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레'의 리좀(rhizome) 텍스트 / 박용진
ㅡ 강주의 작품「p의 배경」과「빨강」1)을 중심으로
1. 시작하며
1968년 김광섭의 작품 성북동 비둘기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의 모더니즘은 전위적인 속성을 바탕으로 계속 발전해 왔다. 오독과 애매를 권장하면서 작품은 포스트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기법인 무의식적 자동기술법까지 폭넓게 발전하면서, 추상적일 수 있는 텍스트는 독자들에게 다원적 영역의 부여와 극사실적 묘사로 현상에 대한 의식의 확장은 물론, 인식의 깊이를 더하여 해석 함량이 늘어났지만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유폐적인 세계는 독자들을 노매드로 내몰곤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다양태' 곧 '고원(plateau)'이 연결되어 하나의 리좀을 구성한다고 보았다.2) 원시遠視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만물은 하나의 형상으로 보이지만 확대해서 들여다볼수록 물질을 이루는 세계는 다분화함을 알 수 있다. 독립성을 띄는 아원자의 운동에 놀라게 되며 개개의 세계에 초점을 두게 되지만 시 작품 또한 물질적 형상을 이루는 시어들로 이러한 분리의 성질이 적용된다. 최근 발표하는 작품들에서 리좀(rhizome)의 형태를 자주 읽을 수 있다. 이질적인 분화와 공감 결여의 텍스트로 인하여 독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좁아지게 되며 특유의 분열 양상에서 길을 찾기는 무척이나 힘이 든다.
모더니즘의 형식을 취하는 리좀시의 특징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은폐와 탈은폐가 가져오는 경계의 선명성
둘째. 회절성回折性의 한계
셋째. 상징의 난립으로 해석 여지의 산만함
리좀 형태의 작품이 갖는 특징과 같아 보이지만 다른 퍼들(puddle) 형태의, 작품과 미묘한 차이를 읽어보자.
2. 등질에서의 분화와 회절回折 한계의 양상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우리를 잃어버렸다
위험한 우연이 계속되었다
자연은 훼손되면서 견뎠고
알아듣지 못할 중얼거림이 귓전에서 맴돌고
접착제로 붙여 놓은 전단지는
반복해서 찢어지고
같은 자리에 덧붙여졌다
서쪽은 오른손에서 멀고
마지막 빛을 주워 서로에게 던졌을 때
결국 빛에 관한 이야기만 남았다
P의 빛은 시가 될 수 있을까
활엽과 침엽을 지닌 한 그루이면서 여러 그루이고 겹쳐 있으면서 독립적인 종자種子로 P를 이해한다. 상상하지 않을수록 상상력은 반항적이고 젖은 문장들은 더 깊은 곳을 찾으므로
레는 슬픔, 레는 멀리 짚어야 하는 애인이어서 슬프고 몇 개의 레는 도와 미로 사이에 놓여
우리는 함부로 헤어지고
서로를 잃어버린다
서쪽엔 너의 눈동자가 무성하다
약속은 눈동자여서
서로의 징후로서
우리는 해 질 녘에 서 있다
서쪽이 사라질 때까지 P는 시를 쓰고 마침내 P는 서쪽과 겹친다
ㅡ 강주의「p의 배경」전문
강주의 작품들은 리좀시의 특성에 따라 많은 상징의 부여와 회절, 경계의 생성을 보여주고 있다. 1.2. 연에서는 '잃어버린 우리'와 '서쪽', '빛'이 과거형으로, 순차적으로 나타난다. 1인칭 복수형인 '우리'는 '나' 이외에 누군가를 지칭하고 있다. 1연에서 언급한 자연과 3연의 활엽과 침엽을 동시에 지닌 나무, 즉 자연 전체에 '나'를 포함한 우리가 아닐까 추정한다. 자연 훼손은 인간의지에 비롯한 필연과 이에 따르는 우연으로 악순환이 나타나기 마련이며 이에 대한 각성을 요구해도 사회는 그저 웅얼거릴 뿐이다. 빛이 남은 상태로 해가 저무는 서쪽은 아직까지는 아름답다. 막바지를 향하는 환경 위기에 대한 경고이리라.
