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작굴서 羅雀掘鼠[그물 라/ 참새 작/팔 굴/ 쥐 서]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음.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
[출전]『新唐書』[내용]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천명의 병력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그러나 구원병의 도움이나 식량 보충도 없는 상태에서 장순의 군대는 많은 적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 낙락장송 落落長松[떨어질 락/길 장/소나무 송]
☞가지가 축축 늘어진 오래된 큰 소나무.[속담]낙랑장송도 근본은 종자(길도 한걸음으로 시작한다)/낙락장송 큰나무도 깍아야만 동량된다/ [예문1]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낙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성삼문)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닐러 무엇하리오--<유응부>,『청구영언』
■ 낙백 洛魄[떨어질 락/혼백 백]
☞혼이 떨어지다, 뜻을 얻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음
[출전]『사기(史記) 』역생육가열전( 生陸賈列傳)[내용] 역생이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고 쇠락하였으며 이렇다할 직업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글은 읽었으나 일거리를 찾지 못하던 중 마을의 문지기 자리를 하나 얻었다.
그 당시 그의 고향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미친 선생' 이라며 비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을 설득시키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자신의 궁색한 처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패공(沛公) 유방을 만나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싶어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들은 나를 바보 취급하지만, 책략이 뛰어나니 그분에게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게." 패공은 선비를 싫어하여 갓쓴 선비만 보면 갓을 벗겨 오줌을 눌 정도요, 어찌 당신 같은 유생을 소개시켜 주겠소?" 그러나 역이기는 개의치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상관없으니, 만나게만 해주시게." 마침내 역이기는 패공을 만나게 되었다.
때마침 패공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씻고 있었는데, 역이기를 보고 일어나기는 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이기는 불쑥 물었다.
"당신은 진나라를 도와 제후를 공격하려는가,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는가?"
"야! 이놈아, 내가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는 것도 모른단 말이냐?" "그렇다면, 다리를 고치고 앉아 어른인 나를 만나야 되지 않겠는가?"
패공은 느낀 바 있어 태도를 고치고 역이기를 상석에 앉히고 천하 대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역이기는 패공의 세객이 되어 제후들 사이에서 큰 활약을 했다.
[원문]< 生食其>者, <陳留高陽>人也. 好讀書, 家貧落魄, 無以爲衣食業, 爲里監門吏.? 然縣中賢豪不敢役, 縣中皆謂之狂生
■ 낙불사촉 樂不思蜀[즐거울 락/아니 불/생각 사/나라 촉]
☞위(魏)나라의 융숭한 접대에 촉(蜀)나라에 있었던 궂은 일을 다 잊는다, 눈 앞의 쾌락에 젖어 자기 본분을 망각한다
[출전]『삼국지』[내용] 제갈량이 죽은 후 촉나라 유선(劉禪)은 위나라 사마소의 침공을 받자 스스로 손목 을 묶고 성문을 열어 투항한다. 그의 아들 유감은 아버지의 항복 결정에 반기를 든다. "저승에 가서 무슨 낯으로 할아버지를 뵈오려 합니까?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고집에 불만을 품고 할아버지 사당앞에서 자결한다.
유선은 촉나라를 세운 유비의 아들. 그는 알아서 항복했다는 정상이 참작돼 비록 패장이지만 참형은 면한다. 사마소는 유선을 비롯한 항복한 촉의 장수들을 자기 처소로 초청해 주연을 베푼다. 이 자리에서 모든 장수들이 풍성한 대접을 받으면 서도 서글픈 신세에 눈물을 흘리는데 오직 유선만은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뜻밖의 행동에 사마소가 까닭을 물었다.
"그대는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소?" 유선 은 "이곳 생활이 즐겁기 때문에 촉나라 일은 생각나지 않습니다(樂不思蜀)"라고 대답했다. 아비가 세운 나라를 말아먹고도, 자식이 자결로 버틴 원망도 한 잔 술 로 잊은 것이다.
■ 낙양지가 洛陽紙價[강이름,지명,이을 낙/볕 양/종이 지/값 가]
☞낙양의 종이 값.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하는 뜻. 곧 저서가 호평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됨/훌륭한 글을 다투어 베끼느라고 종이의 수요가 늘어서 값이 등귀한 것을 말함이니 문장의 장려함을 칭송하는 데 쓰이는 말.
[출전]『진서(晉書)』 문원전(文苑傳) [내용] 진(晉:265∼316)나라 시대, 제(齊)나라의 도읍 임치(臨淄) 출신의 시인 에 좌사(左思)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추남에다 말까지 더듬었지만 일단 붓을 잡으면 장려한 시를 썼다. 그는 임치에서 집필 1년 만에 "제도부(齊都賦)"를 탈고하고 도읍 낙 양[洛陽:하남성(河南省) 내]으로 이사한 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도읍 성도(成都), 오(吳)나 라의 도읍 건업(建業:南京), 위(魏)나라의 도읍 '업'의 풍물을 읊은 "삼도부(三都賦)"를 10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화(張華) 라는 유명한 시인이 "삼도부"를 읽어 보고 격찬했다. 이것은 반(班)장(張)의 유(流)이다. 후한(後漢) 때 "양도부(兩都賦)"를 지은 반고[班固:"한서(漢書) "저 술", "이경부(二京賦)"를 쓴 장형(張衡)과 같은 대시인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자 "삼도부" 는 당장 낙양의 화제작이 되었고, 고관대작은 물론 귀족환관문인 부호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껴 썼다.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올랐다 "洛陽紙價貴"'라고 한다.[원문]司空張華見而歎曰 班張之流也 使讀之者 盡而有餘 久而更新 於是 豪貴之家 競相傳寫 洛陽爲之紙貴?
■ 낙엽귀근 落葉歸根[떨어질 락/입사귀 엽/돌아갈 귀/뿌리 근]
☞'떨어진 잎사귀는 뿌리로 돌아감'이라고 풀이되며 모든 생명체는 그 생명을 다하면 그 근본으로 돌아감을 뜻함[출전]『전등록(傳燈錄)』 [내용] 육조(六朝) 혜능(慧能)이 열반에 들 때에 여러 중생들의 물음에 답하기를 "떨어지는 잎사귀는 근본으로 돌아가고 돌아올 때를 기약할 수 없다"고 했다..[원문]落葉歸根 來時無日
■ 낙점 落點 [떨어질 락/점 점]
☞벼슬아치를 뽑을 때 임금이 뽑을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던 일.
[내용].조선시대에 관리를 임명하는 데에는 원칙이 있었으니, 인사를 담당한 이조나 병조에서 비삼망(備三望)이라 해서 세 사람을 추천하여 왕에게 올리면 왕은 자신의 의중에 드는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서 뽑았다.
점이 찍힌 사람의 편에서 보면‘수점(受點)’으로 되지만 점을 찍은 왕의 편에서 보면‘낙점(落點)’으로 되는 것이다.
[예문].연전에 우리 시삼촌께옵서 동지상사 낙점을 무르와 북경(北京)을 다녀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親庭)과 원근(遠近) 일가에게 보내고, 비복(婢僕)들도 쌈쌈이 낱낱이 나눠 주고, 그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희를 무수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연구(年久)히 보전(保全)하니, 비록 무심한 물건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요.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弔針文』중에서[참고]천거(薦擧)란 관리로 등용할 수 있는 인재를 추천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때 중앙과 지방의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은 3명의 인재를 추천할 의무를 가졌으며, 인재를 추천하는 사람을 거주(擧主)라고 했다. 만약 추천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라면 연대 책임을 졌다.
■ 낙정하석 落井下石 [떨어질 락/우물 정/아래 하/돌 석]
☞다른 사람이 재앙을 당하면 도와주기는 커녕 오히려 더 큰 재앙이 닥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출전]한유(韓愈)가 친구 유종원(柳宗元)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묘지명(墓地銘)[내용].“아! 선비는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비로소 그 지조(志操)를 알게 된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컴컴한 골목에 살면서 서로 사랑하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놀면서 즐겁게 웃으며, 자기의 심장이라도 꺼내 줄 것처럼 친구라고 칭하고,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죽음과 삶을 함께할 거라고 아주 간절하게 말한다.
그러나 머리털만큼이나 작은 이익이라도 있는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구분할 줄도 모른다. 함정에 빠진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돌을 들어 던지는 사람이 많다[落陷穽 不一引手救 反-之 又下石焉者 皆是也(낙함정 불일인수구 반제지 우하석언자 개시야)]. 이처럼 개화되지 않아 금수와 같은 사람들은 어째서 직접 가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한유는 유종원이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기개를 펼치지 못하고 저승으로 먼저 간 것을 애도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지었다. 유종원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문장을 잘 쓰기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조정에 나아가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었다. 그는 순종(順宗)이 즉위한 뒤 왕숙문(王叔文) 등이 주도하는 정치개혁에 가담하였다가 혁신 정치가 실패하여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어 귀양살이를 하다가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유와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을 영도한 인물로서 ‘도를 밝힘[명도(明道)]’을 문학관(文學觀)의 강령으로 삼고 《봉건론(封建論)》《영주팔기(永州八記)》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정치 활동에 있어서도 ‘도(道)’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만일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튼튼한 밧줄을 내려 주기는커녕 오히려 돌을 던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물에 빠진 사람은 생사(生死)의 기로(岐路)에 서 있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지만 돌을 던진다면 죽음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친구나 주위 사람들이 평온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때는 물론이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더욱 구렁 속으로 밀어 넣는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되며, 그 동안 쌓아 온 신뢰 속에서 온정의 손길을 뻗쳐야 한다.<두산백과>
■ 난공불락 難攻不落 [어려울 난/칠 공/아니 불/떨어질 락]
☞공격하기가 어려워 함락시키지 못함[예문1]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적진도 마침내 허물어졌다.
■ 난상가란 卵上加卵[알 란/위 상/더할 가/알 란]
☞ 알위에 알을 포갠다--정성이 지극하면 감천함
[출전]『醒睡稗說 성수패설』[내용]한 벼슬아치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아내에게 말했다."살아서 못돌아 올 것 같소.혹 알위에 알을 포갤 수 있다면 몰라도.."아내는 그 날부터 밤낮없이 계란 두 개를 소반위에 놓고서 포개지게 해 달라고 축원하였다. 어느 날 밤 임금이 미행을 하다가 축원하는 소리를 듣고 죄인을 풀어 주었다.[유]지성감천[至誠感天]
■ 난의포식 暖衣飽食[따뜻할 난/옷 의/배부를 포/먹을 식]
☞ '따뜻한 옷과 배부른 음식'이라고 풀이되며 생활에 부자유스러움이 없음을 뜻함
[유]호의호식(好衣好食)[출전]『맹자(孟子) 』등문공상( 文公上)[내용]등문공(騰文公)이 맹자에게 신하를 보내 정전법(井田法)에 대해 물었다.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군주께서는 인정을 베푸시고자 많은 신하 가운데 당신을 뽑아내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대체로 인정(仁政)이라는 것은 먼저 밭의 경계선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경계가 확실치 않으면 아무리 정전법을? 시행하여도 균형이 깨어지며 관리의 녹도 그것에 의해 정해지거나 불공평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기에 폭군이나 탐관이 있는 곳은 경계가 불확실한 것이 특징입니다. 경계를 확실히 정해 두면 정확히 밭을 분할할 수가 있고, 농작물의 수확량을 기초로 녹(祿)을 결정하는 게 쉬워집니다."
맹자는 말한다. "인간의 생활이란 분업을 하는 것입니다. 원시적인 자급자조만? 으로는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묵자의 영향을 받은 허행이라는 이가 송나라로부터 등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는 거친 옷을 입고 자신이 지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언젠가 그는 등문공에게 임금도 백성과 마찬가지로 손수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농기구나 그릇 등의 당장에 쓰지 않는 물건은 필요한 이웃의 쓰지 않은 물건과 바꾸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우 임금 같은 분은 여덟 해 동안 아홉 개의 큰 강을 막으셨으며 세 번이나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군왕과 선각자들이 강을 막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어 백성들이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고 사는 것(暖衣飽食)이 아니겠습니까."[원문]人之有道也 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聖人有憂之
■ 난장(亂場)판[어지러울 란/마당 장]
☞ 여러 사람이 떠들거나 뒤엉켜 뒤죽박죽이 된 곳.
[내용] 옛날에는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를 거쳐야 했다. 그래서 과거를 볼 때가 되면 오로지 급제를 위해 수년동안 공부를 한 양반집 자제들이 전국 각지에서 시험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렇듯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질서없이 들끓고 떠들어대던 과거마당을 '난장이라고 했다. 과거 시험장의 난장에 빗대어 뒤죽박죽 얽혀서 정신 없이 된 상태를 일컬어 난장판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우리말 유래 사전 >
[참고] 난장 : 시골에서 정한 장날 이외의 특별히 며칠간 터놓은 장, 한국의 장은 18세기 이후 농민의 농업생산에 필요한 미곡·농기구·면화·면포 등이 주요한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발전하여, 19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1천 여 장이 설 정도로 크게 번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개 5일 간격으로 열리는 5일장 체계가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5일장 외에도 특수지역 및 특수산물이 한꺼번에 많이 생산되는 지방에서는 난장이라는 부정기적인 장이 열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난장을 여는 것을 '난장을 튼다'라고 한다.
난장은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동안만 열리는 정기적인 장과는 달리 때로는 물자가 생산되는, 또는 집하되는 기간에 따라 짧게는 10일, 길게는 2개월까지 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 외에도 마을의 흉액을 예방하려고 난장을 트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마을에 흉년·물난리·산사태·화재·호환(虎患)·돌림병 및 지방관의 죽음 등과 같은 흉액이 자주 일어나 마을이 폐촌될 위기에 처할 때 이를 예방하려고 난장을 튼다. 난장을 열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면 그 기세로 마을의 흉액을 일으키는 나쁜 귀신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난장과 비슷한 형태로는 황해도 연평의 조기 파시(波市)와 같이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인 파시, 처음에는 한 해에 봄·가을 두 차례씩 열렸으나 뒤에는 가을 한 차례만 열어 약재만을 다룬 약령시(藥令市)가 있다.
대규모 난장의 경우는 주로 예성강의 고량포, 남한강의 목계, 금강의 강경, 영산강의 영산포, 섬진강의 광양·하동, 낙동강의 초계밤말[草溪栗旨]·안동 등의 포구에서 열렸는데, 쌀·보리·콩 등의 곡물이 주종을 이루었고 그 지방의 주요 특산물이 함께 거래되었다.
이러한 난장에는 거래 물량이 많은 만큼 각지에서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소비와 유흥적 낭비를 조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렴치한 행위가 난무하는 폐해도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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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형난제 難兄難弟[어려울 난/맏 형/어려울 난/아우 제]
☞ 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아우가 낫다고 하기도 어렵다.
