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소첩(小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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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빽빽한 일정에 한가로운 낚시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였다. 공직자 재산등록, 근로소득공제 신고 등을 한꺼번에 처리하여야 했고 게다가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모임의 이사회를 개최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아주 연말연시까지 눌러 있다가 해돋이도 하고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교수로 초빙하겠다는 연락이 오는 바람에 늦어도 17일까지는 귀국하여야 한다니 모처럼의 대첩(大捷)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결국 4박5일 정도로 일정을 마무리해야 할 판이다. 짧은 일정이니 현지 주간 예보상황을 철저히 분석해야 했다. 일부러 계획일정에 맞추려니 딱히 좋은 시즌도 아니려니와 예보 또한 일정의 중심인 16일은 파고(波高) 4미터에 강수확률 50%이다. 평상시 같으면 일정 조정이 현명하지만 이미 동행을 약속한 후배의 일정은 조정이 불가능하고 보니 예정대로 출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한가했던 춘천 원주 간 중앙고속도로는 오늘따라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갑자기 몰린 한파에 잔뜩 웅크린 사람들이 나들이 계획을 취소했는지 왕복차선 모두 생업형 왕래 외에는 레저차량이나 멋들어진 승용차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기우(杞憂)는 제천을 지나 안동 그리고 풍기에 이르자 확 달라진 도로의 모습에 거두어들였다. 경제, 경제하더니 기어코 지역적 차이를 드러내는 모양이었다. 단위가 다르고 방식이 다른 지역적 편차는 역시 소비성향도 다를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일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운전대를 잡은 후배 또한 한줄기 씁쓸한 표정으로 푸념을 뱉는다.
[C발! 강원도하고 확 다르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잖아요. 도로를 만들어줘도 사는 형편이 그저 그러니 차를 몰고 나올 일이 없고 썅! 개발에 편자 아니겠어요. 아후토반이네 완전히.]
직선적이고 솔직한 성격에 끌린 나머지 오랫동안 안보면 궁금해지는 후배는 가당치도 않은 나의 잔소리를 노래로 즐겨 듣는다. 숫제 고개까지 내 쪽으로 돌리고 동의를 구하는가 하면 휴대폰도 걸고 받는데다가 낚시하다 물에 빠뜨려 수리를 한 다음부터 폴더를 열면 발광(發光)이 되지 않아 수시로 실내등을 켜고 자판을 확인하는 운전습관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평균 시속은 140을 넘나들고 커브길이나 굽은 터널에서도 속도를 줄이는 법은 거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허! 또 찍혔네. 뭐 이건 숫제 강도네. 10킬로마다 하나 씩 있나보네. 왜 이렇게 많이 깔았어요?]
할 말을 잃었다. 내비게이션에서 음성으로 알려줬건만 떠들거나 휴대폰 통화를 하면서 지나치더니 과속으로 무인속도단속 카메라 설치지점을 통과해버렸다.
[서대구부터는 내가 운전할게. 너무 성금을 많이 내서 감사장 날아올까 두렵다.]
[올라 올 때나 하시지요. 뭐. 그리고 제처한테는 비밀입니다 이거. 그렇게 해주시는겁니다?]
다부동을 지날 무렵 쉬었다 가고 싶었다. 어차피 부산국제 여객터미널 부근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오전 8시30분 출국수속을 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갈 이유가 없었다.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로 한잔 해야지요.]
[그런 야무진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과속을 할 수밖에.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니까 천천히 가도 되니 휴게소로 들어가시게]
(OO호텔 40,000원, OO호텔 35,000원)
부산역광장에서 쉽게 눈에 띄는 플래카드에 적힌 숙박요금이다. 따로 방을 쓰거나 굳이 비싼 방을 쓸 이유도 없어 싼 호텔로 들어섰다. 방 열쇠를 받아 들고 요금을 묻자 45,000원이란다. 눈을 치켜뜨자 프론트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이죽거린다.
[35,000원 부터인데 그것은 방이 아주 작아요. 다들 “부터”를 쓰기 때문에. . .]
[이거. 만원을 도둑맞은 기분인데요. 이런 식이라면 항도 부산의 이미지는 버릴텐데 안 그렇습니까?]
[다시 안 볼 뜨내기손님들만 상대하나보지.]
방에 짐을 내려놓고 노상에 주차를 한 다음 택시를 타고 자갈치 시장을 찾았다. 시장은 흔히 우리가 사는 풍물시장 내지는 5일장 풍경을 그때로 빼어 닮았다. 싼 물건을 다량으로 공급하는 시장 속성에 맞게 부끄러움도 쭈뼛거림도 어울리지 않는 호객(呼客)이나 흥얼거림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며 짐짓 아닌 채 저마다 감추고 사는 생존본능을 움찔거리게 하는 그런 곳이다. 언제인가 “생명의 전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종종 스스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때 이런 각박한 삶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새로운 용기를 가다듬는 것이 좋다고 권유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스스로 내면의 용기를 자극하여 자살을 막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은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깨우침으로서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로 회귀(回歸)하게 하는 기법(技法)이라는 것이다.
