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재미를 살리는 구성과 깊이에 대하여
노 창 수
모든 시는 ‘극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시는 ‘작은 희곡(little drama)’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써져야 한다.
-브룩스와 워렌의 『시의 이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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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몸체로 드러내는 ‘황금물결’로 표징(表徵)된다. 바야흐로 ‘체로금풍(體露金風)’의 계절임에서이다. 이 성어(成語)는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선문답(禪問答)으로부터 왔다.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질 때는 어찌 됩니까?” 이에 운문선사가 대답했다. “온몸을 드러내놓고 바람을 맞게 되지요(體露金風).”
이처럼 가을의 상징인 금풍(金風)은 곧 ‘가을바람’이겠다. 잎이 떨어지면 결국 나무나 곡식은 바람에 의해 그 몸통[體]이 드러난다[露]는 의미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드러내듯, 가을엔 인문학의 몸체인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에 참 좋은 철이다. 그래서 ‘문학의 철’, ‘철학의 계절’이라 칭해오고 있다. 이 계절엔 특히 시인들에게 시업(詩業)이 과하게 주어져 육고, 즉 고독, 고단, 고구, 고등, 고민, 고통(孤獨, 孤單, 考究, 高等, 苦悶, 苦痛)의 작업임을 새삼 인식하게도 된다. 그만큼 시적 성숙도가 깊어지고 이를 밭 삼아 결실하는 계절이기도 하겠다.
괴테(Wolfgang V. Goethe,1749~1832)는 가을엔 ‘고독이란 고급의 심화된 시’를 가져오는 철이라는 아포리즘으로, 문학적 몸체의 시기를 이미 개괄한 바도 있다. 시인의 ‘좋은 시’는 ‘고’자로 시작하는 단어의 첫 번째의 자리처럼 ‘고독’의 열매일 듯도 싶다. 하여, 시인 작가들은 어떤 일을 체험하는 것을 비롯해 오래 그 것을 경험하고 이를 징험(徵驗)하는 고난과 고독, 그래서 저마다 깊고 실(實)한 작품을 쓰며 자신의 문력을 기대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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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는 극적 구조(dramatical construction)’를 가져야 한다는 건 브룩스와 워렌(Brooks,1906~1994, & Warren(1905~1989)의 교과서적 진언이다. 이는 그들이 공저한 『시의 이해』(1938)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그게 오래전부터 문학교육에서나 독서교육에서 한 혁신적 계기점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래, 한 편의 시는 ‘작은 희곡(little drama)’인 셈이며, 그때 작품은 독자와 소통하는 하나의 ‘유기체’(有機體, organic construction)로 정의된다는 것이 바로 이 책으로부터가 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선 이런 논법으로 몇 편 의 시와 시의 작편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시의 특징인 엠비귀티(ambiguity)는 최소 두 가지를 구름판으로 구축한다. 애매성(曖昧性) 단계를 거쳐 그게 결국 다의성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무릇 개성적인 시적 입체감이란 바로 엠비귀티를 적소에 적용함에 있다. 그게 문학의 존재 이유도 될 것이다. 묘미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하는 미덕과도 같다. 하여, 사물의 공시성, 그 생태를 인정해 주는 배려정신에 시의 도근점(圖近點)이 있다. 그것은 엠비귀티와 모호성으로 독자와 경계가 치우치지 않은 생태로 다가간다.
사회학자 찰스 호턴 쿨리(Charles Horton Cooley, 1864~1929)는, ‘인간은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파편들을 모아 자신의 입장을 내재화(內在化)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작품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이 된다’ 했다. 그는 이 같은 현상에 특히 대상과 자신을 비교하는, 이른바 ‘거울상 자아’[鏡像自我],the looking-glass self)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다음 작품을 먼저 읽어 본다.
