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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서평 스크랩 좋은책 서평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 김미경 지음
서벽향기 추천 0 조회 37 09.10.13 03: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김미경 지음

명진출판사 / 2007년 9월 / 310쪽 / 10,000원



▣ 저자 김미경

1964년생으로 연세대 음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 최고의 기업교육 강사이며 컨설턴트인 그녀는 여성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라이프코치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며 살고 싶은 여성들에게, 꿈을 설계하고 실현해 나가는 데 필요한 해법을 통쾌한 입담과 명쾌한 통찰력으로 제시해 여성들의 멘토로 자리 잡았다. 여성 리더십ㆍ여성 마케팅과 관련된 교육과 컨설팅을 수행하는 더블유인사이츠(W.insights)의 대표로 기업 및 정부 기관 등에 출강ㆍ컨설팅을 하고 있으며 여성소비심리전문가과정, 마케팅 카페, FEMI 포털 사이트를 운영하며 여성들의 꿈을 지원하고 있다. MBC-TV 기분좋은날 ‘김미경의 부매랑’, ‘김미경의 찬찬찬’, ‘김미경의 엔돌핀’ 등을 통해 여성들의 큰 공감을 얻었고, SBS 라디오 ‘김미경의 행복 레시피’를 진행했다. 저서로는 『나는 IMF가 좋다』, 『여자이기 때문에 당하지 말고 당차게 살아라』, 『성공과 실패에서 배우는 여성 마케팅』이 있고, 역서로는 『황금사과』가 있다.


▣ Short Summary

사랑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면 여자들은 대부분 그 사랑에 인생을 건다. 사실 나 역시 그랬다. 20대 시절, 사랑이 전부였고 내 꿈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었다. 꿈이라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결혼한 여성들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나는 여성들이 잃어버린 것은 ‘나’가 아니라 ‘나의 꿈’이라고 대답한다. 나의 꿈을 다시 찾는다면 내가 누군지는 금방 알게 된다고 대답한다.


물론 “잃어버린 꿈을 다시 발견하라”는 메시지는 일상에 치여 사는 아내들에겐 너무나 비현실적인 말로 들릴 수 있다. 아내들은 대부분 “결혼과 함께 내 꿈은 접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독신으로 산다고 모두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최선의 것을 얻는 것이다.


내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내 가슴속에 품은 꿈의 씨앗이 어떻게 세상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는지에 대해서다. 내 꿈의 여린 이파리들이 세상의 바람과 비에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 그를 통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지난 10여 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여자의 꿈은 남자의 꿈보다 훨씬 더 단단해야만 비와 바람에 꺾이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여성들은 특유의 케어 본능을 가지고 있다. 돌보고 키우는 일에는 우리 여성들을 따르지 못한다. 꿈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꿈은 우리가 키우고 돌보자. ‘무엇’ 때문에 못한다고 말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놀라게 할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꿈을 잃지 않은 사람은 언젠가 자신을 놀라게 한다.


▣ 차례

프롤로그 / 결혼 이후 발견한 꿈의 씨앗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DREAMS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언젠가 자신을 놀라게 한다


1. 죽어가는 당신의 꿈을 구출하라

골든타임의 주인공이 되는 방법 / 나는 근거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 꿈은 팔자를 바꾸는 도구 /

꿈은 당신을 지독하지만 아름답게 만든다 / 운명이 장난 칠 때 필요한 악재테크 /

당신의 꿈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2. 꿈은 당신의 미래를 책임질 충분한 자산

남편의 은퇴를 불현듯 맞이하지 마라 / 100달러짜리 컨테이너를 100만 달러짜리로 만들어라 /

남편과 아이는 1순위, 나는 0순위 / 엄마와 며느리라는 이름에 미래를 저당잡히지 마라 /

가슴이 보내오는 시그널에 따라라


WORKS  꿈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인생은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3. 당신의 꿈을 단단하게 키워가는 방법

여자들이 넘어야 하는 네 개의 산맥 /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엄마만큼만 살아라 /

아내의 적은 남편이 아니라 500년 역사다 / 가계부가 아니라 CEO 다이어리를 써라 /

우리도 ‘아내’가 필요해요 / 전업맘과 워킹맘은 이래서 공존하는 관계


4. 꿈은 때때로 당신을 테스트한다

소비할 것인가? 투자할 것인가? / 비교급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꿈은 없다 / 5 : 1 : 1 : 3 법칙을 아시나요? /

시간은 당신의 무기, 시간을 죽이지 마라 / 동네 아줌마도 그냥 만나지 마라


LOVE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꿈의 날개를 나눠 달자


5. 아내와 남편, 서로의 꿈을 향한 우정의 파트너

행복한 부부의 가치는 10억이 넘는다 / 평강공주처럼 남편의 꿈에 투자하라 /

남편을 나의 ‘키다리아저씨’로 키우자 / 가끔 그를 위해 낯선 여자가 되어준다 /

남편을 집에서 놀게 하라 / 내 남자의 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하라


6. 엄마는 아이의 첫 번째 역할 모델이자 최초의 멘토

평생 품고 갈 긍정의 씨앗을 심어줘라 / 아이는 엄마의 마음이 아니라 말에 반응한다 /

나는 어떤 유형의 엄마인가? / ‘들이붓기식 교육’으로는 아이를 성공시킬 수 없다 /

내 아이를 미래의 테마주로 키우는 방법 /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강력한 CEO 마인드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김미경 지음

