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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에세이포럼
22기-7차시
일시 : 2024년 4월 2일 (화) 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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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사랑은 꽃향처럼 | 김인옥 | 2 | 김선애 |
2 | 목화밭 | 김순향 | 3 | 박동조 |
3 | 애장품을 보내며 | 박희자 | 2 | 배정순 |
4 | ||||
5 |
합평순서 / 권춘애 김순향 김선애 김연희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사랑은 꽃향처럼/김인옥2
1. 야산 기슭에 사는 친한 동생 J로부터 목련이 봉오리 맺었다는 기별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파란 하늘을 향해 벋어 오른 가지에는 소담스런 꽃봉오리가 수없이 돋아나 봄 하늘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병환 중이라 경황이 없을 텐데 목련차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올해도 변함없이 적기에 소식을 전해 준 J가 고마웠다.
2. J의 어머님은 치매를 앓고 있다. 3대가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 화목하여 주위의 부러움과 칭송을 받는 가족이었는데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말았다. 팔순을 눈앞에 둔 3년 전부터 기억이 깜빡깜빡하더니 온갖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점점 깊어만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 무력증까지 겹쳐 일상생활은 물론 식사도 떠먹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팔순이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동안인데다가 잔병치레 하나 없이 건강하신 분이었는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노인의 건강인 것 같았다.
3. 한동안 절망에 빠져있던 J는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여생을 행복하게 마무리 짓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가족의 동의를 구했다.
4. 구순을 넘겼으나 아직도 정정하신 시아버지와 남편, 고등학생인 아들이 간호에 나섰다. 가족들은 집안 분위기를 항상 밝게 가지려고 노력했고,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사랑해’, ‘사랑합니다’라며 수시로 사랑고백을 했다. 아들이 대학으로 진학을 하자, 대학에 다니던 딸이 휴학계를 내고 내려왔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사하며 격려한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가족에겐 돌아가며 며칠 씩 휴가도 주며 어려운 시간들을 잘 견뎌내고 있다. 며칠 다녀간 시누이조차 요양병원을 입에 올렸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며 힘닿는 데까지 모셔보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현대의학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면 J와 가족들도 도리가 없겠지만, 환자의 편에서 보면 가족의 곁에서 눈 감을 수만 있다면 편안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5. J는 저녁마다 시어머니의 몸을 씻어드리며 맨손으로 뒤도 닦아드린다. 그게 가능하냐고 물으니 신기하게도 더러운 줄 모르겠단다. 몸을 못 움직이는 분을 씻겨드리려니 체력에 부쳐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만 자기 마음도 개운해져서 좋단다. 깨끗해진 어머님이 목련꽃처럼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예뻐서 이마에 뽀뽀를 해 드리면 “고맙습니다.”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를 하신단다. 시댁과 시어머니가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세상인심 속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고부간의 모습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6. J는 자신의 아이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거두어주셨고, 며느리인 자신이 하는 일에도 언제나 지지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 어머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당신 시어머님을 끝까지 모시면서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으신 어머님에 비하면 자기는 한참 모자란다고도 했다.
7. 산들바람에 샛노랗게 익은 목련꽃차를 유리 다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니 개나리 빛깔의 고운 차에서 은은한 향이 올라온다. 봄이면 심하게 비염을 앓아 종일 목련차를 달고 사는 친구와 목련차를 좋아하는 이웃들에게 조금씩 나누었다. 거저 받은 것이니 나도 거저 주는 것이다. J에게서 받은 사랑에 나도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다.
8. 사랑도 꽃향처럼 주위를 물들이며 퍼져나가는 게 아닐까. 시어머니의 크신 사랑이 며느리인 J에게 향기로 닿아 효성스런 며느리가 되게 했고,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란 J의 딸은 또 누군가의 착한 며느리가 될 것이다. J의 어머님이 그러했듯 J 또한 며느리를 사랑하는 시어머니가 될 것이고, 그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섬기는 효성스런 며느리가 되지 않겠는가. 사랑은 이렇게 유전되듯 세대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거꾸로 얘기하면 고부갈등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기보다 시어머니의 사랑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9. 나는 얼마나 큰 사랑을 며느리에게 베풀며 살아왔는지, 얼마나 며느리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돌아보니 아무래도 낙제 점수다. 베풀기는커녕 뭐 ‘안 주나’ 하고 받기만 좋아하는 나 자신이 돌아 보여 뜨거운 차를 서둘러 마셨더니 목이 뜨끔하다.
