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7차시 습작품 첨삭(2023년 4월 15일 토)
1. 장남/ 박희곤 2
1 시골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였다. 동네 품앗이로 우리 집 모내기가 한창일 때 멀리 면사무소에서 관보가 날아왔다. 서울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열 남매 장남인 형님이 교통사고로 위독하니 빨리 울라오라는 연락이었다. 당시에는 전화기도 없고 버스도 없어 우체국 직원이 걸어서 서너 시간이나 걸리던 시절이었다.
2 아버지는 모내기하던 지게를 벗어 던지고 천수답 흙탕물에 발만 씻고 서울로 올라갔다. 일주일 후 아버지는 형님의 영정사진만 들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소리 내어 올지도 못하고 가슴만 치다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3 이 사건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큰 사건이었고 특히 대가족인 우리 가족들에게는 가장 슬프고도 큰 아픔을 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형님은 파출소에 근무 중 강도신고로 출동하다가 택시에 치여 사망한 것이었다. 1968년 그 당시에는 통금제도가 있어 통금에 쫒긴 택시가 그만 신호를 위반하고 달리다 형님을 충격하여 사망케 한 것 이였다.
4 그 후 어머니는 막내인 동생에게 젖을 물리지 아니하였고 동생은 끝내 살아나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다. 자식농사에 실패한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소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한 집에서 장손을 위하여 소 팔고 논도 팔아 공부시켜 서울로 보냈는데 집안 기둥이 무너졌으니 가정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5사후처리는 몇 년이 지나고 알았는데 그 당시에는 보험이라는 것도 없어 보상금은 한 푼 받지 못했으며 국가에서는 공무 중 순직이라고 약간의 보상이 전부였다. 형님에게는 꽃다운 약혼자도 있었는데 병원에서 울기만 하다가 돌아갔다는 말이 전부였다. 또 한 없이 밉기도 하지만 불상하기도 한 택시 기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6 그 후 가족들은 살기 위해 작은 형님은 외가에 머슴으로 누나들은 친척댁의 식모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어린 동생들만 같이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뇨병에 홧병이 겹쳐 진종일 안방에만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엄마를 볼 때 마다 나는 어찌할수 없는 이런 현실을 가슴깊이 원망만 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돌아가신 큰 형님을 원망하게 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클 수밖에 없었다. 핍박한 가정환경을 원망을 하면 할수록 나는 문제 아이가 되어갔고 우울한 사춘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7 자식을 가슴에 뭍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흘이 멀다 하고 굿을 하는 것이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굿을 하는 엄마를 볼 때 살아있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었다. 결국 영혼결혼식까지 한 형님은 나에겐 형님이 아니라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세월이 가도 엄마는 장손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홧병이 겹쳐, 회갑도 넘기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지금도 그 시절 마디마디를 회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리는 것은 오십년이 지난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8 형님이 돌아가시고 험난한 강산이 두 번 바뀌자 국가 유공자법이 새로 바뀌게 되었다. 경찰관도 군인과 마찬가지도 현충원에 가고 또 매달 금전적 지원도 받게 된다는 것 이였다. 아버지는 원호 청에 많은 서류들을 제출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면서도 매일 술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승인 심사가 통과되는 날 엄마가 돌아가셔도 울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밤이 새도록 우시는 걸 볼 때 가슴이 먹먹했고 지금도 눈물이 떨어져 노트북 자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9 살아남은 8남매를 아버지 혼자서 거두기란 벅차고 힘들었을 거라는 짐작은 했겠지만 본인이 아닌 이상 어떻게 알겠는가? 재혼도 안하시고 8남매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애기중지 하던 소를 팔아야 했고, 논밭은 물론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기와집인 집까지 팔아야 했다. 본인이 직접 하나하나 짓은 집인데도 어쩔수 없었다.
10 그 와중에서도 아버지는 자식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피해 의식에서 국가를 위해서 순직했다는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에 대하여 마음에 분노가 점점 삭아지는 듯 했다. 순직당시 형님은 화장을 하여 현충원에 안장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매달 약간의 원호금이 지급이 되었고 현충일에는 군청에서 하는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가끔 선물도 받아오곤 했다.
