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⑥ 내가 체험한 삼일운동
후세의 사람들은 기미 3.1만세 사건을 커다란 민족운동의 효시라고 서슴지 않고 정의하고 그 정의를 사람들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것이 오류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 상상력, 판단력에는 어떤 종류이든 형태, 윤곽이 있지만 자연이나 사건, 사실에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한 사건과 사실에 천태만별의 해석, 이해 윤곽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겪은 기미운동은 그것이 사전에 계획되고 용의주도하게 의도한 바에 따라 이루어진 민족운동이 아니라 거의 우발적인 항거였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내가 우발적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33인이라든가 기타의 숨은 주도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주동적 역할 이상으로 그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지고 민중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발화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외국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의 항쟁 중에도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항쟁은 없을 것이다. 인도의 간디가 무저항의 저항을 일컬었지만, 한국민은 어떤 지도자가, 어떤 리더가 무저항의 저항을 가장 올바르고 효과적인 저항이라고 설득하거나 주장하기 이전에 이미 전신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생활의 가난과 고달픔으로 찌들대로 찌들은 검은 얼굴들이 그 얼굴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이 흰옷으로만 전신을 감싸고 만세를 부르며 국기를 흔들다가 왜인의 칼과 총에 그대로 쓰러져가고 있는 광경에는 처참한 아름다움이, 금수의 폐부도 울릴 듯한 슬픔이 있었다. 이 기록이 어느 면에서 평가되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한 진실만은 발견할 수 있었다. 3.1만세 사건이 민족의식의 발로이거나 불의에 대한 항재이거나, 시민정신의 각성이거나 한 거대하고 엄청난 이름을 붙이기 이전에 그것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소박하고 어느 의미에서는 조건반사적인 반응이었다는 점이다.
외국인에게 그토록 감동적인 무저항이 어떤 효과를 노려서 어떤 의도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길밖에 달리 항거의 방법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직접적이고 원시적인 짓밟음, 참을 수 없는 차별 대우, 이것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항거는 어리석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양식이었기 때문에 동정하고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개인이 아니고 수천의, 수만의 인간이 모여서 이루어진 한 민족에게 무엇이 그토록 인종하고 굴욕을 감내하기를 강요하던가?
세계 어느 나라의 하늘과도 바꿀 수도 없이 푸르다는 하늘인가? 저 가파르고 깡마른 들판인가? 좁고 가난한 들판인가? 누가 충동질하지 않았는데도, 누가 사전에 미리 연습시키지 않았는데도 이 어리석고 가난한 민족의 만세 사건은 들판을 휩쓸고 지나는 등불처럼 요원히 번져가고 있을 즈음에 나도 일인과 일제와 일본을 나와 내 나라와 민족과 구별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주에서 3.1만세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하루는 학교로 어떤 청년이 찾아왔다. 흰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미투리를 신은 청년이었다. 그의 동작에는 선뜻선뜻한 기운이 돌고 있었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불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성급함이 어투에 묻어 있었다. 그러나 선뜻한 기운이 배어 있는 동작, 성급하고 떨리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 무엇보다 불안해 보이면서도 맑고 빛나던 눈빛이 내 가슴속이 단단하고 응어리진 무엇을 던져주고 갔다. 청년은 투박하고 저력 있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는 사실, 일본인을 쫓아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우리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가 말하는 독립, 만세 등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확실히는 몰랐다. 그때 내 나이 17세, 그 청년이 다녀간 이틀 후인가? 나이보다 키가 껑충하게 크고 기골이 장대한 나는 아침 일찍 학교에 갔었다. 모두 조용히 제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필기를 하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어댈 것인데 이상하게 모두들 아무 말 없이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나도 조그만 쪽지를 받았다. 만세를 부르자. 진주재판소 앞으로 모여라.
공부도 시간도 못 채우고 끝나버렸다. 나는 진주재판소로 가기 전에 시장에 들러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에게 책보를 맡기려고 가는 길에 일본군 오장을 만났다. 적갈색 말을 탄 오장은 말했다. (어딜 가느냐?) 나는 시장에서 아버지가 장사를 하는데 도와주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헌병 오장은 참 착한 아이라고 칭찬해 준 다음 언제나 공부를 열심히 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이르고는 사라져갔다.
나는 아버지의 가게에 책보를 맡기고 진주재판소로 달려갔다. 재판소 앞엔 어느 사이에 모여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 지어 와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장날의 장꾼들과도 같았다. 시위나 독립운동이라는 말이 풍기는 살벌한 분위기를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다. 열일곱 살에 처음 보는 태극기였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 내가 드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태극기를 주었다. 나는 태극기를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대열에 끼어 발을 옮겼다. 나아갈수록 대열에는 열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 열기에 힘입어 누군가가 노래를 불렀다. 모두 따라 불렀다.
쇠 팔뚝 돌주먹 소년 남자야.
애국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 시대 다다랐네.
