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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이야기 샘 스크랩 해미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봉봉7 추천 0 조회 66 15.12.15 11: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미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박사 -



I. 해미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연구


머 리 말


  서산의 해미(海美)는 일찍부터 천주교 박해기의 순교 터로 알려져 왔다. 아울러 그 순교사를 밝히기 위한 노력은 충청도 내지는 내포(內浦) 지역의 교회사를 이해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해미읍성(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6호로 지정)이나 해미의 행정?군사 제도상의 위치와 역할도 중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직접 해미 순교사를 파악해 보려는 연구도 발표되었고, 내포 문화권의 연구나 개발과 관련하여 해미 순례지(성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해 해미 지역의 순교사는 어느 정도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다.1)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오류도 있고 미진한 부분도 눈에 뜨이므로 다시 한번 이를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2) 이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먼저 해미의 지역사 및 해미읍성이 지니는 행정?군사?치안 제도상의 위치와 역할을 천주교 순교사의 배경으로 살펴본 다음, 해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역의 교회사와 함께 해미의 순교사, 해미의 순교자 총수를 자세히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아울러 현재의 천주교 해미 순례지, 즉 해미 성지의 초기 개발 과정과 그 의의를 함께 설명해 보는 기회로 삼았다.


1. 순교사의 배경 ‘해미읍성’


  해미는 태종 7년(1407년) 기존의 정해현(貞海顯)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 ‘해미현’(海美縣)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그 이름이 나타나게 되었다.3) 이후 해미의 행정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고북면(高北面) 전역과 운산면(雲山面) 일부 지역에 해당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운산면 지역이 분리됨과 동시에 기존의 해미현 대부분은 통합된 서산군의 지성면으로 명명되었다가 1917년 서산군 해미면으로 개칭되었다.

  해미는 초선 초기부터 군사적인 측면에서 주목을 받은 지역이었다. 태종 14년(1414년) 덕산(德山)에 있던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즉 ‘병영’)을 해미로 이설한 이유도 해미가 서해안 지역의 군사 요충지, 즉 왜구의 중요한 방어 기지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미는 병사(종2품 무관)가 관할하는 군사 지역이 되었고, 태종이 이 지역을 순방했던 다음해인 17년(1417년) 무렵부터는 군사?행정 기능을 동시에 갖춘 읍성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이어 세조 원년(1455년)에 수립되었던 군익도(軍翼道) 체제가 세조 3년(1457년) 10월 진관(鎭管) 체제로 완전히 변경되면서 해미 병영은 호서(충청도) 육군의 주진(主鎭)으로 각처의 진영을 관장하게 되었다. 해미 병영의 역할은 효종 2년(1651년)에 병영의 청주 이설이 결정될 때까지 23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4) 이러한 결정과 동시에 해미에는 호서 좌영(湖西左營)이 설치되었다. 동시에 호서의 진관 체제는 청주 병영을 비롯하여 홍주 전영, 공주 우영, 청주 중영, 충주 후영, 해미 좌영 등 5개 진영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효종 3년에는 병영이 청주로 완전히 이설되면서 해미현 반양리에 있던 현의 치소가 해미읍성 내로 이전되고, 무관의 겸영장(兼營長, 즉 정3품의 현감 겸 진영장)이 파견되었다. 그 후 호서 좌영은 숙종 19년(1693년) 해미에서 온양으로 잠깐 이설되었다가 숙종 38년(1712년) 다시 해미로 환원되면서 해미의 겸영장이 다시 행정과 군사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미의 겸영장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면서5) 해미?대흥?온양?면천?태안?결성?예산?평택?아산?신창?덕산?당진 등 12개 군?현의 군사와 치안을 관장하였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후 위의 각 지역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일단 세종 3년(1421년)에 축성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중수 작업이 계속되어 성종 22년(1491년)에는 조선 후기의 읍성 형태가 거의 갖추어지게 되었다.6) 그리고 헌종 13년(1847년) 해미 겸영장으로 부임한 박민환이 이후 2, 3년 동안 폐허된 읍성을 중수한 것으로 나타난다.7) 조선 후기 읍성의 규모와 시설 현황은 영조(재위 : 1724-1776)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설명이 아주 정확한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8)


  ① 성지(城池) : 둘레 6,630척(2,210보, 1,326장), 높이 13척, 치성(稚城) 380첩(堞). 옹성(甕城) 2개소. 초루(?樓)와 포루(?樓)는 없음. 남문은 홍예문으로 3칸이며 2층의 누각이 있음. 동문은 3칸. 서문 3칸. 북문은 없음(암문이었던 듯함). 탱자나무(枳木)가 성을 에워싸고 있음. 성안의 샘과 우물 6개소. 창고와 호지(濠池) 없음.

  ② 공해(公?) : 동헌(9칸), 아사, 객사, 장군청, 군관청, 교련청, 작청, 사령청

  ③ 창고 : 내창(성내), 외창(현서 40리)

  ④ 군명 : 해미현. 일명 잠양 탱자성(岑陽枳城)


  또 고종 9년(1872년)에 그린 <해미현지도>(규장각 소장)에는 동?서?남문, 외삼문?내삼문, 동헌, 객사, 내아, 작청, 향청, 내창, 책방, 청허정 등의 시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읍성 안에 있었다고 하는 옥은 위의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천주교 박해기에는 해미 읍성의 성곽과 관아 건물이 대부분 갖추어져 있던 시기였다. 이 중에서 천주교 순교자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추정되는 곳으로는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 터인 겸영장의 동헌, 현재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하는 읍성 중앙의 옥,9) 그리고 순교자들의 형장과 직결되는 곳으로 추정되는 서문과 서문 밖에 있었다고 하는 돌다리 등이다. 이 밖에도 5일마다 열리던 성내 북쪽의 장시도 순교사와 일정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 해미 천주교회사와 순교사

 

  1) 천주교 전파와 초기의 순교자

  해미 천주교 역사는 공주나 홍주의 교회사처럼 내포 지역의 교회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해미 교회사는 내포 교회사의 일부분이 되므로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행정 구역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해미 지역은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고북면과 운산면 일부 지역에 불과하였지만, 군사?치안면에서 볼 때는 해미를 비롯하여 대흥?온양?면천?태안?결성?예산?평택?아산?신창?덕산?당진 등 12개 군?현이 모두 해미 겸영장의 관할 지역이었다. 따라서 해미 교회사는 후자의 넓은 지역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내포 신앙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말에서 1785년 초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거주하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어 여사울의 신앙이 서해안 지역으로 전파되고, 곡교천?무한천?삽교천을 따라 내륙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795년의 을묘박해(乙卯迫害) 이전에 이존창이 천주 신앙을 전파한 지역을 볼 때도, 예산 여사울을 비롯하여 면천?덕산?공주?한산?보령?천안?홍주 등지로 나타난다. 아울러 내포의 신앙 공동체는 초기부터 주로 양인과 천민 등 주로 하층민 출신 신자들에 의해 정착되어 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10) 해미 지역도 이와 같은 초기의 내포 공동체 권역 안에 들어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해미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99년 2월 29일(양력 4월 3일) 약 30세의 나이로 홍주에서 순교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의 순교 행적에서이다.11) 그는 홍주 출신으로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면천(沔川) 관아에 투옥되자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해미와 홍주 관아로 보내져 형벌을 받고 석방된 것으로 나타난다.