명진출판사 / 2007년 9월 / 310쪽 / 10,000원


DREAMS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언젠가 자신을 놀라게 한다


1. 죽어가는 당신의 꿈을 구출하라

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강의를 잘 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라고 묻는다. 글쎄, “많이 보고, 듣고, 공부하고, 준비한다”라는 말 외에 달리 답변할 말이 없다. 나는 지난 16년 동안 강의하면서 사람들이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실 알고 보면, 그들이 울고 웃는 것은 내가 울리고 웃겨서가 아니다. 내가 의도한 것과 관계없이 스스로 울고 웃는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있다. 골든타임은 마음에 품고 있던 꿈이나 계획이 현실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시점을 말한다. 가끔 역량의 크기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면서 일을 찔끔하다가 그만두는 여성들을 만난다. 대표적인 예가 보험사에서 근무하는 설계사들이다. 보험설계사들 가운데 60%가 1년 안에 회사를 그만두고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보험설계사라는 직업은 무척 유망한 직업이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1인 기업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다른 어떤 직업에 비해 크다. 특히 여성에게 매우 적절한 직업이다. 발전 가능성이 많고, 더 다양한 분야로 성장할 수도 있는데 왜 설계사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이 중도에 포기할까. 바로 자신에게 올 골든타임까지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A라는 보험설계사가 고객에게 명함을 주고 6개월 동안 세 번 찾아갔다. A가 고객을 처음 찾아갔을 때 고객은 보험에 관심이 없었고, 두 번째 찾아갔을 때 고객은 보험을 들 상황이 아니었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는 볼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고객에게 보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일이 생겼다. 친구 남편이 사고로 한창 공부해야 할 아이 셋과 전업맘으로 살아온 아내를 남겨두고 일찍 죽은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물론 주변에서 보기에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히도 친구는 남편이 죽기 전에 종신보험에 가입해놓았다. 친구는 보험금을 타서 애들 교육 계획을 세우고 남은 돈으로 학교 앞에 작은 분식집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본 고객은 ‘보험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생각하며 보험에 들기로 결심했다. 그러곤 자신을 찾아왔던 보험설계사 A의 명함을 찾아 연락했다.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보험설계사 B가 초인종을 눌렀고, 고객은 B에게 보험을 들었다. 먼저 찾아왔던 보험설계사 A는 운이 나빴고 나중에 찾아온 보험설계사 B는 운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B는 때마침 찾아온 골든타임을 맞이한 것이고, A는 골든타임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연세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서울대가 아니고 연세대를 목표로 한 이유는 분식집에서 본 텔레비전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매운 쫄면을 하하거리며 먹던 토요일 오후, 식당 텔레비전에서는 ‘연고전’을 중계하고 있었다. 청주에 있는 대학생만 봐도 마음이 설?는데 연대생들과 연대 응원단인 ‘아카라카’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은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날 이후 연대생이 되겠다는 것이 내 첫 번째 목표였고, 두 번째 목표는 아카라카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1983년 3월, 꿈에도 그리던 연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했다. 그렇지만 입학 첫날에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입학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세련되고 예쁘게 차려입은 서울 애들에게 주눅이 들었다. 그날 나는 빨간 체크무늬 치마에 밤색 재킷을 입고 거기에 맞춰 빨간 구두를 신었다. 양장점을 하시던 엄마가 대학생이 된 기념으로 ‘서울 애들한테 기죽지 말라’고 지어주신 옷이었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건데 서울 애들과 있으니 촌스럽기 그지없었고 오히려 아줌마 같아 보였다. 작곡과 수석 입학이기도 했지만 시골에서는 부모가 자식 입학식에 으레 참석하는 것이려니 해서 아버지는 휴가를 내시고, 엄마는 양장점을 단골손님한테 맡겨두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인지 입학식에 참석한 부모가 드물었다. 나는 부모님이 입학식에 오셨다는 것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입학식이 시작되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를 가리키면서 “쟤가 우리 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애래”라며 수군거렸다. 세련된 옷차림을 한 애들 가운데 한 친구가 나한테 와서는 “네가 증평에서 온 김미경이니?”라고 말을 걸었다. 내가 머쓱해하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 네가 수석을 차지한 애 맞구나? 난 차석을 한 혜준이라고 해”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 둘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부모님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너무 으쓱해지신 나머지 아직 친해지지도 않은 과 친구들을 떼로 데리고 가서 비싼 갈비탕까지 사주셨다. 아버지는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시골 증평에서 자식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애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아이들은 재미있게 들어주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그냥 빨리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어쩌면 내 인생은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라카에 가입하기 위해 대강당 지하로 가던 날 확 바뀌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자가 대학에 가는 것을 시집을 잘 가기 위한 코스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음대는 최고의 간판이 되었다. 정해진 코스만 따라갔다면 나도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카라카 서클룸을 찾아가다가 코스를 벗어나 문이 약간 열려 있는 한 서클룸 앞에 멈춰 섰다. 열린 문 사이로 우수에 젖은 한 남학생의 옆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남학생은 언뜻 보기에도 어려워 보이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 여기에 들어갈까? 근데 뭐 하는 서클이지?’라고 생각할 때 룸에서 ‘복사꽃’이라 불리던 복학생 선배가 튀어나와 자기네 서클에 가입하라고 권했다. 그 선배에게 받아 덜렁덜렁 들고 온 책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었다. 교문을 지나다 검문이라도 당하면 엄청 문제가 될 책이었다. 집에 와서 별 생각 없이 펼쳐 든 그 책은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안내했다. 아카라카 치어리더의 꿈은 그렇게 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막걸리 마시고 꽹과리 치며 의기투합하고, 밤새도록 민족과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며 고뇌하고, 화염병을 만들고 데모하고, 그 우수에 찬 남학생과 연애도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했던 고뇌와 내가 쏟았던 열정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제대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악보보다는 전단지나 사회과학 도서를 끼고 다니는 시간이 많았고, 음대 건물보다는 사회과학대 건물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연애하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 남자 취향 때문에 친구들과 커플 모임이 있을 때는 가끔 창피하기도 했다. 실컷 먹고 놀고 나서 계산할 때 보면 친구들의 남자친구들은 가죽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데 내 남자친구는 ‘찍찍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지갑을 열 때마다 ‘찍~’ 하는 소리가 창피하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가 끝내주는 미팅이 있다면서 나를 꼬드겼다. 친구 말대로 남자들의 프로필은 훌륭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 분유를 먹고 자란 남자들이었다. 땟물 흐르는 남자들만 보다가 부티가 줄줄 흐르는 남자들과 마주앉으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영 불편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무언가 죽기 살기로 해서 이루어낸 경험도 없었고, 필이 꽂힐 만한 히스토리나 근거도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가 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그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때도 있다. 살다보니 돈이 없어 불편할 때도 많고, 근거 없는 돈이 오히려 쓰기 편하기도 하니 말이다.


