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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완 재
Ⅰ. 머리말
Ⅱ. 유교개혁운동의 시대적 배경
Ⅲ. 유교개혁운동
1. 이승희(李承熙 1847-1916)
1) 생애
2) 유교개혁사상
⸁ 공교교과론
⸂ 공교진행론(孔敎進行論)
2. 유인식(柳寅植 1865-1928)
1) 인물
2) 유교개혁사상
3) 개혁사상의 핵심
3. 이병헌(李炳憲 1870-1940)
1) 생애
2) 유교개혁운동
3) 금문학과 유교개혁운동
4. 송기식(宋基植 1878-1949)
1) 생애
2) 유교개혁사상
Ⅳ. 結語
Ⅰ. 머리말
본 논문은 구한말 격동기에 있어서 영남유학계의 유교개혁운동 전개의 실상을 서술하는데 목적이 있다. 서술에 앞서 특히 영남유학계라는 지역적 특성에 관하여 간략히 그 의미를 지적해 두고자 한다.
영남은 옛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천년의 도읍지의 고도로서 예로부터 그 찬연한 전통을 인정받아 왔거니와 조선조에 있어서도 그 전통의 맥이 뚜렷한 곳이었다. 고려가 망할 때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선산(善山) 금오산(金烏山)으로 돌아와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조선조 영남유학의 연원은 시작되었다. 길재의 문하에서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가 나고 강호의 아들로서 그 맥을 이은 점필재 김종직(焰畢齋 金宗直)이 나고 점필재의 문하에서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履 鄭汝昌),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고 그 뒤를 이어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과 같은 대유가 나고 다시 그러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조 유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영남유학은 그 연원이 절의(節義)의 숭상에 있었거니와 이 숭절(崇節)의 정신은 길재 이후 영남유학에 일관하는 전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정신은 임진난을 당해서는 의병활동으로서 나타나고 평상시에는 조선조 5백년에 걸쳐 항상 재야적 입장에서 대의(大義)를 표방하고 국가정책의 시비를 따지는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유교 정신이 국권상실이라는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대변란에 처해서 어떻게 대응하려 했던가?그 대응의 양상을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외래 사상을 야만시하고 전통을 묵수하려는 보수적 사상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전통사상을 무용시하고 외래사상의 수용에 급급하는 급진적 경향도 있었다. 이들 양극단적 사고와는 달리 전통을 중시하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적절히 변용된 모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중도적 사상도 없지 않았다. 이들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유교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교개혁운동은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에 있어서 영남유학정신의 필연적이고 정당한 발로라고 규정해야할 것이다.
Ⅱ. 유교개혁운동의 시대적 배경
유교개혁운동의 시대적 배경 및 그 원인을 두 방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원인(遠因)으로서 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대응하려는 중국 사상계의 영향이고 둘째는 근인(近因)으로서 국내의 절박한 상황이다.
먼저 원인부터 살펴 보자.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조류가 더욱 거세어져서 1840년 드디어 중국과 영국사이에 아편전쟁(1840-1842)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중국은 비참한 패배를 맛보고 남경조약을 통하여 홍콩을 영국에 할애하는등 무자비한 침략을 감수해야만 했다. 영국에 이어 불란서, 독일, 포루투칼, 스페인등 서구열강들이 앞다투어 동방경략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서세동점 앞에서 중국의 자구책(自救策)이 강구 되었다. 그 자구책에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어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강유위(康有爲 1856-1927)이다. 그는 변법자강(變法自强)의 기치를 내세워 중국의 유신(維新)을 강조했다. 그는 변법자강의 이론적 근거로서 공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존중을 제시하였다. 그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등의 저술을 통하여 요·순(堯·舜)시대를 이상시한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여러 편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인들의 위작(僞作)임을밝히고 공자의 진정한 사상은 {춘추}(春秋)에 있고, {춘추}에 숨겨진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종래의 복고적 중국역사관을 배격하고 점진적 발전사관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곧 공자의 진정한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공자의 탄생을 중국의 기원(紀元)으로 삼고 공자를 종교적 대상으로 숭배함으로써 유교를 종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강유위의 이러한 유교개혁운동은 그의 제자인 양계초(梁啓超)에 의하여 계승 강조되어 당시 중국사회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상황이 비슷했던 우리나라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다음에 유교개혁운동의 보다 직접적인 요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국내적 상황이다.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조류 가운데서 우리나라만이 예외일 수는 없었다. 중국,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에도 개항의 요구가 밀어 닥쳤다.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은 조선왕조 5백년의 말기적 현상으로 국가권력과 부(富)가 몇 사람의 척신 세도가들의 전유물이 되고 일반백성들은 빈궁의 극한 상황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高宗)을 왕위에 올리고 스스로 섭정이 된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쇄국정책으로 국력의 회복을 도모해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종3년(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고종8년(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고종12년(1875년) 운양호(雲揚號)사건 등 등을 모두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치아래 무력으로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된 그들을 우리의 빈약한 국력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애당초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고종13년(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원산항을 개방하게 되었으며 이어 1882년에는 미국, 영국, 독일 등과도 차례로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여 1905년(을사년)에 강압적인 보호조약을 체결하고 5년후인 1910년에 한ㅗ일 합방조약을 강행했던 것이다.
국권상실의 대변란과 서양근대문명의 유입을 통한 전통의식의 갈등이 유교개혁운동의 근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교개혁운동은 민족주체의식의 확립운동이며 나아가서는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이었다.
Ⅲ. 유교개혁운동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영남지역에서 유교개혁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유교개혁을 위한 문헌적 기록을 남긴 대표적 학자를 연령의 순서에 따라 그 인물과 사상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이승희(李承熙 1847-1916)
1) 생애
이승희는 1847년 2월 19일 한말(韓末) 영남의 거유이며 성리학의 대가이었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아들로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총명한 위에 가정에서의 훌륭한 교육을 통하여 진작 학문이 성취되어 경세(經世)의 꿈이 컸다. 1867년 21세때에 대원군에게 5조소(五條疏 - 1. 聖學 2. 戶籍 3. 田制 4. 選擧 5. 兵制)를 올려 경세의 뜻을 개진하였다. 1905년 59세에 을사보호조약이 성립되자 토역소(討逆疏)를 올려 보호조약에 조인한 역적 대신들을 참할 것을 요구하고 아울러 일본 사령부에 글을 보내 그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대구 경무서에 구류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이듬해 이등박문이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함에 다시 글을 보내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이 일로 다시 경무서에 구류되어 문초를 받았다. 1908년 62세때 부산을 떠나 배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구국활동을 벌였다. 여기서 이상설(李相卨) 안중근(安重根)등과 만나 구국의 방책을 강구했다. 1909년 64세에 중국 밀산부(密山府)에 광활한 황무지를 구입하여 산재한 한인(韓人)들울 집결 거주케하고 마을 이름을 한흥동(韓興洞)이라 하고 구국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이 때 그의 이름을 대하(大夏)라 고치고 대계(大溪)라는 그의 호를 한계(韓溪)로 고쳤다. 한편 당시 중국의 총통이었던 원세개(袁世凱)에게 글을 보내 한ㅗ중(韓ㅗ中)의 제휴를 구하였다. 1913년 67세 때에 밀산부로부터 안동현으로 옮겨 당시 강유위(康有爲) 주도로 조직된 중국의 공교회(孔敎會)에 호응하여 동삼성 공교회(東三省 孔敎會)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 해 북경에 가서 공교회 인사들을 만나 보고 1914년 그들의 요청에 의해 공교교과론(孔敎敎科論), 공교진행론(孔敎進行論) 등을 저술하여 유교의 개혁과 부흥을 꾀하였다. 그러다가 1916년 1월 28일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유교개혁사상
이승희의 저술은 방대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료총서} 제23으로된 {한계유고}(韓溪遺稿)는 활자본으로 총9책이다. 이승희는 한말 성리학의 대가인 한주(寒洲)의 아들답게 이학(理學)에 대한 조예가 깊고 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져 그의 저술은 전반에 걸쳐 도학적 풍미가 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대의 변천을 감안하여 유학의 개혁적 실천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유교적 전통의 범위 안에서 개혁하려는 온건한 개혁운동가이었다. 여기서는 중국공교학회의 요구에 응하여 저술한 공교교과론(孔敎敎科論), 공교진행론(孔敎進行論)을 중심으로 그의 유교개혁사상을 살펴 보고자 한다.
