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희망원의 폭력
3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저녁에서 아침까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안달하지 말라. 너희는 빗질도 길쌈도 않는 백합보다도 훨씬 낫지 않느냐.
옷감이 없으면 무엇으로 입겠느냐? 누가 너의 키를 크게 하느냐? 바로 그가 너에게 옷감을 줄 것이다."
지금도 사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중입니다. 인간은 잠시라도 선택의 기로에 서있지 않을 수가 없으며 경제적인 곤궁에서 무엇을 우선 순위에 놓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소비하는데 있어서 우선순위가 있다면, 보다 중요하고 급한 것은 먼저, 덜 급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다음 나중으로 미뤄집니다. 그런데 가장 친하거나 가까운 가족일수록 더 미뤄질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먹고 마시는 문제는 애굽을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을 헤 멜 때 일어납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다(민 20:1-13)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순위는 세계 13위 수준입니다. 덕분에 이웃이 물이 없어서 곤란을 겪는 문제는 없습니다. 게다가 사회보장 제도에 의해 기초수급자는 상수도를 무료로 공급받는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물을 공급해준다고 믿지 않습니다. 모세는 기도했고 그리고 물을 찾았습니다. 과거 우리가 가난할 때 기도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점진적으로 국가 경제가 발전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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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보내주셨고, 모든 민주적 제도는 나중으로 밀려지고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했고 얻었고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독재는 길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당장에 목마름에 미쳐 하나님을 의심하고 관계를 해쳤습니다. 우리의 신앙 또한 어리석고 불안합니다. 결혼한지 6개월이 될 때 집사람은 결혼 전 가지고 있던 빚문제가 터져 당장 저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황당했지만 집안의 재력을 믿고 있던 터라 어머니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어머니는 결혼한지 6개월도 안 되어 돈을 요구하는 것은 처음 봤다며 황당 해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주장과 아내의 요구에서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여자의 입김은 상당했습니다. 결국 저의 행패에 자형은 자신이 돈을 융통하여 빌려주었고 저는 그것을 집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저의 관계는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집사람의 채무문제는 그 후로도 3번이 나 더 있었고 가정을 심각하게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 번 거듭되자 점점 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집사람의 잘못을 설파하며 이혼하라고 권유했습니다.물론 사주선생님은 본인이 채무관계로 이혼한 경력이 있는 터라 저에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자신은 이혼했지만 아들과 소원하고 전 남편은 절대 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주를 배우느라 누구보다도 채무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물론 제가 당사자이기도 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저녁에서 아침까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안달하지 말라.
이 구절은 내가 간구하면 이뤄진다는 말 대신에 더 강력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인간은 가진 자와 가난한자에게 두가지 다른 시험이 주어집니다. 아니라고 반박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살아 보시면 제 말이 맞다는 걸 체험하게 됩니다. 먼저 가진 자는 그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으려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걸 아름답게 말하면 그들이 가진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시험을 겪게 됩니다. 대다수의 권력자들과 부유한 이들의 그들이 가진 권력과 재산 때문에 고통받게 됩니다.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한 뒤 끊임없은 비판과 비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삼성 이재용 회장은 끊임없는 불법상속에 대한 시비에 고소와 소송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감옥생활은 재벌 자녀로서는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지금도 20대의 도박 중독자의 가정은 해체의 위기에 있습니다. 제 친구는 이혼녀인데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의 무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감당하는 상황에서 자녀의 출산은 그녀의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이혼하였고 결국 딸과 둘이 삽니다. 그녀의 딸도 미술학도로서 자신이 케어 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가 일하는 이유는 자녀의 양육입니다. 방금 언급했던 20대 도박중독자는 아내도 딸도 책임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무능력자로서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간호사들은 그의 이런 태도에 부정적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환자들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결혼하면 배우자가, 자녀가 장성하면 자녀가 책임지는 이들입니다. 가족이 없다면 그들은 국가가 책임지게 됩니다.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 있는 백성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식수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그러나 그럴 능력이 없는 취약한 백성들은 모세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그리고 절대 빈곤의 백성들을 책임지는 지도자 즉 모세는 바로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저녁에서 아침까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안달하지 말라.