어느 편이 낫다고 우열을 가리기가 곤란할 때 쓴다.[동]莫上莫下(막상막하)/伯仲之勢(백중지세)/互角之勢(호각지세)/優劣難分(우열난분)/
[속담]콩이야 팥이야 한다.(네 콩이 크니 내 콩이 크니 한다.) /도토리 키재기/ 막동이 씨름하듯.(童角抵戱) /두꺼비 씨름 누가 질지 누가 이길지.[출전]『世說新語』
[내용] : 후한(後漢) 말의 학자 진식(陳寔)은 덕망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그의 아들 진기(陳紀), 진심(陳諶)과 더불어 세군자로 불리어졌다. 진기의 아들 진군(陳群)도 역시 뛰어난 수재로 재상의 자리에 올랐었다. 진군이 어렸을 때 어느 날 진심의 아들 진충(陳忠)과 놀다가「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을 논하였는데 서로 자기 아버지가 낫다고 하여 결말을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물으니,“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아우가 낫다고 하기도 어렵구나.”라고 대답하였다.[원문]各論其父功德하여 爭之不能決하여 咨于太丘하니 太丘曰 元方難爲兄하고 季方難爲弟니라.
■ 남가지(일)몽 南柯之夢 .南柯一夢 [남녘 남/나뭇가지 가/어조사 지/꿈 몽]
☞남쪽 가지 밑에서 꾼 한 꿈. 일생과 부귀영화가 한날 꿈에 지나지 않는다.
[동]蟻夢(의몽) : 개미의 꿈.槐安夢(괴안몽) 一場春夢(일장춘몽) : 한바탕의 봄 꿈. 邯鄲之夢(한단지몽) : 한단의 꿈.(一炊之夢.邯鄲枕.黃粱夢 浮生若夢(부생약몽) : 뜬 인생이 꿈과 같다.白日夢(백일몽) : 한 낮에 꾸는 헛된 꿈[출전]『南柯記』異聞集(남가기 이문집)
[내용]강남 양주 교외에 순우분이란 협객이 있었다. 그의 집 남쪽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그 아래서 친 구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리고 있었는데, 그 날도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나무 그늘 아래서 잠이 들었다. 그 때 자줏빛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저희들은 괴안국(槐安國) 국왕의 사자인데, 당신을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하였다.
순우분은 그들을 따라가서 국왕의 사위가 되고 남가군(南柯郡)의 태수가 되어 20년 동안 남가군을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니 왕도 그 소식 을 듣고 재상으로 삼았다. 재상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단라국의 군대가 침입을 해와 3만의 군대 로 용감히 싸웠으나, 패하여 많은 군사가 죽고 아내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낙담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서울로 왔으나, 그의 명성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세력이 날로 커지자 괴안 국왕은 불안을 느꼈다. "자네도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 되었으므로 한번 다녀오는 것이 어떤 가?" 왕이 순우분에게 물었다. "저희 집은 여기인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자네는 원래 속세의 사람으로 여기는 자네의 집이 아니네." 그리하여 그는 왕의 사자를 따라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그는 느티나무 아래서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어나서 그가 꿈속에 들어갔던 늩나무 구멍을 살펴보니 그 속에는 성 모양을 한 개미집이 있었는데, 이것이 대괴안국이었던 것이다. 다시 구멍을 따라 남쪽으로 가니 또 하나의 개미집이 있었는데 이것이 남가군이었던 것이다.
그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덧없음을 깨닫고 도술(道 術)에만 전념하게 되었는데, 3년 후에 순우분도 세상을 떠났다. 바로 괴안국 왕과 약속한 3년 기한의 해였다. [원문]生感南柯之浮虛 悟人生之 忍 遂棲心道門 節棄酒色 後三年 歲在丁丑 亦終於家 時年四十七 將符宿契之限矣[속담]인생은 풀 끝 이슬. 만사가 모두 꿈 같다. 인생은 뿌리 없는 평초(萍草)
[예문]오랜 후에 비로소 제 몸이 연화 도량 성진 행자인 줄 알고 생각하니, 처음에 스승에게 수책하여 풍도로 가고, 인 세에 환도하여 양가의 아들되어 장원 급제 한림학사 하 고, 출장 입상하여 공명 신퇴하고, 양 공주와 육 낭자로 더 불어 즐기던 것이 다 하룻밤 꿈이라(구운몽) [참고]권주가『勸酒歌』
1. 불로초로 술을 빚어 만년배(萬年配)에 가득 부어 비나이다. 남산수(南山壽)를.2. 약산 동대(藥山東臺) 어즈러진 바위 꽃을 꺾어 주(籌)를 노며 무궁무진 먹사이다.3. 권군 종일 명정취(勸君終日酩酊醉) 하자. 주부도 유령분상토(酒不到劉伶墳上土)니 아니 취 (醉)코 무엇하리.4. 백년을 가사인인수(可使人人壽)라도 우락(憂樂)을 중분미백년(中分未百年)을 살았을 때 잘 놉시다.5.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 마라. 명년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려 니와 가련하다 우리 인생 뿌리 없는 萍草라. 紅顔白髮이 절로 가 긴들 아니 늦거운가. .<歌詞,작자,연대 미상>
-->초로(草露)와 같은 허무한 인생을 탄식하고 천만 년 수부귀(壽富貴)를 누릴 것을 빌며 무궁무진 즐겨 보자는 것이다. 1·2·3·4절과 5·6·7·8·9·10절은 각각 같은 가락의 반복이다. 술잔을 권할 때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일정한 장단이 없이 마음대로 내뽑는 자유형이다. 춘면곡(春眠曲)이나 어부사(漁父詞)와 같이 4도 상행 종지법을 갖는다.?
■ 남과람우 南郭濫釪[남녘 남/성곽 곽/넘칠 람/피리 우]
☞ 남곽이 함부로 우(대나무로 만든 악기로 피리의 일종이다)를 분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 것처럼 속여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함.
[출전]『韓非子』 내저설 상편[내용]제나라의 선왕이 사람을시켜 우를 불도록 할때는 반드시 3백명이 하도록 했다.
성곽 남곽이라는 처사도 왕을 위해 우를 불기를 원했다. 선왕은 그것을 기뻐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수백 명이 쌀을 받게 되었다.?
선왕이 죽고 민왕이 즉위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연주하는 것을 듣기 좋아하였다. 그러자 처사는 달아났다.
일설에 한의 소후가 이런 말을 했다.? "우를 부는 자가 많으므로 나는 그들 가운데 뛰어난 자를 알지 못한다." 그러자 전엄이 대답하여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도록 하여 들어 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 남귤북지 南橘北枳[남녘 남/귤나무 귤/북녘 북/탱자 지]
☞ 귤이 탱자가 됨.기후와 풍토가 다르면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되듯이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동]귤화위지 橘化爲枳 [출전]『안자춘추(晏子春秋)』 [내용]?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에 안영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했다.
안영이 너무 유명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욕망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수인사가 끝난 후 영왕이 입을 열었다."제(齊)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경과 같은 사람밖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소" 안영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을 비웃는 영왕의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예,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臣)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뽑혀서 초나라로 왔습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격의 대답이었다.
그때 마침 포리가 죄인을 끌고 지나갔다. "여봐라!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예, 제(齊)나라 사람이온데, 절도 죄인입니다." 초왕(楚王)은 안영에게 다시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하고 안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강남에 귤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제(齊)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楚)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줄 압니다."
그 기지(機智)와 태연함에 초왕은 안영에게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려."하고는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원문]王曰, 縛者曷爲者也. 對曰, 齊人也. 坐盜. 王視晏子曰, 齊人固善盜乎. 晏子避席對曰, 聞之, 橘生淮南, 則爲橘. 生于淮北, 則爲枳. 葉徒相似, 其實味不同. 所以然者何, 水士異也.今民生長于齊不盜, 入楚則盜, 得無楚之水士, 使民善盜耶. 王笑曰,聖人非所與熙也. 寡人反取病焉.
[예문1]“강남에 심으면 귤이 되는 것이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자연법칙이 인간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고사(古事)인 남귤북지(南橘北枳)를 인용한 말이었다. 물론 여기서 강남과 강북은 양쯔강 이남과 이북을 뜻했다.
■ 남남북녀 南男北女 [남녘 남/사내 남/북녘 북/계집 녀]
☞우리나라는 남쪽엔 남자, 북쪽엔 여자가 더 잘난 사람이 많다[예문]최근 남북 화해 분위기로 대규모 이산가족 상봉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고 있다. 앞으로 북한이 개방되고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면 인민배우들도 남한의 방송국에 출연할 수도 있으니 각 방송국의 PD는 반갑기만 하다. PD들은 “흑인들을 보면 보통 싱싱한 힘이 느껴지는 것처럼 북한 배우들도 ‘끼’가 흐른다”고 말한다. 아리따운 북한 여배우들을 텔레비전에서조만간 만난다면 ‘남남북녀’라는 말이 바로 현실이 된다.
■ 남부여대 男負女戴[사내 남/짐질 부/계집 녀/일 대]
☞남자는 짐을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집을 떠나 살곳을 찾아 떠돌아 다니는 형상.(유)東家食西家宿 동가식서가숙 / 遊離乞食 유리걸식
■남상 濫觴 [넘칠 람/술잔 상]
☞무슨 일의 시초나 근원이 되는 것
[동]嚆矢(효시):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내어 우는 화살 權輿(권여):저울대와 수레바탕(저울과 수레의 기초)[출전] 『논어』『筍子』『孔子家語』
[내용1]공자의 제자에 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양자강(揚子江 : 長江)은 사천(泗川)땅 깊숙히 자리한 민산(岷山)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 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 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모든 일은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子路)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 아 입었다고 한다.
내용2]子路가 옷을 잘 차려입고 孔子님을 뵈었다. 그러자 孔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由야, 이 옷자락은 무엇이냐? 옛날에 강은 민산(岷山)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처음에 나옴에 그 근원은 가히 써 술잔에 넘칠 만하였다. 그러나 그 강의 나루에 이르러서는, 배 를 늘어놓지 못하고 바람을 피하지 못하여, 건너지 못 하였다. 오직 下流에 물이 많음이 아니겠느냐?
지금 너도 의복을 이미 盛하게 차려 입고 얼굴빛이 충만되었구나. 천하에 장차 누가 즐겨 너에게 간하랴!"공자의 제자에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 남선북마 南船北馬 [남녘 남/배 선/북녘 북/말 마]
☞ 중국의 남쪽은 강이 많아 배를 타고 다니고, 북쪽은 들이 넓어 말을 타고 다닌다 함이니, 사방으로 바쁘게 돌아다닌다.
[예문]양자강은 황하와 더불어 중국의 2대 강이자 중국 최대의 강이기도 하다. 양자강의 상류는 금사강(金沙江)이고, 그 원류는 통천하(通天河)이다. 길이가 약5,800km에 달하는 이 강은 예로부터 남선북마라 하여 중국의 수운에 널리 활용되었다. 여름에는 하구에서 1,100km 상류인 무한까지 1만 톤급의 배로 올라갈 수 있다. 소형 어선이면 티벳과의 경계선인 사천성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양자강이라는 이름을 중국인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 [장강(長江)]이라고 부른다. 양자강은 외국인들만이 사용하는 명칭에 불과하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강소성 양주 근처 수로에 만들어진 다리를 양자교(揚子橋)라고 부른다. 19세기 말 한 서구인이 이 강에 배를 타고 들어와서 <이 곳은 무엇이라고 하는지요?>라고 중국인 선장에게 물었다. 이 선장은 별 생각없이 다리의 이름을 묻는 줄로 알고 <양자>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그 서구인은 강의 이름을 양자강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이것과 비슷한 사례가 또 하나 있다.
태국의 방콕을 흐르는 강을 외국인들은 보통 메낭강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메낭이란 태국어로 그냥 강이란 의미다.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질문했을 때 <이것은 메낭(강)이다>라고 답한 것을 그 강의 이름으로 오해해 그 후 메낭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남원북철 南轅北轍 [남녁 남/수레바퀴 원/북녘 북/수레바퀴 철]
☞수레의 긴 채는 남쪽으로 가고 바퀴는 북쪽으로 간다는 말로, 행동이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것을 가리킨다
[내용]전국시대 위나라 왕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여행을 하고 있던 신하 계량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왓다. 그는 왕을 뵙고 말했다. "저는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북쪽을 향해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남방의 초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나라로 간다면서 북쪽으로 가는 까닭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제 말은 아주 잘 달립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이 잘 달려도 이쪽은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그 사람은 '나는 돈을 넉넉히 가지고 있고, 마부가 마차를 모는 기술은 훌륭합니다.'라고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왕께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행동은 초나라와 더욱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계량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했다. "왕께서는 항상 패왕이 되어 천하가 복종하도록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왕께서는 나라가 조금 큰 것만을 믿고 한단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왕의 영토와 명성은 떨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왕의 목표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만난 사람처럼 초나라로 간다고 하면서 마차를 북쪽으로 몰고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무력이 아니고 인덕으로 천하를 제패할 것을 말한 것이다.
■ 남존여비 男尊女卑 [사내 남/높을 존/계집 녀/낮을 비]
☞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라고 풀이되며, 남성을 존중하고 여성을 비하, 경시하는 일을 뜻함
[출전]『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 [내용]공자가 태산에서 노닐다가 영계기가 성( )땅의 들을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남루한 갖옷에 새끼로 허리를 두르고는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자가 묻기를 "선생께서 즐거워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하니, 영계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즐거움이 매우 많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나게 함에 오직 사람만을 귀하게 하였는데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즐거움입니다.
남녀의 구별은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게 여기는데 나는 이미 남자의 몸을 얻었으니, 그것이 두 번째 즐거움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강보에 쌓인 채 해와 달을 못보고 죽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이미 아흔 살이니, 그것이 세 번째 즐거움입니다.
가난한 것은 선비에게 늘 있는 일이요, 죽는 것은 인생의 끝입니다. 평범한 상태에서 처하다 죽음을 얻는 것이니 마땅히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능히 스스로 깨달아 여유를 지닌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원문]孔子遊於太山,見榮啓期行乎 之野,鹿 帶索,? 鼓琴而歌. 孔子問曰:"先生所以樂,何也?"對曰:"吾樂甚多. 天生萬物,唯人爲貴. 而吾得爲人,是一樂也. 男女之別,男尊女卑,故以男爲貴,吾旣得爲男矣,是二樂也. 人生有不見日月不免襁褓者,吾旣已行年九十矣,是三樂也. 貧者士之常也, 死者人之終也,處常得終,當何憂哉?"孔子曰:"善乎?能自寬者也."
■ 낭자야심 狼子野心[이리 랑/새끼 자/들 야/마음 심]
☞ 늑대 새끼는 작아도 흉포한 성질이 있어 길들이기가 어렵다.
흉포한 사람의 마음은 교화하기 힘들다?[출전]『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내용]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투자문(鬪子文)은 약오(若敖)씨의 후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태어난 직후 들에 버려졌는데 호랑이가 주워다가 길렀다고 한다. 나중에 그를 발견한 사람이 "이 아이에게는 복이 있다"며 데리고 갔다.? 투자문은 뒤에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사람 됨됨이가 공정하며, 법 집행도 엄정 공명했다.?
