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균이 예전에 솔희랑 아울렛이나 대형 백화점에서 함께 쇼핑한적이 있었는가를 부지런히 떠올려 보았지만 솔희와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낸 적이 몇번 없었던데다 같이 쇼핑해본 기억은 전혀 없었다.
“제 카드로 낼께요!”
“에이, 아까부터 왜 그래…어차피 우리집 살림도구쟎아, 내가 내거나 반반씩 부담하거나”
“주방일은 제 취향에 맞는 것 골라서 제가 부담하는게 맞아요”
오래 떨어져 살던 이혼한 부부의 재결합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예전의 생활 방식을 잊고 새롭게 바뀌어진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일게다.
가정용 생활용품과 주방용품을 구입하는데서 솔희의 취향과 필요가 존중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또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오는게 맞는가라는 경제적인 측면까지 조율해야 했다.
결국 솔희의 단색 루이뷔통 핸드백에서 꺼낸 미국 크레딧카드가 직원 손에 쥐어졌다.
정균이 어설프게나마 조리도 하고 살림도 해왔지만 여자의 눈으로 볼땐 도구가 제대로 맞지 않거나 도구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부족한 물건도 많았다.
정균은 솔희가 고르거나 집어내는 물건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한사코 자기가 부담할 것을 고집하는데에는 놀랠수 밖에 없었다.
생활용품들은 부피가 꽤 나가기에 일단 차에 물건을 실어 놓고 그 다음 다른 곳으로 건너가 솔희가 시부모님 인사드릴 선물을 산다며 상당히 값나가는 물건을 구입하면서 카드를 건내는데 정균은 속으로 뜨악했다.
엘에이에서 솔희가 부잣집 자녀들의 전공자 렛슨으로 돈을 좀 만지고 있는 것은 짐작할수 있었지만 그녀의 변화된 모습과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동안 솔희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연기하는거겠지? 저러다가 싫증나면 무슨 행동을 벌일지 몰라)
아직도 정균은 솔희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었을 뿐더러 함께 하는 새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 긴장과 의심을 풀지 않았다.
시부모님께 드릴 선물이 마련되자 이윽고 귀금속 가게에서 독서모임 총회에 달고갈 목걸이와 귀걸이와 팔찌만큼은 정균이 부담을 했는데, 솔희의 예상 밖의 행동은 그 다음부터였다.
불과 3일만 한국에 체류할 일정으로 왔지만 출국일정이 한달 뒤로 연기되니 솔희의 여러 옷가지들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솔희는 외출복 한두벌과 여러벌의 실내용 드레스, 나이트 슬립, 란제리와 속옷과 색조화장품을 추가로 구입하기로 했다.
여자와 쇼핑하는 것은 한세월, 그렇다고 같이 고르기도 뭐한게 순전히 여자의 취향대로 고르는 것이기에 정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싫어 근방의 휴게실에 가 있었다.
하필 여성복과 여성용품점이 몰린 장소에 남편용(?) 휴게실이 있는건 우연이 아닐 듯 싶었다.
생각보다 오래지 않아 솔희의 새로 개통된 한국용 휴대전화 번호가 그의 폰 액정에 나타났다.
솔희가 오라고 부른 한 여성 속옷 판매점으로 들어가보니 이미 솔희는 구입하고자 하는 물건들을 확정한 듯 점원 앞에 서 있었다.
솔희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자기가 고른 속옷들을 정균 앞에 펴보인다.
“보셨죠? 이거 이쁠 것 같지 않아요? 미국에서 가져온 것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예뻐요. 요즘 한국 물건을 더 알아준다더니 정말 별천지에요.”
솔희는 물건자랑도 물건자랑이지만 정균더러 그녀가 산 물품들에 대한 결제를 요구했다.
이들이 속옷가게에서 나온뒤 정균은 솔희의 쇼핑백을 받아들어 한참을 걸어 차의 트렁크에 넣고서는 다시 휴게실로 가서 솔희의 호출을 기다려야 했다.
솔희는 그 다음엔 화장품을 고르러 간다하고 때가 되면 카톡을 치겠다고 약속했다.
쌔한 느낌의 정균은 솔희의 여러 카드 한도가 다 찼으리라 생각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솔희가 스스로 벌어들인 돈인데다가 그녀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었을 때 부리던 그 솔희의 성깔을 아직까지도 몸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30여분 후에 솔희로부터 어느 화장품 매장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받고 가보니 아까 속옷 매장에서와 비슷한 모습으로 솔희는 물건들을 캐시어 앞에 놓고 정균을 기다리고 있었고 정균의 결제를 원하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 4군데의 매장에서 솔희가 고른 화장품과 실내 의상값을 정균이 지불했고 이들은 다소 지쳤는지 음식 백화점으로 이동하여 쥬스를 시켜놓고 테이블에 앉았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정균이 먼저 운을 떼었다.
