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말 영동인의 독립운동가입니다. 충청북도 향토문화사연구소 학술발표 원고입니다. 관심 있는분은 읽어보세요.
한말 영동인의 항일 운동
영동향토사연구회 김 윤 호
1. 들어가는 말
양반(兩班)의 고장(故障)이란 대명사(代名詞)의 자존심(自尊心)을 지키기 위한 우리 고장 선조님(先祖任)들은 총, 칼의 무기(武器)를 들고 외세(外勢)에 항거(抗拒)는 못했지만 한양(漢陽)에서 삼남지방(三南地方)으로 연결되는 교통(交通) 요지(要地)로 추풍령(秋風嶺) 괘방령(掛蒡嶺) 우두령(牛頭嶺) 반고개 등의 영남(嶺南)을 넘나드는 문턱과 호남(湖南)으로의 무주통(茂州通) 압치(押峙)가 이 지방의 관로(官路)요, 상로(商路)로 영동의 문화발전에 이바지 했으며 3곳의 봉수통신(烽燧通信)이 우민(愚民)의 혁명정신(革命精神)으로 싹 틔웠을 것이다.
보은(報恩)에서 시작된 동학혁명(東學革命) 세력(勢力)이 남진(南進)함에 영동주민이 합세(合勢)하여 전라도(全羅道)로 이어졌으며 1907년 을미의병(乙未義兵) 시(時) 삼남(三南)의 관문(關門)인 황간(黃澗) 매곡(梅谷) 주민의 항일운동(抗日運動)이 용산(龍山) 영동(永同) 양강(楊江) 양산(陽山)으로 이어지고 항거(抗拒)하다 붙들려 투옥생활(投獄生活)로 희생(犧牲) 또는 여독(餘毒)으로 평생을 마친 이가 수백이며 만리타국 중국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원(要員)으로 항일(抗日)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 바친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의 힘이 미쳐 36년의 일제강점(日帝强占)의 암흑생활(暗黑生活)을 벗어난 것이라 생각한다.
매년(每年) 3월 1일이면 매곡초등학교(梅谷初等學校)에서 3〮1절(節) 행사(行事)로 일제(日帝)에 항거(抗拒)한 애국지사(愛國志士)의 추모제(追慕祭)를 올리나 영동읍(永同邑)의 3.1 기념비(記念碑-東亞日報 建立))가 세워진 중앙공원(中央公園)의 행사(行事)는 없어진지 오래다. 황간(黃澗) 역전(驛前)과 영동역전(永同驛前)에 애국지사(愛國志士)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는데도 관심(關心) 있게 들여다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매국노(賣國奴)의 1인자인 권중현(權重縣)이라는 사람이 영동인 인데도 그를 아는 분이 몇이나 되며 추풍령(秋風嶺) 계룡리(溪龍里) 출신(出身)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원(要員) 김순철(金舜哲-金在寬) 애국지사(愛國志士)를 아는 이가 없듯이 독도(獨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고 영유권(永有權)을 차지하려는 일본의 야심(野心)을 드러내는 현실(現實)에 우물 안 개구리마냥 역사적(歷史的)으로 우리 땅이라 소리치지 말고 자신(自信) 있는 역사적 근거(根據)를 놓고 꼼짝 못하게 하면 아니 될 이유(理由)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우방(友邦)이라고 하나 속어(俗語)에 “미국(美國) 믿지 말자 일본(日本)은 일어난다.”는 말과 같이 잠시(暫時)라도 방심(放心)하면 안 된다. 선대(先代)의 항일정신(抗日精神) 이어 받아 오늘에 되살려 애국정신 굳게 지켜 투쟁(鬪爭)하고 애국(愛國)하자.
2. 동학운동과 영동
(1)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
이미 개항 전 1860년대 일부 지식인들의 통상개화론은 개항 후 개화사상으로 전개되었다. 개화사상은 안으로 북학파가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밖으로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 일본의 문명개화론(文明改化論)에 영향을 받아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으로 부터 김옥균(金玉均), 박영호(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 군사기술 산업조직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 사회제도까지 개혁하고자 하였다. 개화사상은 1880년대에서 1890대 무렵 조선정책 추진의 기본 방향이 되었고, 그 후에도 민족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정부는 개항 직후 수신사(修信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영선사(領選使)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세계정세와 근대문물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개화정책의 추진을 위하여 통리기무아문과 12사영 ,별기군 등 행정, 군사제도를 개편하였으며 기기창, 박문국, 우정국 등 근대시설과 원산학사, 육영공원 등 근대교육기관, 광해원(廣惠院) 등 근대 의료기관도 설립하였다.
한편 개화사상이 일고 개화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도 함께 전개되었다. 이 사상은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주로 보수적인 유학자들에 의해 외세 침략 양상에 따라 전개 되었다. 즉 병인양요 때는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등이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여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뒷받침 하였으며 일본과 개국통상조약이 체결될 무렵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왜양일체론(倭洋一切論)을 내세워 개항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개항이 이루어지고 특히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소개되자 1881년 이후에 위정척사운동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경상도 유생 이만손(李晩孫)이 영남만인소를,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이 만언척사소를 통해 종전의 외세를 경계하는 단계가 아니라 개화정책을 전면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으로 확대시켰다. 따라서 개화세력과 보수세력 사이에 대립과 갈등은 그 폭과 깊이가 더욱 심해졌다. 위정척사운동은 정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점에서 전 근대적이라고 하겠으나 제국주의 침략에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 침략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한 면에서 보면 애국적인 성격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에 항일의병전쟁 등 민족해방투쟁의 바탕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수와 개화의 갈등은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표면화 되었으며 이러한 국내 혼란성황을 조선의 식민지화에 이용하려는 청나라, 일본, 러시아 세력의 각축으로 조선은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2)영동의 동학운동
19세기까지 농촌경제의 파탄은 지배층의 착취와 수탈 때문이었으며 피지배층은 이러한 지배층의 착취와 수탈에 대하여 농민반란의 형태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발생한 농촌경제의 몰락은 제국주의적 약탈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경제침략에 의한 농촌경제의 파탄은 심해 방곡령(1889) 등의 저항운동이 일부 있었지만 실패하거나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8세기 이후 성리학은 이미 사회 지도이념으로의 자리를 상실하고 지배자들을 위한 지적 유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성리학의 비현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재야 학자들을 중심으로 실학, 국학의 기운이 일어나지만 크게 이슈화하지는 못하였다. 조선을 이끌어가는 사상은 여전히 성리학이었으며 조선의 정치인들은 그 성리학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못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천주교를 통해 서양사상이 조선에 전래되고 개항 이후는 더욱 그 기세가 무서워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위기감마저 들 정도였다. 이에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양의 도전에 대항하기 위해 동학이 창도(1860)되었다. 인내천(人乃天)과 제세구민(濟世救民)은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대항하고 열강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킨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애국적 사상과 제병장생(濟病長生)의 구복적 믿음이 결합하여 농민들 사이에 급속하게 전파되어 갔던 것이다. 동학의 평등사상과 운수론은 조선 정부의 탄압을 불러왔으며 결국 교주 최재우가 처형되는 등 타격을 받았으나 최시형 이후 경전의 정리, 교단의 정비를 통해 더욱 더 그 세력을 넓혀갔던 것이다. 1982년 동학교도들은 삼례(參禮)에 모여 관찰사에게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와 교조 최재우에 대한 신원(伸寃)을 요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경복궁 대궐 앞까지 몰려가기에 이르렀다. 이들 동학교도들의 교조 신원운동은 그 이면에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성격을 일정부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이들이 올린 복합 상소에서 별도로 정부에 낸 건의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건의서에는 삼례집회 이후 지방관의 탐학과 동학에 대한 탄압이 한층 가중되었으며 따라서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중 특히 영동관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포고 격문의 일부
「민정(民情)을 불고(不顧)하고 침해를 전사(專事)해 이로 인하여 수재(守宰)가 탐포(貪暴)하고 향호(鄕豪)가 사학(肆虐)하여 호서에 있어서는 영동, 옥천, 청산 수(守)의 요민탈산(擾民奪産)과 호남에 있어서는 무장(武長), 고창(高敞), 김제(金堤), 만경(萬頃), 정읍(井邑), 여산(礪山), 이(吏)의 화인상명(禍人傷命)이 우극참독(尤極慘毒)한지라 애애무고(哀哀無告)의 원성이 장천(張天)하고 누우(淚雨)가 만지(滿地)하니...」
2) 보은 집회
동학의 교조 신원 및 공인 운동은 보은 장내에서 2만 여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로 발전하며 극에 달했는데 이들은 척왜척양창의(斥倭斥洋創意)라고 쓴 깃발을 내 걸고 각 접을 표시하는 충의(忠義), 선의(善意) 등 5색의 기를 세우며 대접주의 지휘로 그 규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보은군수 이중익이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소용이 없자 정부는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로 파견하였다. 어윤중은 현지에서 동학교도와 접촉하였는데 이들 동학도들은 척왜척양 보국안민을 주장하는 자신들을 도적떼로 취급했으며 또한 이후 탄압할 것이므로 해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어윤중이 일을 무사하게 하겠다는 성의를 보이면서 타협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귀향하던 교도들이 박해를 받게 되자 오히려 동학교도들은 더욱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되고 정부는 홍계훈(洪啓勳)으로 군대를 동원한 무력진압과 선무공작을 병행하도록 하여 결국 양측의 타협을 30일 만에 자진 해산하였다.