이것은 힘들고 가난한이에게는 희망을 주지만 사회 지도자들에게는 의무로 작용합니다. 머나먼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가난한이들이 걷기에 너무나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무장한 지도자의 신념과 하나님의 도움으로 계획하신 일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자신을 책임지는 자는 책임지는 자대로, 의지하는 자는 그들 대로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사회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출애굽기 16장 1:5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애굽 16:13~15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출애굽 16:13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2)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또한 출애굽기 16장의 내용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식량난으로 고통받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 고기도 먹고 빵도 먹었는데 모세를 따라 나서고 난 뒤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고통스럽다고 원망합니다. 나아가서 모세가 말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과거에 어머니에게 이 구절을 말씀드린 게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는 어머니께서 세상물정 모른다고 절 책망하셨습니다. 이제야 이 구절의 의미가 간단하게 아니라 다층적인 구조를 띄고 있음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돈 없고 노력 안 하는 사회 무능력자들을 두둔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가진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부를 가난한자들에게 환원해야 하는 하나님의 시험을, 가난한자들에게는 기다림과 믿음을, 지도자들에게는 제각각 다른 가치 을 믿는 백성들을 하나님에 게로 이끄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빗질도 길쌈도 않하는 백합보다도 훨씬 낫지 않느냐.
요즘 사는 게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절대적인 빈곤은 대한민국에서 복지 사각지대를 제외하고 어느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물론 고급 진 의식주 생활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젊었을 적에는 바디빌딩에 매료되어 매 끼니를 닭 가슴살이나 소고기 같은 육식위주로 먹고, 체중을 불리기 위해 라면을 끓여 면만 먹는 보디빌더들을 모방했습니다. 홍식초와 샐러드 닭가슴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이 커지면서 어릴 적부터 왜소하던 콤플렉스를 해소했습니다.
그렇다고 식스팩이 나오고 멋진 몸매가 되어 보디빌딩 대회 같은 데서 입상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폐쇄병동에 있다 보면 젊은 남성 환자들이 보디빌딩에 매료되어 닭 가슴살을 먹고 하루에 컵 라면을 몇개나 먹는 모습을 봅니다. 운동은 안하고 먹는데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새 10대 청소년들의 몸집이 어른들을 압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식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죄책감에 부모님들은 무분별 하게 배달 음식을 시켜주어 잘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100kg이 넘는 아이들도 나타나게 됩니다. 성인병인 당뇨나 고혈압이 발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이 고민하는 외모문제는 과거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하던 시절과는 다릅니다.
보다 날씬하고 보다 큰 남녀 연예인들의 몸매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저도 무엇인지 궁금하여 따라해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무술을 더 좋아하던 터라 바디빌딩은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건강검진에서 나타났습니다.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혈압이 온 것입니다. 채식도 해보고 체중도 빼 보고 별 짓을 다 해보았는데 건강검진만 가면 150/90까지 혈압이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혈압약을 처방 받아 먹어보고 검사할 때는 2~3알 진정제 까지 먹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현미밥에 두부를 갈아 넣어 죽으로 먹고 있습니다.
과거 신학대학원 시절에 학과장 신부님의 신발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껏 어떤 노숙자에게서 도 본적 없는 낡은 구두를 신고 계신 걸 본 것입니다. 오죽하면 저희들이 돈을 내어 사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해서가 아니라 청빈한 성직자 생활을 위해 실천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당시에는 의아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지 순례를 가는데 수녀님의 가방(?)은 충격이었습니다. 청빈한 가톨릭 성직자들의 모습에서 가난을 안고 살아가는 영적인 당당함을 보았습니다.
집사람은 투자가 망한 후 소비가 극도로 위축되어 저를 많이 의지합니다. 저는 결혼 전 메이커 의류를 좋아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집사람의 코디 덕에 나름 옷 잘 입는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아내의 투자가 망한 후 새 옷을 못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낡은 옷을 창피하게 생각 안 하는 내공이 생긴 것입니다.