11고교를 졸업한 동생이 원호가족으로 은행에 취직을 했을 때는 형님은 죽어서도 장남노릇을 하는구나 하면서 가슴 한쪽엔 뭉클했다.내 나이가 너무 어려 형님하고 같이한 추억도 별로 없었다.그렇지만 이제 형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점점 엷어지고 형님과 화해하고 이해하게 되었다.그것은 형제들과 평생을 함께 하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나 살기에 바빳기 때문이다.
12 비록 살아서 같이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형님은 죽어서도 우리 형제들을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경제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 천마(天馬)가 되어 울어준다는 생각에 마음속엔 회한이 밀려왔다. 내가 죽도록 원망한 형님은 죽어서도 장남으로써 가족들을 위해 희생한 희생 마(馬)였다고.
2. 밥이 있는 놀이터 / 김미성-1
1. 오늘은 300분이 조금 넘는 것 같다. 이곳 복지관 식당은 11시 반부터 점심 급식이 시작된다. 오늘 메뉴는 밤을 넣은 영양 밥에, 닭볶음과 김, 배춧국, 어묵 조림, 산나물 무침이 반찬으로 나온다. 영양사가 그때그때 봉사자들에게 배식담당을 정해주는데 오늘 내 담당은 닭 볶음 배식이다.
2. 어르신들이 오전에 취미 활동을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키오스크에 현금 천 원을 넣고 식권을 구입해 식당으로 오신다. 이 시대 또 하나의 소통 언어인 AI 기기 사용을 척척해 내시는 어르신들이 멋있어 보인다. 과거에 알던, 나이 들면 갈 곳 없고 할 일 없는 노인생활이 아니다. 집에서 나와 이곳에 오신 분들을 보면 젊은 사람 못지않게 활기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3. 식사를 하러 오시는 어르신들 표정이 환하다. 나이 드니 하기 싫은 게 밥 하는 거고,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해 주는 밥 먹는 거라 한다. 집에서는 대충 먹게 되는데 이곳에서 전문 영양사가 짜준 식단에, 조리사가 만들어준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어 좋다 한다. 그것도 혼자 먹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며 활짝 웃으신다.
4. ‘우리나라가 참 잘 사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던 선진화된 노인복지를 본다. 각종 최신 기기를 갖춘 물리치료실에 의료 상담사, 무료 법률 서비스, 넓고 깨끗한 식당과 각종 활동실을 어르신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다.
5. 복지관은 점심까지 해결되는 어르신들의 놀이터인 셈이다. 이곳에 오신 어르신들은 거의 하루의 시간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 오전에 서예나 요가, 민화 그리기, 난타를 하고 오후에는 헬스를 한다거나 탁구를 친다. 또 짝 맞춰 댄스 수업이나 악기 연주, 노래 부르기 등을 한다. 개설된 프로그램이 요일 별로 30가지가 넘는다.
6. 스마트폰 활용법을 배워 사진에 좋은 글을 써 자녀들에게 보낸다는 분도 계신다. 어르신들끼리 모여서 얘기하실 때 보면 건강 전문가들이 많다. 웬만한 강사는 저만큼 가라 할 만큼 풍부한 지식으로 달변을 토해낸다. 자신들의 심리적 건강을 위해서 MG 세대 자식 며느리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 또 연명치료하지 않기, 장기기증 서약 등을 얘기하실 땐 시대가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정치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등, 정말 아는 것도 많고 이곳에 있으면 재밌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누가 당신들 이야기를 이렇게 서로 열심히 들어주겠는가?
7. 2년 전 복지관에 자원봉사자 신청을 하러 왔었다. 영양사가 식사하고 가라고 권해서 이곳에서 처음 밥을 먹었었다. 같이 간 친구와 밥을 먹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혹시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머리를 숙이고 밥을 먹었던 생각이 난다. 뉴스에서 보았던 무료급식, 천 원 급식을 먹기 위해 온 사람들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봉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여기서 본 어르신들은 몸도 그렇지만 생각도 아주 건강하게 사시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라는 걸.
8. 식당 배식 시간이 되고 한 시간 정도가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간이다. 어느 시대든 점심시간은 우리 삶에서 즐거움을 주는 시간인 것 같다. 댄스를 마친 분들 표정이 제일 밝고 에너지가 있어 보인다. 동적인 활동인 데다. 남, 여 짝을 맞춰 놀아서 그런가? 질서 있게 식판을 내밀고 봉사자들에게 인사를 한다 “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 “ 맛있게 드세요” 어르신들과 봉사자들 간에 주고받는 인사도 이미 정이 들어있다.
