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재학 시절 4학년 때인 1982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를 만난 송홍섭은 "당시 대학생이었던 유재하는 내게는 굉장히 얌전한 학생이었고 성품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 이었다. 그런데 팝 음악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재하는 앞으로 팝 음악에 있어서 자기 깃발을 확실히 꽂을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 회고했다.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이 2개월의 짧은 여정은 학교에서 대중음반 분야의 아르바이트는 허가할 수 없다는 사유로 중단되었다. 대학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86년에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 에서 객원 멤버로 활동하였다. 대학 선배 한봉근은 "콘서트때나 녹음 때 한두번 세션으로 도와주었을 뿐이지 정식 멤버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 그룹에서는 6개월쯤 활동하였으며 대구, 부산 등지에서 신촌 블루스 팀과 함께 지방 공연을 갖기도 했다. 김현식에게는 자신의 1집에 수록될 전곡을 주었다. 하지만 밴드 멤버와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고, 후배 뮤지션을 편애하지 않고 챙겨주려 곡 하나만 가져간 김현식의 뜻을 오해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에 6개월의 밴드 활동을 접었다. 이후에는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 위해 언더 음악의 산실 동아기획을 찾아가 한양대 음대 선배로 기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던 포크 가수 이원재와 함께 데모 테이프를 제출, 김영 사장은 고민 끝에 상업적 성공이 불안했던 유재하의 음악을 탈락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영은 이를 부인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잘못된 소문이다. 이원재는 이원재대로 따로 음반을 냈다. 원래 유재하는 김현식의 3집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세션 멤버로 내가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이 유복한 탓에 김현식 3집 녹음과는 별도로 자비를 털어 자신의 독집을 녹음한 것이다. 당연히 앨범 제작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조원익이라는 베이스 치는 친구가 음반 재작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며 유재하의 앨범을 넘겨달라 했다. 유재하도 좀 도와주면 어떻겠냐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유재하는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고, 1987년 8월 자신의 데뷔앨범이자 유작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한다. 음반이 발매된 후 유재하는 조원익에게 매니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조원익은 스스로 생각해봐도 매니저로서의 자질이 없었다고 여겼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여 얼마동안은 함께 일을 보러 다녔다. 이렇게 잠깐 매니저를 맡은 조원익은 그의 사후처리 문제까지 맡았으며 결국에는 추모공연까지 기획하게 되었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당초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었으며, 발매초기에도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터득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음악관계자들조차도 '노래가 이상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MBC방송 심의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시작되는데 PD들은 이를 듣고 그를 박자도 못맞추는 가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KBS의 <젊음의 행진>에서 한번 <내 마음에 비친 내모습>을 부른게 유재하의 유일한 TV출연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앨범의 수록곡 <지난날>은 예선에서 탈락, 그를 한층 더 낙담으로 몰아갔다. 크게 상심한 유재하는 국내 음악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조 섞인 상실감과 자괴감을 드러냈다. "제 노래 들어보셨어요? 우습죠?" 이 무명의 시간은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부담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불운의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은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 유재하의 음반을 발매한 서울음반의 이재석은 유재하를 '순한 바람'이라고 회고하였다. "레코드가 나온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자신의 작품에 대해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그는 벌써 다음 앨범을 계획하며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더군요." 1987년 10월 31일 오후 5시 30분경 어둑해질 즈음이었다. "형, 잠시 나갔다 올께,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께." 평소에도 다정다감했던 동생은 수술을 받고서 칩거하던 형의 볼에 뽀뽀하고 문을 나섰다. 이날 동창회에서 1집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던 그는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은 친구의 차에 올랐다. 1987년 11월 1일 새벽 3시 27분경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부근에서 술에 취한 친구 성낙헌이 몰던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한도콜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로 인해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주검은 경기도 용인 천주교 용인공원묘지에 묻혔다. 유재하의 무덤 앞에는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의 악보 조각상이 있는데, 그 악보 중 2개 음표가 틀렸다. 그의 친형은 "동생의 미발표곡은 남아있지 않으며, 동생이 대략 5년간 11곡을 썼다."고 밝혔다. 사망 후 일반인들과 음악전문가들 사이에 유재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과 동시에 유재하의 음악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3년 후 같은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연예계에는 '먼저간 유재하가 술친구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 는 호사가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여기에 더해 유독 11월에 연예계사건사고가 많이 터지면서 '11월 괴담설' 로까지 부풀려졌다. 사후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은 아들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음반수익과 성금을 기탁하여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1회 대회 수상자인 조규찬을 필두로 유희열, 고찬용, 김연우, 나원주, 정지찬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발라드의 황제로 불린 신승훈은 자신의 데뷔 20주년 앨범을 유재하의 기일인 11월 1일 발매했다.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은 한국 발라드가 음악적으로 10년은 후퇴했음을 의미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유희열은 "유재하씨가 음대 작곡과 출신이란 걸 알고는 음대에 진학했어요. 거기 가면 그 정도 실력이 될까 하고요. 대학에 진학한 뒤 유재하 가요제에도 출전했죠."라고 고백하는 등 유재하는 후배 창작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작곡가 김형석이 음악에 발을 디딘 것도 그의 노래가 계기가 되었다. 유재하 음악의 가치는 영화와 각종 TV 프로그램, 언론 기사에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다. 1985년 조용필을 필두로 이문세, 한영애,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FT아일랜드, 박진영, DJ DOC, 조규찬, 왁스, 이기찬, 정수라, 나얼, 백지영, 김조한, 박정현 등 수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에픽하이는 2집 앨범에서 〈11월 1일〉이란 곡으로 김현식과 유재하를 추모했다. 1996년 저명한 클래식 연주자 리처드 스톨츠만은 자신의 음반 《Spirits》에 〈사랑하기 때문에〉를 수록했다. 한국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부제로 찍혀 있다. 1997년에는 후배 음악가들이 헌정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를 발표하였다. 앨범 발표 당시 크게 히트하지 않았던 〈우울한 편지〉는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범행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로 영화에 삽입되어 다시 히트하기도 하였다. 유재하의 유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목록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7년 1월 4일에는 그의 1집 제목을 딴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가 개봉했다. 차태현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 영화는 느낌이 괜찮았는데 저는 좀 걸렸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 건 유재하 노래로 채워진다는 게 좋아서였다"고 밝혔다. 주지홍 감독은 "나는 시나리오 각색에 참여하다 연출까지 하게 됐다. 평소 유재하의 노래를 좋아한다. 유재하 노래의 가사를 영화를 통해 소개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유재하의 노래를 통해, 우리 영화를 같은 느낌으로 끌어가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