한 번은 그의 친척이 법을 어긴 일이 있었으나 담당 관원이 체면을 생각하여 그를 석방했다. 그것을 안 투자문은 즉시 담당 관원에게 말했다.
"국가가 법률을 만들고 담당 기관을 설치했는데, 법 집행자가 법을 무시하고 죄인을 석방하면 안 된다. 비록 나의 일가붙이일지라도."
그리고 그를 넘겨 주어, 공평한 심리를 하든가 아니면 자해를 시키든가 하라고 명하여 백성의 비난을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담당 관원은 그 사람을 법에 따라 처벌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초나라의 성왕(成王)은 즉시 그의 집을 찾아가서 경의 표했다. 초나라 백성들도 그 말을 듣고 저마다 말했다.
"모두가 투자문 같다면, 초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무엇을 걱정하랴."? 투자문의 아우로 병부상서 자량(子良)의 아들 월초(越椒)를 보러 간 투자문이 말했다.
"저 애를 어서 죽여라. 자라서 틀림없이 우리 약오씨에 화를 가져 올 것이다. '낭자야심(狼子野心)'대로다."? 그러나 자량은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걱정한 자문은 죽는 자리에서 가족에게 유언했다.? "월초가 권력을 장악하거든 도망쳐라."?
그는 장래에 월초가 일족을 수중에 넣고 전멸시킬 것을 염려했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 반(般)이 재상이 되고, 월초도 아버지의 대신하여 병부상서가 되었다. 기원전 626년에 성왕의 아들 상신(商臣)은 부왕을 시해하고 왕이 되어 목왕 (穆王)이라 칭했다. 반은 알고 있었으나 발설하지 않았다.? 월초는 이 기회에 재상 자리를 빼앗으려고 목왕에게 반을 중상했다. 목왕은 월초와 위가(爲賈)의 말을 믿고, 반을 죽이고 월초를 재상에, 위가를 병부상서에 각각 발탁했다.
월초는 20년간 재상직을 보았다. 그 사이에 목왕은 죽고 장왕(莊王)이 즉위했다. 그는 장왕을 내심 경멸하면서도 왕이 위가를 중용하여 그의 권력을 삭감하려는 것을 원망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월초는 장왕이 외국으로 원정 나간 틈을 타 약오씨 일족을 이끌고 위가를 습격하여 그를 체포하여 죽여 버렸다. 그것을 안 장왕은 투씨의 역대 공적을 생각하여 월초에게 사죄시켜 사태를 수숩하려고 월초의 아들을 인질로 내놓으라고 제의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다음 해 7월경, 월초와 장왕 양군이 교전하여 장왕은 약오씨의 일족을 몰살시켜 버렸다.? 월초의 '낭자야심(狼子野心)'은 마침내 여기까지 발전하여 투자문이 염려한 대로 약오씨에게 큰 재난을 가져다 주었다.
■ 낭중지추 囊中之錐 [주머니 낭/가운데 중/어조사 지/송곳 추]
☞주머니 속의 송곳.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나게 된다. 또는 아무리 감추려 하나 숨겨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드러나 善惡을 가리게 된다.
[동]錐囊(추낭). 추처낭중(錐處囊中)이 원어(原語)이다.[속담]주머니 속에 들어간 송곳이라.[출전]『史記』-平原君傳[고사] : 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그래서 楚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식객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사람 20명을 뽑아 동행하고자 했지만 한 사람이 부족했다. 그 때 모수가 자천(毛遂自薦)하자,「평원군이“대저 현명한 선비가 세상을 대처함은 비유컨데 송곳이 주머니 속에 처하여 그 끝이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선생이 내 집에 들어와서 여기에서 3년이 되었다.
내가 들은바가 없으니 이것은 선생이 가진 재주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자 모수가“오늘 처음으로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는 것입니다. 일찍 주머니 속에 넣어 주셨더리면 송곳자루까지 나와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원문]平原君曰“夫賢士之處世也는 譬若錐之處囊中하여 其末立見이라. 今先生이 處勝之門下하여 三年於此矣라 勝 未有所聞하니 是先生無所有也라.”毛遂曰“臣乃今日請處囊中耳니이다. 使遂蚤得處囊中하니 乃穎脫而出하니 非特其末見而耳니다.”
** 譬(비유할 비) 蚤(일찍 조) 穎(고리, 이삭, 빼어날 영) [예문]투자자의 예탁자산에 근거해 투자전략과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주는 "자산종합관리계좌제도"가 조만간 도입되면 증권사들은 명실상부한 투자은행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금융기관간의 업무영역 파괴와 금융권 구조조정이 맞물리면서 증권업이 낭중지추의 저력을 발휘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한국경제>
■ 낭중취물 囊中取物[주머니 낭/가운데 중/취할 취/만물 물]
☞ 주머니 속에 든 것을 꺼내 가지는 것과 같이 아주 손 쉽게 얻을 수 있다.[속담]식은 죽 먹기. 누워 떡 먹기[예문1]듣자오니 특재라 하는 자객이 있어 사람 죽임을 낭중취물같이 한다 하오니 천금을 주어 밤에 들어가 해하오면 상공이 알으시나 할 길 없사오리니 부인은 재삼 생각하소서…(洪吉童傳)
■ 낭패 狼狽[이리 랑/이리 패]
☞다리 없는 두 마리의 이리가 처한 곤경. 조급한 나머지 다급하여 조치를 잘못함
[동]낭패불감[狼狽不堪]--난감한 처지에 있음(=進退兩難/進退惟谷)[출전]『後漢書』 李固傳 /〈진정표(陳情表)〉
[내용1]'낭패'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자주 쓰이는 말이다. 어떤 일을 도모했을 때 잘 풀리지 않아 처지가 고약하게 꼬이는 경우에 사용한다.? '낭'이나 '패'나 한결같이 개사슴록(犬)변으로 이뤄졌다. 한자에서 犬변이 들어 있는 글자는 모두 동물이거나 또는 동물의 특성을 함축한 글자다.
예를 들면 여우 호(弧), 개 구(狗), 삵쾡이 리(狸), 돼지 저(猪), 고양이 묘(猫) 등등이다.
물론 낭(狼)과 패(狽)도 마찬가지다. 낭패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낭(狼)은 태어날 때부터 뒷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다. 그런가 하면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없거나 짧다. 낭은 패가 없으면 서지 못하고, 패는 낭이 없으면 걷지 못하므로 반드시 함께 행동해야만 한다. 그런 이유로 두 녀석이 걸으려면 어지간히 사이가 좋지 않고서는 넘어지기 일쑤다.
이 두 녀석의 성품을 분석해 보면, 낭은 성질이 흉포하지만 지모(智謀)가 부족하다. 반대로 패는 순한 듯 싶은데도 지모가 뛰어나다. 그래서 함께 먹이를 찾으러 나갈 때엔 패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문제가 생긴다. 서로 고집을 피우면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간사하고 꾀가 많다는 뜻의 교활(狡猾)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 역시 개사슴록 (犬)변이다. 교(狡)나 활(猾)은 모두 동물 이름이다.
물론 실존하는 것은 아니며 전설상의 동물이다.
[내용2]진(晉)나라의 정치가 이밀(李密)이 쓴 〈진정표(陳情表)〉라는 글에 나온다. 이밀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촉한(蜀漢)의 관리가 되었다. 촉한이 멸망하자, 진무제(秦武帝) 사마염(司馬炎)은 그를 태자세마(太子洗馬)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사마염의 요청은 끊이지 않았고 이밀은 더 이상 거절할 방법이 없자 자신의 처지를 글로 써서 올리기로 하였다.
《문선(文選)》〈이밀(李密) 진정표(陳情表)〉에 있는 글 중에서 일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저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자애로운 부친을 여의었고, 네 살 때 어머니는 외삼촌의 권유로 개가를 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겨 직접 길러 주셨습니다. 저의 집에는 다른 형제가 없으며, 큰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도 없어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할머니께서 연로(年老)하시니 제가 없으면 누가 할머니의 여생을 돌봐 드리겠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관직을 받지 않으면 이 또한 폐하의 뜻을 어기는 것이 되니, 오늘 신의 처지는 정말로 낭패스럽습니다[臣之進退 實爲狼狽(신지진퇴 실위낭패)].”
이밀은 지극한 효성으로 할머니를 모셔 왔다는 점을 말하면서 자신의 관직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라는 것이다. 이밀의 간곡한 요청은 결국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낭패불감’은 ‘낭패스럽다’는 난감한 처지에 유래한 말이다.<두산백과>[참고]교(狡)는 옥산(玉山)에 살며 개와 같지만 표범 무늬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쇠뿔을 달고 있으니 그 형상이 괴이하다. 울음소리 역시 개와 비슷하다고 적혀 있다. 한가지 특별한 것은 이놈이 나타나면 그해엔 여지없이 풍작이다. 그런 점에서 교는 길조이며 어느 누구나 반긴다.?
교(狡)의 주변에는 활(猾)이 있다. 이놈은 아주 간악하다. 사는 곳은 요광산 (堯光山)인데 몸뚱이에는 돼지털이 나 있으며 동굴 안에서 겨울잠을 잔다. 한소리 기합을 지르듯 울어대면 온 천하가 큰 혼란에 빠져 버린다. 사람들은 모두 흉조의 상징이기 때문에 활을 두려워 한다.?
교(狡)나 활(猾)은 산 속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면 스스로의 몸을 구부려 공처럼 만들어 버린다.?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삼키려 들면 재빨리 입안으로 들어가 내장으로 굴러가 그것을 파먹는다. 배가 아파 호랑이가 날뛰면 맘껏 내장을 뜯어 먹는다. 그리고 호랑이가 죽으면 그제야 유유히 뱃속에서 빠져 나온다.?
망설여 결행하지 못하는 뜻의 유예(猶豫)라는 말도 동물에서 나왔다. 유(猶)는 의심이 많은 동물이다. 이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나무 위로 숨어 버린다. 유의 본래 뜻은 원숭이다. 예(豫)는 상(象)자가 있으므로 코끼리다. 아마 지금의 큰 코끼리보다 더 커서 매우 동작이 느렸을 것이다 (『산해경』)
■ 내강외유 內剛外柔[안 내/굳셀 강/바깥 외/부드러울 유]
☞겉으로 보기에는 유순하지만 속마음은 단단하고 굳셈.[동]外柔內剛(외유내강)[반]內柔外剛(내유외강)
■ 내우외환 內憂外患 [안 내/근심할 우/바깥 외/근심 환]
☞나라 안에도 근심스런 문제가 있고 나라 밖으로부터도 외적이 쳐들어 오는 불안전한 시국.[출전]『晉語』[내용]춘추시대 중엽에 강대한 초나라와 진나라가 대립한 시대가 있었다. B·C. 575년에 진나라와 초나라의 두 군대는 언능에서 마주쳤다. 당시에 진나라의 내부에서는 극씨, 낙씨, 범씨 등의 대부들이 정치를 좌우할 만큼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낙서는 진나라에 항거한 정나라를 치기 위하여 동원령을 내리고 스스로 중군의 장군이 되고 범문자는 부장군이 되었지만, 진나라와 초나라의 두 군대가 충돌하자 낙씨는 초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했다. 범문자는 이에 반대하여? 제후로 있는 사람이 반란하면 이것을 토벌하고 공격당하면 이를 구원하여 나라는 이로써 혼란해진다. 제후는 어려움의 근본이라고 지적하여 말했다. "그 위에 성인이라면 안으로부터의 근심도, 밖으로부터의 재난도 지니지 않고? 견디지만(唯聖人耳 能無外患 又無內憂) 우리들에게는 밖으로부터의 재난이 없으면,? 반드시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근심이 있다. 초나라와 정나라는 잠시 놓아두고서? 밖으로부터의 근심을 내버려 두지 않겠는가?"하고 말한 것이다. 내우외환은 여기서? 유래했다.
[원문] 晉伐鄭, 荊救之. 大夫欲戰, 范文子不欲, 曰 "吾聞之, 君人者刑其民成, 而後振武於外, 是以內和而外威.? 今吾司寇之刀鋸日弊, 而斧鉞不行, 內猶有不刑, 而 外乎? 夫戰, 刑也,? 刑之過也. 過由大, 而怨由細, 故以惠誅怨, 以忍去過. 細無怨而大不過,? 而後可以武, 刑外之不服者. 今吾刑外乎大人, 而忍於小民, 將誰行武? 武不行而勝, 幸也. 幸以爲政, 必有內憂. 且唯聖人能無外患, 又無內憂,? 非聖人, 必偏而後可. 偏而在外, 猶可救也, 疾自中起, 是難.? 姑釋荊與鄭以爲外患乎?"
■ 노당익장 老當益壯[늙을 로/마땅히 당/더욱 익/씩씩할 장]
☞ 늙었어도 기운이 더욱 씩씩함/늙어서는 뜻과 기백을 더욱 굳세게 지녀야 한다는 뜻,
나이가 들었어도 결코 젊은이다운 패기가 변하지 않고 오히려 굳건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동]老益壯[출전]『後漢書』마원전(馬援傳)[내용]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장 마원(馬援)은 어려서부터 큰뜻을 품고 글을 배우고 예절을 익혔으며 무예에도 정통하여, 그의 맏형 마황(馬況)은 그를 대기만성(大器晩成)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형이 젊은 나이로 죽자 마원은 상례(喪禮)를 정중히 모셔 치른 후 예를 다하여 형수를 받들었다.
그 뒤 마원이 부풍군(扶風郡) 독우관(督郵官:감찰관)이란 벼슬에 있을 때 명을 받들어 많은 죄수들을 압송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죄수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애통하게 부르짖는 것을 보고는 동정심이 우러난 나머지 모두 풀어주어 제각기 제 살길을 찾아가도록 하고 자신도 북방으로 달아났다.
마원은 북방으로 가서 소·말·양 따위를 놓아 먹이면서 지냈다. 부지런하고 수완이 좋은 그는 수년간 정성껏 가축을 길러 그 규모가 수천 두까지 이르렀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많은 돈을 벌게 되자 가까운 친구나 이웃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고, 자기는 오히려 떨어진 양가죽 옷을 걸치고 소박한 식사를 하는 등 근검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항시 친구에게 말하였다. “대장부라는 자는 뜻을 품었으면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며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대장부위자 궁당익견 노당익장)].” 그리고 또 “가멸지더라도 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면 수전노(守錢奴)일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세상이 혼란스럽게 되자, 마원은 평범한 삶을 버리고 농서(西)의 외효() 밑으로 들어가 대장이 되었다. 외효는 공손술(公孫述)과 손을 잡기 위해 마원을 그곳으로 파견하였다. 마원은 공손술의 오만(傲慢)한 행동에 크게 실망하고 의례적인 인사만을 하고는 곧장 돌아왔다.
그 후 마원은 광무제를 만나게 된다. 광무제는 마원을 만나자 예절을 다해 대접하였으며, 각 부서를 데리고 다니며 조언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마원은 이러한 후한 대접에 감동되어 외효에게 돌아가지 않고 광무제의 휘하(麾下)에 있기로 결심하였다. 광무제는 마원을 복파장군(僕波將軍)에 임명하여 남방의 교지(交趾:越南 북부)를 평정하게 하여 성공한다.
