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命子, 안동대학교.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
김 명 자*
1. 머리말
2. 분석대상과 방법
3. 16~17세기 退溪學派와 婚班의 형성
4. 18세기 門中과 婚班의 정착
5. 19세기 鄕村社會의 분열과 婚班의 변화
6. 맺음말
요 약 문
본고는 16~19세기 풍산류씨 하회파의 혼반婚班 경향을 다루었다. 혼
반은 중첩된 혼인관계를 대대로 계승하는 문중 집단이다. 하회파와 혼인
이 이루어진 성씨는 256개이지만, 이 가운데 혼반을 형성한 것은 안동
권·진성이.의성김.안동김.광산김.영양남.순천김씨를 비롯한 29개의 성
씨다.
혼반은 17세기 후반 문중과 더불어 형성되었으며, 18세기에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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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파의 혼반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상대 성씨에서 퇴계학맥의 존재
여부였다. 그러나 시기별로는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17세기에는 퇴계학
맥을 포함한 영남사림파로 통혼권이 형성되었지만, 류성룡의 인간관계
도 혼인에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는 혼반이 정착되었는데, 의성김씨 천전파와의 혼인 비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서애계와 학봉계의 갈등이 혼반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안동권을 중심으로 통혼권이 형성되었지만, 근기남인과의 중첩된
혼인을 통해 정치적인 연대를 지향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향촌사회가 병론屛論과 호론虎論으로 분열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하회파의 혼반에도 영향을 주어 병론에 속한 성씨와의 혼인 비중
이 높았다. 따라서 통혼권의 중심도 안동의 서부지역으로 좁아졌다. 이러한
변화는 혼반이 문중의 생존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주제어 : 풍산류씨豊山柳氏 하회파河回派, 문중門中, 혼반婚班, 퇴계학맥退
溪學脈, 서애계西厓系, 학봉계西厓系.
1. 머리말
혼반婚班이란 중첩된 혼인관계를 대대로 계승하는 문중 집단이다. 16세기 이
후 향촌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한 사족은 자신들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횡적 연대로 혼맥婚脈을 형성하였고,1) 이것이 문중의 형성과 더불어 혼반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한 씨족의 파조派祖, 즉 문중의 시조는 대체로 15~17세기의 인물로
높은 관직을 지냈거나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1) 薛錫圭는 '혼맥이란 혼인시 경제적 기반을 우선시 하는 것이고, 안동 사림의 혼반은 퇴계학을
계승하는 동질적 가문인지의 여부를 우선시 한다'라고 하였다(薛錫圭, .安東士林의 政治的 分化
와 婚班 形成., ..안동학연구..제1집, 2002, 138쪽).
투고 /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_ 431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안동권安東圈의 경우 그 대부분이 퇴계학파에 속하였
다.2) 조선후기에는 문중의 위세가 사족 개인의 사회적 지위로 이어졌기 때문에,
문중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지위를 당대 혹은 후대까지 지속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문중활동을 전개하였다.3) 한편 혼인을 통한 횡적인 연대와 결속으로 문중
의 위상을 보존.강화하려고도 하였다. 그래서 문중마다 특정 문중과 거듭되는
혼인 양상을 보이며, 독자적인 혼반을 형성하였다. 혼반의 단위가 문중이기 때문
에 이를 통해 특정 문중의 정치적 경향, 사회적 위세, 그리고 경제적 부의 정도까
지 파악할 수 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사족의 혼인에 대한 연구는 한기범韓基範, 설석규薛錫圭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4) 한기범은 단성丹城호적에 보이는 혼인의 분석을 통해
사족간의 족적 결합이 향촌에서의 족세 형성과 확대 및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설석규는 안동지역 사족들의 혼반 형성의
계기를 퇴계학파의 분화에서 오는 갈등의 소지를 예방하기 위한 안정장치로
설명하였다. 이로써 조선시대 사족 사이의 혼인은 단순히 혈연관계의 형성을
뛰어 넘어 사족의 사회적인 지위와 명망을 보장받고, 사회적 결속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혼인은 문중별로 그리고 시기별로
양상을 달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아직까지
2) 여기서의 안동권이란 경상도의 界首官 가운데 하나인 안동부와 그 관할 아래에 있던 군현까지를
포괄한다.
3) 문중은 혈연성·지연성·공유 재산, 그리고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족의 위세집단이다. 혈연성
은 부계적 혈연집단을 기초로 하며, 지연성의 단위는 향촌 혹은 촌락이고, 공유 재산은 문중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경제적 기반이다. 그리고 공동체 의식은 外來姓氏의 경우, 입향조를 중심으
로 한 공동체의식과 派祖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에 따라 중층적으로 형성·표출되며,
土姓인 경우 중시조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식과 파조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식이 필요에 따라
중층적으로 형성·표출된다.
4) 韓基範, .朝鮮後期 鄕村社會의 族的結合 -慶尙道 丹城縣의 實態 分析., ..湖西史學..19·20, 1992;
薛錫圭, 앞의 논문. 한편 趙康熙의 ..嶺南地方 兩班家門의 婚姻에 관한 硏究..(영남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6)은 분석대상이 대부분 20세기의 인물이지만 조선시대의 혼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432 _ 국학연구제12집
미흡하다.
본고는 ..풍산류씨세보豊山柳氏世譜..(1807, 1855, 1985)를 통해 16~19세기 풍산류씨
豊山柳氏 하회파河回派의 혼반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5) 풍산류씨는 1세 류절柳節
에서 3세 류정장柳挺莊까지는 안동부 풍산현의 호족으로 지내다가, 4세 류백柳伯
이 중앙관직을 역임하면서 향리에서 벗어나 사족화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 말
7세 류종혜柳從惠가 하회에 정착한 이후, 10세 류자온柳子溫(1453~1502)대인 15세기
말까지는 과거나 환로보다는 경제적 성장에 주력하였으며, 아울러 지역 사족들
과의 혼인을 통해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후 11세 류공작柳公綽(1481~1559)
대부터 3대에 걸쳐 문과급제자가 연달아 나오면서 16세기의 풍산류씨는 사회적
명망과 위세를 얻기 시작하였고, 그 최고점에 달한 것이 13세 겸암謙菴 류운룡柳
雲龍(1539~1601)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 형제대이다.6) 풍산류씨 하회
파는 12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1515~1573)과 그의 아들인 운룡·성룡 형제, 그리
고 그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들을 대상으로 시기별 혼인의 변화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파별
로는 어떠한 변화를 보이는지, 혼인과 퇴계학맥과는 얼마나 연관성을 가지는지,
그리고 혼인과 지연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갖는지도 함께 살펴보겠다.
5) 지금까지 ..豊山柳氏世譜..는 1758·1807·1855·1964·1985년에 간행되었으며, 1807년 간행본인 丁卯
譜부터 현전한다. 풍산류씨의 世系에 대한 정리는 柳仲.에서 비롯되어 柳雲龍·成龍 형제로
이어졌으며, 류성룡의 손자 元之는 필사본의 ..豊山柳氏世譜..(대구 柳昌海氏 所藏)를 완성하였
다. 이러한 자료를 기초로 조선시대 풍산류씨의 족보는 3회에 걸쳐 간행되었는데, 모두 하회파에
서 주도하였다. 간략한 정보는 아래와 같다.
