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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야기 스크랩 중국의 ‘해양굴기’
aiCHINA김성태 추천 0 조회 337 16.05.08 07: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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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해양굴기’

 

“이제 더 이상 우리를 비하하지 않겠다”

중국 외교 본색을 드러내다

 

 

 

 

▲ 오는 8월 1일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에 맞춰 취역할 예정인 중국의 첫 번째 항공모함 바랴그호(가칭). photo 신화·연합

 

 

“우리는 주변 국가들과의 선린우호 관계를 계속 심화해 나갈 것이며….”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지난 3월 15일 폐막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채택된 2012년 정부공작(업무)보고에서, 올 한 해 펼칠 중국 외교의 기본 방침을 설명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한국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과의 지역 협력을 심화하고, 평화롭고, 안정되고, 서로 평등하고, 서로 신뢰하고, 서로 윈윈(win win) 하는 동북아 지역 환경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국방 분야에 대한 업무계획 보고를 통해서는 이렇게 밝혔다.
   
“공고한 국방과 강대한 군대는 국가의 주권과 안전을 수호하고, 이익을 안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강력한 방패입니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단계에서 군대의 역사적 사명을 전면적으로 이행하고, 군대의 혁명화와 현대화, 정규화 건설을 전면적으로 강화하고, 정보화 조건하에서 국지전 능력을 제고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다양화된 군사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완성하고….”
   
   
 “할 일은 하겠다” 출사표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 다음 날인 3월 6일에 기자회견을 가진 양제츠(楊潔?) 외교부장(장관)의 말은 더욱더 날카로운 칼날의 섬광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1990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가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것을 보고 당시 중국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시한 ‘도광양회(韜光養晦·칼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기른다)’의 시대는 이제 중국에서 분명히 지나갔음을 보여주는 말들을 양제츠는 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비하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남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을 것입니다.(不妄自菲薄 不好爲人師)”
   
양제츠는 이 회견에서 지나간 10년의 중국 외교를 회고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지난 10년간 세계는 ‘대변혁(大變革)’ ‘대조정(大調整)’의 시기였는데, 이 기간 동안 중국은 그런 국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잘 대응한 결과,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실력 이하로 스스로 비하하는 일은 필요없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처럼 남을 가르치려 드는 일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화즉양리 투즉구상(和則兩利 鬪則俱傷)
   
양제츠 외교부장이 쓴 문자 ‘불망자비박(不妄自菲薄)’이란 말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쓴 ‘전출사표(前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유비(劉備)가 죽은 다음 유비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던 제갈공명이 위나라 군대와의 전투에 나서면서 유선에게 남긴 말이다. 유선이 너무 작은 문제에 신경을 쓰고 대국(大局)을 보지 못함을 깨우쳐주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엷고 얇은 사람이라고 비하하지 말라”고 한 말이었다. 양제츠의 말은 이제 중국은 지난 10년 동안 해온 것처럼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지 않을 것이며, 할 일은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10년 동안 국제 정세에는 일정한 추세를 지닌 국면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각국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움직이는 가운데 변화 속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자리를 잡으려는 ‘변중구치(變中求治)’의 10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제츠는 현재 중국이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 이어도 문제를 비롯한 영토·영해 분쟁을 벌이고 있고, 그 열기가 서서히 상승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이들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국들도 중국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해주기 바랍니다. 가능한 한 정세를 복잡하게 만드는 언행을 피하고, 아시아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공동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평화적인 해결을 시도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양제츠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는 더욱더 섬뜩한 검광(劍光)을 보여주었다. “화즉양리 투즉구상(和則兩利 鬪則俱傷·화합하면 둘 다 이로울 것이고, 싸우면 양쪽 다 다친다)”이라는 위협적인 용어를 구사한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의 전략 중심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중국의 길은 아시아 태평양과 세계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10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하와이 이스트웨스트센터 연설을 통해 드러낸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재개입(Re-engagement) 정책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중국 자신들에 대한 견제라는 점에서 미국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보여준 셈이다.
   
클린턴 장관은 지난해 11월 10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리는 하와이 이스트웨스트센터에서 ‘미국의 태평양 세기(America’s Pacific Century)’라는 연설을 통해 “미국은 20세기까지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과 협력하고 안보협력도 추구하는 전략을 구사해왔지만, 앞으로의 21세기에는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 국가들과 안보와 경제협력을 강력하게 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와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TPP(Trans Pacific Partnershi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의 구축을 통해 태평양 일원에 강력한 자유무역 지대를 건설한다는 구상도 밝혔다. 클린턴 장관은 “자신들의 태평양 세기 건설 과정에서 전통적인 맹방인 한국과 일본, 필리핀, 태국, 호주 5개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태평양 세기 전략을 구사할 것”이라고 했다. 
   
