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고운님 여의옵고
― 조무근 선생님 추모 글 ―
조무근 아동문학가
아동문학가, 동요작사가.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아동문학평론 추천완료(‘79).
월간문학 신인상, 한국아동문학 작가상. 영남 아동문학상. 한정동 아동문학상. 한국동요음악대상. 한국아동문화 예술상 수상.
동시집; ‘생명 발견’ 외 10권.
현재 솔바람동요문학회 회장
내 유년(幼年), 사향(思鄕)의 애틋한 추억
조 무 근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게 마련이다.
떠나 살건 안겨 있건 고향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숨결 끼얹어 주는 것 또 있으랴.
하기야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마지못해 자위하는 변명의토로가 아닐까.
나도 어쩔 수 없이 고향 떠나 경상도에 와 산지 어느덧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맑고 넓은 동해와 등뼈처럼 뻗어 내린 태백의 맥(脈)이 어울려 서린 곳, 강릉 변두리의 鶴山마을.
내 유년의 고향! 학마을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돈다.
내 고향은 학마을이지만 나의 출생지는 함경북도 성진, 거기서 태어나 보름 만에 백두산 아래 무산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강릉농고 임학과 출신인 부친은 결혼하자마자 첫 근무지가 성진영림서 무산출장소였다.
내 이름 가운데 ‘무(茂)’자도 무산(茂山)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거다.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님은 철도청으로 직장이 바뀌면서 서울에서 살았고 나는 학마을 조부모 밑에서 외로운 유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매달 서울 어머니께서 부쳐주는 동화책을 읽고 또 읽는 게 나에겐 유일한 낙(樂)이기도 했다.
오전 학교 공부를 마치면 난 책을 끼고 고향집 뒷동산으로 소를 몰고 가서는 방목을 하고 풀밭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게 뭣보다 큰 즐거움이었다. 학이 사는 풀밭 주변에는 소가 좋아하는 풀들이 잘 자라 그야말로 목초밭이었다.
땅거미가 질 때쯤 책의 글자가 보이지 않자 나는 집에 갈려고 소를 찾았으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온 산을 뒤지며 소를 찾았으나 소는 보이지 않아 할 수 없이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보면 외양간에 소가 먼저와 있지 않은가? 학마을은 그야말로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이었다.
그 평화로운 학 마을에 피난민이 갑자기 몰려왔다. 6.25가 터진 것이다. 6.25가 발발하여 6개월간 서울의 부모와는 전혀 소식이 끊긴 채 이산의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1.4후퇴 때 간신히 부모와 상봉했으나 나의 어머니는 늑막염을 앓으시다 복막염이 재발된 상태였다. 아버님은 혼자서만 피난을 가시고 병중의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비행기 공습을 피해 산 속 외딴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거기다 친구가 없는 난 이웃집 친구와 함께 폭발물을 가지고 놀다가 터지는 바람에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내 어머니는 가누지 못하는 자신보다 화상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렇게도 눈물을 쏟으면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주선한 굿판을 응시하며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전쟁만 아니면 의료혜택을 받아 살아나실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께서는 분명 6.25의 희생양이었다.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기에 고향집 뒷산에 있는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범일 국사가 탄생했다는 학바위 바로 위 저고리골 산등성이에 묻혔다. 어머니 산소에서 바라보면 서울로 향하는 대관령 아흔 아홉 구비의 흔적이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유택이 마련되어 있다.
내 유년의 어머니와의 만남은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기에 남아있는 사진도 없어 그저 추억 속의 희미한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란 존재는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소우주(小宇宙)다.
나도 언젠가는 저세상에서 얼굴조차 희미한 그리운 어머니를 다시 만날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나는 억지로 아문 내 얼굴의 화상 흉터가 ‘감자소디끼(감자누룽지)’라는 별명으로 간간이 놀림을 받기도 해 친구가 별로 없었다.
다음 공산치하에서의 6개월 동안의 잊지 못할 유년의 추억 두 가지를 공개하고 싶다. 그 하나는 고향 집 사랑방에 피난민이 한 20여 일간 묵어 지내던 적이 있었다.