얼마 후, 동정호(洞庭湖) 일대의 만족(蠻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광무제가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전멸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마원이 자신에게 군대를 달라고 청하며 나섰다. 광무제는 그가 너무 늙었으므로 주저하자 마원이 말하기로 “소신(小臣)의 나이 비록 예순두 살이나 갑옷을 입고 말도 탈 수 있으니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하고는 말에 안장을 채우고 훌쩍 뛰어올랐다. 광무제는 미소를 지으며, “확삭하도다, 옹은(확삭재시옹야).”이라며 출정(出征)을 허락하였다. 결국 마원은 군대를 이끌고 정벌길에 올랐다. 그 후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하고 흉노(匈奴) 토벌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그의 형이 말한 대로 대기만성을 이루었다. [원문]常謂賓客曰: 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예문]최고령 출전 선수는 카메룬의 쟈케 송고. 만 37세인 송고는 스페인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서 뛰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카메니와 송고는 무려 20년의 나이 차이가 난다. 한국은 ‘왼발의 달인’ 하석주가 만 33세로 가장 나이가 많다 <스포츠투데이>.
■ 노류장화 路柳墻花[길 로/버들 류/담 장/꽃 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뜻에서 기생을 말함.[예문1]노류장화(路柳墻花)가 수절이란 말이 괴이하다. 요망한 말 말고 오늘부터 수청 거행하라.』 춘향이 여쭈오되, 『만 번 죽어도 봉행(奉行)치 못하리로소이다.』 신관이 대로하여 춘향을 결박하여 형틀에 앉힌 후 집장(執杖) 분부하여, 『대매에 허락하도록 치라.』 <춘향전>[예문2]노류장화는 인개가절이라 무심한 저 달이 구름 밖에 나더니 공연한 심사를 산란케 한다. 눈 속의 푸른 솔은 장부기상이요 학두루미 울고 가니 절세명승이라 이골 물이 콰콸콸 녹수가 변하면 변했지 양인의 정리야 변할소냐. 이화도화 만발하고 행화방초 흩날인다.<양산도타령>
[예문2]노류장화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를 잊어 볼까. 창문을 닫쳐도 숨어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이냐 달빛이 사랑이냐, 텅 비인 내가슴엔 사랑만 가득 쌓였구나. 사랑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게 무엇이냐<창부타령>
■ 노마지지 老馬之智[늙을 로/말 마/어조사 지/지혜 지]
☞늙은 말의 지혜. 연륜이 깊으면 나름의 장점과 특기가 있음.[출전]『韓非子』, 說林上[내용] :「관중과 습붕이 환공을 따라 고죽국을 칠 때 봄에 가서 겨울에 돌아오다가 미혹되어 길을 잃었다. 관중이 가로되“늙은 말의 지혜를 이용할 만하다”하고 곧 늙은 말을 풀어 그 말을 따랐다.또한 산중을 진군하고 있을 때 물이 없어 갈증이 나자 습붕이“개미는 겨울이면 남쪽에 살고 여름이면 산의 북쪽에 사는 것이므로 개미집의 높이가 한 치라면 그 지하 여덟 자를 파면 물이 있다.”고 말하여 파보니 과연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미물도 뛰어난 장점이 있듯이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뛰어난 점이 있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여 할 일을 부여한다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원문][管中濕朋이 從於桓公하여 而伐孤竹할새 春往冬反이라가 迷惑失道하다. 管中曰 老馬之智를 可用也라하고 乃放老馬하여 而隨之하다.]** 管(대통 관) 濕(진펄 습) 迷(어두울 미) 惑(미혹될 혹) 放(놓을 방) [예문]얼마전 검찰 인사에서 사시 11회가 고검장급으로 승진됨에 따라 같은 기수 가운데 승진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표를 종용하는 분위기를 담은 기사가 각 일간지에 실렸다. 뿐만 아니라 사표 낼 사람 이 사표를 내지 않아 인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물론 지휘체계를 살리기 위해 생겨난 관행이겠지만 동기생 한 사람이 상관으로 승진했다고 해서 다른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서 물러 나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관행이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에 자리 잡는다면, 예컨대 30대 과장 밑에 40대 계장은 반드 시 나가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명예퇴직이니 어쩌니 해서 젊은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지식(知識)과 지혜(智慧)는 다르다. 지(知)에 오랜 경험의 세월(日)이 쌓여 지혜의 지(智)가 된다. 영어 단어를 많이 아는 것과 그쪽 문화를 아는 것은 다르다. 노마지지(老馬之智)의 교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응수(소설가)의 『고사산책』에서
■ 노발대발 怒發大發 [성낼 노/필 발/큰 대/필 발]
☞'화를 내고 크게 냄'이라고 풀이되며 크게 화를 내는 것을 뜻함[출전]『사기(史記)』 인상여전(藺相如傳)[내용]사기열전 인상여전에는 당시 최고의 보물이던 '화씨의 구슬(和氏之璧)'에 얽힌 조나라 사람 인상여와 진나라 왕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시 '화씨의 구슬'은 조(趙)나라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워낙 귀한 물건이라? 탐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진(秦)나라 왕은 나라가 강한 것을 믿고 구슬을? 빼앗으려 작정하고 구슬을 진나라의 15개성과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사실은 구슬만 빼앗으려는 거짓 제안이었다. 조나라는 이를 간파했지만 강한 진나라의 제안을 무조건 거절할 수도 없는 곤란한 지경이었다. 이때 조나라의 인상여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인상여가 진나라로 가서 왕에게 구슬을 바쳤으나 왕은 기뻐만 할 뿐 15개성과 바꿀 의향은 전혀 비추지 않았다. ?인상여는 진왕의 본심을 파악하고 거짓으로 "구슬에 흠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하여 다시 구슬을 손에 넣었다.그리고 뒤로 물러나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곤두선 머리털이 갓을 밀어 올릴 만큼 성을 내어(怒發上衝冠) 진나라 왕에게 신의가 없음을 꾸짖었다. 진왕은 인상여의 충절과 용기에 감복하여 인상여와 구슬을 돌려보냈다.결국 인상여의 기지로 조나라는 '화씨의 구슬'을 진나라에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원문] 秦王坐章臺見相如, 相如 奉璧奏秦王. 秦王大喜, 傳以示美人及左右, 左右皆呼萬歲. 相如 視秦王無意償趙城, 乃前曰: 璧有瑕, 請指示王. 王授璧,相如因持璧立, 倚柱, 怒髮上衝冠, 謂秦王曰: 大王欲得璧, 使人發書至趙王,趙王悉召 臣議, 皆曰『秦貪, 負其彊, 以空言求璧, 償城恐不可得』
■ 노심초사 勞心焦思 [힘쓸 로/마음 심/태울 초/생각 사]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생각을 너무 깊게 함. 애쓰면서 속을 태움.**焦 :焦燥(초조) ,焦土化(초토화) ?憔悴(초췌) ,樵童(초동)
[출전]『맹자(孟子)』 등문공상/『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내용]노심(勞心)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다'라고 풀이되며, 맹자 등문공상에 "혹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자도 있고 힘을 수고롭게 하는 자가 있는데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남을 다시리고 힘을 수고롭고 하는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당한다"라 하여 이것저것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초사(焦思)는 '생각을 치열하게 하다'라고 풀이되며, 사기 월왕구천세가에 "오나라가 이미 월나라의 구천을 풀어주자 월왕 구천이 나라로 돌아와서 이에 몸을 수고롭게 하고 속을 태우면서 앉아 있는 자리 옆에 쓸개를 놓아 두고 앉거나 누으면 쓸개를 바라보았으며 먹거나 마실 때 또한 쓸개를 맛보았다.'"
[원문] 故曰 或勞心 或勞力 勞心者 治人 勞力者 治於人<맹자>? 吳旣赦越, 越王句踐反國,乃苦身焦思, 置膽於坐, 坐臥卽仰膽, 飮食亦嘗膽也.<사기>
■ 노이무공 勞而無功 [수고로울 로/말이을 이/없을 무/공 공]
☞'수고는 하나 공이 없다'라고 풀이되며 애는 썼으나 애를 쓴 보람이 없음. 수고만 하고 아무런 공이 없음을 뜻함[동]도로무익(徒勞無益)
[출전]『관자(管子)』/『순자(荀子)』 /『장자(莊子)』
[내용]<관자(管子)>의 "형세편"에 "옳지 못한 것에 편들지 말라.할 수 없는 것을 강제하지 말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르지 말라.이 같은 것을 가리켜, 수고롭기만 하고 공은 없다고 하는 것(謂之勞而無功)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 <순자(荀子)>의 "정명편"에도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막연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고,번잡하고 통일이 되어있지 않으며, 시끌시끌 떠들어대기만 한다. 또한 명목에 이끌리고 말에만 현혹되어 참 뜻을 알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열심히 말은 하지만 핵심이 없고 몹시 애는 쓰지만 공이 없다 (故窮藉而無極 甚勞而無功)." 라고 했다.? 또 <장자(莊子)> "천운편"에도,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위나라 "사금(師金)"이란 사람이 공자의 제자 "안연"을 보고 공자를 평한 말에도 나온다. 즉 "주나라와 노나라는 배와 수레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지금 주나라 때에 행해지던? 도를 노나라에서 행하려 하고 있으니, 이는 배를 육지에서 밀고 있는 것과 같다. 애만 쓰고 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몸에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다 (勞而無功 身必有殃)." 라고 하고 있다.
[원문] 使于人之所不能爲, 則令廢; 告狂惑之人, 則身害. 故曰“與不可, 强不能, 告不知, 謂之勞而無功. <관자(管子)>故窮藉而無極,甚勞而無功,貪而無名.故知者之言也,慮之易知也,<순자(荀子)>? "천운편"[夫水行莫如用舟,而陸行莫如用車. 以舟之可行於水也而求推之於陸,則沒世不行尋常. 古今非水陸與? 周魯非舟車與? 今기行周於魯,是猶推舟於陸也,勞而无功,身必有殃. 彼未知夫无方之傳,應物而不窮者也.<장자(莊子)>
■ 녹림 綠林[푸르를 록/수풀 림]
☞푸른 숲이란 뜻으로, 도둑 떼의 소굴을 일컫는 말.[동] 녹림호객(綠林豪客)[유] 백랑(白浪). 백파(白波). 야객(夜客).[출전]『漢書』王莽傳.『後漢書』劉 傳[내용]전한(前漢:B.C. 202∼A.D. 8) 말, 왕실의 외척인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은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신(新:8∼24)이라 일컬었다.왕망은 농지, 노예, 경제 제도 등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복잡한 제도에 걸려 농지를 잃고 노예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났다. 또한 화폐가 8년 동안에 네 차례나 바뀌는 등 경제정책 역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왕망은 백성들은 물론 귀족들로부터도 심한 반감을 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북 변경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그 중에서도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湖北省當陽縣) 내의 녹림산에 근거지를 둔 8000여의 한 무리는 스스로를 '녹림지병(綠林之兵)'이라 일컫고 지주의 창고와 관고(官庫)를 닥치는 대로 털었다. 그 후 이 녹림지병은 5만을 헤아리는 대세력으로 부상했는데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25∼57) 유수(劉秀)는 그들을 십분 이용하여 왕망의 신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원문]王莽末, 南方飢饉,人庶 入野澤, 掘鳧 而食之, 更相侵奪. 新市人王匡,王鳳爲平理諍訟,? 遂推爲渠帥, 衆數百人. 於是諸亡命馬武,王常,成丹等往從之;共攻離鄕聚,? 臧於綠林中, 數月閒至七八千人. 地皇二年, 荊州牧某發奔命二萬人攻之,? 匡等相率迎擊於雲杜, 大破牧軍, 殺數千人, 盡獲輜重, 遂攻拔竟陵. 轉擊雲杜. 安陸, 多略婦女, 還入綠林中, 至有五萬餘口, 州郡不能制?
■ 녹음방초 綠陰芳草[푸를 록/그늘 음/꽃다울 방/풀 초]
☞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그늘과 꽃다운 풀. 여름의 아름다운 경치.[동]綠楊芳草(푸르른 버들가지와 꽃다운 풀) *綠:草綠(초록),因緣(인연), 記錄 (기록), 祿俸(녹봉) [예문]그때의 심봉사는 출천대효 딸만잃고 모진 목숨 죽지도 못허고 근근부지로 지낼적에 봄이 가고 여름이되니 녹음방초 시절이로고나 산천은 적적헌듸 물소리만 처량허네 딸과 같이 놀던 처녀들은 종종와서 인사를 허니 딸 생각이 더욱 간절허구나 심봉사 마음이 산란허여 지팽막대를 검처잡고 망사때를 찾어가서 비석을 안고 울음운다 .아가 청아 인간의 부모를 잘못만나 생죽엄을 당하였구나 아비 나를 생각커든 어서나를 다려가거라 눈뜨기도 나는 싫고 세상살기도 귀찮허다.타루비 앞에가 꺽꾸러저서 치둥굴 내리둥굴 머리도 직근 가삼 쾅쾅 두발을 굴러 망지소지로 울음을 운다 - 판소리<심청가>중에서
■ 녹의홍상 綠衣紅裳[푸를 록/옷,저고리 의/붉을 홍/치마 상]
☞푸른 저고리와 붉은 치마. 젊은 여인의 고운 옷차림.[참고]丹脣皓齒(단순호치) : 불은 입술과 흰 이. 미인의 얼굴. 雪膚花容(설부화용) : 흰 살결에 고운 얼굴.柳尾蜂腰(유미봉요) : 버들같은 눈섭에 개미같은 허리.綠衣黃裳(녹의황상) : 귀천이 뒤바뀜 綠衣使者(녹의사자) : 鸚鵡(앵무)의 별칭
■ 논공행상 論功行賞 [따질 론/공 공/행할 행/상줄 상]
☞공을 다 따져 각각 알맞은 상을 주는 일.세운 공을 평가하고 의논하여 표창을 하거나 상을 줌[출전]『史記』숙상국세가(蕭相國世家)[내용]고담(顧譚)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명상 고옹(顧雍)의 손자로, 어릴 때부터 수재로 알려져 일을 척척 잘 처리했고, 더우기 사물을 보는 방법이 독창적이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는 꾸밈없는 성품으로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군주 손권(孫權)에게도 생각을 말한 일이 있다. 손권은 식사 중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관심을 가져, 그 후에 때때로 불러서 이야기를 했다. 어느 때, 노나라 왕 손패가, 같은 어머니 형제인 오나라의 태자 손화와 대우를 같이 받고 싶다고 손권에게 요구해 왔다. ?고담은 역사상의 형제의 싸움을 인용해서 손패의 요구를 물 리치라고 손권에게 진언했다. 그 이후, 손패는 고담을 미워했다. 그 때, 같은 시기에 고담과 교제하려다가 거절당한 사람 중에, 위장군 전종의 아들 전기가 있었다. 손패와 전기는 손을 잡고 고담의 실각을 꾀했다. 기원 241년, 손권은 전종(全琮)을 대장으로 삼아 위의 회남으로 출병하여, 위의 장수 왕릉과 작파(芍파)에서 격전했지만, 오군은 대패하여 중랑장 진광 등 십여 명의 장군이 전사했다. 당시, 고담의 동생 고승과 장휴 두 장수는 수춘에서 작전 중이었다. 작파의 패전을 듣고 곧 구원을 떠나 위의 왕릉군을 저지했다. 전종의 두 사람의 조카 전세와 전서도 오군의 부장으로 종군했지만, 위군의 추격이 저지당했다고 알고 공격으로 옮겼다. 위군은 그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모두 패주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오의 수도 건업에서 논공행상이 행해졌다. 많은 사람이 위를 저지한 공을 세웠고 반격한 공도 있었기 때문에, 손권은 고승과 장휴에게 정장군(正將軍), 전제와 전서에 게 편장군(偏將軍)의 칭호를 수여했다. 그래서, 전종·전기 부자는 고담형제에게 더욱 원한 이 깊어졌다.