  면천(沔川)이라는 마을은 투옥된 신자의 엄청난 숫자로 주목을 받았다. 여러 달 째 옥에 갇혀 있는 교우들을 보면서 박 라우렌시오는 가슴 깊이 그들을 마음 아파했고, 여러 차례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즉시 그는 붙잡혔고, (관장은) 그의 목에 무거운 칼을 씌우더니 그를 가혹하게 매질했다. 라우렌시오는 동요하지도 겁을 먹지도 않았고, 관장에게 “이 나무칼은 너무 가볍습니다. 쇠칼을 씌워주시오”라고 말했다. 관장의 입장은 난처해졌고, 마을 전체가 불안에 떨었으며, 마치 큰일이나 났을 때처럼 소문이 만들어졌다. 라우렌시오는 해미(海美) 관아로 보내어졌다가 곧이어 홍주 관아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그는 혹독하게 곤장을 맞았으나 변하지 않았다. 한 달 며칠이 지나자 조정에서 전갈이 도착했고 그는 석방되었다.12)


  이후 박취득은 1797년의 정사박해(丁巳迫害)가 일어난 다음해인 1798년 8월 홍주 관장에게 체포되어 이번에는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이 정사박해는 충청 감사 한용화(韓用和, 재임 : 1797년 윤6월-1798년 7월)가 일으킨 박해였으나, 1795년 이후 조정에서 비밀리에 추진해 온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의 체포 활동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었다. 실제로 정조는 충청 감사와 병사 정충달(鄭忠達)로 하여금 주문모 신부를 수색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했는데, 이때 밀고자 조화진(趙和鎭)이 왕의 밀지를 가지고 천주교 신자를 가칭하고 다니면서 충청도 일대를 염탐하였다.13) 1799년 청주에서 순교한 당진의 배관겸(프란치스코)은 바로 조화진이 밀고한 신자였다.

  해미의 첫 순교자도 바로 정사박해 때 탄생하였다.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에 순교한 인언민(印彦敏, 바르티노)과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이 그 주인공이다. 그 중에서 인언민(1737-1800)은 덕산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내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서울로 올라가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공주로 이주해 살다가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공주와 청주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고향 덕산이 속한 해미 진영으로 다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다가 심한 매질로 인해 6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14)

  이보현(1773-1800)은 덕산 황모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황매실)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20세가 좀 넘어서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黃沁, 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황심은 훗날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게 되는데,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의 누이였다. 입교 이후 이보현은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해 매제 황심과 함께 충청도 연산(連山)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정사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그의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 영장 앞으로 이송되어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한 채 27세의 나이로 타살되었다.15)

  해미가 다시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였다. 덕산의 비방고지(현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 출신인 김사집(프란치스코)이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10월에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은 것이다. 이후 그는 청주 병영으로 다시 이송되어 형벌을 받앗으며, 그곳 장터(현 청주시 남주동)에서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 58세의 나이로 타살되어 순교하였다.16)

  이와 같이 해미에서는 초기 박해 때부터 이미 박취득?인언민?이보현?김사집 등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중에서 인언민과 이보현은 해미의 첫 순교자로 기록되었다. 한편 신유박해 이후인 1805년에도 해미 진영에는 여러 신자들이 투옥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얼마 뒤에 석방되었다.


<표 1> 박해 초기의 해미 순교자 일람(1800년) : 2명

성  명

세례명

출생지

거주지

순교형식

순교일

나이

신분

인언민

마르티노

덕산 주래

주래, 공주

장사

1800년 1월 9일

(음력 1799년 12월 15일)

63

양반

이보현

프란치스코

덕산 황모실(황매실)

황모실, 연산

장사

1800년 1월 9일

(음력 1799년 12월 15일)

27

양인

* 해미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순교자 :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년 홍주 순교), 김사집(프란치스코, 1802년 청주 순교)


  2) 박해 중기의 해미 순교자

  1800년의 순교자 인언민?이보현이 거주하던 덕산은 해미 겸영장 겸 토포사의 관할 아래 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볼 때는 1790년대 초에 이미 해미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볼 때, 즉 해미현 지역 안에 천주교 신자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신유박해가 끝난 지 10년이 지난 1811년의 일이다.

  그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박해의 위협이 사라져 가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해미 일대에서는 1811년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한 사실이 자주 발견된다. 이와 같은 박해는 조정의 공식적인 탄압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지방 수령의 개인적인 명령이나 치안 활동의 결과로 야기된 것이었다. 특히 신유박해가 끝날 무렵에 반포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 대제학 이만수 제진)이17) 왕의 재가 없이도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령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지방 수령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우선 1811년에는 해미현(겸영장은 白泓鎭)의 하이도면(下二道面, 현 운산면 지역)에 거주하는 15세의 박옥귀(朴玉貴)와 동료 안정구(安廷九)를 비롯하여 홍주?덕산 등지의 신자 10여 명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은 사실을 나타난다. 그런 다음 박옥귀와 안정구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같은 해 말 금강 나루터에서 처형되고, 이경배(李慶培) 등 7명은 감영에서 유배형을 받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18)

  1812년에도 해미 진영(겸영장은 崔翼)에서는 남포의 윤필원(尹弼遠), 연산의 옹기점 사람 장어둔남(張於屯南), 노비 덕금(德金), 연산의 원맛봉(元唜奉) 등 남포?연산?보령?비인?금산에 거주하던 1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장어둔남과 덕금을 공주 감영으로 이송하여 같은 해 11월 18일(음력 10월 15일) 부대시(不待時) 판결에 따라 참수하였다.19)

  한편 교회 순교록에는 1813년에 청양 제운 사람으로 신해박해 때 체포된 적이 있던 황 바오로, 결성 덕머리(현 홍성군 은하면 덕실리) 사람으로 홍주와 연산의 옹기점에서 살았던 원 베드로, 결성 덕머리 사람으로 금산과 연산 옹기점에서 일하였던 장 마티아 등 3명이 공주 감영에서 1813년 11월 11일(음력 10월 19일)에 참수당한 것으로 나온다.20) 그 중에서 순교록의 장 마티아는 장어둔남, 원 베드로는 원맛봉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812년에 10여 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해미 진영에 문초를 받고 그 중에서 일부는 공주에서 순교한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사실을 밝히기 어렵다.

  이와 같이 신유박해가 끝난 지 10년 뒤인 1811-1812년 무렵에는 해미를 비롯하여 홍주?덕산?남포?연산?보령?비인?금산 등 여러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충청도에서도 특히 해미 진영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는 데 열중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해미 진영의 옥에는 일찍이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한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출신의 김진후(金震厚, 비오)가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김진후(1739-1814)는 김대건(St. 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그의 집안은 맏아들 종현(淙鉉)이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 모두가 이를 따르게 되었다. 김진후는 1791년 이후 4-5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으며, 1801년에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후 해배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진후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이때부터는 굳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사형 판결을 받지 못한 채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당시의 나이는 75세였다.21) 김진후는 해미의 세 번째 순교자였다.

  1817년 10월에는 다시 한번 해미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때 해미 포졸들이 덕산 배나다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교우촌에 나타나 상당수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으로 압송하였다. 그 후 대부분의 신자들은 석방되었지만, 민(베드로) 첨지와 형수 안나, 손여심과 손연욱(요셉) 부자, 송 첨지 등 5명은 옥사(혹은 병사)로 순교하였다.22) 우선 민(베드로) 첨지는 결성 태생으로 목천 쇠악골 교우촌(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의 소학골)에서 살다가 배나다리로 이주해 살던 중에 과부인 형수 안나와 함께 체포되어 2달 동안 옥살이를 하던 중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인해 둘 다 60세가 넘어 순교하였다.

  다음으로 손연욱(요셉)은 홍주 출신으로 1796년 무렵 성녀 김 데레사(1779-1840)와 혼인함으로써 앞에서 말한 김진후(비오)의 손녀 사위가 되었다. 그는 1817년 배나다리에서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 뒤 6-7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만 했지만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옥 근처에 있는 아우 집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기도 속에서 밤을 지새운 뒤 아침에 안연히 선종하였으니, 그때가 1824년이었다. 그의 행적을 조사한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이러한 그의 선종을 형벌과 오랜 옥살이로 인한 병사로 설명하려고 한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선종을 순교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편 그의 부친 손여심은 아들이 체포된 지 3일 후에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런 다음 10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위독한 병에 걸려 석방되었지만, 얼마 안되어 순교(병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27년이었다.

  송(요셉) 첨지는 송춘화(필립보)의 삼촌으로 알려져 있던 신자로, 홀로 남의 집에서 하인으로 살고 있었다. 1817년 연로한 상태에서 배나다리 신자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어 옥중에서 순교하였다.23)

  1825년에도 해미 진영에 체포된 신자들이 있었다. 우선 하 바르바라는 당진 출신으로 면천으로 시집을 간 뒤 시가 친척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덕행으로 모범을 보였으며, 과부가 된 후에는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전교에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825년 음력 3월 아산의 반디에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으며,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다가 매달 1일과 15일에 출두하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지만, 얼마 안되어 병사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바라르바라의 병사를 형벌과 옥살이로 인한 순교로 설명하려 한 것 같다.24)

  그 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838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조흥운(안드레아)가 해미에서 순교하였다.25) 그러나 그의 순교 행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해미 지방에서는 1811년 이후 오랫동안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진영에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공식 탄압으로 시작된 기해박해 때에는 오히려 해미 진영에서 순교자가 탄생한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그 이유는 기해박해가 서울과 인근의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박해 때 해미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순교자는 면천 양제(현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 출신인 전 베드로였다.