인생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사실은 증평이라는 촌 출신에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서 가난한 남자를 좋아하는 못 말리는 취향이 오히려 지금의 내가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이런 조건들 때문에 더 노력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 꿈은 당신의 미래를 책임질 충분한 자산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64~66세였다. 예순 살을 넘기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예순한 살에 크게 잔치(환갑)를 했을까. 그런데 요즘은 평균수명이 남자는 75세, 여자는 82세로 늘어났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오래 산다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복지시설도 그다지 좋지 않은 나라에서 오래 산다는 것이 어떤 때는 대책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지금 30~40대의 평균수명은 90~100세 정도 된다. 자칫 ‘실수’하면 그중 3% 정도는 110세까지 산다고 한다. 당신은 100세까지 살 준비를 잘 하고 계시는가. 흔히 ‘노후자금’이라고 하는데, 그 보다는 ‘노후생계비용’을 준비해야 한다.


‘열심히 키워놓은 아이들한테 의지하면 될 거야.’ ‘자식들이 돌봐 주겠지’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들은 이미 엄청난 경쟁사회에서 자신을 책임지고 살기에도 버거운 데다가 그 세대에서는 부모를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도 약해진다. 우리가 100세일 때 자식 나이도 70~80일 텐데 늙은이들끼리 뭘 부양하고 부양받겠는가! ‘남편이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이면 은퇴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게다가 남자들은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여자에 비해 극도로 심약해진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보다 수명이 6~8년 정도 길다.


제일기획에서 발표한 ‘와이세대리포트’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65세 이상 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외출을 몇 번 하는지 물어봤는데, 할머니들은 매일 외출하고 하루에 밥을 네 끼 이상 먹는다고 한다. (옆집 가서 한 번, 앞집 가서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그에 반해 할아버지들은 일주일에 1~2회 정도 외출한다고 한다. 그것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누가 죽어서 초상집 가는 경우이고, 누구에게 전화할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어쨌든 여자의 삶은 나이 들수록 훨씬 더 활동적이 된다. 폐경 이후에 더 많이 분비되는 남성호르몬의 영향도 있지만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살면서 닥치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면서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남편에게 노후를 의지하기보다는 아내가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여자는 대부분 남편의 은퇴와 자신의 폐경기가 맞아떨어지는 나이 50이 되어야 닥친 현실에 놀라곤 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라는 점과 생계책임자인 남편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점에 놀랄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놀라야 한다는 것이다.