9. 식 판 두 개를 들고 오시는 어르신이 있다. 할머니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목발을 짚었다. 할머니를 안전하게 의자에 앉히고 할아버지는 양손으로 두 개 점심을 받아 간다. 할머니에게 턱 수건을 받쳐주고 간간이 입도 닦아 주며 식사를 돕는다. 부부 연을 맺고 한쪽이 불편해지니 다른 한쪽이 그의 손이 되어 챙겨 주는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간다. 영양사가 “어르신 반찬 더 드릴까요? “ 하니, “아, 네, 나물 무침 조금만 더 주세요” 한다.
10. 어르신들 식사 배식이 다 끝났다 싶으면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식사를 한다. 그런데 거의 그 시간에 나타나는 마지막 손님이 있다. 전직 현 O 기업 간부였다는 분이다. 그분은 어르신들 식사가 다 끝나가는 시간에 오신다. 그래서 식당 안에 거의 사람들이 없을 때 혼자 드신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것 없이 식사만 하러 오는 것 같다. 다른 분들과는 달리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11. 오늘도 많은 어르신들이 즐겁게 식사를 하고 가셨다. 서로 어울려 즐겁게 시간 보낼 수 있으면 좋지 않은가? 이곳이 고급 식당이든 아니든 그게 뭐 중요할까? 같이 얘기 나눌 수 있는 벗들이 있고, 환경 좋은 시설에서 여러 가지 놀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과거의 체면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어울려 노는 어르신들은 오늘도 스스로 하루의 행복을 만들며 즐기고 있다.
12. 설거지 봉사 팀들의 손발 맞춰 일하는 소리가 잘 돌아가는 공장 같다. 식판을 씻는 식기세척기 소리, 건조된 식판 정리하는 소리 등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어 음악처럼 들린다.
13. 며칠 전 사거리 빌딩에 새로 생긴 ‘주간보호 센터’ 커다란 간판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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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직생활과 추언(芻言) /박문평1
1) ‘평생직장,‘ 지금은 많이 엷어졌지만 예전에는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이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나도 한 직장에서 34년을 그런 생각으로 근무했다. 1980~90년대에는 토요일은 당연히 일을 해야만 했고, 일요일은 결혼식이나 특별한 모임이 있는 날만 쉬는 날이었다. 직장의 강요가 아니었고 내 스스로 일을 하고 싶었다. 희로애락도 많이 겪었다. 쓰라림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냐마는 쓰라림을 곱씹어 볼 여유도 없이 빠르게 달려 온 세월이었던 것 같다.
2) 폰이 없던 그 시절에는 한 밤중에 전화가 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공정 트러블이나 메인 기계 이상으로 공정이 멈추게 되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협력업체를 맡고 있을 때 친구와 등산을 갔었는데 공장에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산악마라톤 선수처럼 달려서 회사로 들어 간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폰이 없던 시절이 훨씬 행복했던 것 같다. 집에 오기까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순한 바람을 맞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3) 내가 근무한 회사는 식품회사로서 신제품이 출현되면 소비자들에게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였다. 물론 T.V나 신문 등 매스컴으로 홍보를 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직원들을 통한 자발적인 판촉활동을 했다. 인당 할당량은 없었지만 입사 후 처음 해보는 판촉활동이라서 그런지 재미가 있었다.
4) 그 때가 겨울이었다. 퇴근 후 식용유를 차에 가득 싣고 손아래 동서가 운영하고 있는 작은 회사로 기분좋게 출발하였다. 갈 때 조금씩 내리던 눈은 돌아 올 때는 제법 많이 쌓였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이 더더욱 난감하였다. 지금은 길도 넓어지고 다른 길도 생겼지만 1980년대에는 좌천에서 울산으로 오려면 제법 높은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내리막 길 아래에는 차량 2대가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져 있었다. 운전대를 꽉 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회사를 위해 기름 몇 박스 팔려다가 두 아들을 고아로 남겨놓을 뻔 했던 기억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남아 있다.