3) 영동 집회
영동집회는 김고미(金古味) 김철중(金哲仲) 김태평(金太平) 이판석(李判石)을 중심으로 서재 금산에서 활동하고, 박추호(朴秋浩) 배순안(裵順安) 이관봉(李寬奉)을 중심으로 삼실촌에서, 조재벽(趙在壁)을 중심으로 황간에서 활동하였다.
보은집회시 동학교도의 통계를 보면 전체 2만 여명 중 1만2천 여명이 파악되는데 이 중 남접이 6400명 북접이 5994명이었다. 이때 영동접의 참석인원은 1893년 4월 3일 보은 동면 방면으로 퇴거하던 남접의 함평, 남원, 순창, 무산, 태인, 영광접의 200여명과 성주 30명 선산 30명 상주 90명 옥천 30명 그리고 영동 50여명이 함께 해산하였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정부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횡포로 농민의 생활은 끝도 없이 추락하게 되었으며 이런 와중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으로 발생한 고부민란(古阜民亂)은 동학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창의문을 동학교도에게 보내고 여기에 농민이 가세하면서 확대되어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 (輔國安民)을 기치로 황토현(黃土峴)에서 격퇴하고 전주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청, 일 양국군이 아산과 인천에 상륙했고, 동학교도는 폐정개혁에 합의하여 해산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결과 청이 패하여 일본이 도성까지 침범하니 동학도들의 항일구국을 위한 봉기로 구국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 때 최시형은 보은의 수비병과 싸워서 이긴 후 옥천, 영동, 청주에서 관군과 싸운 후 논산에서 합류하도록 되었고, 전봉준과 손병희는 공주를 돌파하고 서울로 가려다 관군과 일본군에 의 해 우금치(于今峙)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일본은 충청도 각 읍의 동학 책임자를 파악하여 보복하였는데 특히 보은, 옥천, 영동지역의 동학교도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동학교도에 대한 재판 처결 상황을 보면 충청도는 10건으로 영동, 안양, 청주, 옥천, 천안이 각 1건씩, 그리고 영춘 2건, 청풍 3건으로 나타났다. 특히 영동지역의 동학교도들은 옥천, 청산 등 이웃지역의 동학교도와 연락을 하면서 가담할 준비를 하다가 탄로되었는데 지금 충열탑이 서 있는 영동천 건너 말채나무 거리로 불려지는 곳에서 일본군에 의해 총살 되었다고 한다. 비록 외세의 막강한 화력에 엄청난 피해를 내면서 동학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역사상 가장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특히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조국을 지키려 한 민족적 성격을 가진 위대한 전쟁이었다. 이러한 동학의 반봉건, 반외세에 구국전쟁은 이후 갑오개혁의 원인이 되었으며 사회변화의 큰 축으로 기여했다.
3. 영동의 3 1운동
(1) 지역적 배경
한일 합방 후 식민정책은 공포정치였으며 폭력정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 대하여 자주 독립정신은 내면적으로 강화되었다. 삼일운동은 일제에 대항하는 자주독립의 잠재적인 힘이 민족자결주의에 받아 일어난 거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서 민족정신을 국내외에 새롭게 인식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각 지방에서 전개된 3〮〯1운동의 배경은 지리적 조건, 전통, 지방민의 의식수준 정도 및 식민통치의 피해양상과 관련되는 것으로 지방에 따라 그 요인이 각각 다르게 작용하였다. 특히 충북은 유교적 전통과 농민에 대한 앙제의 경제적 수탈 그리고 지방 행정상의 문제와 관련되었던 것이다. 경기도에 인접한 충북은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이런 특성은 소박하고 소극적인 성향을 지닌 일면도 없지 않으나 국가와 민족이 위기를 맞았을 때는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다. 민족수호의 유교적 전통의 원류는 서양과 일본이 침략을 시도할 때 전개되었던 위정척사운동과 한말 은사금의 거절 순국 등 소극적인 방법뿐 아니라 동학은동과 의병의 항전 등 적극적인 방법으로 전개해 왔던 데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을미사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의명운동은 이 지역 항일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한말 순국지사로서 최익현, 홍범식, 김제환, 영동의 송병순 형제와 이건식의 순국과 옥사는 이 고장 사람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영동지방 31우동의 원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따른 수탈이었다. 일제의 농민경제에 대한 착취는 특히 토지조사 사업 이후 조상 전래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거나 국비로 시행해야 할 국가사업에 강제로 부역을 동원하는 일 등이 잦았고, 민정을 살피지 않고 산업장려의 명분으로 묘목을 강제로 배부함으로서 농민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제의 헌병 경찰을 동원한 식미통치의 강행에도 불구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 쟁취 의욕이 충만해 있었다. 국내에서는 종교단체와 교육기간이 조직을 바탕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덕수궁에서 유폐생활을 하고 있던 고종황제가 급서하자 항간에는 독살 소문이 파다하였고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을 댕기는 도화선이 되었다. 아울러 당시 미국 윌슨 대통령이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운동에 대한 열의는 높아갔으며 이념적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28독립선언은 그 효시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해외의 독립운동이 국내조직과 일원적으로 연합되고 중앙지도체제가 형성되어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확대되는 만세운동의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종 인산일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대한독립을 선언하게 되고 이를 시발로 하여 3 1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충북지방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영동지역 또한 타 지역의 어느 지방보다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2) 31운동의 전개
영동지역은 3월 25일 이루 각 면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 내용을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학산면
영동의 31운동은 3월 25, 28일에 학산에서 가장 먼저 시작 되었다. 이곳 학산의 만세운동은 그 발단이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 강제 노역 동원 및 뽕나무 묘목 강제 배부 등 일제의 악랄한 수탈정책에 기인하고 있다.
이때의 시위는 학산과 양산 면민의 연합적인 시위양상을 보이며 전개되었는데 특히 3월 30일에는 학산면 소재지인 서산리에서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의 부역에 나섰던 군중들이 양산면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져 창문과 전화기를 파괴했으며 구속된 지사들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특히 일본 경찰까지도 만세에 참가하였는데 이것은 면민들의 시위압력에 그들이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 병력이 출동하면서 7명이 체포되었고 38명이 중상을 입는 피해를 보아야만했다.