  본래 몸이 온전치 못했던 전 베드로는 한때 냉담 생활을 하였으나, 덕산 황모실 교우촌으로 이주한 뒤부터 전심을 다해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형이 체포되자, 숨어 있던 곳에서 스스로 나와 형을 따라가던 중에 체포되었다. 이내 형이 갇혀 있던 해미 진영으로 압송된 그는 온갖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형이 배교하고 석방된 후에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고 굶주림과 장독으로 인해 1839년 9월 옥사하였으니, 당시의 나이는 30세가 넘었었다.26)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1811년 이후 1839년까지 해미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신자는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석방되거나 유배형을 받았고, 또 일부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했으며, 때로는 순교 행적이 불분명하거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박해 중기(1811-1839)에 해미 순교자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다음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모두 8명에 이른다.


<표 2> 박해 중기의 해미 순교자 일람(1811-1839년) : 8명

성  명

세례명

출생지

거주지

순교형식

순교일

나이

신분

김진후

(金震厚)

비오

면천 솔뫼

솔뫼

옥사

1814년 10월 20일

(양력 12월 1일)

76

양반

민 첨지

(閔)

베드로

결성

목천 쇠악골

덕산 배나다리

옥사

1817년 말경

60세 이상

 

 

안나

 

덕산 배나다리

옥사

1817년 말경

민 베드로의 과부

형수

손여심(孫)

 

 

덕산 배나다리

병사

1827년

손연욱의 아버지

손연욱(孫)

요셉

 

덕산 배나다리

병사

1824년

김 데레사 성녀의

 남편

하(河)

바르바라

당진 진목

면천, 아산 반디

병사

1825년경

 

 

송첨지(宋)

요셉

 

덕산 배나다리

옥사

미상

 

 

조흥운

안드레아

 

 

미상

1838년 8월 20일

(양력 10월 8일)

 

 

  * 정윤보(스테파노) : 순교 여부 불명. 1817년 배나다리에서 체포된 후 고문의 휴유증을 40년 가까이 겪다가 선종함

 배청모(아우구스티노) : 순교 여부 불명. 당진 진목 출신으로 공주, 면천 강문 등지에서 살다가 1825년에 두 번째로 체포되어 해미에서 옥살이를 하고 석방되었으며, 1829년 6월 26일(양력 7월 26일)에 63세로 선종함


  3) 병인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충청도 지역에서의 병인박해(丙寅迫害)27)는 1866년 2월 23일(음력 1월 9일) 서울에서 베르뇌(St. S. Berneux, 張敬一) 주교가 체포된 지 20일 뒤인 3월 11일(음력 1월 25일) 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의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은거해 있던 다블뤼 주교와 복사 황석두(St. 黃錫斗, 루가)가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28) 이어 위앵(St. L. Huin, 閔 루가) 신부와 오메트르(St. P. Auma?tre, 吳) 신부가 체포되고, 이후로는 충청도 전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해미에서도 공주나 홍주에서와 마찬가지로 병인박해 초기부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수색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순교자의 체포일이 잘 나타나지 않으므로 처음 해미 진영에 체포된 신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체포일이 정확한 신자 중에서는 1866년 10월 1일(양력 11월 7일)에 체포된 해미 원우리(운산면 雁湖里인 듯)의 김선양(바오로)이 첫 신자이다.29) 또 이해 10월부터 체포된 신자들에 대한 처형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1868년까지 계속하여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교회 순교록(殉敎錄)”30)을 종합 정리해 보면, 해미 순교자 중에서 적어도 성명이나 세례명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유명(有名) 순교자는 57명에 이른다.31) 이 중에서 병인박해 초기인 1866년의 순교자가 24명으로 가장 많고,32) 1867년 순교자가 6명, 1868년 순교자가 19명, 순교 연도 미상자가 8명으로 나타난다. 다만, 순교 연도 미상자 중에서는 1869년 이후의 순교자도 들어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순교 사실만 확인 가능한 무명(無名) 순교자수는 1866년에 30명 이상, 1868년에 17명 등 도합 47명 이상이 된다.33) 따라서 교회 순교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대의 순교자는 104명 이상이 되는 셈이다.


<표 3> 병인박해기의 연도별 해미 순교자(교회 순교록)34)

연  도

순교자

특기 사항

1866년

24명

? 손사중과 함께 순교한 종형제 등 신리 출신 순교자 30여 명

? 1866년 순교자 방 안토니오는 현 대전교구 방윤석(베르나르도)의  고조부 방영창(方永昌, 안토니오)

1867년

6명

 

1868년

19명

? 면천 농바위 출신 순교자 26명(유명 순교자 9명, 무명 순교자 17명)

? 1868년 5월 생매장 순교자 3명(문 마리아, 박 요한, 방 마리아)

연도 미상

8명

 

합계 : 57명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 : 도합 104명 이상)


  박해 당시 해미현에 살고 있던 순교자는 서산 강당리(해미 강당리, 현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의 김 스테파노, 해미 원벌(현 서산군 운산면 원평리)의 김 프란치스코와 최 마리아 부부, 해미 역말(현 서산군 해미면 동암리)에 살다가 해미 안우리(현 서산군 운산면 雁湖里 즉 安好里로 추정됨)로 이주해 살던 김선양(바오로), 해미 이문(현 당진군 정미면 여미리의 里門안)의 김정옥(파비아노), 해미 점촌(즉 역말 점촌, 현 서산군 해미면 동암리)의 박춘정(프란치스코, 혹 춘경), 해미 삼진리(현지명 미상)의 최 야고보 등이다. 또 거주지가 단지 해미로 나오는 순교자도 6명이나 된다. 이러한 사실은 박해 초기?중기와는 달리 병인박해기에 와서는 해미현에도 널리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는 다음에 언급한 관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순교자의 시신이 거두어져 안장될 수 있었던 예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우선 김정옥(파비아노)과 이군명(바오로), 김순장의 시신은 김정옥의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해미 장사마골(현 서산군 운산면 수평리의 장수목골)에 안장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김선양(바오로)과 염지량(에벤시오)의 시신도 가족이나 아들이 각각 거두어 안장한 것으로 나타난다.

  순교자들의 거주지 중에서도 ‘면천 농바위’(현재 지명 미상) 옹기점과 ‘서산 강당리’, ‘홍주 원머리’(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덕산 황무실(황매실)’은 신자들이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던 마을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35) 그리고 1861년 10월 이래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공주 진밭 교우촌(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36)에서 해미로 이주해 와서 살다가 함께 순교한 김여홍?여집?경오 가족과 이순백?선경 가족들이 살던 마을도 교우촌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들은 진밭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피신하게 되자 그곳을 떠나 해미로 이주한 것 같다. 1867년의 순교자 김영횡과 1868년의 이군박도 진밭 출신으로 각각 해미와 덕산(가야산)으로 이주해 살다가 체포되었으며, 진밭에서는 리델 신부의 공소집 주인을 한 적이 있었다. 또 해미 점촌의 박춘정(춘경)도 공소집 주인으로 나오는데, 이 사실은 성직자가 한때 점촌에 머물면서 성사를 집전한 사실을 의미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병인박해는 1866년 9-10월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확대되다가 1867년 말과 다음해 초에는 일시 완화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868년 4월 17-26일(양력 5월 9-18일) 홍주 이웃의 덕산에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의 주도로 발생한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다시 확대되었다. 특히 이 사건으로 충청도 각지에서 수많은 신자가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1867년의 해미 순교자가 6명인 데 비해 1868년의 순교자는 19명으로 다시 증가한 사실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1868년 5월 3일과 5월 23일에는 3명의 순교자가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했던 데 대한 보복적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7)