5) 조직원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는 아마 오너의 경영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일 것이다. 3개 회사가 서로 시장 점유율을 늘리려고 경쟁하고 있을 때 오너인 그룹회장께서 “싸움하지 말아라. 우리가 양보해서 끝내도록 하는 게 좋겠다.”라고 하셨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금에 대해서는 “절대로 탈세는 하지 말아라. 탈세해서까지 돈을 벌기는 싫다.”라는 말씀을 들을 때는 구성원들의 사고도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6) 일을 하는 도중 운전 잘못으로 설비가 파손되거나 고장이 난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였지만 고의로 회사에 금전적, 물질적 손해를 입혔을 때는 동정의 여지없이 엄격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출장을 가거나 모임이 있을 때는 공사(公私)를 확실히 가렸다. 공식적인 자리이면 법인카드로 계산하지만 약간의 사적인 성격의 모임일 때는 “이럴 때는 회삿돈을 쓰면 안 되니까 내 개인 돈으로 내겠다.”면서 그 자리에서 선언을 하는 것이었다. 매사에 이런 식으로 솔선수범을 보이니 어찌 존경스럽지 않고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분위기 좋은 회사에서 근무했건만 나의 무딘 감각이나 촌스러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7) 초여름쯤 되어 출장을 갔다. 호기롭게 본사 정문을 통과하여 담당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부하 직원이 들어오더니만 “과장님 지금 절에 가는 중입니까?” 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린 줄 몰라 가만히 있는데 “과장님, 옷차림을 한번 보십시오, 양복과 와이셔츠도 회색이고 심지어 넥타이까지 회색이네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초여름에 입는 양복은 단벌이더라도 셔츠와 넥타이는 얼마든지 조화롭게 입을 수 있었는데 무지몽매도 아니고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물론 이것이 주 업무도 아니고 패션쇼에도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해도 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엎질러진 물 때문에 울 필요는 없다는 말에 위안을 삼으며 일을 마치고 서둘러 내려 왔던 기억도 있다.
8) 군 생활 3년을 제외하곤 경상도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경상도의 억센 사투리와 순화되지 않는 말이 튀어 나오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경험도 있다. 1980년대 초반 6개월간 일본 연수를 마치고 1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부장님께서 서울 본사로 발령 날 것이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좀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회사생활 조금 하다 그만 둘 것도 아니기에 가야만 했다. 인사는 '명령'이지 않은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울생활 특히 본사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남들은 서울 발령을 간절히 바라고, 본사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은 서울을 한사코 떠나려고 하지 않는 데도 말이다.
9) 어쨌던 서울 변두리에 전셋집을 얻고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번은 여직원들끼리 모여서 끽끽거리면서 웃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것은 오리지널(?) 경상도 사투리의 말투 때문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제부터는 서울 표준말을 써야지’ 생각하면서도 무의식 중에 튀어 나오는 말투와 억양은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었다. 30년 이상 몸에 밴 습관을 바꾸어 보겠다고 결심도 해 보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렇게 버겁고 생경한 서울생활이 1년 정도 지날 무렵 드디어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고 좌충우돌하면서 보내는 나날에서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희망사항이었을 것이다.
10) 그날도 직속 상사와 둘이서 점심시간에 외식을 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상사께서 와이샤쓰를 맞추려고 하는데 아는 가게가 있느냐고 하길래 가끔 들리는 곳이 있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공장에서는 일하면서 유니폼만 입었으므로 양복 입을 일이 없었지만 본사에서 근무할 때는 정장차림이었기에 회사 근처에 있는 단골가게를 자연히 알게 되었다. 가게에서 샤쓰를 맞추고는 회사로 돌아 왔는데 30분쯤 지났을까 상사 분이 조용히 불렀다. 평소와 다름없이 또 '업무 협의를 위해 그러는 그겠지'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고 나서는 조금 전에 옷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다. 내가 가게 사장에게 “손님 한 사람 끌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더란다. 그러면서 “같은 말이라도 끌고 왔다는 말 대신에 손님 한 분 모시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듣기가 좋지 않겠느냐”고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라리 사투리라면 애교나 있었겠지만 이건 경상도 사투리나 억양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10) 순화되지 않은 언어는 고사하고 꼴 베는 사람들의 말이라는 뜻으로 무식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추언(芻言)보다 더 비천하고 천박한 말투를 사용했다는 자책감은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가장 부끄러운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11) 그래도 옷 가게에서나 회의실에서 야단을 치지 않고 ‘앞으로는 고쳤으면 좋겠다‘ 라는 충고와 함께 따뜻한 배려를 해 주신 상사 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만약 그때 버릇없고 예의도 모른다고 야단을 치셨더라면 그 분을 잊었을까? 잊지야 않았겠지만 나의 추언은 잊어버리고 아량을 베풀지 않았던 상사라고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그분의 입장이었더라면 그렇게 하였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머릿속이 더 복잡하여진다. 아직 서울에 계시기에 그 당시에 했던 추언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용서를 받으려고 한다.