“당신, 카드 꽉 찼나봐?”
“네?! 이거가지고 카드 안 차요, 갚는것도 별 지장없구요”
“당신 물건값 내주는거 아까운게 아니라 오전에 가재도구 살때랑 이야기가 달라져서 궁금해서 그런거야”
“오호호호! 사는 물건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니깐 돈내는 사람도 달라지는거 맞죠, 안 그래요?”
솔희는 정균의 심각한 질문에 깔깔대고 웃었다.
그녀는 정균과 춘천 호반에서 처음 만나던 플로랄 원피스 차림이었고, 햇볕에 그을릴 것을 우려해서 파운데이션을 상당히 두텁게 바른 다소 균형이 맞지 않는 화장을 한 상태였다.
정균은 화장을 진하게 하고 외출을 나온 솔희의 얼굴을 보며 저러면 오히려 얼굴이 답답하고 덥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웃음을 살짝 띄운 솔희는 만족스러운 듯이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정균을 응시하고 있다.
이제 마치 변주곡이 서정적인 부분에 도달하여 조를 바꾸는것처럼 착 가라앉은 것이 다정하고 우아한 말투로 정균에게 말한다.
“행복하고 싶어서에요. 당신이 사주신 예쁜 란제리를 몸에 걸치고, 내 얼굴에 당신이 사주신 화장품으로 새로운 구도가 잡히고 색상이 완성되어 갈때마다, 제 아름다움이 당신에게 속한 것이라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서요.”
“아………(어떻게 저렇게 표현할수 있는거지?)!”
정균은 이 말에 돈이 없는 여자가 아닌데도 굳이 잠옷과 속옷과 화장품을 남편에게 부담하게 하려는 뜻이 참 가상하게 느껴졌다.
정균은 갈 때가 되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솔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솔희도 따라 일어서며 정균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정균의 손을 잡는대신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그녀의 오른팔 전체를 꽂고 휘감아 깊은 팔짱을 꼈다.
정균은 왼쪽 팔겨드랑이 사이에 낀 솔희의 팔꿈치와 손의 감촉은, 단순한 손의 감촉을 넘어서서 압박으로 느꼈다.
솔희가 자연스럽고 가벼운 파워로 정균의 팔짱을 낀게 아니라 마치 꽉 붙잡고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기 때문이다.
파주 아울렛 스토어에서 먼 주차장까지 가는 긴 걸음을 걷는 동안 반대편에서 남성들이 걸어올 때마다 솔희의 손목 스냅이 더 세게 그의 단단한 윗팔꿈치를 조이며 그의 어깨에 솔희가 상체를 더 밀착시키고 있는 것을 정균은 느끼고 있었다.
대낮의 아울렛에서 위협적이거나 껄렁해 보이는 사내들이 아니었음에도 솔희가 이상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을 안하니, 도통……무슨 대인공포증이라도 걸려서 온게 분명해. 아님 보스톤 골목에서 깡패들한테 당한적있나?)
서울로 진입하는 차 안에서 솔희는 어느 순간부터 긴장되고 초조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듯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솔희는 정균을 따라서 서울에 있는 시댁에 들러야 한다.
정균이 이혼의 이유로 솔희는 보스톤, 정균은 춘천에서 일을 각자하게 되었던 것으로 오래전에 부모님께 일러 놓았던 것이다.
다행히도 솔희는 시부모님에게 반갑게 받아들여졌고, 특히 부모님은 혼인예물로 그녀에게 선물한 Steinway & Sons 피아노를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하는지도 궁금해 했다.
“너희들 다시는 헤어지지 마라. 혼자 아둥바둥 해봐야 생애가 힘들뿐이지 편하고 멋있는건 잠깐이야. 각자 다른 사람 만나봐야 인연이라는 보장도 없고 다시 적응하기도 힘들거고”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님, 저에게 가정보다 중요한건 없습니다. 홀로 일을 하다보니깐 느끼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건, 정균, 너더러 하는 말이야!”
네 사람은 부모님 집 주방의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정균의 아버지는 솔희가 보는 앞에서 정균을 지적하며 야단쳤다.
“서로가 떨어져서 각자의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헤어졌다한건 그럴싸했다만 네 어미랑 나랑 다 알고 있었어. 아름다운 음악가 아내와 몇년 살아보니 싫증났겠다, 아이도 갖고 싶겠다 이런 생각으로 조강지처 버린거 알어. 화려한 핑계 말고 네 숨은 속마음 내가 모를줄 알았더냐?”