이 거사는 양산면 가곡리(柯谷里)의 인천 이씨들이 주동하였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문중의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거사할 것을 격려하게 되고 이에 청년들이 힘을 얻어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당시 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이흥연(이흥연), 이성주(이성주)가 목판에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써서 길가에 세우고 시위를 하려다 경찰에 체포되자 이헌주(李憲周), 이관연(李觀然), 이기주(李箕周)등이 면민을 움직여 이웃 학산면으로 달려가 부역군들과 함께 이들 2명의 학생을 구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한 재판 기록이 일부만 남아있어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으나 재판기록을 참고하여 볼때 이채연(李采然) ,이택주(李宅周), 이봉주(李鳳周), 이낙연(李洛然), 이광연(李光然), 이진국(李鎭國), 이상찬(李相瓚), 이채연(李彩然) 등이 주도하였고 이들은 채포되어 옥고를 당하였으며 이현주 이관연 이기주 등은 도피하였다가 귀향 후 감시를 받으면서 살았다. 이때 재판 결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봉연 2년 경성옥 영동궁 양산면 가곡리
이택주 2년 경성옥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이낙연 2년 경성옥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이채연 2년 경성옥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이진국 2년 경성옥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이광연 2년 경성옥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이상찬 2년 경성옥 영동군 양산면 수두리
이채연 2년 경성옥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그 후 4월 3일 낮 4시 30분부터 밤까지 2차례에 걸쳐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 독립만세 운동의 중심은 양봉식(梁鳳植). 이기영(李基榮), 전재득(全在得), 정해용(鄭海容), 이건양(李建陽), 정만표(全萬杓) 등이 주도하다가 모도 검거되었는데 그들의 재판 기록을 참고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먼저 4월 3일 오후 4시경부터 6시까지 서산리(호미실) 시장에서 약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을 누볐다. 또한 밤 8시경에도 약 200여명의 군중이 양봉식 이기영 전재득 의 지휘하에 만세를 계속하면서 면사무소에 달려가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에 웬 뽕나무인가” 라고 외치면서 임시로 심어 놓은 2만8천여 그루의 뽕나무묘목을 뽑아 불에 태워버렸다. 매우 격렬하게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후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른자 들의 명단은 담음과 같은데 정돈영(鄭暾永)은 고문으로 5월 옥사하였다.
양봉식 5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
정돈영 1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 옥사
이기영 1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이구현 1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전재한 1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전주하 1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전만표 1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정해용 1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
양민철 1년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이건양 1년 6월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서산리
조중구 6월 공주옥 영동군 학산면 삼정리
이들 중에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한 양봉식은 경술국치 후 비분강개하여 의병장 이강년(李康年)의 막하에서 활동하다가 서간도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였던 사람이다. 그는 1919년 2월 진남포를 경유하여 독립선언서 수십장을 얻어와 옥천, 이원 금산, 무주 등에 배포하기도 하였는데 4월 3일에는 학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2) 영동면
영동지역의 중심지인 읍내에서도 3월말 경 영동장날에 시장 남쪽의 다리 위에 누군가에 의해 사방 1m 30cm의 태극기가 달려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종이로 만든 150여 장의 태극기가 나돌랐던 일이 있었다. 드디어 4월 4일 영동 장터에서 2천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투석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날의 만세운동 지도는 박성하(朴聖夏), 한의교(韓義敎), 정성백(鄭聲佰), 장인덕(張寅德), 김태규(金泰圭), 정우문(鄭禹文), 한광교(韓光敎) 등이었는데 이들 7인은 준비 작업을 마치고 독립선언서와 太極旗를 장짐에 僞裝하여 읍내 솥전 안집(朴明月의 집)에 모였다. 안집 주인은 죽음을 각오한 이들에게 술상을 마련해 주었다. 상을 물린 이들이 윗장터와 아랫장터에 흩어져 독립만세를 외치자 이에 구중들은 호응하여 읍내를 누비며 행진하였고 놀란 일본 경찰은 강제 해산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군중들은 몽둥이로 대항하였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6명이 죽고 8명이 크게 다쳤다. 그리고 기태규 한의교 한광교 고화윤 손석구 강병준 박경운 등은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군중을 향해 푸른 물을 끼얹기도 하였다.
3) 매곡면
매곡에서도 4월 2일부터 6일까지 안준(安準), 안광덕(安光德), 안병문(安秉文), 장복철(張福喆), 신상희(申相熙) 등이 주동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옥전리(玉田里)에 살던 안준은 독립선언서를 얻어와 안광덕과 본격적인 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400여장의 태극기와 베껴 쓴 독립선언서를 들고 면 소재지인 노천리(老川里)에 내려와 김용선(金容善), 남도학(南道學), 임봉춘(林奉春) 등과 논의하여 4월 2일 밤나무 묘포장의 부역군들과 면사무소 마당에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당일 11시경 매곡면 밤나무 양묘장에서 작업을 하던 약 100여명과 각 마을에서 모인 300여명이 합세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면장과 직원들도 만세운동에 가담케 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마침 장날이었던 황간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날 옥전리에서도 반세운동이 있었다.
4월 3일과 4일에는 군중 800여명이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추풍령 헌병 분견대가 출동하여 주동 인물인 안광덕 임봉춘 남도학 등을 구속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구속된 이들을 구출하고자 추풍령 헌병 분견소까지 추격하기도 하였다.
4월 5일에는 추풍령 헌병 분견소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4월 6일에는 300여명이 추풍령 헌병 분견소에 쇄도하였으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헌병들이 출동하여 제지당하고 분산하였다. 그리고 이날 안준을 비롯하여 장복철 안병문 감용선 신상희(申相熙) 등 4명과 이후에 다시 이장노(李章魯), 장출봉(張出鳳 ), 김용문(金容文) 등 8명이 체포되었다. 매곡면의 31운동을 주도한 안준은 1897년에 태어나 1910년 15세에 황간학교에 입학하여 4년을 배운 후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서당 훈장도 한바 있었다. 그는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옥중에서 고문으로 인하여 대고 동산병원에 입원하는 등 1년 6월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어 광복 후에 면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매곡면 31운동 과정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주동자 11명이 대구와 공주에서 옥고를 치른 판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안 준 1년 6월 대구옥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
임봉춘 1년 2월 대구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안광덕 1년 2월 대구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김용선 1년 3월 대구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안병문 1년 3월 대구옥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
장복철 1년 3월 대구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신상희 1년 3월 대구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남도학 1년 3월 대구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이장로 6월 공주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장출봉 6월 공주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김용문 6월 공주옥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임진규 1년 2월
4) 추풍령
추풍령의 31운동은 3월 31일 추풍령 정거장에서 수백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자 마침 기차로 도착한 승객들도 이에 호응하였으며 4월1일은 황간역 앞산에서 수100명의 군중이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교인들도 예배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물론 이들도 모두 추풍령 헌병들에 의해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5) 양강면
양강면에서도 읍내에서 태극기가 나돌 때 묵정리에 벽보가 나붙은 바 있었다. 결국 4월 3일 200여 군중이 괴목리 경찰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8명이 체포되었다. 박중옥은경찰 1명을 때려 응징하였는데 김용문과 함게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당하였다.
(3) 만세운동의 양상
영동의 31운동은 타 지역의 그것과는 전개 양상이나 특징이 약간은 다르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3도 접경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서울의 지도부 조직과 연결되여 전개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봉기한 경우다. 식민통치에 대한 반항의식이 바탕을 이룬 상황에서 일제의 농민에 대한 강제노역과 뽕나무 묘목의 강제 배부 등 경제착취가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시작된 후 전 군에 확산되었다. 특히 항일 의병운동을 일으킨 이들이 다시 영동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청장년들이 적극 앞장섰다.
만세운동은 주로 장날을 택하여 전개되었는데 예컨대 용산면 사람들이 청산 장터에서, 양산 사람들이 이원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민족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 것은 개인 신원을 숨기기 쉬웠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어 만세운동의 열기를 쉽게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세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지속적으로 전개 되었는데 처음에는 면사무소 등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평화적 운동으로 전개하였으나 일제가 야만적인 무력탄압으로 주동인물을 검거하고 살상하자 군민들은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는 격렬함을 보여 주었다. 동아일보에서 영동읍에 세운 31운동 기념비는 충북에서는 처음이요 전국에서도 두 번째 세운 기념비다. 또한 1991년 영동읍 주곡리에 7지사(志士)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워 그 빛나는 공을 다시 한 번 기린바 있다.
4. 항일운동(抗日運動) 인물(人物)
(1) 獨立運動家(上海) 一松 金舜哲(在寬) (1895~ )
.
이 름 : 김순철(金舜哲, 一松)
출 신 지 : 충북 영동군 황금면 계룡리 316
묘소위치 : 대전국립현충원 (안장일자 2008.06.02)
생존기간 : 1892.12.11-1939.10.2
훈 격 : 건국훈장 애족장(2004) *3762호
2008년 3월 19일(수) 영산김씨 대종회 총회시 강릉에 사는 김종열(24세손)씨 남매가 참석하여 자신들의 조부 김순철(재관 22세손)이 2004년 “고증이 입증되어 2004년 8월 15일 대통령 노무현, 국무총리 이해찬의 건국훈장 애족장(3762호)을 받고 행정자치부장관 허성관이 건국훈장부에 기입하였다.”고 소개한바 있다.