4. 탈출 / 김옥수1
1)2박 3일간 여수갈 일이 생겼다. 3년 만에 공식적으로 집을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생겨 신이 났다. 울산-여수, 목적지까지 거리를 검색해보니 243km, 자동차로는 3시간 8분 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첫날은 13시부터 일정이 시작되니, 8시 30분경 출발하면 점심 먹을 시간도 충분하겠다.
2)목적지 근처 ‘맛 집’ 검색을 하니, ‘허영만의 백반 기행’에 나온 식당부터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야 한다는 곳까지 몇 군데가 떴다. 사흘간 함께 할 서울 쪽 기관장과 문자로 업무(?)분장을 했다. 첫날 점심부터 일과 후 저녁 먹을 곳까지 다섯 끼를 해결할 곳은 내가 알아보고, 그녀는 숙소예약과 간단한 아침거리를 준비해오기로 했다. 10월 말이라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기도 하고 해가 일찍 지니 18~19시 이후 일정은 맛 집 투어 외, 불가능할 것이다.
3)미리 메일로 받은 자료를 검토한 후, 벽장 안쪽에 있는 작은 캐리어를 꺼내어 먼지를 닦고 차곡차곡 짐을 넣었다. 제법 큰 노트북 가방은 따로 챙겼다. 짐을 현관 입구에 갖다 두었더니, 갑자기 남편이 “차 갖고 갈라꼬?” 했다. 나는 남편의 질문 의도를 아는지라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며, “울산에서 여수까지 가는 직행버스가 없어 부산 가서 갈아타야 한다. 그 방법은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다 짐이 두 보따리라 차 갖고 가는 게 낫다.”고 했다. 남편은 “3시간 이상 걸리는 초행길을 혼자 운전해 간다고? 가만있어봐라. 내가 검색해봐 주께.”하며 컴퓨터를 켰다. 나의 이번 여수행이 초행이라는 건 남편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기억을 수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편은 신복로타리에서 광주 직행을 타고 섬진강휴게소에서 여수행 버스로 갈아타는 노선을 찾아내어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비하는 시간도 많고, 목적지까지 2시간이나 더 걸리는데다, 자차-신복로타리-섬진강휴게소-여수시외버스터미널-여수택시로 가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합리적이었다. 몇 차례 옥신각신하다가 남편의 불안과 분노의 게이지가 높아지기 직전에 자차를 포기했다. 힘들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고 길에서 2시간을 허비하더라도, 난 가야했고, 탈출하고 싶었다. 이미 수락서 등 여러 자료를 주고받았고 4명이 한 팀으로 묶여 번복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모처럼 주어진 사흘간의 자유와 일할 기회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4)노트북 가방 하나만 가져가기로 하고, 최소한의 짐만 넣었다. 검정색 바지 하나로 사흘쯤은 버틸 수 있다. 여분의 목 폴라 1개, 얇은 잠옷 외, 나머지는 다시 옷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인터넷사이트에서 금호고속버스(신복-섬진강휴게소, 섬진강휴게소-여수) 티켓을 각 코스별로 예매했다.
5)다음날 남편은 버스 출발 25분 전, 신복로터리에 나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지나도 섬진강휴게소행 버스가 안와 매표소로 갔다. 중년의 여성이 ‘인터넷에 나와 있는 출발시간은 삼산동 고속버스터미널 출발시간이고, 신복로터리는 20분 후 도착’할 거라고 했다. 또 ‘섬진강휴게소까지 가려면 광주행 버스를 타야 하니 잘 보고 타라’고 했다. 무표정, 무뚝뚝했으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정확히 알려주어 좋았다.
