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입구까지 갔지만 청량산은 그림의 떡일뿐이고
막걸리 한잔 걸친것이 쥐약이였나 ? 노숙이였지만 단잠을 잤다
하기사 전날 생쥐같이 종일 비맞고 허벅지는 다쓸려갖고 얼반 골빙들었으니
잠안오면 죄많지뭐
라면은 썬나갱이 넣고 떡넣고 끊여놨는데 물은 오만상 ㅎ ~
이분은 자기는 어디가믄 수박사오느라 아이스께끼 사오느라 음메가 묵꼬싶다등 주문도 많은데
남한테는 기껏 한다는게 오로지 라면밖에 할줄모르니 염치가없기는 프로수준이라
하기사 이제까지 삼리주민들을 하도우려먹어서 ~ 아무도 안속지요 ㅎ
억굴에 철판깐지는 오래된듯 ㅋ ㅋ ~
빨리가라고 등떠미는분 때문에 고생보따리지고 갑니다
뒤돌아본 청량산 산마루에는 운해가 휘감고있네요
35번 국도를 따라 내려오다 국도를 버리고 가송리로 접어든다
고산정과 농암종택을 보기위해서
고산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4호. 고산정은 정유재란시 안동 수성장으로 활약하여 좌승지(左承旨)에 증직(增職)된 바 있는 성성재(惺惺齋)금난수(琴蘭秀)의 정자이다.
고산정은 안동팔경(安東八景)의 하나인 가송협(佳松峽)의 단애(斷崖)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자의 주위에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낙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獨山)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고산정은 자연석으로 높이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다. 주두(柱頭)의 상부에는 보아지를 끼웠으나 외부에는 초각(草刻)을 하지 않고 내부에만 초각을 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인데 종량(宗樑) 위에는 키 큰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여기에 소로[小累]를 끼워 장여[長舌]와 창방[昌枋 : 대청 위의 장여 밑에 단 도리]을 받게 하였으며, 좌측 마루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귀에는 선자연(扇子椽 : 부채살같이 댄 서까래)을 걸었다.
평면은 어간(御間)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몄는데 좌측방은 통간으로 하였으나 좌측방은 뒤쪽의 1간만을 온돌방으로 꾸며 마루는 ㄱ자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는데 정자로의 출입은 난간의 양측 끝에서만 하게 하였다.
저런 그림같은 집에서 한번 살아보면 평생소원이 없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있다
과연 그럴까 ? 그렇지 않다고본다
촌에 살려면 도시보다 몇배는 부지런해야만 살수있다 적어도 내생각은 그렇다
첫째는 풀과의 전쟁이다 풀을 제거하지 않어면 뱀도 올수있고 여러가지 해충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둘째는 산모기들 때문이다 크기도크고 물리면 아프다 이놈들이 집으로 들어오면 애먹는다
들쥐들도 신경쓰이게하는건 마찬가지다
이런것들 이외에도 귀농인들과 주민들 사이에 갈등으로 역귀농인들이 많다고한다
오수를 연결해주네 마네, 수돗물을 연결안해준다거나,진입로가 문제라는둥 ......
시골생활은 우리가 보기는 꿈같은 얘기지만 그네들의 사정은 다르다는걸 ~~~
나도 이참에 오랜기간 꿈같은 생활을 꿈꾸어왔는데 조그마한 터를하나 마련했다
집을 지을려고보니 내가 생각지도 못한 복잡한 문제들이 ~~~ 첩첩산중이다 에그
시간을 두고 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봐야할듯
이쁜집을 두고 본격적인 산허리둘레길로 접어든다
산위에서 쏱아진 돌맹이들로 산길은 막히고~
추산대장님
친구의 부탁으로 알바하며 부친거라네요
일당 많이받으셨나 ?