노랫소리는 만세로, 만세는 다시 구호로 변했다. 그 열기는 황량한 들판으로 퍼져나갔다. 3월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쌀쌀한 날씨, 벌판은 텅 빈 채로 죽음과 같은 검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고 그 끝에서 끝까지 싸늘한 바람이 쉴 사이 없이 불어왔다. 그 황막하고 쓸쓸한 들판을 우리들은 걸어가고 있었다. 흰옷을 입은 한때의 유랑민같이 우리는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만세를 부르다가 구호를 외치다 하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그렇게 20여 리쯤 나갔을 때였다. 우리 앞에는 칼을 차고 말을 탄 일본 헌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칼질을 하였고 몽둥이질을 하였다. 시위는 삽시간에 신음과 울부짖음으로 가득 찬 피바다가 되었다. 아아 나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태극기를 들고 맨 앞장섰던 나는 제일 먼저 지나지 않았던 나에게 그들은 무자비한 매질을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섬뜩한 것은 장터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헌병 오장의 눈초리였다. 그는 내가 자기를 속였다는 분노 때문에 거의 5분간은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산소용접 때 쓰는 그 푸른 불길과 같은 눈초리였다.
그 눈초리를 열일곱 살 된 내가 어떻게 감당했던가. 그 사나이의 격분한 매질을 어떻게 이겨 내었던가. 나는 까무러치고 물세례를 일주일 동안 거듭한 다음, 그들의 고문으로부터 풀려나왔다. 나와서 안 일이지만 태극기를 들고 앞장섰던 내가 그렇게 빠른 시일에 풀려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진주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황의치씨가 동분서주한 덕이었다.
풀려나와 다시 학교엘 가보니 그사이에 나는 유명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태극기를 달고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다는 것, 일주일간이나 감금당했다는 것, 몸을 쓰지 못할 만큼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 들이 나에게 사실보다 더 커다란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온 학교의 학생들은 나를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감히 가까이 접근해 오질 못하고 (저 애가 이번 감옥에 들어갔다 온 애래) (제가 태극기를 들었대)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였으므로 선생은 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성, 네가 왜 시위했는가를 일어서서 말할 차례가 된 것 같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우리도 이제는 독립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나 일본의 지배 아래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것은 네가 모르는 소리다.)하고 선생은 말했다. (동양 3국은 오랫동안 서로 도우며 화평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금세계에 접어들면서 서구 제국들은 그 3국을 지배하려고 군함과 대포를 끌고 와 위협하고 있다. 이미 저 광대한 영토와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중국은 영국과 불란서의 발길에 짓밟혀 들어갔으며 너희들의 조선 역시 불란서와 러시아가 서로 차지하려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이 조선에 온 것은 그러한 위험을 이기고 독립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주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너희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농지를 개혁해 주고 관청을 세워서 사무를 보게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든 것을 너희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언제든 너희들이 자력으로 서양의 침입을 막는다면 우리는 물러갈 것이다. 우리를 물러가게 하는 일은, 그러므로 너희들 자신에 충실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본군들은 우리를 설득하지 않고 왜 칼질을 했단 말입니까?) (바보 같으니라고) 담임선생은 상기된 얼굴로 악을 썼다. (그래도 못 알아듣겠는가?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서 고향과 부모·형제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런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짓을 하고 있다.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의 고개는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경솔한 짓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이 독립하는 길이란 말엔 그 어떤 면에서라도 진실이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날부터 나는 더욱 열심히 책 속에 파묻혔다. 나의 성적은 급우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빼어났고 학급의 모든 일은 나의 주동 아래서 처리되었으며 그리하여 담임선생의 사랑을 나는 독차지할 수 있었다.
내가 진주농업 학교에 원서를 사 가지고 왔을 때에 섭섭해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나보다는 오히려 선생의 편이었다. 나에게는 장남이라는 구속력이 몸에 배어있었고 또 결혼 이후에 유학의 꿈을 깡그리 말살시켜 버렸었으므로 담담히 시시한 농업학교의 입학원서를 사 들고 올 수 있었지만 그러나 선생으로서는 그러한 시시한 학교에 자기의 제자를 넣어야 하는 슬픔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나 내가 불합격이라는 통지를 받았을 때의 선생의 놀람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날 그는 (이순성, 너는 불합격이다.)하고 교실 문을 열고 핑 나가 버렸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나의 불합격은 시험성적에 관계없이 내가 기미 3.1운동에 앞장을 섰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안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합격, 불합격이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한때의 과오(그들 편에서는 과오일 수 있으니까)로 모든 것을 재단해 버리려는 그들의 횡포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농교교장 선생을 찾아갔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의 무반응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찾아갔다. 닷새째 되던 날에야 그는 (내일부터 등교하라 짤막한 한마디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진주 농업학교 학생이 되었다. 작은 불씨가 들녘을 태우듯이 하찮은 사건이 한 사람의 생을 다르게 방향 지어 놓는 수들이 너무나도 허다하다.
