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 김자인 댁이라면 조선후기<말기에 가까운>에서 왜정 시절 까지엔 만석 부자로
영남에서 알아주는 거부 였다. 그집은 재산으로도 그럴뿐더러 몇 대에 걸쳐
진사 문과에 벼슬이 끊이지 않았고,인심이 또한 후덕하여 더욱 널리 알려져 있었다.
순조 무렵엔가 자인현감을 지낸 이가 있어 김자인댁이다.
그 집은 큰 부자인데다가 인심이 또한 푸근하여 항상 손님 대접에 후했기로, 이고장 순흥.
풍기.영주,봉화. 등지의 사람들은 재채기만 나면 <앳췌! 저-순흥 김자인 댁으로 가거라- >
고 했으니 이는 고뿔(감기)귀신을 쫓는 뜻이었는데, 김자인집에를 가야만 가장 푸짐한
대접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자인현감 지낸 김두명이 벼슬에서 물러와 향리 순흥에 있을 무렵이다.
어느날 김자인은 일이 있어 풍기장에를 갔던 길이었다. 늦은 점심때쯤 국수집에 들렀더니
자뭇 험상궃게 생긴 구척장신의 장년 사나이가 앉아 있는데, 구렛나루에 입언저리가 온통
무성한 털숲으로 뒤덮여, 입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나그네는 매우 시장한 기색이
기도 했다.
<저렇게 입이 온통 털 속에 묻혔으니, 저사람은 대체 음식을 어떻게 먹을까. 어디 한번 구경
이나 해봐야지....>. 이래서, 김자인은 <여보슈 나그네, 초면이지만 점심때도 늦었고 하니
내가 국수 한그릇 대접해도 괜찮겠소?> 하고, 특별히 시켜서 널찍한 양재기에다가 대여섯
그릇이나 될 만큼 무둑히 담은 국수상이 들어왔다.
상을 당겨놓은 나그네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또아리를 내어 입언저리에 대어, 수염털을 모두 걷
어 붙이고는 젓가락을 들자, 소담스레 빨아들여, 그 큰 그릇을 비우는데 게눈 감추듯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몇 해 지나서다. 어느날 밤 김자인 집에는 큰 도둑떼가 들었다. 주인 식구들을 모두
행랑방에다 몰아넣고, 문간에 졸개를 세워 지키게 하고, 떼거지들은 장롱이며, 벽장-고방을
샅샅이 뒤져, 짭짤한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추려서 자루에 넣어 여러 뭉치로 집을 묶었다.
짐을 진 졸개들을 앞세우고 대문을 나서던 도둑 두목이 우연히 행랑방에 앉아 있는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두목은 잠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방문 앞에 펄썩 엎드렸다.
<나리, 죽을 죄로 잘못되었습니다요!>하고 용서를 빌었다. 주인이 어리둥절하여, 다시 유심
히 본즉 도둑 두목은 여러 해 전 언젠가, 풍기장에서 국수로 알게 되었던 구렛나루의 거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두목은 황급히 졸개를 시켜, 저만치 가고 있는 짐꾼 졸개들을 모두 되돌려 세우게 했다.
두목은 짐들을 모두 풀어 고스라니 두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김자인 집에는 큰 도둑은 물론
작은 도둑까지도 얼씬하지 않았다 한다.
도둑사회에도 그만한 인간스러움이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