독립운동가 김순철(재관)은 영산김씨(永山金氏) 관조 김영이(金令貽)의 22세손으로 추풍령면 계룡리 316번지에서 을미(1895년) 12월 1l일에 석훈(錫勳)의 장자로 출생하여 대정 15년 음력 3월경 봉천성 공태보에 도착하여 길림 및 하성현 취원욱지방을 거쳐 같은 해 음력 12월 초순 하얼삔 융익성(隆益盛)의 집에 도달하여 고려혁명당 간부 김봉국 송현 이동구 김현우 이일심 전야우 등과 친교를 맺게 되어 당의 취지에 찬동하여 당원이 되었으며 당을 위해 소화 2년 3월경 전야우의 후임으로 농업부 정미소 등의 경영시설을 맡았으며 또한 같은해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하성현 취원욱 흥발영의 집에서 열린 고려혁명당 세포연합회 대회에 하얼삔시의 대표로 출석하여 아래와 같은 업적을 남기었다.
1. 고려혁명당으로 조합을 조직하여 중국정부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영구적으로 매수하여 농업을 경영하여 당원의 생활에 충당하고 남은 것은 당비로 충당할 것.
2. 조선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교련을 실시하는 한편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을 가르치는 각종 학교의 교육을 통일 제정할 것.
등을 의결하고 이를 착착 실행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같은 음력 8월경 당원 김정환이 귀국할 때 앞서 기재한바와 같이 당비 1,200원 의 조달 외 4개 항목의 사명을 주고, 항상 동당의 간부로서 당원을 지휘하고 또한 연루자 정의부(正義府) 및 형평사원(衡平社員) 등과 상호 기맥을 통함으로써 안녕질서를 방해한자임으로 소화 3년 5월 14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결에 의하여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8년 4월 7일 영동군 추풍령면 계룡리 안산에 묻힌 遺骸를 대전 현충원 유공자(독립) 묘역으로 안장하기 위해 파묘하여 대전 국립 현충원 안치소에 안치했다가 6월 2일 안장했다.
*파묘시, 유골이 한 곳에 뭉쳐있고, 頭蓋骨(해골-머리골)이 없어 유족(손자-덕열, 손녀-강준)의 안타까운 마음과 의혹을 풀길이 없어 근심중이다.
註·豫審終結決定書(光州地方法院 順天支廳, 1928. 5. 14)
(2) 송병선(宋秉璿) 1836(肅宗2)~1905(光武9)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화옥(華玉) 이고 호(號)는 연재(淵齋) 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으로 송면수(宋勉洙)의 아들로 헌종(憲宗) 2년 1836년에 태어났다.
그는 학행으로 천거 받아 제주(祭酒)에 기용된 뒤 서연관(書莚官) 경연관(經莚官)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평소에 충직한 성품이라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으며 의관을 양복으로 고치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채결되자 수일간 단식을 감행하였으며 국왕으로부터 시정개혁과 대일경제를 건의하여 왕의 동의를 얻었다. 뒤에 다시 국왕에게 상소(上疏)하려고 대궐에 가다가 경무사(警務使)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일본 헌병대에 의해서 고향으로 강제 이송 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自決)하였다.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 에 증직되고 시호(諡號) 는 문충(文忠) 이다. 원계영당(遠溪影堂) 거창의 만인재(萬仞齋), 광주(光州)의 만주사(晩州祠)에 향사(享祀)되었으며 원계영당은 대전(大田)으로 옮겼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大韓民國 建國功勞勳章 大統領章)이 수여되었다.
(3) 송병순(宋秉珣) 1839(憲宗 5)~1912
송병순은 조선후기의 학자이며 헌종 5년(1839) 4월 10일 대전 성남동에서 송면수(宋勉洙)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동옥(東玉) 자는 심석제(心石齊)이다.
우암 송시열의 9대손이며 연제 송변선의 아우이다.
그는 을사조약 때 순국한 형 송병선과 함께 그의 큰아버지 송달수(宋達洙)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공부하고, 이 부문의 대가가 되었는데 그의 학식과 덕망이 세상의 사표가 됨은 물론 타고난 성품이 밝고 순수하며 기상과 절개가 굳고 발랄하였었다.
고종 25년(1888),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고종 40년 (광무 7)에는 고종황제로부터 그의 높은 학문과 독실한 행실을 인정받아 경연청 서연관으로 임명 되었으나 친일파들의 방해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그는 세상이 날로 그릇되어 가므로 은퇴하여 학문을 더욱 연구하고, 후진을 가르치어 겨례를 깨우치며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영동군 학산면 범화리(範華里)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강당을 세우고 수백 제자들을 가르치며 천리를 밝히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온 정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고종 42년 (光武9-1905) 침략의 두목 일본 이등방문 의 강도행위와 박제순 등 다섯 도적의 나라를 파는 행위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맺어지고, 맏형 송병순이 순국했다는 슬픈 소식을 듣자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 하고 “은산 철벽을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라“ 하며 더욱 비통한 결심을 하더니 그해 겨울 ”토오적문(討五賊文-다섯 도적을 치다.)“을 지어 전국 유림에 선포하고 국내에 두루 펴 보내어 민족정기를 드 높일 것과 국권회복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그는 또한 순종 4년(1910)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나라 위하는 충성과 겨레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 밖에 없다.”라고 동년 9월 5일 강당 뒤 높은 봉우리에 올라 임금계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며 4배를 드리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는데 몰래 뒤 따랐던 제자에 의해 저지당하니 그 후 부터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서 달랬다.
그러자 이 해에 영동군 양산에 있는 일본 헌병대에서 소위 “은사금” 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는 “재물에 분명함이 대장부인데 염치가 없는 것이 어찌 사람이겠는가? 내 오직 염치만을 알지니 의(義)가 아닌 것은 실오라기 머리카락 하나라도 가까이 하지 않겠다”하고 “내 몸은 비록 욕되게 살지언정 내 뜻은 가히 욕되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물리치니 그들은 갖은 위협과 공박을 다하였다. 그래도 그는 “네가 차라리 내 배를 갈라
놓을 지언정 내 손으로 받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하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1912년 총독부 경학원 대제학으로 있던 박제순이 그에게 보내는 경학원 강사 사령장과 취임을 권고하는 공문이 영동군청에 도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나라를 팔아 먹은 것도 부족하여 원수에게 사람마저 팔려 하느냐?”하고 강력히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욕되게 사느니 보다 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또다시 결심하게 되었다. “원수인 일제의 재물과 벼슬이 어찌 나의 천길만길 같은 대의를 욕되게 할 수 있으랴” 「넓고 아득한 이 천지에 내 한 몸을 둘 곳이 없구나」라는 비통한 글을 남기고 이해 2월 4일 활산정사(活山精舍)에서 74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그의 순국은 항일 재기에 있어서 다시 일어날 힘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저서(著書)로는 문집 15권 학문삼요(學文三要) 사예축식(四藝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등이 있고 “토오적문(討五賊文)”은 만대의 등불이 될 것이다. 심석재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에서는 1973년 그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여 영동 역전 광장 동쪽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1968년 3월 1일에는 건국훈장독립장(建國勳章獨立章)이 추서되었다.
◇을사오적(1905.11.17) 권중현(權重顯-농상공부대신), 박재순(朴齊純-외부대신), 이근택(李根澤-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학부대신) 이지용(李址鎔-내부대신)◇ *권중현은 영동분
(4) 이건석(李建奭) 1852(哲宗3)~1906(光武10)
구한말 애국의사로서 자는 한경(漢卿)이고 호는 성석(醒石)이며 본관은 전주이씨로 정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의성군의 14세손으로 이상영(李象榮)의 아들이며, 1852년 11월 26일 永同郡 秋風嶺面 溪龍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의지가 굳으며 학문에 전심전력하여 학리에 밝았다. 22세에 결혼하였으나 높은 뜻을 품고 가족을 고향에 남겨 둔 채 서울로 올라가 30년간 머물면서 궁내부 주사(宮內府 主事)의 벼슬을 지냈다.