시아버지의 놀라운 말에 솔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균은 부모에게 이혼할 당시 솔희가 불임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정균의 어머니도 놀라는 눈치였지만 아버지가 말을 하는 것을 끊지 않았고 정균은 묵묵히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산다는게 고난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고난이 없으면 일상이 지루해지지, 그 지루함이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법, 너는 벌써 그때부터 지루함을 느꼈던거야. 네가 처를 처음 만났을때를 늘 생각해 보고, 특히 제 처가 불임이라서 버리는건 천벌감이다. 난 네가 그 천벌받을 뻔했다 살아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니 애비말 고깝게 듣지 말고!”
서울 정균의 부모의 집, 정균이 유학을 떠나오기 전에 지내던 방의 밤이 깊어간다.
나이트가운으로 갈아입은 솔희는 생얼에 기초화장품과 크림을 바르고 툭툭 얼굴을 쳐서 스며들게 하는 맛사지를 마친뒤 미소를 짓고, 침대에 먼저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정균의 옆에 자리잡고 누워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 왜 부모님한테 거짓말했어요? 제가 불임판정 받았다고........굳이 그렇게”
정균은 솔희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전 솔희가 임의로 임신중절 수술을 감행하고 거기에 더하여 영구피임시술까지 받았다고 하면 부모님이 분노할 것 같았기 때문에 부모님에겐 그냥 솔희가 불임판명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해 놓은 것이었다.
이제와서 다시 솔희에게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기에 정균이 이혼 당시 부모에게 이혼 사실을 알릴때의 상황을 솔희에게 이야기하면 그녀는 또 다시 상처받을 것이었다.
“여보, 그게 말이지, 그때 당시......”
솔희는 손가락을 들어 정균의 입을 살짝 막았다.
“됐어요. 아무 말씀 안해도 돼요.”
솔희는 정균의 어깨품으로 파고들며 그의 귀에 그녀의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고마와요............여보!”
솔희는 정균의 어깨에 팔벼게를 하고 가늘게 실눈을 뜨고 그의 검은 눈동자를 주시하며 섬섬옥수같은 길쭉한 왼손으로 정균의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스트레스 받아도 골반속 어딘가에 금속성 칼날과 날카로운 주사바늘에 찔리우고 썰리우는 듯한 고통이 재연되지는 않을 것이리라.
‘고마와요, 여보’라는 말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정균은 일 때문에 하루만 부모님 댁에서 지내고 춘천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솔희는 서울 시댁에 삼일간의 단독 잔류를 원했다.
3일 뒤에 부모님은 별도로 다른 일이 있어서 솔희를 데려다 줄 형편이 못되어 정균은 SUV 열쇠를 솔희에게 인계한뒤 전철을 이용해 춘천의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ITX편으로 집에 돌아가려 했지만, 정균은 솔희가 인천공항에 내려서 기나긴 시간 완행열차 여행을 하며 무슨 상념에 빠졌었는지를 그도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사흘간 시댁에 정균없이 머물며 솔희는 예전에 별로 함께할 시간이 없었던 시부모가 의외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솔희가 보스톤 생활과 엘에이 생활에서 절감한 것은 그녀의 백그라운드가 없었다는 것이다.
보스톤에서 에벌린에게 모질고 잔인한 매를 맞고 기절했을 때 그녀의 머리맡에 던져진 에벌린의 친정아빠의 명함은 솔희에게 감당할수 없는 많은 잔소리를 해준 것이다.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이제 없지만 세상 살다보면 무슨 크고 작은 해프닝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실감했기에 그녀에겐 어떤 경로로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그녀의 뒤를 보아줄 백그라운드의 존재가 필요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솔희는 시댁에서 마지막 3일차 되던날 한국에 도착할 당시의 복장인 흰바지와 흰 블라우스와 연한 베이지색 가을 패딩을 착용하고 소형 여행가방과 쇼핑몰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챙겨 정균의 SUV 짐칸에 실었다.
동남아로 여행을 떠나는 시부모님의 여행가방도 들어다 올리려 했지만 솔희의 근력으로서는 역부족이었고 자칫하다가 사고라도 날 것 같았다.
시아버지는 안쓰러운 웃음을 띠며 당신이 직접 두개의 대형 여행가방을 올려 실었다.
시부모님 모두 뒷좌석에 모신채 솔희는 인천공항을 향해 정균의 팔리세이드를 몰았다.
솔희가 한국에서 운전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핸들을 맡긴 시부모님은 차에 오르며 조금 긴장한 분위기였지만 솔희의 발군의 운전실력을 확인하자 마음을 놓는듯 싶었다.
네비를 보며 낯선 한국의 길을 운전하는 처지이면서도 자기를 믿고 뒷자리에서 편히 있는 시부모님의 안전과 생명이 그녀의 어깨에 있다는 사실은 솔희에게 한마디로 정의할수 없는 복잡다단한 심경을 안겨주고 있다.