4연에서 시인은 '레'를 언급했다. '레'라는 음계를 슬픔이라고 했다. 도와 미 사이에 있는 '레'는 왜 슬픔일까. 시제에서 나타난 'P'와 '레'에 대해서도 무엇에 대한 줄임말인지 추정하기가 어렵다. 단지 미로의 첫 글자인 '미'로 넘어가기 전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으나 'P'는 어떤 단어의 약자일까.
리좀은 가지가 흙에 닿아서 뿌리로 변화하는 지피식물들을 표상한다. 나무뿌리에서는 다시 잔뿌리가 자란다.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자라는 방향은 각기 제각각으로 시인의 시가 이와 같다. '레'는 슬픔이고 'P'는 시를 쓴다고 했다. 한 작품(뿌리)에서 다른 잔뿌리(상징어)가 시를 잠식하고 있는 형태에서 '레'와 'P'에 대하여 상상을 진전시키는 속도는 무척 느려진다.
회절回折이란 파동의 전파가 장애물 때문에 일부 차단되었을 때 장애물의 그림자까지 파동이 전파하는 현상을 말한다. '레'와 'P'는 확정되지 않은 대상이다. 사전적으로는 연장선상에의 의미가 담겨 있고 시작품에 있어 대상에 대한 상상은 한계가 없음에도 강주의 시에서는 대상에서 파생한 사유가 대상의 그림자까지 만이 끝이 된다. 리좀시의 특성인 회절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직 상상과 추론을 통해 대상을 확정할 수 있겠지만 금세 미지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 것은 마치 시선이 머물렀으나 곧 사라지거나 변해버리는 그림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개입한 '레'와 'P'는 경계를 형성한다. 포괄적인 의미망을 가진 경계에는 회상의 시간과 모호성, 다층적 상상력을 바탕하며 인식 사유의 범주를 넓혀주는 기능이 있지만 '레'와 'P'가 다른 연에 포진한 '해 질 녘의 빛'과 '우리'와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여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빨강」에서도 "왈칵 쏟아지는 빨강, // 저녁이 출렁일 때," 라고 시작한다. 저녁노을로 붉음에 젖어들면서, 독자는 화자의 이야기에 선명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5연에서 "흔들리는 종소리, 소리 속으로 숨어든 머리가 있고 종은 모자일까" 라면서 '종'이라는 상징이 등장한다. 청각적인 증폭을 가져오는, '종'이 왜 나왔을까. 이어령의 정서진 노을 종소리를 비롯, 많은 시인들이 노을과 종소리를 병치시킨 작품을 내놓고 있다. 화자의 종교적 신념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으나 모호한 원형에서 화자의 주관적 재생에 따른 것이라고 여겨진다. 저물녘에 종소리를 들어본 기억도 없거니와 현실 밖에서 불러들인 상징이 생성한 경계에서 파생될 이미지와 이야기는 그림자(거기까지가 끝인)와 같은 것이다.
3. 퍼들(puddle) 텍스트의 계면界面
퍼들(puddle, 웅덩이)엔 가능성이 잠재한다. 기원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 더 깊어지거나 얕아질 웅덩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예측하기 어려우며 물이 고이면서 산란에 따르는 생태계가 지속된다. 비가 내리며 수면에 파문이 생기기도 한다. 비록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이 세계는 다양한 가능태의 공간을 내어줌을 알 수 있다.
어디에나 해가 넘치는 오후였다 해가 넘치는 어디에서 해가 우리를 넘치고 그것이 우리를 지치게 했고 지친 우리의 이마 위로 넘치는 해가 빛났다
ㅡ 중략 ㅡ
흰개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흰개다 발등 위로 나를 좋아하는 흰개가 턱을 기댈 때 부드럽고 따뜻하고 축축한 것을 기댈 때 우리의 머리 위로 해가 쏟아지고 우리는 함께 빛나고
ㅡ 김리윤의「흰개」부분 (시집『투명도 혼합 공간』문학과 지성사, 2022)
위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은 저물기 전의 해와 흰 개에서 비롯한 이미지는 흰, 하얀의 느낌 이미지가 작품 전반을 이끌고 있다. 주체가 건네는 유의미를 포획하기 전에 하나의 이미지로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안정적인 배경(시적 지향성)을 토대로 독자들은 빛, 흰, 개에 대한 사유를 추출하거나 부여할 수 있다.