농암종택
경상감사시절 동화사승려 옥준이 그렸다는 농암선생의 영정이(보물872호) 있다는데 보지도못하고~
농암이현보(1467-1555)
1467년 7월 29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아버지 이흠李欽 (1440-1537, 인제현감)과 안동권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비중棐仲, 호號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20세 때 홍귀달洪貴達 선생께 수학하고, 1498년 32세에 문과 급제했다. 36세, 새내기 사관史官 시절, 대간臺諫보다 더 가까이서 사초史草를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인사담당 관리들이 직무를 보는 곳에 사관도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연산군은 괘씸히 여겼다. 2년 뒤, 사간원정언으로 언관言官이 되어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곧 압송-장형杖刑-하옥下獄-처형이 이어졌다. 사초가 문제가 되어 발발한 무오사화 4년 뒤의 일이었고, 갑자사화 당년이었다. 연산군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니, 친구들은 이런 강직함을 보고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사관史官과 언관言官으로서 사지死地를 벗어난 아주 드문 경우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직되고, 다음해는 사헌부지평으로 승진 발탁되었다. 다음해 자청하여 영천군수로 나왔다. 선망하는 청요직에 올랐지만 농암의 선택은 지방이었다. 보장된 영달의 길을 포기했다. 그 후 밀양, 충주, 안동, 성주, 대구, 영주, 경주, 경상도관찰사로 이어지는 여덟 고을, 30여년을 근무했다. 전 관료생활을 지방에서 근무한 셈이었다. 가끔 중앙보직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나와버렸다. 특이한 관료이력이라 할 수 있다. 30여년 고을살이도 희귀한 일이지만 이런 관리의 청백리 녹선은 더욱 희귀하다. 경직京職을 절대적으로 선호한 당시의 정치풍토로 볼 때, 끊임없는 외직의 자청은 민생에 보다 가깝게 가고자 하는 일관된 신념 때문이었다. 동료들의 신망과 존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농암의 고을살이는 목민관의 전형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백성에게 관대했으며, 사적인 일이 공적인 일에 절대 개입되지 않도록 했다. 경상도관찰사 시절 친구, 친지의 공관출입금지는 그 대표적인 조치였다. 농민들이 고리대로 인해 토지를 빼았기는 일을 척결하고, 세금에 허덕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향교를 지어 지방교육을 활성화하고 노인공경에 매우 정성스러웠다. 대구부사 시절 학생교육을 위해 봉급을 털어 도우는가 하면, 안동부사 시절‘안동양로연(花山養老宴)’에는 80세 이상 남여귀천을 함깨 초청했다. 당시 사회가 삼엄한 신분사회였음을 생각할 때 이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농암은 고을원의 신분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노인들을 즐겁게했다. 농암에게 '경로'는 '박애'와 더불어 지방행정의 중심이며, 전 생애를 관통하는 최고의 가치덕목이었다. 이런 측면은 집안에서도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인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는 퇴계의 행장行狀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런 휴머니즘 가득한 공복윤리가 있었기에 성주에서는 "고을 사람들이 전출의 길을 가로막고", 충주에서는 "떠나는 날 쫓아와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길을 메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관찰사들의 계속되는 표창상신과 당대에 계층을 초월하고 누렸던 인기는 결코 우연일 수 없다
농암은 대시인大詩人이며 대효자大孝子였다. 1512년 부모를 위해 '애일당愛日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9노인을 모신 이른바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개최했다. 여기서도 70세 노구의 몸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의 효행을 그대로 실행했다. 이런 모습에 동료,친구들이 대거 축하 시를 보냈고, 선조임금이 농암가문에 ‘적선積善’이란 어필을 내린 계기가 되었다. 지금 종택마루에 선조어필이 판각되어 있고, 선현들의 친필 시 40여편 역시 종택에 보존되는데,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이 그 책이다. ‘애일당구로회’는 아들 ,손자로 이어졌고, 이후 500여 년을 이어오는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1542년, 농암은 정계를 은퇴했다. 종2품 '영감(참판)' 신분으로 물러났다. 인기와 여망으로 보면 '대감(판서)'도 가능하고 '정승(좌,우 영의정)'도 가능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임금, 동료들의 만류도 뿌리쳤다. 도성 경복궁과 한강 제청정에 마련된 전별연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 임금은 친히 금서대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고, 편안한 귀향이 되도록 호행관리가 인도하라 명령했다. 전 관료들이 참석했고 전별시를 지었다. 이 날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동료, 벗들의 전별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본 도성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는 말이 나오게 했다. 퇴계 이황은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김중청金中淸은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그 누구도 구런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우리 농암선생깨서 쇠퇴한 풍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용퇴했다. 회재晦齋(李彦迪), 충재冲齋(權橃)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金安國), 퇴계退溪(李滉)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가 떠날 때의 1백 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어찌 비유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고 했다.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했다.