<조선시대 풍산류씨 하회파의 족보 간행 현황>
刊行 時期冊 數編 纂 者序跋
戊寅譜(1758) 2冊柳聖觀, 柳 泳李象靖柳泳, 柳宗春, 柳.
丁卯譜(1807) 5冊
柳漢祚, 柳鳳祚
柳師春, 柳宇春
柳
乙卯譜(1855) 7冊柳進翰, 柳道宗
6) ..謙菴集..卷6, .先代遺事.; ..終天永慕錄..卷1, .世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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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석대상과 방법
..풍산류씨세보..에 수록된 하회파 구성원들의 혼인 연령을 정확하게 확인
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20세를 혼인연령으로 추정해 1580년까지의 출생자
를 16세기로, 1680년까지의 출생자를 17세기로, 1780년까지의 출생자를 18세
기로, 그리고 1880년까지의 출생자를 19세기로 구분하였다. 1880년까지의 출
생자는 모두 4,272명이고, 그 가운데 혼인성씨가 기록된 인원은 3,802명이다.
그러나 재혼·삼혼·사혼이 있어서 실제로 혼인한 횟수는 4,250회이다. 이를 파
별로 분류하면 <표 1>과 같은데, 우선 아래 표에 나오는 각 파와 파조에 대하
여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표 1> ..豊山柳氏世譜..의 하회파 수록 인원·혼인 인원·혼인 횟수
구 분
수 록 인 원 혼 인 인 원
혼인횟수
아들 딸 합계 합 계
아 들
딸
인원
初婚再婚三婚四婚합계
謙巖派
察訪公派 341 293 633 316 58 4 243 559 621
狼川公派498 355 853 469 63 6 300 769 838
敎官公派211 120 331 185 25 7 1 101 286 319
西厓派
察訪公派641 490 1,131 601 135 13 460 1,061 1,209
生 物 派154 105 259 148 22 4 94 242 268
愚 川 派194 126 320 188 33 5 1 106 294 333
柳 川 派412 167 579 356 52 2 106 462 516
謙謹齋派113 52 165 99 14 3 30 129 146
계 2,564 1,708 4,272 2,362 402 44 2 1,440 3,802 4,250
434 _ 국학연구제12집
하회에 거주하던 풍산류씨의 가계는 류중영에서 류운룡으로 이어졌으나,
류성룡의 후손들이 류성룡을 중심으로 분화하면서 겸암파謙巖派와 서애파西厓
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겸암파는 찰방공파察訪公派·낭천공파狼川公派·교관공파
敎官公派로, 서애파는 찰방공파·생물파生物派·우천파愚川派·유천파柳川派·겸근재파
謙謹齋派로 분화되었다.
하회파의 파조인 류중영은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정주목사·황
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장남 운룡은 이황의 문인으로 한성부판관·풍기
군수·원주목사 등을 역임했으며,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류운룡의
아들은 류주柳.(1560~1602)·류기柳.(1561~?)·류심柳.(1572~1632)인데, 모두 하회
에 거주하였다. 첫째 아들 주는 찰방을 지냈기 때문에 류운룡을 포함하여 그
후손들을 찰방공파라 부른다. 둘째 아들 기는 학행으로 세마洗馬를 역임해서
세마공파, 혹은 그의 아들 원량元亮(1590~?)이 낭천狼川현감을 지냈기 때문에 낭
천공파라고도 부른다. 셋째 아들 심도 음직으로 동몽교관이 주어져, 그 후손들
을 교관공파로 부른다.7)
류중영의 차남인 성룡 또한 이황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영
의정을 등을 지냈으며,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로는 류위柳褘
(1573~1585)·류여柳.(1578~1605)·류단柳.(1580~1612)·류진柳袗(1582~1635)·류초柳
初(1584~1658)·류첨柳.(1591~1650)이 있으나, 위는 어린 나이에 죽어 여를 첫째라
부른다. 여는 결혼 후 하회에 거주하였으며 장수長水찰방을 지내서 류성룡을
포함한 그 후손들을 찰방공파라고 한다. 둘째 아들 단은 세마를 지냈고, 그
후손들이 의성 생송生松(生物)에 세거하여 생물파로 부른다.8) 셋째 아들 진과
그 후손들을 우천파 혹은 수암공파라고 하는데, 류진은 지평·군수 등을 지냈
으며, 상주 우천에 이거하여 서애학맥을 상주지역으로 확대하는데 기여하였다.
7) ..國朝文科榜目..(규장각소장 영인본, 1983); ..嶠南科榜錄附錄..卷1~3(孫振熙 著, 1938)
8) ..豊山柳氏世譜..(1807) 이하 ..豊山柳氏世譜..(1807, 1855, 1985)에 근거한 내용은 따로 주를
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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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해서는 파조 이후 특정 성씨와 4촌 이내에서 1회 이상의 혼인이 3~4대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 하회파의 경우 14세인 각각의 파조들이 사촌四寸으로,
이들을 기준으로 할 때 적어도 16세에서 18세까지 계속적으로 혼인이 이루어
져야 혼반이 형성된다.11) 따라서 실제의 혼반은 문중이 출현하는 17세기 후
반부터 형성되어 18세기에 이르러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표 2>는 하회파가 혼인한 성씨와 그 횟수이다. 가장 많이 혼인한 성씨는
안동권씨이며, 그 다음으로 진성이.의성김.안동김.광산김.영양남.순천김.인
동장.풍산김.예안김.청주정.밀양박.풍양조.순흥안.전주이.아주신.예안이.
진주강.경주이.함양박씨 순이다. 이들 성씨를 포함하여 하회파와 혼인이 이루
어진 성씨들이 시기별로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16~17세기, 18세기, 19세
기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1) <풍산류씨 하회파의 혼반 기준표>
세 대 촌수
세대별
혼반 기준
세대별 누적
혼반 기준
세대별
실제 혼인횟수
세대별 누적
혼인횟수
13세 2촌 2명 2
14세 4촌 1명 1명 13명 15
15세 6촌 1.5명 2.5명 34명 49
16세 8촌 2명 4.5명 63명 110
17세 10촌 2.5명 7명 139명 251
18세 12촌 3명 10명 273명 524
19세 14촌 3.5명 13.5명 367명 891
20세 16촌 4명 17.5명 518명 1409
21세 18촌 4.5명 22명 616명 2025
22세 20촌 5명 27명 736명 2761
23세 40촌 10명 *37(34)명 780명 3541
24세(25세 이상) 80촌 20명 *57(46)명 **509(200)명 4250
(* 23세의 누적 혼반 기준은 37명, 24세는 57명 이어야 하나, 1880년 이전까지의 출생자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23세 가운데는 88~92%, 24세(25세 이상 포함)는 75~85%가 분석 대상이다.
따라서 실제 누적 혼반 기준은 23세 34명, 24세 46명으로 추정하였다. ** 509명은 24세이며,
괄호안의 200명은 25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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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6~17세기 退溪學派와 婚班의 형성
16~17세기 향촌사회의 지배구조를 ‘사족지배체제'라고 부른다.12) 16세기부터
향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사족은 유향소.향교.서원 조직 등을 중심으로 공동
의 유대를 형성하였고, 향약과 동계.동약을 실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
다.13) 그러한 가운데 16세기 중반 이후 안동사회는 이황의 문인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리학적 질서의 수용과 실천을 통해 향촌사회의 질서를 변화시
켰으며, 아울러 혼인을 통해 퇴계학파의 외연을 확대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풍산류씨 하회파의 혼인은 어떠한 양상을 띠었는지 살펴보겠다.