⸁ 공교교과론
공교교과론은 오덕(五德), 오륜(五倫), 육예(六藝), 사과(四科)의 4조목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론에서 유교의 교육이 시행되어 온 역사적인 사실을 삼황(三皇) 오제(五帝)로부터 하(夏) 은(殷) 주(周)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밝히고 공자가 역대의 사상과 교육을 절충ㇼ집성하여 새로운 교과론을 만들었음을 말하고 지금에 와서 공자교를 다시 밝히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사상 전통을 계승하여 교과를 확정해야 한다고 위의 4교과를 서술했다. 이 4교과를 차례로 밝혀 보면 다음과 같다
a. 오덕(五德)
오덕은 지(知), 인(仁), 용(勇), 경(敬), 성(誠)이다. {중용}(中庸)에 지,인,용을 3달덕(三達德)이라 하였는데 이승희는 이 3달덕에 경(敬)과 성(誠)을 첨가하여 오덕으로 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중용} 앞 부분에서 계신(戒愼), 공구(恐懼), 신독(愼獨) 등을 역설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경(敬)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용}의 뒷부분에 있어서 성(誠)을 강조하였으니 이 경과 성을 합쳐서 오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는 이 오덕을 곧 오성(五性)과 결부시켜 그 나타남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지(知)는 지(智)의 나타남이고, 인(仁)은 인(仁)의 나타남이고, 용(勇)은 의(義)의 나타남이고, 경(敬)은 예(禮)의 나타남이고, 성(誠)은 신(信)의 나타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오덕은 인성(人性)의 고유한 덕임으로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곧 공자가 평생 강조하고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교의 경전을 이 오덕과 결부시켜 설명하기를 {논어}는 인(仁)을 주로 하고, {예기}는 경(敬)을 주로하고 {춘추}는 의(義)를 주로 하고 {역}은 지(知)를 주로 하고 {중용}은 전체를 설명하되 특히 성(誠)을 들어내었다고 하였다. 오덕은 고유한 인성의 발로임으로 공자교를 세상에 밝히려 한다면 마땅히 오덕을 가르치는 것으로써 제1과목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b. 오륜(五倫)
오륜은 인간의 기본적인 상관관계를 말함이다. 즉 군신(君臣)관계, 부자(父子)관계, 부부(夫婦)관계, 장유(長幼)관계, 붕우(朋友)관계의 다섯가지 유형의 인간관계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 다섯가지 인간관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오륜사상은 유교의 고대이래의 사상으로서 존중되고 강조되어 왔다. 인간관계란 본래 상호적인 것임으로 오륜의 윤리도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무적(雙務的)인 것이다. 즉 부자관계에 있어서 [아버지는 자애하고 자식은 효도해야 하며](父慈子孝), 형제 혹은 장유관계에 있어서는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해야 하며](兄友弟恭), 군신관계에 있어서는 [임금은 의로워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하며](君義臣忠),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남편은 정당해야 하고 아내는 곧아야 하며](夫正婦貞), 붕우관계에 있어서는 [서로 신의가 있어야 하는 것](朋友相信)이다. 저자는 이 오륜의 덕을 효(孝), 충(忠), 제(悌), 신(信), 정(貞)으로 표현하였다. 윤리는 상호적인 것이라 하나, 윤리는 본래 질서를 뜻하는 것인데 질서는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따르는 것이 중요함으로 효ㅗ충ㅗ제ㅗ신ㅗ정으로 표현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군신간의 윤리는 역사적 실천에 있어서 신하가 임금에게 맹목적인 충성과 굴종을 일삼아 왔는데 그것은 잘못된 실천임을 지적하고 탕(湯) 무(武)의 혁명의 이론을 원용하여 임금이 임금노릇을 하지 못하면 임금일 수 없다고 하고 참다운 충은 올바른 임금에게 바치는 윤리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스승(師)의 위치에 관하여 특히 언급하였다. 옛날 도가 행하던 때에 있어서는 군(君)과 사(師)가 분리 될 수 없었으나 공자 때에 이르러서는 공자가 군주의 덕을 가졌으면서도 군주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스승의 위치에 그침으로써 비로소 스승의 도가 새로이 확립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승의 도는 넓은 의미에서는 붕우의 도와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승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제자들은 스승의 믿는 바를 배워 같이 믿게 되니 서로 신(信)으로 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우(師友)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되는 까닭은 윤리를 실천하는데 있음으로 공자 사상을 널리 펼치려고 한다면 오륜을 또 한 과목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c. 육예(六藝)
육예는 {주례}(周禮)에 규정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6가지이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갖추어야할 생활교양이었다. 저자는 기록하기를 주(周)나라 때 사람들은 6세에 수(數)를 배우고 10세에 예(禮)와 서(書)를 배우고 13세에 악(樂)을 배우고 15세에 사(射)와 어(御)를 배웠다고 한다. 이러한 배움은 생활과 직결된 것이었는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 학문이 이론화 되고 형이상학화 되어 학문과 생활이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예의 교과목을 설정하여 실질적인 생활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 이승희의 주장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육예의 명명(命名)과 현실적 기물이 이미 달라 졌으니 어찌 해야 할 것인가?예를 들어 말하면, 육예의 사(射)는 활과 화살을 사용했고 어(御)는 말을 모는 것이었는데 지금에 있어서는 사(射)에 해당하는 기물은 총이고 어(御)에 해당하는 것은 버스나 택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희는 오늘날에 있어서 사와 어는 바로 총과 버스 혹은 택시를 조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나 어 외에 예ㅗ악ㅗ서ㅗ수도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용어로 탈바꿈시켜서 원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d. 사과(四科)
사과는 {논어}에 나오는 분류교과로서 즉 덕행(德行), 정사(政事), 언어(言語), 문학(文學)이다. 이것은 공자가 그의 제자들을 능력에 따라 분류하면서 사용한 교과이다 {논어}에는 또 공자가 제자들을 교육한 내용을 문(文) 행(行)충(忠) 신(信)의 4가지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 두 분류는 그 내용에 있어서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희는 이 두 분류를 4과라하여 공자학의 교육을 위한 교과의 한 조목으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그는 4과의 의미내용을 대단히 넓게 이해 적용하였다. 즉 덕행이란 오덕(五德) 오륜(五倫)을 실천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고 정사는 국가사회와 관련되는 모든 학문ㅗ정치ㅗ법률 그리고 물리(物理)에 관한 학문까지도 이에 속하게 하고 언어는 부자형제등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비롯하여 크게는 국가사회의 법도 규정까지를 뜻하고 문학은 시(詩) 서(書) 예(禮) 악(樂) 나아가서는 역(易) 춘추(春秋)등 문자활동 전반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상이 이승희의 공교교과론의 내용이다. 그 내용을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전통사상에 의거하되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오덕에 있어서 지ㅗ인ㅗ용에 경과 성을 첨가하여 새로이 구성한 점과 오륜에 있어서 사(師)의 위치를 특히 강조하여 의(義)의 측면을 강조한 점과 육예에 있어서 그 의미를 과학문명과 현대생활에 결부시켜 확대 이해한 점과 4과에 있어서 역시 그 의미를 현대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상적 기조는 한당(漢唐) 유학이나 송명(宋明) 유학의 틀을 벗어나, 공자의 사상에로 되돌아가 유학의 근본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찾아 볼 수 있고 또 그 근본정신을 현대에 활용 실천해 보려는 노력을 찾아 볼 수 있다.
⸂ 공교진행론(孔敎進行論)
공교진행론도 4개조항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즉 ⸁학궁(學宮) ⸂학원(學員) ⸃교과서(敎科書) ⸄교규(敎規)의 4조항이다. 이는 공자학의 보급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이다. 이를 각 조항을 따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학궁
먼저 중국고대의 학교제도를 살펴 보고 주(周)의 학제의 완비함을 소개하였다. 즉 도성(都城)에는 학(學)이 있고 주(州)에는 서(序)가 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이(里)에는 숙(塾)이 있었고 교육의 내용으로는 어린이의 학(小子之學) 어른의 학(大人之學) 맏아들의 학(胄子之學) 제후의 학(벽雍之學) 여자의 학(公宮之學) 등의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교제도를 본 받아서 그는 주장하기를 도시에서 시골에 이르기까지 10호(戶)로써 한 려(閭)로 하고 10려(閭)로써 한 이(里)로하여 이(里)마다 한 숙(塾)을 세우되 크고 적은 두 숙사로 하고 따로 여자들을 수용하는 숙사를 두도록 하였으며 10리(里)를 한 방(坊)으로하여 방(坊)마다 한 교(校)를 두어 그가 주장한 공자교의 교과목을 가르쳐야한다고 주장하였다.
b. 학원
옛 제도에 [사람이 7세까지는 가정에서 부모의 가르침을 받고 8세가 되면 스승을 따라 배우고 10세에는 모두 학교에 들어가고 15세가 되면 그 지능의 정도에 따라 사농공상의 각 직업으로 구분되었다] 하고 이를 본받아 호적을 조사하여 8세에서 10세까지 모두 학교에 들어가도록 하고 이에 따르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 부모를 처벌하여 천하사람으로 하여금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c. 교과서
그는 종래의 유교교과서로서 [이아(爾雅)는 초학들의 습자서이고, 곡례(曲禮)는 소학과(小學科)이고, 내칙(內則)은 여학과(女學科)이고, 주례(周禮)는 대학정과서(大學政科書)이고, 의례(儀禮)는 예과서(禮科書)이고,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는 문학과서(文學科書)라고 규정하고 오늘의 교과서로는 사서(四書) 오경(五經)을 기본으로하고 그 위에 현대적인 사실과 규범을 옛날의 곡례(曲禮)나 소학(小學)의 예에 따라 편찬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d. 교규
동양의 전통교육에도 필연 일정한 교규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에는 전하는 것이 없고 서양의 학교교육에 그 규정이 극히 잘 되어 있으니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하고 4가지 점을 지적하였다. 첫째, 시분(時分)이다. 공부하거나 놀거나 모두 일정한 시간에 따라 그 행동을 같이 해야한다. 둘째 분반(分班)이다. 동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한 반으로 하되 사람이 비록 많을지라도 3ㅗ4반을 넘지 않도록하여 번거로움이 없이 공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셋째 분과(分課)이다. 배우는 과목을 윤리, 물리, 역사, 지리, 산수, 습자, 영가(詠歌)등 과목을 차례를 정하여 번갈아 공부하도록하여 공부에 싫증을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넷째 한년(限年)이다. 모든 과목을 년수에 따라 그 과정을 정하여 그 과정을 마친 사람은 졸업을 시켜 그 배운 바를 사회에 써 먹도록 한다.