농암은 돌아오는 한강 뱃머리에서 한 수 시조를 읊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았다고 하여‘효빈가效顰歌’라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농암은 은퇴후 농부로써 일개서생과 다름없는 청빈한삶로 추앙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농암은 귀먹바위 농암에 올라 시조한수를 읆었는데
그시조가 유명한 "농암가"이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산 저 언덕 어제 본듯하여라"
추산대장님 저집 쥔장과 한참동안 얘기 나누시고
오는 동안에 길이 무너지고 잘려나가고 시청에 얘기해서 복구해야 된다고 ~
쥔장이 참인상이 맑고 순수하게 생기셨다(서울대 출신 )
초상권때문에 ~
이엄청난 부지가 쥔장땅 이라카네요
출입금지 경고에도 산위로 치고 올라갑니다
백운지를 지나 단천교를 지나기전 앞의 "왕모산"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왔을때
왕의 어머니가 이곳에 피난허였다고하여 왕모산이라한다
홍건적이 이곳까지 진격하여 공민왕이 위태롭게되자
백마를 탄 노장수가 왕을 구하고 지렁이로 변했단다
왕모산은 "갈선대"라는 바위가 유명하며
12개의 산봉우리를 거쳐야만 정상에 오를수있다
왕모산에는 공민왕이 피난하였을때 주민들이 쌓았다는 왕모산성이있는데
전체길이는 360여미터이고 현재남아있는 성곽은 50여미터이다
성안에는 "왕모당"이라는 성황당도있다
왕모산은 예전에 한번 가본기억이있구요
정상가는길에 강이 휘감아도는 경치가 일품이었네요
264문학관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또는 이원삼(李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이활(李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 발표 때 ‘육사’와 ‘二六四(이육사)’ 및 활(活)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이황(李滉)의 13대 손인 이가호(李家鎬)이며, 어머니는 허길(許吉)로, 5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퇴계이황의 후손으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저항시인으로도 익히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시인 "절정" "청포도" "광야" 등 다수가있다
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황(일명:안동할배)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동설(理動說)·이기호발설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중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퇴계 이황은 많은 벼슬을 지냈고 고사하기도 했으며 본시 건강이 좋지않음도 있었지만
중앙관리들의 당파와 부패를 목도하고 중앙에서의 벼슬보다는 외관직으로 나가는걸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며느리 봉화 금씨 묘소
죽어서라도 아버님을 섬기겠다는 며느리의 고운 심성이 느껴집니다
퇴계이황의 며느리 사랑은 각별하고 남달랐다고 전해집니다
두째며느리 류씨 얘기입니다
두째 며느리 류씨는 결혼후 얼마안되어 남편이 죽고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결혼한 여성은 지아비만을 섬겨야하는 법이있었죠
퇴계선생도 두째며느리를 볼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늘두째며느리가 걱정되었던 퇴계선생은 하루는 잠을자다말고
집안을 둘러보는데 두째며느리의 방에서 소곤소곤 얘기하는 소리가들려
들어봅니다 자세히 엿보니 며느리가 집으로된 인형과 술상을 차려놓고 대화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남편이 그리웠어면 그렇게 할까싶어 퇴계선생은 며느리를 재가시키기로 결심합니다
하루는 두째며느리에게 외출을 허락하고 놀다오도록 지시합니다
담날 늦게돌아온걸 핑계삼아서 집에서 내어쫓습니다
며느리는 애걸했지만 퇴계선생은 친정아버지께 보낼 서신한장과함꼐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며느리는 가는중에 퇴계선생의 서신을 읽어보고는 하염없이 울고맙니다
이후 퇴계선생은 사돈과의 일체연락을 끊고 며느리의 새삶을위해 ~
그당시의 상황으로는 상상할수없는 일이아닐까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라 할수있죠
그리고 얼마후 벼슬을 제수받고 한양으로 가던중 어떤집에 하루 묵어가게 되었는데
반찬이 너무 자기입에 딱맞아 이집에 어르신이 나하고 입맞이 같은가보다하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조식찬도 너무 입맞에 맛게 잘먹고 집을 나서려는데 버섯두켤레를 주었습니다
퇴계선생은 대문을 나서게되고 누군가가 벌어진 문사이로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제서야 퇴계선생도 두째며느리 류씨임을 ~
엄격했던 유교문화의 틀을 과감히 배척하고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한여인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았던 멋진선비라 아니할수없네요
이이율곡과함께 조선성리학의 거두로 조선중기의 학자로 선비로 그렇게 기억합니다
퇴계종택
퇴계의 학문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다. 이황이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이황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이황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夙興夜寐箴註)」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였으며,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게 답해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구(李球)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하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했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해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해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頤)의 저작이며, 제2도의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복심(程復心)의 작품이다. 