이 시기 하회파는 81개 성씨와 228회에 걸쳐 혼인하였다. 2세 1명, 13세 2명,
14세 12명, 15세 30명, 16세 53명, 17세 67명, 18세 32명, 19세 1명으로, 모두
198명이다. 이 가운데 남자는 118명이며, 초혼 118회, 재혼 26회, 그리고 삼혼이
4회여서 모두 148회의 혼인이 이루어졌고, 여자는 80회의 혼인이 있었다.
<표 3> 16~17세기 혼인성씨와 횟수
성 씨 횟수(%) 성 씨 횟수(%) 성 씨 횟수(%) 성 씨 횟수(%)
안 동 권 28(12.33) 남 양 홍 5(2.20) 연 안 이 3 장 흥 임 2
진 성 이 13(5.73) 선 산 김 5 영 양 남 3 전 주 이 2
인 동 장 9(3.96) 예 안 김 5 예 천 권 3 진 주 강 2
전 의 이 9 풍 산 김 5 청 주 정 3 평 산 신 2
경 주 이 6(2.64) 광 산 김 4(1.76) 함 양 박 3 풍 양 조 2
무 안 박 6 밀 양 박 4 흥 양 이 3 한 산 이 2
순 천 김 6 신 천 강 4 부 림 홍 2(0.88) 함 창 김 2
순 흥 안 6 진 주 하 4 아 주 신 2 현 풍 곽 2
안 동 김 6 광 주 이 3(1.32) 안 강 노 2 1회 혼인 38(16.74)
의 성 김 6 봉 화 금 3 야 성 송 2
합 계 228(100)
한 양 조 6 상 주 김 3 예 안 이 2
12) 김인걸, .조선후기 鄕村社會 변동에 관한 연구: 18·19세기 '鄕權'담당층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1.
13) 정진영,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한길사, 1998,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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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에서 안동권씨와 혼인한 횟수가 28회(12.33%)로 가장 많은데, 이는
안동권씨가 안동의 사족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향안鄕案
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1530년의 .가정향안嘉靖鄕案.에 등재
된 331명 가운데 안동권씨가 71명(21%)이다. 그리고 1589년의 289명 가운데
68명(24%), 1617년의 261명 가운데 63명(24%), 1647년의 324명 가운데 60명(19%),
1677년의 192명 가운데 37명(19%)로 16~17세기 향안에 등재된 전체 사족의
20% 이상을 차지한다.14) 따라서 안동의 사족이면 어느 성씨든지 상관없이
안동권씨와 가장 많이 혼인하였을 것이다.
그 다음이 진성이씨로 16세기 중반까지는 단 한차례의 혼인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높은 관직을 지냈거나 경제적 여건이 좋은
성씨들과 혼인하였다. 이를테면 류중영은 의성 사촌沙村에 강력한 경제적 기반
을 가지고 있던 안동김씨 김광수金光粹의 딸과 혼인하였다. 류성룡도 광평대군廣平
大君의 후손으로 하회와 인접한 용궁龍宮에 현감을 역임했던 이경李坰의 사위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안동과 그 인근에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하회파의
토지와 노비는 전국에 분포하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퇴계의 문인들이 생겨나면서 향촌사회는 이들 성씨들
이 주류가 되었고, 혼인의 기준도 변하게 되었다. 이는 이황의 제자였던 정사성
鄭士誠(1545~1607)의 .향약.에 잘 드러난다.15)
…우리 고을(안동)에 있어서 을미년(1535) 전에는 비록 청문사족淸門士族이라 하더
라도 혼인 할 때 오직 전민田民의 다과와 재산의 빈부만을 보고 족계族系와 문호門
戶의 고하高下는 가리지 않고 결혼하는 폐단이 종종 있었다. 전 군수 이고李股가
이 폐단을 통분하게 여겨 일시에 그것을 척결해 버리니 비록 지나친 점이 있다고
는 하더라도 어찌 보는 바가 없었겠는가.
14)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慶北鄕校資料集成..(Ⅱ), 영남대학교 출판부; 오세창 외, ..嶺南鄕約資
料集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집부, ..古文書集成..七.
15) ..芝軒集..卷3 .鄕約..
440 _ 국학연구제12집
그래서 16세기 중반 이후 진성이씨를 비롯하여 퇴계문인을 배출한 예안이.
인동장.경주이.의성김씨와 집중적으로 혼인하게 된다. <표 4>는 파악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혼인성씨들의 당사자 혹은 선조,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와 영남학파
와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16)
이를 통해 16세기 후반부터 퇴계 문인의 존재 여부가 혼인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 학연과 혈연이 밀접한 관계를 가짐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류성룡의
문인 혹은 그 후손들과는 대부분 혼인이 이루어졌다. 풍산류씨를 제외한 문인
으로는 김봉조金奉祖·배용길裵龍吉·김득연金得硏·권기權紀·김윤안金允安·김치관金
致寬·정윤목鄭允穆·정전鄭佺·권익창權益昌·정사신鄭士信·이진李珍·김령金.·정경세·
이준李埈·김홍미金弘微·전식全湜·조우인曺友仁·성영成泳·조익趙翊·고인계高仁繼·이
전李.·노경임盧景任·장흥효張興孝(김성일 문인)·배용길裵龍吉(조목 문인)·신달도申達道
(조목 문인) 등이 거론되는데,17) 이 가운데 17세기에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성씨는 성영·조우인, 그리고 장흥효 가계뿐이다.
<표 4> 16~17세기 혼인성씨의 거주지와 혼인 당사자 혹은 선조
권 역 성 씨 거 주 지 당사자 혹은 선조 비 고
安東圈
경주이씨 榮川城西 李尙彦/省吾堂 李介立
金應祖·趙任道와 교유
/김성일의 문인
고창오씨 禮安春塘 吳守盈이황의 문인
광산김씨 禮安近始齋 金垓/ 濯淸停 金綏
이황의 문인(류성룡의 문인)
/이황과 從遊
남양홍씨 安東 柰城松栢堂 洪宇定류이좌와 교유
무안박씨 寧海朴毅長이황의 문인(김언기의 문인)
16) ..惟一齋先生實記..卷2 .附錄.; ..西厓全書..卷3 .西厓先生文賢錄.; ..豊山柳氏世譜..(1985).
17) 김호종, .서애 류성룡과 안동·상주 지역의 퇴계학맥., ..퇴계학맥의 지역적 전개.., 2004; 한국국학
진흥원, .영남지역의 퇴계학맥도., 2002.