이상과 같이 교과진행의 방법을 제시하고 그는 다시 이를 실천함에 있어서 3가지 난점이 있음을 걱정하였다. 첫째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신학문은 그 지취가 같지 않은 점이다. 동양의 전통학문은 윤리도덕을 주로하고, 서양의 신학문은 대상세계와 공리를 주로 한다. 그러나 윤리도덕은 복심(腹心)에 비유할 수 있고 대상세계와 공리는 수족(手足)에 비유할 수 있으니 두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 완벽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교과를 진행할려면 국가재정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공정한 정치를 행하여야 한다. 셋째 전통적인 고전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위에 복잡한 신학문을 아울러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점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서 그 교재를 알기 쉽게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승희의 유교개혁론은 유교교육의 교과내용과 교육시행의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과내용은 대체로 정통유교의 윤리덕목을 주축으로 하되 그 나름대로 취사선택을 통하여 교과내용을 구성하고 전통유교와 현대사조를 융화시켜 보려는 노력과 고충을 엿볼 수 있다. 교육시행의 방법에 있어서도 현대교육방법의 장점을 십분 수용하여 전통적인 교육방법과 조화시키려고 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2. 유인식(柳寅植 1865-1928)
1) 인물
유인식은 1865년 5월 3일 경북 안동 월곡면(月谷面) 삼산리(三山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성래(聖來) 호(號)는 동산(東山)이었다. 그는 나면서 재주가 뛰어나고 천품이 남다른 바가 있었다. 7ㅗ8세때 역사를 배우다가 탕(湯)임금과 무왕(武王)이 걸ㅗ주(桀ㅗ紂)를 내쫓음으로써 성인(聖人)이라 일컬어진다고 함에 이르러 [임금이 되어 백성을 학대하면 마땅히 쫓아내어야 할 일이거늘 이 일을 했다고 해서 어찌 성인이라고 하는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서파 유필영(西坡 柳必永)으로서 당시 영남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유학자였다. 그러한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학문은 진작 크게 성취되었다. 1893년(癸巳年) 과거에 응시하려고 서울에 올라갔다가 과거시험의 혼탁한 실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나라구할 뜻을 길렀다. 1895년(乙未年) 일본놈들이 민비(閔妃)를 살해하자 석주 이상희(石洲 李象羲)등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의 제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3년 (癸卯年) 서울로 올라가 위암 장지연(韋菴 張志淵)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등과 시국을 논하고 교육을 통하여 민지를 개발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 결론 내리고 서양의 서적들을 구입하여 서구 문물을 이해하기에 힘썼다. 1907년(丁未年) 석주 이상희(石洲 李象羲)와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설하고 한편 김후병(金厚秉) 하중환(河中煥) 김동삼(金東三)등과 협력하여 안동 임하(臨河)에 협동(協同)학교를 설립하여 민중교화에 앞장섰다. 그는 노비들을 해방하고 적서의 구별을 없애고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하였다. 그는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와 협력하여 교육협회(敎育協會)를 창립하여 전국적으로 민중교화사업을 조직화하기에 힘썼다. 1920년(庚申年)에는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를 창립하여 빈민구제에 힘쓰고, 1921년(辛酉年)에는 안동에서 중학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그 이듬해에는 서울에서 민립대학(民立大學)기성회를 조직하여 기금조성을 위하여 전국각지를 순회하였다. 1927년(丁卯年)에는 권동진(權東鎭) 홍명희(洪命憙) 허헌(許憲)등과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여 민중의 결합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해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구국운동으로 일관된 생애였다. 그리고 그 생애는 그대로 유교개혁운동의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유교개혁사상
동산(東山)의 유고는 {동산문고}(東山文稿) 1책2권과 별책으로 된 {대동사}(大東史)가 있다. {대동사}는 단군이래 조선조 멸망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것이고 {동산문고}는 문집(文集) 체제로 편찬된 유고이다. {동산문고}의 내용은 모두가 구국운동과 결부된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 기록의 곳곳에서 전통적인 의식의 개혁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크게 보면 {동산문고} 전체가 유교개혁운동의 사상이요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걔혁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집약한 것이 있으니 곧 권2의 잡저(雜著)편에 수록된 [태식록](太息錄)이다. 동산은 [태식록]의 서두에서: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언론자유의 권리를 주창해서 우리 2천만 동포에게 호소하여 우리 2천만 동포가 정부의 꼭두각시가 되지 아니하고 옛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꼭두각시가 되지아니하고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옛것을 개혁해서 새로워지는 것이 그 방법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은 {춘추}이다고 했다. 이 글이 죄를 짓는지 아닌지는 내스스로 알 일이로다].
고 하였다. 이 글로써 보면 동산은 이 {태식록}이 자기사상의 핵심을 토로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이 곧 유인식의 유교개혁사상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바탕해 있고 이 기본사상의 바탕위에서 시대적 변천에 적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태식록}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정부의 부패를 논함(論政府之腐敗)이고 제2장은 유림의 부패를 논함(論儒林之腐敗)이고 제3장은 오늘날 민족의 책임은 전적으로 유림에게 있다(今日民族之責 專在於儒林)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제3장은 첫머리만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은 유실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알길이 없으나 내 생각으로는 [태식록] 다음에 실려진 [학범](學範)이란 글이 [태식록]의 제3장을 보충할만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학범]의 내용이 현대 유림들이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규범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태식록]과 [학범]을 중심으로 유인식의 개혁사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제1장 정부의 부패를 논함에 있어서 그는 10개 조목을 들고 있다.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임금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君權太重)
② 훈신ㅗ척신등 권력가진 신하들의 화(勳戚世臣之禍)
③ 당론의 화(黨論之禍)
④ 학자들을 지나치게 우대함(尊待學者)
⑤ 무력의 대비를 소홀히 함(疎武備)
⑥ 과거의 폐단(科擧之弊)
⑦ 사람을 씀에 문벌을 중시함 (用人尙閥)
⑧ 사대주의(事大主義)
⑨ 세금ㅗ호적등 부정확한 문서의 폐단(田賦民籍之弊)
⑩ 사무담당자들의 폐단(吏胥之弊)
이상 10개 조항을 제시하고 각 항에 대하여 자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임금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 (君權太重)
인간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군주가 존재하게 된 그 유래를 설명하고 동양 역사상 군권의 변천과정을 살피고 있다. 중국에 있어서도 요ㅗ순(堯ㅗ舜)의 당우(唐虞) 시대에는 서양의 민주주의와도 같은 선양(禪讓)제도가 행하여지다가 삼대(三代 즉 夏ㅗ殷ㅗ周)에 이르러 왕권이 부자상속으로 변하기는 했으나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왕권의 독재가 없이 민주적으로 행하여 졌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진시황(秦始皇)에 이르러 비로소 왕권의 전제가 시작되고 그 때 이래 군주의 전제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단군이래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군권이 그다지 뚜렷하지 아니하였고, 신라시대에도 세 성(姓)이 번갈아 가며 민주적으로 정치가 시행되었는데 조선조에 와서 특히 군권이 절대화되었다는 것이다.
유인식은 기록하기를 [아아, 나라는 백성들이 모여서 된 것이고, 임금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생겨난 것인데 임금이 어찌 나라를 자기의 것처럼 사유(私有)로 할 수 있으며, 임금이 어찌 백성을 억압할 수 있는가?]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이어서[서양의 민주공화정치나, 군주입헌정치제도를 취해야만 국가를 보호할 수 있으며 백성이 안전할 수 있다]고 하였다.
② 훈신, 척신등 권력가진 신하들의 화(勳戚世臣之禍)
훈신ㅗ척신의 개념을 규정하고 그 발생은 필연적인 것이나 문제는 훈신ㅗ척신의 권위가 세습화되고 권력이 독점화되는데 있음을 지적하였다. 조선조의 역사적 사실로서 이를 증명하고 중국역사에도 이런 폐단은 있었으나 조선조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특히 심하였음을 한탄하였다.
③ 당론의 화(黨論之禍)
당론의 발생과 그 전개과정 및 그 정도의 심함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그 막심한 피해를 한탄하였다. 그는 개탄하기를 [나라가 이로 인해 시들고 백성이 이로 인해 곤궁해지니, 참된 옳음도 없고, 참된 그릇됨도 없고, 참된 공론도 없고, 참된 의리도 없고, 참된 군자도 없고, 참된 소인도 없고, 참된 충신도 없고, 참된 역적도 없고, 국사에 공필(公筆)이 없고 야승(野乘)에 정론(定論)이 없어서 백세후에 그 득실(得失)을 찾고 그 가부(可否)를 정하려 해도 종잡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당론의 원인을 추궁하여 [당론의 근원은 허위에서 비롯되나니 허위의 풍습은 문치(文治)에서 말미암는다. 문치가 없으면 당론은 없게 된다]고 하였다. 이 말로 미루어 보면 유인식은 유교문화의 형식성을 크게 싫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이 당론에 깊이 물들어진 관념이 3백년간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혀 집집을 돌아다니며 설득한다 할지라도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학문을 배우게하여 그 생각을 근원적으로 씻어내고 비열한 습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분위기에 젖게하여 시야를 넓히고 가슴을 열게하여 세계의 대세를 이해하고 민족의 장래를 연구하게 해야한다]고 하였다.
④ 학자를 지나치게 우대함(尊待學者)
여기서 학자라 함은 특히 은일지사(隱逸之士)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잦은 사화(士禍)로 학문하는 사람들이 즐겨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지내기를 좋아함으로 이들을 천거하여 벼슬길을 주었던 것이다. [태식록]에서는 그 실효성을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초야에 묻혀 현실감을 결여하였음으로 실질적인 정사에 당해서는 무능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만 그 명성만을 존중하여 등용하는 것은 허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⑤ 무력의 대비를 소홀히 함(疎武備)
우리나라는 본래 웅혼한 기상을 가진 민족이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문치를 숭상하여 문약에 흐르게 되어 나라가 쇠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제도를 본받아 새로운 무기를 제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⑥ 과거의 폐단(科擧之弊)
우리나라의 인재등용의 길인 과거제도는 다만 경전의 어려운 글자나 해석하고 교묘한 표현으로 문장이나 꾸미는 기술을 시험하고 있으니 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널리 학교를 세워 인재를 교육하여 그 중 우수한 자를 등용하되 서양적인 제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⑦ 사람을 씀에 문벌을 중시함(用人尙閥)
조선조에 있어서는 신분의 차별이 엄격하여 신분이 낮으면 비록 우수한 재질을 타고 났을지라도 등용될 길이 없었으니 하루 속히 이를 타파하고 서양의 평등주의를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⑧ 사대주의(事大主義)
우리나라는 고래로 자주의 나라이고 강용한 민족이었는데 고려 중엽이래로 차차 국세가 약하여지고 조선조에 들어와 명(明)을 상전국가로 받드는 사대주의가 굳어졌다는 것이다. 명나라 연호의 사용 만동묘(萬東廟)의 설치등 완전히 민족적 주체성을 포기하는 막심한 사대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⑨ 세금ㅗ호적등 부정확한 문서의 폐단(田賦民籍之弊)
국가의 세금의 원천이 되는 토지의 장부와 국민들의 호적이 전혀 부정확한데서 온갖 폐단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권세가의 논밭은 옥토인데도 최하등의 토지로 대장에 올라 있고, 권세가 없는 빈궁한 사람들의 토지는 최하급인데도 최상급의 땅으로 기재되어 있어 그 세금이 따라서 불공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호적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병역을 치를 장정의 파악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폐단이 있다는 것이다.
