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양성교론 제9권
현양성교론_2. 섭정의품_7. 거룩한 행과 최상의 교법 등(3)
7.5. 외도 이론[異論]의 종류(1)
‘외도 이론[異論]의 많은 종류’란 열여섯 가지의 외도(外道) 이론을 말한다.
무엇이 열여섯 가지인가?
온타남(嗢拕南)에서 말한다.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
드러남과, 과거 미래가 있다함이며,
자아, 상주함, 전생에 지은 원인,
자재 등, 해치는 법,
한계가 있음ㆍ한계가 없음, 속이고 어지럽힘,
원인 없음이라 보는 것, 단멸, 공(空),
최승ㆍ청정ㆍ길상이라 계탁함을
열여섯 외도 이론이라 이름하네.
논하여 말한다.
[열여섯 가지 외도 이론]
‘열여섯 가지 외도 이론’이란,
첫째는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는 이론[因中有果論]이고,
둘째는 조건으로부터 현현한다는 이론[從緣顯了論]이며,
셋째는 과거ㆍ미래가 실유라는 이론[去來實有論]이고,
넷째는 자아를 계탁하는 이론[計我論]이며,
다섯째는 상주함이라고 계탁하는 이론[計常論]이고,
여섯째는 전생에 지은 원인이라는 이론[宿作因論]이며,
일곱째는 자재 등 조물주라는 이론[自在等作者論]이고,
여덟째는 해치는 것을 바른 법으로 삼는 이론[害爲正法論]이며,
아홉째는 한계 있음과 한계 없음이라는 이론[有邊無邊論]이고,
열째는 죽지 않음이라고 속이고 어지럽히는 이론[不死矯亂論]이며,
열한째는 원인이 없다는 견해의 이론[無因見論]이고,
열두째는 단멸이라는 견해의 이론[斷見論]이며,
열셋째는 공이라는 견해의 이론[空見論]이고,
열넷째는 최승을 망령되게 계탁하는 이론[妄計最勝論]이며,
열다섯째는 청정을 망령되게 계탁하는 이론[妄計淸淨論]이고,
열여섯째는 길상을 망령되게 계탁하는 이론[妄計吉祥論]이다.
1)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는 이론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는 이론[因中有果論]’)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되 “원인 속에는 항상 결과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라고 하는 경우이다.
우중외도(雨衆外道)가 이와 같은 계탁(計度)을 짓는다.
【문】 무슨 인연으로 그 여러 외도들은 온갖 원인에 대해서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여 결과가 있다고 밝혀 말하는가?
【답】 교법[敎]과 논리[理]에 의거해서이다
‘교법’이란 그들 이전의 스승이 지은 교장(敎藏)을 말하며, 들은 바에 따라 전수하여 전전히 지금에 이르도록 “원인 속에는 이미 결과가 있다.”고 널리 말한다.
‘논리’란 다음과 같다.
곧 그 사문과 바라문이 성품 됨됨이가 심사(尋思)하고 성품 됨됨이가 관찰하여 심사의 경지에 머물고,
스스로 판별하는 경지에 머물며,
범부 중생의 경지에 머물고,
사유에 따라 관찰하고 행하는 경지에 머물러서,
그가 이와 같이 생각하되,
“만일 그 자체로부터 이 자체가 생기게 되면, ‘그것은 바로 이것의 원인이며 그 밖의 것이 아닌 것’을 온갖 세간이 함께 알고 함께 건립한다.
또한 모든 세간이 이 결과를 구하려면, 오직 이 원인만을 취하고 그 밖의 원인을 취하지 않는다.
또한 곧 이러저러한 사물들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공력을 가하여 영위하고 조작하는 것이며, 그 밖의 사물에서가 아니다.
또한 만약 그 결과가 곧 그것으로부터 생겨난다면, 그 밖의 것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원인 속에 결정적으로 이미 결과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일체가 바로 일체의 원인이라고 건립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마땅히 낱낱이 결과를 구해서 일체의 원인을 취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마땅히 온갖 사물에 대해서 공력을 가하여 영위하고 조작하는 것이 하나의 결과를 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마땅히 일체로부터 일체의 결과가 생겨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건립하기 때문이고, 취하기 때문이며, 사물을 만들기 때문이고, 생겨나기 때문에, 그들은 원인 속에 항상 결과의 성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의 생각에 따라 대답하시오.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양상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만약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곧 결정적인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자체[體]가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양상이 차별이 없기 때문에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른 양상이라면, 그대들의 생각에 어떠한가?
원인 속에 결과의 자체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양상이 되는가, 이미 생겨난 양상이 되는가?
만약 아직 생겨나지 않은 양상이라면, 그 원인 속에 결과가 오히려 아직 생겨나지 않았는데,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이미 생겨난 양상이라면, 곧 결과의 자체가 이미 생겨났는데, 다시 원인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원인 속에는 이전부터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원인이 있기 때문에 조건[緣]을 기다려서 생겨나는 것이다.
저 형상이 있는 법은 형상이 있는 법 가운데 다섯 가지 양상에 의거해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첫째는 처소에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되나니, 항아리 속의 물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둘째는 의지처에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되나니, 안근 중의 안식(眼識)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셋째는 곧 자상(自相)에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되나니, 자체에 의거한 것이지 비교해서 결정함에 의거한 것이 아닌 경우이다.
넷째는 스스로 짓는 업에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다섯째는 원인의 변화로 인하여 결과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거나, 혹은 조건의 변화로 인하여 결과의 변화가 있을 수 있는 경우이다.
이런 까닭에 항상 언제나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뜻에 의거해서, 그들이 건립한 이론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주장이 된다.
말하자면 ‘다르지 않은 양상’에 의해서이고,
‘다른 양상’에 의해서이며,
‘생겨나지 않은 양상’에 의해서이고,
‘생겨난 양상’에 의해서 도리에 맞지 않는다.
2) 조건으로부터 현현한다는 이론
‘조건으로부터 현현한다는 이론[從緣顯了論]’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되,
“일체의 모든 법의 자체는 스스로 본래부터 있으며 여러 조건[緣]을 따라 현현하는 것이지, 조건에서 생겨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는 경우이다.
곧 인중유과론자(因中有果論者)와 성상론자(聲相論者)가 이와 같은 계탁을 짓는다.