인천공항에서 나와 다시 서울로 진입한 그녀는 모교인 OO예술 중고등학교의 담벼락 밑에 주차하고 걸어서 교문을 통과했다.
어떤 학생들은 솔희를 교사로 오인하고 인사하기도 했다.
(나한테서 그리도 선생님 티가 나나?)
예능계 학교의 특성상 각종 실기강사들이 자주 오가고 바뀌기 때문에 모르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솔희를 새로운 예능강사로 아는 모양이다.
솔희가 기억하기로는 중학교 시절부터 전담 음악교사들이 있었지만 실기를 가르쳐주는 외부 강사들이 많았고, 대부분 석사 학위 이상을 받았거나 해외파들도 많았던걸로 기억한다.
그런데도 솔희는 컨서바토리 마스터까지 하고 중고등학교에 강의나가는 동료들을 우습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우스웠던거지 뭐)
솔희는 자조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등나무 그늘 밑의 벤치에 앉아서 교사건물과 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체육시간이 되었는지 운동복 차림으로 발랄하게 뛰노는 아이들, 교복차림으로 쉬는 시간에 나와 떠드는 아이들을 마치 동상이 서서 아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그렇게 솔희는 머물렀다.
“예들아, 난 니들 선생님 아니고 선배 언니야. 지금의 꿈을 잊지마. 꿈을 쫓으면서 너희들 뒤를 잊지말고 너희들 옆을 꽉 쥐고 나갔으면 해. 깨어나서 꿈인줄 알았어도 옆자리와 뒷자리가 너희 현실이 되어줄거야.”
솔희는 나지막이 혼잣말로 후배들에게 당부를 하자마자 또다시 둔부와 허벅지가 저려올만큼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뭉게고 오래 앉아 있다가 하반신 마비라도 찾아올라치면 그때는 하체감각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업어줄 그가 옆에 없다는 것도 분명히 인식했다.
이제는 그녀의 옆자리를 찾아서 긴 자동차 여행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여보, 나는 다 끝냈어”
“기다려봐요, 저 준비 끝나고 당신 옷매무새 봐드릴께요”
“이러다 시간이…..나는 알아서 입었으니깐, 내 걱정말고”
“놉! 제가 오케이 해야 통과에요. 당신 허술하게 다니면 제가 욕들어요! 그러니깐 제 준비 끝날때까지 가만히 계셔요. 제 맘에 안들면 당신 처음부터 다시 옷을 입어야 할수도 있어요.”
정균은 여기서 솔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시간을 맞추는 것보다 분위기를 맞추고 거기에 합당한 준비를 완료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했다.
보스톤에서 생활할때 음악인들의 파티라면 웨딩드레스를 연상케하는 밝은 색의 긴 드레스나, 퍼플 빛의 버블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게 화장을 해왔다.
여긴 한국의 지방, 보수적인 성격이 강할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녀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을 해야만 했다.
엘에이 한인교회 반주자 시절, 연말 송년파티를 나갈때의 복장을 연상해 보니 요란하지 않은 화장과 고급진 정장 정도가 한국인들끼리의 부부동반 파티에 맞는것 같았다.
시간은 점점 지나가고 있는데 결정장애를 겪었던 솔희는 파티를 위한 코디의 구도가 잡히자 거침없이 준비를 시작했다.
화장도 요란하지 않게 비교적 단순하고 간단하게 하려고 했지만, 솔희는 독서클럽 문총무가 정균에게 하던 말이 거슬렸다.
어떤 정체불명의 여성들이 정균을 마음에 두고 있다 한다면 솔희는 그녀들의 기를 처음부터 팍 눌러놓을 생각에 오히려 그녀도 모르게 화장이 화려해졌고 글리터까지 목언저리에 뿌린 지경이 되었다.
솔희는 지난주 파주 아울렛에서 구입한 검은 단색에 얇고 흰 레이스가 중간중간 강조된 넓은 A형 원피스를 차려 입고 보색대비가 어울릴만한 가을용 베이지색 윙을 걸쳤다.
본인의 준비를 끝낸 솔희는 정균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아! 당신 그렇게 하고 다녔어요?"
"내 모습이 어때서?"
"바지부터가 완전 아재 스타일이에요"
"내가 그럼 아저씨지 아님 뭐야?"
"네에에?!! 허얼.......당장 벗어요, 그리고 머리 가르마 맘에 안들어요"
"여보, 솔희 제바알.......지금 넘 늦어"
솔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균의 혁대를 그녀의 손으로 풀고 바지의 단추를 딴뒤 지퍼를 내렸다.
힘없이 정균의 양복바지가 내려가자 솔희는 정균의 손을 잡고 바지를 벗는 것을 도와준뒤 자켓을 강제로 벗기다시피했다.