[어디서 오셨습니꺼? 서울입니꺼. 강원도? 뭘라꼬 이리 멀리까지 왔답니꺼?]
싫지 않은 웃음을 흘리며 넉넉하게 양념을 얹어 볶아주는 꼼장어에 소주 한잔을 받치니 꼭 퇴근길에 동료와 마주 앉은 착각이 든다. 아무리 둘러 봐도 평일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건만 아주머니는 우리 쪽으로 연신 웃음을 지어보이면서도 시선은 항상 밖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꽂혀있다시피 하였다.
습관처럼 새벽에 일어나 반신욕을 마친 후에 후배를 깨워 해장국을 들었다. 이제 국제 여객터미널로 부산하게 움직여야 할 시각이 되었다. 언제나 이듯 출국수속은 지루하다. 가진 것을 몽땅 검색대에 올리고 심지어는 금속탐지기가 반응을 보일 휴대폰 배터리며 카메라 등 쇠붙이는 모두 올려놓으란다. 복잡하게 몸수색까지 마친 다음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백화점 점원처럼 드림 플라워 호의 승무원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한다. 세관 공무원과는 표정부터 다르다. 행색도 남루하고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하는 낚시꾼을 보고도 웃음 띤 얼굴로 말이다. 부산-대마도를 씨 플라워와 함께 취항한 이 배는 303톤급으로 정원은 300명이고 대부분 등
산객이거나 낚시꾼이 이용한다.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선체와 워터제트의 추진력으로 수십 톤의 물을 분사(噴射)하여 선체를 약 1미터 이상 물위에 부상(浮上)시켜 시속 35킬로 노트로 운항하기 때문에 높은 파도 속에서도 요동이 적고 복원력이 뛰어나 거의 멀미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자랑한다. 이즈하라(嚴原)항까지 약 2시간 30분 그리고 히타카츠(比田勝) 항까지는 불과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부산에서 한 시간 여를 지나자 휴대전화를 하던 후배가 분통을 터트린다. 그도 그럴 것이 전화로 거래처에 폰뱅킹을 시도하던 터였다. 휴대폰의 캘린더는 12월 6일 12시 정각에 멈춰있다. 중국에서도 자동로밍이 되는 휴대전화가 일본하고도 대마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 모양이다. 일본 본토는 디지털 방식으로 자동로밍이 가능하지만 대마도는 아날로그여서 서비스를 받으려면 출국 전 미리 통신회사의 대여 폰을 이용하여야 하는데 후배는 몰랐던 모양이다.
[세계 1위 경제 대국하고도 디지털 강국이 뭐 이래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후배의 빈정거림이 나를 향한 시위가 아님을 잘 알기에 쓴 웃음을 지어보였을 뿐이다. 나 역시 대여 폰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기에 빌려 줄 수도 없었다.
[일본에서는 0044-2208-3472로 전화를 하면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가 되니 급한 연락은 가능하니 걱정 말게나]
반쯤 눈을 감고 가수(假睡)라도 할 요량이었다. 순간 배가 몹시 좌우로 흔들리는가 싶더니 아예 파도를 타는 것처럼 너풀거린다. 예보는 외해의 파고가 3미터 가량이라고 했는데 여태 느껴보지 못한 너울 파도를 타더니 기어이 멈춰 서는 기색이다. 게다가 맞바람에 배기가스가 선내로 밀려들어 공기가 탁해지고 디젤 냄새가 역하게 풍겨왔다. 승무원들이 앞에서 뒤로 그리고 좌우로 뛰는 폼세가 마뜩찮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내방송이 이어진다.
[승객 여러분! 지금 해수 유입구에 해상 부유물(浮遊物)이 유입되어 우측 추진축이 동작하지 않아 잠시 역회전으로 제거를 시도 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동요하지 마시고 그대로 선내에서 안전하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뭐가 끼었다는 말이요? 뭐요? 밧줄? 그물이나 판자 쪽? 고래나 상어라고? 이게 뭔 일이여 그래]
간단히 제거해보겠다던 선장은 1시간여 지난 뒤 다시 선내 방송을 한다.
[일단 가까운 히타카츠 항으로 긴급 입항하여 일본 해상보안청과 협조하여 잠수부를 동원하여 수리하는데 다시 1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뭐야? 또 한 시간? 그럼 미리 연락을 취하고 바로 들어갔으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러나 막상 항에 진입한 다음 한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런 안내가 없었다. 또 다시 한 시간 남짓 지난 뒤 안내가 이어진다.
[일본 잠수부가 도착이 안 되어 정비를 못 하였습니다. 부득이 배는 운항을 하지 못하므로 승객 여러분은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이즈하라 세관원이 출장 검사를 나오도록 조치하였으니 승객 여러분께는 목적지인 이즈하라까지 저희 회사에서 준비한 버스 편으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뭐야? 4시간 연착을 하고도 버스로 갈아타라고? 이 자식들이 지금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거야?]
[우린 당일치기 등산객인데 돌아 갈 시간에 내려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오후 낚시 일정을 버렸으니 보상을 하시오.]
승객들의 아우성에 다시 방송이 이어졌고 이를 들은 승객들은 다시 분노를 터트렸다.