2. 목화밭 / 김순향 3
1. 남도 여행길에서 만난 목화밭이다. 하얀 솜꽃을 피운 목화나무가 주렁주렁 다래를 달고 있다. 얼마만인가! 낯익은 그 모습에 아득한 세월 저쪽의 풍경이 선연하게 다가온다.
2. 목화를 보면 먼저 형근 오빠가 떠오른다. 열세 해를 천심으로 우리 집 일을 돌봐줬던 그는 고아였다. 아내가 있었지만 그녀는 지적 장애가 있어 남편 수발은커녕 오히려 수발을 받아야만 했다. 객지에서 장애인 아내를 데리고 남매를 키우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는 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3. 아버지는 그에게 거처할 방을 주고 오갈 데 없는 네 식구를 거두었다. 형근 오빠는 조금 모자란 듯해서 놀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맞서지 않았다. 오랜 세월 뭇사람으로부터 냉대를 받은 탓인지 작은 호의에도 흥감해했다. 어머니는 그런 형근 오빠네 가족들을 살뜰히 챙겼다. 그가 어렵고 힘들어하면 먼저 달려갔다. 그의 처가 아이를 낳을 때는 산파가 되어, 정성을 다해 해산구완을 했다. 음식을 넉넉하게 하여 그 집 식구들을 챙겼다.
4. 우리 집은 해마다 목화 농사를 지었다. 집안사람들의 옷이나 이불, 방석을 만들기도 했지만, 사랑채를 찾아 와서 묵고 가는 손님이 많아 여유 이불과 옷이 필요했었다. 어머니는 형근 오빠가 오자 장승백이 밭에다 목화를 따로 더 심었다. 겨우내 벌벌거리며 추위를 타는 그에게 따뜻한 옷과 이불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5. 사월 중순이나 오월쯤에는 목화씨를 파종했다. 싹이 자라면 촘촘히 나온 것은 솎아주고 드문 곳은 모종을 옮겨 심었다. 주로 어머니와 같이 밭일을 했던 그는 자기를 위한 목화 농사인 줄 알기에 정성을 다해 가꾸었다. 놋날 같은 비가 온 날 '비를 피했다가 하자'는 어머니 말도 듣지 않았다. 도롱이를 걸치고 혼자서 긴 이랑을 목화 모종으로 채웠다. 팔월이나 구월에는 황색과 분홍색, 흰색의 목화 꽃이 어우러졌다. 그는 꽃을 따려는 나를 말리며 따버리면 금방 시들지만 참으면 솜이 된다는 훈계까지 곁들였다.
6.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면 어머니는 솜을 타러 서너 번 읍내로 갔다. 오빠가 짊어진 바지게에 목화를 얹어서, 버스도 자주 오지 않는 시오리 신작로를 도란거리며 걸어갔다. 일찍 집을 떠나 있는 아들과는 함께 걸을 기회조차 없던 어머니였기에 동행해주는 형근 오빠가 얼마나 듬직했을까! 해거름에 씨를 발라낸 솜을 지고 오는 오빠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아마도 그의 시린 등을 데워 줄 폭신한 솜이불을 떠올렸을 게다.
7. 목화솜을 잠재운 지 이레쯤 되는 날, 아침 설거지가 끝나면 아낙들은 안채로 모여들었다. 먼저 무명베 위에 솜을 듬뿍 놓은 이불 속통을 여러 장 만들었고, 미리 염색해두었던 검은 무명천에다 빨간 깃을 단 솜이불을 만들었다. 오빠가 아이처럼 어머니와 올케들이 바느질하는 대청을 기웃거렸다. 싱글거리며 대청을 한번 들여다보고, 뒤란을 한 바퀴 돌고 와서 또 기웃거렸다. 그런 오빠를 보다 못한 어머니는 남정네가 오는 곳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며 내쫓았다.