사월이었어요
눈이 내렸구요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련했어요
사월 눈이라뇨
일상의 시간 속에서
아픔처럼 눈이 내렸어요
누군가는 사소함 속에서
아파했구요
참으로 아련했지요
그만한 눈을 사월에 보는 거 쉽지 않죠
봄이 오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려니 했어요
별일 없이
사는 게 다 그러려니 했거든요
그런데요
봄바람 타고 겨울이
다시 그리움처럼 왔어요
딱 하루였어요
이른 새벽
소복을 입은 목련이
지고 있었어요
-정금숙 「꽃이 진다」 전문
요즘은 시가 조금 억지스러워지고 생소한 게 유행인 듯하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나 유연하게 나아가려는 게 시의 특징이다. 문예지마다 이색적이고 다채로운 시들로 넘쳐나는 시판에, 이 시는 담화에 대한 설정과 전개를 노래처럼 흘러가게 해 차별화한다. 그만큼 호흡이 부드럽게 들고난다. “사월이었어요/눈이 내렸구요/흔한 일은 아니지만/아련했어요”라는 시작부터 여성적 화자(female persona)가 담화형으로 이끌면서도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시의 문장 또한 단박적 그러니까 거침이 없다. 밤에 내린 눈을 지금 보러가듯 마룻장을 딛고 가는 발걸음이 그만큼 짧게 다가온다. 나아가 “누군가는 사소함 속에서/아파했구요/참으로 아련했지요”라든가 “그만한 눈을 사월에 보는 거 쉽지 않죠”라는 부분에서처럼, 사월에 내리는 눈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소”하게 넘기려는 듯하면서도 뭔가 말하려는 듯한 복선(伏線)도 있다. 숨겨둔 걸 한 속삭임으로 말하는 기실은 “아파했”다는 그 “아련”함이다. 사월에 보는 것 가운데 쉽지 않은 일, 그건 “봄바람 타고 겨울이/다시 그리움처럼” 온 사건이다. 이때 피상적 관념으로 쓰일 법한 “그리움처럼”이란 말로 겨울의 마지막을 되돌아보게 하는 심리적 귀환을 넌짓 보여 준다. “그리움처럼 왔”다는 미련, 그건 곧 화자의 미련일 것이다. 그게 의미의 엠비귀티를 투사한 예일 법도 하다.
겨울이란 사실 “딱 하루”만 온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찰나의 그 겨울은 “새벽”에 “소복”한 “목련”을 다 떨어지게 하는 불상사를 벌인다. 봄의 복판인 사월에 겨울이 오고, 더불어 꽃의 생명을 꺾는 사건을 다룬 게 그 동기이다. “꽃이 진다”는 제목은 흔히 알 듯 계절의 순환이 아니다. 사라진 목련은, 봄 속의 겨울이 저지른 한 뉴스거리이기 때문이다. 사실에 대해 인식은 하면서도 화자의 태도가 대수롭지 않다는 데서 시의 묘미를 더한다. 나아가 깊이를 재는 선의 완곡함, 그 흘러가는 듯한 물의 문법식을 따라 화자의 상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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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유희(linguistic fun)는 시에서 뿐만 아니라 카피라이터, 특수광고 문안, 지역홍보, 방송프로그램, 지자체 특산물 소개, 그리고 심지어 체계를 앞세운다는 논문에까지 파고든다. 그만큼 시대를 읽는 코드가 되어 언어 대중화의 한 현상에 긴한 자리를 잡았다. 과거엔, 언어 장난, 축약어, 은어, 속어, 생소한 외래어, 외국어와 조합어 등을 쓰는 걸 거의 백안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현상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시대이니 안 쓰고는 배겨나지 못할 분위기까지 되었다. 가장 가려 써야 할 국가의 홍보물에는 이게 더 많다. 가령 ‘청렴한韓 세상’, ‘다독다독多讀多讀 대회’, 장애아를 위한 ‘핸듀토피아(Handutopia)’, ‘내손도서관’, ‘북스타트(book-start) 운동’, ‘두루두루 배달서비스’, ‘안심한우’, ‘그린시티공모전’ ‘온실가스감축 에버그린21’, ‘주거복지 로드맵’, ‘도시재생 뉴딜’, 또 방송프로그램을 알리는 축약어로 ‘전매청-전라도매력청’, ‘먹방-먹는 방송’, 축제를 나타낸 축약어로 ‘백일화-백년의 덕성 하나되는 불꽃’ 등등 헤아리기 조차 어렵다. 필자는 2018년 작년 한 해 시 작품에 나오는 ‘언어적 펀(fun, 또는 pun)’의 통계를 내본 적이 있는데, 75% 이상이 바로 ‘언어유희’(linguistic fun)로 구성된 사례임을 보고한 일도 있다.
하면, 다음 시가 그런 ‘언어유희’ 기법으로 써진 작품이다.
창세후(創世後), 에덴동산에서도
있었던 일
가끔은 마시게 되면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차(茶)
마시고 나면
그 뒷 끝 맛은, 언제나
후회(後悔)의
향으로
피어난다.