[뭐가 어째? 싫으면 부산으로 돌아가라고? 어떻게 뭔 배로? 저놈이 시방 제정신이야? 보상을 하려고 해도 부산 본사에서 해야 되니 내려서 버스를 타려면 타고 말려면 말라. 지금 이 말이야?]
급기야 역사 유적 탐방객 중 지긋한 나이의 사내들이 선장을 에워싸고 닦달을 하고 있었다. 젊은 선장은 인내심이 부족했던지 짜증을 내고 말 꼬리를 잡고 늘어져 덤비는 사람들로부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즈하라까지는 6천9백 엔인데 5천9백 엔인 히타카츠에 내렸으니 천 앤,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만 5천원을 돌려받고 게다가 4시간을 허비하였으니 손해를 보상해야 되지 않아요?]
차분하게 따지는 동창회로 보이는 아줌마들의 계산에 선장과 승무원은 할 말을 잃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악착같으리라고 예상했던 낚시꾼들은 정작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후 낚시 일정을 잡쳤음에도 아무도 나서서 항의를 하지 않는 것이 자못 이상했다. 그렇다고 낚시꾼들이 모두 점잔을 빼는 것도 아니다. 갯바위나 방파제에서 아무 곳에 용변을 보는가 하면 밑밥 찌꺼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이 비일비재한데 이런 불의를 보고도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쉽게 이해될 리 없건만 또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일 저일 아무데나 끼어들어 정신 사나워 봤자 소득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출장 검사를 한다는 세관원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독점 항로이고 또 나갈 때 타야하는 배이고 낚시 안내업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저런 관계로 얽히고설켜 있으니 나설 리가 없지요.]
얼른보아 내 나이 또래 쯤 되어 보이는 낚시꾼이 의아한 내 표정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넌지시 이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2월 12일 첫날 오후 낚시 일정은 이미 수포가 되고 만 셈이다. 이른바 소속 낚시 펜션이나 가이드의 안내로 다섯 시가 넘어서야 이즈하라의 펜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 창고동으로 안내되어 낚시 가방을 내려놓고 다음 안내를 기다리다 또 한 차례 속을 끓여야 했다.
[배가 고장이 나서 일찍 못 오시는 바람에 많이 늦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배로 포인트에 가면 1시간 내지 1시간 반 정도는 낚시가 가능합니다. 마침 물때가 좋으니 얼른 준비하셔서 나오십시오. 내만 갯바위로 들어갑니다.]
마치 신병 훈련소에서 조교가 이르는 대로 후다닥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그가 나누어주는 밑밥과 미끼를 받아들고 선착장에 모였다. 불과 10분도 안 되는 거리를 운항한 배가 닿은 갯바위는 일견 소양호를 연상케 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내리라는 대로 내려 낚시 준비를 하였다. 아뿔사 헤드라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사위는 아직 땅거미가 내리기 전이지만 달이 유난히 밝은 해걸음에 돋보기도 없이 손어림으로 채비를 묶어야 했다.
[제로나, 제로제로에, 목줄은 1.5미터 직결해서 한 사람은 원투를 한 사람은 발밑을 공략하시되 밑줄을 여유 있게 잡아 입질이 오면 강제집행을 해야 합니다. 철수는 6시 10분입니다.]
시계를 보니 5시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불과 30분 남짓한 낚시를 하라니 어이가 없었다. 밑밥을 던져 넣어보니 전혀 물이 가지 않고 오히려 바람에 서서히 발 앞으로 밀려드는 조류이다. 파도도 없고 물도 맑은데다 아직 어둠이 내리지도 않은 상황에 과연 긴꼬리 벵에돔이 미치지 않고서야 나올 턱이 없건만 가이드는 우리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배를 몰고 나간 것이다.
[입질입니다.]
찌가 빠르게 가라앉아 순간적으로 챔질을 했더니 거의 감촉이 없다. 달빛에 얼른 보기에 복어 새끼 같았는데 손에 쥐어보니 ‘아지’라고 불리는 손가락만한 전갱이 새끼였다. 낚싯대를 접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밑밥을 팔아 소비시키려고 얼렁뚱땅 될 턱이 없는 포인트에 내려놓았다가 걷어 들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어쨌든 출조는 출조이니 여행사에 대한 볼멘소리도 정작 어렵게 되었다. 예정에 맞추어 준비해 두었던 밑밥의 소비가 불가피한 사정을 미리 말하고 희망자만 도시락을 지참시켜 야간 포인트에 내려주면 될 텐데 이미 환영만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유로 출조를 감행시킨 저들은 전혀 손해를 볼 수 없다는 계산이 분명해보였다. 일순 굳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펜션을 고집했던 내가 이들에게 참신하고 순박한 동포애를 느끼기보다 출발부터 꼬이기 시작한 대마도낚시 여행은 이미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한 치밀한 전쟁이고 그도 대첩(大捷)은 이미 아니라고 느끼는 순간 눈가에 피로가 몰리고 있었다. (2008. 12. 12)
첫댓글 그 상황이 그림처럼 보이누만.... ㅎㅎㅎㅎ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이런 후진국에서 자주(아니 항상) 겪는 일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