  지금까지는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해미 순교자 57명 중에서 관변 기록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이는 병인양요 직후에 내려진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38)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공충도사학죄인성책≫(公忠道邪學罪人成冊)39)을 통해 순교록에 수록된 순교자들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는 1868년 4월(음)부터 7월까지 공주?충주?해미?홍주 등지에서 복법(伏法, 즉 처형)된 순교자와 기찰 포교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데,40) 이 중에서 해미 순교자(총 70명)를 시기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4> ≪공충도사학죄인성책≫의 해미 순교자


순교월

거주지

순 교 자

기찰 포교

1868년

윤4월

<34명>

해미

崔召史, 金初乭

嚴德永

면천

金連山, 金今得, 金之先, 朴星化, 張巡得, 金才得, 金致連, 朴仁得, 方巡己, 金永命, 朴今得, 李世達, 李奉誼, 鄭召史, 崔召史, 李召史, 趙召史, 李召史, 朴召史, 姜召史, 金召史, 方召史, 黃召史, 金召史, 鄭召史, 朴召史, 金召史, 李召史, 朴召史, 方召史, 宋召史, 李召史

李熙云?崔永石

1868년 5월

<35명>

홍주

柳己尙, 金召史, 朴致雲, 金召史, 李召史, 文召史

嚴德永?李熙云

덕산

金召史, 宋京卜, 金召史, 劉牙業, 廉召史, 金召史, 劉召史, 李召史, 林召史, 方召史, 申卜實, 金奉學, 金召史, 朴元兼, 朴八甫, 韓道元, 韓召史

서산

李仁甲, 金召史

李承浩?金萬成 

신창

金召史, 吳召史, 金召史, 白召史, 金召史, 朴召史, 金召史, 高仁辰

면천

金召史

예산

金召史

張鎭浩

1868년 6월

<1명>

덕산

朴柳歇

해읍 체포

합  계 : 70명

 


  ≪공충도사학죄인성책≫의 내용은 1868년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이후 해미 인근에서도 대대적인 체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해 주고 있다. 아울러 1868년의 순교자수는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19명(무명 순교자 17명 포함 36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한편 성책에 나오는 이들 70명의 순교자(처형자) 중에는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순교자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5>에서와 같이 5명에 이른다. 물론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이들 순교자는 관변 기록에 의해서도 그 순교 사실이 입증되는 좋은 예가 된다.


<표 5> 순교록과 ≪공충도사학죄인성책≫의 내용 비교표

교회 순교록

공충도사학죄인성책

면천 농바위 거주자 방순기(1868. 4, 19세, 교수)

4월 순교자 方巡己(면천)

면천 농바위 거주자 조 베로니카(1868. 4, 18세 교수)

4월 순교자 趙召史(면천)

홍주 원머리 출신의 박 요한(1868. 5, 42세, 생매장)

5월 순교자 朴致雲(홍주)

거주 불명의 문 마리아(1868. 5, 61세, 생매장)

5월 순교자 文召史(홍주)

덕산 황모실 출신의 방 마리아(1868. 5, 35세, 생매장)

5월 순교자 方召史(덕산)

중복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수 : 5명


  이렇게 볼 때 병인박해기 해미 진영에서 순교한 유명(有名) 순교자수는 순교록에 나오는 57명과 관변 기록에 나오는 70명을 합쳐 모두 127명에 달하지만, 이 중에서 중복 순교자로 추정되는 5명을 제외한다면, 그 수는 정확히 122명이 된다. 또 여기에 순교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는 무명(無名) 순교자 47명 이상을 포함한다면,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병인박해기의 해미 순교자수는 169명 이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초기 박해 때의 해미 순교자는 2명이었고, 중기 박해 때의 순교자는 8명이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기에 와서는 그 수가 122명(무명 순교자 포함 169명 이상)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또 이를 종합해 보면, 다음의 <표 6>에 정리한 것과 같이 박해기 해미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천주교 신자수는 도합 132명(무명 순교자 포함 179명 이상)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기록상의 순교자일 뿐이므로 실제의 순교자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41)


<표 6>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총수

박해 구분

순교자

비  고

초기 순교자(1800년)

2명

 

중기 순교자(1811-1839년)

8명

 

병인박해기 순교자(1866년 이후)

122명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 중복 순교자 5명 제외

합계 : 132명(무명 순교자 포함시 179명 이상)


  해미의 순교자들은 내포의 신앙 공동체가 초기에 이미 보여주었던 것처럼 대부분 하층민 출신이었다.42)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수용함으로써 양반 관료 체제로 대변되는 조선의 불평등 사회와 불합리한 유교 질서를 극복하거나 스스로의 인격을 신앙의 자유 안에서 보호하고자 했던 계층이었다. 그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고수한 이유는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는 데 있었다.43) 실제로 순교자들은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 믿고 굳은 용덕(勇德)으로 이를 지키려 했으며, 그 진리를 통해 조선 사회의 모순이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해미 순교사가 지니는 역사적?교회사적 의미가 함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3. 해미 순교 터와 순례지 조성 과정


  1) 순교 형식과 순교 터

  일반적으로 조정에서는 삼복제(三覆制) 규정에 따라 신앙을 고수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결안(結案, 사형 판결) 후 정법(正法), 즉 참수형이나 교수형, 효수형 등의 사형에 처하도록 했으며,44) 해당 신자의 거주지에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목적에서 해읍정법(該邑正法)의 영을 함께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해미와 같은 지방 관아에서는 박해 초기부터 정해진 옥송(獄訟, 일종의 형사 소송) 절차나 행형 규정에 따라 사형 판결을 내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45) 법전의 결옥일한(決獄日限)46)을 넘겨 수감하는 경우도 많았고, 결안 없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는 경우도 많았다. 초기와 중기의 해미 순교자 10명 대부분이 장사나 옥사(혹은 병사)로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병인박해기에 와서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원군이 내린 선참후계령에 따라 지방 각처에서 수시로, 그리고 한번에 여러 명의 신자들을 처형하면서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나 갖가지 남형(濫刑)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초기?중기 순교자 10명과 병인박해기의 유명 순교자 57명(중복 순교자 5명 포함) 등 모두 67명의 순교 형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47)


<표 7> 박해기 해미 순교자의 순교 형식(순교록)

                  순교형식

박해 

참수

생매장

교수

옥사

장사

석방 병사

미상

초기?중기 박해

 

 

 

4명

2명

3명

1명

10명

병인박해

5명

3명

33명(추정자 포함)

1명

1명

1명

13명

57명

합 계

5명

3명

33명

5명

3명

4명

14명

67명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중에는 교수형(33명)으로 순교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그리고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난다. 우선 참수형으로 순교한 이들은 1866년에 순교한 공주 진밭 출신의 김씨 가족(김여홍?여집?경오)과 이씨 가족(이순백?선경) 5명이다.48) 그리고 1868년 5월 3일과 23일에 생매장으로 순교한 3명(문 마리아, 박 요한, 방 마리아)인데,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들의 이름은 ≪공충도사학죄인성책≫(문조이, 박치운, 방조이)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또 이에 따르면 생매장 순교자들은 모두 포교 엄덕영(嚴德永)?이희운(李熙云)에 의해 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과 함께 체포된 홍주와 덕산의 순교자(도합 23명) 또한 생매장으로 순교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형벌은 천주교 박해사에서도 대표적인 남형에 속한다.

