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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잘못된 헤지거래는 많은 고통을 초래합니다. 저는 23년 전에 헤지거래로 인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키코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이 얘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1989~1992년에 걸쳐 3년간 일본의 동경지점에 발령받아 근무하였습니다. 제가 부임한 1989년 여름, 일본은 동경 올림픽을 치른 후인 1965년 말 ~ 1970년 중반의 57개월에 걸친 호황기인 ‘이자나기’경기 이후 최장의 호황기라 불리는 ‘헤이세이’경기의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1985년 9월 플라자합의**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엔화 가치의 상승으로 일본 기업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자, 일본정부는 환율 급락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수년간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런 정책의 결과로 시중의 유동성은 급팽창하였으며, 모든 자산 가격이 급등하는 버블을 불러왔습니다. 1989년 당시, 동경 시내 한 복판에 있는 황궁을 팔면 캐나다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 까지 나올 정도로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였습니다. 제가 살던 집(사택)은 우리나라 아파트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한 32평 정도되었고, 강남 같은 요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은 지역의 10여 가구가 들어있는 빌라였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당시 한 5천만원이면 될 이 집의 가격이 3억엔(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약 18억원 정도)을 초과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증시도 호황을 누려, 1989년 말, 일본의 종합주가지수인 ‘니케이 225’가 38,900을 돌파하였습니다. ‘니케이 225’는 몇 년전 7,000까지 떨어졌다가 요즘 많이 회복되어 14,000 내외를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의 자산가격 거품이 얼마나 심했는 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거품을 잡기 위해 일본의 정책 당국은 금리를 지속적으로 인상하였습니다. 1989년 초 4.5% 수준이었던 시장금리는 1990년 8월경 8%를 넘어서고 있었고 시장의 전망도 이런 상승세가 2~3년간 계속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제가 다닌 은행의 동경지점은 150억엔 정도의 부실 대출금을 안고 있었습니다. 동 대출금은 70년대 중반에 나갔고, 지금 일본 동경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고 많이 붐비는 곳인 롯본기에 있는 빌딩을 담보로 잡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은 오랫동안 이자 한푼 받지 못하고 원금 회수를 위해 담보물 처분도 감히 검토하지 못하는 등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아니 해결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던 악성 대출금이었습니다.***
동경지점은 년간 약 12억 엔 정도의 영업이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만, 위에서 말한 부실대출금의 조달비용 때문에 실제 이익은 그 만큼 잠식되었습니다. 1989년 이전에는 조달금리가 4~5%이어서 당기순이익 규모는 대략 5~7억 엔이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 6월 이후 시장금리가 7%를 넘어서자 위의 부실대출금의 자금조달 비용이 여타 영업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다 까먹고 드디어 영업적자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금팀 내에서는 시장금리가 7%를 넘어서고 있으니 조달금리 상승을 헤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특히, 제 밑에 있던 현지직원인 신상(현지직원인 행원에 대해서는 성에 일본어 경칭인 ‘상’을 붙입니다)은 차장님 주재 주간 회의 때 마다 현재의 금리 상승 추세는 일시적인 게 아니라 장기간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 동경지점은 금리상승에 대비한 헤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신상은 다른 현지직원과는 달리 자금 전문가로 동경지점에서 채용한 직원으로 상당히 똑똑하고 유능하였습니다. 다른 재일교포 직원들은 일본어 외에는 못했는데 이 직원은 한국말과 영어가 가능한 직원이었고, 자금업무에 대한 긍지나 지식도 남달랐습니다. 아래 직원이라고 해서 신상의 발언을 무시할 수 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동안 신상의 의견에 대해 반대하였습니다. 3~6개월의 단기 헤지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헤지를 한다면 2~3년이라는 장기간 해야 하며, 그 기간 중에 만에 하나 금리 상승세가 꺾여 헤지한 금리 수준 이하로 하락할 경우 헤지 때문에 오히려 이익이 줄어들 것이고 이로 인해 책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제 주장은 매주 월요일 아침 주간회의 때 마다 점차 힘을 잃어간 반면에 신상의 발언은 점차 강도를 높여갔습니다. 금리는 나날이 높아져 갔기 때문입니다.
1990년 8월초 어느 월요일 아침, 그 날도 헤지를 해야 하느니 마느니 나와 신상간에 언쟁이 붙었습니다. 언쟁의 말미에 신상이 한 마디 했습니다.