6)기다리던 광주행 금호고속버스는 08:22에 플랫 홈으로 들어왔고 난 버스에 올랐다. 기사가 퉁명스럽게 표를 요구했다. 인터넷으로 예매했다 하니, 그 표를 기계에 찍으라 했다. 기차처럼 표를 예매하고 지정된 좌석에 앉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고속버스 시스템은 달랐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저장된 티켓을 찾으려하니 버스가 흔들거려 터치하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걸리자 기사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내 검지는 자꾸 어긋났다. 일단 지정된 좌석에 앉아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티켓을 찾아 버스 기계에 찍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사의 오른쪽 줄 맨 앞좌석을 지정한 것은 나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7)그런데 무뚝뚝한 것은 경상도 사람이라 그렇다 치고, 매표소 직원이나 금호버스기사는 왜 그리 무표정할까? 더구나 그 기사는 승객에 대한 태도가 왜 그리 불친절할까? 나는 무안하기도 하고 살짝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8)높은 운전석에 가려 오른쪽 옆모습만 보이는 기사를 잠깐 관찰했다. 40대 초·중반? 작은 몸집, 짧은 스포츠형 헤어스타일, 연회색 와이셔츠, 진회색 가디건, 좁고 발목까지 오는 회색 바지, 연회색의 반버선식 양말, 편해 보이는 밤색 가죽 스니커즈, 장거리 버스기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은 아니었다. 까칠한 독거청년? 아니면 제법 센스 있는 아내를 얻었나 보다.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금호고속 홈페이지에 칭찬 글을 올려줄 수도 있는데... 운전 솜씨는? 양산 지날 때까지 지켜본 결과, 순발력도 있고 매우 안정적이다. 그러면 됐다. 이제 눈 좀 붙이자. 이른 아침부터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를 재촉한 기사 아저씨, 내가 너를 용서하마. 3년 만에 주어진 2박3일간의 자유, 나의 탈출을 위해! (2023. 4. 5)
5. 피정하던 날 / 유광목 1
1.부활절이 다가온다. 수영강 옆으로 벚꽃이 활짝 피어 눈이 부신다. 꽃잎이 구경꾼 위로 떨어진다. 벚꽃이 필 때는 모든 화초가 부활하는 것 같다.
2.30여 년 전 이었다. 부활 대축일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강림축일에 민락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신부님과 교우들, 대부님과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
3.세례를 받기 위해서 예비신자로서 천주교 교리를 신부님과 수녀님과 봉사자들이 강사로 7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매주 화요일 저녁 2시간 씩 천주교 교리, 여러 기도문과 화살기도, 미사 참여 예절 등을 배우고 매주 일요일 미사에 참여해야 했다. 교육을 받을 때는 가을 겨울이었으니 마칠 때는 봄이었다.
4.교리 받는 어느 날이었다. 수녀님이 예비 신자들 피정을 4월 중 일요일에 수녀원에서 한다고 이야기 했다. 피정이라는 말은 생소했다. 사전을 찾아봤다. 피정(避靜,retreat)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줄임말로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하고 조용한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머무르며 종교적인 수양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례를 받은 일반 신자들의 피정과 같이 예비 신자들도 피정을 했다.
5.일요일 오전부터 성분도 치과 병원의 교육장에서 간단히 미사 드리는 예절을 받고, 올리베따노 성베네틱도 수녀원에서 수녀님들과 예비 신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일반 신자들은 수녀님들만 수도하는 곳에서 미사 드리는 기회가 없었다.
6.성전에 들어가니 미사는 엄숙하고 장엄했다. 일반 지역 성당에서 거행하는 미사 분위기와 달랐다.
7.미사를 마치고 교육장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8.오후부터 교리 수업이 시작되었다. 요한복음 13장 1절부터 15절까지 복음이 강독되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당신의 몸과 피를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만찬을 마치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13,4-5)’
9.교육을 마치고 수녀님과 본당 신도회장과 봉사 단원들, 예비 신자 11명이 함께 ‘발 씻김 예식‘이 있었다. 강단 앞쪽에 걸상 몇 개와 세수 대야, 발수건이 있었다. 예비 신자들은 걸상에 둥글게 앉아 가운데에 수녀님과 봉사단원이 자리를 잡았다. 신자들 앞에는 세수 대야가 놓여 있고 신도 회장과 봉사자들은 주전자로 세수 대야에 물을 부었다. 발 닦는 수건은 봉사자들이 들고 있었다. 발과 발바닥을 수녀님이 신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고 나면 봉사자들이 발을 닦았다.