  해미 진영에서 파견된 포교(포도 군관)와 포졸들에 의해 끌려온 순교자들은 갖가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일반적으로 박해자들은 문초에 앞서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신자들을 회유하였고, 실제로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이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한 마디만 하면 석방해 주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이러한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순교의 영광을 얻기 위해 갖은 고초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선 순교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던 진영의 동헌 앞은 신앙을 굳게 증거한 장소, 즉 ‘신앙 증거 터’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중기 박해 때의 해미 순교자들은 진영의 동헌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오랫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김진후(비오)나 손여심 같은 경우는 10년 동안이나 옥중에 갇혀 있기도 하였다. 법전의 결옥일한을 훨씬 넘겨 수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참후계령이 내려진 후의 병인 순교자들은 문초와 형벌 기간, 혹은 옥중 생활이 크게 단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병인박해기의 순교록을 보면, 체포된 지 10여 일이나 한 달 내외에 순교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1868년 4월에 순교한 농바위 출신 김춘겸과 공주 진밭(덕산 가야산) 출신 이군박은 1866년에 체포된 것으로 나오는데,49) 이는 증언 기록 과정에서 생긴 1868년의 잘못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순교자들이 수감되었던 해미읍성 안의 옥터는 순교를 기다리던 ‘신앙 증거 터’이자 교수형이나 옥사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순교 터’로 설명될 수 있다. 훗날의 기록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증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동헌과 옥(옥은 두 곳이 있었다고 한다)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 중앙에는 담을 길이 반이나 넘도록 싸서 돌린 3칸 기와집이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남쪽으로 문 하나가 나있는데, 거기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3,40명 가량이나 갇혀 있다. 그 담 밖에는 큰 고목이 하나 서있으니…… 그 옆에 ‘바깥 옥’이 또 있으니 역시 3칸 기와집이다.…… 거기서 북으로 산밑에 10여 칸 되는 기와집이 있으니 관아로 ‘영장이 공사하는 곳’(즉 동헌)이며, 그 우편에는 아래로 또 큰 기와집이 있으니 그것이 객사요, 그 앞에는 관민의 주택이 많이 늘어 있었다.50)


  여기에서 말하는 큰 고목은 읍성 중앙에 현존하는 회화나무(일명 호야나무 혹은 교수목)51)를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나무 인근에 안과 바깥의 두 개 옥이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헌은 북쪽 산밑에 위치해 있었으니, 현재 복원되어 있는 동헌이 옛 자리이다.

  해미 순교자 중에서 김선양(바오로), 박춘정(프란치스코) 등의 기록에서는 ‘해미읍성의 서문 밖에서 교수형을 당했다’고 하면서 그 장소가 정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또 최 야고보는 동문 밖으로 끌려나가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수형은 일반적으로 옥중이나 옥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제로 교수형은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옥 벽에 뚫은 구멍, 혹은 다음과 같이 널판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맨 다음 옥졸들이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참소(斬所)에 나아가 널판 앞에 당도하니, 그 가운데 구멍 내고 줄을 넣어 1인을 밖에 서고, 1인은 안에 서서 줄로 목을 걸어주며 금장(禁將)이 소리 크게 하며 ‘당기라’ 할 때, 성호 긋고 예수?마리아 소리 한 번밖에 못하고 죽으니라. 죽은 후에 그 시체는 17인을 모두 한 광중에 묻으니라. ……옥졸이 청령(聽令)하고 금장 소리 높이 하며 죄인 하나씩 내어 널판 앞에 세우고, 옥졸 중 하나는 밖에 서서 줄을 잡고, 하나는 안에 서서 줄로 목을 걸어 당길 때 최 마리아의 말이……그러한 후 목을 걸어 죽이니라.52)


  한편 방영창(안토니오)의 경우에는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자리개질(장사형의 일종으로, 굵은 자리개로 곡식 단을 묶어 타작하는 방법)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해미읍성의 서문 밖은 해미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중요한 ‘순교 터’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미의 참수 터는 정확히 어디였는지 밝힐 수 없다. 서문 밖 교수형과 장사형의 예에서 본다면, 참수 터도 이 부근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나 다음에 설명한 것과 같이 해미의 생매장 터는 훗날의 고증과 발굴에 의해 해미의 조산리로 정확히 밝혀지고 있다.


  2) 생매장 터 순례지(성지) 조성 과정

  교회 안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둔 해미의 순교 사적지는 바로 서문 밖 순교 터와 읍성 남쪽에 있는 조산리(현 서산군 해미면 造山里)의 순교 터, 즉 해미의 생매장 터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 1세기 동안 생매장형 순교자는 오직 홍주(지금의 홍성)와 해미의 순교사에서만 탄생하는데, 그 중에서 해미 생매장 터의 위치가 목격 증인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32년 서산의 ‘상홍리 본당’(현 서산동문동 본당의 전신)53)에 부임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바로(P. Barraux, 范 베드로 : 1903-1946) 신부가 누구보다 먼저 여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바로 신부는 1935년에 들어와 해미 순교자들의 목격 증인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 때쯤(1868년) 순교 장면을 직접 목격한 해미 서문 밖의 리주필(李周弼)과 도당리(현 서산군 음암면 도당리)의 박승익(朴承益, 1935년 85세), 부모에게서 순교 행적을 전해들은 조산리의 이치심(李致心)과 해미의 이병준(李秉俊), 역말(현 서산군 해미면 동암리) 오영배(吳泳培), 친구에게서 전해들은 한범동(韓範洞)54), 옛 어른들에게서 전해들은 조산리의 임인필(任仁弼)과 박제만(朴齊萬), 해미의 이기남(李基南)과 이교성(李敎成), 젓내(현 해미면 전천리)의 석(昔) 씨, 조산리의 김기호(金基鎬) 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이들로부터 들은 증언을 토대로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자들의 순교 장면은 물론 조산리에서 있은 교수형 및 생매장 과정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그 문(즉 해미읍성의 서문)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토포 병방 박영완이란 이가 몇 명의 사령들을 데리고 무죄한 사람들을 애매하게 죽이는 중이다. 살기는 참으로 등등하다.……이주필 씨의 집은 서문 밖에 있으니 자세히 알기 위해 거기로 가보자, 아까 보던 박영완은 그대로 있어 거기는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고 비창한 적막이 넘치는 중에 간간이 헐떡이는 소리가 비명할 뿐이었다. 나가서 보니 좌편에는 죽은 사람이 즐비한데,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서 죽은 사람마다 눈에 대어 보다가 한 사람이 아직 덜 죽은 것을 보고 마구 때려서 죽여버린다.……죽은 시체가 쓰려져 있는 곳은 (이주필 씨가) 서있는 데서 15보 가량밖에 되지 않으며, 성 밑에도 시체 몇이 또 있었다. 어떤 때 목을 매어 죽일 때에는 숨이 막혀 헐떡이는 소리가 혹 들리기도 한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사령들이 사람 수십 명을 길게 엮어서 끌고 조그마한 길로 바다를 향해 가니 저게 웬일일까? 영장은 없고 형역(刑役)들만이 끌고 간다. 동네 사람들은 형역들이 무서워서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중에 어떤 이씨 한 명과 박승익이라는 17세 된 아이와 이주필이 따라가서 보니 들을 지나 바다쪽으로 가다가 내(즉 황락천과 산수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해미천)를 건너니, 이 내는 산에서 내려오므로 비가 올 때는 물이 많고 (물살이) 세어 무서운 내이다. 이 내를 건너면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데(즉 조산리 숲), 거기에 구덩이를 몇 개 파고서 끌고 온 사람들을 묻어 죽이려는 것이다. 끌고 온 이 성교(聖敎)하는 사람들을 구덩이 옆에 세우고 ‘지금이라도 성교를 하지 않는다 하고 예수와 마리아를 욕들 하여라. 지금이라도 놓아주마’ 하였다. 그래도 오히려 공경스럽게 예수?마리아를 부르면서 ‘죽으면 천당으로 간다’고 하므로 목도 매어 죽이고, 그대로 산 채로 파묻기도 하였는데, 이웃 동네에 사는 조산(여아)이와 그 아이의 동무 몇이 그 광경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하며, 돗투성이(현 해미면 저성리) 김씨(여아)도 보았는데, 묶어서 산채로 묻어 죽이는 그 틈에는 처녀들도 많이 섞였다 하며……55)


  바로 신부는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조산리의 교수형과 생매장 터 현지를 확인하였다. 그런 다음 1935년 4월 1일에는 증인이 되어 줄 수 있는 여러 신자들과 함께 그 터를 발굴한 결과, 다음과 같이 순교자 유해 수십 구의 진토를 확인하고 그 중에서 10여 구의 유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이 유해나 현지에서 발굴된 진토 안에 1868년 5월 생매장으로 순교한 문 마리아, 박 요한, 방 마리아 등의 유해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의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 없이 몇 십 명이 되나, 아직 남아 있어 수습된 유해는 10여 명 가량밖에 안 된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만, 증인들의 가르침에 의하여 똑똑히 안 후에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호의적 승락을 얻어 발굴한 결과 유해를 많이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고상이 썩은 형적까지 보였으니, 이런 것을 친히 본 증인들은 교우 중에 대곡리(현 해미면 대곡리 한티) 김동석(1950년대 대곡리 공소 회장), 박명화, 정순석, 서산 읍내 박병섭 씨 등이다.56)