최규승 시인은 "비서정적 현대시는 관념이 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념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날 것 그대로 직관하려고 합니다"3)라고 했다. 김리윤의 흰 개와 부합한다. 자칫, 관념과 시어의 범주를 넘나들 수 있는 '해'와 '흰 개'는 하얀 오후와 흰 개에 대하여 부드러움의 날 이미지를 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독자들 또한 자신을 비롯한 주변의 많은 체험을 대입시키기 용이하다.
하나의 웅덩이(puddle)에는 다양성이 응축되어 있으며 언제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풀려나올, 대기하는 상태를 예측하며 퍼들 형태는 시적 시발始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구조로 이어지기에 마치 위상기하학4)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4. 앞으로의, 리좀
강주 작품에 대하여 개인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갑자기 튀어나온 종에 머리를 부딪혀서 하얘진 세상' 같은, 여름이면 평탄한 도로를 달리다가 만난 호우와 산사태를 간접 경험한 느낌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오고 가기 힘든 독자의 불편한 상황이 마치 '너무 잦은 환승은 목적지를 잃은 시'5) 와 같다는 생각이다. 많은 상징어끼리의 충돌이 가져오는 산만함에서 내적으로 매몰된 체험 추정을 가능케 하며, 비동일적 서정성을 추구하는 강주의 작품들은 모더니즘의 또 다른 유형이라 할 리좀의 형태로서 젊은 시인들에겐 기본값이 된 지 오래로 이미 적응을 마친 독자들은 어쩌면 카타르시스를 느낄지도 모른다. 불가해한 작품을 마주하면서 그저 '멍'의 상태를 유지하며 심층에 쌓인 노폐물을 정화하는 효과를 기대해 본다.
강주의 첫 시집 흰 개 옮겨 적기 에 비하여 두 번째 시집인 99가지 기분은 은폐(혹은 유폐)가 많아진 형식과 풍부한 질료를 토대로 하기에 상상 발원의 개시는 다양해질 것이다. 평이하고 예측가능한 작품 구조에서 많은 식상함을 느껴온 것은 사실이며 리좀의 형태든지 퍼들식의 작품이든지 독자들마다 받아들이고 용해하는 과정이 다를 것이기에 어쩌면 여지껏의 구분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대상과 주체를 동일시하는 서정의 장르에 비해 자유로운 리좀시는 마치 난립한 잔뿌리 같은 현상태만이 지속되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급한 '다양태'는 미흡하여 예측가능성의 공간은 협소해진다. 작품에 대한 온전한 해독은 필요치 않지만 시적 지향점을 두기 어려운 만큼 시인들은 이에 대한 반조反照와 많은 사유에 따라 독자 스스로가 정동丁東을 찾아야 한다.
5. 마무리하며
시를 왜 쓰는가, 문학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할까, 복잡하고 빨라진 현시대의 속도에서 시를 통해서 얻는 이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자아自我는 사고, 감정, 의지 등 여러 작용의 주관자이자 이러한 작용을 통일하는 주체다. 대상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인지 자의식이 우선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코기토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다고 느끼고 있다. 자아는 동기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원초성과 외재적 요인의 틈에서 떠도는 심상의 파편으로 인하여 통합의 부재가 가져오는 혼란을 겪기 마련이어서 현대인들은 충족하지 못한 미완의 감정이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채 일상에 문득 출몰하며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잠시도 쉴 수 없는 시간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사람을 급박한 진행형의 존재로 밀어내고 있다. 자칫 분열로 치닫기 쉬운 부정의 자아를 순화시켜 주는 게 문학이고, 시라고 할 수 있다. 리좀시든지 퍼들시든지 형태상의 구분일 뿐 지난 기억을 소환하여 통합의 주조로 내세운 시편들에서 기억에 대한 회귀와 재생력을 지속시키는 본바탕이며 긍정을 향한 포괄적인 내적 감응을 가지는 데는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1). 시집 99가지 기분
2). 들뢰즈와 가타리의『천 개의 고원』(조광제. 세창미디어. 2023)
3). 월간 <현대시> 2017년 6월호 (이달의 시집/최규승, 흔적을 지우는 방식으로 새로워지는 것) p80.
4). 위상기하학(Topology geometry, topological)은 공간의 위상적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 점 상호 간의 연속적 위치 관계를 바꾸지 않고 서로 변형하여 맞추어 포갤 수 있는 두 도형은 같은 도형으로 볼 수 있어 서로 동상 또는 위상동형位相同型 이라고도 한다.
5). 무한화서 (이성복. 문학과 지성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