이때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침략을 은밀히 획책하고 있는 시기에 김옥균(金玉均) 등이 1884년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일본군대의 힘을 빌려 우정국 낙성식날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3일동안 집권한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대내외의 조선에 혼란을 갖어왔고 1894년 동학란때 우리나라 내정간섭을 위한 일본의 적극적 침략야욕은 청일전쟁을 (淸日戰爭) 을 유발하여 일본의 승리로 이끌어 강압적인 일본에 의해서 시행된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식민지화를 위한 근대적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고 청국으로부터 조선에서의 우월권을 인정받아 그들의 침략적 만행이 노골화 되어가다 온 국민의 반발은 커 갔고 영리한 민비(閔妃)는 친러 정책으로 기울자 일본은 자객을 은밀히 보내어 국모인 민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비롯한 제도의 개혁을 마음대로 하자 1895년(을미사변)에 전국의 유림과 애국지사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구국의 정신으로 구한말 최초의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국모를 시해한 왜적의 만행을 규탄하고자 기호유생(畿湖儒生)을 대표하여 여러번 상소하였고 1898(광무2년) 고종의 양위를 모의했던 안경수(安駉수) 등 친일파가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자 이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또한 수차 하였던 것이다. 1902년 주사(主事)가 되었는데 1903년(광무7) 일본과 러시아에 같은 대우를 하여 자주국권(自主國權) 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다시 왕께 올렸으며 1905년(光武9) 일본과 오적(五賊)에 의한 을사보호조약의(乙巳保護條約)의 부당성을 승지(承旨) 이석종(李錫鍾)과 함께 과격한 글로 상소하였다. 특히 10월 11일 잠시 고향에 내려왔다가 20일에 평안도의 자객 20여명과 조정의 매국노(賣國奴)를 처단하자는 약속을 하고 서울로 올라갔는데 전날 모의가 폭로되어 일본 놈들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마구 날뛰며 체포하였다.
그는 이날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쓰러져가는 국운을 통곡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이때 별실에 살고 있던 작은 부인 천씨(千氏)가 식사를 가지고 와서 정성 것 드렸으나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나만 편히 먹고 지낼 수 있는가」하고 이를 물리쳤다.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피를 토하고 기절까지 하자 일본 관헌이 주사를 놓아주고 약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는 한도가 있으니 응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 응수(應洙)가 면회 왔을 때 말하기를「나는 나라를 위하여 죽기로 뜻을 정하였으니 만약 살아서 돌아가면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이냐? 나는 죽음을 각오 했거니와 너는 빨리 고향의 집에 돌아가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힘쓰고 조상제사를 극진히 받들어라」라고 했다.
1906년(광무10) 5월 10일 55세로 손수 목 졸라 순절하니 일본관헌은 그의 시체를 남대문 밖에 내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응수는 동지인 이학래(李鶴來) 윤상필(尹相弼) 등이 정성껏 힘을 다하여 지금의 노량진 앞 기슭의 이문화(李文和) 선산 야래에 임시 매장하였다가 이듬해 여름 황간의 동산에 안장하였다. 그의 유서가 신고 있던 버선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슬프다 죽음이여 사람이 누가 죽지 않으리요 마는 죽을 바에 죽기 어렵다. 내가 죽되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매국노를 죽이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함을 한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그의 애국충절을 보여주고 있다. 아들 응수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대한의 자주독립과 민족자결의 원칙을 호소하여 31운동 당시 선두에 서서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 후 권총과 폭탄의 밀수사건으로 전후 14개월을 감옥에서 지냈다.
이렇듯 이건석의 우국충의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애국충정의 충효정신을 우리 모두 본 받아야 할 갸륵한 정신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1963년에 건국훈장독립장(建國勳章獨立章)이 추서 되었고 이해 11월에 永同郡 黃澗 驛前에 그의 공적비를 세워『대한의사 이건석 기념비』라 음각하였고 2평에 철조 담장을 하였다.
(5) 김중제(金重濟) ( ~1920)
자는 국진(國珍) 호는 선암(仙巖) 경주김씨로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이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돌아가심에 산 능선에 올라가 온 종일 통곡하였다. 다음 해 복이 끝나는 날 조선조에 가서 종일 땅을 치며 통곡하고 유시(遺詩)를 남긴채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향당(鄕黨)에서 그 절개를 장하게 여겨 관찰사에게 천거하여 모성공회(慕聖公會)에서 크게 표창하였고 경주김씨 상촌파(桑村派) 후손들이 1959년 9월 농아천사 경주김공 김중제 충의비【聾啞處士 慶州金公 金重濟忠義碑】를 영동군 용화면 용강리에 세웠다.
(6) 홍 진(洪 震) 1878(高宗15)~1946
홍진은 영동읍 출신으로 본명은 면희(冕熹) 호는 만오(晩唔) 이며 홍재식(洪在植)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시(詩) 서(書) 문예(文藝)에 뛰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또한 천성이 효성스러워 편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고 나라 일을 지켜보며 옳고 그름을 지적하였다. 일찍이 항일사상을 품어 숨어서 동지들과 교류하였다. 1898년 (光武2)에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하고 그 해에 한성평리원주사(漢城平理院主事)에 임명되고, 1899년에 한성평리원 판사(判事)를 역임했다. 1903년(光武7)에 충주검사국 검사(忠州檢事局檢事)로 전임되어 의병(義兵)에 대한 형사사건을 맡아 처리할 때 그들을 격려 두둔하였다. 1905년(光武9)에 충청도 재판소 검사(忠淸道裁判所檢事)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에 충청도 의병사건(義兵事件) 논고를 거부하고 검사직을 사퇴한 뒤 서울에서 변호사 사업을 시작하여 1919년 2월까지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31우동에 참여하고 인천만국공원 (仁川萬國公園)에서 13도 대표를 소집하여 국민대표대회(國民代表大會」)를 열어 한성정부(漢城政府)를 구성하였다. 곧 뜻한바 있어 이규갑(李圭甲) 안상덕(安詳德) 한남수(韓南洙) 이춘숙(李春塾) 등과 함께 중국(中國) 상해(上海) 로 망명하였다. 이 해에 상해 임시의정원(臨時上海議政院) 충청도 선거위원장 겸 법제위원장(法制委員長)에 선출되어 임시헌법과 의정원법을 제정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의 정세에 비추어 지방 관념을 초월하여 독립운동가들의 대동단결에 힘쓰고 1921년에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法務總長) 내무총장(內務總長)에 임명되었고 1926년 때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제를 국무령제(國務領制)로 바꾸는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 초대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이 때 그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3대 사정방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 비타협적 자주적독립을 진작한다.
둘째 : 전민족 대동체를 건립한다.
셋째 : 각 피압박 민족과 대연맹을 체결하고 우의적 국교를 증진한다.
1927년에는 전 해외운동계의 파생으로 독립운동이 부진하자 각지의 잡다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 유일의 대독립당을 조직하자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것을 받들어 만주에 진출한 그곳의 3부인 신민부(新民府 )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 및 교민 각 단체의 수뇌들과 의논한 끝에 국민의회(國民議會)를 결성하여 그 부의장 에 선임 되었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설하여 부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에 한국독립군을 창설하고 이청천(李靑泉)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 침략으로 중국 관내로 가서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고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를 설립하였으며 임시정부 조직을 확대, 강화하여 그 승인운동을 벌였다. 한편 연합군(聯合軍)과의 합동작전으로 대일 항전을 전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날로 거세어지자 임시정부는 1933년 겨울에 남경(南京)으로 그 활동무대를 옮겨 중국 산해관(山海關) 이내와 미국 각지에 산재한 민족주의 각 단체의 대단결 항의를 다시 고창하였다.
1934년 봄에 이미 만주에서 창립된 한국독립당과 남경에서 창립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을 만들고 그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항주(杭州)에서 재건한 한국독립당에서 조소앙(趙素昻)과 같이 당을 영도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전선(韓國光復戰線)을 결성하였다.
그 운영 간부로서 잡지 발간과 전단 표어를 만들어 뿌리는 등 선전사업에 힘썼다. 1939년에는 기강(綦江)으로 옮겨 임시정부의 내무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이시영(李始榮) 이청천(李靑天) 조소앙(趙素昻) 차이석(車利錫) 등과 함께 항일대책을 세우는데 진력하였다. 1940년 5월에 광복전선 9개 단체의 대통일로 다시 조직된 한국독립당의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3년에 임시의정원의 확대강화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파란 많은 정국을 조화시키기에 힘썼다. 또한 일본 독일 등에 대하여 대한만국 임시정부로서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을 연합군에 편입 시켜 항전케 하였는데 특히 버어마,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서 용맹을 떨친바 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과 더불어 11월 29일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오랜 동안의 해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운 조국에 돌아 왔다. 비상 국민회의(國民會議) 의장으로 피선하기도 하였으나 오랜 망명생활에서 해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서울에서 서거하였다.
