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송은석(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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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옥포면 기세리의 숨은 보물, 인산당·소계정·모열각
프롤로그
우리고장에도 봄이면 벚꽃 길로 유명한 곳이 여럿 있다. 달성군 옥포면 기세리 옥연지 일대, 속칭 ‘용연사 벚꽃 길’도 그 중 한 곳이다. 벚꽃이 만개하는 4월 초가 되면 이곳 기세리는 그야말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게다가 최근 이곳 옥연지 일대에 송해공원이 조성되면서 기세리의 유명세가 더해졌다. 하긴 ‘기세’라는 지명부터가 심상치가 않다. 동네의 자연형세가 기이하여 기이한 세상, ‘기세(奇世)’라고 했다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기세리에 400년 내력의 한 문중 세거지와 그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기세리의 주인인 충주 석씨 문중과 그 관련 유산이다.
충주 석씨 유래와 대구 입향 내력
충주(忠州) 석씨(石氏)의 시조는 ‘석린’이다. 석린은 고려 중엽에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인물이다. 그는 고려에서 서북병마사와 상장군을 지내고 예성군에 봉해졌다. 이를 연유로 그의 후손들은 예성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예성’은 지금의 ‘충주’이다. 시조 석린 이후 8세 석수명과 석여명 대에 이르러 석씨의 본관은 홍주와 충주로 나눠진다. 이때 홍주를 본관으로 삼는 석수명의 후손들은 주로 북한에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주 석씨 대구 입향조는 인산당 석언우이다. 그는 1576년 경상북도 밀양군 무안면 중산리에서 아버지 석세경과 어머니 연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17세의 나이로 의병 창의하여 공을 세운바가 있다. 이후 비슬산 자락 인수동에 잠시 터를 잡았다가 다시 지금의 기세리에 정착하였으니, 400년 기세리 충주 석씨 입향조이다.
충주 석씨 대구 입향조 석언우의 재사, 인산당
인산당은 석언우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사로 기세리 충주 석씨의 대종당이다. 지금의 건물은 옛 건물이 퇴락하자, 1952년 3월 현풍의 한 고가를 사서 그대로 이건한 것이다. 건축양식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다. 예전에는 인근에 석언우의 아들 송암 석운상의 정사인 송암정사도 있었다. 하지만 송암정사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퇴락, 그 편액만이 수습되어 현재 인산당에 걸려 있다.
기세마을 랜드마크, 소계정(小溪亭)
기세마을 가장 안쪽에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된 소계정이 있다. 이 정자는 소계(小溪) 석재준(石載俊) 선생의 제자들이 1921년에 건립한 것으로 선생의 호를 따서 소계정이라 이름 하였다.
소계정은 달도산 아래 기세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옥연지를 바라보며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소계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가운데 1칸은 대청, 양옆은 방이며 전면으로 반 칸 규모의 퇴 칸을 두고, 양쪽 방 후면에는 벽장을 두었다. 현재 소계정 대청에는 여러 현판이 게시되어 있다. 이중에는 소계정기·소계정중건기·소계정원운 등이 있으며, 전면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또한 방 안에도 교지를 비롯한 여러 관련 자료들이 게시되어 있다.
한편 소계정 우측에는 영당이 있다. 영당에는 석재준 이하 자, 손 3대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영당 곁에 ‘소계석선생행적비’도 있다. 소계정 경내에서 멀리 밖을 바라보면 마을과 건너 앞산 사이로 옥빛을 띠는 옥연지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풍광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수려하다.
한말 대구의 큰 선비 소계 석재준
석재준은 자가 경수, 호는 소계이다. 1866년 8월 23일, 아버지인 지지당 석치규와 어머니인 파평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가학을 익혔고 15세에 만긍와 윤태로의 문하에 출입했다. 하지만 당시 과거제도가 너무 문란하자 선생은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다시 임재 서찬규의 문하에 나아갔다. 1891년, 선생이 경학원(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 시절의 성균관)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강장인 서찬규와 이헌영, 이희익 등이 선생을 일러 ‘남주(南州)의 아칙(雅勅)한 선비(남쪽의 훌륭한 선비)’라 극찬한 바가 있다. 1903년 봄 연재 송병선을 모시고 강의를 하였고, 이 해 여름 경학원 강장에 추대되었다. 1908년에는 학행으로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10년 경술국치에 북쪽을 향해 통곡을 하고, 울분을 담은 7언절구 한 수를 남기고 기세리로 낙향했다.
‘공승이 굶어 죽은 것이 어찌 한갓 죽음에 불과하며, 도연명이 귀거래한 일이 어찌 구차하게 살고자 함이랴. 한번 죽고 한번 사는 것이 오직 의리에 있는 것이니 천추의 평론을 누가 감히 가벼이 보랴.’
당시에 많은 선비들이 기세리로 선생을 찾아와 수업을 청하니 집이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21년 제자들이 뜻을 모아 집을 하나 새로 지었으니 바로 지금의 소계정이다. 선생은 해방된 지 3일 만인 1945년 8월 17일 향년 80세로 졸하였다. 선생은 죽기 3일 전인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의 소식을 듣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에필로그
기세마을 입구 도로 한 편에는 두 여인의 열부행과 효부행을 기린 정려각과 비가 있다. 열부우(烈婦雨)의 주인공인 석구홍의 처 진주 강씨에게 내린 열부 정려각인 모열각과 석종균의 부인인 고령 신씨의 효부행을 기린 비석이 그것이다. 이제 기세리는 옥포면의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달성군을 넘어 대구를 대표하는 핫플레이스로 성장했다. 그래서 말인데 송해공원만 다녀갈 일이 아니다. 바로 인근에 있는 400년 내력의 기세마을도 한 번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