그럼에도 마시게 되는 차
그 이름
앗, 차
-이영성 「앗, 차」 전문
일의 실수로 지르는 감탄사 ‘아차’는 어떤 실수에 뒤이어 깨닫는 탄식이다. ‘앗차!’와 같이 일상에서 자주 사용된다. “창세후(創世後), 에덴동산에서도 있었던 일”이니 순간이 빚는 그 뉘우침으로선 오래된 고전적 발성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차”란 “가끔은 마시게 되”고 그때마다 “나를 되돌아보”며 말 그대로 음미하듯 하는 음료이다. 그래 자성(自省, 自醒)하듯 “끝 맛”은 “후회(後悔)의 향으로”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잊고 “마시게 되는 차”란 무엇일까. 바로 “그 이름”이 “앗, 차”라는 것이니, 넌센스 퀴즈일듯한 에피소드를 시로 옮겨왔다고 할 수 있다. 그걸 시적으로 동기화시켜 작품화한 사례이다. 옛날 같으면 이런 건 시가 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현대에 와서는 충분히 시가 되는 일이다. 아무 “차”나 함부로 마실 일은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차는 분명히 있다. 미묘한 청탁 자리에 안내되어 “차”를 접대받는 경우에 ‘아차’ 깨달은 예도 있다. 풍자나 위트로 드러내 보이는 그 애매성도 보이는 작품이다.
하늘이 주신 낯빛에
악마의 그림자
드리운 것은
잔인한 계절 뒤 숨은
게으른 봄볕 탓이 아닐 겝니다.
호복한 미소에
싸리문짝으로 걸친
깊고 굵은 주름도
때 맞추어 지나던
철없는 장대비 탓이 아닐 겝니다.
다만
간밤 눈물기 미처
마르지 않은 안경알에
봄꽃 가루 살랑
내려앉았을 뿐.
-김철수 「그대의 얼굴」 전문
뒷부분부터 읽는 게 좋을 작품이라 본다. “간밤”에 “눈물기”가 “미처 마르지”도 않은 “안경알”엔 “봄꽃 가루”가 “내려앉았을 뿐”이란 것으로부터 “그대의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얼굴은 진정 화자에 대한 화 때문에 “깊고 굵은 주름”이 든 게 아니다. 오히려 그걸 자족해 버리는 데 있다. 시에서처럼 그대 “하늘이 주신 낯빛”에 “악마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건 “잔인한 계절” 뒤에 오는 “게으른 봄볕”의 “탓”은 아니다. 더구나 “싸리문짝”처럼 “걸친” 당신의 “깊고 굵은 주름” 탓, 또는 “때맞추어” 지나가버린 “철없는 장대비”의 “탓”, 아니 그것도 아니다. 계절은 이미 봄이지만 이 봄을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추위가 “그대”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눈물로 젖은 “안경알”에 “봄꽃 가루”가 살짝 덮인 모습에 그러한 기미(機微)를 본다. 탐미주의적인 시로 보이는 이 작품의 매력은 더 있다. 구조가 튼실하다는 것 말고도 담화적 호흡이 부드럽게 소통됨이 더 큰 장점이겠다.
잘만 쪼개졌더라면
화력 좋은 원목 한 토막이
시원찮은 임자를 만나
만신창이의 부스러기가 돼
도끼날만 원망했다
버리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폐기물이 되지 않고
불쏘시개가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삶
-김윤묵 「장작을 패며」 전문
“장작을 패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시는 더러 있다. 가령, 오세영이 쓴 「장작을 패며」는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불 지르리라’라고 선언한다. 우린 행위자가 모르는 목적을 도모하는 열성을 장작불처럼 갖고 있는 수가 있다. 한편 주근옥의 「장작을 패며」는 ‘참선하는 모습으로 서있는 소나무 구상나무/등속의 둥치를 도끼로 잘라 굴려다가 쌓는’ 일에 대해 뼈마디를 쪼개어 쌓는 것과 비교한다. 이수익의 「장작패기」에서는 ‘도끼날이 찍은 생목(生木)은 엇갈린 결로써 스크럼을 짜며/한사코 뿌리치기를 거부하지만…/사내의 노여움은 어쩔 수 없다’는 직선적 욕망에 와 결국 ‘처형의 뜰 모서리를 지우듯’ 하는 도끼날의 행위를 감각적으로 투사한다.