8. 이불 바느질이 끝나면 남자들의 솜옷을 만들었고,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옥색 비단 조끼도 만들었다. 어머니는 바느질한 실밥을 떼어내고 꼼꼼하게 부분 부분을 확인한 후 애타게 기다리던 오빠에게 안겼다. 이불과 옷을 받아 든 그의 함박웃음이 어찌 그리도 천진해 보였던지!
9. 그는 점차 지난했던 옛 삶을 잊고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갔다. 건강도 회복하여 튼실한 장년의 모습을 되찾았다. 몇 해를 열심히 일한 덕에 새경도 올려 받았고 논도 샀다. 친오빠는 한 번씩 다녀가는 손님이었지만,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 집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는 형근 오빠는 부모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10. 그러구러 형근 오빠가 우리 집에 온 지 열세 해가 되었다. 시월 열사흘의 달이 휘영청 밝았다. 아버지는 멀리 대종중 묘사에 가셨고, 올케언니는 부산에 유학중인 조카를 보러 갔다. 집에는 어머니와 나, 어린 질녀 둘 뿐이었다.
11. 어머니는 형근 오빠와 함께 며칠 전부터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단무지를 담은 독과 김장독을 뒤란 땅 속에 꽁꽁 묻어 갈무리했다. 한밤중까지 말린 나물을 봉지봉지 묶어두고 잠자리에 드셨다. 일을 거들던 오빠도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비어 있는 사랑채로 나갔다.
12. 설핏 잠이 들었을 때 세차게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질녀의 말에 맨발로 뛰어갔다. 그 참을성 많던 분이 온 방을 헤매며 고통스러워했다. 어린 질녀들과 중학생인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거리고 있을 때 대소가 사람들이 달려왔다. 육십여 년 전, 병원은 시오 리 밖에 있었고, 우리 마을엔 전화가 없어서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다. 당숙이 손수레를 가져오도록 여기저기 기별하고 있을 때 득달같이 달려온 형근 오빠가 어머니를 들쳐 업었다. 집을 나가 살아도 오빠의 눈과 귀는 우리 집을 향해 열려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나와 집안사람도 함께 걸었다.
13. 늦게 기별을 받은 친척이 소달구지를 끌고 와서야 어머니를 받아 눕혔다. 어머니를 내려놓은 후 형근 오빠가 손등으로 훔치는 땀은 땀이 아니라 진액이었다. 사람이 다급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더니 그가 그랬다. 지금도 육덕 좋은 내 어머니를 업고 어떻게 그 먼 길을 달릴 엄두를 냈는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으리라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14. 의사는 장이 꼬였다고 했다.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해 전 복막염 수술을 했던 어머니는 수술의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나는 눈물로 어머니를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보를 받고 천리 길을 달려오신 아버지를 보고서야 어머니는 수술을 허락했지만, 이미 기력이 다 소진되어 수술을 할 수 없었다.
15. 아버지는 잿불처럼 사위어가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오랜 경험으로 아내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감지한 것이었다. 큰 그늘을 드리웠던 둥구나무 한그루가 허망하게 사그라지고 있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애통했다. 집으로 오신 지 삼십여 분만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16. 갑작스런 어머니와 사별로 마음 추스리지 못하는 날, 나는 산소로 향했다. 그날은 쑥국 새가 유난히도 청승을 떨며 울었다. 자드락길을 오르는 내내 무섬증이 들었다. 인적 없는 산허리에 올라서서 어머니 무덤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아직 떼가 자리 잡지 못해 황토색인 봉분을 뺀 나머지 공간에, 온통 하얀 꽃들이 피어 있지 않은가! 거리가 멀어 무슨 꽃인지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괴기스러웠다.