옷감이 없으면 무엇으로 입겠느냐? 누가 너의 키를 크게 하느냐?
신앙이 없다면, 내가 신학교육을 받고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고통받지 않았다면 자존감은 떨어지고 우울증이 왔을 것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으로 가정이 지옥 같을 때, 사람들은 제가 커서 아버지 같이 술을 먹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욱더 종교적이 되는 방법으로 그 시기를 견뎠습니다. 신학교를 나온 보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개신교 계열의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성격도 활달하고 MBTI성격 유형에서 ISFP로 예술가 적인 취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폐쇄병동 중에서도 가장 힘든 병동에 배치되었습니다. 보호사의 박봉과 자녀들의 양육비 때문에 그는 오후 근무를 하고 야간 근무을 연이어 하는 ‘더블’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업무 스트레스 강도가 최고조인 병동에서의 악한 환자들만 상대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폭력에 노출되어 어느 순간 환자들과 똑같아졌습니다.
그리고 불면에 시달렸습니다. 보호사나 간호사나 증상이 심한 환자들과 생활한다는 것은 극도로 스트레스 받는 일입니다. 그것은 퇴근 후에도 잔상으로 남습니다. 발버둥 치는 환자들과, 누구나 혐오하는 환자들의 대소변을 치우는 경험과 발악하는 환자를 강제로 억제하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하는 힘든 일입니다. 그는 점점 말이 없어져 갔고, 마침내 환자를 폭행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이 안 오자 향정신성 의약품인 수면제를 받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는 병동에서 수면제를 받지 못하자 제가 근무하는 병동에까지 와서 받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좋은 저희 병동 간호사도 중독의 우려 때문에 주지 않자 더욱더 우울 해져 갔습니다. 결국 이번 인사이동에 업무 강도가 낮은 병동으로 이동되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들의 발작과 직원 간의 긴장이 스트레스를 받게 합니다. 불안한 가정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종교적인 힘으로 극복했듯이 직장내 스트레스도 하나님의 힘으로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가 너에게 옷감을 줄 것이다.
성경에서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을 양식이 부족했을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준 기적적인 음식입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경 출애굽기 16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할 때까지 매일 그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만나의 특징
외형과 맛: 만나는 "꿀 맛이 나는 고운 과자"로 묘사되며, 땅에 내린 이슬 위에 놓인 것처럼 매일 아침 발견되었습니다. 성경은 만나를 하얀색이고 고운 가루 같은 것으로 기술하며, 이를 모아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수집 규칙: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아침 각자 필요한 만큼만 만나를 수집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으므로,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를 수집하도록 했고, 이를 준수하는 것이 신앙의 표시였습니다.
영적 의미: 만나는 단순히 물리적인 양식을 넘어서, 하나님의 보살핌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순종을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만나의 교훈
만나 이야기는 여러 가지 교훈을 전달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공급자임을 보여줍니다. 둘째, 매일 만나를 수집하는 과정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존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셋째, 안식일 전날 이틀 치 만나를 수집하도록 한 지시는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만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양과 위안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공급, 그리고 신앙 생활에서의 순종과 신뢰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구약의 ‘만나’는 하나님이 내리는 음식이었지만, 또한 앞으로 다가올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음식을 이야기합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저도 처음에는 도대체 ‘만나’가 무엇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이 아닙니다.
출애굽기는 구약 성경의 두 번째 책으로, 모세 오경(토라)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광야에서의 방황, 그리고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받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가 정확히 언제 쓰여졌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출애굽기는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며, 이는 기원전 15세기경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다양한 문서적 증거와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출애굽기가 최종적으로 서면으로 기록된 시기를 더 늦은 시기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체로 출애굽기가 현재의 형태로 정리된 것은 기원전 6세기 말부터 기원전 5세기 초, 즉 바빌론 포로기 이후와 이스라엘 백성이 유다 땅으로 돌아온 후의 기간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는 토라(모세 오경)의 최종 편집이 이루어진 시기로도 간주되며, 이 과정에서 여러 구전 전통, 기록 자료, 그리고 다양한 출처의 문서들이 통합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출애굽기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기의 기록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된 복잡한 과정의 결과물로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의 ‘만나’의 상징적인 의미는 바로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도래를 예언합니다. 신앙은 하루 아침에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참된 영적 구원은 생존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로서 우리는 ‘영적인 떡’ 예수님의 삶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옷감이 없으면 무엇으로 입겠느냐? 누가 너의 키를 크게 하느냐? 바로 그가 너에게 옷감을 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하는 능력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에서 한마디의 말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과거 우리는 그들을 장애인이라 매도하며 눈에 보이지 않게 수용하는데 급급했습니다. 대구 희망원은 1958년 개설된 대구광역시의 복지시설입니다. 이 시설은 초창기에는 정인택 원장이 운영하다가, 1980년에 천주교 대구대교구로 이관되어 운영되었습니다.