클린턴 장관은 이 연설에서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며, 중국의 발전은 미국에도 이롭다”고 하면서도 “앞으로 미국은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이 국제관례를 지키는지, 또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간여할 것”이라고 말해 중국에 대해 견제정책을 구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반도 정세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
   
이틀 뒤인 11월 12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만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내년(2012년) 이후의 중·미 관계에 대한 세 가지 건의’를 제시했다. 후 주석이 제시한 세 가지는 첫째 중국과 미국은 앞으로 서로 신뢰하고 서로의 핵심 이익을 존중하는 관계가 돼야 할 것(互尊互信), 둘째 상호 경제교류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互利互惠), 셋째 양국 간 안보협력은 서로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정신으로(同舟共濟), 특히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중국과 미국이 대등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후진타오가 밝힌 이 같은 전략은 오는 10월 중국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를 예정인 시진핑(習近平) 현 국가부주석이 지난 2월 13일부터 닷새 동안 이뤄진 미국 방문을 통해 재확인됐다. 시진핑은 미국 방문 중 클린턴 장관과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이 주재한 만찬 연설을 통해 “길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를 마라, 길은 바로 너의 발 아래 있다”는 내용의 중국 유행가 가사를 인용하며 미국이 지금 황혼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국과 미국의 대립적인 분위기가 이번 양제츠 외교부장의 전인대 기자회견을 통해서는 “화합하면 서로에게 이롭고, 싸우면 서로 다친다”는 노골적인 표현이 구사되는 경지로 한층 날카로워진 것이다.

양제츠 외교부장은 일본에 대해서는 “역사를 거울 삼아 미래를 바라보아야 할 것(以史爲鑑 面向未來)”이라고 훈계조로 말했고,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는 최근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말을 했다. “최근에 출현한 일련의 좋은 움직임에 대해 중국은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덩샤오핑 ‘화평발전’서 마오쩌둥 ‘초영간미’로
   
이번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 전날인 3월 4일 전직 외교부장 출신인 리자오싱(李肇星) 전인대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올해 중국의 국방예산이 지난해보다 11.2% 늘어난 규모임을 공개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올해 국방예산이 중국 국내총생산과 전체 재정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28%와 5.53%로, 2008년의 1.33%와 6.68%에 비해 줄어든 규모라고 설명했다. 또한 중국의 국방예산이 전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 1.28%는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이 2% 이상을 책정한 것과 비교하면 낮은 규모이며 “중국의 국방예산은 어디까지나 방어적이며,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자오싱 대변인의 이 같은 주장은 중국의 군사력이 미국이나 영국보다는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에 더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점은 의도적으로 간과한 논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중국의 국방예산은 올해 사상 처음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얕은 서해를 사이에 둔 대한민국이 제대로 대비하려면 말 그대로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의 힘겨운 발걸음을 해야 할 규모다. 이를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번 전인대를 통해 발표된 중국의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의 흐름 가운데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중국이 미국과의 대립각을 날카롭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1949년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마오쩌둥(毛澤東)이 추구하던 ‘초영간미(超英?美·영국을 초월해 미국을 넘는다)’라는 전략은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덩샤오핑에 의해 ‘화평발전(和平發展)’ 전략으로 바뀌었고, 그동안 중국은 모든 역량을 경제발전에 쏟아 붓는 것으로 대외에 공표됐다. 
   
그러나 리자오싱 대변인이 올해 중국의 국방예산이 미국과 영국에 비해서는 그래도 적은 규모라고 강변한 것은 평소 중국이 미국과 영국의 군사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봐야 한다. 중국은 어느새 덩샤오핑의 화평발전에서 벗어나 마오쩌둥의 초영간미의 길로 접어들고 있고, 그런 중국은 우리에게 이미 위협의 수준을 넘어서 현재적 위험요소로 자리 잡았음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박승준 /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전 조선일보 베이징 특파원

 

 

 

 

핵잠수함·항공모함·로켓발사장…휴양지의 두 얼굴, 남해함대기지

 

‘중국의 제주도’ 하이난다오의 위린해군기지

 

 

▲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장병들이 하이난다오 싼야의 위린해군기지에 도열해 있다. photo 신화·AP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는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섬이다. 총 면적 3만5400㎢로 대만을 제외하고 중국에서 가장 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제주도(1845㎢)의 19배 넓이다. 적도와 가까워 포근한 아열대성 기후가 특징으로, 중국의 신혼부부들도 신혼여행지로 즐겨 찾는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와 여러모로 비슷한 곳이다.
   