⑩ 사무담당자들의 폐단 (吏胥之弊)
고려시대이후로 관공서의 실질적인 사무는 아전(吏胥)들이 담당해 왔는데 그들의 농간에 생겨나는 폐단이 막심하다는 것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은 실무에 어두웠음으로 실질적인 일선 행정은 아전들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제2장 유림의 부패를 논함에 있어서는 그 세목을 8개항으로 나누고 있다.
① 경학가(經學家)
② 과학가(科學家)
③ 유현숭배(崇拜儒賢)
④ 유원(儒院)
⑤ 경학가의 전제(經學家之專制)
⑥ 호가의 전제(豪家之專制)
⑦ 가정교육범위의 협착(家庭敎育範圍之狹窄)
⑧ 생재를 가벼이 여김(簿生財)
위 8개항을 제시하고 이에 대하여 자세하게 논술하였다. 그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경학가(經學家) ㅡ 조선조의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입과 귀로 그 뜻을 말하고 듣는데 그치고 그 근본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문을 세상의 구제와는 상관없이 홀로 즐기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통폐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陽明學)을 언급하면서 그 학문이 실천적이고 명백하여 우리나라 학자들의 지리부회(支離附會)한 경향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② 과학가(科學家) ㅡ 과학(科學)이란 과거를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조에 있어서 선비들이 출세하려면 반드시 과거를 통해야 함으로 과거에 출제되는 과목을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그 과목이 현실구제의 방략이 아니라 교묘한 표현방식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과거시험자체에 부정이 심하여 참다운 인재를 구할 수 없고 또 그러한 학문을 통하여 선비들의 기상과 습속이 퇴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③ 유현을 숭배함(儒賢崇拜) ㅡ 어진사람을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것(尊賢尙德)은 당연한 것이나 우리나라에서의 유현을 숭배함은 다만 그 계보, 학통, 문벌등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면에 치우쳐 있고, 또 그 숭상의 정도가 지나쳐 하늘처럼 떠 받들고 자신은 그 밑에서 노예처럼 굴종하는 폐단을 가졌다고 한다.
④ 유원(儒院) ㅡ 유원이란 선비들이 모이는 곳을 말한다. 선비들이 모이는 곳은 곧 서원(書院)이다. 서원이 설치된 목적은 훌륭한 선비를 양성하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도 그 근본목적은 망각하고 조상을 자랑하는 장소로, 그리고 상민(常民)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장소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⑤ 경학가의 전제(經學家之專制) ㅡ 학문이란 대자연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으로서 그 주장과 견해가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견해가 서로 다를지라도 상호존중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의 학문은 자기가 받드는 학문계통과 다른 학설을 주장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하여 조금도 용납하지 아니했다. 그리하여 학문은 더욱 좁아지고 백성들의 지혜는 막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⑥ 호가의 전제(豪家之專制) ㅡ 호가(豪家)는 세력있는 집안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이래로 지배계층 즉 호가가 생겨나 약한 아래계층을 괴롭혀 왔다는 것이다. 조선조에 와서는 사ㅗ농ㅗ공ㅗ상의 계층 중 사(士)계층이 곧 호가로서 다른 계층들을 마치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는 것이다.
⑦ 가정교육범위의 협착(家庭敎育範圍之狹窄) ㅡ 옛날 교육은 소학에서는 예ㅗ악ㅗ사ㅗ어ㅗ서ㅗ수의 육예(六藝)를 가르치고 대학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가르쳤는데 후대에 와서 과거로 인재를 뽑게 됨에 어려서부터 글자를 교묘하게 꿰어 맞추는데만 마음을 쓰고 나라와 백성의 안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⑧ 생재를 가벼이 여김(簿生財) ㅡ 조선조에서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사(士)를 높임으로써 농ㅗ공ㅗ상등 생산업을 경시하게 된 폐단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이상 8가지 조항을 서술하고 끝으로 총론허위(總論虛僞)라하여 특히 허위를 통박하고 있다. 조선조는 국가가 성립하던 초창기에는 모든 것이 진실되었으나 중기이래로 점차 허위로 기울어지게 되고 후기로 내려오면서 국가 전체가 온통 허위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실정과는 달리 서양의 모든 문화, 학술, 제도는 모두 진실되고 실질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허위를 극복하고 진실에로 돌아가려면 우리나라의 청소년으로 하여금 진실된 학문을 배워 진실된 인품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제3장 오늘날 민족의 책임은 전적으로 유림에 있다. (今日民族之責 專在於儒林)를 논함에 있어서는 그 머리말만 있고 내용은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이 내 생각에는 [태식록]에 이어 실려 있는 [학범](學範)이 바로 이 장의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태식록]의 제2장 제7항의 가정교육범위의 협착을 논한 끝머리에 [오늘날에 있어 사기(士氣)를 고취하고 인재를 양성하려면, 반드시 학문하는 범위를 넓히고, 정신을 발양하고 지절(志節)을 격려하고 널리 지식을 구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주장은 제3장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학범]이 곧 선비들의 학문하는 길잡이로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학범]이 [태식록] 제3장의 내용이리라 생각하고,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학범]은 15개 조항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 15개항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입지(立志)
② 양심(養心)
③ 윤리학(倫理學)
④ 공덕심(公德心)
⑤ 열성(熱誠)
⑥ 의력(毅力)
⑦ 함축(涵畜)
⑧ 치신(治身)
⑨ 독서(讀書)
⑩ 궁리(窮理)
⑪ 학문(學文)
⑫ 합군(合群)
⑬ 경세(經世)
⑭ 이상(理想)
⑮ 종교사상(宗敎思想)
이상 15개항을 제시하고 각 항에 대하여 자세한 해설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자세한 해설의 소개는 피하고 그 내용의 핵심만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① 입지(立志)는 삶과 학문에 대한 목적의식이 뚜렷해야 함이고 ② 양심(養心)은 마음공부를 통하여 정신적 주체성을 확립해야하고 ③ 윤리학(倫理學)은 서양학문에 심취하여 동양적 전통을 소홀히 할 것을 경계하여 전통적인 윤리적 미풍을 강조하고 ④ 공덕심(公德心)은 개인과 전체가 조화될 수 있는 길을 강조하고 ⑤ 열성(熱誠)은 {중용}의 성(誠)의 덕목에 열(熱)자를 더하여 참된 성을 간직하기를 강조하고 ⑥ 의력(毅力)은 강건한 정신력의 양성을 강조하고 ⑦ 함축(涵畜)은 포용력을 강조하고 ⑧ 치신(治身)은 자신의 한 몸을 올바르게 가눌 수 있겠끔 강조하고 ⑨ 독서(讀書)는 동서고금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기를 강조하고 ⑩ 궁리(窮理)는 학문이 관념에 그치지 아니하고 실질적인 이치를 추궁하도록 강조하고 ⑪ 학문(學文)은 자기 생각을 조리있게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자적 공부를 널리 하도록 강조하고 ⑫ 합군(合群)은 민족적 단결,단합을 강조하고 ⑬ 경세(經世)는 학문하는 목적이 나라를 바로잡는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됨을 강조하고 ⑭ 이상(理想)은 높은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져야 하고 ⑮ 종교사상(宗敎思想)은 유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신념을 가지고 보기를 강조하였다.
3) 개혁사상의 핵심
위에서 살펴 본 [태식록]의 내용을 통하여 동산 유인식의 유교개혁사상의 핵심을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의 유교개혁사상은 철학적 이론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현실적 측면에서의 개혁사상임을 지적할 수 있다. [태식록]의 제1, 제2, 제3장의 표제 즉 정부의 부패, 유림의 부패, 유림의 당면과제라는 표제가 그를 잘 실증해 주고 있다. 동산은 유교의 부패의 근원적인 요인이 허위(虛僞)에 있다고 보았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유림의 부패를 논하고 마지막에 이를 총괄하여 특히 허위를 매도했던 것이다. 이 허위라는 표현속에 내포된 의미에는 유교의 형식성, 명목성, 관념성등이 포괄되었다고 할 것이다.
둘째로 동산의 유교개혁사상은 실질적 실용적 입장, 한마디로 말해서 실학적 입장에 서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허위의 반대는 진실이다. 유교적 허위의 내용을 이루는 형식성, 명목성을 배제하고 유교의 실질성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동산의 개혁사상이다. 유교의 실질적이고 본래적인 목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자기 완성을 도모하고 나아가 타인의 완성을 도모하여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구현하려는 것이 유교의 이념이다. 따라서 동산의 실학적 개혁사상은 결국 유교의 본래적 이념에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셋째로 동산의 실용적 개혁사상은 시의성(時宜性)을 중시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태식록] 제3장의 서론에서 [교화(敎化)는 지도자가 위에서 베풀고 아래에서 따라가는 것이거늘 그대는 이 나라의 책임이 유림에 달렸다 하니 틀린 사실이 아닌가]하는 질의를 전제하고 그에 답하기를 [그대의 견해는 과거의 이론이고 나의 주장은 20세기 이후의 이론이다. 그대는 진화의 법칙, 민권의 이론을 알지 못하니 어찌 오늘의 실정에 맞을 수 있으리오?]라고 답하고 있다. 실질적인 추구는 시대의 변화와 환경의 조건과 잘 융화될 수 있어야 한다. 동산은 이점을 중시하였다. 이것이 또한 참된 의미의 실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로 서양문물의 적극적인 수용태도를 지적할 수 있다. [태식록]의 여러 조항에서 강조하였듯이 서양문물이 실질적이고 선진한 문화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서구찬양론자는 아니었다. [학범]의 윤리학의 조목에서 강조했듯이 우리의 전통적인 윤리사상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면 동서문화를 조화롭게 융화하려는 입장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입장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의 입장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도 할 것이다.
