리이름인데 꽤 길었다.
농촌으로 접어들면서 씨엠립 까지 180㎞ 대장정은 시작이 되었다. 이 나라 제일가는 2차선 국도, 속도는 시속 40㎞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우마차, 보행인 등 얽혀 속력을 도저히 낼 수 없었다. 시가지에서 멀어질수록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 바다 같기도 하고 호수 같기도 한 늪, 평원에 죽순처럼 펼쳐진 야자수림, 이국 풍경이 정겹고 아름답다. 주택양식은 기둥을 박고 그 위에다가 집들을 지었다. 기둥은 나무와 시멘트 두 가지인데, 농촌 집은 구조가 가벼워 큰 바람이 일면 날아갈 것만 같다. 알고 보니 이 나라는 태풍이 없다고 한다. 늪지대가 많고 스콜현상으로 습기가 많은 나라, 뱀 위험도 많으리라. 기둥 위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고 추위가 없으니 가벼울 수밖에 없는 집 구조, 그런데 태풍이 없다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노변에는 소규모 웅덩이들이 많았다. 늪의 나라, 어딜 가나 50㎝만 파면 물이 나온다고 한다. 웅덩이는 다목적용으로 식수도 되고 설거지도 하며 화장실이 없어 용변 후 뒤처리까지 한다고 한다. 목욕하는 아동들도 많았는데 얕은 웅덩이에서 물장구치며 노느라 온통 진흙탕 물이었다. 문제는 위생인데 그래서 이 나라는 아동이 하루 약 300명씩 죽는다고 한다. 출산까지의 과정이며 고통이 얼마인데 그렇게 쉽사리 죽어가다니 놀랍다. 평균수명이 짧다(남 53세, 여 55세) 하여 궁금했는데, 다산국가(출산율 5~6명)여서 그나마 유지가 되는가 싶었다. 의상은 간편하게 입고들 살았다. 생소한 건 ‘크로마’인데 일종의 보자기로 허리에 두르기만 하면 되었다. 마치 치마 입은 모양새였는데 남녀 구분이 없고, 팬티 입을 것도 없다고 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간편한 옷은 있을까 싶지가 않았다. 상하(常夏)의 나라, 오히려 최상의 의상일지 모를 일이었다. 쭉 뻗은 도로 양옆으로 사원들이 이따금 띄었는데 모두가 황금색 건물로 되어있고 주변은 깨끗이 정리가 되어있다. 사원주변엔 대부분 학교시설이 있는데 스님들이 가르친다고 한다. 국민의 70%가 문맹인 나라. 그 외 농촌 마을에는 학교건물이라곤 아예 뜨이지가 않았다. 의식(衣食)은 거의 해결이 되고 주거환경마저 간편하니 아등바등 경쟁하며 살일 없는 나라, 사는 모습들 보니 평온하다. 후진국일수록 행복지수 높은 이치 알 것 같다.
시가지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벼가 익어가 마치 가을풍경처럼 느꼈는데. 조금 더 달리니 모내기하느라 분주하다. 옛날 우리 농촌 모습과 똑같았다. 사람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 모심기하는 장면이나 뒤에서 모춤을 요소요소에 내 던지는 모습이나 마치 30여 년 전의 우리 모내기 장면을 옮겨 놓은 것 같다. 다른 게 있다면 열대불볕더위에, 노동력은 대부분 여자였고, 못줄 이 없이 눈대중으로 심는다. 농촌에 농기계라고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남자들은 수확할 때나 거들어 준다고 하는데 모계사회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인지, 저 고된 일을 여자들이 도맡아서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가 않았다. 한참을 더 달리니 수확기에 접어들어 빈 논들이 많았는데, 벼 수확은 이삭중심으로 높이 베기를 하여 마른 볏짚이 누렇게 서 있다. 빈 논마다 소들을 풀어놓은 게 볏짚을 먹이로 뜯기는 것 같았는데 그 볏짚 말고는 들녘에 별달리 사료가 됨직한 초원은 별로 눈에 띄지가 않았다. 벼농사는 삼모작도 가능하나 보통 이모작을 한다는데 소들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마치 소 천국에 온 것 같다. 힌두교 영향으로 쇠고기를 먹지 않고 단지 우마차 등 축력(畜 力)으로 이용할 뿐이라는데 어쩌다 길거리에서 차에 치여 죽기라도 하면 150$(약 14만 원)을 배상받는다고 한다. 주인은 은근히 그걸 바라는 일도 있다는데 그것은 배상금 외에 외국인들이 쇠고기를 선호하여 이중으로 수입이 된다고 하였다. 길거리에는 어슬렁거리는 소들이 있어 실제 치일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16시10분, 콤퐁 툼 도시에 도착, 25분간의 휴식을 가졌다. 학살범 ‘폴 포트’의 고향이라고 한다. 킬링필드에서 본 위령탑의 참상에 이름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노변 ARUNRAS 호텔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오는데 2층 게양대를 보니 6개국 국기가 나란히 꽂혀있다. 그중 태극기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여 반갑다. 이 나라에서 느껴보는 대한민국 위상이로다. 잠시 인근시장을 둘러보니 열대 과일이 풍성하다. 마침 안내원이 맛보기나 하자며 과일을 사들고 올라왔다. ‘리치’와 ‘앗 볼’이라고 했다. ‘앗 볼’은 혀에 닿는 감촉과 맛이 마치 곶감 같았는데 그래서 안내원은 부르기 좋게 아예 곶감이라고 했다. ‘리치’는 포도 알 크기에 즙까지 많아 마치 포도 먹는 느낌이 들었는데, 외양이 껄끔껄끔한 녹색 표피에 두껍고 투박한 게 조금은 달랐다. 호기심에 한참을 까서 먹었는데 양손 엄지와 검지 가락에 때가 새까맣게 달라붙었다. 끈적끈적하여 잘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모르고 먹었지, 두 번 다시 먹을 과일은 아니었다. 달리는 차 창 밖으로 망망한 평원 끝자락에 구름 꽃이 피어났다. 구름 사이로는 빛살이 하늘 높이 뻗어 올랐다. 서편 하늘 무척 아름다웠다. 시시각각 변화해 가는 노을빛 감상에 한참을 젖었는데, 어느새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해가 잦아든다. 황혼이로다. 그 과정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담았는데, 초점이 흔들려 잠시 달리는 차를 세우고서 찍었다. 땅거미 짙어가니 촌 가 모습들이 이채롭게 들어온다. 기둥 위 2층 집 계단에 촌부의 모습이 어둠 속에 앉아있는 게 무료하고 적적하다. 아이들 모습은 아예 측은하다. 긴긴 밤 보낼 일이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오면서 보니 도롯가에 전봇대가 없어 궁금했는데 가정별로 자가 발전기를 이용한다고 한다. 씨엠립이 가까워지면서 전봇대가 보였다. 이 나라는 주방문화가 없다고 한다. 전력사정이 어렵고 냉장고가 없으니 이해가 되었다. 주방이라야 밥그릇과 수저 외에 반찬이라곤 한 가지뿐이라고 한다. 대신 밥은 두세 그릇을 비운다는데, 하긴 우리도 경험하고 살아온 지 그리 오래 잔은 일이지 않은가 싶다.
목적지 씨엠립 럭키앙코르호텔 도착시각은 18시35분, 180㎞ 거리를 무려 6시간 걸려서 달려왔다. 307호실을 배정받아 가방을 옮겨놓고 다시 호텔을 나온 시각은 19시, 저녁식사 차 ‘TONLE MEKONG 레스토랑’에 도착시각은 19시20분, 건물 외관이 크고 붐볐다. 내부규모는 500석쯤이나 될 것 같다. 각국 여행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는데 다행히 예약을 해 놓아 자리 찾아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뷔페식이어서 분위기 조금은 혼잡하다. 식사시간 중 무대에선 민속공연을 펼쳤는데 시장기 채우랴, 공연 보랴, 사진 찍으랴, 박수치랴 수시로 변화하는 조명 속에 열기가 한참이나 그렇게 오르내렸다. 식탁 저편엔 서양 관객네댓이 공연장면에 어떻게 열중하던지 나는 그들 관람 태도까지 훔쳐보느라 더 바빴다. 아마도 공연에 남다른 취미를 가졌거나 전문가들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취미가 다르고 식견이 다르니 공연에 대한 이해의 폭이 천차만별하리라. 1시간 보내는 동안 식사분위기도 어지간히 잦아들었고 관객 팀도 점차 줄어갔다. 레스토랑을 나온 시각은 20시20분,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는데 인구 8만 명 도시가 불과 4~5년 사이에 20만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관광 위력 한번 대단하다. 호텔에 도착시각은 20시55분, 거쳐 온 과정을 정리해 가며 여독을 풀었다.
11월27일(월) 씨엠립 맑음. 06시 아침식사. 관광 일정이 빠듯하여 서둘러 준비하고 호텔문을 나선 시각은 06시30분, 앙코르 왓 유적지를 향해 새벽공기를 마시며 달렸다. 이른 새벽인데도 자전거 오토바이 행렬이 줄을 이어서 지나갔다. 노변에서 아침 식사장면도 목격되었는데 도시 사람들은 삼시세끼 밥을 사서 먹는다고 한다. 우리 돈 200~500원이면 된다는데 나라마다 음식문화가 이처럼 달랐다. 직장 일과 시작이 07시라고 해서 반신반의해 온 터였는데 학교 앞을 지나며 보니 실제가 그랬다. 운동장을 꽉 메운 학생들이 저마다 뛰노느라 바빴는데 그때 시각 06시40분, 더위 때문인 것 같다. 중학교 남녀 공학인데 상의는 흰 와이셔츠에 하의는 곤 색 치마, 바지를 입었는데 멀리서 보니 산뜻하고 그렇게 청순해 보일 수가 없었다.