하지만 하이난다오는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3대 함대 중 하나인 남해함대의 전략기지다. 제주도로 치면 서귀포쯤 되는 하이난다오 싼야(三亞)의 위린(楡林)항에는 남해함대의 핵잠수함 기지가 있다.

힐튼, 쉐라톤, 크라운플라자, 메리어트, 홀리데이인 등 외국계 휴양리조트와 골프장이 밀집한 야롱만(亞龍灣)과 언덕 하나 건너다. 화강석으로 된 사각형의 위린해군기지 정문 위에는 붉은 별이 붙어 있다. 기지 주위로는 야자수가 늘어서 묘한 풍경을 이룬다.
   
   
야롱만이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영국의 월간 군사전문지인 제인스인텔리전스리뷰(JIR)가 공개한 미국의 상업위성회사 디지털글로브의 위성사진에 따르면 위린해군기지는 구축함과 순양함, 잠수함 등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접안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잠수함 정박이 가능한 긴 부두 2곳과 이보다 조금 짧은 부두 3곳도 확인됐다.

디지털글로브는 지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하이난다오 위린항 일대를 관측위성으로 촬영해 왔다. 이후에도 위린해군기지는 기지 주변을 오간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규모가 파악돼 왔다. 위성사진 판독 결과 확인된 핵잠수함 은닉용 지하터널 11곳은 터널의 크기와 높이 같은 구체적인 모습까지 사진에 포착됐다.
   
홍콩과 대만을 비롯한 서방 언론은 “중국이 2005년을 전후해 위린항에 핵잠수함과 항공모함 기지를 건설했을 것”으로 관측한다. 서방 언론의 이 같은 지적에 중국 외교부 친강(秦剛) 대변인도 “우리는 광활한 해역을 갖고 있고, 국가의 해상안전과 해양주권, 해양권익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 군의 신성한 직책”이라고 우회적으로 시인한 바 있다.
   
오는 8월 1일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에 맞춰 취역할 예정인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 바랴그(가칭)의 모항도 하이난다오가 유력하다. 홍콩의 유력 일간지 문회보(文匯報)는 “야롱만 동쪽의 작은 만(灣)이 항공모함의 모항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당초 바랴그함의 모항으로는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산둥성 칭다오(靑島)의 샤오커우쯔(小口子)항이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발해와 서해는 수심이 얕아 항모전단이 기동하기 힘들고, 한국과 일본에 군비 증강 빌미만 제공할 것”이란 논리가 먹히고 있다.
   
이미 하이만다오 야롱만 동쪽에는 항공모함이 정박 가능한 부두 2곳이 들어선 것으로 전해진다. 외국계 리조트가 밀집한 야롱만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핵잠수함, 동쪽에는 항공모함 기지가 들어서는 것이다. 야롱만이 중국 해군의 핵심전력이 모이는 하와이 진주만과 같은 곳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천혜의 양항, 하이난다오 위린항
   
최근에는 위린항 일대의 성역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중군위) 기관지인 해방군보(解放軍報)는 ‘손중산 눈 속의 위린항’과 같은 기사를 통해 국부 쑨원(孫文)을 앞세워 위린해군기지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해방군보에 따르면 광둥 태생의 쑨원은 “중국의 문호를 굳게 보호하고, 남양 일대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위린항을 극찬했다고 한다.
   
실제 하이난다오 위린항은 일찍부터 천혜의 양항으로 손꼽혀 왔다. 항만 양쪽에는 절벽이 있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고 수심도 최대 22m(부산항은 수심 16m)로 깊어 일찍부터 군항(軍港)으로 사용됐다. 1904년 러일전쟁 때는 희망봉을 돌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러시아 발틱함대가 중간 기항했고,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연합함대가 위린항을 점령해 군항으로 사용했다.


   

 

 

위린항을 군항으로 본격 정비한 것도 일본이다.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9년 2월 하이난다오를 기습점령한 일본연합함대와 육전대(해병대)는 인도차이나반도 진공을 앞두고 위린항을 군항으로 재정비했다.

당시 위린항 일대에는 해군병원과 영창(형무소)을 비롯해 심지어 종군위안부까지 설치했다. 침략국인 일본 역시 하이난다오의 전략적 중요성을 눈여겨봤던 셈이다.
   