사회장(社會葬)으로 인천시 학익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1962년 정부는 그의 임시정부에서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大韓民國建國勳章 獨立章)이 수여 되었다.
(7) 양봉식(梁鳳植) 1862(高宗19)~ 1950
양봉식 의사(義士)는 구 한말 고종 19년(1882) 6월 3일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에서 양해요(梁海堯)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는 단산(丹山), 목사공(牧使公)
양언련(梁彦璉)의 19세손이다.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왜적이 황후(皇后) 민비(閔妃)를 시해하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히 항거하는 의병을 일으켰는데 의병장 이강년(李康年)이 제천(堤川) 단양(丹陽)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항거하자 양봉식은 그 휘하에 들어가 왜적을 무찌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고종 42년(1905)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고 왜적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양봉식은 순종 2년(1908)에 만주로 망명, 조국독립을 위하여 활약하다 1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양봉식도 이에 힘입어 고향 동지들과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무주, 오천 ,금산 ,이원 등지에서 배포하며 총 궐기할 것을 호소하고 학산면 거사 일을 3월 20일로 결정하였었는데 그 전날 양산면 이병연(李秉然) 동지, 등이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학산으로 모여 들었다. 양봉식도 이에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200여 군중과 학산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였다.
다음날 당초 예정대로 거사하니 그 시위가 거센 파도와 같았으므로 영동 헌병대가 출동하여 선두 지휘자를 무자비하게 체포 구금하였다.
4월 3일 또 300여 군중이 학산 장터 서산리를 중심으로 일어나 주재소를 파괴하고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뽕나무 및 소나무 묘목 약 3만 8천 그루를 불태워 버렸으므로 왜병은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 충돌이 벌어져 5명의 부상자가 났고 19명이 검거 되었다.
이 때 양봉식도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니 악랄한 고문을 받고 서울 서대문 옥에 송치 되었다가 다시 공주 옥으로 옮겨 5년형(刑)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고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8) 안 준(안 준) 1897(光武1)~1969
1919년 영동군 매곡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愛國志士)로서 1897년(光武1) 매곡면 옥전리(玉田里)에서 안상구(安商球)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919년 31운동의 거센 기운이 전국으로 퍼져 영동에서도 곳곳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안준은 4월 1일 저녁 안광덕(安光德) 등과 인적이 드문 안녕(安寧)부락에서 밀회를 갖고, 안광덕이 서울에 갔다가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몰래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문종이에 베껴 쓰고 태극기를 400여장 만들었다.
그리고 거사일은 이튿날 4눨 2일, 모일 장소는 밤나무 묘포장, 선언식 장소는 면사무소, 선언문 낭독은 안광덕, 만세선창은 안준, 각 부락 군중 동원과 태극기 배포는 김용선(金容善) 등 11명으로 각각 결정 분담하였다.
4월 2일 매곡면사무소 마당에 300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면장 이하 전 직원을 함께 참가 시키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안준(安準)이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은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성난 파도처럼 거리로 몰려 나갔다.
일본사람들을 불러내어 태극기를 들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며, 안준은 시위 군중을 황간 방면으로 이끌고 갔다. 황간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해도 저물어 저지하는 황간 헌병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4월 4일에도 800여명이 면사무소 마당에 모여 안준의 선창으로 만세 시위를 시작 하였으나, 급히 출동한 추풍령 헌병 수비대가 에워싸므로, 자유스러운 활동은 못한 채 몇 동지(同志)가 체포되었다.
4월 6일 또 700여명을 동원하여 매곡면사무소에서 시위를 벌리고 추풍령으로 향 하였으나, 출동한 왜병의 발포로 군중은 해산되고, 7명의 동지들과 함께 안준도 체포되었다. 끌려감을 완강히 거부하던 안준은 “우리의 평화적인 독립시위에 왜 간섭하느냐? ” 하며 왜놈 헌병을 떼려 눕혔다고 한다.
안준은 대구(大邱)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항거하다가 무자비한 고문으로 갈비뼈 3개가 부러져 대구 동산병원에서 5개월간 입원 치료를 한 후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제 학정에 치를 떨며 문 밖 출입 없이 세금을 거부하는 등 일제 행정에 일체 협력하지 않은채 조국광복의 날만을 기다리며 청빈하게 살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흰 두루마기에 모자를 쓰고 태극기를 높이 들어 목청껏 독립만세를 부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매곡면민들이 그를 매곡면장에 추대하니, 온 힘을 다해서 면민을 위해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1969년 3월17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면민들이 면민장으로 장례를 치러 주었고, 그의 애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해서 1976년 3월 1일 매곡초등학교 교정에 31독립운동 의거 기념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고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구훈장 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9) 이광연(李光然) 1872(高宗9)~1939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로서 1919년 3월 20일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에 사는 인천이씨(仁川李氏)들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양산면 각골에 대대로 사는 인천이씨들은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양산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 거사 계획을 눈치 챈 보통학교(普通學校) 학생 이흥연(李興然) 이성주(李聖周)가 흑판에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써서 큰 길가에 세워놓고, 만세시위를 벌리려던 차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헌주(李憲周) 이관연(李觀然) 이기주(李箕周)등은 면민들을 격려하여 이웃 학산면(鶴山面)으로 몰려가 마침 영동 무주간에 이르는 도로공사 부역에 나섰던 수많은 군중과 합세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까지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결국 일본 결찰 응원병력의 출동으로 시위군중은 어쩔 수 없이 해산했고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이 때 그도 체포되어 이 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1980년도에 建國勳章 愛族章을 추서했다.
(10) 이기영(李璣榮) 1873(高宗~1946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 영동군 학산면 봉산리 사람, 1919년 4월 3일 우후 4시부터 6시까지 학산면 서산리 장터에서 군중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거사는 그를 비롯한 양봉식(梁鳳植) 정해용(鄭海容) 이건양(李建陽) 전만표(全萬杓) 전재득(全在得)에 의해 주동이 되어 전개된 것이다. 그들은 이날 오후 8시쯤 다시 200여명의 군중을 지휘 면사무소에 몰려가 「바야흐로 지금은 국민이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인데 비싼 뽕나무 묘목을 강제 배부하려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이니 이것을 처치하자」고 하면서 구내에 임시로 심어 놓은 뽕나무 묘목 2만 8천 그루를 뽑아 도로에서 불태우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그는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17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1982년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1) 전만표(全萬杓) 1876(高宗)~1959
이기영 양봉식 전재득 등과 같이 영동군 학산면 면사무소와 거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6월 28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3년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2) 성하식(成夏植) 1878(高宗15~1958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 1878년 (高宗10) 2월 3일 영동군 매곡면에서 태어났다. 만주로 망명하여 1913년 1월에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를 1917년 2월에 길창소학교(吉昌小學校)를 각각 설립하여 후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무송현(撫松縣)에서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12년 3월에는 부여현(夫餘縣)에 삼흥교(三興校)를 설립하고, 1924년에는 빈현(賓縣)에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였다. 1926년에는 신민부(新民府)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중국 관헌에 의해 치포되어 만주 감옥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또한 조선 고유의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단군문화(檀君文化)를 다시 발전시킨다고 표방하여 조선 민중에게 조선 독립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인 대종교에 가입하여 그 간부로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29년에는 다시 검수현(檢樹縣)에 유성학교(裕成學校)를 설립하는 등 계속적으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활동하였으며 1968년 6월 39일에 서거하였다. 1077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3) 이응수(李應洙) 1879(高宗16)~1049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 1879년 (高宗16)에 황간에서 한말의 의사(義士) 이건석(李建奭)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성석(醒石) 이건석은 을미사변 이래 국권수호를 위해 여러번 상소하다가 체포, 구금되어 옥중에서 피를 토하고 자결한 의사로서 자결 당시 그의 아들인 응수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슬프다 죽음이여! 사람이 누가 죽지 않으리오 마는 죽을바에 죽기가 어렵다. 내가 죽되 눈을 감지 목하는 것은 매국노를 죽이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함을 한 하노라. 슬프다 응수야! 너도 이 일을 원통히 여겨라. 내가 죽은 뒤 슬퍼함으로서 효도를 여기지 말고 예로서 장사 지내어라. 이 아버지의 뜻을 이으면 참 내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응수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전력을 기울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거기에서 1915년 1월경부터 1919년 28독립선언이 있기까지 겨레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강단 혹은 동창생들과의 좌담으로 2인 이상이 모이기만 하면 일제의 만행을 비판하고 세계의 추세를 논하며 조국의 장래 걱정으로 격려하고 조국을 위해서 일어날 것을 은연중에 맹세하였다.