유적지를 향해 달려가며 안내원이 전해주는 관련 정보인데 캄보디아를 찾는 관광객은 우리나라가 제일 많다고 한다. 2위는 일본, 3위 미국, 4위 중국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관광객은 작년에 30만 명이 다녀갔고, 올해는 60만 명쯤 예상된다고 했다. 그동안은 주로 태국 방콕을 거쳐온 모양인데, 지난 6월6일 아시아나 항공이 캄보디아 직항로를 개설을 하였고, 이어 대한항공이 11월14일 개설을 하였다. 항공사마다 매주 4회 운항을 하는데 내년부터는 매일 운항계획이라고 한다. 우리는 11월25일 대한항공편을 이용하여, 항로 개설 11일 만의 여행객이 되었는데 마일리지 적립 등 잘 된 일이었다. 관광 첫 코스 앙코르 왓 ‘남문‘, 까지 달려온 거리는 15㎞쯤 되는 것 같다. 도착시각은 07시05분, 차에서 내렸다.
먼저 사원답사계획인데 오전 ‘남문’에서 시작하여 ’바이욘 사원‘, ’바푸온 사원‘, ’코끼리 단상‘, ’따쁘롬 사원‘을, 오후엔 ’앙코르 왓‘으로 되어있다. 결론부터 이야기지만 앙코르에는 서울의 약 3분의 2에 이르는 약 400㎢의 방대한 지역에 100여 개의 유적이 있다고 한다. 제대로 감상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린다고 했다. 대부분 힌두교의 유적들인데 와서 보니 힌두교의 신화나 신들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앙코르 유적을 대하기는 어려웠다. 장님 코끼리 더듬기 식이었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한 유적지를 둘러보는 기대감에 모두가 들떠있다.
앙코르 톰(성)에는 동서남북의 문과, 승리의 문을 더하여 5개의 문이 있다. 그중 첫 코스가 ‘남문’이었는데, 23m 높이의 거대한 문 위에 4개의 얼굴을 가진 ‘아바로키테스바라’가 올려져 있다. 이는 메루 산에서 4방향을 지배하는 신이라고도 하고 불교의 관음보살이라고도 한다. 깜짝 놀랄 정도의 위용과 아름다움으로 감탄을 하였다. 남문을 올 때는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길이는 약 200m, 이 다리는 중생들의 사바세계와 신의 세계의 연결을 상징한다고 한다. 다리주변에는 해 자(물길)가 둘려 있다. 길이 약 1.5㎞, 폭 20m, 깊이 1.5~2m. 이는 우주를 둘러싼 바다를 의미하며 외적을 방어하게 하려고 악어를 길렀다고 했다.
남문을 돌아보고 다음 코스를 가고자 역내운행 버스에 올랐다. 유료버스였다. 1.5㎞, 불과 3분 거리의 ‘바이욘 사원’에 도착시각은 07시25분, 오는 길은 수림 울창하고 주변 환경 쾌적하다. 노변엔 원숭이들이 뜨였는데 길들었는지 재롱들을 떨었다.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왓’과 더불어 앙코르지역 건축물의 백미로 꼽히는 사원이라고 한다. ‘앙코르 톰’의 중앙에 있었는데 벽면에 남아있는 사료에 의하면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불교사원으로 건축이 된 것으로 해석된다고 하였다. 부조(浮彫)에 소 도축(屠畜) 장면이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 같다. 이 사원에는 54명 군주의 상과 탑에 각 4개의 ‘아바로키테스바라’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으며 약 30만 개의 크고 작은 돌을 쌓아 올린 후 조각을 하였다. 사원 입구 벽면에는 대단히 긴 부조가 둘려 있는데 각 단은 1m 높이, 3단으로 되어있다. 하단은 악(惡)의 장면이, 중단은 선(善)을, 상단은 지배계급의 크메르인 일상생활과 전쟁에 대해 주로 새겨 놓았다. 부조가 정교하고 섬세하여 놀랐는데, 800여 년 세월이 흐르도록 비바람에도 흐트러짐 없이 유지됐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동작과 표정까지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다음 찾은 곳은 ‘바푸온 사원’, ‘바이욘 사원‘ 북쪽으로 200m 지점에 있는데 황금다리를 건넜다. 이것역시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앙코르지역에서 세 번째 지어진 것으로 전체적으로 거대한 나무뿌리에 훼손이 심하여 프랑스 복원 팀에 의해 복원 중에 있다. 주변에는 사원에서 분리된 축대석이 널려있었다. ’바푸온 사원‘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오는 중인데 슬슬 변통이 일었다. 갈수록 통증이 더 해오는 게 심상치가 않다. 화장실을 찾았지만 뜨이지가 않았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이곳은 화장실이 없다고 한다. 쉬면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늘에서 쉬는 동안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지고, 야자수가 주어졌는데도 아무것도 정신이 없었다. 30℃가 넘는 고열, 땀만 줄줄 흘렀다. 참느라 사력을 다 하는 중인데 잡상인이 다가온다. 주로 부채와 유적지 사진첩이었는데 하나 보내면 또 한 사람이 다가오고, 보내면 또 오고 하는데 어디 내가 제정신인가. 그런데도 유독 끈질기게 달라붙는 소녀가 있었는데 마지막 비장의 무기를 꺼내드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미남‘ ’할아버지 미남‘ 해 대는 게 아닌가.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결국, 부채를 1달러 주고 샀는데 어떻게 애절하게 사정을 하는지 그 청순한 눈빛, 가냘픈 목소리, 표정이 마음에 와 앉던지, 열 살쯤이나 되었을 것 같다, 소녀의 모습 잊혀 지지가 않는다. 부채는 그날 어떻게 덥던지 요긴하게 썼다. 오랜 진정 끝에 다행히 변통은 잦아들었다.
조금 후 ‘코끼리 단상‘에 도착시각은 08시50분, 왕궁의 정문인 동문과 직선 대로(약 350m)로 이어지는 이 단상은 왕이 공공행사나 군대사열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건축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12세기 후반에 조성이 되었다. 동쪽 광장을 향한 단상은 모두 3개인데 양옆은 코끼리들이 부조되어 있고 중앙의 단상은 가루다가 받치고 있다. 중앙의 것은 왕이, 양옆의 것은 신하들이 사용하던 것 같다. 단상 위에는 나무로 된 정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이곳에 올라서면 아래 중앙광장에서 장대한 병사들의 분열과 코끼리 행진이 금방이라도 펼쳐질 것 같고,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의 위용을 가늠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광장 앞쪽 끝에는 12개의 탑이 열병하듯이 서 있어 위용을 더하고 있는데 파수 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단상의 백미는 실물 크기의 코끼리 옆모습 조각이 아닌가 싶다.
코끼리 단상을 빠져나와 대기버스에 올라 5분 거리 야외 화장실에 도착시각은 10시10분, ‘늘 좋은 여행을 생각하는 (주)여행 생각’ 한글표기차량이 서 있다. 반가웠다. 화장실 이야기이지만 이집트 피라미드 주변에서도 그렇고, 북경 자금성 여행 땐 그 넓은 경내에 단 한 군데뿐이어서 뱀 꼬리처럼 늘어섰던 장면을 본 일이 있다. 경관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실정이면 지하 시설을 할 수는 없을까. 년간 300만 명이 찾는다는 앙코르 왓 유적지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혹시나 실수라도 했더라면 어찌했을지 지금도 돌아보면 아득한 심정이 되어온다.
다음 코스 ‘따 쁘롬 사원’ 도착시각은 09시20분, 입구에서 내려 비포장도로를 따라 350m쯤 걸었다. 숲인지 정원인지 갖가지 수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있다. 무화과, 보리수, 흑단나무, 습박 나무라는데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목들이 장관을 이루고 서 있다. 고무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수액(樹液)도 처음으로 보았다. 노변엔 지뢰피해군인 7명이 악단을 이루어 음악연주를 하는데 아리랑을 계속 불어대고 있었다. 앞에는 지폐가 제법 쌓였는데 조직 운영기금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따 쁘롬 사원‘은 앙코르주요사원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지어졌으며 어머니에게 봉헌한 불교사원이라고 한다. 힌두사원이 아닌 점이 특이하다. 사원내부 벽에 새겨진 비문내용이라는데 2,700명의 스님들이 거주 하였고, 600명의 무희들이 있었으며, 약 3,000개의 마을이 이 사원의 관하에 있었다. 재산도 엄청나서 500㎏에 이르는 금 접시, 35개의 다이아몬드, 4만 여개의 진주 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추모행사 때는 166,000개의 촛불이 쓰였고, 약 8만 여명의 노역자가 종사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영화를 누렸던 사원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된 상태로 예전의 영화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각종 거대한 나무들이 벽과 지붕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담을 넘고 문을 감싸고 있어, 문화유산이 파괴되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참담한 심경을 금할 수 없었다. 아니,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예술의 극치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앙코르 사원들은 모두 정글에 파묻혀 있었다. 크메르제국이 멸망하면서 사원들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사라졌고 400여 년간 그렇게 방치가 되었다. 그동안 나무들은 어떤 제약도 없이 사원을 지지대 삼아 커나갔던 것이다. 1861년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어‘ 에 의해 발견이래 대부분의 사원은 나무들을 베어내어 제 모습을 찾았지만 ’따 쁘롬 사원’만은 예외로 최소한의 벌목만 하였다. 유네스코에서도 사원복구를 포기하였다고 하니 가늠이 가리라. 그런 이유로 ‘따 쁘롬 사원’만은 나무의 수명 따라 사원의 운명이 정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들이 더 성장 못 하도록 성장억제 처리를 하고 있었다.