【문】 무슨 인연 때문에 인중유과론자는 모든 원인 속에 이미 결과의 성품이 있으며 조건으로부터 현현한다고 보는가?
【답】 교법[敎]과 논리[理]에 의거해서이다.
‘교법’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성품 됨됨이가 심사(尋思)하고 성품 됨됨이가 관찰하여.....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그가 이와 같이 생각하되,
“결과가 먼저 있고 다시 원인을 따라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런데 공력을 가하지 않고서 결과를 이루게 된 것은 아니다.
다시 어떤 조건으로써 공력을 짓는가“
어찌 오직 현현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망령된 사유를 짓고서, ‘조건을 따라 현현한다는 이론’을 말하게 된 것이다.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은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장애하는 조건이 없어서 장애하는 것인가,
장애하는 조건이 있어서 장애하는 것인가?
만약 ‘없음’이라면, 장애하는 조건이 없는데도 장애가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있음’이라면, 결과에 속하는 원인이 무슨 까닭에 장애하지 않는가?
동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둠이 항아리 속의 물을 장애하고, 또한 능히 항아리까지 장애함과 같다.
만약 ‘역시 장애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또한 마땅히 현현해야 한다.
함께 장애하는 것인데도 다만 원인 속에 먼저 있었던 결과의 성품만 현현하고 원인을 현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있음의 성품이 바로 장애하는 조건이다.”라고 말할 것인가,
“결과의 성품이 바로 장애하는 조건이다.”라고 말할 것인가?
만약 ‘있음의 성품이 바로 장애하는 조건’이라면, 이것은 곧 있음의 성품이 항상 현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원인이 역시 있음이거늘 무슨 까닭에 장애하는 조건이 되지 않는가?
만일 ‘결과의 성품이 바로 장애하는 조건’이라면,
이와 같이 하나의 법이 또한 원인이기도 하고 또한 결과이기도 하므로,
마치 싹이 바로 씨앗이고 열매가 바로 줄기[莖] 등과 같을 것이니,
원인과 결과가 곧 하나의 법으로서 역시 현현하기도 하고 현현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지금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현현함이 본래 법과 더불어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저 본래 있는 법이 항상 현현하는 것이니, 이미 현현했는데 다시 현현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 현현은 원인이 없는 것인가, 원인이 있는 것인가?
만약 원인이 없는 것이라면, 원인이 없이 현현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 결과의 성품이 현현할 수 있음은 원인의 성품이 아니니, 현현하지 않는 원인이 능히 결과를 현현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장애하는 조건이 없음’에 의해서이고,
‘장애하는 조건이 있음’에 의해서이며,
‘있음의 양상’에 의해서이고,
‘결과의 양상’에 의해서이며,
‘현현함이 동일한 것’에 의해서이고,
‘현현함이 다른 것’에 의해서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만약 “법의 성품이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없음의 양상이고,
만약 “법의 성품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있음의 양상이다.
만약 성품이 없는 것이라면 현현할 수 없으며,
만일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곧 현현할 수 있을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제 간추려 말하겠다.
비록 참으로 있는 것이지만 형상을 취할 수 없고,
혹은 멀리 있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네 가지 장애하는 원인에게 장애 받음으로 인하여 취할 수 없고,
혹은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고,
혹은 감관이 훼손ㆍ파괴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저 상응하는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은,
마치 ‘원인 속에 결과가 있으며 조건을 따라 현현한다는 이론’과 같아서 도리에 맞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성상론(聲相論)도 역시 그러하다. 이 중에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외도 성론(聲論)의 논사들은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되,
“소리의 양상은 본래부터 있어서 생겨남도 없고 소멸도 없다.
그러나 자주 펴고 토설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현현하게 되는데, 소리 자체는 항상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조건을 따라 현현한다는 이론’은 도리에 합당하지 않는 이론이다.
3) 과거ㆍ미래가 참으로 있다는 이론
‘과거ㆍ미래가 참으로 있다는 이론[去來實有論]’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혹은 이 법에 있어서 바르지 못한 사유로 인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되,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어서 자상(自相)이 성취되는 것은 마치 현재와 같아서 실유(實有)이지 가유(假有)가 아니다”라고 하는 경우이다.
【문】 무슨 인연 때문에 그들은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는가?
【답】 교법[敎]과 논리[理]에 의거해서이다. ‘교법’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또한 이 법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는 사유로 인용된 경전의 가르침이 있다.
경전에서 “일체의 존재라는 것은 12처(處)를 말함이니, 이것은 십이처의 자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박가범께서 “과거의 업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경우이다.
또한 경전에서 “과거의 물질이 있고, 미래의 물질이 있으며, 나아가서는 식(識)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 그것이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성품 됨됨이가 심사(尋思)하고 성품 됨됨이가 관찰하여.....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그가 이와 같이 생각하되,
“만약 법의 자상(自相)이 이 법에 안주한다면 진실로 이것은 있음일 것이다.
이것이 만일 미래에 없는 것이라면 그때는 마땅히 아직 자상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만약 과거에 없는 것이라면 그때는 마땅히 자상을 잃을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모든 법은 자상이 마땅히 성취되지 못할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법은 마땅히 성품이 진실이 아닐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도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여,
‘과거와 미래의 체성과 양상은 실유(實有)’라고 한 것이다.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과거ㆍ미래의 두 가지 양상이 현재의 양상과 더불어 다르지 않은 양상이 되는가, 다른 양상이 되는가?
만약 다르지 않은 양상이라면, 삼세의 양상을 건립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다른 양상이라면, 체성과 양상이 실유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늘 말하기를,
“자기 뜻에 하고자 한 것은 삼세의 법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상주하는 양상이 되는가, 무상한 양상이 되는가?
만약 상주하는 양상이라면, 삼세에 떨어진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무상한 양상이라면, 삼세 중에서 항상 실유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늘 “자기 뜻에 하고자 한 바이다.”라고 말하는데,
미래법이 와서 현재세에 이른다고 계탁하는가,
미래에 죽어 없어지는 것이 현재세를 낸다고 계탁하는가?
법이 미래에 머물고 이것이 조건[緣]이 됨으로써 현재세를 낸다고 계탁하는가?