1949년 중국 건국 후 하이난다오 위쪽 광둥성 레이저우(雷州)반도 잔장(湛江)에 사령부를 둔 남해함대도 위린항을 거점기지 중 하나로 사용했다. 최근 들어서는 그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06년 이후 탄도미사일 구축함과 핵잠수함 상당수가 위린항에 배치됐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 2008년 12월, 소말리아 아덴만의 해적 단속을 위해 중국 해군이 첫 해외파병을 단행한 곳도 하이난다오다.
   
사실 광둥성 잔장에 함대사령부를 둔 남해함대는 중국의 3대 함대 중 최약체로 평가받아 왔다. 칭다오에 사령부를 두고 칭다오와 뤼순(旅順), 후루다오(葫蘆島) 기지를 관할하는 북해함대와 저장성 닝보(寧波)에 사령부를 두고 상하이와 저우산(舟山), 푸젠(福建)을 관장하는 동해함대보다 관할지의 지정학적 중요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사군도와 서사군도를 둘러싼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대만 등과 영토분쟁이 불거지며 위린해군기지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위린해군기지는 남해함대의 다른 거점인 잔장이나 광저우보다 서사군도·남사군도에서 훨씬 가까이에 붙어있다. 위린해군기지는 남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잔장에서 직선거리로 350㎞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위린해군기지에서 서사군도까지는 330㎞, 남사군도까지는 1050㎞ 거리다.

반면 잔장에서 서사군도와 남사군도까지는 각각 570㎞, 1300㎞가량 떨어져 있다. 위린항에서 출항하면 분쟁지역에 도달하는 거리를 각각 240㎞, 250㎞ 단축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중국의 가상 적국인 베트남과의 분쟁 시에도 위린해군기지는 함대사령부가 있는 잔장보다 입지적으로 우월하다는 평가다. 중국은 청나라 말인 1909년 광동수사(광동함대)의 리준(李准) 제독이 서사군도와 남사군도를 순찰하며 ‘황룡기(청나라의 국기)’을 꽂았다는 것을 근거로, 서사군도와 남사군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대만 역시 중국과 같은 논리다.
   
   
베트남 통킹만 봉쇄에 유리
   
결국 이는 서사군도·남사군도와 지리적으로 훨씬 가까운 베트남과의 분쟁소지가 됐다. 실제 남해함대는 서사군도와 남사군도를 두고 베트남해군과 ‘서사(西沙)해전’(1974) ‘남사(南沙)해전’(1988)과 같은 해상전투를 치렀다. 특히 1974년 서사해전은 1978년 중월(中越)전쟁으로 촉발되는 단초가 됐다.
   
잔장에서 하노이 앞의 통킹만(중국명 베이부만)으로 진입하려면 남북 길이만 150㎞에 달하는 레이저우반도를 돌아 충저우(?州)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하이난다오를 향해 뻗어있는 레이저우반도는 산둥반도, 랴오둥반도와 함께 중국의 3대 반도 중 하나다. 위린에 해군기지를 설치함으로써 남해함대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이난다오를 해군기지로 조성하는 데 대한 중국의 여론 역시 우호적이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는 “세계 최장 다리를 놓은 해상교량기술로 하이난다오와 남사군도를 다리로 연결해 영토주권을 지키자”와 같은 다소 황당한 주장도 나온다. 하이난다오에서 남사군도까지는 직선거리로 1000㎞가 넘는다.
   
이 같은 여론에는 국력이 약했을 때 일본군에 의해 6년간 침탈당한 하이난다오의 역사적 배경이 한몫했다. 하이난다오에서 벌어진 미국과의 충돌도 우호적 여론을 거든다.

2001년 4월 1일 일본 오키나와의 카데나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 해군 EP-3정찰기는 하이난다오 상공에서 근접비행을 하던 중국 해군항공대 잔(殘)-8 전투기와 충돌했다. 이후 미군 정찰기는 하이난다오 동남쪽 링수이(陵水) 리족(黎族)자치주의 군용비행장에 불시착했고 정찰기 승무원 24명은 중국 측에 억류됐다. 당시 미국 정찰기에 근접비행하던 해군전투기 조종사 왕웨이(王偉) 소령이 실종사 하는 바람에 중국에서는 ‘전쟁 불사’와 같은 호전 여론이 들끓었다. 
   
2009년 3월에는 중국 어선과 미 해군 측량조사선 임페커블호가 하이난다오 인근 해상에서 대치하며 충돌을 빚는 사태까지 불거졌다.
   