‘따 쁘롬 사원‘에서 나와 약 30분간 달려 씨엠립 CAMBODGE보석단지에 도착시각은 10시50분, 홍보관에 들려 설명을 들었다. 그간 살아오며 보석은 전혀 관심이 없어 여행 때마다 들었어도 무심히 넘겼는데, 보석종류가 많다는 것도, 그중에서도 다이아몬드보다는 사파이어가, 사파이어보다는 루비가 좋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남편 심중 헤아리는 아내, 언제나 그렇듯 매장(賣場)을 건성으로 보고 돌아서 나온다. 점심은 ‘북한 친 선관’에서 한다며 안내원으로부터 미리 예고가 되어있었다. 기대와 설레 임 속에 도착시각은 11시35분, 대로변에서 약간 벗어나 1차 선도로 노변에 있었다. 단층건물에 지붕은 이엉으로 이었고 마당은 넓었다. 식당으로 들어서니 강당 같은 내부 구조에 300석은 될 것 같다. 아가씨들이 친절히 맞이해 주었다. 조금 후에 한국 관광객 한 팀이 뒤따라 들어왔다. 모두 40여 명, 손님은 그뿐이었다. 메뉴는 한식이었는데 곁들여 평양냉면이 나왔다. 음식 날라 오는 종업원들을 보니 분홍색 원피스차림에 한결같이 늘씬하고 미인들이었다. 가슴에는 명찰이 붙어있다. 미스 림을 보고 우리 종씨네 하였더니 아~. 그러세요, 생긋 미소로 반겨준다. 음식상이 다 차려지고 식사가 시작이 되었다. 중간쯤에 갑자기 마이크 음이 울리더니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 무희들이 나와 춤을 추는데 모두가 조금 전 음식을 날라주던 종업원들이 아닌가. 뒤이어 가요 휘파람 독창에, 곡 연주를 하더니, 모자 춤과, 삼인조 한복 춤 등 흥겨운 무대가 이어져갔다. 가야금을 켜는데 선율이며, 훤칠한 미모가 어떻게 돋보이던지, 마지막 합창으로 ‘두만강’,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공연은 막을 내렸다. 처음엔 단순 종업원으로 알았는데 그 모두가 가수이자 무용수며 악사였다. 모두 12명으로 확인이 되었는데 그러고 보니 북한에서 파견된 외화벌이 꾼이요, 홍보대사요, 계산된 정치꾼들이 아닌가. 무엇보다 미모에 놀랐고, 예술성에 놀랐고, 친절에 놀랐는데 식사 마치고 나올 때 보니 출입문까지 따라나와 일렬로 늘어서 안녕히 가시라며 허리 굽혀 인사는 물론 차가 떠나올 때까지도 계속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다. 현관에서 같이 사진 찍고 악수하고 나왔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가 않고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평양출신이고 고위층 자녀로서 사상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이곳에 북한사람 오느냐 물으니 한 사람도 없다던데 자유 분망한 우리 관광객들을 보고 무엇을 보고 느꼈을지 궁금하다. ‘평양친선관‘을 나와 10분 거리 상황버섯 쇼핑 장에 도착시각은 12시35분, 입구에 ’원기상황무역공사(元氣桑黃貿易公司)‘라고 간판이 되어있다. 약 40분간 홍보 관에서 설명 듣고, 시음하고, 쇼핑하였지만 별다른 관심들은 보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홍보원이 설명 중에 여성생리에 좋다 면서도 자작 하는 말이었는데 ’열사람이면 한 사람쯤 관심을 보입니다‘.하여 바로 쇼핑실적이 부진하다는 독백처럼 들려왔다.
쇼핑장을 나와 씨엠립에서 북쪽으로 약 6㎞, 차편으로15분 달려 ‘앙코르 왓‘에 도착시각은 13시30분, 입장권을 끊었다. 매표소직원이 차에 올라 인원점검을 하고 내려갔다. 안내원 하는 말이 저 사람들 여기 입사하려면 1,000$은 들여야 하고 월급은 80$(약 75,000원)이라며 대우가 좋다고 했다. 공무원 두 배 수준이니 그럴 만하다. 이어진 설명 중에 앙코르(Angkor)는 ’중심‘이라는 뜻이고 왓(Wat)은 태국어로 ’사원‘이라는 뜻이어서 ’앙코르 왓‘은사원의 중심’이라는 뜻이 된다고 하였다. ’앙코르 왓’은 실제 그 이름에 걸맞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웅장함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교되고, 그 아름다움은 인도의 ‘타지마할’과 비교된다고 한다. 수리아바르만 2세 자신의 무덤이기도 한 앙코르와트는 1113년에서 1150년 사이 약 37년 만에 완공이 되었다. 멀리서 유서 깊은 ‘앙코르 왓’ 전경을 바라보며 그 위용에 펄서부터 감동에 젖어든다. 차에서 내려 본당까지는 약 350m, 중간에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양옆으로 해 자가 아름답다. 폭은 약 260m, 길이 5.5㎞, 물 위에 사원이 거꾸로 떠 있고 천연사직이 한눈에 안겨왔다. 한 폭의 그림이로다. 가는 도중 길 양옆으로 아담하고 우아한 건물이 있는데 ‘경장 고(經 藏庫)’라고 한다. 내부를 둘러보니 돌 구조에 천정이 허공인 양 떠 있고 냉기가 내렸다. 경전을 보관하려면 단열과 통풍은 기본일 터였다. 상하(常夏)의 나라, 선인들의 지혜가 체감으로 와 닿는다. ‘경장 고’를 나와 몇 걸음을 더 가면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이곳에서 중앙 탑을 보면 정중앙에서는 온전하게 보이지 않던 5개의 탑이 모두 보이며 그 훌륭한 조화를 감상할 수가 있다. 디지털 카메라에 담으니 연못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찍혀서 나왔다. 작품 중의 작품이로다.
다리를 건너 사원에 들어서면 중앙의 탑 문 상층부가 잘려 있는데, 이는 탑 문 속에 보물이 들어 있어 외적들이 훼손한 것이라고 한다. 그 옆문에는 또 다른 훼손 흔적이 있는데 총탄자국이었다. 이는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들이 이 ‘앙코르 왓’을 요새로 사용했는데 그때 생긴 상처라고 한다. 불가사의한 신전을 건축한 인간의 힘이 경이롭게 느껴지는 한편 곳곳에 있는 탄흔을 보면서 인간들이 참 한심한 존재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본당을 감상하려면 1층의 회랑(回廊) 부조감상, 2층 인간계, 3층 천상계로 나뉘는데 사원의 높이는 65m에 이른다. 먼저 1층 회랑의 부조인데 들어서면 가로 80m, 세로 87m 가 되어 규모에서 놀라게 된다. 회랑을 받치는 기둥만도 60개 나 된다. 부조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절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계급이 높을수록 형체가 크고 복잡한 치장을 하였으며 양산을 많이 쓰고 있다. 가끔 부조의 표면이 반질반질 윤이 나 있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이 유독 많이 만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가까이 접근을 못 하도록 금줄시설을 해 놓았다. 회랑이 너무 커서 서남쪽 일부만 돌아보았는데, 정문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인도 서사시 중 하나인 ‘마하 바라타’에 나오는 전투장면이 펼쳐진다. 화살을 쏘고 맞는 장면, 행군하는 장군과 병사들, 치열한 전투장면들을 볼 수가 있다. 모서리 부분 부조 ‘라마 야나 등’에는 빌리의 죽음과 슬퍼하는 왕비와 부하들, 악귀의 제왕 등이라는데 신화적인 장면이 되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남쪽 회랑에는 ‘승리의 행진’ 장면인데 주로 ‘앙코르 왓‘을 건축한 수리야바르만 2세 치하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부조해 놓고 있다. 태국의 시암족을 정벌하고 나서 그들에게 충성서약을 받고 승리의 행진을 하는 모습이었다. 더 나아가면 ’야마의 심판‘장면이 나오는데 염라대왕 야마가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모습이 3단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천국은 상단에 조각되어 있고, 중단에는 야마가 심판을 내리는 모습이, 하단에는 지옥이 상세히 표현 되어 있다. 위쪽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온화하고 행복한 표정이고, 아래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코뚜레를 뚫려 짐승처럼 끌려다니며 매를 맞는 장면이여 보는 이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었다.
오던 회랑을 돌아 나와 2층에 올랐다. 양옆에 작고 아름다운 경장 고가 있는데 책보다는 제기 등 의식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했던 곳이 아닌 가 추측 된다고 하였다. 분위기는 다소 침침했는데 창문이 적었다. 회랑내부 벽면은 장식 없이 담박한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외부벽면에는 천상의 요정인 압사라 들이 다양한 포즈로 춤을 추고 있는데 육감적인 모습이어서 시선을 끌었다. 주로 2~3명 정도가 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그 많은 조각이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의 자세나 손가락의 모양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신들과의 대화요 수화라고 한다.