10.수녀님이 발을 씻어주니 30-40대 어른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었다. 다음에는 나 차례였다. 어릴 때 한겨울에 따듯한 물로 때가 많은 발을 깨끗이 씻어준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살아오는 동안 발을 씻어준 분은 어머니 말고 아무도 없었다, ‘발 씻김 예식’하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 발을 집에서 깨끗하게 씻고 발톱도 깎아 왔을 걸, 그 때의 발톱은 등산을 자주해서 검푸른 색깔이었고, 발 모양도 볼품이 없고, 냄새도 있을 것인데. 수녀님의 고운 손에 맡길 수가 없었다. 쑥스럽고 미안하여 부끄럽고 어색하여 양말을 벗어 발을 내밀지 못 하겠다. 씻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없을까. 점점 수녀님이 나 곁으로 다가왔다.
11.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같은 처지였다. 예수님에서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하고 그에게 대답하셨다.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12.수녀님과 회장님에게 발을 씻지 않겠다고 할 변명거리도 없고, 다른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하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까.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성당의 예비 교리받기 전에는 교회도 가고 절에도 가고 천도교, 원불교, 증산교 등의 책을 보면서 깨달음을 찾기 위해 넘나 들었다. 고기 잡는 어부에게 잡혔다. 이제는 천주교를 나의 믿음을 정하고 다른 마음먹지 말자고 다짐할 수
밖에 없었다. 수녀님이 내 앞에 왔다. 발을 내어 드렸다. 발을 씻을 적에 눈물이 났다. 베드로와 같은 심정이 내 마음과 같아 세례명도 ‘베드로’라고 내가 정했다.
13.성당에 가기가 싫고 게으름을 피울 때, 발 씻김 피정을 마련한 이 신부님과 발을 씻어 준 김리디아 수녀님의 얼굴이 생각나 신발 끈을 묶고 집을 나선다. 주일 마다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면 미음이 평화롭다. 세파 때문에 고달프고 괴로울 때도 성당에 앉아 있으면 감정이 반감되어 힘을 얻어 일어날 수가 있었다. 천주교의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오니 지난 인생이 큰 탈 없이 무난하게 지내왔다. 주님의 은총이다.
6. 소탐대실/우진숙1
1. 공직에 몸담았을 때다. 의회가 열리는 날은 업무를 보는 둥 마는 둥 지방의회방송 생중계에 온 신경을 쏟았다. 의회방송 시청은 교육위원의 질문과 집행부의 답변을 모니터링하며 업무에 참고하고 대비하는 학습시간이었다. 그때 문득 소탐대실이란 말이 떠올랐다. ‘소나무를 탐하려다 대나무를 잃는다.’란 내 방식의 뜻으로 풀이를 해봤다. 널리 통용되지 않는 독자적인 해석이지만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는 건 그 당시 겪은 뼈아픈 사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의회와 집행부는 서로 견제하고 통제하는 기구이다. 항시 기를 세우고 갈등이 상존하는 행정기관의 두 기둥이 있기에 상호 발전하고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일시적인 교육 수장의 부재로 암암리에 의회가 집행부를 만만하게 보던 그런 때였다.
3. 그즈음 권한대행인 부교육감은 호락호락하지 않는 대쪽같이 곧은 성격의 행정가였다. 내가 알기론 의장의 사사로운 청탁이 씨알이 먹혀들지 않아 자존심이 몹시 구겨져 있던 상태였다. 그 이후로 심심찮게 지역신문에 부교육감에 대한 비난과 질타의 기사가 줄을 이었다. 다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양쪽의 눈치만 살피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4. 민선 초기시절 특히 여론에 민감한 때였다. 해마다 공시되는 고객만족도와 청렴도는 기관의 외부평가로 가늠되는 공공기관의 주요척도였다. 당시 우리 부서가 고객만족도를 관장했고 나는 그 업무담당 팀장이었다. 내용의 잘잘못보다 두 분의 갈등 표출이 고객만족도에 영향을 미칠까 봐 은근 걱정되었다. 의장의 불편한 심기를 풀어줄 누군가의 중재가 절실함에도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아 애가 타고 속이 끓었다.
