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대마도프로그램으로 대체한 나!답은 8월에 군산을 다녀왔다.
이번 코스는 그동안 다녀온 곳과는 많이 다른 느낌을 갖는 곳이다.
주제도 '근대문화유산을 찾아서'이다.
우리가 학교과정을 통해 근대시대를 배워본 적이 없기때문에 근대이야기만 나와도 벌써 움츠려든다.
근대역사박물관 3층에서 근대시기의 군산 설명을 들은 후 특별전을 잠깐 보았는데 경술국치의 내용이 있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학교에서 국사를 배우지 않기에 야스쿠니신사를 야스쿠니 젠틀맨으로 인식한다는 설문조사는 기이한 웃음을 흘리게 한다.
역사를 조금 알고, 그 조금 아는 역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있는 나로서는 한국사를 수능시험에 넣기로 했다는 뉴스도 반갑지 않다. 너무나 형식적이다. 고민한 흔적이 보이질 않고, 그저 시류에 던져져 흘러가는 듯하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역사를 배워야한다면, 근대사에 대해 비중을 두어야 마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오히려 근대사를 외면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또한, 아주 오래전의 선사시대와 국가의 형성을 배우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고도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요즘 체험학습이 일반적인데 체험학습 시간을 이용해 삼국시대까지를 알게 하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시험을 통하여 평가할 것이 아니라 체험학습에 전문 해설선생님을 모시고 설명을 들은 후, 본인이 흥미있는 곳에 대한 보고서로 대체한다면 역사를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고 목적을 이룰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안되는 이유야 너무 많을 것이다. 되게 하려고 생각하지 않으면 말이다.
8시 50분 황골에서 출발하여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11시 10분경 군산 발산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재미있게도 초등학교건물 뒷편에 문화유산이 있었다. 석등과 석탑, 부도, 석물 등 시마타니가 농장을 꾸미려고 전라도 각지에서 가져다 놓은 것들이다.
시마타니가 누구인가.
군산의 최대농장주인 구마모토와 더불어 손꼽히는 일본인 농장주이다. 양조장을 운영하다 한반도에 건너와 토지와 쌀이 풍부한 군산에 홀딱 반한 모양이다. 천황이 항복한 이후 이땅에서 살겠노라고 귀화신청을 한 것을 보니..그 옆의 3층 건물인 금고는 미국산 철문을 단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놓았다. 그곳에 무엇을 넣었을까?
그렇게 튼튼한 금고이니 가장 귀하게 여기는 물건을 놓았을것이다.
시마타니는 문화재수집가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수집가인지 수탈가인지..명확하게 발음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리고는 우리나라에 유일한 일본식 절인 동국사로 향했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한건물로 이어지고 뒤편에는 일본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일본에 온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절이다. 그러나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은 우리나라 금산사에서 가져온 불상이다.
겉으로 봐서는 소조인지 알 수 없지만 친절하게도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이라 써있고 옆의 협시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까지도 적어놓았다.
군산내항을 보고 간 곳은 신흥가옥.
일명 포목상과 농장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히로쓰가옥이다. 그의 집은 아주 튼튼하게 지어졌고 지금은 사유재산이다. 2층은 다다미방이다. 히로쓰의 딸이 사용했다고 한다. 얼마전 다녀온 대마도가 떠오른다. 우리가 머문 곳도 다다미방이었다.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맞게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을 보는 것이 일본의 다다미와 우리의 온돌문화이다.
그곳의 해설사선생님으로부터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1층과 2층, 야외정원을 돌아보고는 "야, 집 좋다!"하고 나간단다.
그것이 문제다. 그 집이 어떻게 지어진 것이며 왜 지어진 것을 이해해야지 영화촬영을 했던 곳이라는 것과 일본느낌이 난다 등등의 겉보기로만 지나간다면 군산에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발 해설사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관람하기를 권한다. 그곳에 살면서 가장 그곳을 잘 아는 분의 설명이니 바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줄 일이다.
군산 곳곳을 걸어다니면서 군산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갖는 시간이었다.
금강 하구에 위치하여 백제, 신라, 당, 일본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위해서 반드시 확보하여야 하는 요지였던 군산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무기를 사용하여 왜적을 소탕한 장소이기도 하다.
1380년 여름 왜선 500여척이 군산지역에 침투하여 삼남연해지방을 황폐화시킬 때 최무선이 대첩을 거둔 곳이다.
근대에 와서 군산항의 개항이 거론된 것은 고종14년이다. 이미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후 개항의 압력을 받았던 곳이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에 의존하는 정치를 펴던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황제로 즉위하는 의식을 환구단에서 올린 후 나름대로 부국강병을 강구하였다.
또,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제도와 경찰제도의 재편에 예산을 집행하면서 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실시하였다. 근대적 화폐제도를 모색하고 산업진흥정책등을 실시하면서 군산의 개항이 이루어졌다.
일찍부터 군산에 들어와 야곰야곰 지역을 넓히던 일본정부는 '각국조계지'선포도 선점하고, 그 후 오랫동안 살려는 생각에 히로쓰가옥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남의 땅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을터이다. 앞으로 내땅이고 내 자식이 살아갈 곳이기에 3년간 심혈을 기울여 집을 짓고 뒤쪽에 집을 지을 땅을 확보해놓은 것이리라.
쌀!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 나는 쌀이 모두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한제국사람들 가운데 친일하는 사람 빼놓고는 대부분 농민들은 수입해온 값싼 안남미를 죽처럼 끓여먹으며 연명했다. 그것은 단순히 식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위기가 심화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군산항을 개항한 후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쌀의 대외유출이 심화되고, 그로 인하여 조선상인이 몰락하여 유통권의 변동이 생겼다. 일본인의 토지침탈은 더욱 공공연히 군산세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부농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이지만 빈농은 생존경제의 틀이 해체되는 비극이 심화되었다.
결국 정부가 국내산업을 보호하는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철저한 준비없이 개방화정책을 선택한 결과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대한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위정자들의 의식과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첫댓글 답사다녀왔지만 글을 보면서 느끼는게 더 많은건 왜인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