3. 이병헌(李炳憲 1870-1940)
이병헌(李炳憲)은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진암(眞庵) 혹은 백운산인(白雲山人)으로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이다. 청(淸)의 강유위(康有爲)를만나 그에게 영향을 받아 유교를 종교화하려는 공교운동(孔敎運動)을 벌이고 역시 강유위의 영향아래 금문학(今文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로는 1989년 6월에 발간된 상ㅗ하 두책의 이병헌전집이 있다.
1) 생애
1870년(고종7년) 음12월 18일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병곡면(甁谷面) 송평리(松坪里)에서 이만화(李晩華)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이정화(李正華)에게 양자로 들어 갔다.
1897년 27세때 면우(恔宇) 곽종석(郭鍾錫)을 사사(師事)하게 되고 그를 통하여 이승희(李承熙) 장복추(張福樞)등 당시 경북지역에서 들어난 학자들을 알게 되었다.
1898년 29세에 포천으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을 찾아 보았다.
1903년 34세 이후로 약10년간 자주 서울을 내왕하면서 변해가는 세계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을 소개하는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4년 45세때 4개월간 중국유람길에 올라 북경에서 공교회(孔敎會)에 접하게 되고 이어 곡부(曲阜)를 예방하고, 상해를 거쳐 홍콩으로 강유위를 찾았다.
1917년 47세에 두 번째로 5개월간 중국 여행길에 올라 다시 곡부를 예방하고 항주(杭州)로 강유위를 찾았다.
1918년 49세에 유교재건의 기지로서 배산(培山ㅡ산청군 단성면)에 문묘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1919년 50세때 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을 저술하였다.
1920년 57세에 배산서당의 문묘에 모실 공자상을 곡부에서 모사해 오고 강유위를 통해 금문경을 구해 오기 위하여 3월에서 4월에 걸쳐 세 번째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이 때 이후 금문경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하게 되었다.
1922년 53세때 역사교리착종담(歷史敎理錯綜談)을 저술 민족사관에 입각한 국사서술을 시도하였다.
1923년 54세에 배산서당의 문묘와 도동사(道東祠)가 준공됨에 네 번째로 중국을 방문하여 청도(靑島)에서 강유위를 만나 금문학에 관하여 논의하고 곡부에서 악(樂)을 배우고, 상해에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배산서당낙성 축사를 받아와 문묘에 모시고 석채례(釋菜禮)를 지냈다.
1924년 55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학계를 둘러보고 그 해 겨울 금문경학의 첫 저술인 [공경대의고](孔經大義考)를 완성하였다.
1925년 56세때 다섯 번째로 중국을 방문하여 강유위를 만나고 우리나라 독립지사들을 만났으며 [유교복원론] [공경대의고] [총서](叢書)등 그의 저술을 중국에서 출판하였다.
1926년 57세때 [시경삼가설고](詩經三家說考) [서경금문고](書經今文考)를 저술하여 강유위의 극찬을 받았다.
1927년 58세에 [예경금문설고](禮經今文說考)를 완성하고 그 이듬해 [역경금문고](易經今文考)를 저술하였다.
1938년 69세에 두 번째로 일본을 다녀 왔다.
1939년 5월 발병하여 와병중에 [5괘변의](五卦辯儀), [수화개벽설](水火開闢說)을 지었다.
1940년 1월 23일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유교개혁운동
이병헌의 유교개혁운동은 광범한 범위에서 진행되었다. 유교경전의 재해석, 유교의 종교화운동, 그리고 종교화의 실천등 다방면으로 시도되었다. 그런데 이병헌전집에서는 [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이라는 장편의 글이 있고 그 부록으로 [천학](天學)이라는 역시 장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이 그의 유교관 내지 유교개혁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이 글을 중심으로 유교개혁사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유교복원론]의 구성은
서언(敍言)
제1장 유교명의(儒敎名義)
제2장 유교성질(儒敎性質)
제3장 유교종지(儒敎宗旨)
제4장 유교윤리(儒敎倫理)
제5장 유교범위(儒敎範圍)
제6장 유교연혁(儒敎沿革)
제7장 유교전포(儒敎傳布)
제8장 유교교제(儒敎交際)
제9장 유교희망(儒敎希望)
제10장 유교결과(儒敎結果)
결론(結論)
이상과 같이 되어 있다. 그리고 부론으로 된 [천학]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서언(敍言)
제1장 천지형체(天之形體)
제2장 천지성정(天之性情)
제3장 천지주재(天之主宰)
제4장 천지변화(天之變化)
제5장 천지부위(天之部位)
제6장 천지감응(天之感應)
제7장 천지도수(天之度數)
제8장 천지원소(天之原素)
제9장 천지동정(天之動靜)
제10장 천지종시(天之終始)
통론(通論)
아래에 그의 글을 장을 따라 그 내용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먼저 유교복원론의 서언에서
공자의 도는 위대하고 완비한 것이어서 육합(六合)에 펼쳐도 부족함이 없고 만고(萬古)에 걸쳐 항상 새로운 것임으로 지공무사한 마음이 아니고는 이를 헤아릴 수 없음을 전제하였다.
제1장 유교명의
[유교는 어떠한 교인가?]라는 질문을 제시하고 이에 답하기를 [유교는 공자의 교이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어 질의하여 [유교는 위로 요ㅗ순ㅗ우ㅗ탕ㅗ 문무ㅗ주공ㅗ공자로부터 이래로 안자ㅗ증자ㅗ자사ㅗ맹자ㅗ정자ㅗ주자ㅗ퇴계ㅗ율곡에까지 이르는 것인데 이것을 유독 공자교라고 함이 타당한가?] 하고 이에 답하여 [위로 요ㅗ순ㅗ우ㅗ탕ㅗ문무ㅗ주공의 성인이 있어도 공자처럼 위대하고 완비하지 못하고 이래로 안자ㅗ증자ㅗ자사ㅗ맹자등 아성(亞聖)은 공자의 뜻을 계승하기는 했으되 그 규모가 적음을 면치 못하고 그 이래로 정자ㅗ주자ㅗ퇴계ㅗ율곡은 더욱 그 규모가 적어졌으니 유교의 전통에 있어서 공자만이 유일무이한 교주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문답식의 서술을 통하여 유교는 곧 공자교이고 공자가 진정한 교조임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그 공부하는 방식도 후세의 유교학자들의 학설에 구애되기보다는 곧 바로 공자사상에 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공자학의 공부는 새로운 계발이 아니라 복원(復原)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제2장 유교성질
본 장에서는 먼저 유교의 성격이 서방의 학문 및 종교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공자의 종교가적 규정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밝혔다. 그는 유교와 서방종교를 비교하여 서방종교가 천당과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데 반하여 유교는 현실적인 인간의 문제를 주로 취급하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또 서방종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학문적 성격이 있는데 반하여 유교는 아래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간에서는 흔히 공자는 현실문제를 중점적으로 취급하고 영혼문제와 내세의 문제에 대하여 초연 하였음으로 종교가라 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평론을 강하게 부정하고 경전의 표현을 인용하면서 공자는 신비적 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진 종교가였음을 역설하였다. 경전의 용어들이란 {역}(易)의 궁신(窮神), 진신(盡神), 살신성인(殺身成仁)등의 용례이다.
제3장 유교종지
본 장에서는 유교에 있어서 시대적으로 중시했던 점들 즉 머리를 기르고 긴 소매의 옷을 입었던 일,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높였던 일, 송ㅗ명(宋ㅗ明)대에 심성(心性) 이기(理氣)를 주로 문제 삼았던 일들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그 때 그 때의 유교의 종지로 여겼던 점을 문답식으로 질의 응답하고 공자의 교가 시공간을 통하여 완벽한 것임을 알고 시대에 따라 알맞게 시중(時中)의 도를 실천하는 것이 유교의 종지임을 밝혔다.
제4장 유교윤리
유교의 현실적 급무는 윤리의 실현에 있음을 밝히고 윤리의 핵심은 오륜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 오륜은 그 이치를 따라 적용하면 만세토록 불변의 원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윤리와 비교할 때 서양의 윤리는 상제(上帝)를 믿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요체로 삼음으로 신과 사람의 윤리를 다하게 되며 또 그 원리가 간명하여 행하기 쉽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함으로 전 지구상에 널리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윤리는 국가와 사회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공덕(公德)이 발달하여 현재 전세계를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에 반하여 유교의 윤리는 가정을 중시하고 친족을 중시하는 윤리이니 여기서 차별이 생기고 계급이 생겨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사회의 발전이 더디어지니 어찌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답하기를 유교의 윤리가 가족에서 친족, 친족에서 사회로 전개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실행의 순서일 뿐 결코 국가 사회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공자가 말한 {예운}(禮運)편의 [대동세계](大同世界)는 바로 전인류 사회를 하나로 보는 이상적 세계이요, 이상적 윤리임을 역설하였다.