다시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중앙 탑을 비롯하여 연꽃 봉우리 모양의 5개의 탑이 솟아있다. 이곳은 ‘앙코르 왓‘의 심장부이며 천상계를 상징하는 곳으로 왕과 승려들만이 출입했던 곳이라고 한다. 중앙 탑의 높이는 3층 바닥으로부터 약 13m, 2층으로 부터는 40m에 이른다. 다시 중앙 성소를 오르기 위해 40개의 계단, 70도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이렇게 가파르게 계단을 조성한 것은 성소에 신을 알현하는 사람들은 잔뜩 엎드리고 조심스럽게 올라가라는 이유에 서라는데,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내와 가슴 조여가며 서로 조심하라며 올랐다. 현재 중앙 탑의 성소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만 원래는 힌두교 주신인 ’비슈누‘였다고 한다. 16세기 프놈펜에서 돌아온 불교도 Chan Reachea왕이 이 ’비슈누‘를 깊이 묻고 불상으로 대치 시켰다. 그 후 약 400년 지나 1934년 프랑스사람들이 중앙 성소 아래를 파 들어갔더니 약 27m 아래에서 가루다를 타고 있는 ’비슈누 상‘이 나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앙코르 왓’ 전체를 내려다보니 신의 예술인가 싶기도 하고, 성소 중앙에서 섰다는 게 마치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감격에 젖었다. 올라올 땐 서쪽 중앙계단으로 올랐지만 내려올 땐 안전을 위하여 줄을 매 놓은 남쪽계단을 이용을 하였다. 34℃의 고열, 땀범벅에 허기지고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 왔다. 층계별 계단을 타고 내려와 가까스로 차에 올랐다. 그때 시각 15시20분, 혹시나 하여 먹을 것을 찾으니 아내가 뜻밖에도 망고가 있다고 한다. 망고라…, 간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방 입실 직전인데 안내원이 맛이나 보라며 망고를 나누어 주었다. 잠자리인데 망고라니, 시큰둥하니 받아들었다. 아침 호텔방을 나올 땐 아내는 아까우니 가져가야 한 다 크니, 나는 짐스러우니 놔두고 오라 크니 승강이를 벌였다. 결국은 아내가 싸들고 나와 좌석 밑 구석에 밀어 넣었던 모양이었다. 차에서 깎아주는데 어떻게 달고 맛이 있던지 피로회복은 물론 잃었던 활력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안내원과 아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씨엠립으로 나와 앙코르 쇼핑센터를 거치듯 들렸다가 발 마사지 센터에 도착시각은 16시05분, 1시간 동안 발 마사지를 받았다. 담당아가씨가 가냘프고 앳되다. 나이를 물으니 ‘퉨이 포’ 한다. 깜짝 놀랐다. 10대 후반으로 알았는데 스물넷이라…, 문득 가정주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프놈펜에서 ‘킬링필드’를 향해 달려가며 들판의 소를 보고 안내원이 한 말이었는데, 이곳은 ’사람도 작고 소도 작으며 개, 고양이 다 작습니다‘ 해서 웃은 일이 있다. ’소가 큰 셰퍼드만 합니다‘. 해서 설마 했었는데 과장이기는 해도 보니 모두 말라빠지고 작았다. 더워서 그렇다는데, 담당 아가씨도 체신까지 작은 게 20대 여성으로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이를 물었던 게 애잔한 마음으로 안겨왔다.
저녁식사를 위해 ‘VIP 한국관‘에 도착시각은 17시30분, 샤부샤부와 낙지볶음으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은 대체로 식성에 맞았다. 술 좋아하는 분네들 2홉 소주 시켜먹고 값 치르는 걸 보니 병당 만원 꼴이라고 했다. 다리(橋梁)공사장 여자 일당이 2$(약 1,900원)이라던데 너무 비싼 것 아닌가. 우리 소주가 이곳에 와서 제왕 대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식사를 마치고 베트남을 가기 위해 서둘러 식당 문을 나섰다. 씨엠립 공항에 도착 시각은 18시25분, 출국 수속을 밟았다. 대기 후 베트남 항공기 탑승, 유도로를 빠져나가 19시45분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예상외의 일은 좌석 배치였는데 우리 부부는 VIP석에 앉는 영광을 않게 되었던 것이다. 앉자마자 음료수, 샴페인이 제공되고, 이륙하자 커튼으로 칸막이를 하니 일반석과 분리되어 분위기가 아늑하다. 좌석도 넓었고 발 뻗음이 편안했다. 모두 12명 공간이었지만 전담 스튜어디스가 자리를 지켜주고 관리를 해 주는 것이었다. 얼마 후 야간 기내식이 나왔는데 이때도 보니 식탁보를 깔아주고 냅킨이 제공되며 음식마다 덮인 랩을 일일이 제거해 주었다. 화장실 이용은 얼마나 편리하던지, 패키지여행에서 VIP석 앉기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추측이지만 사연은 이랬다. 애초는 18시50분 발, 캄보디아 항공편으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앙코르 왓‘ 관광을 마치고 나오는 중에 안내원이 전격 제안을 하였다. 정시에 떠나려면 일정상 시간이 빡빡하니 1시간 뒤 비행기 편을 이용해보자는 것이었다. 쉽게 동의가 되었다. 공항 연락결과 다행히 가능하다 하여 절차를 밟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반석은 다 채워지고 VIP석이 남아돌았던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일행 중 6명이 VIP석에 앉는 영광을 않게 되었다.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시각은 21시15분, 1시간30분이 소요되었다. 도착지점이 공항광장이 되어 입국장까지 대기버스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큰 버스에 먼저 나온 VIP 승객 10여 명만 달랑 싣고 내 달리는 것이었다. 전에 로마와 카이로에서 경험이었지만 공항 내 버스 짐짝 버스 아니던가.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 2002년 4월에 완공하였다는데 규모는 좀 작았지만 깨끗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출구를 나오니 안내원이 ’노랑풍선‘ 피켓을 들고 맞이해 주었다. 공항 밖 대기버스에 승차시각은 22시, 출발하자 안내원이 자기소개를 한다. 이승규입니다. ‘여기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입니다’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사회주의 공화국!’ 어쩐지 듣고 보니 섬뜩한 생각이 든다. 중국 여행 때도 그런 소개 들어보질 못했는데…, ‘공화국’이란 게 말이 공화국이지 얼마나 무섭던가. ‘조선 인민 공화국.’ 6․25남침을 겪고, 전쟁의 참화를 경험하며, 또 기억하며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다. 반세기도 넘게 살아온 터였다. 그러고 보니 잠시 뜸을 들인 이유 알 것 같다.
외국 여행 때마다 안내원을 만나면 맨 먼저 공통으로 듣게 되는 게 있다. 그 나라 소개인데 수도는 하노이, 정치는 시장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공화제, 인구는 약 8,400만 명, 하노이 인구 500만, 호찌민 시(구, 사이공)는 약 1천만 명, 면적은 한반도의 약 1.7배, 지형은 남북으로 길어 1,750㎞에 이르고, 폭은 좁아 가장 좁은 곳은 50㎞라고 한다. 통상 북부, 중부, 남부로 나뉘는데, 기후, 품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고 했다. 1인당 GDP는 약 700$, 도시는 2,000$에 이른다는데, 도농 간 격차가 큰 것 같다. 공항에서 시내 호텔까지는 약 22㎞, 오는 도중 황룡다리를 건넜다. 다리난간에 세워진 전선주마다 LG깃발이 나부꼈다. 그래서 이곳에선 ‘LG다리’라고도 한단다. 반가웠다. 시내가 어두워 궁금했는데 밤 9시면 대개는 불을 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생활 정도를 가장 쉽게 엿 볼 수 있는 게 전력사정이라면 과장된 표현일까. 가전 기기며, 밤 문화인들 있을까 싶지가 않다. 국민생산도 차질이 크리라. 나라마다 어려운 전력사정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헤프게 쓰는 게 아닌가 반성이 되었다. 대낮 노변 전등불이 켜진 채 있어도 무심히 지나는 사례 얼마나 많은가. 오는 도중 부슬비가 내렸다. 하노이시가지가 밤비에 젖어들었다. LA THANH 호텔에 도착시각은 22시40분, 숙소를 배정받아 622호실에 든 시각은 23시, 여장을 풀었다. 멀고도 먼 여행길 피로하다.
11월28일(화) 하노이 흐림. 새벽 04시에 기상, 화장실을 다녀오니 잠이 오질 않는다. 2시간에 걸쳐, 거쳐 온 코스를 정리를 하였다. 간밤 기상 식(機上 食)이 과했던지 뱃속이 불편하다. 아침을 걸렀다. 호텔을 나선 시각은 08시45분, 하롱베이를 향해 떠났다. 동양의 3대 비경 중의 하나인데 거리는 150㎞, 3시간30분 이 걸린다고 한다. 날씨가 흐렸는데 런던을 닮았다고 했다. 가로수가 울창하고 거리는 비교적 깨끗했다. 환경미화원이 우리보다 10배는 많다고 한다. 그런데도 도시는 한없이 어지럽게 느껴졌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오토바이와 자전거 행렬, 끊임없이 울려대는 클랙슨소음, 도심 가득한 매연, 차선을 바꿔 가느라 좌로 우로 비켜가는 곡예운전, 많은 이들은 마스크를 하고 다녔는데 말 그대로 공해의 극치가 아닌가 싶었다. 헬멧 쓴 사람이 없어 궁금했는데 더위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속도를 40㎞로 제한하여 전체적인 흐름은 완만하다. 시내버스는 별로 보이지가 않았다. 교통수단 90%가 오토바이인 나라, 더 달릴라 야 달릴 수 없는 환경이었다. 특이한 건 신호등인데 시설이 잘 보이지가 않는다. 처음에는 아예 없는 것으로 알았다. 알고 보니 낮게 시설이 되어 있었다. 시 외곽으로 빠지니 그제야 높이 해 놓은 시설이 보였다. 교통사고의 경우인데 처리방법이 인간적이라고 했다. 사고가 설사 상대방의 잘못이었을 지라도 상대가 피해가 크면 따뜻이 위로해주고 도움차원에서 돈까지 쥐여준다고 한다. 규정부터 따지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아닌 것 같아 유교덕목인가 싶고, 때가 덜 묻은 것도 같다. 그렇다면, 아직은 살 만한 나라가 아닌가.
