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복 중의 복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귀한 일이요 복된 일입니다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녀 삼으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만한 삶을 살지도 못했고 그 분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의 기준에 합당하지도 않아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녀됨의 감격을 입술 뿐 아니라 심령 중심에서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자녀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하는 말씀들이 오늘 성경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14절에 보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로 알거니와...’, 19절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4장 4절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13절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 사도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됨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깊이 심어주어 이 땅에 사는 동안 부끄러움이 없는 주의 백성으로 살도록 인도하려는 목회적 열정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을 에베소서 2장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요, 이 세상 풍속을 좇던 자요,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던 자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우리의 모습,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까 달라진 줄 믿습니다. 달라졌다고 하는 의미에는 변질과 변화가 있습니다. 우유나 생선 같은 것을 마트에서 사 오면 언제까지 먹어야 한다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유를 먹다보면 밀릴 때가 있어요. 오늘이 14일인데 유통기한이 13일 까지면 ‘아, 하루 지났구나’ 하고서 긴장되지만 일단 컵에 따라 맛을 봅니다.
‘아직은 괜찮네..’ 그리고 우리는 계속마십니다만 아이들은 기겁을 합니다. 기한이 넘었다면 일단 마셔보기 전에 그냥 쏟아 버려요. 요즘 젊은 사람들의 가치관은 낸정하기 이를데 없습니다만 사실 그것이 옳바른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변질되었다면 아까워도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변질되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 버릴 수 있겠습니까? 버려야 되는데, 버려야 당연한데, 이걸 못 버리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성도 여러분, 변화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긍정적으로 달라짐, 예수 안에서 그 분을 닮는 변함은 언제나 은혜로운 모습이요 아름다움인 줄 믿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된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지혜로웠고 머리가 좋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술수가 뛰어나고 융통성이 탁월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서 돈도 많이 벌고 자기가 원하는 소원도 이루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부자가 되었고 이루고 싶은 일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루었기에 그는 성공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삶을 기초부터 흔들어 버리셨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복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어찌 복이 되겠습니까? 그거 착각해도 큰 착각이지요. 야곱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법은 다 동원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형제도 속였고 부모도 속였습니다. 일가 친척도 속이면서 돈이 되는 것은 다 모았어요. 거부가 되었고 이제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들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어요.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훅 부시면 먼지 같이, 검불 같이 날아 가거니와....’ 착각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야곱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어요. 결국 그 많은 재산들, 사회적인 성공의 이름들을 다 포기하고, 압복강에서 홀로 남았어요. 천사와 씨름하다가 천사가 떠나려고 하니까 야곱이 눈물로 고백합니다. ‘떠나지 마세요’ 그 전에는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았어요. 잘 사는 것 같이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 철이든 야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말로 철들었다고 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엉덩이뼈를 부러뜨렸어요. 큰 시련을 주신 거예요.
신앙생활 잘 가다가 어떤 시련이 생기면 삐끄덕 하고 그 소리가 요란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고 나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 간절한 사모함, 그 사자를 붙잡는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하나님을 향한 그 열정과 사모함은 변하지 않았어요. 절대로 내 환도뼈는 부러지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모함은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제야 물어보십니다. ‘내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말에 히브리적인 의미는요, 도둑놈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도둑놈이었어요. 부모도 속이고, 형제도 속이고, 일가친척도 속이고, 다 속였어요. 돈벌이만 된다면 다 속였습니다. 도둑놈이지요?
일본말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생각하라. 일본사람들이 외형적으로는 친절하고, 아주 예의 바른데, 머릿 속에는 뭐라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서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민나도로보데스, 모두가 다 도둑놈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람을 대한다는 거예요. 도둑놈 눈에는 도둑놈 밖에 안 보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 야곱이 도둑놈으로 살았으니까 자기가 상대한 모든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먼저 빼앗고, 약삭빠르게 빼앗아야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이름이 무엇이냐?’ ‘도둑놈입니다. 약탈자입니다.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입니다’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 입으로 너의 인생을 좀 내가 한 번 고백해 보라는 거예요.
그 전에는 야곱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압복강에서 주님을 만난 고백은 그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 도둑놈 같이 살았습니다.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았습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내 입으로 그렇게 고백할 때까지 내가 기다린거야. 그리고 이제 내 입으로 고백하니 내가 말하는데 너 이름 바꿔. 이스라엘이라 해라’
그 후에 이스라엘의 인생은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이요, 축복된 인생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시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그것은 헛수고 하시는 거예요. 헛수고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저 헛수고인데.....’ 더 안타까운 거는요, 헛수고라고 얘기를 해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들을 만한 믿음의 분량이 안 되기 때문에 못 해 주는 안타까움이 더 마음 아파요. ‘성도님 그거 헛수고예요’ 라고 얘기를 해 주어야 하는데 못 해주는 거예요. 그거 얘기해 주었다가는 시험 들까봐요. 그나만 있는 신앙도 떨어질까봐 못 해주는 거예요.