제5장 유교범위
유교의 범위는 천지와 더불어 그 범위를 같이한다는 것이 그의 답이다. 그렇다면 유교는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가? 오늘날에 통용될 뿐만 아니라 만세에 통용된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유교에서는 전통을 존중하여 그것을 부연설명할 뿐 창작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지난 옛것을 존숭하고 지금의 것을 옳지 않다고 하니 이는 유교가 고금에 통용되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에 대하여 답하기를 새로운 창조는 전통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마치 봄이 겨울에 바탕하여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전통과 창조, 옛것과 지금의 것이 하나로 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유교는 현실적인 비근한 문제를 많이 말하였을 뿐 심오한 우주의 이치를 말한 것이 적으니 우주와 그 범위를 같이 한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데 대하여 공자는 사람의 정도에 따라 진리를 설명하였음으로 그러할 뿐 {중용}이나 {역}의 이론은 우주와 합치하는 범위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제6장 유교연혁
유교가 이 세상에 생겨난 것은 공자에서 비롯하는가?이에 답하기를 [위로는 그 시초를 알 수 없고 아래로는 끝나는 바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 유교를 공자교라고 해야 하는가?이에 대하여 [유교는 천리(天理)의 진체(眞體)인대 공자가 이를 교로서 확정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유교의 연원이 그렇듯 오래라면 어떤 과정을 걸어 왔는가?복희씨를 만나서는 8괘가 그려지고 요순을 만나서는 사시(四時)와 칠정(七政)이 정하여지고 3왕을 만나서는 충(忠) 질(質) 문(文)이 숭상되듯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때 그때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그 모습을 들어내 왔다는 것이다. 즉 천지가 생겨난 이래 이룩되어 온 인류문화는 그대로 유교의 나타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상 불합리한 것처럼 들리나 그는 유교를 진리 그 자체라고 보는 입장에서 이러한 논리를 전개했다.
제7장 유교전포
오늘날 세계의 모든 종교는 포교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유교는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유교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극히 소극적이다. 포교는 오직 관(官)의 제도적 방식에 의존할 뿐 개인적인 노력으로 포교하려는 열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공자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포교하려했으니 그 본보기를 공자에서 배워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경쟁사회에 있어서 예수교, 불교가 저렇듯 열열하게 포교하는데 유교만이 소극적 포교자세이니 장차 어떻게 존속할 것인가?이에 대한 이병헌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종교는 참다운 진리를 가진 자만이 가장 오래 존속할 수 있고 가장 멀리 포교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유교는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이유가 3가지 이니, 첫째 공자교는 미신이 아니고 진리를 위주하기 때문에 세계가 개명되고 발달할수록 그 세력이 더욱 왕성해질 것이다. 둘째는 공자는 경쟁을 일삼지 않고 예양(禮讓)을 위주로 하니 이 세계에 경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실현되어 예양을 귀하게 여기게 되면 자연 공자교는 행하여지기 마련이다. 셋째로 공자는 남을 배척하지 아니하고 대동(大同)세계로 융합하기를 주장하니 세계가 장차 하나로 통합되면 공자의 교는 들어나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현실적으로 유교인들은 어떠한 노력과 포교의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인가? 첫째 교당을 세워 성심으로 공자를 받들어야 한다. 둘째 경전을 번역하여 성경으로 삼아 천하에 두루 펴야한다. 셋째 교사(敎士)를 뽑아 공자가 가르친 바를 세상에 널리 소개해야 한다.
제8장 유교교제
동서가 소통하는 시대에 있어서 여러 종교도 자연 서로 접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유교는 다른 종교와 어떤 자세로 접촉해야 할 것인가?오늘날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으니 마땅히 다른 종교를 존중하면서 그 종교의 좋은 점을 배워야 한다. 그 본보기를 공자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 겸손하게 예(禮)를 물었는 자세 그것이 곧 앞으로의 유교인의 다른 종교를 대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제9장 유교희망
종교는 궁극적인 바램이 있으니 불교는 극락정토(極樂淨土)에 되살아 나는 것이고 예수교는 천당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인대 유교의 궁극적인 바램은 무엇인가?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시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유교는 마음을 위주로 삼는데 이 마음은 천지의 이법과 통하는 것이니 성인이 출현하여 이 마음을 순화하여 현실적으로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유교의 바램이다.
제10장 유교결과
장차의 세계에 있어서 종교는 합일되는 날이 있을 것인가?반드시 있을 것이다. 어떠한 종교가 능히 하나로 합칠 것인가?공자의 유교만이 하나로 합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미신적인대 반하여 유교는 합리적이며 다른 종교들은 모두 내세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죽은 후의 문제이니 실증할 수 없으나 유교는 현실에서 그 목적을 실현하려 하니 언젠가는 실현 가능한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론에서 세상사람들은 모두 유교를 정치이론으로만 인정하고 종교로서 인정하지 아니하나 이것은 유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이다. 유교계에 일대혁명을 통하여 유교의 진면목을 들어내어야 하는데 그길은 공자의 숨겨진 참뜻(微言大義)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들어내는데 있다고 하였다.
다음에 천학의 내용도 간략히 소개해 보자.
서언(敍言)에서 도(道)의 근원이 천에서 나오는데 그 천에 대한 견해가 일정하지 아니하면 유교의 근원을 알수 없다고 전제하였다. 그가 천학(天學)을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1장 천의 형체(天之形體)
[천에 형체가 있는가?] [있다, 끝없이 푸르고 푸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같이 문답을 시작하여 천체와 지구의 운행을 설명한 끝에 천은 [형체없는 형체]라고 규정하였다.
제2장 천의 성정(天之性情)
[천에 성정이 있는가?] [천에 성정이 없다면 사람의 성정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정자(程子)는 천을 성정으로 말할 때 이를 건(乾)이라 한다고 했다]라는 문답으로 시작하여 천의 성정이 곧 천도(天道)로서 4덕(四德) 5상(五常) 4시(四時)운행이 바로 그 나타남이라고 하였다.
제3장 천의 주재(天之主宰)
[자연 속에 과연 무엇이 있어서 주재를 하는가?] [자연 속에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으니 수시변화 속에 각기 조리가 일정하여 변함이 없는 것이 조화(造化)의 주체이다]고 문답을 시작하여 그 주재자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고 동시에 일정한 곳에 고정되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제4장 천의 변화(天之變化)
천의 변화는 무궁무진한 것임으로 사람으로서 그 전모를 헤아리기는 극히 어렵다는 것을 말하였다.
제5장 천의 부위(天之部位)
[천은 하나인데 고금의 천을 말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각기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각기 입각하는 위치에 따라 그 보는 바가 다르고 그 말하는 부분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고 전제하고 그 입각하는 위치와 말하는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제6장 천의 감응(天之感應)
[사람과 하늘사이에 어떻게 감응의 원리가 있는가?] [천인은 한가지 이치임으로 감(感)이 있으면 반드시 응(應)이 있기 마련이다]하고 그 감응의 양상을 설명하였다.
제7장 천의 도수(天之度數)
동서의 역법(曆法)을 비교하고 서양의 천문학적 지식을 소개하면서 지구운행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제8장 천의 원소(天之原素)
[동양은 음양오행으로 천이 유행(流行)하는 기(氣)로 삼고 서양학자들은 우주내의 물질의 유형을 따져서 70여종의 원질(原質)의 이름을 찾아내었으니 음양. 오행의 생성의 기가 저 원질들과 서로 짝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발하고 이들은 궁극에 있어서는 서로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동양의 성인들은 만물이 엉켜 운행하는 가운데서 진재(眞宰)를 찾아내는 종합적 탐구를 하고 서양학자들은 만물이 엉켜 있는 가운데서 그 원질을 쪼개내는 분석적 탐구를 한 차이를 지적하였다.
제9장 천의 동정(天之動靜)
항성(恒星)은 움직이지 않으나 행성(行星)은 움직이니 동정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태양과 별들의 움직임이 동으로 돌기도 하고 좌로 돌기도하여 서로 상대적인 운동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제10장 천의 종시(天之終始)
[천에는 시작이 있고 끝남이 있는가?] [천은 끝남이 없는것으로써 본체로 삼고 다함이 없는것으로써 작용을 삼으니 어찌 시작과 끝남이 있다고 하겠는가?]하고 끝남이 없고 다함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통론(通論)에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고금을 통하고 내외를 아울러 절대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을 교(敎)라 하는데 교가 천(天)을 체현(體現)하면 그 교는 지극한 것이된다. 교에 종사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두어서는 아니되고 일체를 천에 순응해야 한다]고 하고 결론적으로 [세상의 군자들이 유교의 근원을 회복코자 할진댄 천을 근거로하여 헤아리지 아니하면 공자의 뜻이 아니다]고 하였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유교복원론에서는 공자사상의 완전무결성을 전제로 하고 그 완전성에로 되돌아 가는 것이 유교이념의 실현이요 동시에 불완전한 현실적인 유교의 개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3) 금문학과 유교개혁운동
이병헌의 유교개혁론은 그의 금문학(今文學)연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금문학연구는 강유위(康有爲)의 영향아래 이루어졌다. 강유위는 청(淸)의 말기 서양이 무력적 위력으로 동양을 침범할 때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중국의 사상적 주체성을 확립하려 한 학자이다. 그의 무술변법의 사상적 근거가 금문학이었던 것이다.