본래는 짓는 작용이 없었는데 지금에 짓는 작용이 있다고 계탁하는가?
본래는 양상이 원만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양상이 원만하다고 계탁하는가?
본래의 양상이 다르고 지금의 양상이 다르다고 계탁하는가?
미래에 현재분의 양상이 있다고 계탁하는가?
만약 “곧 미래법이 와서 현재세에 이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마땅히 방소(方所)가 있을 것이고,
또한 미래와 현재가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마땅히 상주함일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미래가 죽어 없어져서 현재를 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미래법이 지금에 생겨나지 않는 것이고,
현재법도 본래 지금에 생겨남이 없는 것이며,
또한 미래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는데 죽어 없어짐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법이 미래에 머물고 이것이 조건이 됨으로써 현재세를 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고,
또한 마땅히 본래 없는 것이 생겨남은 미래법이 생겨남이 아닐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본래는 짓는 작용이 없었는데 지금에 짓는 작용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본래 있었고, 지금 있으며, 곧 있는 것이니,
앞에서 말한 과실과 같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이 짓는 작용이 그대 생각에는 어떠한가?
저 본래 법과 더불어 다른 양상이 되는가, 다르지 않은 양상이 되는가?
만약 다른 양상이라면, 이 짓는 작용의 양상은 미래에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다르지 않은 양상이라면, 본래 짓는 작용이 없었는데 지금에 짓는 작용이 있다고 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짓는 작용이 없다.”고 말하면, 이러한 과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원만하지 않은 양상ㆍ다른 양상ㆍ미래분(未來分)의 양상도 역시 그러하다.
이 중에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또한 자체가 잡란(雜亂)하다는 과실이 있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미래가 현재를 향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현재가 과거로 향해가는 것고 그 상응하는 바대로 과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앞에서 계탁한 바 모든 인연과 말했던 것이 논파되는 도리와 같은 것들이다.
이상과 같이 ‘제 모양[自相]’에 의해서이고, ‘같은 모양[共相]’에 의해서이며,
‘오는 것’에 의해서이고, ‘죽어 없어짐’에 의해서이며,
‘생겨남’에 의해서이고, ‘짓는 작용’에 의해서이며,
‘원만상’에 의해서이고, ‘다른 모양’에 의해서이며,
‘미래분’에 의해서 ‘과거ㆍ미래가 실유라는 이론[過去未來實有論]’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논파하고 나니,
다시 힐난하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만약 과거ㆍ미래가 無라면, 어떻게 無를 반연하여 지각[覺]이 나오는 것이 있는가?
만약 無를 반연하여 지각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찌 교법에 위배되는 과실이 없겠는가?
마치 온갖 있음이란 12처(處)를 말한 것이라고 말한 예와 같다.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세간에서 無를 취하는 지각이 일어나는가, 일어나지 않는가?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면, 능히 무아를 취하고 토끼뿔ㆍ석녀(石女)의 아이 등의 지각이 모두 無이어야 하므로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박가범께서 “아첨이 없는 나의 모든 성문(聲聞)들은 내가 말한 바대로 바르게 수행할 때에 有이면 有라고 알고 無이면 無라고 안다.”고 말씀하신 이와 같은 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대는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이 취함에 지각이 없고 짓는 것에 행함이 있는가, 짓는 것에 행함이 없는가?
만약 짓는 것에 행함이 있다면, 없음을 취하는 지각이므로 짓는 것에 행함이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짓는 것에 행함이 없다면, 이것은 행함이 없는 지각이다.
그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이 있음[有事]에 반연하여 나오는 것인가,
일이 없음[無事]을 반연하여 나오는 것인가?
만약 有事를 반연하여 나온다면, 행함이 없는 지각[覺]이 有事를 반연하여 나온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無事를 반연하여 나온다면 無를 반연하는 覺이란 있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비록 “온갖 있음[一切有]이란 십이처를 가리킨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있음의 법[有法]에 대해서 밀의로 있음의 양상[有相]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無法에 대해서 밀의로 無相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有相의 법이면 능히 有相을 지니고,
만일 無相의 법이면 능히 無相을 지닌다.
그러므로 모두 법이라 이름하고, 모두 有라고 이름한다.
만약 그것과 다르다면 모든 수행인들이 다만 有만 알고 無를 알지 못하므로 마땅히 끊임없이 소지법(所知法)을 관찰함이 아닐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비록 “과거의 업이 있고, 이 업으로 인하여 중생이 손해(損害)가 있음을 받게 되고, 손해가 없음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지만,
‘받음’이라는 이것도 역시 그 습기에 의거하여 “그 법은 있다.”고 밀의로 가설한 것이다.
말하자면 온갖 지어감[諸行] 중에서 일찍이 청정한 업과 부정한 업이 생겨남과 소멸이 있었고,
이 인연으로 인하여 그 지어감 [行]이 뛰어나게 다른 모습으로 계속하면서 일어나니,
이것을 습기라고 이름한다.
이 상속에 포섭되는 습기로 말미암아, 좋아할만한 결과와 좋아할만한 것이 아닌 결과가 생겨난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과실이 없고, 그대들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비록 “과거의 물질이 있고, 미래의 물질이 있으며, 현재의 물질이 있다. 이와 같이 나아가서는 식(識)고 역시 그러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이것도 역시 세 가지 행상(行相)에 의거해서 밀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인상(因相)ㆍ자상(自相)ㆍ과상(果相)이 그것이다.
그 인상에 의거해서 밀의로 “미래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 자상에 의거해서 밀의로 “현재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 과상에 의거해서 밀의로 “과거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또한 다시 “과거ㆍ미래가 실유의 양상이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마땅히 알지니, 미래에는 열두 가지 양상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원인에서 현현하는 양상이고,
둘째는 자체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양상이며,
셋째는 조건[緣]을 필요로 하는 양상이고,
넷째는 이미 생겨난 종류의 양상이며,
다섯째는 마땅히 생겨나는 법의 양상이고,
여섯째는 생겨나지 않은 법의 양상이며,
일곱째는 아직 잡염이 생겨나지 않은 양상이고,
여덟째는 아직 청정이 생겨나지 않은 양상이며,
아홉째는 마땅히 구할 수 있는 양상이고,
열째는 마땅히 구하는 것이 아닌 양상이며,
열한째는 마땅히 관찰해야 하는 양상이고,
열두째는 마땅히 관찰함이 아닌 양상이다.
