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둘째 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4월 07일(주일)
고린도전서 15:35-49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삶의 변화다!”
봄꽃들을 자세히 보세요.
참 예쁘지요.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했어요. 오래 자꾸 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거예요. 그러니까 꽃에 물도 주고 말도 걸잖아요. 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밝아지고 환해져요. 꽃에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꽃을 보면서 또 이런 생각이 들어요.
“비 내리고 바람 불면 금방 꽃이 질 텐데 어떻게 하나?”
꽃은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특히 연두색 잎사귀가 나오기 전 피는 봄꽃들은 더 예뻐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땅에 떨어진 꽃들은 화려하고 예뻤던 만큼 실망도 크지요. 사람들이 외면해요. 땅에 떨어져 시들고 색바랜 꽃은 죽은 거예요. 저렇게 죽으려고 며칠 동안 그토록 향기를 내고 온갖 자태를 뽐냈을까 싶으니 괜히 코끝이 찡해 와요.
시들고 추해졌으면 그만인데 왜 마음이 빼앗길까요?
자기 투영이지요. 땅에 떨어져 시들고 추해진 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나이 들어 늙고 병들면 죽겠지!” 하는 심리투영인 셈이지요. 꽃과 나무들은 이렇게 자연적 순환을 통해 꽃 피고 지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몸과 육신도 꽃과 나무처럼 꽃 피고 지고를 반복하지 않잖아요. 물론 영원이란 시간으로 보면 인간의 육신도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그러나 지금 ‘나’라는 실존적 존재는 단 한 번 죽으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삶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코헬렛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죽음은 삶을 단단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만큼 지금 주어진 삶이 소중하고 고귀한 거예요. 지금 맡겨진 삶이 깨우치고 새롭게 변한 삶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게 뭐 있겠지요.-(『지혜란 무엇인가』, 송민원 지음, 감은사, P.231)
지금 내 삶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바울의 표현대로 지금 우리는 내 삶 속에서 예수가 일어나고 드러나는 부활의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예수가 일어나고 드러나는 부활의 삶,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아는 반드시 죽어야 할 거예요. 죽어야만 사는 게 바로 부활의 삶이에요.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비결은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내 자아가 죽고 변화되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렇습니다. 씨앗은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만 거기서 새싹이 나와요. 죽지 않은 씨앗은 알갱이 그대로예요.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지요. 이게 자연의 순리예요.
희한한 건 바로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아가 죽어야 삶이 변화됩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전도서 저자가 말하는 ‘헤벨’(הֶבֶל)인 거예요. 곧 헛된 거예요.
그러면 헛되지 않고 영원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가 죽어야 해요.
요한복음에 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여기서 ‘생명’으로 옮긴 헬라어 '프쉬케'(ψυχη)는 ‘영혼’, ‘내적 자아’란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리다’라는 뜻의 헬라어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는 멸망하다, 잃다, 파괴하다, 죽다, 손상시키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말이 됩니다. 반면 자아를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보전, 곧 지킬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자기애에 집착하는 사람은 헛된 삶이 되고 자기를 채찍질하고 성찰하는 사람은 쓸모 있는 영원한 삶을 산다는 거예요. 영원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매 순간을 소중히 살라는 말이지요. 날마다 자아를 다스리며 사는 거예요. 바울의 말로 하면 매일매일 내 자아가 죽어야 영생(永生)하는 거지요. 말하자면 날마다 내 삶 속에서 예수가 일어나고 드러나는 부활의 삶을 사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죽어 있는 자들의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네크로스/νεκρος)은 곧 ‘죽어 있는 자들’입니다. 성서는 죽어 있는 자들을 ‘죄인’(엡 2:1)이라고 말해요. 본문의 초점은 죽어 있는 자들이 죽느냐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없다(12절)고 말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있다고 줄곧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바울에게 이런 물음을 제기했을 거예요.
“어떻게 죽어 있는 자들이 일으켜지며(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종류의 몸으로 옵니까?”(35절/표준새번역)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포스/Πῶς)에 있어요. 이를테면 죽어 있는 자들이 일으켜지는 구체적인 방법을 물은 거예요.-(『부활되어야 할 부활』,강일상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P.129)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어떤 몸으로 옵니까?“ 물었던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흔히 생각하는 신체적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뒤에 나오지만, 바울은 자연의 변화, 곧 몸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할 뿐이에요.