그래서, 손패를 통해 손권에게 진언했다. "고승과 장휴는 전군(典軍)진순과 친했기 때문에 공을 거짓 전달하여 주군을 속였습니다." 손권은 조사를 하지 않고, 이 말을 믿어 장휴를 포박하고, 고승의 처분은 보류하였다. 그 리고, 뒷날 고담에게 사죄시키려 했다. 어느 날, 고담에게 말했다. "동생을 어떻게 할까? 담은 사죄할까?" 오히려 나쁜 말을 믿은 손권을 책망했다. 손권은 화가 나서 형제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고담은 비분의 정을 <신언(新言)>20편에 이어 썼지 만, 2년 후 지방에서 병사했다.
[예문]전쟁이 끝난뒤 조예는 문빙과 그 휘하 장병들에게 그 지위와 공과를 따져 상을 내렸다.
뒷날 사 람들은 이를 두고 논공행상이라고 불렀다. 때는 바야흐로 국정감사의 계절이다. 감사대상기관의 장(長)들은 연일 다그치는 선량들의 질책에 혼쭐이 나고 있다. 국정감사가 의원들의 정치적 입지를 조명하는 자기과시의 자리라기 보다는 공직자들의 공과와 업 적을 가리는 논공행상의 자리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올 감사 또한 예년과 같이 소리만 무성하고 알맹이는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제발 이젠 말잔치와 소모성 논쟁만으로 끝나는 국감은 아니어야 할텐데.--이응수<고사산책>
■ 농가성진 弄假成眞 [희롱할 롱/거짓 가/이룰 성/참 진]
☞장난삼아 한 것이 진심으로 한 것 같이 되었다는 뜻 =假弄成眞(가롱성진)
■ 농단 壟斷(언덕 롱/끊을 단)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 곧 ① 재물을 독차지함. ② 이익을 독점함.[출전]『孟子』公孫추篇(공손추편)[내용]전국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 중이던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선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 테니 제나라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맹자는 거절했다."전하,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에 달라붙어서 '재물을 독차지[壟斷]'할 생각은 없나이다."이렇게 말한 맹자는 '농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농단'은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인데, 전하여 '재물을 독차지한다',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먼 옛날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했었다. 그런데 한 교활한 사나이가 나타나 시장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높은 언덕[壟斷]'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서 장사함으로써 '이익을 독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이 사나이의 비열(卑劣)한 수법을 증오(憎惡)하고 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 때부터 장사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 농와지경 弄瓦之慶[희롱할 롱/실패 와/어조사 지/경사 경]
☞딸을 낳은 기쁨.[출전]『詩經』[내용] : 옛날 중국에서 딸을 낳으면 실패(瓦)를 장난감으로 준데서 유래.「乃生好載寢之地 載衣之旺 載弄之瓦」
■ 농장지희(경) 弄璋之喜(慶) [가지고 놀 롱/옥구슬 ?장/어조사 지/기쁠희]
☞아들을 낳은 기쁨.[출전]『詩經』[내용] : 옛날 중국에서 아들을 낳으면 구슬(璋)의 장난감을 준 고사.(詩經에「乃生男子 載寢之狀 載衣之裳 載弄之璋」)
■ 누란지위 累卵之危 [쌓을 루/알 란/어조사 지/위태로울 위]
☞알을 쌓은 듯한 위태로움. 쌓아 놓은 알과 같이 매우 위태로운 형세.
[동]危如累卵(위여누란). 累卵之勢(누란지세). 累碁(누기) : 바둑 돌을 쌓아 올린 듯하다.如履薄氷(여리박빙) : 엷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다. 百尺竿頭(백척간두) : 백 척이나 되는 장대 위에 매달려 있다. 風前燈火(풍전등화) : 바람 앞의 등불. 焦眉之急(초미지급) : 눈썹에 불이 붙음. 일각의 여유도 둘 사이없이 다급함. [속담] 강가에 나간 아이와 같다. /눈먼 말 타고 벼랑가기다. /봄 얼음 건너가는 것 같다.
[출전] 『史記』, (范雎傳) [내용] 전국시대, 세 치의 혀[舌]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遊說)하는 세객(說客)들은 거의 무두 책사(策士) . 모사(謀士)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 . 모사를 종횡가(縱橫家)라고 일컬었다.위(魏)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范雎)도 종횡가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 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힐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齊)나 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 데 제나라에서 수가보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須賈)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齊나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참언(讒言)했다.
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謀士)답 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鄭安平)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장록(張祿) 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이 왔 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왕계(王稽)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 을 진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소개했다."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위태롭다.(危於累卵)'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
[秦王之國 危於累卵 得臣則安])이라고 하였사옵니다."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시대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후 范雎[張祿]은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원문]已報使, 因言曰: 魏有張祿先生,天下辯士也. 曰『秦王之國危於累卵, 得臣則安. 然不可以書傳也』. 臣故載來. 秦王弗信, 使舍食草具. 待命歲餘.
■ 능서불택필 能書不擇筆 [능할 능/글 서/아니 불/가릴 택/붓 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출전]『唐書』(歐陽詢傳)[고사] :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 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 저수량(저遂良)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不擇筆紙]'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또 '능서불택필'은 『왕긍당필진(王肯堂筆塵)』과 주현종(周顯宗)의 『논서(論書)』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書)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 능소능대 能小能大[능할 능/작을 소/능할 능/클 대]
☞모든 일을 임기웅변으로 잘 처리함.
[예문1]명랑, 쾌활하고 이지적 사고방식에 융통성이 풍부하고 결단성이 있으며, 다정다감한면이 많다.모든 면에 능소능대(能小能大)하여 목적한 바를 달성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출세의 길운(吉運)이 유도되며, 만인의 존경과 헌신적인 협조를 얻어 명망이 높게된다.<성명풀이>[예문2]세요 각시 가는 허리 구붓기며 날랜 부리 두루혀 이르되,"양우의 말이 불가하다. 진주 열그릇이나 껜 후에 구슬이라 할 것이니 재단(裁斷)에 능소능대 (能小能大)하다 하나 나 곧 아니면 작의(作衣)를 어찌 하리오. 세누비 미누비 저른 솔 긴 옷을 이루미 나의 날래고 빠름이 아니면 잘게 뜨며 굵게 박아 마음대로 하리오. 척부인의 자혀 내고 교두 각시 버혀 내다 하나 내 아니면 공이 없으려든 두 벗이 무삼 공 자랑하나뇨<규중칠우쟁론기>
■ 니취 泥醉[진흙 니/취할 취]
☞술에 취해 진흙처럼 흐느적거림. 몹시 술에 취한 상태
[출전] 이백의 『襄陽歌』[내용]니취(泥醉)라는 것은 일설에 '술 벌레'라고 한다. 뼈가 없는 이 벌레는 물을 만나면 활발히 움직인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것을 술벌레가 몸에 들어가 작용한 것으로 나타낸다.? 장경성(長庚星)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아명을 태백(太白)이라 부른 이백. 물론 그는 훗날에도 그 이름을 계속 써 왔다.?
그는 태어나면서 용모가 수려했고 문학과 역사에 심취했다. 우연히 이백의 문재(文才)를 알게 된 당(唐) 현종은 그에게만은 궁안 법도를 따르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며 한림학사에 임명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석 잔을 마시면 크게 깨우치고?
다섯 말을 마시면 자연과 합하네? 술 세계 제호의 맛은? 취해 보지 않은 자 모르리라
만년에 이르러 이백은 관직이 번거러워 유람을 하였는데 동정호의 악양루에서 놀고, 다시 배를 채석강(采石江) 위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유랑한 풍악소리가 들려 왔다. 물론 이 소리는 다른 이에게는 전연 들리지 않고 이백에게만 들여 왔다. 그때 강위에는 큰 물고기가 뛰놀며 큰 고래가 수염을 휘날리며 솟구쳤다. 두 선동(仙童)이 사신의 기를 가지고 이백에게 다가왔다.?
"상제께서 장경성(이백)이 귀환하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뱃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그들이 쓰러져 잠이 든 때에 이백은 풍악에 인도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물론 전설이다.
■ 다기망양 多岐亡羊[많을 다/갈림길 기/잃을 망/양 양]
☞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 학문의 길이 다방면이면 진리를 얻기 어렵다. 또는 방침이 많아 도리어 갈 바를 모른다.
[동]亡羊之嘆(망양지탄) *岐 : 岐路, 分岐點 [출전]『列子』[내용]양자의 이웃집에서 양 한 마리가 도망을 했다. 양의 주인이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양자에게 노복(奴僕) 청하여 양을 쫓아가려 하자, 양자가 물었다. "단 한 마리의 양을 잃었는데 어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뒤쫓아가는고."
이웃집 사람이 대답하였다. "도망간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이오." 얼마 뒤에, 그들이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서 양을 잃었다고 하였다. 양자가 양을 잃은 까닭을 묻자, "갈림길을 가면 또 갈림길이 있어서, 양이 어디 갔는지 모르게 되어 버렸소(多岐亡羊)."
양자는 그 말을 듣고는 묵묵히 앉아 입을 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루종일 웃는 얼굴 한번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이 기껏해야 양 한 마리를 잃은 일이요, 더구나 자기의 양도 아닌데, 그렇게 침울해 있는 것은 이상하다 생각하고, 까닭을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은 스승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선배 제자인 심도자(心都子)에게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으니 심도자는 "단 한 마리의 양이라 할지라도, 갈림길에서 또 갈림길로 헤매어 들어가서 찾다가는 결국 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물며 학문의 길은 어떻겠느냐?
목표를 잃고 무수한 학설들에 빠져 헤맨다면 아무리 노력한들 그 또한 무의미한 것 아니겠느냐." 하였다. 《장자(莊子)》 변무편(騈拇篇)에도 양을 잃은 이야기가 있다. 남녀 종이 책을 읽고 주사위놀음을 하다가 양을 잃었다는 이야기로, 이 곳에서도 주위의 사물이나 현상에 휩쓸리다 보면 자기의 본분을 잊게 된다는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망양지탄(亡羊之歎)이라고도 한다.
학문에는 지식의 집적과 이론의 분석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부질없이 지엽말절을 꼬치꼬치 캐고 살피는 일에 빠져서 근본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란 것을 풍자한 이야기이다.
[원문]心都子曰:"大道以多 亡羊, 學者以多方喪生. 學非本不同,非本不一, 而末異若是. 唯歸同反一, 爲亡得喪. 子長先生之門, 習先生之道, 而不達先生之 也, 哀哉!"
[예문1]20세기를 가득 채웠던 수많은 승리와 좌절, 환희와 비탄을 돌이켜보면 승리를 기리고 패배를 모멸하는 숱한 담론 속에서 서서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다. 인간논리와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의 형국이어서 이들 논의는 그가 복무해야 할 대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최후의 근본적 성찰로서의 휴머니즘이 요청되는 역사적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전환기적 전망으로서의 휴머니즘」--신영복
■ 다다익선 多多益善 [많을 다/더욱 익/좋을 선]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다. 많이 보태지면 힘이 더 난다.
[동]多多益辦(다다익판) :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잘 처리한다.
[출전]『史記』, 淮陰侯傳[내용] : 漢나라 유방(劉邦)이 천하통일 후 한신(韓信)을 楚 왕으로 임명하고, 한신에게「임금이 묻기를“나는 얼마쯤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느냐? ”
한신이 대답하기를“폐하께서는 10만의 군사를 거느리는데에 불과합니다.”임금이 가로되“그대는 얼마쯤인가?”
한신이 대답하기를“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
”유방이 웃으면서“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는 사람이 어째서 10만의 장군에 불과한 나에게 포로가 되었느냐?”하니 한신이 대답하기를“폐하께서는 장군의 능력은 없지만 장군을 통솔하는 폐하의 능력은 하늘이 주신 것이므로 도저히 사람의 능력으로는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문]上問曰 如我能將幾何오하니 信曰 陛下不過能將十萬이니다. 上曰 於君何如오 曰 臣多多益善耳니이다.
■ 다사다난 多事多難[많을 다/일 사/많을 다/어려울 난]
☞여러 가지로 일이 많고 몹시 어려움.
[유]내우외환[內憂外患]/무리난제[無理難題][반]무사식재[無事息災]/평온무사[平穩無事]
[예문]이사장의 그간 동정이나 경영철학 등을 비롯해 우리 병원에서 이루어진 각종 기념비적 의학기록과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를 통해 결실을 맺은 감동적인 사연 등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진 책 내용 가운데는 가천의과대학교와 가천길대, 신명여고 등 가천학원과 경원대학교·경원전문대 등 경원학원의 내용도 포함돼 있어 한 해 동안 다사다난했던 우리 재단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길병원보>에서
[예문2]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03년이다. 이해는 마침 이 왕가에 가장 뜻깊은 해였다.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고종만큼 다사다난한 사건들을 겪은 임금도 드물다. 그런 와중에서도 40년 동안 큰 병고 없이 옥좌를 지켜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궁내외 대신 등이 뜻을 모아 위로잔치를 베풀기로 했다. 이 잔치를 칭경예식(稱慶禮式)이라 했는데, 잔치 준비 중 몇몇 대신들이 이왕이면 자동차 한 대를 들여와 축하식장인 광화문의 광무대까지 고종을 모시자는 듯을 모았다로부터 자동차의 편리함을 충분히 들어왔던 고종은 대신들의 간청에 처음에는 빈약한 나라살림을 생각해서 거절했으나 끝내는 허락했다. <좋은차닷컴>
■ 단금지계 斷金之契 [끊을 단/쇠 금/어조사 지/맺을 계]
☞ 무쇠를 자를 수 있을 정도의 굳은 사귐.
[동]단금지교[斷金之交]/금란지교[金蘭之交][유]금석지교[金石之交]
[출전]『周易』, 繫辭下?[내용]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합하면 그 날카로움은 쇠도 끊을 수 있고,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한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도 같다는 의미로 서로 마음이 맞는 절친한 우정의 사이를 이르는 말.[원문]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 단기지계 斷機之戒[끊을 단/베틀 기/어조사 지/경계할 계]
☞베를 끊어서 훈계했다.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계.