“대리님! 그럼 헤지 안 한 책임은 누가 지나요?”
이 말 한 마디에 저는 순간적으로 멍한 상태가 되었고, 그 걸로 회의는 끝났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며칠 간 제 머리 속에서는 신상의 “헤지 안한 책임은 누가 지나요?’ 란 말이 떠나지 않았고, 끊임없이 헤지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로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향후 금리 전망에 대한 각종 자료를 뒤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 명색이 자금 전문가로 본점에서 해외지점으로 발령받아 온 놈이 헤지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 회피해서야 되겠는가!”
이 것이 고민의 결론이었고,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신상을 불렀습니다.
“좋다! 헤지 하자! 헤지 기간은 2년으로 하고 헤지 방식은 유로엔선물로 3개월 단위 스트립(Strip) 방식으로 한다.**** 지점장님 결재를 받을 품의서를 만들되 일본의 경제 상황, 향후 금리 상승과 장기간 고금리 지속에 대한 판단 근거, 우리 지점의 영업상황과 헤지의 필요성 등을 품의서에 명확히 언급하고, 후에 누가 보더라도 당시에 헤지가 필요한 것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 생애 최초의 헤지 전략은 순식간에 추진되었고 며칠 뒤 지점장님의 결재를 받고 실행되었습니다. 아마 은행 내에서도 파생금융상품을 이용한 최초의 헤지거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동경지점은 한국계 금융기관으로는 유일하게 동경금융선물거래소(Tokyo Int’l Financial Futures Exchange; TIFFE)의 회원사였습니다. 요즘이야 주가지수를 비롯한 각종 금융상품에 대한 선물과 옵션의 거래량이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금융선물에 대해 아는 사람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고, 한국계 은행이 엔화 관련 선물거래를 중개하여 수수료를 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건만 아마 은행의 이름에 걸 맞고 장래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제가 발령받아 가기 약 1년 전인 1988년 6월, 일본의 은행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동경금융선물거래소에 개장과 동시에 회원사로 가입하였습니다. 가입 이후, 회원사로서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소규모의 유로엔 선물거래를 현지 책임자가 담당하여 거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차입금의 금리 상승에 대한 헤지로 가장 간편한 방법은 고정금리의 장기자금 차입입니다. 당시 한국계 은행의 해외지점 입장에서는 신용도 등의 문제로 고정금리의 장기 엔화자금을 차입하는 것이 쉽지도 않았고, 장기자금에 대한 가산금리(차입 스프레드)도 상당하여 실행하기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유로엔 선물거래를 활용하면 회원사인 관계로 수수료를 별로 들이지 않고도 헤지거래를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지거래를 유로엔 선물거래로 처리하였습니다. 2년치 선물거래로 헤지한 평균금리 수준은 약 8%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90년 9월에도 시장금리는 계속 상승하여 드디어 9%를 돌파하였습니다. 헤지 전략은 일견 성공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년초 이후 주가가 점차 하락하고, 정책금리 인상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자 시장은 급변하여 추가적인 금리인상설은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였습니다. 10월 이후, 금리는, 인상되기는 커녕, 오히려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헷지에 대한 불안감도 함께 밀려왔습니다.
1991년 1월까지 그럭저럭 8%대를 유지하던 금리는 2월 들어 7%대로 내려앉았습니다. 한 때 4만을 육박하던 니케이225도 2만대로 내려 앉는 등 경제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금리 상승세 지속을 주장하던 논자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헤지거래에 대한 품의서를 결재하셨던 지점장님이 귀국하시고 새로운 지점장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지점의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하던 신임 지점장님께 부실대출금의 조달 비용을 헤지하기 위해 유로엔 선물거래를 했으며 관련 손실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고하였습니다. 은행업무를 하면서 헷지거래와 금융선물거래를 처음 접해보시는 신임 지점장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관련 자료를 보여드리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손실이 발생하는 헷지거래를 직접 결재를 하지 않으신 신임 지점장님께서 이를 수긍할 리가 없었습니다. 잔여 헷지거래를 모두 즉시 청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반대거래를 통해 유로엔 선물 포지션을 모두 정리하고 보니 2억 몇천만엔 정도 손실이 발생하였습니다.