시내를 관통하는 동안 유난히 눈에 띈 게 건축양식이었는데, 노변 건물들이 주로 3~5층에 앞면 폭은 겨우 3m쯤이나 될 것 같다. 그러니 집 구조가 노변 쪽은 극히 좁고 안쪽으로 길어 직사각형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정집과 상가가 거의 모두 같았다. 궁금해 물었는데,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토지는 국가소유이므로 분배 시, 도로 접합 면 혜택을 고루 주기 위한 배려에서 그렇게 되었단다. 토지임대기간은 49년인데, 그 기간 중 간혹 사고파는 경우가 있어 이 경우 앞면을 넓게 하여 건물을 지을 수는 있다는데 그런 건물은 거의 눈에 띄지가 않았다. 그러니 가게마다 상품을 진열하고 나면 통로가 좁고 길어 어둡고 답답해 보였다. 가정집도 벽 쪽으로 가구배치를 하고 나면 복도처럼 긴 방 구조가 되어 얼마나 불편할까. 이해가 안 되었던 건 도시는 인구밀집지역이라 그렇다 치고 농촌집들도 비슷한 구조가 많았다. 민주주의 체제하에 있던 호찌민시(구, 사이공)의 건축 양식이 몹시도 궁금하다. 시내엔 ‘가인’을 맨 부녀자들이 종종 눈에 띠였다. 긴 작대기 양끝에 짐을 매달아 한쪽 어깨에 메고 가는데 80㎏까지도 가능하다고 한다. 대개는 어깨가 무너져 내려 고생을 한다는데 그래서 지게의 우수성에 대하여 이야기들을 나눴다. 평생 지게 지고 살았어도 어깨 고통받는 이 별로 들어 보 덜 못했기 때문이다. 시내중심에서 약간 벗어날 즈음에 홍 강(Red River)을 건넜다. 무척 넓고 강물은 흐렸다. 중국에서 발원하여 하노이까지 무려 1,200㎞에 이른다는데 통킹 만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강 주변은 미개발 상태에서 산만했다. 귀국해서 알았지만 지난해 9월, 전 서울시장과 하노이시장이 홍 강 개발계획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한다. 우리 기업이 참여하면 호기(好機)를 누릴 것도 같다. 외곽지점에서 기차를 만났는데 속도가 느렸다. 식민지 시절 프랑스에서 건설했다는데 협궤(狹軌)에 단선이어서 속도를 낼 수가 없단다. 하노이에서 호찌민시까지 36시간이나 걸린다고 했다. 열차는 만원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어울려 사는 사회, 이것이 곧 낭만이 아니고 무엇이랴. 60년대 우리의 통일호를 보는 것 같아 향수를 느꼈다.
시내를 벗어나자 농촌 모습이 들어왔다. 망망한 대평원에 가을 추수가 일제히 끝이 났다. 저온에서 자라는 옥수수와 감자농사만 한창이었다. 기후가 같은 동남아권이면서도 위도가 높아서인지 캄보디아와는 농촌풍경이 완연히 달랐다. 겨울에는 섭씨 7도까지 내려가고, 몇 해 전인가는 4도까지도 내려갔다는데 그때 사람이 많이 얼어 죽었다고 한다. 더운 지방 사람들이라 그 정도의 기후조건에서도 심혈관계 질환을 일으켜 사망까지 이르는 것 같다. 벼 수확한 논을 보니 볏짚 높이가 들쑥날쑥 이었다. 캄보디아는 벼 벤 논이 높이 베기 일색이었던데 비하여 이곳은 높이 베기, 중간 베기, 낮추 베기가 혼재하여 궁금하다. 농촌은 기계화가 안 되어 인력만으로 농사를 짓는다는데 낮추 베기 논은 우리의 기계수확 한 논과 바닥 모습이 같았다. 높이 베기 논에 소를 풀어놓아 볏짚을 뜯기는 장면은 캄보디아와 똑같았다. 농약을 전혀 쓰지 않아 무공해 재배라는데 그래서 논에는 우렁이와 미꾸라지가 매우 많다고 한다. 끝도 없이 펼쳐진 대평원에 다랑이 논처럼 작은 논배미들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경지정리 논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경지정리를 한다면 필지 규모를 3,000평쯤 해도 전혀 손색없을 것 같은 입지 조건인데도 그랬다. 세계 3대 쌀 수출대국 베트남, 경지정리와 기계화가 이루어져 생산성만 높인다면 세계 쌀 시장을 주름잡을 것도 같다. 겨울이라야 가을 날씨 같은 자연조건, 풍부한 수자원, 2기작 등 그런대로 벼농사 여건을 두루 갖추었지 않는가. 소가 논갈이 장면이 그림처럼 들어왔다. 마치 우리의 옛 농촌모습이었는데 가을갈이였다.
달리는 차 창 밖으로 농촌 풍광에 젖어가며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없어 문답식 대화들이 오갔는데 단연 결혼 문화가 화제가 되었다. 우리나라 농촌총각이 베트남 처녀를 돈 주고 사온다는 여론에 대하여 안내원의 견해를 물었는데 그렇지 않단다. 이 나라는 결혼 비용 일체를 남자가 부담을 한다고 한다. 여자는 몸만 가면 되는데 이점은 캄보디아와 같았다. 우리나라 총각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면서 돈을 주고 데려오는 것은 당연하여 결혼문화의 차이일 뿐이지 사고파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결혼 후에도 처가에서 금전적인 도움을 바라지 않겠는가? 에 대하여는, 우리도 결혼하여 처가가 못살면 도움을 주지 않는가. 그런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지 사고파는 연장선상에서 보지 말라고 했다. 이곳 농촌은 전화도 없고 연간 소득이 200$(약 19만 원) 농가도 많다고 한다. 그러니 가끔 우리 돈 10만 원쯤 송금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하고 반문이 돌아왔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 이렇게 간단한 것을, 관습의 차이일 뿐인 것을, 그간 오해를 했던 게 아닌가 싶어 부끄럽다. 조류인플루엔자가 한창일 때 우리나라 신랑감이 이 나라 신부댁을 찾아갔더니 닭을 잡아내 놓더란다. 먹기 꺼림칙했는데 베트남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관심조차 없더라고 했다. 수준의 차이이니 어쩌겠는가. 두서없는 얘기지만 농산물 거래는 ㎏ 단위로 이루어져 수박 한 덩이를 사도 ㎏ 단위로 맞는 것을 골라야지 만약 2.7㎏ 크기이면 계산이 상당히 복잡하더라고 해서 웃었다.
대화를 나눠 가던 중인데 일단 정지선에서 잠시 차가 멎었다. 막사 같은 건물 앞에 근무자가 앉아있는데 궁금하다. 알고 보니 도간 경계를 넘을 때는 통행료를 내야 한단다. 우리는 고속도로에서만 통행료를 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럴 수도 있구나. 열악한 지방재정을 위해 우리나라도 시도해 봄이 어떨까. 교통대국이지 않은가, 아 하! 망령이로다. ‘베트남농원’에 도착시각은 10시50분, 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서니 교민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정원수와 초가지붕이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간판을 보고 농장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농산물 가공품 판매장을 겸한 휴식 공간이었다. 인기품목은 꿀이었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용기에 값은 10,000~15,000원, 가격이 냉큼 내키는 조건만은 아닌 것 같았다. 농원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다시 차에 올라 하롱베이를 향해 가는 동안 차중에서의 방담(放 談) 요지인데 이 나라는 남녀 차별이 적어 국회의원 450명 중 여성이 117명이라고 한다. 여성의 90%가 직업을 가졌고, 실업률은 4% 정도로 낮으며, 장애인도 일을 한단다. 일력 창출결과라고 한다. 정치체제는 사회주의 공화제지 만 1986년 ‘도이모이 정책’을 단행하였다. ‘도이모이’는 베트남 어로 ‘쇄신’이란 뜻인데 기초골격은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를 접목시키려는 정책 이어서 베트남 판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로 불린단다. 한마디로 개방에 의한 국제화와 시장경제의 도입인데 그 결과 1인당 국민소득이 100~200$에 불과하던 베트남이 최근에는 700$ 수준에 이르렀다. 가장 혁명적인 조치는 농업 개혁인데, 1988년 1월,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가 갖되 농민 개개인에게 장기사용권을 부여함으로써 생산력 향상을 유도하는 토지법을 제정을 하였다. 이 때문에 쌀 수입국으로 전락했던 베트남은 다시 세계 3대 수출국으로 부상하는 등 도약의 발판이 마련이 되었다. 이 나라는 인접국가보다 화교 경제력 비중이 작다는데 이유는 1979년 중국이 베트남 침공 시 화교가 선상난민 형식으로 베트남을 떠난 결과라고 하였다.
우연히 차창 밖을 보니 우리나라 중고차 한글표기 ‘마그넷’이 달려간다. 베트남은 우리보다 한글을 좋아한다는데 한류영향이라고 하였다. 그 사례 담인데, 베트남 수입업자가 한국에 와 중고차량 수입 상담을 하고 돌아갔다. 한국에서는 이미지를 좋게 하고자 새 차처럼 페인트칠하여 배에 실려서 보냈다. 그런데 한글표기가 없어졌다고 항의를 하더란다. 할 수 없이 베트남으로 건너가 원형대로 한글을 복원시켜 주었다고 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그 많은 한글표기 차량을 보면서 처음에는 단순히 못사는 나라라서 그런 가했는데 그것이 곧 우리의 위상이자 한류의 영향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잔뜩 찌푸린 날씨, 안개마저 자욱하여 시야가 흐렸다. 멀리 바다 위에 희끄무레하니 보이는 게 구름 같기도 하고 그림자 같기도 하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절경이 들어왔다. 하롱베이였다. 안내원의 설명인데, 하롱만은 서울의 3배 가까운 면적의 바다 위에 약 3,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베트남 최고의 자연경관지 이자 세계 8대 비경으로 꼽힌다. 1994년 유네스코가 보존해야 할 ‘인류의 자연유산’으로 선정을 하였다. 하롱은 용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인 하룡(下龍)의 베트남어, 다음은 하룡만의 전설인데, 옛날이 일대에는 끊임없는 해적의 침입이 있었는데 한번은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해적을 물리치고 보석들을 빼앗아 그 보석들을 바다에 뿌려 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이 보석들이 기암괴석으로 변해 해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288년 쩐홍다오 장군이 이 지형을 이용해 몽고군을 격퇴했다고 하며, 또 다른 전설로는 산에 사는 거대한 용이 바다로 뛰어나갔는데 용의 꼬리가 도리깨질을 쳐서 산이 움푹움푹 패여 이런 지형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하롱베이 도착을 앞두고 거의 육지의 끝 지점이었는데 기상천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암괴석과 숲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절경을 무참히도 까뭉개 내렸다.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산들이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석회석 채취가 목적이었다는데 그래도 그렇지 세계 8대 비경의 관문이지 않은가. 이왕 파헤쳐진 경관 어서 다 깎아내려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지금 베트남은 건설경기가 한창이여 시멘트가 부족하다고 한다. 석회석의 나라 베트남, 물도 석회수가 되어 상품화된 물 말고는 먹지 말라는 당부 한두 번이었던가. 그런데 석회석 채취할 데가 없어 하필 비경(秘 境) 문전에서 채취를 하다니 기가 찼다.