[동]孟母斷機(맹모단기)[출전]『列女傳』, 母儀[내용] : 맹자가 자라서 어느 날 유학을 갔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오니,「맹모가 바야흐로 베를 짜다가 묻기를“학문이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느냐?”맹자가 말하기를“전과 같습니다.”하니 맹모가 칼로써 베를 끊으면서 말하기를“네가 학문을 그만두는 것은 내가 이 베를 끊는 것과 같다.”하니 맹자가 두려워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학문하였다.」
맹자는 마침내 천하의 명유(名儒)가 될 수 있었다.
[원문]孟子之少也에 旣學而歸한대 孟母가 方績이라가 問曰 學이 何所至與오. 孟子曰 自若야니이다.孟母가 以刀로 斷其織이어늘 孟子가 懼而問其故한대 孟母가 曰 子之廢學이 若吾斷斯織也라.孟子가 懼하여 旦夕으로 勤學不息하고 師事子思하여 遂成天下之名儒러라.君子가 謂하되 孟母는 知人母之道矣러라
**旣 이미기/ 方 바야흐로 방/ 績 길쌈할 적/ 至 이를 지/ 若 같을 약 / 斷 끊을 단/懼 두려워할 구/ 子 2인칭 대명사 /廢 그만둘 폐 / 斯 이 사 / 旦 아침 단 / 夕 저녁 석 /勤 부지런할 근 / 息 쉴 식 / 遂 드디어 수 / 謂 이를 위 ?
■단도직입 單刀直入[홀 단/칼 도/곧을 직/들 입]
☞한 자루의 칼을 들고 곧바로 쳐들어 감. 허두를 빼고 요점이나 본문제로 들어간다. 또는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서슴지 않고 정면으로 대번에 용건을 들어 말하는 것.[불]생각과 분별과 말에 거리끼지 않고 眞境界(진경계)로 바로 들어감[예문]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예문2]어렵사리 그와의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서문식당이 아닌 포구 안쪽 허술한 선술집으로 그를 이끌었다.손씨도 봉환의 처지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단도직입으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김주영 <아리랑난장>에서.
■ 단말마 斷末魔[끊을 단/끝 말/마귀 마] ?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
/숨이 끊어질 때 마지막 모질음을 쓰는 것/죽을 때,임종
[내용]말마는 범어 marman의 음역이고 支節이라고도 번역하며 또 의역하면 死血인데 사람의 몸이 이것에 닿으면 죽는 국소의 뜻임/
傷害人心者 臨終受斷末魔苦(顯宗論)-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죽을 때 단말마의 고통을 받는다
[예문1]검이 한가닥 청광으로 화해 무섭게 날아갔다. 노승을 공격하던 흑의인 하나가 문득 심상치않은 느낌에 번개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크악!”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나왔다--<한국일보>연재 「태풍운연의」에서[예문2][폭포」--이형기
■ 단사표음 簞食瓢飮 [도시락 단/밥 사/표주박 표/마실 음]
☞ 대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 좋지 못한 적은 음식.-->소박한 시골생활.청빈한 생활[동]簞瓢陋巷(단표누항)-도시락밥과 표주박물로 누추한거리에서 생활함/簞瓢
[출전]『논어』『漢書』[내용]「공자가 말씀하시되「어질도다 안회여! 한 도시락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심으로 좁고 더러운(누추한) 집에 있음을 사람들이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회는 그 속에서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도다, 회여!
[원문1]子曰 賢哉라 回也여 一簞食와 一瓢飮으로 在陋巷을 人不堪其憂어늘 回也는 不改其樂하니 賢哉라 回也여. ** 簞(도시락 단) 食(밥 사) 瓢(바가지 표) 巷(집 항) 堪(견딜 감) 憂(근심 우) /[원문2]顔淵簞食瓢飮在於陋巷『漢書』
■ 단순호치 丹脣皓齒 [붉을 단/입술 순/흴 호/이 치]
☞붉은 입술과 흰 이--미인을 형용하는 말.
[동]주순호치[朱脣浩齒][유]명모호치[明眸浩齒]--맑은 눈동자와 힌 이,미인/花容月態(화용월태)--꽃같은 용모와 달빛같은 자태/, 水中蓮花(수중연화)/ 雲間明月(운간명월),/ 解語之花(해어지화)/沈魚落雁(침어낙안)--물고기가 숨고 기러기가 떨어진다/雪膚花容(설부화용)
[출전] 『초사』[예문1]일필휘지, 솔의의 서가 아닌가 한다.
유두분면(기름 바른 머리와 분 바른 얼굴), 단순호치(붉은 입술과 하얀 이)의 다듬고 꾸민 얼굴도 아름답지만 꾸미지 않은 수수한 아름다움이 더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것--월정 정주상 작품 감상조언 중에서.
■ 단장 斷腸 [끊어질 단/창자 장]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게 견딜 수 없는 심한 슬픔이나 괴로움.
/애 끊는 슬픔[출전]『世說新語』[내용] 晉나라의 환온(桓溫)이라는 사람이 蜀나라로 가던 도중 환온의 종자(種子)가 양자강의 삼협(三峽)에서 원숭이 새끼를 싣고 가자 그 어미가 새끼를 그리워하여 울부짖으며 백여리나 달려와 배에 뛰어 들더니 죽고 말았다.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너무나도 슬퍼했던 나머지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원문]桓公入蜀, 至三峽中, 部伍中有得 子者, 其母緣岸哀號,行百餘里不去 遂跳上船, 至便卽絶;破視其腹中, 腸皆寸寸斷. 公聞之, 怒, 命黜其人.[예문]단장의 슬픔을 안고.../단장곡/단장의 미아리고개(노래제목?)
■ 담판 談判 [말씀 담/가를 판] ?
☞어떤 일의 是非를 가리거나 결말을 짓기 위하여 논의하다. 부당한 일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여 시정하도록 하다./따짐
[예문1]유럽연합의 대표단은 19일 베이징에 도착하여 중국과의 담판을 벌인다. 한 소식통은 유럽연합의 요구사항이 미국보다 결코 낫지 않을 것으로 전했다. 또한 많은 부분들이 미국의 조건을 본따서 이루어졌고, 심지어 금융,보험,해상등의 서비스무역의 요구조건은 미국보다 높아서 유럽연합과의 담판역시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뉴스투데이>
■ 담하용이 談何容易 [말할 담/어찌 하/쉬울 용/쉬울 이] ?
☞무슨 일이든지 입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쉽지 않으므로 쉽게 입을 여는 짓은 삼가야 한다는 말.
[출전]『漢書』 東邦朔傳[내용]동방삭(東邦朔)은 전한(前漢) 중엽 사람이다. 그는 정직하며 유머를 좋아 했다.? 무제(武帝)가 전국의 인재를 모집했을 때 고향의 염차(厭次:산동성)에서 수도 장안으로 나가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상시랑(常侍郞)으로 발탁되었다.
무제는 장안 근처에 황실 전용 사냥터 '상림원(上林苑)'을 만들려고 했다. 동방삭은 국고를 비게 하고, 백성의 생활 밑천을 빼앗는 짓이라며 반대했으나 무제는 듣지 않았다.
그는 부국 강병책을 건의했지만 채택되지 않아 '비유 선생론(非有先生論)' 이라는 풍자문을 써서 간했다. 거기에는 비유 선생과 오왕(吳王)이라는 두 가공 인물이 등장한다.
비유 선생은 오왕을 섬긴 지 3년이 되지만, 조금도 정견을 발표하지 않았다. 오왕이 어이가 없어서 "뭔가 말을 해주시오"하고 요망했지만, 선생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오왕은 안달이 났다.
"말해 주시오. 뭐든 듣겠소."? "좋습니다. 입을 여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간언하다 죽은 충신의 이름을 나열하고는 또 거듭 말했다.
"입을 열기가 어찌 그리 쉬운 일이오!(談何容易)" 그는 계속해서, 알랑거려 중용된 인물, 임금이 포악했기 때문에 세상을 피한 인물의 이름을 들어 충신을 멀리하고 소인을 등용한 어리석음을 말했다.
"입을 열기가 어찌 쉬운 일이오!"
선생은 또 현자가 명군을 만나 서로 도와 가며 나라를 일으키고 융성케 한 사례도 들어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을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오왕은 감동하여 이후부터 선생의 간언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오나라를 융성으로 이끌었다는 내용이다.
■ 당구풍월 堂狗風月 [집 당/개 구/바람 풍/달 월]
☞무식쟁이라도 유식한 사람과 사귀면 견문이 넓어진다. 또는 무슨 일 하는 것을 오래 오래 보고 듣고 하면 자연히 할 줄 알게 된다.
[속담]서당개 삼년에 풍월한다[堂狗三年에 吠(짖을폐)風月이라.] The sparrow near a school sings the primer.[영어속담] /산까마귀 염불한다[예문]얻어 들은 풍월. **狗 ,拘(얽을 구-拘束)
■ 당동벌이 黨同伐異 [무리 당/같을 동/칠 벌/다를 이]
☞옳고 그르고 간에 같은 사람은 편들고, 다른 파의 사람을 배격하는 것을 말함
[출전]『後漢書』 당동전(黨同傳)[내용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룩한 이래 중국의 권력은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자연히 황제를 둘러싼 친위 집단이 권력을 농단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을 이룬 것이 환관과 외척 세력이었다. 또 한(漢)나라 때에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유학을 공부한 선비 집단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하자 선비들은 초야로 피해 청의(淸議)를 일삼고, 자연스럽게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무리들이 모였다. 이를 당인(黨人)이라 한다. 후한 때에는 화제(和帝) 이후 역대 황제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이 되고, 이 과정에서 황태후의 친인척인 외척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일 장성한 황제는 이들의 전횡을 탐탁치 않게 여겨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우고 이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그 중심인 된 세력이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들은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집단의 결속력이 유달리 강하고, 사회적 책임이나 정치적 경륜보다는 자신들의 이해에 민감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권력을 쥐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마련이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은 예비 관료 집단인 선비들이 환관의 농단으로 국정이 문란하고 풍속이 타락해 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들도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여 전국적으로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비 집단과 외척, 환관 세력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권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집단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당동벌이이다. 좁게는 당고(黨錮)의 옥(獄) 이후 이응(李膺)을 중심으로 한 당인들이 유교적 지식 계급 이외의 세력을 적대시하던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한은 외척이 망쳤고, 후한은 환관이 망쳤다고 한다. 후한 말에 이르러 환관들은 외척과 선비 집단을 철저히 탄압하고, 그 결과로 지식인 관료 집단인 선비 집단이 황실을 버림으로써 후한이 자멸하게 되었다.
■ 당돌서시 唐突西施[갑자기 당/뚫을 돌]
☞당돌한 서시라,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진 서시
[동]진서(晉書)[예문]진나라에 주의라는 자가 있었는데, 매사에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자였다. 하루는 친구 강량이 찾아왔다.?"친구들이 자네를 악광과 비교하고 있네."
악광은 진나라의 현인으로 죽어서까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과 자신을 견준자는 말을 들은 진의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무염은 추녀이고 서시는 재색을 겸비한 미녀라는 사실은 갓난아이도 안다네. 친구들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악광과 함께 나를 말한다면, 이것은 무염을 서시와 똑같은 미녀라고 하는 것과 같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선녀와 같은 미모의 서시를 거스르는 것이 되네. 그대들은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서시는 월나라의 미인으로 월와 구천이 오나라에 패한 뒤 오왕 부차에게 보내졌다. 부차는 서시의 눈부신 미모에 현혹되어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결국 구천에게 멸망하고 만다.
■ 당랑거철螳螂拒轍[사마귀 당/사마귀 랑/저항할 거/바퀴자국 철]
☞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다. 자기의 힘은 헤아리지 않고 강자에게 함부로 덤비다.
[동]螳螂之斧(당랑지부) : 사마귀가 앞 발을 머리 위로 올린 것.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螳臂當車(당비당거) : 사마귀의 팔뚝이 수레를 당하다. 용감무쌍한 것.
[속담]새앙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는 격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출전]『淮南子』 人間訓,『한시외전』[내용1] : 齊나라의 장공(莊公)이 어느 날 사냥을 갔는데 사마귀 한 마리가 다리를 들고 수레바퀴로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본 장공이 부하에게“용감한 벌레로구나. 저놈의 이름이 무엇이냐?”“예. 저것은 사마귀라는 벌레인데 저 벌레는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 모르며 제 힘은 생각지 않고 한결같이 적에 대항하는 놈입니다.(淮南子)?”장공이 이 말을 듣고“이 벌레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반드시 천하에 비길 데 없는 용사였을 것이다.”하고는 그 용기에 감탄하여 수레를 돌려 사마귀를 피해서 가게 했다.[내용2] '螳螂之斧(당랑지부)'는 사마귀가 먹이를 공격할 때에 앞발을 머리 위로 추켜든 모습이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과 흡사한데서 온 말이나 '당랑거철'과 같은 뜻으로 쓰임./
『문선』에 보면 '당랑거철'은 三國時代(삼국시대)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이란 사람이 劉備(유비) 등 群雄(군웅)에게 띄운 격문에 나온다.
"曺操(조조)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된다. 그러니 모두 袁紹(원소)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螳螂拒轍)'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한시외전)." [원문]此所謂 螳螂者也 其爲 也 知進而不知却 不量力而輕敵 莊公曰 此爲人而必 天下勇武矣 廻車而避之<韓詩外傳>於是操師震 晨夜逋遁 屯據敖倉 阻河爲固 欲以 之斧 禦隆車之隧<文選>
■ 당랑포선 螳螂捕蟬[사마귀 당/ 螂 사마귀 랑/捕 잡을 포/ 蟬 매미 선]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덤비면 결국 큰 해를 입게 된다는 뜻. [동]螳螂在後(당랑재후)
[출전] 『한시외전(韓詩外傳)?』[내용]전국시대 오나라 왕이 싸움을 무척 좋아하여 그의 강대한 병력을 믿고 이웃 나라를 침략했다. 그리하여 오나라는 끊일 사이 없는 전화 속에서 민생은 도탄에 빠질 지경이었다.
한번은 오왕이 또 초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자 오나라 문무대신들은 당시의 정세로 보아 다시 출병을 하게 되면 오나라에 대단히 불리해질 것을 우려하여 오왕에게 계획을 취소하도록 극구 권하였다.
그러나 오왕은 본디 성격이 강직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하고 마는 고집불통인지라 이러한 권유를 듣고 침략 계획을 스스로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렸다.
"무릇 누구도 초나라 침공을 저지하는 자는 용서없이 모두 처단할 것이다."
대신들이 비록 오왕의 힘에 겨운 침략행위를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목숨이 두려워 감히 진언하질 못했다. 이때 소유자라고 하는 대신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여하간 오왕의 출병을 막고자 곰곰히 방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매일 아침 일찍 활과 화살을 들고 왕궁 후원에 나아가 배회하면서 아침 이슬로 그의 옷을 흠뻑 적시곤 하였다. 이렇게 사흘이 되던 날 과연 오왕의 주의를 끌게 되어 이상히 여긴 오왕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이 하여 아침 일찍부터 옷을 적셔 놓으오?" "신은 아침 일찍 뒤 화원에 와서 꾀꼬리를 잡으려다 그만 연못에 빠졌습니다. 비록 옷은 젖었지만 오히려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라고 소유자가 대답했다.