마땅히 알지니, 현재에도 역시 열두 가지 양상이 있다.
첫째는 결과에서 현현하는 양상이고,
둘째는 자체가 이미 생겨난 양상이며,
셋째는 조건이 모인 양상이고,
넷째는 이미 생겨난 종류의 양상이며,
다섯째는 찰나(刹那)의 양상이고,
여섯째는 다시 생겨나지 않는 법의 양상이며,
일곱째는 현재 잡염의 양상이고,
여덟째는 현재 청정의 양상이며,
아홉째는 기쁘고 즐거워할만한 양상이고,
열째는 기쁘거나 즐거워할만한 것이 아닌 양상이며,
열한째는 마땅히 관찰해야 하는 양상이고,
열두째는 마땅히 관찰함이 아닌 양상이다.
마땅히 알지니, 과거에도 역시 열두 가지 양상이 있다.
첫째는 이미 원인이 지나간 양상이고,
둘째는 이미 조건이 지나간 양상이며,
셋째는 이미 결과가 지나간 양상이고,
넷째는 자체가 이미 파괴된 양상이며,
다섯째는 이미 소멸한 종류의 양상이고,
여섯째는 생겨나지 않은 법의 양상이며,
일곱째는 잡염이 고요히 그친 양상이고,
여덟째는 청정히 고요히 그친 양상이며,
아홉째는 마땅히 회고하여 그리워할만한 곳인 양상이고,
열째는 마땅히 회고하여 그리워하지 않을 곳인 양상이며,
열한째는 마땅히 관찰해야 하는 양상이고,
열두째는 마땅히 관찰함이 아닌 양상이다.
4) 자아를 계탁하는 이론
‘[計我論]’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되,
“자아가 있고, 살타(薩埵)가 있으며, 삭취취(數取趣)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실유(實有)이고 상주한다.”라고 하는 경우를 말한다.
여러 외도들이 이와 같은 계탁을 짓는다.
【문】 무슨 까닭에 그들 여러 외도는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는가?
【답】 교법과 논리에 의거해서이다.
‘교법’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치[理]’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성품 됨됨이가 찾아 생각(尋思)하며, 성품 됨됨이가 관찰함이니 널리 말한 것은 앞에서와 같다.
두 가지 이유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애초에 지각 작용을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살타(薩埵)라는 지각작용이 있게 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애초부터 이미 지각작용을 생각하고서 그 작용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무아(無我)라면 다섯 가지 사실[事]을 보고서 마땅히 다섯 가지의 자아라는 지각[覺]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첫째는 물질의 형태를 보고서는 오직 물질이라는 覺을 일으켜야 하며, 살타의 覺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순고락행(順苦樂行)을 보고서는 오직 느낌[受=三受]의 지각만을 일으켜야 하며, 수승함이나 열등함이라는 살타의 覺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셋째는 이미 명칭을 세우고 그 명칭에 상응하는 行을 보고서는 오직 想의 覺을 일으켜야 하며, 찰제리ㆍ바라문ㆍ폐사(吠舍)ㆍ술달라(戌達羅)ㆍ불수(佛授)ㆍ덕우(德友) 등이라는 살타의 覺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넷째는 청정ㆍ부정에 상응하는 行을 짓는 것을 보고서는 오직 그 행의 覺만을 일으켜야 하며, 어리석은 이ㆍ지혜로운 이라는 살타의 覺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는 경계에 식(識)이 좇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는 오직 마음이라는 覺을 일으켜야 하며, ‘나는 능히 본다’는 등의 살타의 覺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애초에 지각작용을 생각하지 않음[先不思覺]으로 인하여 이 다섯 가지 事에 대하여 오직 다섯 가지 살타의 覺을 일으키며, 온갖 行의 覺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이전에 思覺하지 않고 보고 나서 갑자기 살타의 覺을 일으킴이 있다.
이상과 같아서 결정적으로 실아(實我)가 있음을 안다.”
또한 그들은 이와 같이 생각한다.
“만약 무아라면 온갖 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는 지각[思覺]을 일으켜서 짓는 바가 있게 되어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내가 눈으로 온갖 빛깔ㆍ형태를 장차 볼 것이고, 온갖 빛깔ㆍ형태를 현재 보며, 온갖 빛깔ㆍ형태를 이미 보았다’이다.
혹은 다시 마음을 일으켜서,
‘나는 이와 같은 작용들을 보지 않을 것이다. 모두 자아의 覺이 행함으로써 앞잡이가 된다.
눈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귀ㆍ코ㆍ혀ㆍ몸ㆍ의지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선업을 짓는 것ㆍ선업을 그치는 것ㆍ불선업을 짓는 것ㆍ불선업을 그치는 것 등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도 모두 思覺을 앞잡이로 삼음으로써 비로소 작용이 있게 된다.
이러한 것 등의 작용이 오직 온갖 行에 있어서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보여진 사물에 즉(卽)하여 살타의 覺을 일으키는가, 보여진 사물과 다르게 살타의 覺을 일으키는가?
만약 보여진 사물에 즉하여 살타의 覺을 일으킨다면, 그대들은 빛깔ㆍ형태 등에 즉하여 살타가 있다고 계탁하는 것과 자아가 있다고 계탁하는 것은 뒤바뀐 覺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보여진 사물과 다르게 살타의 覺을 일으킨다면, 자아에 형태ㆍ부피가 있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자아에 수승함이나 열등함이 있다거나, 혹은 찰제리 등이라거나 혹은 어리석음이라거나 혹은 지혜로움이라거나 혹은 그 빛깔ㆍ형태 등의 경계를 능히 취한다고 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직 이 법의 자체에 대해서 이 覺을 일으키는가, 그 밖의 자체에 대해서도 역시 이 覺을 일으키는가?
만약 오직 이 법의 자체에 대해서 이 覺을 일으킨다면, 이 覺은 보여진 것에 즉하여 그 자아의 覺을 일으킴이니, 뒤바뀐 覺이라고 이름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 밖의 자체에 대해서도 역시 이 覺을 일으킨다면, 곧 일체 경계가 각각 일체 경계의 覺의 원인일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정(無情)의 무리에 대해서 유정의 覺과, 유정의 무리에 대해서 무정의 覺과, 그 밖의 유정의 무리에 대해서 그 밖의 유정의 覺이 일어나는가, 일어나지 않는가?
