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1:1-6
바울 사도와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빌립보 교회에 축도합니다(1, 2).
사도는 빌립보교인들의 믿음과 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3).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자신의 기도가 간절한 사실을 말합니다(4-5).
사도는 말로든 글로든 빌립보 교회 신자들을 총체적으로 격려합니다(6).
1. 본문 1절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입니다.
1) 본문 1절 초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입니다.
바울은 자신이나 자기 사역에 명성을 얻을 만한 칭호를 사용하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자기가 그리스도의 참 사도인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장황스런 찬사가 필요 없었기에 생략하고 있습니다.
2) 본문 1절 하반에 “감독들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공적 말씀 사역의 존귀함 때문에 목회자들에게 각각 다른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감독’이라는 말이 한 교회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보아 모든 말씀 사역자들에게 일반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과 목사와 장로는 같은 뜻입니다.
제롬(Jerom)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에바그리우스(Evagrius) 에게 보낸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사도에 대한 설명에서 이 귀절을 인용했습니다.
후에는 대학에서 지명한 개교회 장로들만을 감독으로 부르는 것이 습관화되었습니다.
물론 장로는 인간 관습에서 나온 것이요, 성경 말씀의 권위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실로 우리가 알기로는 사람의 마음이나 습관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주관하지 않고는 말씀의 사역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질서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개개인을 말하는 것이지 나라 전체나 전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단어에 대해 논쟁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이 생각해 낸 잘못된 것을 택하는 것보다는 방언의 창시자이신 성령 하나님을 따라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모든 장로들이 동급이기에 동일한 직분을 가졌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 중에 한 사람을 말의 와전으로 인해서 새로운 이름의 미명아래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게 하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에서 ‘내가 너희를 자주 생각한다’는 뜻을 보여줍니다.
3. 본문 4절은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입니다.
정확히는 ‘항상 나의 모든 기도 중에 너희 모두를 위하여 간구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앞서 그 신자들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기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사도는 그 신자들이 자기의 모든 기도 속에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기쁨으로 그 신자들을 위해 간구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쁨’은 과거에 대한 것이고 기도는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이 복된 출발을 한 것과 그들이 완전해지는 열망을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부족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는 것은 우리를 항상 즐겁게 해 줍니다.
4. 본문 5절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입니다.
1) “첫날부터”라는 말속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는 교리를 즉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알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칭찬합니다.
게 하십니다.
2) 선지자의 증거대로 주님은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시138:8, 사64:8). 우리 모두는 한결같으신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시작하신 것을 완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단순히 창조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우리를 부르시어 그의 아들로 삼아주신 구원의 서정 전체를 뜻합니다.
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멸망할 육체에서 자유한 자들이 더 이상 육체의 욕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반면에 그 자유한 자들은 아직 자기들이 소망하는 점에까지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보하는 중에 있다거나 또 그들이 바라는 복과 영광을 아직도 누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소망 중에 감춰 있는 보배들이 나타날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주께서 주시는 영원한 소망에 대해 말할 때는 항상 우리의 눈을 우리 속 사람이 싫어하는 그 이상으로 복된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