어떻든 바울은 물음을 제기한 이들에게 참 어리석다는 뜻으로 ”어리석은 자여“ 꾸짖고 있어요. 그러면서 바울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36절)고 단호하게 잘라 말해요. 이를테면 죽어 있는 자들에게 죽으라는 거예요. 죽어야만 일으켜진다는 말이지요. 바로 이 문제에서 오해가 생기게 된 거예요.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사후(死後)의 부활로 오해를 낳은 거지요.
그럼 다시 35절의 물음을 곱씹어 봅시다.
”어떻게 죽어 있는 자들이 일으켜집니까?“
여기서 바울은 ’어떻게‘에 방점을 두고 답하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은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죽지 않으면 살려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죽어야만 일으켜지고 살려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옵니까?“(35절), 이 잘못된 번역이 마치 죽은 자들이 죽은 뒤에 어떻게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지를 말하는 것처럼 들리게 했어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중요하겠지요.
35절 질문에서 ’어떻게‘란 말은 일으켜지는 방법을 물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말 성서는 마치 죽은 뒤의 상태를 묻는 것처럼, 번역한 거지요. 죽어 있는 자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번역했으니 오해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지요.-(『부활되어야 할 부활』, P.131-132)
’다시 살아나다‘로 옮긴 헬라어 에게이로(έγείρω)는 현재 수동태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일으켜지다‘에요. 죽어 있는 자들이 스스로 일으켜질 수 없잖아요.
그래서 35절의 본래 의도는 ’어떻게 일으켜지는지‘를 묻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수동태로 묻지 않고 ’다시 살아나다‘ 능동태, 곧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 묻고 있으니 누가 읽어도 사후의 부활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마치 죽은 뒤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 거지요.
사실, 36절에서 바울은 질문에 대답을 씨를 심는 파종에 비유했어요. 특히 ’당신이 심는 씨‘라고 했으니 더욱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심은 씨가 죽으면 일으켜진다고 하니까 죽은 뒤의 부활로 오해의 소지를 남겨놓은 겁니다.
그런데 36절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이 비유적으로 설명한 씨를 ’심는다‘(스페이로/σπείρω)는 말입니다. 바울은 질문에 대답을 단순히 씨를 심는 파종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죽지 않으면 살려지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오늘 본문의 열쇠는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바울은 본문 전반부(35~41절)에서 파종 이야기를 하고, 후반부(42~49절)에서 ’심어져‘, ’일으켜진다‘는 말로 반복하고 있어요.
42절 하 반절을 자세히 보세요.
”멸망 안에서 심어져 불멸 안에서 일으켜진다.“
’심어져‘, ’일으켜진다‘는 말이 44절까지 반복해서 이어지고 있거든요. 바울은 ’심는다‘는 말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 거지요. 이 말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와 같은 겁니다.
하여 바울은 3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심는 게 생겨날 몸이 아니라 밀이나 어떤 곡식이든지 씨앗을 심는 거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수박을 얻으려면 수박씨를 심은 것이지 수박을 심은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장차 생겨날 몸인 수박을 얻기 위해 수박씨를 심는 거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수박씨를 심었는데 어떻게 씨와 전혀 다른 형태의 수박이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겁니다. 곧 수박씨도 죽어서 수박이 되었다는 거예요. 수박씨가 죽지 않고는 어떻게 수박이 될 수 있겠느냐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바울은 죽어 있는 자들의 죽음을 심어진 씨의 죽음에 빗대어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거예요. 죽어 있는 자들, 곧 죄인이 죽지 않고서 어떻게 일으켜지기를 바랄 수 있으며,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그 몸, 곧 형체를 주시는 분은 누굴까요?
그렇습니다. 몸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몸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몸의 존재가 다양함을 설명합니다.-(『관주∙해설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 해설, 대한성서공회, P.283)
바울은 식물만을 예로 든 게 아녜요. 그는 ’모든 육체가 같은 육체가 아니다‘(39절) 하면서 동물까지 포함하고 있어요.