작곡을 공부한 내 첫 직장은 광고회사였다. CM송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엔지니어들과 마찰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랜 경력을 근거로 단단해진 그들의 고집과 CM송도 창작이라는 생각으로 밀고 나간 내 고집이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심한 언쟁까지 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기 싸움이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과의 마찰이 회사를 그만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월급이 너무 적은 점도 꽤 크게 작용했다. 그 당시 월급이 25만 원 정도였는데, 어느 세월에 돈을 모으나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피아노 레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음악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 일단 재미는 있을 것 같았고, 회사원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니 그 또한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레슨비가 한 달에 3만 원이었으니 10명만 가르쳐도 월급보다 많았다. 나는 사업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시작하면 성공해야 직성이 풀렸기 때문에 대충 시작할 수 없었다. 따로 경영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는 그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개념이 서 있었다.


가장 먼저 전단지를 만들어 전봇대며 아파트 입구에 붙이고 다녔다. 경비원 아저씨 눈을 피해가며 붙이는데 ‘부끄럽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많이 붙일까’라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경비원 아저씨가 정말 무섭긴 무서워서 붙이다가 들키면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하다하다 나중에는 경비원 아저씨를 아군으로 삼는 방법을 택했다. 담뱃갑을 쥐어드리며 애교 있게 부탁하는 방법이었다. 거절하는 아저씨는 없었다.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없이 사는 사람들끼리 담배 한 갑이 엄청난 걸 바꿀 수 있다는 것을 20대 후반에 배웠다. 그 추운 날씨에 전단지 400장을 붙이고 다녔던 날,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서럽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오기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다음 날부터 보상을 받으면서 내가 그렇게 상냥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목표를 가지고 덤벼들면 자신도 모르는 여러 가지 능력이 발휘되게 마련이다.


그렇게 하여 ‘김미경 피아노 교실’이 탄생했다. 나는 단순히 피아노 레슨 선생님으로 그 일에 접근하지 않았다. 선생님이자 피아노 교실 경영인으로 접근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때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하면 고객을 만족시킬까’ 하는 것이었다. 나온 답은 ‘고객을 감동시키자.’ 그때까지만 해도 경영관련 책들을 읽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면 아이디어는 나온다는 것을 이때 체험했다.


피아노 교실을 시작한 뒤 남편 아침식사 메뉴는 무조건 토스트였다. 집에서 국이나 찌개 냄새, 반찬 냄새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원룸이라 주방이 드러나 있었는데 예쁜 커튼으로 가렸으며, 옷도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처럼 입었다. 그곳은 내 집일 뿐 아니라 회사였던 것이다. 금방 입소문이 났다. 나도 예측하지 못한 정도의 반응이었다. 나중에는 레슨 받는 아이들이 60명 정도 되었다. 처음에 피아노 한 대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넉 대를 더 들여놓아야 했다. 잠은 그야말로 피아노 다리 사이에서 잤다.

1년 만에 원생 200명을 확보했고, 강사는 10명 정도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시작한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 기쁨과 보람은 유통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피아노 교습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나자 갑자기 그 일이 재미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들과 접촉하는 일이 적성에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이 기계적이라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그와 함께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자꾸 나를 잡아당겼다. 전처럼 신나지도 않았고 꼭 무엇을 잃어버린 듯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굳이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를 찾자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난 일 때문이었다. 음대를 다녔으면서도 정외과나 신방과 친구들과 많이 친했는데 그 친구들은 거의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신기하고, 새롭고, 솔직히 부러웠다. 그리고 내가 쓰는 단어의 한계를 느꼈다. 또 한정된 인간관계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하늘이 유난히 푸르던 그날, 나는 그 알 수 없는 기운이 뭔지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중대한 결심을 했다. ‘평생 동네 피아노 선생님으로 살 거야?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데?’ 그때부터 나는 피아노 학원 원장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기로 했다.


학원을 정리할 생각을 하면서 무엇을 할까 내내 고민했다. 그러다가 학원협회에서 마련한 강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학원 원장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그야말로 머리에서 종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강사라는 직업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학원을 친구에게 넘겼다. 그리고 곧장 중앙대학교 야간대학원의 산업지도자과정에 등록했다. 등록하고 보니 제대로 찾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수강신청한 사람들은 나처럼 강사를 꿈꾸는 사람들이거나 이미 강사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공부는 당연히 열심히 했고, 함께 공부하는 그들과 연구했다.