하롱베이 도착시각은 12시50분, 관광지 개발 11년째, 택지 조성 등 변화해가는 모습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밍하이(MINH HAI)호 승선시각은 12시55분, 우리 일행만 탔는데, 점심은 옵션으로 해물로 계획이 되었다. 그런데 바닷물은 석회수가 되어 물고기와 해초가 없고 파도, 갈매기, 갯내도 없다는데 궁금하다. 30분쯤 항진해 나가니 아늑한 바위섬 절벽 아래 어시장이 열렸다. 활어(活魚)는 펄떡대고, 유람선은 모여들고 사고파는 장면 부산하다. 하롱만의 섬들은 물에 녹는 성분이 포함된 석회암으로 돼 있어 섬의 아랫부분이 바닷물에 녹아 빙 둘러 절벽을 이루어 마치 버섯 모양들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용식작용(溶蝕作用)으로 섬은 각양각색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래서 닭, 개, 낙타, 등 이름이 붙어있단다. 코발트 빛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답다. 신선이로다. 선상에 올라 포즈 취하고 사진 찍느라 바빴다. 1시간쯤 지나 요리가 나왔는데 바닷가재에 꽃게처럼 생긴 게 나왔고, 조개, 대하, 다굼바리회, 생선튀김, 감자튀김 등 시차를 두고 나왔다. 이름 모를 해물 포함 7~8가지가 넘었다. 선상요리…, 해상 풍광이 더하여 진미에 젖었다. 처음엔 시장기에 게 검스레 접시를 비웠는데 뒤에 나온 해물들은 포만감으로 맛보기에 그쳤고 식탁만 채워갈 뿐이었다. 천천히 음미해 가며 고루고루 먹어도 되는 것을, 이렇게 풍성히 나올 줄을 미처 알았던가. 1인당 30$, 전용 유람선에 요리사와 봉사직원이 같이 탔는데 너무 싼 것 아닌가 싶었다. 유유자적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띠엔꿍 동굴’에 도착시각은 15시10분, 하롱베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로 1998년 5월에 일반에게 공개됐다고 한다. 배에서 내려 100m쯤 올라 입구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높이 20m의 넓은 공간과 함께 버섯, 용, 코끼리 등 모양을 한 종유석이 경이롭고 아름답다. 동굴 천정은 유네스코에서 낙석 등 위험방지 차원에서 시멘트로 보완작업을 하였다는데 물결무늬처럼 자연스러워 설명을 듣기 전에는 인공물인 줄 몰랐다. 매우 높고 들쑥날쑥한 천정을 어떻게 보완을 했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 동굴은 죽은 동굴이라고 한다. 습기가 없어서라는데, 습기 없는 동굴이 죽은 동굴이란 걸 이곳 와서 듣고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넓은 공간에 습기라곤 전혀 느껴볼 수가 없었다. 이 동굴은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해적들의 은신처였다고 하며, 프랑스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가들 은신처로도 이용되었다는데 물 한 방울 없는 동굴에서 어찌 생활을 했을지 궁금하다. 동굴 계단을 내려오며 밖을 내려다보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경탄을 하였다.
다음 코스 ‘티톱(TITOP)섬’ 도착시각은 15시55분, 모래사장이 아름답다. 들어서니 섬 가장자리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바로 뒤편 높은 위치에는 'DAO TITOP'이라고 표기가 되어있다. 이것은 1962년 소련 두 번째 우주인 TITOP이 이곳을 방문하여 자연경관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는데 호찌민이가 그의 내방을 기념하고자 기념비를 세우고 섬 이름을 ‘티 톱 섬’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바로 섬 전망대를 향해 올랐는데, 가는 길은 가파른 숲 사이로 425계단 시설이 되어있었다. 산 높이는 200m쯤 불과하지만 여독 탓인지 중도 포기하고 4명만이 올랐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이라니, 사방팔방 시야 끝까지 펼쳐진 비취색 바다, 알맞게 배치되고 여러 가지 모형의 섬, 그 조화로움이 이런 걸 예술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이라고 해야 하나.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나도 모르게 찬탄의 소리를 질렀다. 솔직히 시샘도 일었는데 신은 어찌하여 이 나라에만 축복을 내렸는지 그게 묻고 싶다. 내려와 해변을 걸으니 수면이 고요하다. 유람선에 올라 쾌속정을 타려고 잠시 대기하는 중인데 P 회장님의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크신 체구, 박자 맞춘 적당한 몸놀림에 흘러간 옛 노래는 언제나 들어도 구성지고 즐겁다. 좌중을 사로잡는 솜씨 부럽다.
쾌속정 보트에 탑승시각은 17시10분, 굉음이 일더니 날렵하게 바다를 갈랐다. 7~8분쯤 후 ‘루언 동굴’이 나왔다. 달리는 동안 배를 갸웃 등거리며 달릴 땐 놀람 반, 희열 반, 모두가 가슴조이며 얼마나 환호했던지 모른다. 마치 호수 같은 바다 위에 동굴 형체로 섬이 떠 있는데, 위는 바위산이고 수면은 동굴이었다. 주변은 유람선이 유유히 떠돌고, 서양연인 노를 저어가는 게 한 폭의 그림 같다. 동굴지점에서 모터를 멈춰 섰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느라 여념들이 없었다. 원위치에 도착시각은 17시30분, 희뿌연 날씨 속에 어둠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바로 유람선에 올라 ‘티 톱 섬’을 출발, 밤바다를 달려 하롱베이 상륙시간은 18시35분, 축복의 땅 하롱베이 비경은 그렇게 끝났다. 5분 거리 BLUE SKY 호텔에 도착 409호실을 배정 받아 가방을 내려놓고 저녁식사 차 다시 나온 시각은 19시50분, 호텔식이었는데 늦은 점심에다 포만감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모두가 건성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런 날 뷔페식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필 진수성찬은 또 무언가. 연거푸 나오는 찌개와 찜은 거들떠도 안 본다. 성찬(盛饌)의 홍수에 빠졌다, 아까운 마음에 일어설 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나왔다,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할 양식이요 귀중한 자원인 것을…, 호텔 방으로 돌아와 큰딸에게 전화하여 소식을 전했다. 일찍 잠자리에 드니 여유롭고 푸근하다.
11월29일(수) 흐림. 하롱베이의 아침 기온은 쾌적하고도 흐렸다. 하노이 요즘 날씨 런던 날씨라더니, 같은 동남아권이면서도 기상조건은 나라마다 달랐다. 캄보디아는 한여름이었고, 이곳은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아침식사 06시50분, 출발시각 09시05분, 호텔을 떠나오며 계산대에 들려 전화요금 1$을 내미니 2$을 내라고 한다. 간밤 다른 분은 계산대에서 전화하고 1$이면 되었는데, 하니 계산대와 방은 다르단다. 1분도 채 안 된 통화였는데 방에서 했다 하여 두 배를 내라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나 간밤 계산대에서 전화를 하려 하니 친절히도 방에서 하라 하며 안내했지 않았던가. 불과 1$이지만 조금은 씁쓸하다. 어제 온 길 따라 하노이를 향해 떠났다. 그냥 가긴 무료하여 방담으로 시간을 채웠다. 베트남 여자들 바람피우는 남자 용납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이혼이 많다고 한다. 이혼 많은 건 캄보디아도 같았는데, 하긴 우리나라도 이혼 많기로는 그 대열에서 빠지지 않을 터였다. 캄보디아에서는 여자들에게 자녀 성(姓)을 물으면 실례란 말을 듣고, 아버지가 다른 경우가 많구나! 생각을 하였다. 여자가 남자바람 끼 좋아할 나라는 없으리라. 베트남이 우리나라와 수교한 건 1992년, 그전엔 일본을 통해 상거래를 하였다. 수교 초기엔 한국에 대한 인식이 나빴단다. 졸부들이 베트남에 와서 여자 농락 사례가 많았다는데 이를 치유한 건 ‘대우’와 ‘태광산업’ 공로라고 했다. 대우가 진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태광산업이 진출하여 신발산업을 육성시키고 취업의 길을 열었다. 예부터 ‘광에서 인심 난다.’ 하지 않았던가. 이 나라의 한류 열풍은 대단하다고 한다. 선두주자는 ‘의가 형제’의 주역인 장동건과 이영애였단다. 베트남에서 ‘의가 형제’는 가히 폭발적이어서 3차례나 재방송이 되었고, 방영되는 시간에는 거리가 텅 빌 정도라고 했다. 장동건이 들어간 팬시 상품(Fency商品)이 불티나게 팔리고 이영애의 머리스타일이 순식간에 유행이 되었다. ‘가을동화’ ‘사랑이 뭐 길래’ ‘별은내 가슴에’ ‘신데렐라‘ ’마지막 승부.‘ 등이라는데, 최근엔 ’아들과 딸‘이라던가, 여하튼 장동건의 인기가 얼마쯤인지는 베트남에 건너와 공연을 했을 때 인파가 어떻게 몰렸던지 교통이 막히고 경찰이 교통정리를 하는 등 후유증이 무척 컸던가 보다. 다음 안재욱이 공연신청을 하니 얼마나 놀랐던지 승인이 안 되어 무산되었다고 했다. 나는 TV를 접해 온 지 40년이 넘었건만 드라마를 관심 있게 본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위력을 외국에 나와서야 듣고 느끼다니 한심(?)하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볼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내 생활의 틀이 그렇고 TV 속에 매여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노변 청과상에서 하차시각은 09시30분, 휴식 겸하여 시식을 하였다. 시식과 일은 야자와 파인애플, 화고였는데, ‘화고’는 겉과 속이 치자만큼이나 노랗고, 과육은 촉감과 맛이 마치 삶은 계란과 같았다. 그래서 계란과일이라고 한단다. 맛이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별미로 먹었다. 파인애플은 표피가 질기고 가시처럼 돋아난 게 깎아 먹기가 좀 쉬운 일인가. 그런데 여인네는 수월수월 잘도 깎아 냈다. 파인애플은 세 번 수확을 하는데 첫 번째 수확은 내수용, 두 번째는 수출용, 세 번째는 통조림용으로 쓰이는데 질기다고 한다. 통조림용은 최상품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보다. 또 들려주는 바나나 상식이었는데 품종은 400여 종류에 이르고 5단계로 구분이 된단다. 1단계: 파랄 때 수확, 2단계: 노랗게 변색시작, 3단계: 완전 황숙, 4단계: 검은 반점 발생, 5단계: 까맣게 변질하였을 때를 말하는데, 맛은 4단계에서 제일 좋고, 5단계에서도 1주일간은 신선도가 유지된다고 했다. 바나나는 냉장고에 넣어서는 안 되고 신선도 유지를 위해 물을 뿌리라고 해서 아주 유용한 상식이 되었다.