투고 /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_ 443
장흥효는 김성일과 류성룡 모두에게 사사 받았지만 이현일李玄逸의 외조부로
후대에 학봉계의 계보를 잇는 위치로 상정된다. 장흥효의 가계가 하회와 인접한
금계金溪에 세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의심스럽지
만, 이를 제외하고는 17세기의 혼인에서 서애계와 학봉계의 분화를 확인하기는
힘들다.18) 류운룡의 차남 기는 김성일金成一의 형인 김극일金克一의 딸과 혼인하
였고, 14세 심의 넷째 사위는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아들로, 김응조는 류성룡에
게 사사했지만 김성일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15세 백지百之는 김성일의
증손녀와 혼인하였고, 14세 진의 첫째 사위도 김성일의 문인이자 사위인 김영조
金榮祖의 아들, 시민時敏이다. 또한 학봉계의 대표적인 성씨인 재령이·한산이씨와
도 혼인이 이루어졌다. 류진의 넷째 사위 이상일李尙逸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맏아들로, 이현일의 형이기도 하다. 그리고 16세 세정世精의 사위는 안동 소호리蘇湖
里에 세거한 한산이씨 이상정李象靖의 후손이다.
물론 하회파의 혼인은 16세기 중반 이전의 영남사림 후손들과도 이루어졌다.
15세 원리의 사위는 예천 용문龍門에 세거한 예천권씨 권면權冕으로 그는 김종직
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헌부집의에 이른 권오기權五紀의 후손이다.
그리고 17세 후달後達은 선산의 밀양박씨 박영朴英의 후손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박영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으며,
문하에 이황·박운朴雲·김취성金就成·김취문金就文·신계성申季誠·박소朴紹 등이 배출
되었다. 그 밖에 조식曺植의 문인과도 혼인이 이루어졌다. 16세 응하應河는 조식
을 사사한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의 증손녀와 혼인하였으며, 세하世河는 곽재우의
후손 현풍곽씨 곽세건郭世楗의 딸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17세기에는 퇴계문인과
그 후손들과의 혼인이 주류였지만, 조식의 문인과도 혼인이 이루어져 영남학파
18) 17세기 서애계와 학봉계의 분화와 갈등은 설석규의 .퇴계학파의 分化와 屛虎是非(Ⅰ).(..한
국사상의 재조명.., 2007)을 참고할 수 있다. 한편 전주류씨는 同姓인 풍산류씨와 혼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성김씨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학봉계를 주도하였을 것으로 짐작
된다.
444 _ 국학연구제12집
내에서 큰 분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한편 류성룡의 인간관계도 혼인에 영향을 미쳤다. 류성룡이 조정에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동강東岡江 김우옹金宇. 등과 함께 활동한 것
이 계기가 되어 그 후손들과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8세 성신聖臣은 광주이
씨 이덕형의 현손녀와 혼인하였고, 14세 초의 사위는 성주의 의성김씨 김우옹의
후손이다. 17세 후강後康은 경주의 여강이씨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을 사위로 맞이
하였고, 이후 혼인이 계속 이어졌다. 왜냐하면 이언적의 신원伸寃문제가 제기되
었을 때 류성룡이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기 때문이다.19) 또한 16세 세정世精은
안동 주촌周村의 진성이씨 이증효李曾孝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증효는
1581년 '친부시해사건親父弑害事件'으로 안동부가 안동현으로 강등되자 류운룡.
안몽열安夢說과 협의하여 상소복호上疏復號하였고, 류성룡의 추천으로 의흥현감이
되었다.20) 이러한 인연이 세혼世婚의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 상대 성씨가 비록 퇴계학파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문과 급제 등을
통해 가격家格을 높인 성씨들과도 혼인이 이루어졌다. 겸암 찰방공파 18세 몽서
夢瑞의 첫째 부인은 진주강씨로, 그의 조부는 문과 급제한 강여호姜汝.이다. 그
리고 생물파 15세 백지百之의 첫째 사위 또한 진주강씨 강진석姜震錫으로, 몽서
의 부인과 남매이다. 이들 남매는 아버지의 음덕으로 하회파와 혼인이 이루어
졌다.
그러면 하회파의 통혼권通婚圈은 어떻게 되는가? <표 4>에서 드러나듯이 통
혼권은 풍산현을 비롯하여 안동·예안·예천·영천榮川·문경·의성·봉화.상주 등
주로 영남권이다. 따라서 지역적 인접성이 혼인에 중요한 요인임이 확인된다.
그러나 파별로 혼인성씨가 조금씩 다른 경향을 보여주듯이 통혼권도 조금씩
다르다.
19) 한편 '孫·李是非'로 여주이씨 晦齋派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경주손씨 愚齋派는 학봉계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조강희, 앞의 논문, 131쪽).
20)..松澗集..卷3 .行狀..
446 _ 국학연구제12집
혼인 상대자는 안동이 가장 많으며, 그 밖에 봉화·예천·상주·문경·선산·영해·울
진 등으로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낭천파도 안동, 그 중에서도 특히 풍산현이
많으며, 그 밖에 예천·경주·상주·문경·영해·예천·의성·진주·영천·현풍.충주 등
이 보여 상대적으로 넓은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교관공파는 진성이씨와 6회에
걸쳐 혼인하여 하회파 내에서 진성이씨와 가장 높은 혼인 비율을 보였다. 찰방
공파와 낭천파는 이황의 숙부 이우李.와 형 이해李瀣의 후손들과의 혼인이 잦았
으나, 교관공파는 주로 이황의 후손들과 혼인하였다.
서애 찰방공파는 안동·예안·의성·예천·상주·성주·경주·대구·합천 등 영남권
과 경기지역을 통혼권으로 하였으며, 다른 파에 비해 장현광과 정구의 문인 혹은
그 후손들과의 혼인 빈도가 높았다. 생물파도 퇴계학파 혹은 안동의 명문가와
혼인을 하였지만, 겸암파나 서애 찰방공파와는 달리 인동·합천·진주 등 경상우
도 쪽으로의 혼인이 많았고, 조식의 문인도 있다. 우천파는 혼인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류진으로 인하여 당대의 대표적인 퇴계문인과 상주지역에서 류성룡
의 제자인 정경세와 이준의 후손들과도 혼인이 빈번하였다. 혼인의 범위는 안
동·예안·문경·상주·영천 등으로 하회파의 세거지 중심이지만 예천·상주의 다른
파들과는 달리 안동에 거주하는 성씨와의 혼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서파인 유천파와 겸근재파는 조금 다른 혼인 양상을 보였다. 17세기의 유천
파는 26회의 혼인이 이루어져 하회파 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족세를 보인다.
더욱이 여자의 혼인 성씨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실제 구성원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혼인 성씨와 빈도는 인동장·신천강·예안김.예천권씨 순이며, 그 밖에
감천전·대구빈·경주이·무안박·반남박·상주김·선산김·.안동김·연안이·영천태·
장흥임·전의이·진성이·충주지·함창김·흥해배·구례손씨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겸근재파와 더불어 안동의 겸암파, 서애 찰방공파, 우천파에 비해 중첩적인 혼
인 빈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리고 14세 초가 예천 호명虎鳴에 세거하는 이황
의 현손녀玄孫女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을 제외하고는 퇴계학파에 속하는 가계와
의 혼인이 보이지 않고, 통혼권도 예천.상주를 중심으로 하여 충청도 쪽으로도
형성되었다.