제3도의 제사는 주희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의 본문은 주희의 『대학경(大學經)』 1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의 규약은 주희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의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복심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희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복심의 저작이며, 제9도에서 잠은 주희의 말이고, 도는 왕백(王柏)의 작품이며, 제10도의 잠은 진백(陳柏)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처는 이황의 독자적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부륜(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 이황은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퇴계이황과 관기 두향이의 러브스토리
퇴계이황은 48세의 나이에 단양군수로 부임하게된다
그때 관기로있던 두향이가 퇴계를 사랑하게되고
그당시 퇴계이황은 아내와 아들을 연달아 잃어 마음의 상처가 컷을터 곧디곧은 이황도
두향이의 외모와 글솜씨,거문고 솜씨에 마음을 주게되고
이들의 사랑도 무르읽어갈무렵 풍기군수로 가게된다
이날밤 술한잔의 시한수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
두향이의 답가
"이별이 하도설워 잔들고 슬피울며
어느덧 술다하고 님마져가는구나
꽃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하노라"
이이별로 이황이 죽은 1570년까지는 만나지는 못했다고 하구요
선물은 몇번 주고받은듯합니다
두향이는 이일로 남한강 강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으며
두향이가 준 매화꽃은 지금도 도산서원 앞뜰에 피고진답니다
이황이 죽고 두향이는 4일밤낯을 걸어와 님을 뵙고 집에 돌아가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퇴계종가에서는 두향이의 묘소에 벌초를하고 넋을 기린다고 합니다
450년이 흐른 로맨스지만 참아름답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얘기입니다
도산서원은 조위에 문여믄 오른쪽 외쪽 아들이 공부하는방있고
대문양 옆으로 책넣어놓는 책방이있구요
대문 밑으로 좌측으로 기숙사가있고 대충 뭐 그런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뒷편에 큰건물은 보물이라캐서 함볼라캤디만 수리중인지 내부공사중이라 볼수가없군요
"역락서제"
쉽게얘기해서 책방입니다
추산대장께서 "금소나무"라카네요 일명 "금송"
원래 요밑에 안동호 수몰되는데 어디있었는가 봅니다
시사단
조선시대 정조대왕은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념하기 위해 이조판서 이만수에게 도산별과를 새로 만들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게 했는데, 도산서원의 소나무 숲에서 과거시험이 치뤄졌고 당시 7천여명의 인재들이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모였다고 합니다. 그 중 3,632명이 답안지를 제출하였고 강세백, 김희락 두사람이 급제하여 왕앞에서 보는 최종 면접시험인 전시에 나아갈 자격을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양을 벗어난 장소에서 처음 치러진 이날의 과거시험을 기리고자 1796년(정조 20년) 영의정 채제공의 글로 비문을 새기고 시사단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매년 이 과거시험을 기념해 한시 백일장이 열린다고 합니다.
에이구 쫄병 잘못둔 죄로 어만 사람 잡았네요
이틀동안 비맞고 지랄같은걸 걷니라고 안동선비님 욕봤심니데이~
한번정도 짜증낼만한데 묵묵히 동행해줘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우째 요번에는 국시 한젖가락 어더 묵을수있는지요
노력해보이소 ~
별말없이 걸어도 이심전심 첫눈오는날 안동역에서 만남 잘성사 시켜보시구요
다시한번 고맙고 감사합니데이
앞으로는 전국적으로 민폐끼치는분은 배제하고 우리끼리 만납시다 ㅎ
첫댓글 낙동강길 역사가 함께 하는길이었죠
앞으로 이어질 낙동강길은 강폭이 넓어지는것 많큼 많은사람들이 모여 사는곳이죠
그렇다보니 물은 더러워지구요,이제부터 진짜 묵언수행길이니 눈으로 많은것 보고 지나시기 바랍니다.
선배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는군요.
먼길 잘 이어가시길요
왜 5대강은 시작해서 이 고생인고,,, 여러명이 함게 떠들며 가는것 보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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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ㅅ 老 松 할배가
홀로 조용히 많은 생각을 하면서 걷는것두 몸에 좋습니다
홀로 많이 걷다보면 나 보다 남을 먼저 생각 하고 마음을 비게 마련입니다,
괜히 묵언수행이 아닙니다, 시작 했으니, 한눈 팔지 마시고,,,
앞만 보고 걸어 가세요,,, 5대강 끝나는 날까지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 노릇 하고 다니세요, 보아도 못 본척,들어도 못들은척,말 하고
싶어도 꾹 참고 다니세요,,, 5대강 후에는 멋진 이글스님에 모습을 그려 봅니다
,뒤에서 늘 응원합니다,,,, 화성이라는 아름다운
낙동강 끝나기전에 한번 따라 나서 봐야 할낀데
대구 근처로 오실때 연락 주이소
작년에 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그땐 황량한 벌판이던데 지금은 메밀밭이었네.. 끝자락에서 라멘 끼리 무것는자리에서 산길로 올랏던 기억두 살짝 나넹..ㅎㅎ
안동호는 물이 많이 빠졌네 그땐 시사단만 외로운 섬이었던거 같은뎅...
행님 지금부터는 완죤히 고속도로길만 남았네요... 을숙도 하구둑이 벌써 눈앞에 보이는것 같슴돠... 화이팅입니다^^
묵언수행 5대강을 할려면
역사공부도 엄청하시는것 같습니다..
사진도 멋지고 언제한번 발걸음 맞추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차피 시작하신 고행길 좋은 추억 , 인연
남기시고 득도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고행길 동행이 있어 다행(?)이지 싶습니다.
걷고 난 후에 작성하는 강행기 때문에 머리가 더 하얘지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화이팅입니다.
류씨 이야기 어느티브에 나왔는데ㅋ 요기서도 읽게되네요 대단한 글솜씨로 역사공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