만약 일어난다면, 이것은 곧 무정이 유정이어야 하고, 유정이 무정이어야 하며, 그 밖의 유정이 그 밖의 유정일 것이니,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현량(現量)을 무시하여 부정함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이 ‘나’라고 여기는 지각[計我覺]은 현량의 의미를 취하는가, 비량(比量)의 의미를 취하는가?
만약 현량의 의미를 취한다면, 오직 물질 등의 온(薀)은 현량의 의미이고 자아는 현량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비량의 의미를 취한다면, 어리석은 이ㆍ어린 이 등이 능히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못하여 마땅히 갑자기 자아의 覺을 일으키지 못함과 같을 것이다.
또한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은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만약 저 세간에 짓는 바가 지각[覺]으로써 원인을 삼는가, 자아로써 원인을 삼는가?
만약 覺으로써 원인을 삼는다면, 자아가 지은 바라고 계탁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자아로써 원인을 삼는다면, 먼저 이미 생각하는 지각[思覺]으로 짓는 바가 있게 된다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어진 사물의 원인은 무상함인가, 상주함인가?
만약 무상함이라면, 이 짓는 바의 원인 자체는 변하여 달라짐이니, 자아가 짓는 바가 있다고 계탁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상주함이라면, 곧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것이니,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법에서 짓는 바가 있다고 계탁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작이 있는 자아가 능히 짓는 바가 있게 되는가, 동작이 없는 자아가 능히 짓는 바가 있게 되는가?
만약 동작이 있는 자아가 능히 짓는 바가 있게 된다면, 이것은 곧 항상 짓는 것이니 마땅히 다시 짓지 않아야 한다.
만일 동작이 없는 자아가 능히 짓는 바가 있다면, 동작이 없는 속성인데도 짓는 바가 있다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자아가 짓는 바가 있게 되는가, 원인이 없음이라고 하는가?
만약 원인이 있다면, 이 자아는 마땅히 그 밖의 원인으로 인하여 일으켜져야만 비로소 짓는 바가 있을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원인이 없다면, 마땅히 어느 때에도 온갖 사물을 지을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자아는 자신에 의지함으로써 능히 짓는 바가 있게 되는가, 다른 것에 의지함으로써 능히 짓는 바가 있게 되는가?
만약 자신에 의지한다면, 이 자아는 스스로 늙음ㆍ병ㆍ죽음의 괴로움과 잡염 등의 일을 지을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은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온(薀)에 즉해서 자아가 있다고 시설하는가, 여러 온 안에 있다고 하는가, 온 외의 다른 곳에 있다고 하는가, 온의 속성이 아니라고 하는가?
만약 온에 즉해서 자아를 시설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온과 더불어 차별이 없는 것이니, 자아가 있다고 계탁하여 실유라거나 상주함이라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여러 온 안에 있다면, 이 자아는 상주함인가, 무상함인가?
만약 상주한다면, 상주하는 자아가 여러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손감(損減)이나 증익(增益)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손감이나 증익이 없다면, 법ㆍ비법(非法)을 일으킨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법과 비법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여러 온(薀)으로 이루어진 몸은 궁극적으로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마땅히 공용(功用)에 의거하지 않고 자아는 항상 해탈해야 한다.
만약 무상이라면, 온의 자체를 떠나서 외부로 생겨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으며, 상속되고 유전하는 법이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이것에 있어서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 다른 곳에서 짓지 못하고서 얻는다면 큰 과실이 있게 되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온 이외의 다른 곳이라면, 그대들이 계탁하는 자아란 마땅히 무위(無爲)이어야 한다.
만약 온의 속성이 아니라면, 자아는 어느 때나 마땅히 염오(染汚)가 없어야 하며, 또한 자아와 몸이 서로 속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는 어떤 의도인가?
계탁된 자아는 보는 자[見者] 등의 양상에 즉(卽)하는가, 보는 자 등의 양상을 떠나는가?
만약 보는 자 등의 양상에 즉한다면, 보는 것[見] 등에 즉하여 가립해서 능히 보는 자 등의 양상이 있게 되는가?
보는 것 등을 떠나서 별도로 능히 보는 자 등의 양상을 건립하는가?
만약 보는 것 등에 즉하여 능히 보는 자 등의 양상을 가립한다면, 곧 마땅히 보는 것 등은 능히 보는 자 등일 것이니, 그대들이 자아를 건립하여 능히 보는 자 등으로 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보는 자 등이 보는 것 등과 더불어 서로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보는 것 등을 떠나서 별도로 능히 보는 자 등의 양상을 건립한다면, 그 보는 것 등의 법은 자아가 이룬 업이 되는가?
자아가 집착하는 도구가 되는가?
만약 자아가 이룬 업이라면, 이 자아는 마치 종자(種子)와 같아서 마땅히 무상(無常)이어야 한다.
만일 옹기장이 등을 거짓으로 선비[士夫]라고 내세움과 같다고 말한다면, 이 자아는 마땅히 무상이어야 하고 마땅히 가립이어야 하므로, 그대들이 “이것은 상주한다.” “이것은 실유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신통을 갖춘 가립된 士夫와 같다고 말하면, 이 자아도 역시 마땅히 무상이고 가립이어야 하며, 모든 지은 바에 대해서 의지에 따라 자재롭다고 말하는 이것도 역시 앞에서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지대(地大)와 같다고 말하면, 마땅히 무상이어야 한다.
또한 계탁된 자아는 지대와 같은 드러난 작업이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세간의 지대가 지은 업용(業用)은 드러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물을 지녀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데, 자아에는 이 업이 드러나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허공과 같다면, 마땅히 無法일 것이니,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오직 물질이 없는 것에 대해서 허공을 가립하기 때문이다. 허공은 비록 가유(假有)이지만 업용이 분명히 얻을 수 있는데, 계탁된 자아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세간의 허공은 지은 바 업용이 분명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허공으로 인하여 가고 오는 것과 굽히고 펴는 것 등의 업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보는 것 등의 자아가 이룬 업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자아가 집착하는 도구라면, 가령 낫[鎌 ]과 같다고 말하면, 낫이 아닌 다른 물건도 역시 능히 끊는 작용이 있다.