”사람들의 육체가 다른가 하면, 짐승들의 육체도 다르고, 새들의 육체도 다르고, 물고기들의 육체도 다르다. 하늘에 속한 몸들도 다르고, 땅에 속한 몸들도 다르다.“(39~40절)
여기서 바울은 ’육체‘(사르크스/σάρξ)와 ’몸‘(형체:소마/σŵμα)을 연결해 말합니다. 파종 이야기에서 ’씨와 몸‘(형체)을 연관시켜서 말하더니 동물을 예로 들면서 육체와 몸의 연관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을 비롯해 동물들의 생존 양태가 다양하다는 거지요. 그 생존 양태를 바울은 ’몸‘(소마/σŵμα)이라고 했어요. 게다가 그 몸들의 영광도 다르다(40절)고 하면서 ’몸‘과 ’영광‘(독사/δόξα)을 연관 지어 말하고 있어요.-(『부활되어야 할 부활』,P.135)
하여 해와 달과 별의 영광도 서로 다르다는 말과 함께 ”영광 안에서는 별이 별을 능가하기도 한다.“(41절)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게 이런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이 몸을 가진 육적인 존재라는 거지요. 다만 생존 양태, 곧 사는 모습과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요. 흔히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짐승 같다, 개만도 못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짐승은 본능에 따라 살지요. 반면 사람은 이성, 곧 생각하며 살아요.
때론 사람도 본능대로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욕심부리며 욕망에 따라 사는 걸 말해요. 사람이 생각 없이 자기 욕망에 따라 산다면 그야말로 ’육적인 몸‘(자연적인 몸)이지요. 이게 바로 육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바울은 육적인 몸을 죄의 몸(롬 6:6)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몸(롬 6:12)이요, 죽음의 몸(롬 7:14)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육적인 몸도 알고 보면 ’짐승 같은 삶‘과 차이가 없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 ’몸‘(소마/σŵμα)을 존재 양태, 삶의 방식, 또는 사는 모습으로 이해했어요. 그러기에 바울에게는 짐승 같은 삶, 육을 따라 사는 삶이 곧 ’몸‘이었던 거예요.-(『부활되어야 할 부활』, P.137)
그렇습니다. 욕심과 욕망대로 살면서 믿음을 얘기하고 예수를 거론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믿음은 경건할지 모르나 삶은 지극히 육적인 사람이 있어요. 한때 바울도 육을 따라 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율법은 신령한 줄 알았지만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왔다.“(롬 7:14)
그래요. 바울은 자기 속에서 온갖 ’탐심‘(貪心)을 본 거예요. 하여 바울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14/표준새번역)
구원을 갈망하던 바울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해요. 바울의 절규를 들으면서 바울과 우리가 겹쳐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온갖 욕망이 탐심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역시 육적인 몸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육적인 삶에 뼈아픈 깨달음이 없이는 영적인 삶은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단지 예수 믿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육적인 삶이 변화하여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영적인 삶은 변화된 삶을 말합니다. 죽어 있는 자들(죄인)의 삶이 변화하지 않고서야 영적인 삶이 될 수 없어요. 따지고 보면 육적인 몸도 죽어 있는 자들의 삶을 말하는 다른 표현인 거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36절에서 ’심는다‘(뿌리다)는 말을 하고선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다고 했으니 42절 이하도 그 의미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죽어 있는 자들이 일으켜지려면 심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42절의 ’심다‘는 말이 헬라어 원문에는 ’심어지다‘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또 ’썩을-것으로‘ 번역한 전치사 헬라어 엔(έν)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디에서 심어지고 어디에서 일으켜지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42절 하 반절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멸망(썩음) 안에서 심어져 불멸(썩지 않음) 안에서 일으켜진다.“
그래서 42~44절이 이렇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그(죽어 있는 자)는, 멸망 안에서 심어져 불멸 안에서 일으켜집니다. 치욕 안에서 심어져 영광 안에서 일으켜지고, 무력함 안에서 심어져 능력 안에서 일으켜집니다. 곧 자연적인 몸(프쉬키코스 소마/ψυχικός)이 심어져 영적인 몸(프뉴마티코스 소마/πνευματικός σŵμα)이 일으켜지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42~44절)-(『부활되어야 할 부활』, P.141)
그러면 여기서 누가 심어지고 일으켜진다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바로 ’죽어 있는 자‘입니다. 그렇게 심고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질문 속에 감추고 있어요. 그러니까 죽어 있는 자(죄인)가 멸망 안에, 치욕 안에, 무력함 안에 심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죽어 있는 자가 일으켜지는 것은 불멸 안에, 영광 안에, 능력 안입니다. 말하자면 심어지고 일으켜지는 장이 다르다는 거지요. 질적으로 다른 거예요.