애걸복걸하던 정균은 아무래도 안되겠다싶어 솔희가 하라는대로 그녀가 골라준 양말을 신고 솔희가 꺼내고 있는 양복을 받아 입었다.
솔희가 정균의 가슴쪽 옷매무새를 잡아당겼다 풀었다 하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살피는 것이, 흡사 그녀가 피아노 연습에 몰입하고 있을 때의 표정과 똑같았기에 정균은 이 순간 솔희를 자극하면 안된다는 직감이 스쳤다.
솔희는 부부화장실의 세면대로 정균의 손을 잡아 끌고 가서 다시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정균의 머리카락 방향을 바꾼뒤 살짝 위로 세웠다.
"어때요, 맘에 드세요?"
"당신이 한거니깐 믿어야지"
세면대 거울에는 머리카락 모양이 뒤바뀐 정균이 어색하게 웃으며 솔희는 만족스러운듯 정균의 오른쪽 어깨에 턱을 기대고 왼손을 그의 왼편 어깨에 올려 놓은채 카메라앞 포즈를 취하듯 입술을 길쭉히 늘이고 웃는 모습이 비추고 있다.
솔희는 거울에 비치는 정균의 어색한 웃음을 즐기고 있는듯 했다.
이렇게 그는 솔희에 의해서 머리에서 발끝 양말까지 다시 개조되었다.
하나하나 정균의 옷매무새를 보고 고르고 입히고 다듬는 솔희의 손길은 생각보다 능숙했고, 마치 유치원 입학식에 아이를 데려가는 엄마의 표정과도 같았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돌변하게 만든 것인지 정균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런 솔희와의 경험은 흔치 않은 것이라 당황하면서도 솔희와의 관계에서의 이 변화를 즐기기로 했다.
그전 엘에이에서 결혼생활을 하던 시절, 두 사람이 정균쪽 주최의 모임에 가본적은 딱 한번 뿐이었고 이토록 정균의 코디에 부산을 떨며 하나하나 챙겨받던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마음 간사하다는 것이 앞으로는 외출할때 솔희가 지정해주는 것만 입어야 한다는 부담, 먼저 정균이 의상을 선택했을때 쏟아질 그녀의 잔소리는 살짝 그를 어지럽게 했다.
“와아, 이거 채소장님, 문총무한테 이야기들었는데 사모님이 계시니 아주 멋쟁이 되셔서 오시네! 물론 그전에도 멋있었지만....동행하신 미인께서 부인되시는 분?”
“네, 제 아내입니다. 여보, 인사드려, 우리 박회장님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민솔희라고 하고 채정균씨의 안사람입니다”
방 입구에서 멤버들을 기다리던 박회장은 솔희와 정균을 보자 깜짝 놀랐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대부분의 멤버들이 짝을 이루어 가득차 있었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하지 않고 있었다.
솔희는 마주치는 간부들과 간략한 인사와 자기소개를 한사코 ‘정균의 아내’로만 이야기한다.
문총무로부터 권장받은 자리를 인계받아 함께 착석하는데 모든 이들의 시선은 정균과 솔희에게로만 집중적으로 쏠리고 있었다.
정균은 그런 상태가 부담스러운 듯 했지만, 이미 남들 시선에 익숙할대로 익숙해 있는 솔희는 좌우를 살펴보며 고개인사 대신 여유로운 미소로 대신하고 있었다.
솔희는 옆자리와 맞은편 자리한 멤버 부부들에게 눈짓과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혼자 온 젊은 여성들을 찰나의 순간을 스크린샷 하듯이 살폈다.
짝없는 30대 여성들이 대여섯명은 되어 보였는데 그중 두명의 여자가 솔희를 살짝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정확히 캐치했다.
(저, 두 여자? 남의 남자 넘보지 못하도록 이 자리에서 확실히 각인시키고 가야지)
솔희는 열흘 뒤에 미국 엘에이로 가는 비행기를 홀로 타야하고 한달 반을 춘천에 정균을 홀로 남겨 두어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그간의 미국생활 전반, 렛슨일과 교회일 등을 마무리하고 귀국 이삿짐을 쌀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2주차에는 정균이 엘에이에 합류하여 이삿짐을 한국으로 부친뒤 라스베가스에 함께 가서 재혼신고를 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친정에 인사를 가야 한다.
솔희는 정균과 떨어져 있어야 할 그 6주의 기간이 너무나도 길다 느끼고 있기에 다시 그녀가 춘천의 살림에 온전히 합류하는 날 정균의 주변이 클린해야만 했다.