이와 같이 보는 것 등을 떠나서 외부에 그 밖의 사물에서는 보는 것 등의 업용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불과 같다고 말하면, 곧 헛되이 자아를 계탁하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마치 세간의 불처럼 능히 태우는 자를 떠나서 역시 스스로 능히 태우기 때문에, 만약 보는 자 등의 양상을 떠나서 별도로 자아가 있다고 말하면, 곧 계탁된 자아의 양상은 모든 형식에 위배되어[乖一切量]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그대들이 계탁하는 자아는 잡염ㆍ청정의 양상과 더불어 상응하여 잡염ㆍ청정이 있게 되는가?
잡염ㆍ청정의 양상과 상응하지 않으면서도 잡염ㆍ청정이 있게 되는가?
만약 잡염ㆍ청정의 양상과 상응하여 잡염ㆍ청정이 있는 것이라면,
곧 모든 行에 있어서 질병ㆍ재난ㆍ횡액이 있고,
그것이 그치고 수순ㆍ증익이 있을 수 있으며, 곧 그 모든 行이 비록 자아가 있지 않더라도 잡염ㆍ청정의 양상과 상응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외부 사물과 같이 내부의 몸도 역시 그러해서, 비록 자아가 있지 않더라도 잡염ㆍ청정의 의미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자아를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잡염ㆍ청정의 양상과 상응하지 않으면서도 잡염ㆍ청정이 있는 것이라면, 잡염ㆍ청정의 양상을 떠나서 자아에 잡염ㆍ청정이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그대들이 계탁한 자아는 유전(流轉)의 양상과 상응하여 유전과 지식(止息)이 있는가,
유전의 양상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유전과 지식이 있는 것인가?
만약 유전의 양상과 상응하여 유전과 지식이 있다면, 모든 行에 있어서 다섯 가지 유전의 양상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원인이 있고,
둘째는 생겨날 수 있으며,
셋째는 소멸될 수 있고,
넷째는 전전히 상속하여 생기하며,
다섯째는 변하여 달라짐이 있다.
만약 모든 行에서 이 유전의 양상을 얻을 수 있다면, 마치 몸에 어금니와 강물에 등불과 수레 등과 같나니, 유전의 작용 중에 비록 자아가 있지 않더라도 곧 그 모든 行이 유전과 지식이 있을 수 있거늘 어찌 자아를 계탁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 양상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유전과 지식이 있는 것이라면, 곧 계탁된 자아에 유전의 양상이 없는데 유전과 지식이 있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그대들이 계탁하는 자아란, 경계에서 생겨난 괴로움이나 즐거움 및 사업(思業) 아울러 번뇌ㆍ수번뇌(隨煩惱) 등이 변이(變異)된 바로 말미암아 받는 자[受者]ㆍ짓는 자[作者] 및 해탈자가 된다고 말하는가?
그 변이에 의거하지 않고서 받는 자 등이 된다고 말하는가?
만약 그 변이에 의해서라면, 이것은 곧 모든 行이 받는 자ㆍ짓는 자ㆍ해탈자인 것이니, 어찌 자아를 계탁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령 이것이 자아라면, 자아는 무상한 것이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그 변이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자아는 변이가 없는데도 이것이 받는 자ㆍ짓는 자 및 해탈자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는 지금 마땅히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말해야 한다.
오직 자아에 한해서 말하여 짓는 자를 삼는가?
그 밖의 법에 있어서도 말하여 역시 짓는 자를 삼는가?
만약 오직 자아에 한해서라면, 세간에서 불[火]에 대해 타는 것ㆍ빛을 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그 밖의 법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다면, 곧 보는 것 등의 여러 감관에 대해서 짓는 자를 말하게 되며, 헛되이 자아를 분별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는 마땅히 자신의 뜻에 의도하는 바를 말해야 한다.
오직 자아에 한하여 자아를 건립하는가?
그 밖의 법에 있어서도 역시 자아를 건립하는가?
만약 오직 자아에 한해서라면, 세간에서 가설(假說)된 士夫의 몸에 대해 말하여 덕(德)ㆍ우(友)ㆍ불(佛)ㆍ수(授) 등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 밖의 법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다면, 이것은 곧 오직 모든 行에 대하여 가설하여 자아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어찌 다시 별도로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가?
왜냐하면 모든 세간 사람들은 오직 가설된 士夫의 몸에 대하여 유정이라는 표상[想]을 일으키고, 유정이라는 명칭을 세우며, 자신과 타인의 차별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는 그대들은 어떤 의도인가?
‘나’라고 여기는 소견[計我之見]은 선(善)인가, 불선인가?
만약 선이라면, 어떻게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 깊이 아견을 일으키며, 또한 방편에 의거하지 않고 갑자기 일으키며(?),
또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을 두려워하게 하고, 또한 능히 온갖 악(惡)의 과실을 증장시키겠는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불선이라고 말하면, 올바른 것ㆍ뒤바뀌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이것이 뒤바뀌게 계탁된 자아라면, 자체가 실유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무아(無我)라는 견해는 선(善)인가, 불선인가?
만약 선이라고 말하면, 저 상주하며 실유(實有)인 자아에 대해서 자아가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선(善)의 속성이고 뒤바뀜 없는 견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불선이라고 말하면, 일체지자(一切智者)께서 널리 말씀하신 바,
“정근(精勤)의 방편으로 생기하는 것은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을 두려워하지 않고 능히 백정(白淨)의 과위를 속히 증득하게 하며, 모든 악의 과실을 여실히 다스린다.”고 한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 생각에 어떠한가?
자아의 성품에 즉(卽)하여 자아가 있다고 스스로 계탁하는가, 아견(我見)으로 말미암아서인가?
만약 자아의 성품에 즉하여 자아가 있다고 스스로 계탁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어느 때라도 무아의 覺이 없을 것이다.