5. 일이라면 겁내지 않던 성품 탓일까. 평소 의장과는 나쁘지 않은 관계였고 존경해왔던 터다. 다급한 마음에 용기 내어 스스로 호랑이굴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의 처신 문제를 거론하는 그 자체부터가 마뜩찮은 일이고 주제넘은 행동이었다. 부교육감과 의장 두 분께 화해를 청하며 내가 오작교를 놓아드리겠다며 나선 것이다. 울산교육을 위해 두 분께 화해를 청하는 메일을 보낸 뒤 한동안 수긍하는 듯 잠잠했는데 얼마 뒤 엉뚱한 사고가 터졌다. 대외적으로 큰 행사는 늘 의전이 화근이다. 시장과 시의원, 교육위원이 동석한 자리의 배석문제로 화가 불거졌고 의장은 진노했다. 외부행사에서 간혹 일어나는 일이건만 의장의 분풀이는 부교육감이 타켓이 되었다. 나중에 그 화가 내게로 불똥이 튈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6. 차기 임시회에서 의회방송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바로 그때였다. 의장은 불편한 심기로 5분 자유발언대에 나섰다. 작심한 듯 교육감 권한대행인 부교육감을 향해 성토하며 내 이름까지 거명하는 거였다. 동석했던 위원들은 물론 방송을 시청하던 선후배 동료들 모두 깜짝 놀랐다. 교육 수장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 발언 속에는 부교육감에게 과잉 충성하고 아부한 내가 근무평정 1위를 받았다는 부적절한 내용을 폭로한 거였다. 업무 담당 외엔 전혀 알 수 없는 인사상의 비밀을 임시회에서 의장이 공개한 것은 부교육감의 원칙주의에 던져진 불화살이었다.
7. 부교육감은 나를 불러 의장의 인신공격성 발언에 대해 어찌 대응하겠냐고 묻기에 나는 침묵하겠다고 답했고,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입혀 미안하다고 하셨다. 황당한 상황을 지켜본 출입기자가 급히 나를 찾아와 원하는 대로 기사를 써주겠다며 회유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만 덮어달라고 했다.
8. 다음날 의장의 자유발언이 지역신문에 그대로 공개되었고 교육가족이라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대단한 망신이었다. 그다음 날엔 교원단체에서 의장을 비난하는 답장 기사가 실렸다. 의장이 제 할 일은 제쳐두고 개인감정에 사로잡혀 일개 직원한테 보복성 발언을 쏟아낸 걸 지적하며 한심한 의회란 비난을 퍼부었다. 멋모른 하룻강아지 겁도 없이 호랑이굴로 들어갔으니 절로 굴러온 먹이감이 된 셈이다.
9. 그로 인해 내 몸값은 올라가고 의장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하루아침에 팀장이 의장과 동격으로 격상되었다며 다들 헛헛했다. 의장은 교육 원로라는 명예에 금가고 인격적 손상으로 점점 초라해져 갔다. 내게도 그 영향은 비껴가지 않고 긴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그 틈을 이용해 약삭빠른 후배가 보궐선거로 당선된 교육감을 설득해 의장의 눈치를 살피며 승진에서 나를 배제시키고 자리를 꿰찼지만 억울해도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직장도 바둑판처럼 꼼수를 쓰면 이기고 묘수를 읽지 못하면 패하는 것이다.
10. 나는 결승점에서 탈락한 선수마냥 몇 해 동안 속앓이를 했다. 새로 차기 교육감이 당선되고 나서야 나는 구제되고 승진기회도 찾았다. 억울하게 강탈당한 자리 늦게나마 찾았으니 기뻐해야 함에도 허탈감이 더했다. 새치기당한 뒤늦은 승진이었어도 여성 1호란 딱지는 유효했다. 여성 후배들의 롤 모델로 그들의 앞길을 열어줘야 할 막중한 책임감은 퇴직하는 그날까지 무겁게 자신을 따라다녔다. 직급도 인플레인지 어느덧 여성 후배가 3급(부이사관)으로 고속 승진한 인사발표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예전에 아문 상처가 덧난 듯 몸이 가렵고 마음도 허전했다.
11. 아픔만큼 성숙해지듯 지금이야 생각의 깊이와 넓이가 확장되고 주변 경계도 느슨해질 만큼 나이를 먹었다. 퇴직 당시의 직급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다행이랄까. 타인들에게 거부감이 적고 사회라는 척박한 땅에 착근하는 데도 수월했다. 오래도록 속은 아리고 쓰렸으나 ‘소나무를 탐하려다 대나무를 잃은 건 아니다.’며 다시금 지난 일을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