순간 마지막으로 요란한 하이힐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들어본 듯, 아닌듯한 젊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 회장님, 이렇게 나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넘 늦었죠? 시립교향악단 리허설이 늦게 끝나서”
“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안했어요, 이리로 들어오시죠”
솔희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 보았고, 총무로부터 자리를 안내받아 홀로 들어오던 화려한 투피스 정장 차림의 여자와 둘은 눈을 마주쳤고, 두 여자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머, 어머, 어머! 솔희 언니?!! 솔희 언니 맞어?”
“응, 나 솔희. 넌, 유성하!? 네가 여기엔 웬 일이니?”
“아, 모야!! 제이 오빠랑 에벌린 결혼식날 나더러 왜 한국 안갔냐고 채근하더니만, 또 여기선 왜 한국에 있냐는 듯이 묻네? 그런데......!”
제이와 에벌린이라는 말이 성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솔희는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고 주눅이 든 상태에서 죄인처럼 옆의 정균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제이라는 이름은 이들 사이에서 결코 언급되어서도, 생각해서도 안되는 이름이었지만 에벌린이라는 이름은 그 말만으로도 솔희에게 잠자고 있는 공포를 깨우는 악명이었다.
그럼에도 정균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기에 솔희는 잠시 안도했지만 공황장애가 또 밀려올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성하는 제이와 에벌린을 언급하는 순간 눈빛과 표정이 변화한 솔희의 분위기에 뭔가 심상치 않은 과거의 흑막이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성하는 솔희와 정균이 부부였다는 것도 놀라왔지만 오랫동안 이혼상태였다는 것도 그런것과 관련성이 있을거라고 순식간에 간주해 버렸다.
미국에서 학교다니던 시절, 성하는 솔희를 잘 알고 있었고 브라이언과 깊은 관계까지 맺고 있는 연인사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성하가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알게된 정균이 솔희의 남편이었다는 것도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솔희는 그런 해묵은 인간들의 해묵은 감정과 트라우마에 휩쌓일 여력이 없었다.
성하의 놀란 눈빛은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솔희를 만난데만 있지 않다는 것을 솔희는 잡아냈다.
성하는 바로 다이렉트로 정균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머, 채선생님! 삼주전에 홈플에서 봤어요. 아는체 하려다가 여성용품 매장에서 너무 심각하게 고르는 것 같아서요, 꽤 야한 속옷가게인데 그건 보통 사이한테 주는 선물이 아닐 듯 싶어서 혹시나 했는데....여태까지 모태솔로처럼 보이셨네?”
성하는 정균과 솔희를 번갈아 보았고, 성하의 눈길이 솔희를 향했을 때 솔희는 살짝 미소를 띠우며 자기 손가락으로 성하더러 확인하라는 듯 그녀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정균이 홈플에서 고른 그 야한 팬티는 지금 내가 입고 있다라는 뜻이다.
성하는 무척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총무가 지정해 준 의자에 착석했다.
개회사가 끝나자 정균은 그들 앞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솔희 소개를 해야 했다.
마이크를 넘겨받고 자리에서 일어선 정균은 연신 웃음 띈 얼굴로 솔희를 소개했다.
“여러분, 이렇게 너무 갑작스레 소개하게 되어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제 아내 민솔희를 소개합니다!”
환성과 박수가 터지자 정균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는 11년전 엘에이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러다 제 처가 보스톤에서 본격적인 연주자로서의 목표가 잡혔고 저는 춘천에 사업 아이템이 생겨서 고심 끝에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습니다. 지금 안사람은 미국 일을 정리하고 합류하게 됩니다. 이런 기회가 생기면 앞으로 빠지지 않을 것이고요”
많은 이들은 정균이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다가 뜬금없이 아내라는 여자를 데려온 것에 대한 궁금증을 대충 그런 식으로 풀어주었다.
사회를 보는 문총무는 솔희 본인이 소개를 할 것을 요청했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솔희는 일어나서 살짝 웃음을 지어준뒤 소개를 시작했다.
“여러분, 너무 늦게 여러분 앞에 나타나서 죄송해요. 정균씨가 말한 그대로에요. 음악의 고향이라는 곳에서 제 일에 집중해 봤지만, 정균씨와 재결합하여 부부의 인연을 다시 이어 가정을 꾸리기로 했어요.....잠시 미국 엘에이로 돌아가서 이민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 결혼식을 다시 올릴거에요. 그 담엔 이분의 내조에만 전념할 계획이구요. 그때 많이들 와서 축하해 주세요”
솔희는 자기소개 연설을 하는 도중 경쟁자 여인들을 티나지 않게 눈여겨 보았다.
두 여인은 솔희의 압도적인 학벌과 미모에 아예 기가 질린 모양이었지만, 하필이면 성하, 성하가 제일 짜증스럽고 신경이 쓰였다.