출발시각은 09시55분, 조금 달리니 소나무 숲이 보인다. 아열대성 기후에서 보는 소나무, 쭉 뻗어 자라 운치는 없지만 반갑다. 이 나라는 고무나무와 커피로 유명하다는데, 고무나무는 프랑스 사람이 원산지 브라질에서 26 본을 가져와 번식을 하였고, 커피는 세계수출 1위라고 한다. 특이한 건 묘지제도였다. 논 가에 묘지들이 많았다. 유심히 관찰하니 봉분을 콘크리트로 둘러친 묘지, 봉분 없이 사각형 형태로 평평하게 단(壇)처럼 꾸민 묘지, 봉분 앞에 자그마한 비석 세운 묘지, 적갈색 시설물로 발전한 형태의 묘지도 많았는데 90%가 매장을 한다고 한다. 논 가에 조상님을 모셨으니 찾아뵙기는 쉬울 터였다. 나라마다 다르고 신분 따라 다른 묘지제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는데, 아니었다. 나그네 눈엔 묘지만 보였다.
‘베트남 농원’에 도착 시각은 11시05분, 휴식 겸 쇼핑을 하였다. 홍보실에서 건강식품 설명회와 차 대접을 받았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분위기 조금은 서먹하다. 가는 곳마다 몸에 좋다는 식품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그런데 건강을 위해서는 제 나라, 제 고장에서 나는 식품을 먹으라 하지 않았던가. 이름하여 신토불이(身土不二)…, 11시35분, 출발과 동시에 게임을 벌였다. 화장지로 목감기 게임이었는데 먼저 통로를 중심으로 두 팀으로 나누어 일렬로 앉았다. 시작 신호와 동시에 각 팀의 앞사람이 통으로 된 화장지를 자기 목에 한 바퀴 감고 뒷사람에게 넘겨준다. 뒷사람은 넘겨받은 화장지를 역시 자기 목에 감고 다음, 그다음으로 연속 넘겨주는 게임이었는데, 맨 뒷좌석까지 먼저 도달 팀이 이긴다. 화장지가 중도에서 끊어지면 잇느라 시간이 걸렸다. 게임은 단시간에 끝이 났다. 그런데 두 줄로 목에 화장지를 감고 앉아있는 모습들이 어떻게 해괴하고 코믹하던지 킬킬거리며 웃었다. 일행이 화장지로 하나로 묶였다. 안내원의 기발한 착상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사는 즐거움 뭐 별거던가. 동심이 따로 있다던가.
정오를 넘기니 도로가 학생들 자전거 행렬로 가득 넘쳐난다. 처음엔 하교 시간으로 알았다. 알고 보니 집으로 점심 먹으러 간단다. 이 나라는 도시락 문화가 없다고 한다. 대부분 여성이 직업을 가진 나라라던데 이해가 안 된다. 더구나 거리가 먼 농촌 마을이지 않은가. 월남전이야기인데, 1964년부터 9년여에 걸쳐 약 32만 명의 한국군이 참전을 하였고, 4만여 명의 베트콩을 전사시켰다. 공과는 논외로 치고 단,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놓고 ‘학살이다, 아니다’에 대하여 의견들을 나누었다. 이점 안내원의 견해였는데, 낮에는 논에서 일하는 순수농민 이지만 밤만 되면 베트콩으로 둔갑하여 총을 겨누니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고 하였다. 옳은 시각 같았다.
‘한식 하노이 1번지‘에 도착시각은 13시10분, 150㎞거리, 4시간이나 걸려서 왔다. 고속도로가 없는 나라. 덕분에 이국 풍경에 젖어보는 맛은 괜찮았다. 식당은 중심가 서호(西湖)주변에 위치하였는데 건물은 2층 구조에 꽤 크고 넓었다. 2층 예약된 자리를 찾아 앉아 한식으로 맛있게들 먹었다. 밖으로 나오니 ’대우‘가 지었다는 고층빌딩이 서호와 어우러져 멋이 있다. 아내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잡상인이 달려든다. 목걸이를 사달라는 것이었다. 아니라며 거절을 하니 거듭 달려든다. 냉정하게 뿌리쳐서 보냈다. 다시 카메라에 초점을 맞춰 찍으려는데 다른 잡상인이 다가온다. 이번에도 거절을 하였다. 그런데도 집요하게도 달려들었다. 급기야는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데 도저히 귀찮아서 견딜 수가 없다. 물건이라야 목걸이와 그물망으로 된 그네 정도였는데, 잡상인은 왜 그리도 많고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지, 호수를 내려다보며 한가로이 도심을 감상할 수도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차에 올라탔는데 이번에는 유리창 문까지 두드리며 졸라댄다. 여행객의 정서와 휴식 같은 건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도이모이‘정책 이후 시장경제 바람이 일어 담배 한 갑, 껌 한 통이라도 벌어보려는 행상들로 꽉 들어찼다고 한다. 천차만별한 인생살이, 안쓰럽기는 하다.
중심가 ‘문묘’ 도착시각은 14시, 오는 도중 도심 한복판에 ‘APEC 베트남 2006’이라고 쓴 아치를 볼 수가 있었다. 온통 꽃으로 장식을 해 놓았는데, 막을 내린 지 9일째 되었지만 그때의 열기가 몸에 와 닿는다. ‘문묘’는 공자 등을 모신 유교사원이자 베트남 최초의 국립대학이다. 1070년 Ly Thanh Tong 황제에 의해서 세워졌다. 건물은 전통적인 베트남 양식으로 6개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정원은 갖가지 수목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정문에는 ‘문묘문(文廟門)’이라고 쓰여 있고 본당의 현판에는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쓰여 있었다. 본당의 중앙에는 공자가, 좌우로 장자, 맹자와 증자 있다. 정원 주변에는 80여 개의 비문이 있는데 이곳에서 공부하고 박사가 된 사람들의 업적을 새겨놓은 것이었다. 카메라 축전지가 떨어져 사진에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문묘에서 나와 7분 거리 ‘호찌민 광장’에 도착 시각은 15시05분, 대단히 크고 넓었다. ‘바딘 광장’이라고도 한다. 정면에 1969년 9월2일 사망한 호찌민 묘가 있고, 길 건너편으로는 멀리 국회의사당과 공산당 본부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바딘 광장은 호찌민이 1945년에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의미 있는 자리다. 묘는 다낭에서 운반해온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건물 안에 호찌민 유해가 유리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는데 개관시간이 맞질 않아 관람 못한 게 아쉬웠다. 호찌민 묘 광장 왼쪽 담장에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영원 하라.’ 오른쪽 담장에는 ‘주석 호찌민은 우리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다.’ 라고 대단히 큰 표어가 붙어있다. 호찌민은 미국과 싸웠지만 미국으로부터 존경받을 정도로 인격자라고 한다. 호찌민이 집권시절 관저로 누나가 방문 한 일이 있는데 가족에게 신경 쓰면 국가관이 흔들린다며 면담을 거절하여 눈물을 흘리고 갔다고 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미혼으로 살았다. 묘 바로 옆에는 1906년 프랑스 총독관저로 지어져 지금은 영빈관으로 쓰이는 건물과 호찌민 생가를 동시에 볼 수가 있다. 정원수와 호수가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다웠다. 영빈관은 노란색으로 치장한 4층 건물이었는데 APEC행사 때 노무현 대통령 맞이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영빈관 정문에는 ‘호지명주석고거기념관(胡志明主席故居紀念館)’, 그리고 생가에 들어서면 ‘호지명주석거주적방자(胡志明主席居住的房子)‘라고 표기가 되어있다. 그가 1958년부터 1969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인데, 적당히 거리를 두고 2개의 건물로 되어 있었다. 그중 본 건물 1층은 회의실로 되어있고 2층은 침실과 서재로 꾸며져 있다. 아담하고 검소하여 인품이 느껴졌다. 생가에는 호찌민의 자가용 2대도 전시가 되어있는데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기증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용은 딱 한 번뿐, 바딘 광장에서 독립선언문 낭독할 때였다는데 얼마나 검소한지 가늠이 갔다.