그래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장도 무엇에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삶이 달리 평가되겠지요. 하여 45절에서 바울은 아담 안에서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놓으면서 바울은 그 존재 양태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아담 안의 삶을 멸망과 치욕과 무력함으로 말했고요. 그리스도 안의 삶을 불멸과 영광과 능력으로 대비시켜 놓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멸망과 치욕과 무력함 안에서 심어진다는 말은 아담 안에서 심어진다는 말입니다. 반면 불멸과 영광과 능력 안에서 일으켜진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켜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육의 몸으로 심어져 영의 몸이 일으켜진다(44절)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프쉬키코스 소마/ψυχικός)을 자연적인 몸이랄 수 있어요. 말하자면 자연적인 몸은 본능에 맡겨 사는 동물처럼 살아 숨 쉬는 생존 차원의 삶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첫 사람 아담의 삶이 그저 생존하기 위해 사는 삶을 산 거예요. 한 마디로 타고난 대로 산 거지요.
첫 사람 아담이 그렇게 살았으니 흙에서 나서 흙과 같은 사람(47절)을 살 뿐이지요. 흙의 사람 형상을 입었으니 또 다른 아담으로 살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육적인 존재로만 산다면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거예요. 욕심대로 산다면 짐승이나 다를 바 없겠지요. 이렇게 산다면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겠지요.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거예요.
육적인 존재로 산다면 멸망(부패), 치욕, 무력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전도서 저자가 말하는 헤벨입니다. 헛된 삶이지요. 그런 삶을 사는 한 아무리 천국 간다고 믿어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아무리 영생을 믿는다 해도 그리스도 안의 삶, 곧 불멸과 영광과 능력의 삶을 살지 못할 건 뻔한 거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생명을 주는 영, 곧 하늘 사람의 형상을 입은 예수의 몸으로 살아야 하고, 그 믿음을 삶으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적인 몸과 영적인 몸을 대비해서 멸망과 불멸, 치욕과 영광, 무력함과 능력 사이에서 어느 쪽의 삶을 살 것인지 우리에게 살피게 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멸망 안에서 심어져 불멸 안에서 일으켜지기를 간절히 바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자연적인 몸(육의 몸)이 심어져 영적인 몸이 일으켜지는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지금 우리 삶 속에서 다시금 일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그러고 보면, 바울이 본문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51절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비밀을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변화되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을 ’변화‘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의 변화가 비밀이라는 거예요. ’보십시오‘ 하고 환기(喚起)시키는 것은 깨달아야 할 비밀을 넌지시 제시한 거예요. 그게 바로 잠든 자들(코이마오/κοιμάω), 곧 죽어 있는 자들도 그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일으켜진다면 그들은 변화할 거란 뜻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잠든 자들, 곧 죄인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일으켜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입니다. 그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일으켜지면 삶이 변화되겠으나 그리스도가 일으켜지지 않으면 삶의 변화는 나타나지 않겠지요.
진정 변화하려면 육의 몸이 심어져 영적인 몸이 일으켜져야 하겠지요. 그렇게 심어져 일으켜지려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적인 몸(육적인 몸)이 심어져 영적인 몸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35절에서 물었던 ”어떤 종류의 몸으로 오는가?“에 대답인 겁니다. 죽어 있는 자(죄인)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일으켜지는 변화된 부활의 삶, 육적인 몸이 심어져 영적인 몸이 되는 변화된 부활의 삶을 바울은 오늘 아주 긴 호흡으로 말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죽지 않고는 살려지지 않습니다. 살려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날마다 죽기를 각오하는 결기 있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리라 봐요.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31절) 바울의 말처럼 우리도 날마다 죽으면서 사는 삶의 수행, 곧 날로 거룩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구원을 이루시길 빕니다.
날마다 죽으면서 사는 것은 예수님이 말하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과 같은 것입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가 헛되듯이 십자가 없는 부활도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해요. 그러니 죽지 않고는 살려지지 않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이 오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큰 울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벚나무 씨가 심어져 벚꽃이 되듯이 죽어 있는 자들이 심어져 그리스도가 일으켜져야 합니다. 육적인 몸이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야만 세월호의 아이들과 이태원의 젊은이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을까요?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죽지 않고는 살려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이는 삶이 아니라 살리고 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날마다 내가 죽지 않고는 그리스도가 일으켜지지 않습니다. 육적인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일으켜질 때야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삶, 곧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기도 / 살려주는 영이 되신 주님!
육적인 몸이 심어져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지기를 원합니다.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변화된 삶임을 깨달았으니 오늘 우리도 날마다 내 자아가 죽는 수행의 결기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