만일 아견으로 말미암아서라면, 비록 실아(實我)가 없더라도 아견의 세력에 의해서 모든 행(行)에 대하여 망령되게 “자아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대가 “결정코 실유(實有)의 자아이다.”라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不覺을 우선으로 하면서 그 覺을 일으킴’에 의해서이고,
‘思覺을 우선으로 하면서 지어진 바가 있음을 봄’에 의해서이며,
‘여러 온(薀)에 대해서 이것이 有라고 건립함’에 의해서이고,
‘그 양상에 대해서 안립하여 有를 삼음’에 의해서이며,
‘잡염과 청정을 건립함’에 의해서이고,
‘유전(流轉)과 지식(止息)을 건립함’에 의해서이며,
‘받는 자와 짓는 자 및 해탈자를 건립함’에 의해서이고,
‘짓는 자가 있음을 시설함’에 의해서이며,
‘언설을 시설함’에 의해서이고,
‘견해를 시설함’에 의해서 실유의 자아를 계탁하는 것은 모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내가 이제 제일의(第一義)인 자아의 양상을 말하겠다.
이른바 자아라는 것은 오직 모든 법에 대해서 가립하여 있다고 한 것이며 실유의 자아가 아니다.
그런데 이 가아(假我)는 저 모든 법과 더불어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은 성품을 말할 수 없다.
이 자아가 실유의 체성이라거나, 혹은 그 모든 법은 곧 자아의 체성ㆍ양상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이 가아는 무상(無常)의 양상이고, 항상하지 않는 양상이며,
잘 보존되지 않는 양상이고,
변하여 무너지는 양상이며, 생겨나는 법의 양상이고,
늙고 병들며 죽는 법의 양상이며,
오직 모든 법의 양상이고,
오직 고뇌의 양상이다.
그러므로 박가범께서 말씀하기를,
“필추(苾蒭)여, 마땅히 알라. 모든 법에 대해서 자아가 있다고 가립한다. 이 자아는 무상이고, 항상하지 않으며, 잘 보존되지 않고, 이것은 변하고 무너지는 법이다..... (이와 같이 자세히 말함)”라고 하셨다.
마땅히 알라. 네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모든 행(行)에 대해서 자아가 있다고 임시로 시설한 것[假設]이다.
첫째는 세간으로 하여금 말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모든 세간에 수순하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결정코 무아라고 말하면 갖게 되는 많은 두려움을 끊어 없애기 위해서이고,
넷째는 자신과 타인이 공덕을 성취함과 과실을 성취함을 널리 말해주어서 결정적인 믿음ㆍ이해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이런 까닭에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이론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주장이 된다.
5) 상주함이라고 계탁하는 이론
‘상주함이라고 계탁하는 이론[計常論]’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되,
“자아와 세간은 모두 상주한다.
짓는 것도 아니고 짓는 것이 지은 바도 아니며, 변화함도 아니고 변화로 지어진 바도 아니어서 훼손할 수 없다.
적취(積聚)하여 머무는 것이 이사가(伊師迦)와 같다.”라고 하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전제(前際)를 계탁하여 일체가 상주한다고 말하는 이, 일부분이 상주한다고 말하는 이, 그리고 후제(後際)를 계탁하여 생각 있는 것[有想]이라고 말하는 이, 생각 없는 것[無想]이라고 말하는 이,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님도 아닌 것[非想非非想]이라고 말하는 이, 또한 모든 작은 분자[極微]가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이가 있어서 이와 같은 계탁을 짓는다.
【문】 무슨 까닭에 그 여러 외도들은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건립하여 “자아와 세간이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답】 그들은 인연(因緣)을 계탁한 것이다.
경전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으니,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전제(前際)를 계탁하는 이’는 다음과 같다.
혹은 하품ㆍ중품ㆍ상품의 정려(靜慮)에 의지하여 숙주수념(宿住隨念)을 일으키고 연기(緣起)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의 여러 행(行)에 대해서 다만 오직 기억하며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므로 과거세를 계탁하여 전제(前際)로 삼고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을 일으킨다.
혹은 천안(天眼)에 의지하여 현재세를 계탁하여 전제로 삼고, 여러 행(行)이 찰나에 생멸하고 유전함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한다.
또한 모든 식(識)이 유전(流轉)하고 상속하여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에 이르러 단절됨이 없음을 보기 때문에 상견을 일으킨다.
혹은 범왕(梵王)이 의지대로 성립하는 것을 보고서,
혹은 4대종(大種)의 변이(變異)를 보고서,
혹은 모든 식의 변이를 보고서 (상견을 일으킨다).
‘후제(後際)를 계탁하는 이’는 다음과 같다.
표상[想]과 느낌[受]에 대해서 비록 차별을 보지만, 그러나 자아의 자상 차별을 보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상견(常見)을 일으켜서,
“자아와 세간은 모두 상주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극미(極微)는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이’는 다음과 같다.
세간의 정려(靜慮)에 의지함으로써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연기(緣起)를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탁하기를,
“존재가 먼저 있어서 존재의 결과가 집기(集起)하며, 흩어짐이 먼저 있어서 존재의 결과가 파괴 소멸된다”고 한다.
이 인연에 의거해서 그들은,
“여러 극미의 성품으로부터 구체적인 물질이란 결과가 생겨나며, 구체적인 물질을 점차 분석하면 나아가서는 극미에 이른다. 이런 까닭에 구체적인 물질은 무상하지만 극미는 상주한다”고 말한다.
이중에서 전제(前際)와 후제(後際)가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이론은 자아를 집착하는 이론의 차별상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자아 이론이 이미 논파되었으니,
자아의 차별상 이론도 역시 이미 논파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지난 세상의 생각은 여러 온(薀)을 취하는가, 자아를 취하는가?
만약 온을 취한다면, 자아와 세간이 상주한다고 집착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자아를 취한다면 “과거에 이와 같은 명칭 등의 여러 유정의 종류를 내가 일찍이 그곳에서 이와 같은 이름과 이와 같은 성(姓)으로..... (나아가 자세히 말함)”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 생각에 어떠한가?
저 현재 화합된 색경(色境)을 반연하여 안식(眼識)이 일어날 때, 그밖의 나타나지 않고 화합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그 밖의 여러 식(識)은 사라지는가, 전전(展轉)하는가?