그 무렵 나에게 그러한 변화가 이중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진주 농업학교를 일인 교장의 덕택으로 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인들과 친숙감을 맺어주기 보다는 오히려 배일사상과 독립에의 의지를 길러주었고, 그것은 다시 불문에 발 딛게까지 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안 사실이지만 농교에는 기숙사생들과 통학생 간에 싸움이 매일 계속되고 있었고, 도둑질이 어떻게나 성행하든지 눈 감고 있으면 귀도 떼어간다는 유행어가 학생들에 퍼져 있을 지경이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K라는 학생은 가난한 빈농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한번 그의 삼촌이 중국음식점에 가서 사준 짜장면을 먹은 적이 있었다. 어떻게나 그 맛이 일품이었던지 그는 기숙사 선생들의 호주머니를 날마다 뒤져 그 돈으로 짜장면을 사 먹었다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실에도 그때의 농교의 풍기가 얼마나 해이해져 있었으며, 더불어 우리나라의 농촌 사정이 얼마나 비참했었던가를 더듬어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사건 속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K가 학우들의 호주머니를 뒤졌다는 파렴치 행위보다 오히려 그런 사건들을 유발할 수 있던 민족의 빈곤상과 바야흐로 신문명이 밀려오고 있는 역사의 개명기에서 우리 민족의 도의심이 그만큼 타락되어 있었고 질서가 문란했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 누구라도 각성을 가진 자라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개탄하는 자 중에 대구고보 2년에 다니다 진주 농교로 전학 온 김욱주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기쁨을 지금도 나는 은밀히 누리고 있다. 그만큼 그는 영민하고 아름다운 학생이었고, 멸망하는 것들 가운데서의 고결함을 흠뻑 지니고 있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이조 명문의 후예이든지 망해가는 토호의 자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너져가는 자기 것을 가냘프게 수호하려고 하는 왜소한 아름다움이 전신에 풍기고 있었다. 그의 긴 손, 긴 목, 조용한 움직임, 어느 것이나 나를 끌어당기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내가 그와 처음 말을 나눈 것은 어느 날 아침의 등굣길에서였고, 그것은 엉뚱하게도 학교에 대한 너절한 불평이었는데도 우리 둘은 순식간에 의기투합하여 교문 안에 들어설 때까지 높은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나는 약간 흥분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정화에 나서자)고 제의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날부터 교실과 운동장을 찾아다니며 비난과 불평을 수군덕거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상급생들의 비행, 학교 전체의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있는 기숙사생과 통학생들 간의 폭력 사태, 도둑질 등을 거리낌 없이 공격하였고, 그 공격의 소리는 삽시간에 학생들 사이에 퍼지고 퍼져 수군덕거림으로 온 학교가 들썩들썩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둘만 모여도 나와 김옥주에 대한 찬동과 비난으로 들뜬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또 긴 오전이 지나가고 해가 뒷산 가까이 이른 저녁이 되자 상급생들은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나와 김옥주에 대한 이를테면 성토대회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아무리 들어도 나에 대한 성토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하급생들의 불경스러운 태도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듣다못해 나는 단상 곁으로 갔다.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들 사이에서는 된다. 안된다 하고 한참 왈가왈부하더니 (요점만….)이란 단서 아래 허락하여 주었다.
나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말했다. (피지배자의 치욕 속에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 역시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무엇을 배우려고 다닌다는 그것을 나는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왜 배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우리들로서 기숙사생이 통학생을 매질하고 상급생이 하급생을 구타하는 사태가 과연 정당하며,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을 불손하다고 성토한다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우리들을 일본인 교사들은 무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은 우리의 통치하에 있어야 하고 우리의 지배를 받지 않고는 하루도 유지할 수 없다는 산 증거가 바로 너희들의 행동에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냐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인가. 왜 그들에게 그런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듣지 말기로 하자. 우리도 뭉쳐서 우리의 얼을 저들에게 보여주기로 하자)
나는 대충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두서없는 소리로 주워댔던 듯하다. 더욱이나 그날은 진주 장날이어서 장이 열리는 교문 밖에는 장꾼들이 빽빽이 들어차 나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학생들이 히어로였던 시대였었으므로 그 장꾼들은 모두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렇다는 듯한 공감의 표정을 하고 있더니, 내가 단을 내려서자, 박수를 퍼부어 주었다. 내 이야기의 뜻이 그들에게 전달되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들에게 간절히 주고 있었던 것, 그들을 깨우쳐주려는 것에 대한 나의 열의가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였을 것이다.
뭐가 무언지 모를 흥분에 싸여 자리로 들어가자, 분위기는 한동안 술렁거리는 것 같았다. 학우단을 만들자는 나의 제의를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이 모임을 가진 것은 그런 단체를 결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성토하자는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허를 찔려 그 제의를 거절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였다. 한 학생이 옳소! 소리를 연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나에게 초대 회장을 맡으라고 하였다. 초급 생으로서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진주 농고 학우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었고 학생들 간의 모든 일들을 자치하게 되었다. 그런 날들이 겹치고 어느덧 여름이 가고 가을이 밀려왔다.
출처: 수미산 원문보기 https://cafe.daum.net/cigong2500/IHLF/38 글쓴이: 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