오왕이 이 말을 듣자 놀람과 기쁨이 엇갈렸다. 놀라운 것은 꾀꼬리를 잡는데 무엇 때문에 귀중한 교훈을 받았으며 기쁜 것은 이 귀중한 교훈이 자신의 입신처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서였다. 그리하여 오왕이 재촉하여 물었다.
"꾀꼬리를 잡는데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그 사실을 상세히 아뢰렷다."
소유자는, "조금전에 신이 이후원에 와서 새를 찾아 활솜씨를 시험해 보려 했는데, 갑자기 나무 위에서 매미 한 마리가 소리 높여 울더군요. 그래 머리를 들어 보니까 매미가 붙어 있는 바로 뒤에 사마귀 한 마리가 두 팔을 내어 밀고 막 매미에게 덮치려고 하고 잇지 않겠어요. 매미는 이를 모르고 있으니? 틀림없이 아침 식사로 잡았다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그 사마귀 뒤에는 꾀꼬리 한 마리가 묵묵히 앉아 있는데 그도 사마귀를 잡아먹으려고 온 정신을 기울여 주시하고 있더군요. 신은 그 때 활을 잡아당기고는 바로 쏘질 않았습니다. 사마귀가 팔을 뻗어 매미를 잡자 꾀꼬리가 확 덮쳐가 사마귀를 잡아 한 입에 넣어 막 삼키려는 찰라에 신이 꾀꼬리를 조준하여 활을 쏘니까 꾀꼬리가 맞고 땅으로 떨어지더군요. 사마귀와 꾀꼬리가 다같이 눈앞의 이익만을 탐내고 뒤의 화환은 꿈에도 생각지 않다가 그러한 결과가 생겼다고 신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막 달려가서 그 꾀꼬리를 주우려다 옆에 못이 있는 것을 모르고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지는 바람에 이렇게 온 몸이 물에 젖었습니다.
그때 제자신도 똑 같은 과오를 저질렀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교훈입니까?"
오왕이 듣고는 한참 무언가 깊이 생각하더니 소유자의 언중의 말뜻을 깨달아 초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포기하였다.
■ 대기만성 大器晩成[큰 대/그릇 기/늦을 만/이룰 성]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큰 인물은 많은 노력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뒤늦게 이루어짐.
[출전]『한비자』,『老子』[내용]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대지는 모퉁이가 없고, 큰그릇은 늦게 만들어지며, 큰 소리는 드물게 소리나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으며, 도는 숨어있어 이름이 없다--대지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최대의 사각은 지나치게 커서 그 모퉁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인 것과 같이 최고의 가치가 있는 그릇은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 후라야 완성된다. 가장 힘이 강한 소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같이 생각된다. 절대적인 불변의 참된 도(道)는 너무나도 광대해서 그 정체를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된 도인 것이다." 노자의 말로서, 여기서의 도는 유교가 말하는 사람이 지켜 행해야 하는 도와는 다르다.
원문에서 나온 대기만성의 본래의 의미는 큰 그릇은 덜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즉, 원래 위대하고 훌륭한 것은 보통 사람의 눈이나 생각으로는 어딘가 덜된 것 같고, 그 반대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老子』[참고1]유노(喩老)옛날 중국 초나라의 장왕(莊王)은 즉위한 지 삼년이 지났는데도 별 정령을 내리지 않았다. 우사마(관직이름)로 있는 사람이 하루는 장왕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새 한 마리가 남쪽 언덕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년이 되어도 날지 않고 또 울지도 않습니다. 이런 새를 무어라 불렀으면 좋겠습니까? "장왕이 대답했다.?"
그 새가 삼년을 안 날고 있는 것은 날개에 힘을 붙이기 위해 그러는 것이고 울지 않는 것은 주의를 살피느라 그러는 것이오. 그러나 한번 날기 시작하면 하늘 높이 솟아오를 것이며 한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조금만 더 두고보시오. 그리고 난 그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소. "
?그 반년 뒤 스스로 정무를 맡아 처리하는데 엄정하고 예리했다. 쓸모없는 법령 열 가지를 폐지했고 대신 아홉 가지 법령을 새로 지었다. 또 무능한 중신 여섯 명을 파면시키고 현명한 사람 여섯명을 야(野)에서 새로 등용해 썼다.
그런 다음 장왕은 제(濟)나라와 싸워 크게 이겼고 진(晉)나라를 하옹(중국의 지명)에서 패퇴(敗退)시켰으며 그 여세를 몰아 뭇 제후들을 송나라에 모이게 해 그 맹주(猛主)가 되어 천하(天下)의 패권(覇權)을 쥐었다. ?장왕의 이런 큰 성공(成功)은 그가 목전(目前)의 작은 공을 생각 않고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힘을 축적한데 있다. 그래서 老子는" 큰 그릇은 쉬 만들어지지 않으며 큰 소리는 자주 나지 않는 법이다".[大器晩成 大音稀聲]이라 말했다(한비자)
[참고2]西漢(서한)말의 馬援(마원)은 어려서부터 야심이 많았지만 좀처럼 등용되지 못한 채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논밭이나 관리하는 말단 관직을 받아 부임 인사차 형인 馬況(마황)에게 들렀다. 형이 말했다.
“너는 大器晩成형의 인물이다. 기술이 뛰어난 목수는 산에서 갓 베어낸 나무를 절대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먼저 잘 다듬은 다음에 선을 뵈지. 열심히 노력해라.”
과연 그는 형의 말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후에 東漢(동한)이 서자 光武帝(광무제)를 도와 혁혁한 공을 세워 관직이 伏波將軍(복파장군)까지 올랐다. 伏波將軍이라면 西漢 漢武帝(한무제) 때부터 있었던 관직으로 將軍 중에서도 戰功(전공)이 뛰어난 사람에게만 授與(수여)되었던 관직이다. 후에 洞庭湖(동정호) 일대에서 반란이 일었다. 조정에서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怪疾(괴질)에 걸려 潰滅(궤멸)되고 말았다. 光武帝가 난처해하자 그는 출병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의 나이 예순이 넘어서였다. 그는 마침내 반군을 진압하여 성공적으로 개선했다.‘老益壯’(노익장)의 고사다. 비록 大器晩成의 인물이었지만 老益壯까지 과시했던 셈이다.
■ 대동단결 大同團結[클 대/같을 동/묶을 단/맺을 결]
☞많은 사람. 여러 갈래의 당파가 큰 덩어리로 한 데 뭉치다.
[예문]최근 항간에는 3영수합작이니 3거두합작이니 하는 추상적 명사가 유행되고 있다. 우리는 조국의 완전 자주 독립을 위하여 전민족적 대동단결을 주장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였으며 또 남북통일의 균형적 추진을 위하여 남한에서 각 당파의 통일과 단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면과업으로 현정하였던 것이다. 통일과 단결은 전민족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백범어록』중에서
■ 대동소이 大同小異 [클 대/같을 동/작을 소/다를 이] ?
☞크게는 같은 데 작게는 다르다. 거의 같음.
[동]五十步百步 (맹자)[출전]『장자』천하편[내용]장자는 묵가와 법가 등의 학설의 논점을 비판하고 도가 사상을 선양한 다음 장자 의 친구인 혜시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바판하는데 혜시의 말 가운데'하늘은 땅보다도 낮고 산은 연못보다 평평하다. 해는 장차 중천에 뜨지만 장차 기울어지고 만물은 장차 태어나지만 장차 죽 는다. 크게 보면 한가지이지만 작게 보면 각각 다르니(大同小異) 이것을 소동이(小同異)라고 말한다. 만물은 모두 같고 또 모두 다르니 이것을 대동이(大同異)라고 말한다.' 대동소이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주자(朱子)도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쓰면서 뜻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당나라의 노동과 마이가 사귐을 맺는 시(詩)에 "어제의 같음은 같음이 아니고 다름은 다름이 아니다. 이것을 크게는 같고 작게는 다르다고 말한다"고 쓰고 있다.[예문]도보와 삼국초기로 부터 통일신라, 고려, 이조에 걸쳐 만들어 졌든 각종 고분벽화 기와회화등에 보면 맨손투기의 자세며 칼이나 창, 봉을 들고 방어, 공격하는 온갖 모습이 생생히 나타나 있는데 이를 보면 현재 기도회 술기의 자세와 대동소이 함을 알수 있을 것이다.
■ 대대손손 代代孫孫[대 대/자손 손]
☞대대로 이어오는 자손.[동]子子孫孫(자자손손) 世世孫孫(세세손손)[예문]그 뒤 광주 이씨와 영양 최씨는 대대손손 세의(世誼-조상 때부터 사귀어 온 정의)를 지켜 흡사 한 집안 사람들 같이 지내왔으며, 묘삿날도 한 날로 정하여 두 집이 같이 행사(行祀)한다 하니, 오늘날 같이 메마른 인정 세태에 붕우유신의 큰 귀감이 되고 있다.<전통문화의 맥-경북교육위>
■ 대명천지 大明天地[클 대/밝을 명/하늘 천/땅 지]
☞매우 밝은 세상. 크게 밝은 하늘과 땅.
[예문1]바야흐로 욕이 대명천지를 활보하고 있다. 욕이야 지천에 흔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쓰기 어려운 음지의 거류민. 그런데 어느샌가 버젓이 활자화된 형태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주된 마당은 사이버 공간. 하지만 최근에는 욕에 대한 사전이 발간되는 등 인쇄매체에서도 욕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이 욕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낸 것일까.
■ 대서특필 大書特筆[클 대/글 서/ 특별할 특/붓 필]
☞뚜렷이 드러나게 큰 글씨로 쓰다.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하다.
■ 대우탄금 對牛彈琴[대할 대/소 우/튀길 탄/거문고 금]
☞ 소에게 거문고를 들려준다-어리석은 사람에게 도리를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유]마이동풍[馬耳東風]/우이독경[牛耳讀經][출전]『弘明集』[내용] 후한(後漢) 말기에 모융(牟融)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불교학에 밝았는데, 유학자에게 불교를 설명할 때는 불전(佛典)이 아니라 유학의 《시경》《서경》등의 경서를 인용했다. 유학자가 이를 책하자 모융이 말했다.
"너희는 불전을 읽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잘 알고 있는 경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공명의(公明儀)의 고사를 인용했다.
"노(魯)나라의 공명의라고 하는 어진 사람이 하루는 소를 향해 거문고를 켜주었다. 그런데 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풀을 먹고 있었다. 소가 못 들은 것은 아니다. 청각(淸角)이라는 고상한 곡조는 소 귀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기와 등애의 울음소리와 젖을 먹고 있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그러자 소는 꼬리를 흔들면서 발굽 소리를 내며 걸어다니고, 귀를 세우고 그 소리를 다소곳이 들었다. 이는 소의 마음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시경》을 인용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유학자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모융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대의멸친 大義滅親 [클 대/옳을 의/없앨 멸/가까울 친,겨레친] ?
☞큰 의리를 위해서는 혈육의 친함도 저버린다. 정의를 위해서는 사적인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동]滅私奉公(멸사봉공) : 사사로운 일을 저버리고 공적인 일을 힘써 받는다/枉尺直尋(왕척직심) : 짧은 것은 굽히고 긴 것을 폄. 小를 희생시켜 大를 살림.(尺:길이의 단 위. 10촌을 말함. 尋:두 팔을 벌린 길이 7∼8尺정도.) **굽을 왕/깊을 심/받들 봉
■ 대천지수 戴天之讐[일 대/하늘 천/어조사 지/원수 수]
☞함께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
임금이나 어버이에 대한 원수는 하늘을 함께 하고 살지 않는다.
[동]不共戴天之讐(불공대천지수). 不共戴天(불공대천). 徹天之怨(철천지원).殺父之讐(살부지수). 貿首之讐(무수지수) : 아버지를 죽인 원수.
[출전]『禮記』곡예편(曲禮篇)[내용] 아버지의 원수는 함께 하늘을 이지 못하고 형제의 원수는 병기를 돌이키지 않고 친구의 원수는 나라를 같이 하지 않는다.
[원문]父之讐는 不與共戴天하고 兄弟之讐는 不反兵하며 交遊之讐는 不同國이라. [참고]"내 이제야 남의 아비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겠노라. 남의 아비를 죽이면 남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제 아비나 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니라."『孟子』 (盡心篇)
■ 도견상부 道見桑婦[길 도/볼 견/뽕나무 상/아녀자 부]
☞길에서 뽕나무를 보고 여자와 말을 한다는 뜻으로, 하고 싶은대로 일시적인 이익을 구하려다가 결국에는 기존에 갖고 있던 것까지 모두 잃게 됨을 비유함.
지나친 욕심을 경계함
[유]獲山猪 失家豚[획산저 실가돈]산돼지 잡으려다 집돼지를 잃는다奔獐顧 放獲兎[분장고 방획토]달리는 노루를 돌아보면 잡았던 토끼를 놓친다[출전]『열자(列子)』설부(說符) 편[내용] 진문공은 나라 밖으로 나가 제후들을 모아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그때 공자 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웃었다.
공은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웃는 것이오?" 서가 말했다. "신이 웃는 것은, 이웃 사람 중에 그 아내가 私家로 가는 것을 배웅하는 자가 있었는데, 길에서 뽕나무를 잡고 어떤 여자를 보고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아내를 돌아보니, 그 아내 역시 손짓하여 부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신은 이 남자의 일을 생각하고 웃은 것입니다."
문공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위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멈추고 돌아왔다. 문공이 미처 돌아오지 못했을 때, 진나라의 북쪽을 침략하는 자가 있었다.
■ 도남 圖南[그림,꾀할 도/남쪽 남]
☞어느 다른 지역으로 가서 큰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을 이름.
[유]鵬程萬里(붕정만리) [출전]『莊子』[내용] "북해(北海)에 곤(鯤)이라는 고기가 있다.
그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고기가 화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한번 날아 오르게 되면 그 날개는 하늘을 덮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새는 바다에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 한다. 남쪽 바다는 천연의 못이다."
<제해(齊諧)>라는 것은 이상한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 이렇게 씌어 있다.
"붕새가 남해로 옮겨가려는 때는 날개가 물위를 치는 것이 삼천리에 미치고,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날아 오르는 것이 구만리에 이른다. 여섯 달을 계속 난 다음에야 쉰다"고 했다. 여기에서 "도남" 이니 "붕정만리" 니 "붕익" 이니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 도로무익 徒勞無益 [다만 도/수고로울 로/없을 무/이로울 익] ?
☞헛되이 수고만 하고 보람이 없다.