위의 시는, “화력”이 “좋은 원목” 중 “한 토막”으로 태어난 장작이지만, “시원찮은 임자”(화자)를 “만나” 고생만 하는, 그래서 엇쪼개지거나 튕겨지거나 하여 결국 “만신창이의 부스러기”가 된 장작을 대변한다. 아니 장작 부스러기가 된 듯한 화자와 자아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는 시인이 살아온 생을 대리 진술해 보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장작의 실존과 구체성을 인물과 대비하게 만든다. 더불어 화자의 겸양적 언어 또한 인상적이다. 그는 “폐기물이 되지 않고” 다행 “불쏘시개가 된 것만으로도” 능히 “감사”해 한다. 화자의 진력, 그건 자신이 어떻게 쪼개지듯(굵게 살든, 가늘게 살든 무방함) 불쏘시개(쓰임새가 적어도 무방함)로 만족하는 여유로움을 드러내어, 잘난 체하며 잘 패진 장작의 세상에다 느릿한 풍자의 멍석도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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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두 가지 사례를 보인다.
조선시대 작가 유진한(柳振漢,1711~1791)의 문집인 『만화집(晩華集)』에는 1754년에 쓴 「한시 춘향가」가 전한다. 이는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춘향전」이지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거기엔 시가 이렇게 시작한다.
‘광한루 앞 오작교에 나는 견우 너는 직녀/인간 세상 쾌사는 암행어사로 금수를 놓은 옷을 입은 낭군이 되는데/월하노인은 예쁜 기생과 연분을 맺어주었네/용성객사 동대청에/재회의 기쁨 한이 없도다/남원 책방 이도령이/처음 만난 절세 미인 춘향…’(廣寒樓前烏鵲橋 吾是牽牛織女爾 人間快事繡衣浪 月老佳緣紅紛妓 龍城客舍東大廳 是日重逢無限喜 南原冊房李都令 初見春香絶對美…)
이 한시 또한 이도령과 춘향의 만남에 특별한 흥미를 유도하며 이야기의 재미와 깊이를 더해간다. 용성 동대청에 재회의 기쁨, 나아가 남원 책방 도령과 절세미인 춘향이 첫눈에 반한 대목을 점층적인 단계로 가는 그 재미와 깊이가 독자를 매료시킨다.
정현종(鄭玄宗, 1939~)은 미생물과 나의 존재를 「한 숟가락 흙 속에」란 시에 담아 노래한 적이 있다. ‘한 숟가락 흙 속에/미생물이 1억5천만 마리래!//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삼천 대천 세계가 거기인 것을!//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수십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결국 우리는 아무리 미약한 생명체라도 그 밀어 올리는 생태의 힘에 의해 자기 존재를 영위해 간다는 것을 아는 게 바로 시를 쓸 수 있는 동인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많이 관심을 갖는 게 ‘생태문학’인데, 다른 시인들과는 색다른 소재와 원리를 개발한다면 좋은 작품을 얼마든지 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요즘 시 작단을 살펴보면, 70·80년대식 ‘자연보호’ 수준을 넘지 못한 시를 생태시라 일컫고 있어 안타깝다.
최근 각 문예지에 발표된 시와 시조들을 읽다가 작품을 안이하게 쓰는 시인들이 많음을 느낀다. 누구나 아는 쉬운 시를 쓰는 것과 상식적인 내용으로 시를 유행가 가사처럼, 또는 인터넷 카페용의 시와 구분해야 하겠지만, 요는 평범한 일과 사유를 매재로 해서 단순 아가형(雅歌型)으로 쓰는 것으로부터는 좀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위의 두 사례는 ‘재미의 깊이’와 ‘생태적 구성’으로 이름붙일 수 있겠다. 더 압축하면 ‘재미’와 ‘구성’이다. 시에 재미가 없으면 독자로부터 외면당해 결국 실패한다. 하지만 재미만 있다면 시가 아닌 산문이 될 공산이 크다. 그래서 장면과 일의 요소를 독특하게 배치하는 건축물 같은 그 구성력이 요구된다.
시를 어떻게 쓰느냐에 대해선 다들 조용하게 있지를 못한다.
그만큼 시에 관한 목소리들이 많다. 해서, 시를 만만하게 보는 일, 또 그렇게 굴리는 말들을 다 들을 필요는 없겠다. 재미와 구조에 제 생각의 깊이를 재봄직할 작품이 오뉴월 폭포수처럼 쏟아지기를 바란다. 어디 밥 먹는 거, 잠자는 거, 사는 거, 죽는 거, 마저 다 잊고 한번 정신없이 읽고지고할 시는 없을까^^
(광주문학 '계간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