호수를 끼고 돌아 나오니 ‘일주사(一柱寺)’가 나왔다. 하나의 기둥 위에 세워졌대서 ‘일주사’라 한다. 규모는 작지만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돌로 된 기둥이었는데 원래는 나무 기둥이었다. 1042년 Ly Thai Tong 황제가 세웠는데 그동안 전란으로 여러 차례 훼손과 복구를 반복을 하였다. 전설인데 황제가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사내아이를 주는 꿈을 꾸고 평민 처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고 이에 감사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아들을 얻고자 이곳을 방문하여 치성드리는 여인이 많다는데, 하노이 화보에 빠지지 않으며 동전에도 새겨졌다는 ‘일주사’. 주변엔 연꽃이 소담하고 아름답게 피어있다.
‘일주사’ 출발시각은 16시25분, ‘수상인형극장’을 향해 달렸다. 가는 길 도심교통이 몹시도 혼잡하다. 찌푸린 날씨가 되어 어둡고, 매연과 먼지에 찌들어 어둡다. 오토바이 행렬은 더 어두웠는데 하긴 밝은 색상 복장으로는 매연환경으로 인해 단 하루인들 견뎌 낼까 싶지가 않다. 목적지를 지척에 두고 네거리에 이르렀는데 도로까지 파헤쳐 병목현상이 생겼다. 재촉해 대는 클랙슨 소리, 교통경찰 호루라기 소리, 운전기사 고함, 불만에 찬 목소리들, 꽉 메운 오토바이와 자전거 때문에 노면은 아예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조금씩은 움직여 나갔고 사고도 별반 뜨이지가 않는다. 하노이 교통 환경 신기하기 그지없다.
‘수상인형극장’에 도착시각은 16시55분, 입구에 들어서자 여행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불과 10여 분 사이에 자리가 들어찼다. 내부는 노천극장이었는데 무대는 사방 7~8m 정도의 작은 연못과, 연못 뒤편으로 과거 베트남의 왕궁과 같은 모습으로 세워진 화려한 건축물이 배경이 되고 있다. 수상인형극은 1000년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홍하 삼각주에서 발생한 북베트남 특유의 예술로서, 비가 많고 논농사 때문에 물을 많이 저장하고 사용하는 베트남의 자연조건이 수상인형극을 발달시켰다고 한다. 먼저 무대의 왼쪽에서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와 명창들이 분위기를 띄웠다. 바로 드라마의 내용을 변사가 열변을 토해 전개해 나간다. 마치 어렸을 적 무성영화를 보며 변사의 열변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내용은 깃발 행진과 인형극 소개에 이어 용춤, 사자춤, 봉황 춤, 피리 부는 소년, 낚시, 선녀춤, 여우 잡기, 오리 가두기, 농촌의 전원적인 풍경 등 17가지의 해학이 연속 펼쳐졌다. 웃음과 탄식이 절로 묻어 나왔다. 수상 무대의 인형은 물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막 뒤에서 사람들이 물속으로 연결된 기다란 막대와 수면 아래에 숨겨진 끈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설계된 이 인형들을 조종한다. 인형과 연결되는 나무막대는 물에 잘 뜨는 무화과나무와 대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수상 무대 뒤 어두운 장막 안에는 인형을 조정하는 배우들이 허리까지 차는 물속에 숨어 있다. 수상인형극이 시작한 지 약 50분이 지나자 아쉽게도 극이 막을 내렸다. 수상인형극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인형 조종자들이 수면으로 떠올라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멋이 있다. 전통 민속이 이렇게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되는구나 감복을 하였다. 이 인형극이 시작된 마을에서는 비밀을 유지하려고 한정된 수의 가족들에게만 전수하여 1960년대까지 베트남 북부지방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국립인형극단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인형극 관람 후 차에 오른 시각은 18시, 저녁식사시간으로 알았는데 ‘고무 시제품매장’을 방문한다고 한다. 심신도 피로하고 짜증도 일었다. 그렇다고 안내원이 가자 하는 코스를 마다할 수도 없었다. 중개료에 관계된 일 아닌가. 매장은 구시가지를 벗어나 신시가지에 있었다. 가는 도중 시가지 노변에 2주 전 개최한 APEC회의장이 보였는데 대단히 크고 넓었다. 공항건물보다도 더 컸는데, 이 나라가 APEC를 유치하고 행사를 치르는데 얼마만큼의 열정과 기대 속에 대비를 했는지 가늠이 갔다. 안내원은 지난해 제13회 부산 APEC 당시 이처럼 권위 있는 행사를 우리는 왜 일부 반대하고 소란을 피웠는지 모를 일이라며 갸우뚱거렸다. 베트남은 본 행사를 유치하여 국가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한다.
매장에 당도시각은 18시25분, 사전에 안내원과 연락이 되었던지 직원들이 나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처음엔 고무 시제품 매장이라 하여 궁금했는데 들어서 보니 ‘Ace 천연 라텍스’ 매장이었다. 고무성분을 원료로 한 일종의 ‘매트리스’였는데 홍보실에서 약 20분간 설명을 들었다. 모두 매트리스침대에 누워보고 감촉을 느껴보며 유용성 여부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특징이라면 스펀지 마냥 유연한 탄력성 때문에 누우면 몸이 매트리스에 밀착 포근히 안긴다. 어떤 자세에서도 편안한 수면조건을 제공하며, 특히 모세혈관의 혈행에 압력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침상생활을 장시간 하는 환자들에게 좋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내 상식과는 달랐다. 베개는 목침이 좋고, 허리 통증환자는 맨바닥이 좋으며, 노인은 푹신한 의자에 앉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유는 골반의 혈액순환에 영향을 끼쳐서 둔부에 질환을 유발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내의도 꼭 끼면 혈액순환장애를 일으키며 피부 공기접촉이 차단되어 피부건강에 좋지 않다 하지 않던가. 같은 이치인데 매트리스의 장점이라며 들었던 게 장기 환자는 혈액순환 장애로 욕창(褥瘡)이 촉발될지 모를 일이었다. 50만 원 내외의 고가제품임에도 많은 상담이 이루어졌다. 본 여행 기간을 통해 최고의 거래실적을 올렸는데, 특히 더운 여름철 푹신한 매트리스가 오히려 애물단지가 아니 될는지 갸우뚱해진다. 대금은 대부분 카드로 결재가 되었고 부피가 커 국제택배로 약정이 되었다. 제품도 가지가지, 충동구매도 가지가지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대장 금’에 도착시각은 19시35분,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여행 기간 현지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는데 그동안 호텔식과 한식이 거의 반반씩 되었던 것 같다. 음식 때문에 불편은 느껴보질 못했다. 이것으로 일정은 끝인가 했는데 공항 가는 길에 다시 들린 곳은 ‘굿모닝 하노이’ 쇼핑, 그때 시각 20시30분이었다, 또 쇼핑이라! 신물이 난다. 신시가지에 매장은 크고도 넓었다. 벨트 값이 우리 돈으로 9~17만 원선, 모든 값이 이처럼 비싸게 느껴져서인지 아무도 사는 이는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대로변에 택시가 죽 늘어서 있다. 보니 다섯 대 모두 우리나라 마티즈가 아닌가. 마티즈 택시 반갑다. 혼자 타는 경우가 많은데 굳이 커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우리도 택시만이라도 이처럼 소형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기름 값이며, 주차 간편해서 좋고, 또 보기는 어떻게 좋던지 잠시의 광경이지만 마티즈 택시를 보며 환호를 하였다.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시각은 21시50분, 대기시간이 길었다. 그간 수고해준 안내원은 이승규 씨, 부산출신으로 나이는 30세, 아직 미혼인데 하노이에서 안내원 생활 3년 되었다고 하며 이곳 생활에 만족 한다고 한다. 아는 것이 많고 애국심이 강했다. 올 때 그로부터 일행 모두 원뿔꼴 월남 모자를 선물로 받아들었다. 하노이에 한국관광객 안내원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으니 약 200명쯤 된단다. 이틀 동안 동행한 또 한 사람의 베트남국적 안내원이 있었는데 아내는 감사의 인사와 아울러 원뿔꼴 모자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글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쓰고 사인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 나라는 한국어 열풍이 대단하다고 한다. 매년 10월9일 한글날이 돌아오면 대학별로 한국어과 출신들이 모여 한국어 경연대회를 열고 갖가지 잔치를 하는데 한국보다도 열기가 뜨겁더라고 해서 놀랐다. 한글표기는 이제 품질 좋은 물건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통한다는데, 안내원의 한글 사인을 보고 그 말이 과장이 아니로구나 느낄 수 있었다.
짐 탁송시각은 22시30분, 출국 검색대를 통과하여 1시간가량 대기후 대한항공 684호기에 탑승, 유도로를 빠져나와 활주로에 도착시각은 24시,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여객기 규모는 약 300여 석으로 대형이었는데도 영상스크린이 없어 비행과정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심야라서 그렇게 갑갑할 수가 없었다. 아직 이런 고물여객기도 다 있구나. 02시쯤 기내식이 나왔고, 03시 제주 상공 통과, 잠시 후 인천국제공항 도착시각은 03시30분, 우리 시간으로는 05시30분이었는데, 먼동이 트려면 아직은 이른 시각, 기내를 빠져나오니 날씨 쌀쌀하다. 입국수속 후 마일리지 적립 확인하고 나오며 서울 여성 팀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였다. 나이 젊지만 호흡 잘 맞았고 잘 따라 주었는데 아쉽다. 자녀들 좋은 대학 갈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빌었다. 공항 밖 전주행 리무진 버스에 오른 시각은 06시30분, 조금 달리니 여명이 밝아온다. 쭉 뻗은 영종 가도 새벽바람 시원하다. 대한민국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