나름대로 준비기간이 끝난 다음, 2단계 행동에 들어갔다. 강의할 준비가 끝났다고 해도 누가 내게 강의를 의뢰하겠는가? 그 누구도 내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강의를 할 것이라고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를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각 회사의 교육담당 부서와 담당자를 알아내 일일이 메일과 편지를 동시에 보냈다. 대략 200군데였는데 당연히 어디에서도 회신이 오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찾아 주지 않았다. 메일을 보낸 지 한 달이 가까워질 무렵 드디어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대우자동차에서 여직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기분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남편을 앞에 앉혀놓고 2주일 동안 맹렬하게 강의연습을 했다. 첫 강의 때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강의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고 여기저기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다른 곳에서도 하나 둘씩 강의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강사 인생이 시작되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뒤 삼성, LG, 포스코 등 대기업과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내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어 삼성경제연구소가 뽑은 ‘최고의 명강사 톱15’에 포함되기도 했는데,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의 기쁨과 보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내가 직장을 때려치운 다음 전업맘으로 살았다면, 피아노 학원 원장으로 머물렀다면 지금 느끼고 누리는 많은 행복을 놓쳤을 것이다. 이는 전업맘으로 살거나 학원 원장으로 일하는 것이 지금 하는 일보다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꿈을 이루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꿈이 무생물처럼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해감을 경험을 통해 확인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꿈을 화석으로 만들지 않고 진화시켜나갈 때 사람은 살아 있는 맛을 느끼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꿈이 진화하려면 그 꿈을 꾸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나가야 한다. 꿈을 이룬 사람과 이루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그것을 위해 자신을 올인했는지 안 했는지 하는 것뿐이다. 뻔한 소리 같고 고리타분한 얘기 같지만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WORKS  꿈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인생은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3. 당신의 꿈을 단단하게 키워가는 방법

나는 스물세 살 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제 딱 마흔넷이니까 22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 셈이다. 아이 낳을 때 잠깐, 조금 쉬는 기간 잠깐을 빼고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다. 여자가 20대부터 40대까지 쉬지 않고 일하려면 남자는 한 번도 넘지 않아도 되는 산맥을 네 번이나 넘어야 한다. 첫째 산맥은 대부분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온다. 직장생활을 2~3년 하다보면 그냥 이유 없이 다니기 싫을 때가 있다. 이게 바로 첫 번째 산맥이다. 첫 번째 산맥을 간신히 넘고 나면 두 번째 산맥이 나타난다. 대개 스물일곱에서 여덟, 아홉 즈음에 결혼하면서 오는 산맥이다.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더라도 엄청난 세 번째 산맥이 다가온다. 바로 임신이다. 하여간 세 번째 산맥을 넘고 나면 마지막으로 가장 높고 무시무시한 네 번째 산맥에 맞닥뜨리게 된다. 알 만한 사람은 이 네 번째 산맥이 바로 ‘육아’라는 것을 벌써 눈치 챘을 것이다. 일하는 엄마들이 육아 때문에 겪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쟁이 따로 없다.


우리나라에 일하는 여성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그리고 일하는 여성 중 60%는 맞벌이하는 여성이다. 60%나 되는 여성이 매일매일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는 일, 밥 퍼주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하는 것이다. 일하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 바로 알림장이다. 나는 알림장에 정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문방구가 문 닫기 전에 집에 들어가서 애들 알림장을 확인하고 준비물을 챙겨서 가방에 넣어줘야 다음 날 학교 교육이 돌아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나도 알림장 때문에 무서웠던 경험이 있다. 큰애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거의 집에 늦게 들어가다 보니, 한 번은 애가 메모지에 준비물을 적어 화장대 거울에 붙여놓은 적이 있다. “엄마, 이거 꼭 준비해줘. 오늘은 나만 안 가지고 갔어. 내일도 안 가지고 가면 진짜 혼나.” 그런데 그날은 색종이, 가위, 풀도 아니고 엄청 무서운 게 적혀 있었다. “요구르트병 10개, 우유팩 3개, 빨대 6개.” 도대체 그 시간에 그걸 어디 가서 구해야 하나 싶었다. 결국 그날 밤에 요구르트병과 우유팩을 찾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 7시에 딸을 깨워서 슈퍼마켓으로 끌고 갔다. 메모지에 적혀 있는 대로 요구르트 10개, 우유3개를 샀다. 그러고는 그냥 버리기 아까워 아이와 둘이 앉아서 그걸 다 마셨다. “학교 가서 깨끗하게 씻어. 선생님한테 혼나지 말고!” 하고는 애를 학교에 보내고 출근했다.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회사에서 눈물이 찔끔찔끔 나면서 “나 왜 이러고 살까? 이러고 살면 행복해지는 거 맞아?” 했다. 유산균이 잔치를 벌였는지 뱃속은 부글부글 끓고 머리는 스트레스로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은 날에는 스트레스 풀 상대가 딱 한 사람 있다. 바로 남편이다.


퇴근해서 멀뚱하게 앉아 있는 남편을 속사포 쏘아대듯 심문한다. “당신 회사 다니지? 나도 회사 다니지? 왜 나만 집안일하고 애보고 그래야 해? 당신은 애와 관련이 없어? 당신 아빠 아니야? 낳아놓기만 하면 다야?” 일단 전체적인 것으로 싸잡으면서 문제 상황을 아우르고 난 뒤 이제 구체적인 2차 심문으로 들어간다. “이번 주에 나 바쁘다고 도와달라고 했지? 출장도 있고 하니까 아이 알림장 당신한테 꼭 챙기라고 부탁했잖아. 왜 안 챙겼어?” 오랫동안 이런 일로 싸우다 보면 가끔 한국 여성을 대변하는 투쟁가로 돌변한다. 싸우는 대상은 내가 사랑에 미쳐서 결혼한 한 남자가 아니다. 한국 역사 500년을 상대로 나 혼자 싸우는 고독한 투쟁으로 느껴진다.