신약에 와서 대표적으로 주님을 만난 후에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젊은 사람이 공회 의원으로 재물도, 학문도, 권세도 가졌던 전천후입니다. 출세의 모델이지요. 얼마 전에 30대에 청와대에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던 사람이 검찰에 출두하대요. 난 1억 밖에 안 받았다고 그러대요. 그렇게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권세도, 젊은 나이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모델 같은 출세의 상징도 별거 아니구나. 6개월도 못 가는구나.
사울이 그랬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더 착각하고 살았던 집은 자기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해선 한다고 행동이었어요. 성도들과 상대해 보면 가끔씩 웃기는 일이 있어요. ‘목사님 저 기도해 보니까요. 하나님이 이 교회 가라고 해서 응답받고 왔어요’ ‘아, 그러세요?’ 그리고 한 몇 년 열심히 해요. 어느 날 찾아옵니다.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요?’ ‘제가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이 떠나라 그러데요. 그래서 응답받고 떠납니다’ 아주 웃기는 일이지요. 자기가 생각 다 해 놓고, 그 모든 결정은 하나님 이름 다 갖다가 써 먹는 거예요. 하나님 이름을 도용하는 거예요. 얼마나 편리하게들 사는지 몰라요. 자기가 결정 해놓고 다 하나님이 응답주셔서 하는 거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래요. 아주 목사를 앞에 놓고 희롱하고 있는 거지요. 자기 편의 대로 모든 것을 생각 하지요.
오늘 이 사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실 줄 알았어요. 성경에 보면 여호와에 대하여 특심하였더라. 그런데 다메섹에 가서 아나니아와 하는 제자와 그의 공동체를 또 잡으러 가다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지난 번 성지순례에서 처음으로 시리아의 문이 열려서 시리아에 중부연회의 감리사님들이 다녀왔는데, 그 다메섹커스에 지까라고 하는 스트릿에 다녀왔어요. 쭈욱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바울이 걸었던 그 지까라고 하는 길, 거기에 있는 아니니아에 있는 집에 들어갔어요. 사울은 아나니아에 있는 집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의 보살핌을 받고, 그에게 세례를 받고, 안수 받아서 눈을 뜬 줄로 믿습니다.
참 감동적이었어요.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울이 바울된 그 현장을 이 시리아의 문이 열려서 처음으로 들어갔어요. ‘아, 이 집에서 사울이 세례를 받고, 바울이 되었구나’ 주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었는데 사울은 그렇게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주님은 네가 뒷발질하기가 마치 소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처럼 고통일거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내가 싫어하는 일을 너는 네 이름으로 그렇게 신나게 하고 있는지 너 그거 모르느냐! 사울은 거기서 주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무엇이 원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면서도 당당하게 생각했던 사울, 다메섹에서 주님 만나고 나서 달라진 줄로 믿습니다.
사울이 바울 되듯이, 야곱이 이스라엘 되듯이 변화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집사가 되었습니다. 권사가 되었어요’ 라고 말한다고 해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그의 인격을 배우고, 그의 인격을 닮아서 삶의 내용들이 변화되어지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줄 믿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지요. 주님 만나서 달라진 것, 글쎄, 옷차림도 조금 달라져야 하겠지요? 주일예배 때는 옷차림도 달라지기를 저는 바랍니다. 가장 여러분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옷들로 입고 오시고, 좀 노인들은요, 이쁜 옷들 입혀 보내세요. 꾀죄죄하게 다니시지 마시고, 자식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또 우리 자신들도 가장 정중한 모습으로 나와야 되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데가 엎드려 절하는 기본적인 예배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지금 여러분들이 의자에 편하게 앉아 계시지만, 그 예배의 중심은 엎드려 절하는 예배의 중심의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 어떻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 수가 있어요? 있을 수 없잖아요. 어떻게 팔짱을 끼고 예배를 드릴 수가 있어요? ‘아, 어떤 목사님들은 강단에서 다리 꼬고 있던데요?’ 그거 배우지 마세요. 그 분도 100% 온전한 것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배우지 마세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만약 여러분들이 청와대의 대통령에게 초대를 받았다면 난리가 날 거예요. 뭐, 백화점 가서 옷부터 고르기 시작하고, 벌써 한 달 전부터 머리를 볶으고 지지고 난리가 날 거예요. 여러분들이 대통령 앞에 가서 주머니에 손 넣고, 팔짱 끼고, 다리 꼬고 그리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우리의 한민족의 정서로는 우리가 윗사람 앞에서 그러지 못하잖아요. 하나님이 대통령과 비교가 됩니까? 대통령을 100명이 모아놓은 들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모습이, 정말 그런 마음이 표현이 되는 것입니까? 외형적으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 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전에는 내 중심이예요. 교회 오는 날은 어떤 날? 별 볼일 없는 날. 친구와 만나자는 약속도 없고, 뭐, 백화점 할인하는 세일기간도 아니고, 아무런 스케줄에 뭐가 없어서 교회나 가자. 전에는 그러고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님을 만난 후로는 그러지 않았어요. 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 중심으로 달라진 줄 믿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예요. 시간도 하나님 중심, 내 물질도 하나님 중심, 내 마음의 씀씀이도 하나님 중심, 내 삶의 기준도, 내 삶의 가치관도, 내 삶의 우선순위가 이제는 내 삶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그 때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는 줄 믿습니다.