선후배가 이런 관계로 만나게 되는건 사실 흔한 일이었지만 가장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몇 년만에 보자마자 공공장소에서 제이니 에벌린이니를 입에 담은 것도 정균과 솔희 모두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때 솔희의 눈을 날카롭게 찌른, 넓은 룸의 가장 앞쪽 무대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는 이런 혼돈상태의 그녀에게 탈출구와 해방구를 제공하는 구세주로 다가왔다.
“제가 할줄 아는 것은 피아노 연주 밖에 없어요. 여러분에게 첫인사이자 선물로 드릴께요”
솔희는 자리에서 빠져나와 피아노 앞에 가서 다시 돌고 멤버들을 향해 정중히 무대인사를 했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어떤 멤버들은 솔희의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프로 연주자의 인사법 그대로라고 감탄했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잘되던 안되던 그건 솔희에게 더 이상 중요한게 아니었고, 솔희는 학생들에게 늘 그런 식으로 교육하고 있었던 바였다.
솔희는 즉석에서 생각난 공동체의 힘찬 단결을 노래한 알렉산더 볼드윈의 유니티를 연주했다.
70명, 솔희는 최저 30명 앉혀 놓고도 연주회를 해보았기에 70명의 청중은 그리 적은 숫자만은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음악애호가들의 집단이 아니라는데서 솔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연주자는 청중의 기호나 수준에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 역시 솔희는 지켰다.
당차고 힘있는 곡이 서정적인 파트로 들어갈때, 그녀는 생각보다 힘이 없었고 서정적인 곳에서도 감정표현이 잘 되질 않았다.
하지만 변주가 있는 곡에서 솔희의 과장되고 격정적인 감정표현이 순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 곡의 끝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서정적인 린 스테파노의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연주했고 그 동안 멤버와 그 배우자들은 솔희의 피아노 소리에 빠져 들어갔다.
솔희는 내친 김에 사랑의 세레나데인 슈만의 '사랑의 꿈' 이렇게 세 곡을 연탄곡으로 피아노를 쳤다.
서정적인 사랑의 세레나데로 넘어가면서 솔희는 지금 그녀가 보스톤에 있는지 엘에이에 있는지 한국에 있는지조차 인식을 못할 정도로 몰입했다.
솔희는 다시 찾은 소중한 가정, 이제 다시 시작하는 사랑과 행복감을 만끽하며 세레나데에 몰입하고 있었고 그 노래와 연주는 그녀의 지금 현실상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균은 솔희의 그 연주하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보며 입이 찢어져 연신 감탄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성하는 정균의 눈치를 살폈고, 정균의 그런 해피한 모습을 보며 정균이 왜 자신을 비롯한 숱한 여인들에게 냉담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솔희가 끝음 연주를 마치고 잠깐 가만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 앞이라고 해서 대충 칠수는 없었지만 고장난 팔근육과 떨어질 때까지 떨어진 음감과 둔해진 감성 치고는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몰입된 연주라는 느낌에 휩쌓이며 불꽃과 격정을 다해 지금의 아름다운 상태를 가미하여 연주한 곡이 끝나자 밀려오는 허무감.......
꿈을 꾸는듯이 몰입했던 연주가 끝난 뒤에 밀려 들어오는 아쉬움과 깊은 공허감 속에 마네킹처럼 굳은 채로 피아노 앞에 있었다.
독서 멤버들과 가족들도 모두 그런 심각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피아노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고 모든 동작을 멈춘 솔희를 따라 긴장과 침묵을 유지하며 숨소리마저 자제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리스마와 서정성이 조화된 솔희의 연주에 몰입하다 못해 무대 앞에 놓여진 그랜드 피아노와 솔희를 원래의 한 본체라고 착각할 만큼이나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파티 멤버와 배우자들, 아니 청중들은 솔희의 연주가 방금 끝났어도 여전히 그녀의 감정에 지배받고 있는 위중한 순간이었다.
(휴우........)
솔희는 마치 학교수업이 9시까지인데 잠에서 깨어보니 9시가 넘어버린것 같은 놀라움과 충격에 휩쌓였다.
(내가 꿈을 꾸고 있었던가? 이거 현실 맞지?)
솔희는 늦잠잔 학생이 뒤늦게 허둥지둥 하듯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내쉬며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솔희는 한때 프로였듯이 그 다음 동작에 대해 허둥지둥 서둘지 않았다.
고개를 바로하고 두 손을 정렬하고 일어서서 파티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멤버들은 무거웠던 긴장과 침묵을 깨며 환호하고 기립박수를 쳤다.
"와아아~~"
"BRAVA!!"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그녀는 치마 옆을 잡고 허리와 고개를 살짝 숙이는 무대 인사를 하였다.
기립해서 박수치는 멤버들도 있었고 그들은 솔희의 연주에 대한 감동과 감사를 전하는 한편 이순간 특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솔희의 자태에 매료되고 있다.