피아노 학원을 할 때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강사 초창기에도 남편은 내가 하는 일을 ‘안 말리자 주의’였지 ‘도와주자 주의’가 아니었다. 강사 일을 시작하고 잘한다는 소문이 나 여기저기서 강의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다. 그날도 강의 준비 등으로 일하다 새벽에 집에 들어와 남편이 깰까봐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런데 잠에서 깬 남편이 말했다. “여보, 나 물 좀.” 순간 피곤함보다 더한 짜증이 났다.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온 아내한테 “수고했어, 힘들었지?”라고는 못할망정 물 좀 달라고 하다니. ‘이야, 잘난 김미경이 돈도 안 보고 배경도 안 보고 마냥 멋져 보여 결혼한 그 남자가 지금 러닝에 팬티만 입고 물 달라는 이 남자야?’ 야심한 시간에 싸울 수도 없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달래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남편 바꾸기에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였던 게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여자를 잘 모르는 탓에 서운하게 하는 타입이었기에 리모델링이 비교적 쉬웠고 빨리 되었다. 속을 끓이면서도 “남자들은 다 그래!” 이러면서 포기했다면 나는 남편에게서 멋진 파트너십을 못 느꼈을 것이다.


4. 꿈은 때때로 당신을 테스트한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삶 그리고 그 인생이 ‘브라보!’라고 외칠 수 있는 멋진 인생이 되는 삶, 행복한 삶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다. 스스로 만족하고 다른 사람이 동경하는 그런 멋진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위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 해답은 ‘프로정신’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프로정신일까? 나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그 사람의 리더가 누구인가에 따라 구분한다. 인생을 돌아보면 항상 끌어주고 자극이 되는 리더가 있었다.


학생 때에는 부모님, 선생님, 선배 또는 앞서가는 친구가 리더가 되었고, 거기에다 그 무엇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험이라는 리더가 있었다. 아무리 공부를 안 하는 학생도 시험 기간만큼은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냈으니 시험은 가장 강력한 리더였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이제 시험은 없다. 인생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르게 하는 제도도 사람도 없다. 게다가 다양한 방법으로 공부하게끔 하던 부모님도 더는 어떤 자극을 주실 수 없다. 인생의 리더가 완전히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중요한 시기다. 스스로 자신의 강력한 리더가 되는 사람, 그리하여 제 인생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는 사람의 인생은 그야말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반면 남편이나 아이의 인생 같은 외부의 영향력에 따라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장면에 박수만 쳐주는 인생이 된다.


피아노 학원이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난데없이 팔겠다고 하자 다들 말렸다. “고생고생해서 이제 손도 안 대고 코 풀게 생겼는데 그만둔다고? 미쳤어? 남들은 이런 학원 못해서 난리인데.” “지금 네 나이가 몇 살인데 공부를 다시 해? 그것도 전혀 안 해본 일을. 계속 직장 다닌 사람들은 벌써 팀장들인데 새로운 일에 뛰어든다고? 고생하려고 작정을 했군.” 그렇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과 비교할 생각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보편적인 생각, 안전한 길, 다 소용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밀고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 오히려 더 큰 행복을 끌어안았다. 행복을 걷어차는 것으로 보였던 내가 말이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내 자신으로서 살 때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고 믿는다. 내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도 안 해본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은 늘 온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끓인 내 작품은 미역국이다. 미역국을 선택한 것은 쉬어 보여서라는 단순한 이유였는데, 내 딴에는 끓인다고 끓였는데 솔직히 그 미역국을 먹고 너무 맛이 없어서 토할 뻔했다. 무슨 놈의 미역국이 미역 따로 놀고 고기 따로 놀고 물 따로 노는 것이었다. 엄마가 끓일 때는 그렇게 쉬어 보이던 미역국이 도대체 왜 이럴까 싶어서 엄마한테 전화했다. “엄마, 나 미역국 끓이는 방법 좀 알려줘.” 그랬더니 엄마는 “그냥 고기랑 미역이랑 물 넣고 자작하게 끓이면 돼” 하셨다. 그래서 “엄마, 세 가지 다 넣고 끓였는데 안 된단 말이야!”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더니 이번에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긴 했다. “자, 미경아.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봐. 우선 미역을 불려.” “얼마만큼 불려?” “아, 그냥 먹을 만큼. 그리고 고기를 참기름 넣고 달달 볶아.” “얼마만큼?” “적당하게! 거기다 물 넣고 미역 넣고 끓여.” “물 얼마만큼?” “적당히 부어. 눈으로 보면 알지.” 이건 프로가 아니면 절대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어쨌든 그날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미역국을 끓였더니 그래도 맛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그렇데 한 번, 두 번, 세 번 끓이다 보니 지금은 미역국을 얼마나 잘 끓이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무조건 하라. 그리고 훈련하라. 그럼 뭐든지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무식해 보이지만, 실은 이것이 프로가 되는 첫 번째 방법이다. 그런데 이것을 일상에 놓을 것이냐, 일터로 놓을 것이냐, 아니면 자원봉사 쪽으로 놓을 것이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자신감에는 네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 무능감’이다. 내가 뭘 잘못하는지도 모르는 단계다. 그러다가 ‘의식적 무능감’이 온다. 내가 무엇을 못하는지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성장하게 된다. 그 다음 단계는 바로 ‘의식적 자신감’이다. 한국에서 살 때에는 영어를 못하는 것에 대해 신경도 안 썼는데(무의식적 무능감) 해외여행을 나가보니 ‘아, 영어를 못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의식적 무능감). 그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와, 나 영어 좀 되는데’ 하는 단계(의식적 자신감)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의식적 자신감 단계에서 멈추면 안 된다. 이 단계를 뛰어넘어 마지막 네 번째 단계인 ‘무의식적 자신감’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영어를 잘하지만 잘한다고 스스로 인식하지 않는’ 그 순간에 바로 프로가 될 수 있다.