중국은 이 같은 지지여론을 등에 업고 하이난다오에 위성발사센터도 건설 중이다. 하이난다오 동북쪽 해안인 원창(文昌)시에 들어서는 원창위성발사센터로, 중국의 네 번째 로켓발사기지다. 로켓을 쏘아 올리는 위성발사센터는 언제든지 핵을 탑재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장으로 전용이 가능하다. 원창위성발사센터는 오는 2013년부터 로켓을 쏘아 올리게 된다.
   
   
적도 가까워 위성 발사 최적지


   

▲ 중국 하이난다오 위린해군기지의 잠수함 은닉 터널(오른쪽).

 

지구자전력을 이용할 수 있는 적도와 가깝고 바다를 끼고 있는 하이난다오는 위성발사의 최적지로 손꼽혀왔다. 중국은 1970년대부터 하이난다오를 위성발사장으로 염두에 뒀다. 하지만 1970~1980년대 냉전시대에 미국을 의식해 부득이하게 서부내륙 쓰촨성 시창(西昌)과 간쑤성 주취안(酒泉), 산시성 타이위안(太原) 등을 위성발사기지로 운용했다. 탈냉전 후에도 하이난다오는 궤도위성 발사 전의 발사시험장 정도로만 활용해 왔다.
   
현재 하이난다오의 위성발사센터 건설을 주도하는 곳 역시 인민해방군이다. 지난 2009년 중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원창위성발사센터장 기공식에는 인민해방군 총장비부 창완취안(常万全) 상장(별 셋)과 총장비부 정치위원 츠완춘(遲万春) 상장 등이 참석했다. 위성발사장에 갖는 인민해방군 수뇌부의 관심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당초 우리나라도 적도와 가장 가까운 제주도에 발사장을 두려 했다. 서귀포시 모슬포항에 발사통제센터를 두고 뭍과 10㎞ 정도 떨어진 마라도에 발사장을 둔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최적 입지로 꼽혔던 제주도 대신 전남 고흥의 나로도를 위성발사장으로 선택했다. 나로도에서 쏘아 올린 나로호 로켓은 두 차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핵잠수함(위린항), 항공모함(야롱만 동쪽), 군비행장(링수이), 로켓발사장(원창)까지 갖추면 하이난다오는 비슷한 위도선상의 하와이를 능가하는 군사기지로 변모한다. 하이난다오의 면적(3만3900㎢) 역시 하와이(1만6636㎢)보다 두 배 이상 커 추가 개발 여지도 있다. 태평양의 제해권이 하와이 진주만에서 하이난다오 야롱만으로 점점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류공다오의 북양함대 칭다오의 북해함대로 부활‘

동양 최강 함대’의 추억

 

 

▲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앞바다 류공다오에 있는 ‘갑오전쟁해전관’. 청나라 북양함대의 함정을 형상화해 지어졌다.

 

 

서해를 향해 뻗어나온 중국 산둥(山東)반도 웨이하이(威海)에서 배로 20분 떨어진 곳에는 류공다오(劉公島)란 섬이 있다. 국가 5A급(최고급) 관광지로 지정된 이 섬에는 ‘북양해군충혼비’란 탑이 서 있다. 중국 최초의 근대 해군인 북양(北洋)함대 건설 100주년인 1988년 세워진 28m 높이의 탑이다.
   
류공다오는 1세기 전만 해도 동아시아의 해군력이 집중됐던 곳이다. 지금의 하이난다오(海南島)와 같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양함대의 모항으로, 북양수사제독서(함대사령부에 해당)와 수사학당(해군사관학교에 해당)이 류공다오에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류공다오는 청일전쟁(1894~1895) 때 일본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초토화됐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직접 현판을 쓴 류공다오의 중국갑오전쟁(청일전쟁)해전관에는 바닷속에서 건져낸 북양함대의 전함과 녹슨 함포, 닻 등이 남아 있다.
   
류공다오에서의 참패 이후 지난 100여년간 중국은 변변한 해군을 갖춘 적이 없다. 중국이 해군기지와 함대 건설에 열을 올리는 것은 북양함대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북양함대는 1888년 청나라 말 실권자인 북양 대신 리홍장(李鴻章)이 주도해 만든 함대다. 독일 조선소에서 건조한 철갑선 정원(定遠)함과 진원(鎭遠)함을 주력으로 하는 북양함대는 ‘동양 최강’이란 평가를 들었다.
   
