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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말선초의 정국과 우현보 일가(3) 위화도회군 후의 정세와 우현보 일가 1)-②에 계속하여 - 65페이지 -
3. 려말의 정국과 우현보 일가의 위치 1) 위화도 회군 후의 정세와 우현보 一家
그 후에도 일성에서 누차 우현보를 논죄하였으나 왕은 그의 손자 성범이 부마였으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왕은 대간을 불러 말하기를 "현보의 죄가 명백하더라도 반드시 죽일수는 없는데 하물며 죄상이 불명하고 이미 유배되었다가 방면되었고 사면령이 시행된 후이니 다시 거론하지 말라"하였다
그러나 대간은 또 상소하여 논죄하였고, 지신사 성석용과 대언 유정현 등이 왕에게 권유하여 결국 공양왕은 우현보의 처벌을 허가하였다.
왕은 우현보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유사(有司)가 경의 죄를 억지로 청하여 이렇게 되었으니 경은 귀소(歸所)에서 편안히 있으라"하였다. 이에 우현보는 철원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을 받고, 단양부원군에 봉하여졌다.
1392년 4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하여 중상을 입자 정몽주 일파에서는 대성과 사헌부를 동원하여 정도전, 조준, 남은(南誾) 윤소종 조복(趙僕) 등을 탄핵하였다.
결국 정도전은 봉화현에 유배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일시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성계 일파에서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하게 되었다. 곧 무력을 동원하여 정몽주를 주살하고 전일의 정도전 일파를 탄핵하는데 중심이 되었던 대간 김진양 등을 국문하여 숙청하였다.
우현보도 여기에 연루되었으나 공양왕은 역시 성범 때문에 석방하고 죄를 묻지않았다. 이에 도평의사사에서는 왕명을 듣지도 않고 우현보와 아들 지밀직사사 홍수, 전의부령 홍부, 판사 홍강, 상호군 홍득, 예조정랑 홍명과 종실 남평군 화 등을 잡아 먼 변방으로 유배하였다.
이성계 일파에서는 경력 장지화 등을 시켜 사후에 보고하기를 "현보 등이 여러번 죄에 관련되었으나 관대하게 용서를 받아도 마음을 고쳐지않고 다시 난을 모의하니 화기가 급박하여 보고하지 못하였습니다, 현보 등을 외방에 유배하고 사후 보고합니다"고하였다 이때는 이미 정권이 공양왕의 수중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있다
이 무렵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고 있던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를 보면 아래와 같다.
우현보와 홍수 부자는 본래 사미한 행실로 의아 취용되어 관직을 도적질하여 녹을 먹었습니다 그 집안만 알고 나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한번도 생민에 마음이 미치지 못하고 공도에 말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 위조에 있을때 붕당을 심고 회뢰를 행하고 민전을 점탈하였습니다 무진년에는 형벌에서 요행히 빠졌습니다
현보는 김저와 득후의 모의에 참여하였고 홍수는 행우를 맞아들이려는 의논에 참여하여 여러번 탄핵을 받았으나 처벌에서 빠졌습니다
몰래 이초을 보내 대언을 조작하여 상국에 호소하여 근왕을 청해 천하의 병력을 움직여 본국을 모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정몽주가 아첨하는 무리들을 유사에 포열시키고 종친들과 더불어 모의하여 충량한 사람을 모함하고 국가를 어럽혔으니 용서할수없습니다
죄의 괴수 우현보와 그 아들 홍수 등 5인및 일당인 남평군 화 등 20인을 외방에 유배하십시요
죄악이 가득차 민심을 만족시킬수없으니 그 죄를 명백히 정하고 가산을 적몰하여 국가의 형벌을 밝힐것을 청합니다
이에 왕은 마지 못해 우현보를 경주로 유배하고 직함을 박탈할것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 양호당 우현보 연구(양호당 선생 기념사업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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