17. 산소에 다다르니 밑동이 잘린 목화 포기들이 무덤가에 원을 그리며 누워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망석 앞에는 형근 오빠가 우두커니 앉아있었고, 미처 널지 못한 목화 포기가 바지게에 얹혀 있었다. 가지마다 달려있는 다래들과 흐드러지게 핀 목화를 보자 목이 메었다. 그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장례식과 집안 일로 미처 거두지 못해 목화가 많이 피었다고 했다.
“저녁때는 여기 오지 마라, 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우짤래! 인자 잊어야지.”
타이르는 형근 오빠의 목소리도 촉촉이 젖어있었다.
18. 어머니는 알뜰한 수확을 위해 해마다 목화 포기를 베서 양지바른 무덤 가장자리나 잔디밭에 널어두게 했다. 조롱조롱 달린 못다 핀 다래들은 생명이 끝났음에도 햇볕 바라기를 하여 탐스런 목화를 피워주었다. 항상 아흔다랭이와 장승배기 밭의 언저리에 널었었는데, 굳이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을 올라 산소까지 온 오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19. 그는 꽃을 좋아하던 어머니를 위해 산소 둘레에 꽃나무를 심었다. 처서 즈음 벌초를 했어도 가을 초입에 풀이 무성해져 그냥 둘 수 없다며 일 년에 두 번을 했다. 훗날 그는 살림이 편해져 남의 일을 하지 않았지만, 생을 다할 때까지 내 부모님 묘소를 가꾸었다. 어떤 자식이 그만큼 할 수 있을까! 우리 집 살림이 줄자 셈 빠른 이들은 일찌감치 떠나 안면을 바꾸기도 했는데 그는 끝까지 부모님 곁을 지켰다.
20. 가슴 깊숙이 부모님과 형근 오빠를 품고 사는 내게, 목화밭은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매개이다. 그곳에는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목화밭을 매던 어머니와 형근 오빠, 그리고 내가 있다. 부모님도 그도 굴곡진 삶이었지만, 서로의 울타리가 되었기에 몰아치는 비바람을 잘 견뎌냈으리라. 오랜만에 보는 하얀 목화송이들이 더없이 살갑다. 부모님과 형근 오빠가 몹시 그리워질 때면, 또 목화밭을 찾아 나서리라.
3. 애장품을 보내며/ 박희자 2
1. 살던 집이 매매되었다. 평소 아끼던 애장품이 빛을 볼 전원주택을 찾아 헤맸다. 현장에서 부딪친 전원주택의 기대는 꿈이 되었다. 소장했던 물건들이 애장품으로 숙성되어 가는 동안 우리 부부의 세월도 곰삭아 버렸다. 정서적 관조는 현실 생활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병품아(병원 품은 아파트) 로 결정하고 바라만 봐도 위안이 되는 장식품들을 떠나보냈다.
2. 십여 년 전에 전원생활을 했었다. 건축한 지 오래되어 낡은 기와집이었다. 초라한 집에 하나둘 모은 옛날 물건들이 환경을 꾸며 주어 주택이 윤택했었다.
3. 학창시절 우연한 기회에 옛 물건에 관심을 두는 기회가 있었다. 젊은 날은 환경과 맞지 않아 마음에만 새기며 살았다. 뜻밖에 전원에 살게 되면서 적극적인 관심법으로 촉각을 세워 보니 기회가 닿았고, 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넣어 소장하기를 즐겼다.
4. 물건이 한점 두 점씩 더해질 때마다 평생 살아갈 고래 등 같은 집을 꿈꾸었다. 옛 물건의 멋을 알게 해 준 소녀의 추억도 덧칠했다.이렇게 하나하나에 의미를 더해가며 살뜰하고 소중하게 간직했었다.
5. 어느 순간 전원을 벗어나 도심에 원룸 건물로 이사하게 되었다. 다행히 넓은 베란다가 있어 최애 것들은 옮겨올 수 있었다. 화초들과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실내 정원은 행복을 주는 힐링 공간이 되었다. 나를 웃게 하는 갖가지 토우 인형들, 내 감정선이 오르내릴 때 위로가 된 익살맞은 개구리군단, 내 삶의 기대치 높이에서 꿈을 키워주던 솟대들, 거북 가족과 항아리들, 특히 마음이 실렸던 돌절구통과 석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을 담은 최애 애장품이 되었다.