금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연원은 오래 되었다. 한(漢)나라가 유학을 관학으로 삼고 경학(經學)을 확립하면서 금문ㅗ고문(今文ㅗ古文)의 문제가 생겨났다. 즉 한(漢)초에 유가경전을 정리하면서 당시에 쓰던 문자 즉 예서(隸書)로 새로 경전을 정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노(魯)의 공왕(恭王)이 궁궐을 확장하기 위하여 공자가 살던 옛집을 헐었더니 그 벽속에서 선진(先秦)시대에 통용되던 문자인 전서(篆書)로된 경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예서로 된 경전을 금문경전이라 하고 전서로 된 경전을 고문경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금문으로 쓰여진 경전과 고문으로 쓰여진 경전의 내용이 일치하지 아니하고 고문경전의 편수가 금문경전의 편수보다 월등히 많았던 것이다. 여기서 금문경전을 숭상하는 학자와 고문경전을 숭상하는 학자사이에 서로 경전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학파를 이루어 경학사상 오랜 논란의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고문경전에 대한 위작설(僞作說)이 제기되다가 청(淸)대에 고증학이 성행하여 고문경전의 많은 부분이 위작임을 밝혀내고 금문학의 정당성을 입증하게 되었다. 그런데 금문학파와 고문학파간의 논쟁은 경전자체의 정당성의 문제에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 경전해석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도 그 견해를 달리 했던 것이다. 그러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중국역사해석의 문제이다. 고문학자들은 중국역사를 요ㅗ순(堯ㅗ舜)시대를 이상화하고 고대로부터 점차 타락되어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상고적(尙古的), 복고적(復古的)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금문학자들은 역사는 고대로부터 점차 진보발달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처음 주장한 학자는 한(漢)의 금문학자 하휴(何休)이다. 그는 이른바 장삼세설(張三世說)을 주장하여 {춘추}(春秋)의 12공(公)을 공자를 기준으로하여 [소전문](所傳聞)의 시대, [소문](所聞)의 시대, [소견](所見)의 시대로 나누고, [소전문]의 시대는 혼란의 시대이고, [소문]의시대는 승평(升平)의 시대이고, [소견]의 시대는 태평(太平)의 시대라고 하였다. [소전문]의 시대란 공자가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그들이 들었던 바를 다시 전해 듣는 시대를 말함이고, [소문]의 시대는 할아버지들이 경험한바를 이야기로 듣는 시대를 말함이고, [소견]의 시대는 공자가 직접 경험하고 보았던 시대를 말함이다. 역사적 실제로는 [소전문]의 시대로부터 [소견]의 시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전쟁이 잦아지고 혼란이 심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휴(何休)는 이를 반대로 혼란에서 태평에로 발전되어 왔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공자를 기준으로 하고 공자의 이념이 명백화되는 시점을 표준으로하여 역사발전을 규정했던 것이다.
강유위는 금문공양학(今文公羊學)파의 계통을 이어 이를 크게 선양했던 것이다. 그는 [신위경고](新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등을 저술하여 {춘추}(春秋)는 공자가 장차 올 시대를 위하여 은밀하게 그 뜻을 편 책이라 규정하고 공자가 태어난 해를 중국의 기원원년으로 하고 공자를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강유위의 사상에 영향 받은 이병헌은 공자교에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금문학에 깊은 연구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앞에서 살펴 본 {유교복원론}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를 가장 이상적인 성자로 보고 그의 사상은 완전무결한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유교개혁운동은 새로운 발전의 모색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공자의 사상을 사실 그대로 들어내는 것 즉 그 원상에로 복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개혁운동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송기식(宋基植 1878-1949)
송기식의 자(字)는 공필(鞏弼), 호는 해창(海窓)이다. 경북 안동출신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배우고, 일본에게 국권이 빼앗기자 석주(石洲) 이상용(李相龍),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특히 교육을 통한 국민계몽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저술은 해창문집(海窓文集) 9권이 있다. 그리고 필사본으로 [유교유신론](儒敎維新論)이 있다. 먼저 그의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생애
1878년 9월 25일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何面) 송천동(松川洞)에서 괴당(槐堂) 송순호(宋淳昊)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18세때 일본의 발호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안동에서는 권세연(權世淵)이 의병장이 되고 각면에 총부통(總副統)을 두게 됨에 해창의 조부가 동후면(東後面) 부통이 되어 그 밑에서 군관(軍官)으로 의병에 참가하였다.
1896년 19세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의병장이 됨에 해창은 대장영(大將營) 서기(書記)로 종군하였으나 그해 가을 정부로부터 의병해산령이 내려 집으로 돌아와 학업에 열중하였다.
1898년 21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찾아 공부하였다.
1908년 31세에 스승인 서산 김흥락의 유고를 7년간 필사하여 문집 31권 16책을 완성출간하였다.
1909년 32세 후진양성을 위하여 봉양서숙(鳳陽書塾)을 세우고, 이 해 석주 이상용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세우자 적극적으로 이에 참여하였다.
1919년 42세 3ㅗ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18일 봉양서숙 학생들과 함께 앞장서 만세를 불러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안동 감옥에 구류되었다가 3월28일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어 2년형을 선고 받았다.
1920년 43세 영친왕(英親王) 가례(嘉禮)로 인하여 감형되어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봉양서숙을 계속 경영하였다.
1921년 44세 유교의 혁신을 위하여 {유교유신론}(儒敎維新論)을 저술하였다.
1925년 49세 3월에 남선면(南先面) 인곡(麟谷)에 인곡서숙(麟谷書塾)을 세우고 5월에 충북 단양군에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어 군수 김경배(金莖培)의 초청으로 교수의 책임을 맡게 되고, 한편 4서(四書)를 국역하였다.
1932년 56세 서울 유교회 초청으로 녹동서원(鹿洞書院)의 교수로 초빙되어 3년간 봉직하였다.
1949년 72세 3월22일 세상을 떠났다.
2) 유교개혁사상
송기식의 문집가운데는 곳곳에 그의 유교개혁사상이 피력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유교개혁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유교유신론}(儒敎維新論)이다. 이는 그의 문집에 실리지 아니하고 국한문 혼용으로 된 필사본으로 일반인에게 별로 소개되지 아니한 자료이다. 그의 {유교유신론}은 서언에 이어 모두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에 그의 {유교유신론}의 내용 목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언(緖言)
제1장 불역(不易)의 도체(道體)와 변역(變易)의 시중(時中)
제2장 근세유교(近世儒敎) 쇠패(衰敗)의 원인
제3장 유자자기(儒者自棄)의 폐(幣)와 향원자수(鄕原自守)의 해(害)
제4장 유교포위주의(儒敎包圍主義)가 근고협애주의(近古狹隘主義)로 된 원인
제5장 유교가 불행(不幸)함으로 인하여 조선인 각종성질의 고질(痼疾)을 성(成)하다.
제6장 각사회에서 유교에 대한 압박의 원인
제7장 금일은 유교부흥의 시기(時機)
제8장 조선인 유교뇌수(儒敎腦髓)와 은연(隱然)한 세력굉대(勢力宏大)
제9장 유교반정 (儒敎反正)의 방법
제10장 양본원(養本源)의 방법
제11장 응실용(應實用)의 방법
제12장 현금(現今) 각종교와 구서(歐西) 각 학설의 고증비례(考證比例)
제13장 유교는 통일(統一)의 주의(主義)
제14장 세계는 유교범위내에 영원한 태평의 장래
아래에 각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ㅇ서언(緖言)
유교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하늘과 같은 진리이어서 누구나 이를 받들고 밝혀야 할 의무가 있음을 전제하고 특히 유교는 우리의 오랜 전통문화이니 이를 밝혀야 함은 지상의 과제라고 하였다.
ㅇ제1장 불역(不易)의 도체(道體)와 변역(變易)의 시중(時中)
[上帝께서 下民에 衷을 降하시매 象을 垂하사 聖人으로 人類에 大道를 紹介하시니 道의 廣大함이 天地를 包圍하며 精微함이 方寸에 退藏하며 贍足함이 萬物을 幷育하야 世界의 無窮을 享有하니 一本의 大部分은 不易이오, 萬殊의 小部分은 變易이라, 不易은 經이며 體이오, 變易은 緯이며 用이라, 不易은 無形에 基因하고 變易은 有用에 活用한다. 聖人이 上帝를 代表하사 人類에 紹介하시니 性을 養하는 敬工夫이며 身을 修하는 孝悌로 自하야 外로 治平에 至하기 까지 易의 道體와 變易의 時中을 大略證擧하리라]고 전제하고 여러 경전에서 불역의 도체에 해당하는 구절 17개조를 발췌하여 나열하고 변역의 시중에 해당하는 구절 4개조를 발췌하여 나열하였다.
ㅇ제2장 근세유교(近世儒敎) 쇠패(衰敗)의 원인
유교쇠패의 원인으로 4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전제정치에 입각하여 계급에 따라 사람을 쓰는 것이다. 한 조상이 공을 세우면 대대로 자손들이 양반노릇을 하게 됨으로 자연 문벌(門閥)을 숭상하는 고질이 생겨나 학문을 해도 세상을 구제하려는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권세와 지위를 얻으려는데 있게 되어 유학이 쇠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문을 숭상하고 한글을 천시하는 점이다. 한문은 중국의 문자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한문이 곧 유교인줄 잘못 생각하고 나아가서 한문을 배우기 어렵다고 해서 유교를 싫어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과문(科文) 즉 과거에 필요한 문장에 힘쓰고 유학의 참뜻을 알려고 하지 않은 점이다.
넷째는 당론(黨論)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이다. 조선조의 당론이 극심했던 것은 다시 논할 필요도 없거니와 당시에는 이미 당론이 사그러들기는 했으나 은연중에 그 영향이 있어 서로 상대를 모함하는 풍조가 유학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했다.
ㅇ제3장 유자자기(儒者自棄)의 폐(弊)와 향원자수(鄕原自守)의 해(害)
유학자 가운데는 모든 것을 운수에 맡기고 스스로 난국을 타개하려는 의욕이 없어 자포자기하는 것이 유학자의 한 폐단이라는 것이다.
이들 자포자기하는 부류와는 달리 외관상으로는 유교인으로서 손색없는 모습을 취하나 내막적으로는 유교의 근본정신과 합치하지 아니하는 태도를 취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을 향원(鄕原)이라 하는데 저자는 이들 향원을 5가지로 분류하였다.
①혼돈노성파(混沌老成派) ─ 이들은 과문(科文)과 사장(詞章)을 숭상하고 잡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새로운 학문과 유행에는 아주 외면하는 파.