1886년 정원함과 진원함을 앞세운 북양함대가 일본 나가사키(長崎)항에 입항했을 때는 일본 조야(朝野)가 긴장했다. 나가사키에 상륙한 청나라 수병이 위세를 부리며 거들먹거리자 일본 낭인(浪人)들이 청국 수병 5명을 칼로 베는 사건까지 터졌다. 하지만 격분한 리홍장이 ‘함포 사격’을 운운하자 일본 메이지정부는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북양함대 참패가 트라우마로
   
이후 일본 메이지정부는 함대 건설에 착수한다. 메이지천황도 직접 함대 건설 성금을 하사했다. 메이지정부는 정원함과 진원함과의 거함대포 결전에서 이길 방법은 빠른 기동력과 철저한 준비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철저한 준비는 청일전쟁 때 십분 위력을 발휘한다. 청일전쟁 개전 초 일본연합함대는 서해안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병력수송선인 고승(高升)함을 수장시킨다. 당시 순양함 나니와(浪速)의 함장으로 고승함을 격침시킨 인물이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다.

“이순신에 비하면 하사관도 안된다”고 자신을 평한 도고 제독은 훗날 러일전쟁 때 경남 창원의 진해만에 웅크리고 있다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마도와 독도 바다에 수장시킨다. 진해 제황산 꼭대기에는 도고 제독이 이끈 일본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三笠)호의 선교를 본떠 만든 진해탑이 서 있다.
   
북양함대는 압록강 어귀 대동구(大東溝)에서 벌어진 황해해전(압록강해전)에서도 여지없이 참패했다. 당시 치원(致?)함을 지휘하던 등세창(鄧世昌) 제독은 수장당한다. 함대사령부인 류공다오 앞에서 벌어진 웨이하이해전에서도 북양함대는 일본연합함대의 어뢰정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태평천국군 출신으로 해전 경험이 전무했던 북양함대 총사령관 정여창(丁汝昌) 제독은 음독자살로 목숨을 끊는다. ‘동양 최강’으로 군림했던 북양함대의 패전은 중국 해군을 줄곧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됐다.
   
   
관광휴양지 칭다오의 또 다른 얼굴
   

 

 

 

결국 북양함대가 류공다오에서 남서쪽으로 200여㎞ 떨어진 칭다오(靑島)에서 부활하기까지는 100년이 걸렸다. 칭다오에는 중국 해군의 3대 함대 중 가장 막강한 전력을 갖춘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다.

칭다오 자오저우만(膠州灣)은 하이난다오 위린항을 능가하는 천혜의 군항이다. 세계 최장의 해상대교(길이 41.58㎞)가 놓여 있는 자오저우만은 입구가 좁은 반면 안은 넉넉해 함정을 정박하고 은닉하는 데 탁월한 입지조건을 자랑한다.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칭다오 역시 중국의 대표적 관광휴양지다. 시내 곳곳에 해군 레이더기지가 있지만 매년 8월이면 ‘동양의 옥토버페스트’인 칭다오맥주축제가 열려 시내가 떠들썩하다. 2008년 8월에는 베이징올림픽 요트경기가 열렸고, 일찍이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도 여름이면 칭다오에서 피서를 즐겼다. 남해함대가 주둔하는 하이난다오와 마찬가지로 관광휴양지와 해군기지가 공존하는 셈이다.
   
중국 해군이 칭다오에서 북해함대를 키워낸 것은 1960년부터다. 처음에는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4척의 구축함이 전부였다. 하지만 북양함대 패전 후 100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중국은 북해함대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장착한 핵잠수함으로 무장한 최정예 함대로 키워냈다. 지난 2009년 중국 건국 60주년에 맞춰 후진타오 주석이 관함식을 거행한 곳도 칭다오항이다. 당시 한국을 포함해 21개국 대표단이 관함식을 지켜봤다.
   
현재 칭다오에 함대사령부를 두고 있는 북해함대는 칭다오의 자오저우(膠州)기지와 뤼순(旅順)기지, 후루다오(葫蘆島)기지를 거점항으로 운용하고 있다. 특히 북해함대의 주력이 있는 칭다오 자오저우해군기지는 1988년 새로 정비한 3곳의 방파제와 2곳의 도크, 4곳의 접안시설(부두)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칭다오 남쪽 자오난(膠南)시에 새로 조성 중인 샤오커우쯔(小口子)해군기지 역시 길이 600m의 접안시설 3곳을 비롯해 각각 2㎞에 방파제 2개를 완비하고 있는 것으로 위성사진 판독 결과 확인됐다. 샤오커우쯔해군기지는 하이난다오와 함께 오는 8월 1일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에 맞춰 취역할 예정인 항공모함 바랴그(가칭)호의 유력한 모항 후보로 꼽힌다.
   