투고 /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_ 447
겸근재파도 진성이·거창신·광산김·남양홍·봉화금·순천김·순천박·원주변·경
주이·풍산김·해평윤씨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16세 일상日祥이 무반이었던 풍산
김씨 김시설金時卨의 딸과 혼인하고, 17세 항윤恒潤이 광산김씨 김유金綬의 후손인
서국瑞國의 딸과 혼인한 것 외에 관직을 역임하였거나, 퇴계문인의 후손은 보이
지 않았다.
하회파가 16세기에 혼인한 성씨는 고성이·남양홍·성주배·순창조·순흥안·안
강노·안동권·안동김·야성송·의성김·전주이·청주정·한산이씨로 모두 13개 성씨
인데, 이 가운데 17세기에 혼인이 계속된 성씨는 안동권·안동김·의성김·전주이·
청주정씨 뿐이다. 이는 16세기~17세기 초기까지는 혼반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회파가 3~4대 내려오는 동안 중첩적인 혼인을 한 성씨들이
출현하여 안동권·진성이·예안이씨 정도를 17세기 후반의 혼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성씨들이 전체 79개 성씨에서 3개에 불과해 아직까지 혼반이 정착
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4. 18세기 門中과 婚班의 정착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하였던 안동의 사족들은 갑술환국 이후 근기남인의 도
태로 제휴할 중앙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향촌에 고립되었다.21) 아울러 경제
적 확대 재생산의 한계, 사족들의 숫적 팽창과 확대, 그리고 종법의 수용을 통해
가족제도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에 사족의 공동유대를 통해 운영되던 향촌사
회는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문중을 단위로 한 사족지배체제로 재편되었다. 사족
들은 향촌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였고, 각각의 문중에서는 제사의 실행, 조상
숭조 사업, 문집과 족보의 간행 등 여러 가지 문중활동을 전개하면서 치열한
21) 李樹健,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1995, 558~563쪽.
448 _ 국학연구제12집
생존을 도모하였다.22) 한편 중앙으로의 진출이 좌절되면서 통혼권의 범위가
좁아진 가운데, 퇴계학맥을 중심으로 한 횡적 결합을 통해 문중의 위상을 보존
하기도 하고 강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회파의 혼인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18세기에는 1,133명
이 165개의 성씨와 1,276회에 걸쳐 혼인하였다. 16세 3명, 17세 47명, 18세 196명,
19세 311명, 20세 330명, 21세 193명, 22세 46명, 23세 1명, 25세 2명, 26세 1명,
27세 3명으로 18세에서 21세에 집중해 있다. 이 가운데 남자가 684명으로 재혼
이 121회, 삼혼이 22회였고, 여자는 449명이었다.
가장 많이 혼인한 성씨는 안동권씨로 134회에 이른다. 그 다음 의성김씨 60회,
진성이씨 52회, 영양남씨 36회, 광산김씨 33회, 인동장씨 31회, 청주정씨 29회, 밀양
박.전주이씨 27회, 예안김씨 26회, 경주이·안동김씨 24, 진주강·전의이·풍양조씨
22회, 순흥안씨 21회, 선산김·순천김·풍산김씨 20회 순이다. 16~17세기부터 18세
기까지 혼인이 이어지는 성씨는 67개이고, 18세기에 새롭게 혼인이 이루어진 성씨
는 99개이다. 새롭게 등장한 성씨 가운데 영천이.오천정씨와 17회, 장수황씨와 15
회, 파평윤씨와 13회, 경주최·인천채씨와 11회에 걸쳐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그 밖
에 5~10회가 8개 성씨이고, 2~4회가 37개 성씨, 1회 혼인한 성씨는 48개이다.
18세기 혼인의 특징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혼반이 정착되었다. 17세
기에는 79개 성씨와 혼인하였고, 그 중 14개(18%) 성씨가 전체 혼인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는 166개의 성씨와 혼인하였고, 그 가운데 18개
(11%) 성씨의 혼인 횟수가 630회로 전체 혼인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여, 17세기
에 비해 혼인성씨는 2배 이상 늘어났지만 중첩혼인의 비율은 약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이는 18세기 이후 중첩 혼인이 본격화되고 혼반이 정착되었음을 의미
한다. <표 7>에서 20회 이상 혼인한 성씨는 혼반으로 볼 수 있다.
22) 이해준,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1996, 295쪽; 조선후기 안동의 문집간행 현황에 대해서는 김명자
의 .朝鮮後期 安東의 文集刊行 現況과 그 意味.(..朝鮮史硏究..第 16 輯, 2007)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투고 /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_ 449
<표 7> 18세기의 혼인성씨와 횟수
성 씨 횟수(비율) 성 씨 횟수(비율) 성 씨 횟수(비율) 성 씨 횟수(비율)
안동권 134(10.50%) 선산김 20(1.57%) 파평윤 13(1.02%) 벽진이 7
의성김 60(4.70%) 순천김 20 야성송 12(0.94%) 월성손 7
진성이 52(4.08%) 풍산김 20 경주최 11(0.86%) 진양정 7
영양남 36(2.82%) 동래정 19(1.49%) 연안이 11 봉화금 6(0.47%)
광산김 33(2.59%) 반남박 18(1.41%) 인천채 11 성주여 6
인동장 31(2.43%) 여강이 17(1.33%) 상주김 10(0.78%) 평해황 6
청주정 29(2.27%) 영천이 17 흥양이 10 무안박 5(0.39%)
밀양박 27(2.12%) 오천정 17 김해김 9(0.71%) 여산송 5
전주이 27 창원황 17 재령이 9 축산김 5
예안김 26(2.04%) 남양홍 16(1.25%) 창녕조 9 화순최 5
경주이 24(1.88%) 부림홍 16 광주안 8(0.63%) 4회 혼인 12(0.94%)
안동김 24 아주신 16 밀양손 8 3회 혼인 19(1.49%)
전의이 22(1.72%) 장수황 15(1.18%) 한산이 8 2회 혼인 24(1.88%)
진주강 22 평산신 15 한양조 8 1회 혼인 52(4.15%)
풍양조 22 함양박 14(1.10%) 경주김 7(0.55%)
합계 1,276(100%)
순흥안 21(1.65%) 예안이 13(1.02%) 고성이 7
이들은 중첩적인 혼인을 통해 혈연 사이에 족적 결합을 높였다. 낭천공파
19세 서.는 영양남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아들 20세 시춘時春의 첫째 부인
도 영양남씨이며, 둘째 부인은 청주정씨이다. 시춘의 아들 정조靖祚의 부인도
정사성의 후손이고, 정조의 두 딸도 정사신의 후손과 혼인하여 5대에 걸쳐 두
성씨와 집중적인 혼인을 하였다. 또한 서애 찰방공파의 19세 윤潤은 3남매 가운
데 두 딸을 모두 칠원윤씨에게 시집보냈을 뿐만 아니라, 손녀도 칠원이씨와 혼
인하였다.
둘째로 의성김씨와의 혼인 비율이 높아졌다. 의성김씨와의 혼인이 17세기에
는 6회로 9번째였으나, 18세기 들어 60회로 늘어나 두 번째로 혼인을 많이 한
450 _ 국학연구제12집
성씨가 되었다. 파를 확인할 수 있는 38명 가운데 의성김씨 천전파川前派가 31명
이고, 성주의 김우옹 후손 4명, 김우옹의 동생으로 의성에 세거하는 김우굉金宇宏
의 후손이 3명이다. 천전파 가운데 약봉파藥峰派(金克一)와 귀봉파龜峰派(金守一)는
천전에, 운암파雲巖派(金明一)는 임하 신덕新德에, 학봉파鶴峰派(金誠一)는 금계에, 남
악파南岳派(金復一)는 예천에 각각 세거하면서 하회파와 중첩적인 혼인을 하였다.