입으로 내 스스로 이야기 한다고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 놀랍게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은 세상 사람들이 더 잘 알아요. 우리끼리 집사님, 권사님 백날 해봐야 우리끼리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끼리도 잘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좀 당부하고 싶은데, 성도들 중에 직책이 있는 분들은요, 직책을 부르세요. 김집사님. 박집사님. 님 자 부르기 어려운 같은 선교회 또래면 김집사, 박집사 이렇게 부르세요. 함부로 이름 부르지 말아요. 천박하고 안 좋아요. 정말 덕이 되지 않아요. 그것 좀 바꿔 주세요. 이은숙 권사님, 박은경 집사님. ‘야, 은경아’ ‘은숙아’ 이렇게 좀 부르지 말란 말이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책이 있잖아요. 아니, 권사님, 같은 또래면 김집사, 박집사, 그렇게 부르면 얼마나 좋아요. 이게 무슨 아주 유치한 사회 모임도 아니구요. 그것은 친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끼리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세상 사람이 보면 더 냉정합니다.
제가 몇 번 이야기 한 기억이 나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군목을 2분 모셨는데, 새로 온 군목이 있었어요. 23, 4살 밖에 안 되었지만, 신학대학원을 나왔기 때문에 중위를 달고 입대를 했어요. 군의관과 법무관은 중위로 들어와요. 사단장은 별을 2이나 단 사람이예요. 하늘 같은 사람입니다. 일반적인 중위들은 사단장 근처에도 못 갑니다. 그런데 새로운 군목이라고 해서 새로운 목사님이라고 환영파티를 열어 주었어요. 마주 식탁에 앉았습니다. ‘목사님 우리 부대에 새로 오심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소주잔을 딱 주고, 한 잔 받으십시오. 제가 그 뒤에서 서빙을 했거든요. 육군병장 황병장. 손이 떨려요. 사단장께서 육군중위에게 술을 다 하사하시고 벌벌 떨면서 술을 받아서 돌아서서 황송하게 그 잔을 받았어요.
한 잔 마시면요, 처음에 한 잔만 받으라고 하지만, 그거 무너지면 두 잔 세 잔은 그냥 가는 거예요. ‘한 잔만 먹어. 한 잔만 받어’ 그 한 잔을 깨기가 어렵지요? 한 잔만 받으면 그냥 가는 거예요. 1차가 끝났어요. 술을 먹는 사람들은 1차로 끝나는 법이 없어요. 1차는 형식적인 모임입니다. 소위 파티 매너를 가지고 정중하게 하는 자리가 1차모임이예요. 술 먹는 사람들의 본심은 2차, 3차에 가야지 본색이 드러납니다. 초청받은 분들 다 떠나고, 연대장들, 참모들 둘러앉아서 2차가 시작이 되었어요. 정말 현대적이고 멋있는 목사님이 우리 부대 왔다고 그렇게 추켜 세우던 그 사단장이 1차가 끝나고, 2차가 시작되면서 연대장보고 사단장이 ‘이번에 온 목사도 돌파리가 왔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는 우리는 세상이 더 잘 압니다. 정신 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너희의 행실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끼리는 이야기 해서 소용이 없어요.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고, 복되다고 해야 그게 복이고,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고 당신들은 우리 지역에서,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라고 해야 우리가 빛과 소금이예요. 그래서 주님도 너희가 세상에서 빛이요, 세상에서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한 해를 마무리 되는 이 12월 중순에 우리가 와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당시의 초대교회의 성도등을 향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된다고 하는 것, 여러분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으로 그렇게 말씀을 하면서 이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자녀답게 사시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21세기의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 초대교회에 간곡히 권면했던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에 응답들이 바로 오늘을 통해서 증거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우리 중심이었는데, 주님을 만난 이후에 우리의 모습이 이제는 우선순위가 달라져서 하나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믿음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먼저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이웃을 주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 달라지는 성도의 삶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하나님 자녀됨에 아름다운 증거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되게 하시고,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소망 가운데 살면서 성도의 순결함을 유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