   
황해·발해 방어가 주 임무
   
수도 베이징과 톈진의 길목인 황해와 발해를 방어하는 것이 북해함대의 주 임무다. 북해함대는 한반도 유사시에도 가장 먼저 투입될 해군부대로 거론된다. 칭다오에서 대한민국 해군 제2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평택해군기지까지는 직선거리로 570㎞, 제주해군기지가 들어설 예정인 서귀포 강정읍까지는 620㎞에 불과하다.
   
부지 조성부터 난관에 봉착한 제주해군기지와 달리 칭다오해군기지에 대한 중국민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독일, 일본, 미국에 유린당한 역사를 딛고 일어선 자부심이다. 사실 칭다오를 군항으로 본격 조성한 것은 독일 해군이다. 독일 선교사 피살을 빌미로 1898년 칭다오를 점령한 독일 해군은 청나라로부터 칭다오를 99년간 조차하는 권리를 얻어낸다. 일본 역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칭다오항을 점령했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에는 미 해군이 장제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1949년까지 4년간 칭다오에 주둔했다. 랴오둥반도의 뤼순항을 조차해 남하하려는 소련(현 러시아) 해군을 봉쇄하기에 칭다오가 최적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칭다오 시내 해안가 해군박물관에는 연중 참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퇴역한 구축함, 순양함, 상륙함, 잠수함에 직접 승선해 보려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중국이 해양굴기에 나선 배경이 서려 있는 곳이 류공다오와 칭다오다.

 

 

 

 

동북아 패권은 해군력으로 결정된다

 

 

 

▲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중국 해군의 최신예 구축함 스자좡호를 타고 칭다오 앞바다에서 군함들을 사열하고 있다. photo 로이터·연합

 

 

제주도 서귀포시 마라도로부터 남서쪽으로 149㎞(80마일)에 위치한 이어도를 두고 중국이 감시선과 항공기를 동원해 정기순찰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한·중 간 마찰이 일고 있다. 독도 문제에 딴죽을 걸고 있는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해양 패권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동아시아 해양권을 놓고 최근 한반도 주변국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일본과 중국은 동중국해에서 센카쿠열도(중국명 釣魚島·댜오위다오)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은 오호츠크해의 남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 4개 섬을 놓고 영토 분쟁이 촉발됐다. 일본은 독도를 국제 문제로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곧 중국과 러시아는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의 해양 연고권을 놓고 갈등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양 영토 갈등이 왜 빈번해지고 있는 걸까.
   
우선 동아시아가 가진 지정학적 해양 환경이 갈등의 핵심이다. 동아시아는 한반도를 가운데 두고 사할린 인근 타타르해협, 동해, 남해, 서해(황해), 동중국해로 이어진 340만㎢의 해양이 있다. 그 바다를 다시 만주와 중국의 동쪽 해안지대 그리고 일본 열도가 둘러싸고 있는 지중해의 형태다. 그래서 근래에는 ‘동아지중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다.
   
유럽의 지중해와 마찬가지로 모든 지역과 국가들은 바다를 통해 주로 무역을 하고 있다. 그 중요성은 유럽의 지중해 못지않다. 주민들이 이주할 때나 군사작전을 펼 때도 바다가 주요 무대가 된다. 그래서 각국의 수도를 비롯해 대도시들은 주로 해양과 관련된 항구도시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조선(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 백제의 한성·사비성, 신라의 금성(경주), 가야의 김해, 고려의 개경(개성) 등은 전형적인 항구도시였다. 일본도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2세기경 원조선과 한(漢)나라는 황해 북부의 패권과 무역권을 놓고 충돌해 1년간 수륙양면전을 치렀다. 또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엽까지 고구려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 수·당(隋·唐) 세력 간에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교역권을 놓고 무려 70여년 동안 전쟁을 했다. 동북공정을 진행해온 중국 정부는 이 전쟁이 국내 전쟁 또는 통일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백제는 660년 여름에 황해를 건너온 당나라 군대 13만명과 1900여척의 군함, 신라 선단 100척이 공동 상륙작전을 시도해 사비성을 함락당했다. 부흥운동마저 663년 나·당 연합해군과 백제·왜 연합해군이 충돌한 백강구 해전에서 왜선 400척이 불타며 실패로 끝났다.
   