아래는 천전파와의 혼인 횟수이다.
<표 8> 18세기 의성김씨 천전파와의 혼인 횟수
약 봉 파 귀 봉 파 운 암 파 학 봉 파 남 악 파
7회 2회 4회 17회 1회
하회파내에서 서애 찰방공파가 의성김씨와 가장 많이 혼인하였고, 그 가
운데서도 학봉파와 가장 빈번한 혼인을 하여 18세기 안동의 대표적인 두 문중
은 혼인을 통해 결속을 높였다. 서애 찰방공파의 19세 호灝는 당대 학봉계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인 김방걸金邦杰의 현손 시정始精을 사위로 맞이했다.
또한 19세 란瀾은 재령이씨 이상일의 후손과 혼인하였고, 두 동생도 학봉파와
운암파의 후손과 각각 혼인하였다. 혼인을 통해 사족 사이에 형성된 혈연적 유
대는 후손들에게도 이어졌는데, 김극일의 5대손인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문집
간행 당시 작성된 기미년(1799)의 .완의完議.에는 도유사都有司 류규柳를 비롯
하여 16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23) 낭천파의 19세 규가 당시 의성김씨 천전
파 문중의 사업을 실질적으로 책임졌던 것은 그의 5대조모가 김극일의 딸이었
기 때문이다.
셋째로 영양남씨와의 혼인 비율이 17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안
동의 향안에 등재된 영양남씨의 숫자는 16~17세기에 비해 18세기에 현격하
2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집부, ..古文書集成..六(Ⅱ), .完議 8., 76~78쪽.
투고 /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_ 451
게 감소하였다. 1530년의 향안에 등재된 인물 331명 가운데 28명(8.46%), 1589
년의 289명 가운데 18명(6.23%), 1617년의 261명 가운데 19명(7.28%), 1647년의
324명 가운데 19명(5.86%), 1677년의 192명 가운데 12명(6.25%), 1707년의 713명
가운데 28명(3.93%), 그리고 1737년의 220명 가운데 7명(3.18%)으로 나타났다.24)
이는 사족으로의 위상에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양
남씨가 하회파와의 혼인 빈도가 높게 나타난 것은 의성김씨의 학봉계가 혼인
을 통한 계파내의 긴밀도가 높은데 비해, 풍산류씨 하회파가 학맥과 혼반에
상대적인 유연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낭천파가 영양남씨와 집중적
으로 혼인하였다.
마지막으로 17세기까지 거의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던 전주이(25회)·인천채씨(11
회)와의 혼인 비율이 높아졌다. 하회파내에서 전주이씨와 가장 먼저 혼인을 한
사람은 16세기의 류성룡이다. 17세기에는 생물파의 17세 후승後昇이 장현광의
문인이었던 인동의 이선술李善述의 증손녀를 부인으로 맞이했을 뿐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전주이씨와의 혼인이 25회에 이른다. 후승의 동생은 여전히
이선술의 후손과 혼인하였지만, 그 이후의 혼인은 대부분 근기 출신의 중앙관료
를 역임한 후손들과 이루어졌다. 생물파의 17세 후인後仁은 이면위李冕胃를 사위
로 맞이하는데, 그는 영의정을 역임한 이성구李聖求의 현손이다. 이성구는 태종
의 자 경녕군敬寧君의 후손으로 1608년(선조 41)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
작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영의정 이원익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부승지·예조
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에 대사간에 올랐다.25)
그런데 이원익이 영의정을 지내기까지는 류성룡의 후원이 있었다. 류성룡이
영의정이었을 때 이원익이 좌의정, 이덕형이 우의정을 역임하며 국정을 함께
24)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慶北鄕校資料集成..(Ⅱ); 오세창 외, ..嶺南鄕約資料集成..; 한국정신문
화연구원 편집부, ..古文書集成..七.
25) ..國譯仁祖實錄..卷1·卷10·卷19: ..梧里續集..附錄 .行狀.·.年譜..
452 _ 국학연구제12집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598년 이원익이 영의정이었을 때 류성룡을 변호
하다가 정계에서 은퇴하기도 하였다.26) 이로 인해 18세기 들어 이성구의 후손
뿐만 아니라 이원익의 후손과도 계속적인 혼인이 이루어졌다. 유천파도 전주
이씨와 혼인하였으나, 주로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인 저당樗堂 이몽상李夢祥의 후
손이었다. 서파이지만 중앙 세력과의 중첩적인 혼인을 통해 겸근재파와는 달
리 하회파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였다.27)
한편 인천채씨와도 혼인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인천채씨가 18세기 이후
향촌의 새로운 사족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인천채씨는 채수蔡壽(1449~1515)
의 이거로부터 함창咸昌에 세거하게 되었다. 채수는 1469년(예종 1)에 장원급제
한 이후 한성부좌윤.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1506년(중종 1) 정국공신 4등으
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511년에 지은 패관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
의 내용이 윤회화복으로 민심을 소란시킨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불태워졌고,
이후 함창에 은거하게 된다.28) 1703년(숙종 29)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었을
때, 채수가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과 함께 제향될 정도로 재지사족으로서 기
반을 마련하였다.29) 이후 생물파의 20세 택춘澤春과의 혼인을 시작으로 18세기
후반 30여 년 사이에 10명과 중첩적으로 혼인하였다.
물론 18세기의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서애파, 그 가운데서도 서애 찰방공
파가 있다. 17세기까지는 겸암파의 족세가 더 번성하였으나, <표 9>에서 드러나
듯이 18세기 이후로는 오히려 서애파의 족세가 더 번성하게 된다. 거기에는 서
애 찰방공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26) ..西厓先生年譜..卷1~2 .年譜..
27) 유천파의 성장은 하회파 내에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855년의 大同譜
간행시 류성룡의 後室에게 貞夫人 명칭을 쓰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풍산류씨는 결국 100여 년 동안 세보를 간행하지 못하였다(金宅圭, ..同族部落의 構造
硏究.., 151쪽).
28)..懶齋先生文集..卷4 .行狀..
29) ..商山誌..卷3 .學校..
454 _ 국학연구제12집
그러면 18세기부터 하회파 내에서 왜 이러한 족세의 변화가 나타났는가? 그
것은 17세기 후반 들어 류성룡이라는 현달한 파조가 있는 서애 찰방공파를 중심
으로 하회파가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서애의 학통이 서애 찰공파에서는 류원지
柳元之→류세철柳世哲→류후장柳後章→류성화柳聖和→류규→류이좌柳台佐→
류도휘柳道彙로 이어졌고, 우천파에서는 류진→류천지→류백지…류심춘柳尋春
→류후조柳厚祚→류주목柳疇睦→류흠목柳欽睦을 통해 가학으로 이어졌다. 이처
럼 서애 찰방공파가 우천파와 더불어 서애의 학통을 주도적으로 계승하였다.