  바로 신부와 상홍리 본당(본당 회장 백낙선 요한) 신자들은 이와 같이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 수습한 뒤 4월 1일에는 대곡리 공소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인 1935년 4월 2일57) 만장을 앞세운 유해 상여를 ‘해미읍성 → 음암면 유계리 → 일곱거리’를 거쳐 음암면 상홍리의 가잿골(당시 성당 소재지) 백씨 문중 묘역(상홍리 산 105번지)의 최상단에 안장하였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로 묘지 설치 허가 없이는 이장할 수 없었으므로 사설 묘지 허가를 받은 문중 묘역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이후 서산 동문 본당의 10대 주임 신균식(申均植, 도미니코) 신부는 1955년 순교자 묘지 뒤에 십자가 순교탑(높이 약 5m)을 세우고, 묘지 앞에는 ‘병인년해미순교자묘’라고 새긴 비석을 안치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는 상홍리의 백낙관(시몬)이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원들의 협찬과 본인의 희사로 순교자 묘역을 새로 단장하였다.58)

  이에 앞서 1950년대에는 해미 공소 신자들이 해미읍성 안의 옛 옥 터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그 자리에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는데, 읍성 복원 사업이 시작된 이후인 1982년에 공소 강당이 철거되면서 순교 기념비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또 1956년 6월 14일에는 서문 밖에 있던 자리갯돌을 동문 성당 구내로 이전해서 안치하였으며, 1975년 10월 24일에는 해미 순교자 현양대회가 개최되고, 조산리의 옛 순교 터에 건립된 해미 순교탑 축성식이 대전교구장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의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이어 1984년 7월에는 해미 성당 준공 축성식이 있었고, 다음해 4월 동문 본당에서 해미 본당이 분리 설립됨과 동시에 윤종관(尹鍾寬, 가브리엘)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해미 순교 터가 순례지(성지)로 조성될 수 있었다. 해미의 자리갯돌은 1986년 8월 29일 본래 있던 읍성 서문 밖으로 다시 옮겨져 안치되었다.59)

  1995년 9월 18일, 대전교구에서는 상홍리 현지에서 순교자의 무덤을 파묘하고 유해를 발굴한 뒤 자기 항아리에 봉안하였으며,60) 이튿날 해미 성당과 상홍리 공소, 동문동 성당으로 옮겨 철야 참배 기도를 가졌다. 그런 다음 9월 20일에 개최된 서산?당진 지구 무명 순교자 현양 대회 때 해미 순교탑 앞의 석관 무덤으로 옮겨 안치한 뒤 교구장 경갑룡(景甲龍, 요셉) 주교의 집전으로 무덤 축성 예절을 가졌다. 동시에 상홍리의 본래 무덤 안에는 부장품 옹기 그릇과 진토 자기 항아리 각각 하나, ‘상흥리 순교자 묘역 조성까지의 내력’을 적은 한지 비닐 주머니를 안치하고, 무덤 앞에는 새 기념비를 건립하였다.61)

  이상의 과정을 거쳐 해미 조산리의 옛 생매장(교수형 포함) 순교 터는 그 본래 자리가 확인되면서 유해와 진토가 발굴될 수 있었으며, 마침내는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순례지(성지)로 자리 매김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유명 순교자(문 마리아, 박 요한, 방 마리아 등)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터, 특히 생매장 순교 터가 정확히 확인된 것은 한국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던 일로, 이는 일찍부터 한국 순교사와 순교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상홍리 본당 바로(밤 베드로) 신부의 선구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35년 유해 발굴 당시 목격 증인들의 나이가 이미 85세였으므로, 그 시기가 더 늦었더라면 순교 터를 정확히 확인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맺 음 말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의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치스코)이다. 이어 1814년에는 김진후(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으며, 그 외에도 1811-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베드로) 첨지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기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순교록에 나오는 57명,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나오는 70명 중에서 중복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 5명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처럼 모든 기록을 통해 성명이나 세례명 중 적어도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해미의 유명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그리고 병인박해기에 순교한 전국의 순교자수가 약 8천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해미의 병인박해기 순교자수를 추정해 본다면 최대 405명에 이른다는 추정도 가능해진다.

  교회 순교록만을 통해 볼 때,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67명 중에는 교수형(33명)으로 순교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그리고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난다. 해미읍성 안의 진영 동헌 앞은 바로 순교자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한 장소가 되며, 읍성 안의 옥은 그들이 순교의 영광을 기다리던 신앙 증거 장소요 중요한 순교 터로 기억되어야 한다. 또 서문 밖의 교수형(혹은 참수형) 터와 문 마리아, 박 요한, 방 마리아 등이 생매장으로 순교한 조산리의 생매장(교수형 포함) 터도 교회사는 물론 지역사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순례지로 자리 매김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생매장 순교 터와 그곳 순교자의 유해가 확인 발굴되고 보존되어 왔다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해미 지역 혹은 해미의 순례지(성지)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순교자수나 순교 터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순교자들은 천주 신앙을 수용함으로써 조선의 불평등 사회와 불합리한 유교 질서를 극복하거나 스스로의 인격을 신앙의 자유 안에서 보호하고자 했던 계층이었다. 그들은 천주 교리가 진리라 믿고 굳은 용덕으로 이를 지키려 했으며, 그 진리를 통해 조선 사회의 모순이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해미 순례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교회사적 의미를 함께 담고 있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해미의 순교사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일부분이기도 하지만, 해미 지역사의 한 부분도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픔의 역사이건, 어느 한 부분의 역사이건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야만 한다.

  현재 초기 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3명의 해미 순교자(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는 교황청 시성성에 의해 ‘시복 시성을 추진하는 데 아무런 장애 없음’이 인가된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고, 그 시복 재판이 한국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위임되어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들을 위한 자발적인 기도와 현양 운동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연구가 이들의 시복을 위한 자료로 활용되고, 그 현양을 위한 순례의 활성화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

 

1) 해미 지역의 교회사나 순교사에 대해 조사한 자료나 기존의 연구들은 다음과 같다. 이 중에 서 ≪해미순교자약사≫는 ≪경향잡지≫ 제29권 815호(1935. 10. 27)부터 제30권 822호(1936. 1.28)까지 모두 7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해미 치명자 유해”를 묶어 펴낸 것이다.

  ? 바로(Barraux), ≪海美殉敎者略史≫, 서산천주교회, 1935.

  ? ≪대전교구사 자료 제3집 “순교자들의 전기”≫, 천주교 대전교구, 1991.

  ? 조  광, <천주교 분야>, ≪瑞山?泰安文化遺蹟≫ 下, 서산문화원?충북대학교 고미술사학과, 1991.

  ? 조  광, <19세기 해미 지방에서의 서학 신봉>, ≪남도영교수고희기념 역사학논총≫, 민족문화사, 1993 ; ≪순교지와 순교 유물≫,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에 재수록.

  ? 차기진, <丙寅迫害와 충청남도 殉敎者에 대한 연구>, ≪宋基寅華甲紀念 “역사와 사회”≫, 현암사, 1997.

  ? 차기진, <내포 지역의 복음 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 ≪내포 천주교회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천주교 대전교구 솔뫼성지, 2002.

  ? ≪해미 지역 성지 순례≫,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2002.

  ? 배동순?복익채 외 편, ≪홍성 천주교회사≫, 홍주향토문화연구회, 2004.


2) 조광은 특히 병인박해 기간 동안에 탄생한 해미 순교자 중에서 모두 117명의 씨명(氏名)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으며(<19세기 해미 지방에서의 서학 신봉>, 435쪽), 차기진은 병인박해의 순교록에 나타나는 공주 순교자는 193명, 홍주 순교자는 89명, 해미 순교자는 52명 에 이르며, 이 숫자를 전국의 병인 순교자 8천 명에 대비해 보면 공주 순교자는 최대 1,503명, 홍주 순교자는 최대 692명, 해미 순교자는 최대 405명에 이른다고 추정하였다(<병인박해 와 충청남도 순교자에 대한 연구>, 145-146쪽). 그러나 병인박해기에 탄생한 홍주 순교자의 경우, 성명이나 세례명을 확인할 수 있는 순교자에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무명 순교 자를 합한다면 도합 199-200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차기진, <홍성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연구>, ≪홍성 지역의 천주교 순교사와 순교 터 개발≫, 천주교 대전교구 홍성지구, 2005, 41-46쪽). 마찬가지로 해미 순교자수도 새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


3) ≪태종실록≫ 권14, 태종 7년 9월 5일 을묘.