대구 희망원은 갈 곳 없는 노숙자와 지적장애인을 수용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안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인권 문제와 학대 현장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결국 천주교 대구교구의 사과문과 관련자의 인사이동 그리고 수용된 장애인들의 복지시설 이관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부조리는 정부와 그들을 맡은 민간 사업자의 부패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래 선 안 됩니다.
사제와 관리자가 무엇이라 변명하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이라도 받아야 합니다. 보호사들이 정신과 환자들의 폭언과 폭력에 노출되어 환자들을 구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관리해야 할 간호사도 침묵하고 관리자가 없는 정신과나 장애인 복지 시설의 야간은 인권의 사각지대와 같습니다.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직원들의 폭력에서 환자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옷감이 없으면 무엇으로 입겠느냐? 누가 너의 키를 크게 하느냐? 바로 그가 너에게 옷감을 줄 것이다.
가난과 폭력에 노출된 그들을 구원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폐쇄병동에서 신앙에 열심인 환자들은 많습니다. 이상하게 정신과에는 불경을 읽은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응답은 우리 같은 잠복 그리스도인이 합니다. 환자를 보호해야 하는 직원이 환자를 때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답게 나서서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해자를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도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업무 강도가 낮은 곳으로 이동시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희망원’ 사태는 관리직원들과 성직자인 사제들, 그리고 봉사자들과 원생들 과의 거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양측은 갈라져 갈등하고 싸우고 마침내 언론에 노출되어 사제들과 관리직원들이 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제들과 직원들 그리고 봉사자들과 그 광경을 목격하는 바로 우리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저 또한 폭력에 수시로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행히 제게 폭력을 막을 수 있는 힘과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무술을 해오면서 아마추어 선수로서 올림픽에 나가지도 못하고, 프로선수로서 대회에 나가서 돈도 안 벌었습니다. 무술은 매일 아니면 일주일에 3일에서 4일을 연습해오는 이유를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다고 도장을 열어서 관원들을 교육하는 입장도 되지 못했습니다.
저희 동네에 주짓수 도장이 있는데 관장이 아이들을 봉고차에 태워서 등교와 하교를 시켜주고 집에다가 데려다 주는 모습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의 폭력에 대항하여 억제하고, 직원들의 폭력에서 환자들을 보호하는 모습의 저를 보고는 마침내 하나님의 소명을 깨달었습니다. 저는 환자도 증상도 직원들의 폭력도 막을 힘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너에게 옷감을 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안고 산다는 것은 응답의 의무를 가지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예수님의 말씀을 무기로 응답하는 것, 그것이
‘홀로 있으리라’
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종교적 개인성이란 하나님의 양심의 말씀을 가슴속에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의 의견에 반하여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100세를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삶은 천년을 삽니다. 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통찰을 가지고 사는 잠복 그리스도인이 많다면 우리가 사는 인간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모든 혁명은 힘없고 자격 없는 한 사람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희미한 하나의 불꽃에서 시작됩니다. 헌신과 노력 그리고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소망과 실천입니다. 그 불꽃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옮겨 붙어 마침내 거대한 변화의 불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회복지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가진 한 명의, 오직 한 명의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또 그가 하필 사회복지사라면 그것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그 ‘겨자씨’가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미약한 저는 한권의 책을 통해 한 명의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집중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