나도 이런 자신감이 성숙하는 과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 처음에 강의했을 때에는 청중이 너무 무서워서 ‘야, 나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겠다. 더 연습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3~4년이 지나니까 ‘나, 진짜 잘하네. 이대로 가면 나보다 강의 잘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강의가 끝나고 “원장님, 어떻게 그렇게 강의를 잘하세요? 원장님 강의는 항상 최곱니다” 하는 칭찬을 들을 때에야 ‘어머, 내가 강의를 잘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무의식적 자신감의 단계에 이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열심히 하기만 해서, 수십 번 훈련한다고 해서 모두 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선도’, 이것이 필요하다. 어제 한 강의를 오늘 또 하고, 내일 또 하고, 10년 전에 강의했던 노트 가지고 오늘도 강의한다면 누가 나에게 강의를 의뢰하겠는가. 10년 전에는 최고였어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흡수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냥 ‘예전에는 잘나갔다’는 소리에나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일을 오래하다 보면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몇 년 전에 프로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15년 전쯤 대출 좀 받으려고 한 은행에 전화를 걸었는데 “저기 대출…” 하고 말하려는 순간, “담당자 바꿔드리겠슴댜~” 하고 솨솨거리며 전화를 돌렸다. 다행히 전화를 돌려받은 직원은 “감사합니다. 대출과 이 OO 대리입니다. 말씀하세요”라며 알아듣게 응대해주었다. “제가 대출을 받으려고 하는데요.” “아, 그러세요. 그럼 혹시 대출자격이 되나 알아봐드릴 텐데요. 계좌번호 좀 불러주시겠어요?” 그런데 통장을 다른 방에 두고 와서 바로 계좌번호를 불러줄 상황이 못 되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계좌번호 찾아서 다시 전화해주세요” 하고 탁 끊어버리는데, 그 직원은 친절하게 기다리고 있겠으니 가지고 와서 불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대출 받으러 올 때 필요한 서류를 불러줄 테니 메모 준비하라며 또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분이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데, 바로 그분이 내가 생각하는 프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같은 일을 오래했다고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얼마나 유통기한을 길게 늘려 가느냐에 따라서 마지막에 프로로 존경을 받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LOVE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꿈의 날개를 나눠 달자


5. 아내와 남편, 서로의 꿈을 향한 우정의 파트너

남자 후배가 결혼한다고 하자 다들 “뭐 하는 여자야?” 하고 묻는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말에 “야, 좋겠다. 방학 있지. 정년 때까지 편하게 일할 수 있지. 돈 되지. 부럽다. 부러워!”라며 부러움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원래 한국 남자들은 아내가 돈 벌어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이후 경제 환경과 고용 패러다임이 변하면서 남자들도 여자들이 돈 버는 것을 관용하는 단계를 넘어 환영하는 세태가 되었다. 남자들의 이런 심리변화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거센 사회 환경 때문이다.


남자가 45세 전후가 되면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자살할 확률도 높고, 바람피울 확률도 높다. 남자가 45세 전후에 바람을 피우는 것은 기운으로가 아니라 정서로 피우는 것이다. 자살이 나을까, 바람이 나을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도 한편 내 남편이 아닌 한 인간으로 멀찌감치 떨어뜨려놓고 보면 그 나름대로 측은한 마음도 생긴다. 남편을 보듬고 평생 용기를 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옆집 아줌마가 아니라 바로 아내인 나다.


아내들만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편들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아내들만 꿈을 미루고 현실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돈도 많이 벌어다주고 애들이랑 잘 놀아주고 사회적으로도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들이 집안 살림에, 애들 뒷바라지에, 남편 내조에 여력이 없어 자신의 꿈을 보류해둔 것처럼, 남편들은 생활비며 아이들 학비를 버느라 자신의 꿈은 아예 접었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엄마들의 교육열은 이미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제 다르게 살자. 아이에게만 몰두해서 가르치려고 하지 말자. 가정의 엔진인 남편에게도 투자하자. 아이에게는 숨통 막힐 만큼 공부해야 한다고 볶아대면서 남편은 배운 것을 빼먹기만 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빼먹기만 하니 남편의 노동력이 노쇠해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가정의 힘이 노쇠해가는 것과 같다.