4) ≪효종실록≫ 권7, 효종 2년 11월 13일 정해, 11월 19일 계사 ; ≪여지도서≫, 충청도 병영, 관  직.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병영 시기인 선조 11년(1578년)에 해미읍성에서 훈련원 봉사(奉  事)로 근무하였다.


5) ≪해미현읍지≫(영조대), 관직.


6) 현재 해미 읍성의 주문인 남문, 즉 진남문(鎭南門) 안쪽 상단의 장대석의 각석에 ‘황명홍지 사년신해건’(皇明弘治四年辛亥建)이란 명문에서 1491년에 중수가 완료된 사실을 알 수 있다.


7) 해미읍성 소재(진남문 우측), <해미좌영루첩중수비>(海美左營樓堞重修碑).


8) ≪여지도서≫, 충청도 해미, 성지?공해?창고. 한편 ≪문종실록≫(원년 9월)에는 “해미현 내상 성(內廂城) : 둘레 3,352척. 높이 12척. 여장(女墻) 높이 3척. 적대(敵臺) 18개소 중 16개소는 아직 축조되지 않음. 문은 4개소인데 옹성(甕城)은 없음. 여장 668개소. 해자 둘레 3,626척. 성내 우물 3개소”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해미현, 관방) 에는 “병마절도사영 : 해미현 동쪽 3리. 석성. 둘레 3,712척. 높이 15척. 우물 3개소. 군창 있 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읍성의 둘레는 1,800m, 높이는 5m, 성내 면적은 약 5만 9천 평 이고, 1973년부터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성내의 민가와 관공서 등이 철거되었으며, 동헌,  아문, 객사, 책실, 정자(청허정), 동?서?남문, 포루 2개소, 부속 건물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9) 읍성 안의 동헌과 옥의 위치에 대한 설명은, 다음 각주 50의 인용문을 참조.


10) 차기진, <내포 지역의 복음 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 <朝鮮後期 內浦天主敎會의 變貌와  그 性格>(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제30회 백제 연구 공개 강좌’, 1997), <이존창의 천주교수용과 교회 활동>(≪교회사연구≫ 19, 2002) 등을 참조.


11)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는 박취득이 1797년 홍주 관아에 자수하여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교한 것  처럼 기록하였다(Ch. Dallet 저, 安應烈?崔奭祐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1979, 410-416쪽). 그러나 다블뤼 주교의 다음 기록들에 따르면 해미가 아니라 홍주에서순교한 것이 분명하다.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필사본), 조선, 1858-1859년, p. 95 ;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조선 순교사 비망기≫, 필사본), 조선, 1859-1860년, p. 75. 관변 기록에도 박취득은  1799년 홍주에서 경폐(徑斃, 사형 집행 이전에 자살하거나 옥사함)한 것으로 나온다(≪승정  원일기≫ 96권, 정조 23년 6월 21일 무신 ; ≪일성록≫ 28책, 동일조, 忠淸監司李泰永疏曰…… 道內之年久滯囚者 惟是存昌及洪州之朴取得兩漢 而取得則前月已爲徑斃……).


12)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 50.


13) 李晩采 편, ≪闢衛編≫ 권4, 戊己兩年湖西治邪 ; 黃嗣永, <帛書>, 6행.


14)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 pp. 140-141 ;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 79.


15)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 pp. 139-140 ;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 79 ; ≪推案及鞫案≫, 1801년 3월 15일, 207쪽, 주문모.


16)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 pp. 124-126 ;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p. 188-189.


17) ≪순조실록≫, 순조 원년 12월 22일 갑자.


18) ≪日省錄≫, 순조 신미 4월 7일, 5월 23일, 11월 3일, 12월 15일, 12월 20일(≪承政院日記≫,가경  16년 동일).



20)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p. 223-225.


21)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p. 226-227.


22)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p. 260-263. 위의 기록에 따르면, 배나다리에서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정윤보(스테파노)는 고문의 후유증을 40년 가까이 겪고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더 이상의 행적을 찾을 수 없으므로 순교자로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23) 송 요셉과 함께 옥중에 있던 또 다른 신자 한 명은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어느날  탈옥하여 오랜 뒤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순교자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24)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p. 268-270. 한편 바르바라와 함께 옥살이를 한 배청모(아우구스티노)는 순교자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당진 진목(현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으로 1799년의 청주 순교자 배관겸(프란치스코)의아들인 배청모는 부친과 함께 청주 병영에 수감된 적이 있었으며, 부친 순교 후 도피하여 공주와 면천의 강문(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강문리) 등지에서 살다가 182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 진영에서 형벌을 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2-3년 뒤 석방되어 1829년 7월 26일(음력 6월 26일) 63세로 선종하였다.


25)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 357.


26)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 pp. 455-457.


27) 1866년(고종 3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엄격하게 말해서 ‘1866년에 전개된 박해’를 말한다. 그러나 이전의 박해와는 달리 병인박해는 1866년에 공식적으로 종결되지 않고 1867년(정묘년), 1868년(무진년)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1868년의 박해를 ‘무진박해’(戊辰迫害)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고에서는 1866년 이후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박해를 ‘병인박해’의 연장으로 이해하였다.


28) ≪右捕盜廳謄錄≫, 병인 정월 11일 ; Ch. Dallet, 앞의 책, 하, 426쪽. 


29) ≪병인치명사적≫ 권6, 58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715.


30) 교회에서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諡福) 조사를 시작한 것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다시 입국하는 1876년부터였다. 이후 시복 조사는 1876년에 시작된 예비 조사, 1899년에 시작된 조사 수속(교구 재판), 1919년 이후의 교황청 수속(서울교구에서 위임을 받아 1921년부터 시작한 교황청 재판), 그리고 교황청 재판 단계로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순교자  들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수집 정리되었다. 본고에서 말하는 “교회 순교록”은 이렇게 수집 정리된 자료들을 말한다.

 현존하는 병인박해기 순교자들에 관한 순교록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우선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예비 조사 단계에서 정리한 ≪치명일기≫(1895년 간행)가 있다. 그리고 조사 수속 단계에서 교황청 재판(교구 위임 재판) 단계까지 계속 보완 수집된 자료들을 책자 형태로 묶은 ≪병인치명사적≫(절두산순교기념관 소장, 필사본)과 드브레(Devred, 兪世俊) 보좌 주교가 정리해 놓은 일련의 증언 자료집,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한국교회사연구소, 1987)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내용이 풍부한 ≪병인치명사적≫은 1923-1925년 사이에 총 25권으로 필사 정리되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22권뿐이다. 나머지 3권은 순교자 시복에 직접 관계된 것으로, 교황청 비밀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31)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57명의 일람표는 [첨부]한 ‘병인박해기의 해미 순교자’를 참조. 다음의 순교 행적이나 순교자들의 거주지 관련 내용도 이에 따른 것이다.


32) ≪병인치명사적≫(권 23, 86쪽)과 ≪박순집 증언록≫에 나오는 ‘김 비비앙 첨지’(해미 이문안출신, 1866년 11월 20일 교수)는 ≪치명일기≫(정리 번호, 700번)와 ≪병인치명사적≫(권1, 51 쪽),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정리 번호, 38번)에 나오는 ‘김정옥 파비아노 첨지’와 동일인  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병인치명사적≫(권1, 96쪽)에 신리 출신의 해미 순교자 ‘손자중’은 ‘손사중’의 잘못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좌포도청등록≫에 나오는 신리 출신의 손자중(孫  子仲, 바오로, 52세, 배교)은 위의 순교자 손사중과는 다른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좌포도청  등록≫, 무진 윤4월 12일).


33) 이 밖에도 1866년의 순교자 유 치릴로 내외는 ‘다른 여러 교우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한다  (≪병인치명사적≫ 2권, 69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685?686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 그러나 여러 교우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34) 다음 내용 중에서 방영창(안토니오) 관련 내용은, 방윤석 신부 소장, <방재희 필립보의 고증 자료>(필사본), 1985 참조.