그후에도 해양력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물론이고 한민족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발해는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해양력을 가진 국가였다. 732년에 발해의 수군은 압록강 하구의 단동항을 출항해 산동성에 있는 당나라의 국경도시이며 무역도시인 등주성을 점령했다.

고려는 해양력이 강했기 때문에 분단된 중국 지역을 상대로 동시 등거리 외교를 전개하면서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쌍방무역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라비아해, 홍해까지 이어지는 중개무역망을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몽골과 대항해서 자주성을 지킨 것도, 또한 삼별초가 4년 동안이나 남해와 동중국해를 누비면서 저항한 것도 뛰어난 해양문화와 막강한 해양력 때문이었다.
   
   
해양력 약화 조선의 운명
   
그러나 비자주적인 성리학자들이 지배한 조선은 해양을 천시하고, 해양력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1592년 동남아시아 해양까지 활동 무대를 넓힌 일본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다행히 명맥을 유지해온 해군력과 탁월한 전략가인 이순신 장군의 지휘로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일본은 해양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고, 도쿠가와 막부 때는 유럽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기 위해 1613년에 선박을 자력으로 건조했다. 이 배는 태평양을 횡단해서 멕시코 부왕의 영접을 받기도 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활동 범위로 삼으면서 해양활동을 전개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오면서 유럽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로 진격했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반식민지화됐다. 일본 또한 결국은 미국 해군의 압력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870년 일본은 병부성에서 20년에 걸쳐 군함 200척 및 운송선 20척을 건조해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제국 해군이 탄생하게 된다. 이 무렵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정한론을 주장했고, 조선을 ‘다시’ 속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온다.

일본은 이미 1850년대에 홋카이도를 정복하고, 남부 사할린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류큐국(琉球國)을 점령해 일본으로 편입시켜 오키나와 제도의 끝인 대만 부근까지 연결시킨다. 완벽하게 한반도를 가운데 둔 채 대륙을 포위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울릉도는 전략적으로 중간 거점에 해당했고, 그래서 사카모토 료마 같은 인물이 울릉도 개척을 주장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해양권 둘러싼 청일전쟁
   
해양 패권에 자신감을 가진 일본은 드디어 행동에 나섰다. 1875년에는 수입함인 운양호를 비롯한 3척의 일본 군함이 강화도 근해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후유증 때문에 조선은 허무하게 불평등한 조건으로 개항을 한다.
   
이렇게 되자 동아시아는 교두보인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 청나라, 러시아가 각축전을 벌이는 구도로 변했고 그 실질적인 힘은 해양력의 차이에서 나왔다. 청나라는 1882년에 신식 해군을 창설하고, 해군력 증강을 주도하는 사업을 벌여 ‘정원(定遠)’ ‘진원(鎭遠)’이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최신예 철갑함을 독일에 주문했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계기가 되어 조선의 지배권과 동아시아의 해양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리홍장의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황해해전에서 일본 해군에 대패했으며, 이와 함께 조선은 청나라에서 벗어난 자주국이라는 명분과 함께 일본의 속국으로 한 걸음 더 빨려들어 갔다.

전쟁배상금 등을 투입해서 전력을 강화시킨 일본은 영국에서 최신형 전함을 구입해 미카사(三笠)라고 명명한 후 실전에 배치했다. 이미 다음 ‘타깃’으로 러시아를 선택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빼앗고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항을 확보한 후에 조선과 함께 대마도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동해와 남해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확보하자는 전략이다. 그렇게 하면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과 중국을 바다에서 압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 물동량 99%가 해로로
   
역사를 통해 해양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한 중국은 현재 나진·선봉지구를 조차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어 놓고 두만강 하구의 나진항을 통해서 동해로 진출한 다음 제주도, 이어도,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를 거쳐 남사군도(南沙群島)까지 이어지는 해양로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의 최근 군사비 지출은 세계 3위에서 5위 사이를 맴돌고 있다.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항공모함까지 취역할 예정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어도를 자국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며 동지중해 패권을 잡을 야욕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일본도 해양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세계 4위의 군사비 지출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의 해군력은 세계 2위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은 1994년에 발효된 해양 영토의 개념을 적용하면 세계 5위의 해양 영토 대국이다.
   
동중국해 심해에 묻혀 있는 자원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 해역이 중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되면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물동량의 99.3%가 해로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여기에는 석유라는 에너지 자원도 포함돼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해양 충돌이 19세기 말과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해양을 어떻게 바라보고, 중국과 일본의 해양력 강화를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까. 그 해답은 이제 바다에서 찾아야 한다.

 

윤명철 /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해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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