만약 사라진다고 말하면, 사라져버린 식이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전전한다고 말하면, 한 경계로 말미암아 어느 때나 모든 식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집착된 자아는 표상[想]이 지은 바이고 느낌[受]이 지은 바로 인하여 변이(變異)가 있게 되는가, 변이가 없게 되는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 세간과 자아가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없다고 말하면, 하나의 표상이 있고나서 다시 갖가지 표상이 생겨남이 있고, 다시 작은 표상 및 한량없는 표상이 있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먼저 순전히 즐거움이 있고나서 나중에 순전히 괴로움이 있으며, 또한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며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것이 있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만약 “목숨이 곧 신체이다.”라고 계탁한다면, 그는 자아는 곧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만일 “목숨은 신체와 다르다.”고 계탁한다면, 그는 자아가 물질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만약 “자아는 함께 두루하여 둘이 없고 빠진 곳이 없다.”라고 계탁한다면, 그는 자아가 역시 물질이기도 하고 물질이 아니기도 하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곧 이 의미에 대해서 다른 문구와 다른 문장에 의거해서 집착을 일으킨다면, 그는 자아가 물질이 아니고 물질 아님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만약 조금은 물질이고 조금은 물질이 아니라고 본다면, 그는 한계[邊]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한량없다고 본다면, 그는 한계 없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다시 두루 보아서, 물질 부분은 적고 물질 아닌 것이 한량없다고 하거나, 혹은 물질은 한량없고 물질 아닌 부분이 적다고 말한다면, 그는 역시 한계가 있기도 하고 역시 한계 없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다만 문장의 다른 것만 의거하고 의미의 다른 것에 의거하지 않아서 집착을 일으킨다면, 그는 한계가 있음도 아니고 한계 없음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보거나, 혹은 해탈의 자아가 두 가지를 멀리 떠난다고 보는 것이다.
현양성교론 제10권
또, 다음으로 아주 작은 분자가 항상 머무르는 것을 계교함에 대하여 내가 지금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시오.
그대는 관찰하고서 아주 작은 분자가 항상하다고 계교하는가?
관찰하지 않고서 저것이 항상하다고 계교하는가?
만일 관찰하지 아니했다면 지혜로 관찰함을 떠나서 항상하다고 결정하여 계교함이라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이미 관찰했다고 말한다면, 온갖 양(量=現量 따위)을 어기기 때문에 될에 맞지 않는다.
또, 그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온갖 아주 작은 분자의 성직이 미세하기 때문에 저것을 항상하다고 계교하는가,
거치른 결과인 물건과 더불어 그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저것을 항상하다고 계교하는가?
만일 미세하기 때문이라면, 흩어지기도 하고 줄어지기도 하여 그 성질이 아주 저열하거늘 항상하다고 말함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그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아주 작은 분자가 땅ㆍ물ㆍ불ㆍ바람의 모양을 초월하여 그 종류의 모양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능히 저 결과를 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저 아주 작은 분자는 또한 다른 모양을 얻을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그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온갖 아주 작은 분자로부터 생긴 바 거치른 물건이 다르지 않은 모양인가 다른 모양인가?
만일 다르지 않은 모양이라고 말한다면, 저 원인과 더불어 차별이 없기 때문에 또한 응당 항상함이리니 여기에는 곧 원인과 결과의 결정이 응당 없을 것이다.
만일 다른 모양이라면, 그대의 뜻에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흩어짐인 아주 작은 분자로부터 거치른 물건이 생기게 된 것인가,
모이는 것으로부터 서인가?
만일 흩어짐으로 부터라고 말한다면 응당 어느 때에도 온갖 결과가 생길 것이니, 여기에는 곧 원인과 결과의 결정이 응당 없을 것이다.
만일 모이는 것으로부터 서라고 한다면, 그대 뜻에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저 거치른 결과의 물건이 아주 작은 분자로부터 생길 때에 저 형질(形質)의 양(量)을 벗어나지 아니한 것인가, 저 형질의 양을 벗어난 것인가?
만일 저 형질의 양을 벗어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형질분자로부터 물건이 생기나니 형질은 분자가 있는 물건이다.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형질의 양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주 작은 모든 분자의 자체는 미세하게 분리할 수 없으므로 분석하지 못한다. 생긴바 거치른 물건도 역시 응당 항상함이리니,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만일 아주 작은 온갖 분자는 본시 없었으나 지금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아주 작은 분자를 항상하다고 계교함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그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 아주 작은 온갖 분자가 거치른 물건을 조작한 것이 종자 따위와 같다고 하는가, 옹기장이 따위와 같다고 하는가?
만일 종자 따위와 같다고 말한다면, 응당 종자와 같아서 그 자체가 무상함일 것이다.
만일 옹기장이 따위와 같다고 말한다면, 저 아주 작은 모든 분자에게도 응당 옹기장이 따위 같은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만일에 종자 따위와 그리고 옹기장이 따위와 같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비슷함이어서 비유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그대 뜻에는 어떠한가?
온갖 바깥 물건들이 생기는 것이 중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중생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중생으로 말미암아서라고 한다면, 저 바깥의 거치른 물건은 중생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소의(所依)인 미세한 물건(작은 분자)은 중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도리에 맞지 않나니, 누가 능히 저것에 대하여 그 공능을 억제하겠는가?
만일 중생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작용함이 없이 바깥 물건이 생김이라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와 같이 숙주수념(宿住隨念)이 온갖 쌓임[蘊]을 취하며, 그리고 중생을 기억하기 때문이며,
하나의 대상으로 말미암아 온갖 인식이 흘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과 느낌으로 말미암아 변하여 달라지고, 또는 변하여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저 전제와 후제가 항상 머무른다고 계교하는 논리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 관찰함과 관찰 않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공통된 모양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제 모양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조작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근본에서 작용한 바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분자가 항상함이라고 하는 논리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함이라고 계교하는 논리는 이치에 합하는 말이 아니다.
또 다음으로 내가 지금 항상 머무는 모양을 말하리니,
만일 어느 때에도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모양이거나,
만일 온갖 종류가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모양이거나,
만일 온갖 종류가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모양이거나,
만일 자연이어서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모양이거나,
만일 딴 것을 거치더라도 또한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모양이거나,
또 생김이 없는 모양이면,
그것이야말로 항상 머무는 모양이라고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