②구학고집파(舊學固執派) ─ 이들은 성리학(性理學)이나 정주(程朱)의 학문에 대해서는 밝게 알면서도 그 사고가 완고하여 성인의 근본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
③부귀자존파(富貴自尊派) ─ 이들은 조상의 은택으로 부귀를 누리는 무리들로서 조상의 유업을 고수하는 것만을 도리라 생각하고 일체의 혁신을 외면하는 파.
④외관파(外觀派) ─ 이는 생활습관과 행위규범은 유교적 규범을 따르면서 내용적으로는 모든 유교활동을 외면하고 협조하지 아니하는 파.
⑤자훼파(自毁派) ─ 이들은 서양의 새로운 문화에 현혹되어 여태까지 믿어오던 유교를 배반하고 비난하는 파.
ㅇ제4장 유교포위주의(儒敎包圍主義)가 근고협애주의(近古狹隘主義)로 된 원인
공자가 하(夏)의 역법(曆法) 은(殷)의 수레와 주(周)의 면류관(면琉冠)과 순(舜)의 음악과 무왕(武王)의 음악을 두루 수용할만큼 포괄적인 사상을 가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학파가 갈라지고 주장이 서로 맞서게 되면서 유학이 점차 포용성이 없는 좁은 유학으로 쇄퇴하였다는 것이다. 제목은 그 쇄퇴의 [원인]이라 하였으나 내용에 있어서는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한 바가 없다.
ㅇ제5장 유교가 불행(不行)함으로 인하여 조선인 각종성질의 고질(痼疾)을 성(成)하다.
이 장에서 필자는 종교인들은 각자의 종교에 충실하니 예외로 하고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 성질에 따라 분류하면 7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호명파(好名派) ─ 어떤 단체 어떤 공적인 일에 있어서나 자기의 공명심을 앞세우는 유형의 사람들.
②탐리파(貪利派) ─ 어떤 일에 있어서나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 유형의 사람들.
③금전파(今錢派) ─ 금전만능주의를 앞세우는 유형의 사람들.
④의뢰파(依賴派) ─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정신이 없이 남에게 의존하는 유형의 사람들.
⑤참위파(讖緯派) ─ 옛사람의 예언(豫言)에 미혹되어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을 결여한 유형의 사람들.
⑥곤궁파(困窮派) ─ 생활이 곤궁하여 정신적으로 남에게 굴종을 일삼는 유형의 사람들.
⑦부랑파(浮浪派) ─ 주색잡기를 일삼으며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유형의 사람들.
이상 7유형의 사람들은 유교가 쇄퇴함으로써 생겨난 폐단이라고 규정하였다.
ㅇ제6장 각사회에서 유교에 대한 압박의 원인
유교는 도처에서 배격되고 있는데 그것은 유교가 그 본래의 정신을 발휘치 못하고 전제정치가 시행되고 계층의 차등만이 생겨 각 계층간에 반목과 알력이 생겼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반목의 원인이 유교에서 유래되었다고하여 유교가 배격되고 있다는 것이다.
ㅇ제7장 금일(今日)은 유교부흥(儒敎復興)의 시기(時機)
사상에는 흥하고 쇠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유교는 지금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으나 지금처럼 시대가 혼란할수록 절대적인 진리를 지닌 유교는 새롭게 그 빛을 발할 때임을 강조하고 유교의 이상세계인 {예운}(禮運)편의 대동세계(大同世界)의 내용을 소개하였다.
ㅇ제8장 조선인(朝鮮人) 유교뇌수(儒敎腦髓)와 은연(隱然)한 세력굉대(勢力宏大)
조선인의 유교적인 잠재세력으로 첫째 유교적인 생활의식에 젖은 일반대중이 있고, 둘째 고을마다 향교와 서원이 있어 교육시설로써 전용될 수 있는 것이고, 셋째는 고을마다 청년을 가르칠 수 있는 선비가 있는 점을 들었다.
ㅇ제9장 유교반정(儒敎反正)의 방법
유교를 바로잡을 방법으로 다음의 11조항을 제시했다.
①공자를 종교적 대상으로 받들어 단결할 것.
②유교도 종교적인 예식(禮式)절차를 갖출 것.
③각지방에 신도조직을 가지게 하고 신도가 수 10호가 되면 교회를 세우도록 할 것.
④복일(復日) 즉 일요일마다 강연회를 가져서 경전의 뜻과 당면한 과제를 밝힐 것.
⑤경의강습소(經義講習所)를 설립하여 경전에 밝은 강사를 두고, 지방교회에서 18세이상의 유능한 사람을 강습생으로 선발하여 6개월, 1년, 3년의 기간으로 강습을 받게하여 졸업후 지방교회, 향교, 서원의 임원 또는 강사로 활용할 것.
⑥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누구나 쉽게 경전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할 것.
⑦선행자(善行者) 특히 효행자(孝行者)를 표창하여 윤리도덕을 장려할 것.
⑧계급을 타파해야 한다. 제자의 수용에 차별이 없었던 공자의 정신으로 돌아가 서로 차별없이 사랑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⑨관ㅗ혼ㅗ상ㅗ제(冠婚喪祭)의 예를 시대에 맞게 참작 조절할 것.
⑩부인의 교육문제이니, 부인은 국민의 반을 차지하니 이들을 교육하여 장차 부인회의 활동을 담당하게 할 것.
⑪학교 교육문제이니 국민 모두가 학교교육을 통하여 현대과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할 것.
ㅇ제10장 양본원(養本源)의 방법
본원(本源)을 양성하지 않으면 사물의 온갖 변화에 응할 수가 없다. 그러하기 때문에 본원을 양성해야 한다. 유교에서는 하늘에서 받은 사람의 본원을 성(性)이라한다. 이 성을 길러 하늘(天)과 합치하는 성인이 되는 것이 유교의 목적이다. 이러한 성을 기르는 방법이 곧 경(敬)이다. 본장에서는 공자이후 여러 선현들과 {대학} {중용} {논어}등 중요 경전에서 말한 경의 뜻과 경의 실천방법을 제시하여 본원을 기르는 방법으로서 제시하였다.
ㅇ제11장 응실용(應實用)의 방법
실용의 방법으로서 공자묘(孔子廟)에 교적(敎籍)을 비치하고 각지방에 교회(敎會)를 설립하여 복일(復日)을 지켜 그 날에는 지위의 귀천을 따지지 아니하고 모두 참석하여 예식을 행하되 첫째 정좌(靜坐)의 절차를 가져 10분 혹은 20분간 고요하게 앉아 마음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강연(講演)의 절차를 가져 경전의 뜻을 풀이하기도 하고 시사(時事)에 관한 해설을 한 후 다시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이 정좌를하여 마음을 정리한 후 폐회를 하도록 한다.
ㅇ제12장 현금(現今) 각 종교와 구서(歐西) 각 학설의 고증비례(考證比例)
동서고금의 학설과 종교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으나 천(天)이 하나이듯이 그 근본원리는 하나일 뿐이다. 유교는 4천년의 역사를 가져 정대광명(正大光明)하고 공평중직(公平中直)한 진리를 가졌음으로 다른 종교, 철학, 과학의 진리를 모두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종교와 철학의 내용을 유교의 이론과 대비(對比)시켰다. 즉 선교(仙敎)의 연성(鍊性), 불교의 참선, 기독교의 기도, 천주교(天主敎)의 송주(誦呪), 대종교(大倧敎)의 제천(祭天)은 모두 유교의 경(敬)에 해당이 되고, 선교의 지치(至治), 불교의 대승(大乘), 기독교의 심판, 천도교의 광제(廣濟)는 유교의 대동(大同)에 해당되며,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은 유교의 인(仁)에 해당되는 것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서양의 철학사상을 일일이 유교사상의 내용과 대비하였다. 즉 탈레스(德笭)이래 소크라테스(蘇巨羅哲斯), 플라토(相拉圖), 아리스토텔레스(亞里士多德)를 비롯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영국, 독일, 불란서의 중요 철학자들의 근본사상을 지적하고 그것들이 모두 유교의 사상내용에 이미 설파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만큼 유교사상이 포괄적이며 근원적임을 지적하였다.
ㅇ제13장 유교는 통일의 주의
유교는 포괄적이고 통일적인 사상이라하고 그 통일주의의 내용으로서 4가지를 들었다. 첫째 시중주의(時中主義)이요, 둘째 집대성주의(集大成主義)이요, 셋째는 일용사물당연주의(日用事物當然主義)이요, 넷째는 지어지선주의(止於至善主義)이라하고 이어 이 4가지 주의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ㅇ제14장 세계는 유교범위내에 영원한 태평의 장래
장래의 세계는 유교사상에 의하여 태평의 세계를 실현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Ⅳ. 結語
구한말(舊韓末) 개화기에 영남지역에서 유학의 개혁을 말한 학자들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뚜렷한 이론적 체계를 이루어 개혁을 주장한 학자는 또한 많지 않았다. 이 논문에서는 분명한 개혁적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문자적 기록을 남긴 유교개혁론자로서 이승희(李承熙), 유인식(柳寅植), 이병헌(李炳憲), 송기식(宋基植)의 네사람을 들고 그들의 주장내용을 대강 살펴 보았다.
이들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다같이 유교의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그 주장의 내용에는 각기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색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이승희는 유교의 사상내용을 새시대에 맞게 절충해 보려는 입장이었고 유인식은 주로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유교를 개혁하려 하였고, 이병헌은 금문학(今文學)에 바탕한 종교적 측면에서 유교를 재구성하려 하였고 송기식은 사회교화적 측면에서 유교를 개혁하려 한 특색을 가졌다.
그러나 같은 시대적 배경속에서 형성된 주장임으로 그들 주장에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서양의 과학문화를 수용하고 그와 융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들의 주장속에는 공통적으로 유교를 종교화해야 한다는 경향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는데 그것이 결국 서양의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깊고 얕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서양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서양철학의 이해를 유교사상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의 유교개혁론을 크게 보면 결국 동도서기(東道西器)적인 유교문화권의 서양문화수용론의 큰 테두리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