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황씨(長水 黃氏) 편
현재에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越松)지역에는 황장군(黃將軍)의 묘가 전해지고 있다. 황 락(黃 洛)은 갑고(甲古)·을고(乙古)·병고(丙古)의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각각 기성군(箕城君 : 기성은 평해의 옛이름)·장수군(長水君)·창원백(昌原伯)에 봉해져 훗날 평해· 장수·창원 등 3관향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맏이 황갑고(黃甲古)의 후손 황온인(黃溫仁)은 평해 황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인 황을고(黃乙古)의 후손으로 신라 경순왕의 부마이며 시중벼슬을 지낸 황 경(黃 瓊)은 장수 황씨의 시조(始祖)가 되며, 셋째인 황병고(黃丙古)의 후손인 황충준(黃忠俊)은 창원 황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고증(考證)할 문헌이 실전(失傳)되고 고증할 역사기록이 없기 때문에 장수 황씨(長水 黃氏)는 조선시대 4대 명상(名相)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황희(黃喜)정승의 증조부로 증(贈) 참의(參議)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거분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 경(黃 瓊)의 9세손인 황공유(黃公有)는 고려 명종때 벼슬이 전중감(殿中監)에 이르렀는데 평소 이의방(李義方)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의방(李義方)의 무신정권때 무인(武人)들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수(長水)로 돌아갔는데, 현감(縣監)이 이의방(李義方)의 지시를 받고 체포하려 함에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남원(南原) 땅으로 이거하여 자손이 세거하니 지금의 광한루(廣寒樓)가 곧 그 구기(舊基)이다. 호안공(胡安公) 황치신(黃致身), 소윤공(少尹公) 황보신(黃保身),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 사직공(司直公) 황직신(黃直身) 4파(四派)의 후손들이 경기도 포천·파주·고양·이천·안성·용인을 비롯해 인천, 충남 보령, 전북 무주·남원·순창·전주·김제·정읍, 전남 장흥, 경북 문경·상주·경산·김천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익성공(翼成公) 방촌 황 희(黃 喜) 정승의 제2자(第二子)인 황보신(黃保身)이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호조정랑(戶曹正郞)·종친부(宗親府) 전부(典簿)에 이르렀으나 신병(身病)으로 사직하고 상주시 모동면으로 옮기어 세거하니 이가 곧 상주 입향조이다. 후손인 봉천(鳳泉) 황복중(黃復重)이 1774년(영조50년)에 상주에서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로 이거하였는데 학행(學行)이 돈독하고 조리(操履)가 염결(廉潔)하였으며 촌영훈육(村英訓育)을 하였다. 후손들이 가천, 성주읍, 선남, 대구 등지에 산거하여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익성공(翼成公) 방촌 황 희(黃 喜, 1363∼1452)정승은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다.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의 둘째 아들이다. 1376년(고려 우왕2년) 음직(蔭職)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1389년(고려 창왕1년) 문과에 급제했고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70여명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간청과 백성만이라도 구제해야 한다는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가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했다.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遺) 등을 지냈다. 그 뒤 좌천·면직·소환을 반복했고, 1399년(조선 정종1년)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1400년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했다. 1401년(조선 태종1년)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이 되었고, 이후 승추부도사(承樞府都事)·대호군·지신사·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141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16년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이듬해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부사가 되었다. 1418년 세자의 폐위가 결정된 후 태종의 미움을 사서 서인(庶人)으로 교하(交河)에 유배되었고 곧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1422년(세종 4년)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환급 받고,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다시 예조판서에 올랐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찰사로 파견되어 선정을 폈다. 1427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1430년 태석균(太石鈞)의 치죄(治罪)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했다. 1431년 복직되어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정승(政丞)의 지위에 24년간, 영의정에만 18년간 재임하면서 세종대왕을 도와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 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소신이 굳으면서도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했으며,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역대 왕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왕과 다른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그는 오랜 관직생활 동안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바로 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중복·누락된 부분이 있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온전한 법률집으로 만드는 등 법전의 정비에 힘썼으며,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해 농사의 개량과 종자 보급을 실행하고, 양잠을 장려하여 의생활을 일신시켰다. 건국 초기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가 자주 침범하자 이에 대한 방비책 마련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원나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고려의 예법을 시의에 맞게 고치기도 했다. 세종대에는 그간의 국정경험과 세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등을 지휘·감독했으며, 왕과 중신들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세종을 도와 성세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계자(季子)인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의 훈공(勳功)으로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을 추증하는 한편 사림(士林)들이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산양서원(山陽書院)·장수 창계서원(滄溪書院)을 설립하고 춘추로 제향을 올리며,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문종대왕(文宗大王)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에는 ‘풍채가 준수하고 기국(器局)니 넓고 깊었으며 굳건한 절조(節操)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학문(學問)의 정도(正道)는 뛰어나게 탁월하였다. 관용(寬容)과 도량(度量)이 있어 국가를 위해 한결같은 충성(忠誠)을 평생 지키었다’며 익성공(翼成公)에 대한 190여마디가 넘는 칭송(稱頌)과 찬양(讚揚)을 아끼지 않으며 진정한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또한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도 남겼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저서에 「방촌집」이 있다. 황 희 정승의 아들인 치신·보신·수신·직신 4형제도 모두 벼슬에 등용되었고 현달하였는데, 그중 치신(致身)은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고, 수신(守身)은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이외 오위장 황 열(黃 悅)의 아들인 황정욱(黃廷彧)은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황 기(黃 璣)의 아들 황경원(黃景源)은 대제학을 비롯해 이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던 맹헌(孟獻)·여헌(汝獻)·효헌(孝獻) 3형제가 유명하고, 선조때 일본에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내침(來侵)을 예고한 황윤길(黃允吉), 임진왜란 때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晉州城)에서 전사한 황 진(黃 進), 숙종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황 엽(黃 曄), 순조때의 명신 황승원(黃昇源), 한말의 야사(野史)를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황 현(黃 玹) 등이 뛰어났다. ※ 엮은이 : 성주군 월항면 덤개, 이재필(李在弼) 본지 편집인 2005-11-23 17:56:4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