뿐만 아니라 병산屛山서원의 토지와 노비를 경제적 기반으로 공론을 형성하면서
하회파 내에서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30)
<표 10> 하회파의 과거합격자와 음직수여자의 수
분 류 사마합격자 문과 합격자 음직 수여자
겸암파
찰 방 공 파 3 1 5
낭 천 파 6 2 2
교 관 공 파 1 1
서애파
찰 방 공 파 26 10 16
생 물 파 1
우 천 파 6 2 5
유 천 파 1 1
겸 근 재 파
계 43 16 31(미확인 1명)
이러한 위상의 변화로 서애 찰방공파에서 문과 합격자와 관직 진출자가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표 10>을 보면 하회파의 문과 합격자 16명 가운데, 서애 찰방
공파가 10명을 차지한다. 이와 더불어 갑술환국 이후 남인의 당색을 띠는 안동
30) 李樹煥, .17, 18세기 安東 屛山書院의 社會 經濟的 基盤 - 屛山書院 古文書 分析-., ..嶠南史學..
第3輯, 1987, 166쪽.
투고 /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_ 455
의 사족들이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경로가 좁아진 것과는 달리, 서애 찰방공파
는 관직으로의 진출이 계속되었다. 서애 찰방공파의 위상과 족세가 번성해짐에
따라 전체 혼인성씨의 비중과 경향에 서애 찰방공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5. 19세기 鄕村社會의 분열과 婚班의 변화
19세기 안동사회의 최대 쟁점은 ‘병호시비屛虎是非'였다. 병호시비는 안동의
병산서원과 호계虎溪서원을 출입하는 영남사림들이 각각 병론屛論(서애계)과 호
론虎論(학봉계)을 형성해 대립을 일으킨 시비를 일컫는다. 이 향전은 1620년 여강
서원廬江書院에 류성룡과 김성일을 배향하면서 야기된 위차 문제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비는 1812년에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추향追享하려는
논의 과정에서 학봉계의 제안을 서애계가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갈등은 1871년 호계서원이 훼철될 때까지 60년간 지속되었다.31)
이 과정에서 병론을 중심으로 한 사족과 호론을 중심으로 한 사족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이것은 각자 자신의 세력으로 더욱 결집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혼반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19세기의 하회파는 2,471명이 219개의 성씨와 2,746회에 걸쳐 혼인하였다.
16세 1명, 17세 2명, 18세 8명, 19세 16명, 20세 143명, 21세 358명, 22세 629명,
23세 700명, 24세 448명, 25세 138명, 26세 15명, 27~29세 각각 3명, 30세 4명으
로, 21세에서 24세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 남자는 1,559명이
31) 여강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 받아 虎溪書院으로 바뀌었다. 병호시비에 대해서는 申奭鎬의
.屛虎是非に就いて(上).(下).(..靑丘學叢..1·3, 1930·1931), 권오영의 앞의 논문, 설석규의 앞의
논문(2007), 金炯秀의 .조선후기 영남지역 여론 형성과 정치참여: 통문과 상소.(..조선시대 고문
서 자료집(Ⅰ).., 2007)을 참고할 수 있다.
투고 /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_ 457
혼인은 안동권씨와 224회, 진성이씨와 170회, 그리고 의성김씨와 121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다음이 안동김.광산김·순천김·영양남·풍산김씨 순이다. 16~17
세기에는 79개 성씨 가운데 35개 성씨가 혼인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18세기에는
164개 성씨 가운데 18개(9%) 성씨가 절반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19세기에는 218
개의 혼인 성씨 가운데 상위 20개(7.5%)의 성씨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여 시기
가 내려올수록 특정 성씨와 혼인비율이 더욱 높아졌다. 19세기 하회파의 혼반은
35회 이상 혼인한 성씨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처음으로 혼인한 성씨는
120개이다. 그 가운데 의령남씨가 6회로 가장 많았고, 가평이·강릉신·영월신·영
해신씨 등이 4회, 9개 성씨가 3회, 18개 성씨가 2회, 그리고 1회 혼인이 이루어진
성씨는 88개로 대부분 강원도, 충청도, 영남우도 등 안동권과 거리가 멀었다.
19세기의 혼반에는 다음의 세 가지 경향이 보인다. 첫째로 18세기에 이어 19세
기에도 여전히 안동권·진성이·의성김씨와 가장 많이 혼인하였으나, 그 비율에
있어서는 안동권씨가 10.5%에서 8.15%로, 진성이씨가 4.0%에서 6.2%로의 변
화가 있었다. 즉 안동권씨의 비율이 감소하였는데, 이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안동권씨 내의 몇몇 파의 위상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반면 진성이씨와의
혼인비율은 18세기에 비해 높아졌다. 이는 진성이씨가 19세기 안동권의 유력
성씨이기도 하지만, 학봉계를 대표하는 의성김씨와 갈등을 보이고 있는 상황
에서 상대적으로 진성이씨와의 비율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풍산의 예안이·풍산김·안동권씨, 예안 상계上溪의 진성이씨, 그리고
상주 우천의 풍양조·진양정씨, 문경의 개성고씨, 경주의 여강이씨, 대구의 경주
최씨와의 혼인 비중이 높아졌다. 이들이 바로 병론에 속하였던 문중이다. 향촌
사회가 분열되면서 이러한 성씨들과의 혼인 빈도가 높아져, 안동에서는 서부지
역으로 통혼권이 좁아졌다. 반면 병론에 속하였던 문중들이 상주권 뿐만 아니라
대구·경주 등에도 거주하였기 때문에 통혼권이 넓었다. 이는 안동권을 중심으
로 통혼권을 형성한 의성김씨 천전파에 비해 향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18세기까지 높은 비율을 보였던 영양남·흥해배·진주강씨와의 혼인
458 _ 국학연구제12집
이 상대적으로 줄었다. 향촌사회가 분열되면서 서애계와 학봉계는 각각 학맥
과 혼인을 통한 결속으로 향촌사회에서 여전히 위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
황의 문인이면서 서애계와 학봉계에 속하지 않고 김언기金彦璣를 중심으로 산
림처사를 지향했던 문인들을 파조로 둔 문중들은 19세기 향촌사회가 분열되는
상황에서 위세가 약해졌다. 영양남·흥해배씨와의 혼인 빈도가 낮아진 것은 이
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진주강씨와의 혼인 비율도 줄었다. 진주강
씨가 18세기까지는 관직과 혼인을 통해 향촌사회의 주류로 편입될 수 있었으
나, 19세기 들어 향촌사회가 분열되는 상황에서 노론 및 소론의 당색을 띤 진주
강씨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애계는 전前 시기와 마찬가지로 근기남인을 비롯한 중앙세력과 정
치적 제휴를 추구하였고, 한편으로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남인으로 생존하기
위하여 퇴계학맥과 안동이라는 큰 범주에 해당되는 성씨들과도 공동의 유대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그 비율은 전 시기에 비해 낮아졌지만 이들과 여전히 혼반
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유대는 ‘영남만인소' 등의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연결고리였다.