6. 엄마는 아이의 첫 번째 역할 모델이자 최초의 멘토

우리 엄마는 양장점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다섯 형제를 다른 엄마들처럼 보살피지는 못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늘 “너네 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라는 말은 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잘 될 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항상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셨다. “미경아, 네가 왜 이렇게 잘 되는지 알아? 너는 엄마한테 평생 감사해야 해. 내가 너 태몽을 잘 꿔서 그런 거거든.” 나는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게 다섯 살 때부터 태몽 얘기를 들었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태몽은 이렇다. 엄마 처녀 시절에는 보지도 못했던 8차선 고속도로를 엄마는 꿈에서 봤다고 한다. 꿈에 8차선 고속도로에 어떤 사람이 말을 달그락거리며 달려가는데 수만 명이 그 사람을 쫓아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얀 말을 타고 앞장서 달리는 그 사람은 머리가 굽실굽실한 것이 외국사람 같기도 하고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엄마가 그 수만 명을 헤치고 극성스럽게 마구 달려가 그 사람이 여잔지 남잔지 확인하려고 말꼬리를 딱 잡고 봤더니 그 사람이 여자였단다. 그리고 나를 낳았다고 한다. 나도 들을 때마다 꿈 내용이 멋있어서 막 흥분되곤 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수양엄마로 모시는 분이 계셨다. 엄마 친구로 아이를 못 낳는 분이셨는데, 딸이 많은 우리 엄마가 자매 가운데 하나를 데리고 가라고 그랬단다. 엄마가 우리를 불러놓고 “누가 갈래?” 하고 물었을 때 “엄마, 내가 갈게” 하고 나서서 내가 그분의 수양딸이 된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수양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오래하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리 집에 오셨을 때였다. 수양엄마가 “미경아, 너희 엄마 같은 사람 세상에 없어. 넌 평생 감사하고 살아야 해. 네 엄마가 너한테 얘기하는 말 달리는 태몽 있잖아. 그거 사실은 다 뻥이야”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수십 년 동안 의심 없이 믿어온 태몽이었는데 말이다.


“그거 다 거짓말이야. 충북 괴산 증평 시골에서 딸을 낳았지만 정말 멋있게 키우고 싶다고, 복숭아 받은 꿈 갖고 어떻게 크게 되겠냐고 너희 엄마가 딸 낳을 때마다 하나하나 꿈을 지어낸 거야.” 어쩐지 우린 어렸을 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태몽은 안 그런데 우리 엄마는 꿈이 왜 이렇게 스펙터클한가 싶었다. 언니 태몽도 대단해서 엄마는 원래 태몽 콘셉트가 저러신가보다 했는데, 알고 봤더니 다 지어낸 거라니. 태몽이 현실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의 그 꿈은 나한테 무한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것은 확실하다.


돈이 있건 없건 자식교육에 대한 엄마들의 열망에는 아무 이유 없다. 그야말로 ‘묻지 마 교육’이다. 아이가 “엄마, 우리 집에 돈 없어서 어떡해?” 하면 “이놈의 새끼야, 너 하나 공부시킬 돈 없을 것 같아? 내 살을 베어 팔아서라도 너 공부시킬 돈은 만드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해” 그런다. 아이는 엄마가 그러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엄마들의 그런 노력은 다양한 양상으로 계속되고 있다. 엄마라면 ‘너만 공부하겠다고 하면 내가 파출부를 해서라도 밀어주겠다’는 것이 공통된 마음이다. 그런데 엄마들의 이런 노력이 긍정적인 방향이라면 아이의 공부에도, 장래에도 도움이 될 텐데, 최근에는 너무 과하고 극단적이기까지 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엄마들은 다들 시행착오를 겪고, 실수하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엄마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드는 매니저형 엄마, 아이를 산만하게 만드는 갈대형 엄마, 아이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CCTV형 엄마, 아이를 방황하게 만드는 방임형 엄마의 네 유형을 다 경험하게 된다. 물론 나도 네 유형의 모습을 골고루 갖춘 ‘사이코형 엄마’다. 너무 바빠서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한다”라고 말만 하고 아이에게 신경을 안 쓰기도 하고, 어느 날은 너무 방임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학교에 한 번 찾아갈까?”라고 했다가 “엄마, 찾아가려면 8년 전에 갔어야지. 고등학생인데 이제 찾아가면 뭐해?” 하며 딸한테 혼난 적도 있다. 엄마의 시행착오로 아이가 의존형으로 되는 데에는 10년 밖에 안 걸릴지 모르지만, 자기 생존을 위해 의존형을 극복하는 데는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뒤늦게 망쳐진 아이 인생을 수습하기보다 미리미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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