6. 내 고등학교 때 가족이 대전에서 울산으로 터전을 옮겼다. 여름 방학을 맞아 처음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기차를 탔다. 동대구역에 내려 울산행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7. 역에 내려 초행길에 우왕좌왕하다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온다던 딸이 행방불명 된 줄 알고, 가슴 태울 가족의 걱정은 뒤였다. 당장 눈앞이 캄캄했다. 여관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학생 혼자는, 더구나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짧은 원피스를 입고, 불 꺼진 대합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8.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빈 대합실에 망연자실 앉아 맴도는 정적만 쫓고 있었다. 대책 없는 내가 안쓰럽던 직원의 혀 차는 소리가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했다. 아우라를 풍기며 내 또래의 여학생이 사뿐사뿐 대합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 순간 섬광처럼 소녀가 나를 구제해 줄 구세주라는 생각으로 내 몸이 반응했다.
9. 소녀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다 방학을 맞아 대구집에 오는 길이었다. 소녀는 함께 부모님을 기다리자고 나를 안심시켰다. 소녀의 어머니가 달려와 포옹했다. 귀부인인 어머니는 안심하고 하룻밤 묵어가라고 하셨다.
10. 기사가 운전해 주는 승용차가 소녀의 집에 닿았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커다란 간판에 불이 밝혀 있었다. 잔디마당을 가로질러 어머니 뒤를 따랐다. 정원에 장식품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생전 처음 보는 돌하르방과 석등이 조화를 이뤘다. 마당 둘레로 청사초롱이 줄을 섰고, 곳곳에 절구통에서 수생식물을 품고 있었다.
11. 눈이 휘둥그레지는 부엌을 지나 안내된 방에는 금장을 두른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편히 쉬라며 잠자리를 봐주시는 어머니 배려에 잠을 청했다. 위기에서 벗어남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모녀에 감사함보다 아름다운 정원의 장식품들을 가슴에 깊게 끌어안았다.
12. 따뜻하게 보호해 주던 모녀에게 보답하리라는 다짐을 했었다. 당장은 학생 신분으로는 쉽지 않아, 편지로라도 진심을 전하겠다는 마음 가득했으나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소녀와 내가 가진 환경이 비교되어 주눅이 들었다.
13. 어른이 되어서도 먹고사는 일이 우선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 소녀와 같은 동명의 사람을 만나면 소녀를 기억했다. 동대구를 경유하거나 방문할 때면 감사함을 전하지 못한 죄스러움이 마음을 누르고는 했었다.
14. 살면서 순간순간 여유로워지면, 소녀를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한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아파트의 이삿짐을 정리하며 애장품이었던 물건을 떠나보내야 하던 날, 전원이 꿈이듯 소녀의 미련도 헛된 것을 알게 되었다.
15. 살면서 이뤄놓았던 모임도 하나씩 갈무리가 필요한 나이다. 묵혀둔 소녀를 잊지 못하고 부추김은 은혜를 갚지 못한 죄스러움의 발로임을 알게 되었다. 마음의 무게가 더해진 절구통이 남자들 손에 끌려나갈 때 내 마음을 얹어 놓았으니, 무게가 더했으리라!
16. 다행히, 나의 애장품의 가치를 알아줄 조건을 마다하지 않고, 얼싸안던 새 주인은 전원생활의 꿈을 함께 꾸었던 친구다. 애지중지해 주는 새 주인과의 만남을 감사할 것이다. 최적의 환경인 경주 남산 줄기에 자리한 한옥 뜰에서 한껏 맵시를 자랑하고 있을터이다. 햇빛 별빛 받는 이곳이 행복하니 염려 놓으라며 오랜 세월 감사했노라며 인연을 다 한 나를 추억하리라! 내가 소녀와 아쉽고 송구했던 인연의 무게를 훌 덜어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