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堂 漫筆>
익숙함, 그 너머: 경이(驚異)로움에 대한 단상(斷想)
박 성 환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향유해오던 일상(日常)이 사람마다 다르긴 해도 많이 바뀌어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코로나로 인하여 냉혹하고 무의미해진 일상일지라도 그것은 초월할 수 없는 현실적 삶의 토대이다. 아무리 끔찍한 상처라도 그것을 무(無)로 돌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일상적 시간뿐이다. 전날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다음날 아침 눈 뜨면 또 하루분의 일상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삶을 긍정하고 지금까지의 심상한 일상으로 ‘그냥’ 되돌아가게 된다. 이 ‘그냥’이란 말에는 자세하게 설명하기 곤란하고 논리적 이유를 댈 필요가 없다는 그런 뜻이 담겨있다. 행복한 사람은 때마다 짜릿한 즐거움을 맛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항다반사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행복하다. 소소한 물건에서, 무료해 보이는 일상에서 아름다움은 살아 숨 쉰다. 행복이란 결국 그런 사소한 즐거움의 누적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주는 안도감(comfort from ordinary daily repetition)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는 영국인들의 격언은 일상의 안온함을 중히 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새로운 것이 주는 신선함보다는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을 택하는 편이다. 익숙한 방식과 타성에 젖어 늘 해오던 습관대로 사고하며 일상을 반복한다. ‘반복’은 순조로운 현상으로 이어지는 익숙함을 낳는다. 익숙함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중력(重力)처럼 보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 중력(gravity)과 무덤(grave)의 어원이 같다는 것은 무덤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중력에 대한 순응을 은유한다. 익숙함이란 중력은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고 그 대가로 ‘안정(安定)’이라는 편안함을 준다. 누구나 편안함에 안주하면 이 ‘익숙함의 중력’에 굴할 수밖에 없다. 세월의 강물에 흔들리며 떠내려가는 배에 실려 무심히 흘러갈 뿐이다.
코로나의 ‘감염공포’는 생명의 위협과 격리의 두려움에 맞닿아 있다. ‘감염공포’는 생활의 패턴을 망가뜨리고 정상적인 일상을 일실(逸失)케 하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삶의 기쁨은 익숙한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서 온다는 것, 남루한 일상에서 거룩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한다. 소설가 박경리, 박완서 두 분께서는 이런 맥락을 일컬어 “일상의 기적”이라하였다.
‘익숙함의 중력’에 사로잡혀 일상을 편하게 이어가지만, 반복과 익숙함은 삶을 지루한 매너리즘에 빠지게 한다. ‘익숙함의 중력’에 굴복하여 그에 얽매이면 뉴턴의 사과처럼 밑으로 떨어지기 쉽다. ‘나’라는 존재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거스를 줄 알아야 한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강을 거슬러 오르고, 살아 있는 나무는 바람에 꿋꿋하다. 거스를 줄 알아야 나의 존재함이 증명된다. 밑으로 잡아끄는 ‘익숙함의 중력’의 힘에 굴하지 않고 튕겨내는 힘을 행사하는 때에야 익숙함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다.
중력에 거스르는 대표적 예술로 발레(ballet)가 있다. 발끝으로 선다는 것, 그것은 바로 중력에 저항하는 자세이다. 최대한 위로 솟구쳐 오른 뒤 중력에 의해 밑으로 떨어질 때까지 그 짧은 시간에 아름다운 동작을 뚜렷하게 만들어낸다. 발레는 이렇게 아름다움의 구현이지만 그것은 또한 중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발레 예술에서 보듯이 ‘익숙함의 중력’에 저항하는 첩경은 ‘경이(驚異)로움-기적(奇蹟)’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기적은 우리 인간에게는 경이로움이지만, 물위를 걷기도 하는 신(神)에게는 사소한 일상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발레 예술에서 경이로움을 구현해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경이로움을 창출해 낼 수 있다. 일상의 반복되는 경험과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에 담긴 의미를 읽고 익숙함을 새로운 감각으로 낯 설은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를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러시아의 비평가 시클롭스키(Shklovsky)]라고 한다--으로 시작할 수 있다. 담긴 의미를 지나쳤던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새롭게 만나는 ‘낯설게 하기’는 예술과의 접점이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 중의 하나인 예술은 이렇게 ‘낯설게 하기’로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경이로움’과 ‘기적’을 창조하는 고귀한 인간 고유의 업(業)이다. 익숙한 일상을 물구나무서기로 뒤집어 보고 ‘지금-여기’의 삶 말고 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을 ‘문득’ 깨닫게 만드는 것: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내리꽂히는 푸른 유성의 별빛 같은 전율, 눈앞에서 바다가 쩍 갈라지는 것 같은 경이로운 느낌, 기적 같은 느낌,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이다.
우리는 발끝으로 서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발레처럼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가 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일상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삶 속에서 해내고 만들어 내기도 했을 수많은 자신의 ‘마법’을 알아보는 눈이 생겨야 한다. 어차피 사람은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 지나가고, 자신이 아는 것만 본다. 그러나 그것은 겉껍데기이며 진짜는 그 속에 깊이 가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얼굴을 한참동안 거울 속에서 들여다보아라. 그러면 원숭이가 태어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모든 현상의 그 ‘너머(beyond)’에 ‘참(眞)’이 있다는 은유이다.
반복되는 것은 익숙해지면서 예측하기 쉽기 때문에 반복되는 삶을 추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복(反復)은 단지 반복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반복은 나에게 다양한 의식구조(意識構造)를 만들어내어 그것에 감응(感應)하게 만든다. 감응은 자기 자신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스며들어 반응하는 것’이다. 속담에 ‘꿈에 중을 보면 옴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중은 절에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다. 옻나무는 옴이 생기게 한다. 꿈에 본 중과 피부에 돋은 옴 사이에는 절과 산과 옻나무의 3단계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과 저것은 전혀 관계가 없지만, 중간에 드러나지 않은 몇 단계를 복원하면 스며들어 반응하는 인과관계가 확인된다[정민,『한시미학 산책』]는 뜻이다. 익숙했던 일상과의 관계가 낯설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큰 지적 성취를 이룬 과학자, 예술가들도 일상은 인간적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하는 능력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 ‘너머(beyond)’를 상상하는 능력도 갖고 있다. 이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게 하는 마법, 물구나무서기에서 오는 ‘낯설게 하기’의 마법이다. 삶 속으로 마법--‘거울 속의 제 얼굴에서 원숭이’를 볼 줄 아는 ‘마법’을 들이 시라. 신들의 영역인 ‘기적’과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으리.
2020.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