두번 깊은 목례를 멤버들에게 바친 솔희는 피아노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박회장님에게 성큼 다가가 목례를 올렸다.
그리고 그에게 팔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제스츄어를 보였다.
박회장은 솔희의 제스츄어를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알아차리고 일어났고 솔희가 그에게 서로 두 손을 잡아줄 것을 청하자 박회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르며 떨리는 두 손으로 솔희와 손을 맞잡고 멤버들을 향해 돌아섰다.
어떤 멤버들은 박회장이 처음 보는 미모의 여자 솔희 앞에서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기분은 좋은 그런 상태를 보며 깔깔대며 웃고 손뼉을 친다.
"아하하하핫! 고상하신 문인 작가선생님조차 미인 앞에서는 어쩔수 없나보네!"
어느 짓궂은 멤버가 얼굴이 빨개진 박회장을 그런 식으로 놀려댔다.
그 다음 솔희는 말없이 웃음을 만면에 띠며 먼 방향에 앉아 있는 문총무를 향해 팔을 뻗었다.
눈치가 빠른 문총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목례를 하며 두손을 높이 들어 솔희가 있는 방향으로 박수를 치며 회원들에게도 솔희에 대한 박수를 멈추지 말라는 듯한 싸인을 보냈다.
멤버들과 가족들은 이번 모임을 갖기 위해 백방으로 뛴 문총무를 향해 치하하는 박수를 보냈다.
이런 동작은 연주가 끝난 직후 협연자와 지휘자, 오케스트라 악장간의 악수나 포옹같은 프로 연주자들의 인사법이지만 이런 귀한 자리를 만들어 준 주최측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의미였다.
또한 이 연주는 솔희의 독무대가 아닌 모두가 함께 한 무대라는 것을 연주자가 겸손하게 밝히는 절차이기도 했다.
솔희는 대중 앞에서 연주해 본지도 까마득하게 오래되었고, 70명 안팎의 한정된 청중들 앞에서의 예정에 없던 즉석 연주였지만 지금만큼의 행복감을 느껴본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
적어도 그들은 솔희를 비평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고 솔희의 연주 행위 자체에 감사할 것을 알기에 느낀 쾌감이랄까?
음악을 모르는 그들은 솔희의 피아노 소리와 일체되는 솔희의 어깨짓과 수시로 바뀌는 표정을 감상하며 역시 전문가레벨까지 수련한 피아니스트임을 실감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수근거렸다.
(첫음부터가 범상치 않더니만!)
(악보 외워서 틀림없이 치는 수준이 아니라 음악을 완전히 자기걸로 만들어서 잡수시고 소화한 것 같아)
(인사하시는것만 봐도 숙달된 무대 매너시쟎아?)
(연주간 표정이랑 몸짓도 정말 자연스러우신게 프로는 프로야)
마지막으로 다시 기나긴 박수 속에 거듭 단독 인사를 마친 솔희는 미련없이 피아노 뚜껑을 내린뒤 그녀의 본래 자리인 정균의 옆자리로 돌아와 착석했다.
정균은 옆에 앉는 솔희에게 '수고했어'라는 의미가 담긴 미소를 보냈고 솔희 역시 빨간 글리터가 반짝이는 입술을 길게 늘이며 미소로 정균에게 짧막하게 화답했다.
솔희는 이 순간 한버터면 정균의 목을 잡고 입술에 키스할 뻔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연주회 직후 자연스레 그리 했기 때문이고 정균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희는 이 감격적인 순간 자신이 어디의 어느 위치에 있다는 몸으로 알고 있어서 한국식 예법에 바로 적응해 버렸다.
대신 솔희는 테이블 아래의 그녀 오른 손으로 정균의 왼손을 잡아 누구도 보지 못할 것처럼 꽉 붙잡았다.
뜨거운 두 사람의 감격의 기운이 테이블 아래 두사람의 허벅지 사이의 굳게 잡은 손으로 오가고 있다.
식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멤버들이 모두 잔을 들고 샴페인과 와인으로 ‘위하여!’를 외쳤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소주나 맥주를 반주로 삼으니 역시 한국인들은 어쩔수 없어 보인다.
식사 도중에도 많은 멤버나 커플들이 차례로 솔희에게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이 모임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정균은 많은 이들의 축하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정균의 완전히 바뀐 복장 코디는 솔희의 작품임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기에 솔희의 재주가 꽤 많다고 칭찬이 쏟아졌다.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거쳐 파장이 가까워감에도 솔희는 이날 모임의 최고의 슈퍼스타이자 VIP였고 모든 시선과 관심은 정균과 솔희에게 쏠렸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번개같은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나게 읽어주심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