35) 서산 강당리(해미 강당리)는 1866년 11월 21일에 심 회장, 김선양(요셉) 부부 등 도합 17명이 함께 체포되어 홍주로 끌려가 교수형으로 순교한 교우촌이다(≪병인치명사적≫ 1권 154, 157쪽, 2권 150쪽, 23권 115쪽, 26권 114쪽 ; ≪치명일기≫, 정리 번호 680번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16?117번, 148번, 161번). 그리고 홍주 원머리는 대전교구 박재만(타데오) 신부의 고향으로 박해기 해미?홍주?수원 등지에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교우촌이고(그 중에서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 마티아의 무덤은 현재 신평 성당 구내에 있다), 덕산 황무실(황매실)은 1800년의 순교자 이보현의 고향이요 박해 시대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1858년에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1863년에는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선종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3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리델 문서 I≫, 1994, 67쪽, 99쪽.


37) 조광, 앞의 글, 432쪽.


38)≪고종실록≫ 권3, 3년 12월 28일 계축.


39) 현재 이 자료는 절두산순교기념관과 규장각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데, 전자의 표지에는 “공  충도사학죄인성책”이란 제목이, 후자에는 “公忠道各鎭各邑去四月朔內所捉邪學罪人居住姓名 及譏校姓名?錄成冊”(규장각 도서 번호 17149)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러나 둘의 내용은 동일하다. 아마도 이 성책은 충청 감영에서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된 신자들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40) 훗날의 증언 기록에는 병인박해기 해미 순교사에서 토포 병방 박영완이란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6호, 1935. 10. 28).


41) 병인박해 직전인 1865년의 전국 신자수는 약 2만 3천 명으로, 이 중에서 8천 명 내외의 신  자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치명일기≫에는 그중 877명만이 수록되어 있으며,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는 986명이, ≪병인박해 치명사적≫에는 약 990명만이 수록되어 있다(차기진, <병인박해와 충청남도 순교자에 대한 연구>, 145쪽).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실제  순교자수 약 8천 명에다 ≪치명일기≫에 수록된 순교자수를 대비하여 계산해 본다면, 해미의 병인박해기 순교자수는 최대 405명 정도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앞의 주 2를 참  조).


42) 차기진, <병인박해와 충청남도 순교자에 대한 연구> 및 <조선 후기 내포 천주교회의 변모와 그 성격> 참조.


43) 조광, 앞의 글, 437쪽.


44) 순교자가 아닌 배교자의 경우에는 태형(笞刑)?장형(杖刑)을 가한 뒤 석방해 주거나 도형(徒刑) 혹은 유형(流刑)에 처하였다. 또 성직자(선교사)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와 같은교회 지도층은, 사형이 확정된 후 대기하였다가 추분 이후부터 입춘 이전에 날짜를 정하여 사형을 집행하는 대시(待時) 집행이 아니라 부대시(不待時) 집행의 판결에 따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고, 10악(十惡)에 해당하는 모반죄 혹은 부도죄(不道罪)의 판결을 받는 경우에도 부대시에 따라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였다.


45) 조선 시대 본래 지방의 군?현 수령은 장형 이하, 관찰사는 유형 이하의 옥송만을 처리할 수 있었고, 사형은 삼복제의 절차에 따라 왕의 윤허를 얻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결안 정법이 흔해지면서 삼복제의 효력이 점차 약해지게 되었다.


46) 조선 시대의 결옥일한은 대사(大事)인 사죄(死罪)가 한 달(30일), 중사(中事)인 유죄(流罪)나 도죄(徒罪)가 20일, 소사(小事)인 장죄(杖罪)가 10일이었다(≪大典會通≫ 권5, 형전, 결옥일  한).


47)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수록된 70명의 해미 순교자는 모두 복법(伏法, 즉 처형)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순교 형식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 복법은 ‘정법(참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처형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48)≪치명일기≫, 정리 번호 709-712 ; ≪병인치명사적≫ 6권, 32쪽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63번.


49) ≪치명일기≫, 정리 번호 694번, 698번 ; ≪병인치명사적≫ 11권, 31쪽 및 65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63번.


50) <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6호, 1935. 10. 28.


51) ‘호야나무’의 본래 이름은 ‘회화나무’이다.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 이 나무는 일찍부터 상서목으로 여겨져 학자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에 오른 뒤에, 혹은 은퇴한 뒤에 자주 심었다하여 학자수(學者樹)라고도 한다.


52) 1866년 11-12월 서산 강당리 출신의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신자가 이러한 방법으로 홍주에서 순교하였다(≪병인치명사적≫, 1권 157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17번).


53) 서산동문동 본당은 1908년 당진의 구합덕 본당으로부터 결성군의 ‘수곡(水谷) 본당’이 분리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폴리(D. Polly, 沈應榮 데시데리오) 신부가 부임한 데 먼기원이 있다. 그러나 1914년 결성군이 폐군되고, 폴리 신부도 제1차 세계대전에 소집되면서  수곡 본당은 폐지되고, 그 사목 관할 구역은 다시 구합덕 본당에 통합되었다. 이후 1917년  10월 초에는 서산군 팔봉면에 ‘금학리(金鶴里, 쇠길리) 본당’이 설립되는데, 이 본당이 바로  서산동문동 본당의 직접적인 전신이 된다. 그 초대 주임 안학만(安學滿, 루가) 신부는 10월  2일 금학리에 부임하였다. 이어 1919년 10월 2대 주임으로 부임한 폴리 신부는 1920년 후반에 금학리 본당을 음암면 상홍리(上紅里)로 이전하였고(상홍리 본당), 3대 멜리장(P.M?lizan, 梅履霜 베드로) 신부에 이어 1932년 초 4대 주임으로 부임한 바로(범 베드로) 신부는 1932년 6월 서산읍 동문리(東門里)의 현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을 신축한 뒤 1937년이곳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동문 본당). 이처럼 ‘상홍리 본당’은 1920년에서 1937년까지17년간 존속되었다.


54) 한범동은 해미읍성 인근에 있는 오동(현 해미면 烏鶴里의 향교말)의 한씨 집성촌에 거주하던 이주필의 친구.


55) <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6호, 1935. 10. 28.


56) <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7호, 1935. 11. 28.


57)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해미에서 발굴하여 상흥리로 이장한 날짜는, 그 내력을 적은 한지  에는 4월 2일로, 묘비에는 4월 20일로 기록되어 있다.


58) 1995년 9월 18일 상홍리 순교자 무덤을 파묘하여 유해를 이장 뒤 9월 20일자로 서산동문  본당 주임 김종국(바르나바) 신부가 기록하여 상홍리 본래의 무덤 안에 안치한 한지의 내력 참조(방윤석, <상홍리 ‘병인년 해미 순교자 묘’ 발굴에서 이장까지>, ≪교회와 역사≫ 248  호, 1996. 1).


59) http://www.dm1004.or.kr.


60) 당시 순교자 유해 발굴 작업에는, 대전교구 사법부 대표 윤인규(라우렌시오, 솔뫼 피정의  집 관장) 신부, 서기 김종수(아우구스티노, 해미 본당 주임) 신부를 비롯하여 홍보국장 방윤석 신부, 김종국(바르나바, 서산 동문 본당 주임) 신부, 이원무(베다, 서산 동문 본당 보좌) 신부, 정필국(베드로, 군종 제대) 신부, 그리고 여러 수도자와 본당 신자들이 참석하였으며, 이튿날에는 교구 총대리 김병재(바오로) 신부가 유해 발굴 과정을 확인하였다(방윤석, 앞의 글 참조).


61) 현재의 해미 순례지 부지는 1985년 해미 본당이 설립된 이후에 발족된 순교 현양회의 노력과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의 결과로 인해 1998년 말에 마련된 것이다(약 7천 평). 이어 1999년 5월부터는 그 전해 2월에 해미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안상길(安相吉, 사도 요한) 신부(2001년 2월 성지 전담 신부로 임명)의 주도로 기념 성당 건립 기금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2003년 6월 17일에는 마침내 해미 순교자 기념 성당이 완공 축성(집전 : 경갑룡 주교)되고 순교자들의 유해가 새 성당 안에 안치될 수 있었다.


P. 윤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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