피난만이 가고 난 어느 날 붉은 완장을 찬 인민군 서너 명이 들이닥쳐 온 방안을 뒤지는 것이었다. 사랑방 뒤란 문을 열고는 갑자기 할아버지 가슴에 권총을 겨누면서 바른대로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 피난민을 어디에다 숨겼냐는 것이었다. 그 피난민은 잘 살았던 지식층의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뒤란의 감나무에 안테나를 설차하여 라디오 방송을 듣고 떠날 때 그 안테나 줄을 철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피난민이 어디로 간 것 같다고 말하면서 할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인민군은 어린 내가 애원하는 통에 총부리를 거두어 할아버지는 무사할 수 있었다. 이따금 인민군들은 고향 집 뒷동산의 학을 공포로 날리고는 날아가는 학들에게 무차별 연발로 총을 난사해서 재미로 학을 떨어뜨리고는 자기들이 쾌감을 느끼는 야만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일삼던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추억담은 아마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우리 집에서 2㎞가량 떨어진 모산 외갓집(南 찰방집)에 심부름을 갔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외할머니께서 하얀 치마를 내게 주시는 것이다. 비행기 소리가 나면 흰 치마를 뒤집어쓰고 엎드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는 것이다.
마침 강릉 비행장 쪽에서 학산 방향으로 긴 인민군 행렬이 보였다. 방구쟁이라고 부르는 정찰기 한 대가 지나가더니 뒤이어 제트기 편대가 기관총으로 마구 쏘아대는 것이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시켜준 대로 흰 치마를 뒤집어쓰고 눈만 빼꼼히 응시하니 내가 엎드린 몇 미터 전방에서 눈이 흰 먼지를 일으키듯 기관총알이 눈 속에 꽂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총알을 맞으면 죽는 것조차 모르던 참 순진한 시절이었다.
내 생명을 염려해준 외할머니의 자상하신 염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음을 훨씬 지나서 깨달을 수 있었다.
6.25라는 전쟁으로 얼룩지고 내 어머니마저 빼앗아 가버린 내 유년시절의 한국 6·25동란! 전쟁만큼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할아버지께서는 40여 년 전, 아버님께서는 15여 년 전, 할머니께서는 내년이면 돌아가신 지 만 10년이 되는데 97세로 장수하시고 돌아가셨다.
이제 나는 머나먼 객지 외톨이 떠돌이로 살고 있다. 내년이면 만 40년 조금 넘게 어린이 교육에 전념해왔고, 어린이를 위한 시(詩)를 쓰는 아동문학가로 벼텨 온 것은, 잃어버린 내 동심(童心)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견고한 고독과 향수를 달래기 위한 위안의 방패가 아닌가 회고해 본다.
하아얀 백학(白鶴)이 평화스럽게 살아가던 바로 그 아래 양짓말 기와집인 내 고향 집, 그리고 바로 부엌 대문에 젖히면 버티고 서있는 600여 년 묵은 은행나무, 학바위 바로 위의 어머님 산소, 백학은 어리론가 사라진 지 오래고 한 가마니씩 따던 은행알도 이젠 잘 열리지 않아 은행나무만 고향 집 사연을 간직한 채 외로이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중근(현 공인회계사). 건호(현 삼척여중 교장)와 같이 초등학교 동기면서 불알친구인 우리들은 겁도 없이 등사판 마을 문집 ‘무학(舞鶴)’을 만들던 그 흔적이 남아있지않아서 안타깝고, 구정리 출신 경섭(전 동부제강부사장, 현 미국 연수 중)군이 무척 그립다.
내가 강릉사범병설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내일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눈싸움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나보다 한 살 위인 마을 친구 연간 군은 눈 뭉치 속에 솔방울을 넣어 던져 내 눈에 맞혀 나는 한쪽 눈이 부어올라 대신 중학교합격 소식을 전해주던 그 친구도 지난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늦게서야 듣고 그리움의 눈물이 솟구쳐 며칠간 일손이 잡히지 않기도 했다.
새천년을 맞을 21세기, 내 나이도 이제 60이 된다. 북쪽 끄트머리에서 태어나 남쪽 끝까지(거제도) 고향 등지고 떠돌이 생활을 해온 걸 보면 내 사주팔자엔 분명히 역마살이 낀 모양이다. 명퇴를 신청해 놓고 고향 학마을로 돌아가리라 다짐하지만, 막상 고향이 타향처럼 돼버린 30여 년의 공백 기간에 반겨줄 사람도 없을 것 같아 망설이고 있다. 그러나 마음만이라도 당장 달려가고픈 내 고향 鶴마을! 무척이나 외로움을 탔던 내 유년의 그 고향!
슬픔과 애틋한 그리움이 왈칵 솟구쳐 오르는 그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하지만 허허로운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누가 뭐래도 고향이란 그리움의 그 첫 번째 대상이다.
새삼 고향 학마을의 정경이 그리워진다. (1999.11, ‘학마을이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