이 때 유학생들은 독립에 관한 정세분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웅변대회 등을 통하여 공론화함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그는 1918년 11월 30일 각 학교 연합웅변대회에 참가하여 시사를 언급하고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자결론을 주장하였다.
그 후 1919년 4월 5일 경기도 시흥에서 독립운동 전개를 모의하고 태극기 한 개씩을 가지고 4월 7일 군자면 사무소 앞으로 모이라는 비밀 통고문을 돌리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가을에 상해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소속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을 취하면서 국내에서 독립군 활동에 호응, 협조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독립운동 후원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1년 10월 동운정(東雲町) 공설운동장에서 동지들을 만나 각처의 부호들을 찾아 독립운동자금을 각출 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이 해 11월 각 처의 부호들에게 독립운동자금 요구서, 시국에 관한 경고문, 서로군정서의 사형선고서 등을 우송하는 등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63년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4) 정해용(鄭海容) 1880(高宗18)~1942
자는 원일(元一) 호는 일장(一張)이며 하동정씨(河東鄭氏)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의 16세손이며 정구종(鄭九鍾)의 둘째 아들로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에서 태어났다.
이 는 1919년 4월 3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학산면 서산리 장터에서 군중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에 열거한 동료와 뽕나무 묘목 28000그루를 불태우며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0년 2월 12일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1980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5) 이채연(이채연) 1880(高宗17)~1954
일제때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3월 20일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인천이씨들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외치다 일경에 체포되어 그 해 10월 13일 2년형을 선고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6) 김수원(金壽遠) 1881(高宗18)~1936
선산(善山) 김씨로서 고려말 시조 김기(金起)의 16대손인 김수대(金秀垈)의 차남으로 1881년 12월 23일 영동군(永同郡) 양산면(陽山面) 호탄리(虎灘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허상기(許相基) 형제 및 육창주(陸昌柱) 김용이(金龍伊) 등과 함께 옥천군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수백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 헌병과 격돌하여 주재소의 기물을 파괴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해 6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7) 이상찬(李相瓚) 1884(高宗21)~ 1942
영동군 양산면 사람으로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 이다. 1919년 3월 30일 양산면 가곡리에 사는 인천이씨들이 주동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양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 되여 학산 장날에 학산으로 몰려가 도로공사 작업인들과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建國勳章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8) 여구방(如九芳) 1886(高宗23)~1963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로서 일명 규방(圭滂)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15일 김승림(金升林) 박원보(朴元甫) 여규일(呂圭一) 등과 함께 학산면 영동-무주간 도로공사 부역을 위하여 일 하는 군중들을 모아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학산 경찰주재소를 일시 점거하여 건물과 기물 등을 파괴 방화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하여 1990년 7월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19) 장복철(張福喆) 1890(高宗27)~1931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로서 일명 복철(復哲)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2일부터 5일가지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老川里) 옥전리(玉田里) 일대에서 안준(安準) 등과 함께 연일 계속하여 주민 30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4월 5일 추풍령 헌병파견대를 습격하여 방화시위하다 체포되었다. 이 해 5월 3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3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0) 박원보(朴元甫) 1890(高宗27)~1957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로서 일명 내석(來碩)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1919년 4월 16일 영동군 학산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학산주재소를 점거하고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해 징역 1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되어 1990년 7월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1) 김승림(金升林) 1891(高宗28)~1952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는 1919년 4월 16일 영도군 학산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학산주재소를 점거하고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해 징역 1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되어 1990년 7월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2) 신상희(申相熙) 1892(高宗29)~1962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로서 1919년 4월 2일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및 옥전리 일대에서 안준 등과 같이 독립만세운동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6일 다수군중과 추풍령 헌병파견소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2개월 형을 선고 받고 경성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또 이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도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3) 이봉연(李鳳然) 1893(高宗30)~1941
이는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양산면 가곡리에 사는 인천이씨들이 주동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양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여 학산 장날에 학산으로 몰려가 도로공사 작업인들과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0년에 建國勳章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4) 이택주(李宅周) 1893(高宗30)~ 1947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0일 양산면 가곡리에 사는 인천이씨들이 주동한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양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여 학산 장날에 학산으로 몰려가 도로공사 작업인들과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5개월 형을 선고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0년에 建國勳章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5) 정돈영(鄭暾永) 1894(高宗32)~1919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로 일명 도영(道永)이라고도 하였다. 1919년 4월 3일 영도군 학산면서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뽕나무 묘목 28.000여 그루를 불태우다 학산주재소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 중 옥사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되어 1986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6) 김용선(金容善) 1895(高宗32)~1963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2일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및 옥전리 일대에서 안준 등과 같이 독립만세운동 시위를 3일과 4엘에 걸쳐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매곡면의 각 부락주민 300영병과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4월 4일 다수군중과 추풍령 헌병파견소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3개월 형을 선고 받고 경성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또 이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도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7) 허 량(許 樑) 1895(高宗32)~1935
허랑은 영동군 심천면(深川面) 마곡리(麻谷里) 사람으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그는 1919년 3월 27일 육창주(陸昌柱) 허상기(許相其) 김용이(金龍伊) 등이 옥천면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수많은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이날 우연히 이원 장터에 들른 그는 자신도 대한의 국민으로서 독립만세 시위대열에 가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군중의 앞에 서서 헌병대로 달려가 창문과 담장을 부수며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허상기 육창주 김용이와 함께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혔으나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와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자 탈출하여 다시 군중을 지휘하였다. 그는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말뚝을 뽑아 헌병을 구타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이 해 6월 28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요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고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追敍 되었다.
(28) 이건양(李建陽) 1895(高宗32)~1963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로 영동군 학산면 서산리 사람이다. 양봉식 등과 학산면 장터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1920년 4월 9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되어 1977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29) 안병문(安秉文) 1897(光武1)~1922