한편 파별 혼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전체적으로 안동권씨와 가장 많이 혼인
하였지만, 서애 찰방공파와 우천파는 진성이씨와의 혼인 비율이 가장 높다. 그
리고 19세기 들어 영양남씨와의 혼인 비율(2.2%)이 낮아졌지만, 겸암 찰방공파
는 여전히 4.6%의 비율을 보인다. 생물파·우천파·유천파·겸근재파는 상주·문경
의 진양정·흥양이·풍양조·인천채·초계정·개성고씨와 혼인 비율이 높은데, 이
가운데 진양정·흥양이·개성고씨의 파조들은 서애문인이었다. 특히 개성고씨의
경우 18세기까지는 혼인이 거의 없다가 19세기 들어 21명과 혼인이 이루어졌다.
그 밖의 성씨들도 19세기 서애계와 학봉계가 분열되었을 때 모두 병론에 속했던
성씨들이다. 따라서 생물파·우천파·유천파·겸근재파는 상대적으로 안동과의 혼
인 빈도가 떨어지고, 상주와 문경 등지에 거주하는 성씨들과의 혼인 비율이 높
아졌다. 그러나 우천파는 여전히 안동의 진성이.안동권.의성김씨와의 혼인 비
율이 높게 나타났다.
460 _ 국학연구제12집
파별로 1회 혼인성씨의 비율을 보면, 겸암 찰방공파 15%, 낭천파 10%, 교관
공파 17%, 서애 찰방공파 6.5%, 생물파 23%, 우천파 16%, 유천파 15%, 그리
고 겸근재파가 47%이다. 1회 혼인한 성씨들은 대체로 상주권을 비롯하여 강원
도·충청도·영남우도 등 안동과 거리가 먼 곳에 거주하였다. 서애 찰방공파가
1회 혼인 비율이 가장 낮고, 상주·예천·의성에 세거하는 파들의 1회 혼인 비율
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그리고 겸근재파는 1회 혼인 비율이 무려 47%
이다. 이는 혼반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6. 맺음말
본고는 16~19세기 풍산류씨 하회파의 혼반 경향을 다루었다. 혼반이란 중첩
된 혼인관계를 대대로 계승하는 문중 집단으로, 혼반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파조
이후 특정 성씨와 4촌 이내에서 1회 이상의 혼인이 3~4대 지속되어야 한다.
하회파와 혼인을 한 성씨는 256개이지만, 이 가운데 혼반을 형성한 성씨는 안동
권씨를 비롯하여 진성이.의성김.안동김.광산김.영양남.순천김.인동장.풍산
김.예안김.청주정.밀양박.풍양조.순흥안.전주이.아주신.예안이.진주강.경
주이.함양박·선산김.동래정.여강이.파평윤.김해김.평산신.남양홍.인천채.
영천이씨이다.
그러나 시기별로는 혼인의 경향이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16세기 중반까지는
하회파의 혼인에 관직과 경제적 기반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16세
기 후반부터는 양상이 달라져 상대 가계에 퇴계문인의 존재 여부가 혼인의 중요
한 기준이 되었다. 그렇지만 조식의 제자들과도 혼인이 이루어진 점으로 미루
어, 전체적으로는 영남사림파 내에서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밖에 류성룡의 인간관계, 그리고 문과 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성씨들과도 혼인
횟수가 다소 높았다.
투고 / 16~19세기 豊山柳氏 河回派의 婚班 _ 461
.2008. 04. 13 : 논문투고 .2008. 04. 29 ~ 05. 15 : 심사
.2008. 05. 31 : 수정완료 후 제출 .2008. 06. 10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
17세기의 퇴계학파는 서애계와 학봉계로의 분화의 조짐이 보였다고 하지만,
그것이 혼인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17세기 통혼권의 구심점은 여전히
퇴계의 문인이 많고 사족세가 강한 안동이다. 족세가 강한 파는 안동의 명문사
족들과 중첩적인 혼인을 하면서 통혼권의 범위가 영남좌도까지 확대되었지만,
서파인 유천·겸근재파는 안동과의 혼인 집중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세거지인 예
천.문경을 비롯한 충청권으로 통혼권이 형성되었다.
18세기 혼인의 특징은 특정 성씨와의 지속적인 혼인을 통해 혼반이 정착되
었다는 점이다. 이는 18세기 향촌사회의 질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문중 기반의 확대였다. 서애 찰방공파가 18세기
하회파의 혼반 경향을 주도해 나갔으며 학봉계와도 족적 결합을 통해 유대를
형성하였다. 통혼권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권이었지만, 남인으로서 정치
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중앙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극복하고자 종친을 비롯한
근기남인과도 혼반을 형성하였다.
19세기에는 향촌사회가 병론과 호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이것이 혼반에도 고
스란히 반영되었다. 병론에 속한 풍산의 예안이·풍산김·안동권씨, 예안 상계의
진성이씨, 그리고 상주 우천의 진양정씨, 문경의 개성고씨, 경주의 여강이씨,
대구의 경주최씨와의 혼인 비중이 높았다. 19세기 들어 혼인 성씨는 더욱 많아
졌지만, 특정 성씨와의 혼인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그런 양상은 서애 찰방공파
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그 다음이 낭천파, 겸암찰방공파·유천파, 우천
파, 교관공파, 생물파, 겸근재파 순이다. 19세기 중앙정치가 벌열화된 것처럼
향촌사회도 특정 성씨와의 족적 결합을 더욱 높여 나갔다. 이것이 바로 혼반을
통한 생존전략이다.
464 _ 국학연구제12집
Honban(婚班) of the Hahoi clan of the Poongsan
Ryu family from the 16th to 19th century
―
Kim, Myung-ja
(Andong National Univ.)
This paper examines the Honban trend of the Hahoi clan of the
Poongsan Ryu family from the 16th to 19th century in Korea. Honban
refers to a group of clans which had handed down overlapping marriage
relationships for many generations. Among those 256 families
which had had a marriage relationship with the Hahoi clan, 29 families
including Andong Kwon, Jinseong Lee, Euiseong Kim, Andong
Kim, Gwangsan Kim, Yeongyang Nam, and Sooncheon Kim formed
Honban. Beginning with the formation of clans in the 17th century,
Honban was established in the 18th century. The most important criterion
for Honban was whether the other clan had a network of the
Toegye School. However, there was a slight difference by period.
Marriage relationships were made largely with the Youngnamsarimpa
including the Toegye School network in the 17 century, together with
some with other families personally related with Ryu Seong Ryong
and descendents of those who served as high-ranking officials.
Honban was established in the 18th century when there was a high
Abstracts _ 465
ratio of marriage with the Cheonjeon clan of the Euiseong Kim family,
which indicates that the conflict between the Seoae fraction and
the Hakbong fraction did not affect Honban. Despite the established
marriage relationship mainly with the Andong Kwon family, the clan
sought for a political alliance with the Geunginamin faction by means
of overlapping marriage relationships. In the 19th century, local community
was divided into Byeonglon and Holon, which had an effect on
the formation of Honban of the Hahoi clan, as shown in the increasing
marriages with families belonging to Byeonglon. As a consequence,
marriage relationship was limited to the west of Andong. This change
occurred because Honban was a survival strategy for the clan.
Key words: The Hahoi clan of the Poongsan Ryu family(豊山柳氏
河回派), Honban(婚班), Clan(門中), Network of the Toegye
School(退溪學脈), Seoae fraction(西厓系), Hakbong fraction(
鶴峯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