[동]徒勞無功/도로阿彌陀佛(아미타불)/萬事休意(만사휴의)/勞而無功[참고1]
도로아미타불은 옛날 어떤 고을로 동냥을 갔던 젊은 중이 아리따운 처녀를 보고 그만 상사병에 걸렸다. 중은 번민 끝에 처녀에게 청혼을 했다. 처녀는 10년 동안 한방에서 동거하되 손목도 잡지 말고 바라만 보고 친구처럼 지내면 10년 후에는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동거가 시작되어 어언 내일이면 10년이 되는 날 밤, 중은 사랑스런 마음에 그만 하루를 못 참고 처녀의 손을 잡으니, 깜짝 놀란 처녀는 파랑새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이리하여 10년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즉 순간의 실수로 애쓴 일이 소용없이 되어 처음과 같음을 일컫는다.[참고2]이 말의 진의는 '공부(工夫)와 '도로(徒勞)'와 '아미타불(阿彌陀佛)'에 있다.공부는 학문과 기술 등을 배우고, 배운 것을 현실에 익힘을 말한다.
결국 공부란 인간이 되는 노력을 말한다. 절에서 '공부를 한다'하면참선(參禪) 또는 기도(祈禱)함을 뜻한다. 도로(徒努)란 헛수고를 말한다.
보람없이 애만 쓰는 것을 도로라고 한다. 과대망상이나 신경과민도 도로에 포함된다.
도로와 관련된 옛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신라시대의 큰스님으로 경흥(憬興)이라는 왕사(王師)가 계셨다.
스님께서 심한 두통병에 걸렸다. 백약으로 고쳐도 치유가 힘들었다.
어느날 노파가 나타나서 스님의 병을 '도로병(徒努病)'이라고 진단했다.
쓸데없는 일에 골머리를 쓰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도로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실컷 웃으면 될 것이라며 노파는 얼굴을 여러 모습으로 바꾸며 경흥 스님을 웃겼다. 노파와 함께 실컷 웃은 다음부터경흥 스님의 도로병은 완치되었다고 한다.
노파가 꾸며낸 11가지의 얼굴표정은 11면 관세음보살의 표정과 같았다고 한다.
노파는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님이다. 이 땅의 서쪽으로 10만억 국토(國土)에 아미타불의 정토세계(淨土世界)가 있다. 서방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 아미타불과 함께 사는 것을 발원(發願)하고 쉴 사이 없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을 염불(念佛)이 라고 한다.
염불과 관련하여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라는 가르침이 있다.
자성(自性)이 아미타불이고 정토(淨土)는 마음속에 있다는 깊은 가르침이 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햇수다. 십년 동안 공부를 하면 자성속에 있는 아미타불과 만날 수 있고 마음속에 있는 극락정토(極樂淨土)속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다.
십 년 공부가 무너지기는 매우 간단하다. 한 번의 도둑질과 한 번의 싸움과 한 번의 우둔한 판단은 이내 아귀(餓鬼),아수라(阿修羅),축생(畜生)에 떨어지고 만다.
근래 십년공부가 도로로 떨어지는 짓들을 흔히 볼 수 있다.[참고3]만사휴의(萬事休矣)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보았지만 달리 해결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여 모든 일이 헛수고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로,『송사(宋史)』의「高氏世家」에서 비롯된 말로 남평(南平)이라는 나라의 보훈(保勛)이라는 임금은 어렸을 때 편애를 받고 자란 영향으로, 항상 웃고 살았다. 당시 송나라가 강성해지고 있던 시기였기에 국력 강화에 힘을 기울여야 함에도 만사 걱정이 없는 태도로 일관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남평 사람들은 만사휴의(萬事携矣:모든 것이 끝났다.)요, 이제 그에게 기대를 걸어 볼 수 없으니 남평은 곧 망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 도룡기 屠龍技[죽일 도/용 룡/재주 기]
☞용을 죽이는 재능이라는 말로, 세상에서 쓸모 없는 명기를 뜻한다.
[출전]『장자(莊子)』 열어구 편[내용]"열어구"는 인위적인 지를 떠나 무위 자연의 신지를 터득하는 것에 관한 내용으로, 모두 10편의 독립된 단장으로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장자는 천지만물의 근원인 지식을 떠나 도 그 자체에 몰입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장자는 지인과 소인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도를 알기는 쉬우나 말하지 않기란 어렵다. 도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음은 하늘을 좇는 것이고, 알면서 말하는 것은 인위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옛날의 지인들은 하늘을 좇고 인위로 가지 않았다.
전국시대 주평만이라는 자는 용을 죽이는 방법을 지리익에게서 배우느라 천금이나 되는 가산을 탕진하여 삼 년 만에 그 재주를 이어받았지만, 그 재주를 쓸 데가 없었다.
성인은 필연적인 일에 임할 때에도 그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감정의 다툼이 많고 그런 다툼을 그대로 행하니까 밖에서 찾는 데가 있게 된다.
마음속의 다툼을 믿고 행동하면 파멸로 이르게 마련이다."
여기서 주평만이라는 자는 천금이나 되는 많은 돈을 주고 용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지만 그 어느 곳에도 쓸데가 없었다는 것은 세속적인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어 대도를 달관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도리불언 하자성혜 桃李不言 下自成蹊[복숭아 도/오얏 리/이룰 성/좁은 길 혜]
☞도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므로 저절로 길이 생김. 덕 있는 자는 잠차코 있어도 그 덕을 사모하여 사람들이 따른다.?
[출전]『史記』 李將軍列傳[내용]전한(前漢)의 장군 이광(李廣)은 농서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예, 특히 활쏘기에 뛰어나 기원전 166년에 흉노가 침입해 왔을 때 그 격퇴에 힘썼다. 그 후로 자주 전공을 세워 북쪽 변경이 태수가 되었다.?
흉노는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이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감히 침공해 오지 못했다. 그의 용병은 알기 쉬웠으며, 부하를 사랑하였으므로 모두가 기꺼이 그의 지휘에 따랐다. 행군 중 물이나 풀이 있으면 부대를 쉬게 하고, 소수의 정찰병을 보낼 뿐이었다.?
기원전 121년, 4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했을 때 4만의 흉노군에게 포위당했다. 그는 부하에게 명하여 원형의 진을 만들게 하고 자기도 강궁을 가지고 적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이 떨어져 가므로 부하들은 당황했지만, 그는 침착하게 적의 부장을 쏘아 쓰러뜨렸기 때문에 흉노는 두려워서 근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진영을 굳게 지켜 원군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선전했으나 부하를 많이 잃어 후(候)에 봉해지지 않았다. 뒤에 대장군 위청(衛靑), 곽거병(藿去病)이 출진할 때 종군할 것을 원했으나 무제(武帝)는 그의 노령을 염려했다.
그러나 재삼 요청하므로 무제는 하는 수 없이 이광을 위청의 한 부장(部將) 으로 임명했다. 위청은 명령대로 그를 우장군으로 종군케하고, 동쪽 길을 가게 하여 막북(漠北)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광은 도중에 길을 잃는 등 애로가 많아 기한 안에 당도하지 못했다. 흉노에게 애먹고 있던 위청은 이광을 의심하고, 무제에게 그를 벌하라고 상주했다. 그는 모든 죄는 자기에게 있다며 부하를 감싸고 병사로 돌아와?
"60이 넘어 심판을 받는 치욕은 견딜 수 없다"며 자결했다.? 그의 죽음을 듣고 장병은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 라고 그를 절찬했다.?
■ 도방고리 道傍苦李[길 도/곁 방/쓸 고/오얏 리]
☞길가에 있는 오얏은 쓰다는 말로, 많은 사람이 무시하는 것은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쓸 데가 없어 버림받는다. 모두가 버리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출전]『世說』 [내용]진(晉)나라의 왕융(王戎)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그때 길가의 오얏나무에 가지가 휘어지게 많은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따려고 앞을 다투어 달려갔다. 그런데 왕융 혼자만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물었다.?
"왜 너는 따러 가지 않느냐?"? ?"길가에 있는데, 저렇게 열매가 많이 매달려 있는 것은 틀림없이 써서 먹지 못할 자두임이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따보니 과연 왕융이 말한 대로 먹을 수 없는 자두였다.
[주] 왕융: 234~305년. 진(晉)의 정치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노장 사상을 선호하고 유유자적하며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 도불습유 道不拾遺 [길 도/아니 불/주울 습 / 잃을 유]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뜻.
곧 법이 엄격하게 시행되어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자가 없을 만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말로서, 형벌이 엄해서 백성들이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출전]『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내용]秦(진)은 일찍부터 法家(법가)를 등용해 부국강병을 이룬 나라이다. 孝公(효공)이 상앙을 등용해 두 번에 걸쳐 變法(변법)을 실시하자 秦은 반석위레 서게 됐다.
상앙이 사용했던 방법은 간단했다. 가혹하리만큼 엄한 벌을 세워 백성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왕족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과연 그가 헌법의 초안을 올리자 효공(孝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대로 했다가는 한 사람도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법이 공포되자 아우성이었다. 혹자는 칭찬하고, 혹자는 비난했다. 상앙은 둘 다 잡아다 엄벌에 처했다. 이때부터 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해놓고 법을 시행하자 백성들은 손가락 하나로 움직였으며, 백성중 감히 法을 어기는 者는 아무도 없었다. 法을 시행한지 10년,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으며 집집마다 넉넉했고 전쟁에 용감했으며 나라는 크게 흥성했다.
당시의 사회상황을 사마천은 [史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었으며(道不拾遺), 산에는 도적이 사라졌다(山無盜賊)."
[원문] 威王曰ː"寡人之所以爲寶與王異. 吾臣有檀子者,使守南城, 則楚人不敢爲寇東取, 泗上十二諸侯皆來朝. 吾臣有 子者, 使守高唐, 則趙人不敢東漁於河. 吾吏有黔夫者, 使守徐州, 則燕人祭北門, 趙人祭西門, 徙而從者七千餘家. 吾臣有種首者, 使備盜賊, 則道不拾遺. 將以照千里,? 豈特十二乘哉!" 梁惠王慙, 不 而去.
■ 도삼이사 桃三李四[복숭아 도/석 삼/오얏 리/넉 사]
☞복숭아는 3년 오얏나무는 4년 길러야 수확함--무슨 일이든 이루어지는데는 시간이 필요함.
■ 도시 倒屎[거꾸로 도/똥,신발 시]
☞신발을 거꾸로 신는다는 말로, 대단히 반가워하는 것을 형용한 말
[출전]『'삼국지(三國誌)』위서(僞書) 왕찬전(王粲傳)[내용]왕찬의 자는 중선이고, 산양군 고평현 사람이다. 증조부 왕공과 조부 왕창은 모두 한대에 삼공을 지냈다. 부친 왕겸은 대장군 하진의 장사였다. 왕찬은 재능이 뛰어나 바둑을 두던 바둑판을 흩뜨려도 금방 원상태로 복기할 수 있었다.
헌제가 잠시 서쪽으로 옮겼을 때, 왕찬은 장안으로 이주하였다. 그 당시 좌중랑장이었던 채옹은 재능과 학문이 탁월하여 조정에서의 관직도 높았고 귀한 신분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은 항상 그의 집으로 향해 달려가는 수레로 가득 메웠으며, 언제나 집안은 빈객으로 가득했다. 채옹은 왕찬이 문밖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가 영접하였다. 왕찬이 들어오자 빈객들은 그가 나이가 어리고, 용모도 왜소하였으므로 모두 매우 놀랐는데, 채옹이 말했다.
"이 사람은 왕공의 손자로서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으며, 나는 그만 못하오. 우리 집에 있는 서적과 문학 작품은 모두 그에게 주어야 하오."? 채옹의 안목은 적중했다. 그러나 왕찬은 빼어난 재능으로 인하여 피살되고 말았다. '도시'와 같은 말로는 '시리', '도극' 등이 있다.
■ 도외시 度外視[법도 도/바깥 외/볼 시]
☞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함. 문제 삼지 않음. 불문에 붙임.
[유] 치지도외(置之度外). [반] 문제시(問題視).[출전]『後漢書』〈光武記〉[내용]후한의 시조 광무제(光武帝)때의 일이다. 광무제 유수(劉秀)는 한(漢:前漢)나라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현(劉玄)을 세워 황제로 삼고 한나라를 재흥했다. 대사마(大司馬)가 된 유수는 그 후 동마(銅馬) 적미(赤眉) 등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으나 천하 통일에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윽고 제(齊) 땅과 강회(江淮) 땅이 평정되자 중원(中原)은 거의 광무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벽지인 진(秦) 땅에 웅거하는 외효( )와 역시 산간오지인 촉(蜀) 땅의 성도(成都)에 거점을 둔 공손술(公孫述)만은 항복해 오지 않았다. 중신들은 계속 이 두 반군의 토벌을 진언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이렇게 말하며 듣지 않았다.
"이미 중원은 평정(平定)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문제시할 것 없소[度外視]."광무제는 그간 함께 많은 고생을 한 병사들을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쉬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원문]關東悉平. 帝積苦兵閒, 以 子內侍,? 公孫述遠據邊 , 乃謂諸將曰: 且當置此兩子於度外耳?
■ 도원결의 桃園結義[복숭아 도/동산 원/맺을 결/의리 의] ?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욕을 버리고 목적을 향해 합심할 것을 결의하다.
[동]結義兄弟(결의형제) : 의형제를 맺음[출전]『삼국지연의』
[내용] : 後漢 말기 환관들의 횡포가 몹시 심하여 정사가 혼란했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피폐함이 극에 달했다. 또한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 국중이 시끄러울 때 유비(劉備)는 선조의 왕조를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고「도원 안에서 세 사람이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생각건데 유비 관우 장비는 비록 성씨는 다르나 이미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곤궁함을 구제하고 위태로움을 부축하여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리라.
天地神明께 제사하고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죽기로 맹세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원문] 三人이 焚香再拜而誓曰 念컨데 劉備 關羽 張飛는 雖異姓이나 旣結爲兄弟하니 則同心協力하여 救困扶危하여 上報國家하고 下安藜庶라.
** 巾(두건 건) 焚(불사를 분) 誓(맹세할 서) 協(합할 협) 扶(붙잡을 부) 藜(검을 려) 庶(뭇 서) [참고] 死生契簧(사생계활) : 生死를 같이 함. /意氣投合(의기투합) : 서로 마음을 합함. /一心同體(일심동체) : 한 마음 한 몸. 즉 서로 행동을 같이함.
■ 도원경설 음무난멸 盜寃竟雪 淫誣難滅[도둑 도/원통할 원/마침내 경/씻을 설/음탕할 음/무고할 무/어려울 난/없앨 멸]
☞도둑의 원죄는 끝내 눈처럼 할 수 있지만, 음탕한 꾸밈은 없애기가 어렵다.
도둑의 누명은 장물이라는 물증이 있기 때문에 벗을 수 있으나 화냥의 누명은 흔적이 없으므로 밝히기 어렵다.
[속담]도둑의 때는 벗어도 화냥의 때는 못 벗는다.<耳談續纂>
■ 도처춘풍 到處春風[이를 도/곳 처/봄 춘/바람 풍]
☞이르는 곳마다 봄바람. 즉 좋은 얼굴로 남을 대하여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려고 처신하는 사람.
가는 곳마다 기분 좋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