안병문은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에서 광무1년(1897)에 태어났다. 매곡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옥전리에 사는 안준 안광덕 장복철 신상희 등과 밤을 세워가며 구국의 길을 의논하고 있던 중, 안광덕이 서울에 다니러 갔다가 그 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 한 통을 몰래 휴대하여 가지고 옴으로서 비로소 구체적인 만세운동 계획이 세워졌다. 4월 2일 오전 11시, 밤나무 묘포장에 작업하러 모이는 것으로 위장하고 10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계획대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행진에 들어 갔다. 이들은 거리에서 한동안 시위행진을 벌린 다음 매곡면사무소로 가서 면장을 비롯한 면직원들을 앞세우고 대한의 민족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독립운동 행사에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연설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시위 행열의 인원이 늘었다. 그리고 거리로 진출하여 많은 면민들을 참가 시키어 당당하게 황간을 향하여 행진해 갔다. 이에 겁을 먹은 일본 수비대와 경찰대는 황간 들머리에 집결하여 이 행열을 막아내기 위해서 삼엄한 방어진을 치고 있어 시위행열은 부득이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4월 3일 그들을 비롯한 남은 동지 11명은 다시 매곡면사무소 앞에서 8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동지 3명이 체포되었고, 군중은 강제 해산 되었다. 4월 6일 그를 비롯한 남은 주동자들은 부락마다 다니면서 추풍령으로 밀고 들어갈 것을 설득하여 오전 10시경 다시 매곡면사무소 마당에 700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른 다음 바로 추풍령으로 갔다. 그러나 일본 앞잡이의 밀고로 미리 출동한 무장 헌병의 발포로 시위군중은 해산 당하고 그를 비롯한 안준 신상희 장복철 김용선 이장노 장출봉 김용문 등 8명이 체포 구금되었다. 이 때 체포된 그는 이 해 5월 3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3개월의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30) 안광득(安光得) 1897(光武1)~1933
일제 때의 독립 우동가로서 일명 광덕(光德)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3일 밤에 매곡면 옥전리와 노천리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튿날 4월 4일에는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면사무소로 가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독립만세를 부른 후 추풍령 헌병 파견소로 몰려가서 시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 2개월 헝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7월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31) 이진국(李鎭國) 1898(光武2)~1969
일제대의 독립 우동가로서 1919년 3월 30일 양산면 가곡리에 사는 인천이씨들이 주동한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양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여 학산 장날에 학산으로 몰려가 도로공사 작업인들과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2년에 建國勳章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32) 이낙연(이낙연) 1899(광무3년)~1919
일제 때의 독립 우동가로서 영동군 양산면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양산면 가곡리에 사는 인천이씨들이 주동한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양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여 학산 장날에 학산으로 몰려가 도로공사 작업인들과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하였다. 1968년에 建國勳章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33) 남도학(南道學) 1900(光武4)~1969
일제대의 독립 우동가로서 일명 기언(其彦)이라고도 한다. 1919년 4월 2일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및 옥전리 일대에서 안준 등과 같이 독립만세운동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6일 다수군중과 추풍령 헌병파견소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2개월 형을 선고 받고 경성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또 이 해 5월 3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1년 형을 석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9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면민 일동이 장례를 치러주고 그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 3월 1일에 31독립운동 의거 기념비를 매곡초등학교 교정에 세웠다. 지금은 그 비를 학교 앞 도로변으로 옮겨 세웠다. 1983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34) 서영석(徐泳奭) 1925(光武3年)~1963
일제대의 독립 우동가로서 영동군 매곡 사람이다. 1941년 5월 일본 대판에서 정덕수(丁德秀)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 결사인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당원을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고 활동하던 중 1941년 10월 조선학생 일제 검거 때 동경으로 피신했다. 그 후 1943년 대판에서 나머지 동지를 규합하라는 장덕수의 옥중 지령을 받고 다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44년 8월 27일 대판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되자 동 9월 15일 미군 맥아더 사령부의 정치범 사면령에 의해 출옥하였다 1977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35) 오용수(吳龍洙) 1922~
일제대의 독립 운동가로서 1922년 11월 18일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廣坪里)에서 태어났다. 그가 배움의 길을 택하여 공부에 전력을 다하려고 할 즈음 일제는 한국민에게는 고등교육의 길을 봉쇄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사범학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학교로서 우수한 학생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일제의 교육 방침에 그대로 승복 추종한 것은 아니어서 한국학생들 사이에는 민족정신의 계승과 그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는 항일의식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지하 써클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 10월 초순,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 제7회 학생들이 왜관(倭館) 작업장에서 저항하다가 퇴학 또는 정학 당한 상태를 보고 제8,9회 학우들이 대구 충령탑 부근에 모여 철야 토론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왜관에서의 저항을 계속 계승해 나가자고 협의하고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이 때 그는 대구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같은 학교 학생 박효준(朴孝濬) 이태길(李太吉) 강두안(姜斗安) 유흥수(柳興洙) 문홍의(文洪義) 등과 함께 독서회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예활동을 통하여 실력배양을 도모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독서회는 후에 문예부로 발전, 연구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1941년 2월 독립 쟁취를 위한 각자의 실력배양과 독립운동의 전개 및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유능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같은 학교 교우인 임광 강두안 이태길 박효준 박찬웅 등과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서 그는 정치경제부 책임자로 뽑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고 이를 실천하기위한 지하운동(地下運動)을 전개하였다. 첫째 매 10일마다 각목 연구사항 발표, 둘째 각 부문별로 하급생을 포섭하여 지도, 양성, 셋째 졸업 후 우수학생 발굴 및 특수 지도 실시, 넷째 졸업 후에도 활동사항을 월 1회씩 보고, 다섯째 기타 배일사상 및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개몽 활동 전개 등의 실천항목을 설정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해 3월에 졸업한 후 황간 남성국민학교에 재직하면서 같은 학교 하생 중 김영이(金榮二) 유상환(陸象煥) 박희이(朴喜二) 등 3인을 선정하여 특별지도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아울러 일반 학생들에 대한 민족의식 및 배일사상 고취를 위한 지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밀결사(秘密結社) 및 지하활동이 누설되어 이해 8월 23일 체포되었다. 2년 3개월간의 예심기간을 거쳐 1943년 11월 30일 일본육해군형법(日本陸海軍刑法) 및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2년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 되었다.
(35) 정원택(鄭元澤) 1924~1992
본관은 영일정씨로 영동군 양가동에서 태어났으며 1943년 10월 일제 때 징병에 끌려가 중지파견일군남경지구(中支派遣日軍南京地區)에 배속되어 있으면서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래서 광복군에 입대하기위하여 탈출을 시도했으며 중국군 유격대에 인도되어 1945년 4월광복군 총사령부 토교대(土橋隊)에 편입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에 이르기까지 4개월간을 복무하여 특수임무 등을 수행하였다. 1990년 7월에 建國勳章 愛族章이 추서(追敍) 되었다.
5. 抗日 獨立運動 記念碑 및 銅像 寫眞
*이건석 의사(황간역) 31운동 기념비(신-매곡면)
31운동 기념비(구-매곡면)) 31독립의거 기념비(매곡)
31 독립의거 기념비(주곡리) 7지사 독립만세 운동비
영동읍 31운동 기념비(동아일보 건립)
송병순 동상(31 운동 순절)
6. 나가는 말
충북 최남단 백두대간 추풍령과 괘방령 우두령에 삼도봉이 있어 충청북도 경상북도 전라북도 삼도문화(三道文化)가 융합(融合)된 정기를 이어받고, 비단같이 곱고 잔잔한 금강(錦江)에서 슬기를 배우고 익혀 이 고장을 빛낸 역사의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에서 온다는 말을 실감 나게 한다. 우리고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토(國土)를 방위(防衛)하기 위하여 시석(矢石)과 창검(槍劍)이 빗발치는 전쟁(戰爭)에서 목숨을 초개 같이 던져서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충신열사(忠信烈士)가 잠든 고장이고 장강대해(長江大海)같이 왕양(汪洋)한 문장(文章)으로 현란(絢爛)한 문사(文思)를 펼쳐 문명(文名)을 중외에 떨친 학자를 비롯하여 국난(國亂)에 향토수비군(鄕土守備軍)의 의병(義兵)을 자초(自招)하여 싸우다 옥고(獄苦)를 치른 업적(業績)과 정신(精神)은 우리고장의 전통(傳統)이며 뿌리이다.
우리고장이 동학란 의병의 활동기록이 상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보은에서 시작된 동학혁명군(東學革命群)의 세력(勢力)이 전라도(全羅道)로 확산(擴散)하려면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중요한 진로(進路)였을 것이 틀림없어 많은 인물이 참여(參與)했을 것으로 본다.
한말 항일 운동으로 항거한 인물이 어느 고장 못지않게 많으나 그 후손의 관심여하와 열의에 따라 잘 알려진 의사가 있는가 하면 이번 조사를 통하여 그 훌륭한 업적이 묻혀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는 분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되어 안타까웠다. 물론 애국지사의 업적을 경중으로 순위를 론(論)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를 관장해야할 기관에서는 묻혀진 인물열사 및 애국지사에 대하여 무관심하니 더욱 안타깝다. 항일운동을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자살 자결(自殺 自決)을 하여야 더 애국이고 수년간 옥고를 치루며 육체적(肉體的) 정신적(精神的) 고통을 견디며 애국한 것은 소홀(疎忽)이 여겨지는 사회풍토가 원망(怨望)스럽고 무전유죄(無前有罪)와 무관유한(無關遺恨)한 후손들만의 후환(後患)이다.
홍 진(洪 震) (1878(高宗15)~1946)은 영동읍 출신으로 본명은 면회(冕熹) 호는 만오(晩唔) 이며 홍재식(洪在植)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시(詩) 서(書) 문예(文藝)에 뛰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또한 천성이 효성스러워 편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고 나라 일을 지켜보며 옳고 그름을 지적하였다. 일찍이 항일사상을 품어 숨어서 동지들과 교류하였고, 관직에서도 어느 관료 못지않은 고위직에서 근무하며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요직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분으로 애국지사 중 가장 훌륭하고 큰 업적을 남긴 분으로 알게 되어 이번 발표문에 기록하였으니 탐독하여 우리고장 항일 독립투사로 홍보하고 우리 고장의 후손들은 그 업적을 길이 본받아 향토 발전(愛鄕)과 나아가 국가발전(愛國)에 이바지하기 바란다.
* 참고 문헌
영동 군지 - 2004년 발행 동학농민전쟁 사료총서
영동향교지 - 1990년 발행 영동군 애국지사 모음집
영동군 향토사료3집 “향토지”(인물편) - 1992년 발행
영동군 “향토연구” 3호 5호 6호
한국 31운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