“헤지 안 한 책임은 누가 지나요?”라며 저를 압박했던 신상은, 우연인 지는 모르겠으나, 헤지 포지션이 손실로 돌아선 얼마 뒤 대장에 폴립, 즉, 용종이 생겨 홋가이도에 있는 온천으로 요양하러 간다며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요즘이야 내시경 검사로 대장의 용종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의 의료기술로는 이의 처리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홀로 남아 신임 지점장님께 헤지거래의 당위성에 대해 주장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신임지점장님께 요주의 인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재일교포 현지 책임자가 매입한 일본주가지수 연동 채권(Nikkei Index Linked Note)이 Knock-in 구간에 진입하여 큰 손실이 발생하였습니다(이 건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들이 동경지점에 쌓여 신임 지점장님과 동거했던 1년 반 동안은 아주 아주 어려운 해외지점 생활이 되었습니다.
동경지점에서 실행한 헤지거래는 정말 헤지의 개념에 적합한 것이고 방법이나 시기가 타당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건 데, 당시 헤지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관련 책 좀 읽어서 쌓은 알량한 지식으로 무모하게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우선, 자금운용 상의 문제를 자금조달 문제로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동경지점의 수익성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자금 조달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대출금이 연체되어 부실자산이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미수수익으로 계상하지 못하여 당기순이익에 기여하지는 못하지만 조달금리를 훨씬 상회하는 연체이자율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달금리가 올랐다고 해서 함부로 헤지할 성격의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부실자산을 정리하고 밀린 연체이자를 징구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 졌어야 했습니다. 취급 경위, 당시의 정치적 상황, 차주의 배경 인물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관련 부실대출금을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헤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금운용, 즉, 대출팀과 충분히 협의하여 이들의 동의와 승인을 받았어야 할 사안이었지 자금조달팀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실행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관련 손익의 관점에서 볼 때도 잘못된 거래였습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실제 고정금리의 장기차입으로 대처하는 것이 정당했습니다. 선물거래는 그 손익이 매일매일 정산되어 손익계산서에 반영되기 때문에 기간손익의 왜곡이 발생했습니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금리 추가 상승에 따른 헤지의 효과와 하락의 위험성을 좀 더 심사숙고했어야 했습니다. 금리상승의 막바지 단계에 들어간 상황에서 추가적인 금리 1~2% 상승에 대비할 사안도 아니었습니다. 하려면, 금리가 4~5%였던 1989년도에 했어야죠!
결론적으로, 금리 상승에 대비하여 지점의 이익규모를 일정 수준에 고정시키고자 실행한 유로엔선물거래는 전혀 헤지거래가 아닌 투기거래였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지의 소산으로 겁없이 실행한 투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헤지거래로 인해 곤욕을 치렀지만, 동경지점을 떠나온 뒤에도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는 신상의 “헤지 안 한 책임은 누가 지나요?”란 물음이 자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측면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을 때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않고, 그 일을 외면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교훈적인 측면에서 신상의 말을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참! 젊은 시절의 패기가 느껴지는 말입니다.
“헤지 안 한 책임은 누가 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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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나기는 일본 신화에 나오는 창조의 신의 이름을, 헤이세이는 히로히토 일왕에 이어 1989년에 즉위한 아키히토 현 일왕의 연호를 따서 붙인 명칭입니다. 헤이세이 경기는 1986년 11월 ~ 1991년 2월에 걸친 51개월 간 지속되었습니다.
**레이건 정부 당시 미국의 쌍둥이 적자, 즉,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달러화의 가치를 내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는 정책을 채택한 합의입니다. 발표 다음날, 달러화 환율은 1달러에 235엔에서 약 20엔이 하락하였고,. 1년 후에는 달러의 가치가 거의 반이나 떨어져 120엔 대에 거래가 되었습니다.
***대출금이 부실화된 것은 정치적인 배경으로 대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차주사의 배경에, 1970년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의 주인공인 모 여인이 동경에 있을 시 이 여인을 보호한 것으로, 그리고, 일본에서 주먹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재일 한국인 모 씨가 있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금융감독기관이 동경지점을 검사하러 와도 이 대출금의 부실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다고 합니다. 당시까지 연체이자만도 100억 엔이 넘었던 그런 대출금이었습니다.
****Strip 헤지란 헤지해야할 변동금리부 자산이나 부채가 장기간에 걸쳐 존재할 때 동기간에 걸쳐 각 결제월의 단기금리선물을 동일 수량 만큼 매입하거나 매도하는 헤지기법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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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체적이고 현장강있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