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르투 관광하자고 했지만 하루에 볼 수 있는 곳은 몇 안 된다. 예쁜 것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과 다니는 건 관광이 아니었다. 무엇을 입에 넣을 것인가만 관심 있는 아이들을 위해 비싼 레스토랑(포르투 해변공원의 Lais de guia)에서 점심을 사 먹고, 대신 저녁은 장을 봐서 저렴하지만 푸짐하게 먹었다. 16.5유로 문어다리 요리는 맛있다. 아주 부드러운 문어 다리다.
레스토랑 음식값은 스페인과 자꾸 비교하게 된다. 스페인에 아주 오래 살았던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게 된다. 포르투갈 음식값이 확실히 싸다. 마트에서 사는 식재료도 싸다. 특히 양질의 소고기가 매우 저렴하다.
2.
아이들이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지낼 것인지 관심이 많다. 일단 8월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했지만 아이들이 50일을 꾸준히 노력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말은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만 약속을 지킬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정고시 합격이 가능한데, 그건 내 스트레스 값이다. 온갖 압박과 보상을 통해 아이를 한 방향으로 몰고 가야만 하는데, 벌써부터 하기 싫다. 무서운 게 없었는데, 두려운 상황이 하나 둘씩 생기고 있다.
3.
점심 직후에 근처에 있는 수족관(Sea Life)에 갔다. 어른1 어린이2 합이 32유로다. 부담스럽지만 관광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지불했다. 수족관은 이미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서 그런지 포르투 수족관은 애들 장난 수준이다.
4.
포르투 성당을 찾았다. 보기에 따라 교도소나 철옹성처럼 보인다. 1722년에 완공했다고 적어놓았다. 300년 된 성당이다. 12세기에 지은 산티아고 대성당보다 훨씬 소박하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상당히 화려하다.
벽면의 부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로댕의 지옥의 문도 떠오르고, 앙코르와트 사원의 부조도 생각나고, 사찰의 탱화도 연결된다.
종교를 떠나 그 지역의 역사와 정서가 반영된 이야기가 부조 속에 스며 있다.
3차원 입체 작품은 확실히 직접적인 메세지 전달이 있다. 막연히 종이에 그리는 그림보다 공간을 차지하는 조소작품이 더 어려운 창작이라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다는 설명을 진즉에 들었는데, 입체작품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까 인간은 왜 3차원 입체를 먼저 만들고 나중에 2차원 그림이 탄생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졸음이 몰려온다. 관광이 걷기보다 훨씬 피곤하다. 하려고 했던 말을 다음 포스팅으로 넘긴다)
5.
조소작품은 전달과정에서 정보의 손실과 왜곡이 없다. 현실세계를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로댕의 <칼레의시민>을 떠올려보라.
"700년 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죽음으로 걸어가는 6명의 영웅은 동상으로 태어나는 영웅의 당당함과 의연함이 없다. 지금은 없어진 로댕갤러리에 칼레의시민 12개 진품 중 하나가 전시돼 있었다. 동상이지만 받침대가 없어서 관람객과 칼레 시민의 눈높이가 같다. 그것은...."
이런 설명글과 관계 없이 <칼레의시민> 작품을 직접 보면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된다. 번역 과정이 필요 없다. <칼레의시민>은 700년 전 상황을 지금 내 눈앞으로 타임슬립을 통해 가져왔으면서도 청동 주물의 물리적 특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만난 역사적 유물로서 대형 성당들은 성경 말씀을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었다. 라틴어 성경만 있고, 금속활자 발명 이전이라 성직자의 말씀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역사를 전달 받을 수 없을 때 성당 벽면의 부조 작품은 대중에게 이야기 전달의 역할을 한다.
그런 생각의 전개가 앙코르왓 부조와 우리 사찰의 탱화를 소환한 것.
한편 <칼레의시민>을 보고 그렸거나 촬영한 사진으로 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머리속에서 번역의 과정을 거쳐야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3D <칼레의시민>을 2차원 평면으로 flatting했기 때문에 상상 속에서 그림이나 사진을 입체로 복원하는 과정을 번역이라고 말한 것이다. 환조 작품인 <칼레의시민>을 한장의 사진으로 본다면 정보 손실도 감수해야 하고, 여러 방향에서 찍은 사진을 본다면 좀더 세밀한 상상의 번역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경우에도 정보손실은 발생하고, 입체로 복원하기 위한 훈련에 따라 상상의 정확도가 달라진다.
어린 아이가 펜을 손에 쥐고 도화지에 사람 얼굴을 그린다며 대충 동그라미를 그리고 점을 찍거나 선을 그어 졸라맨 수준으로 완성해도 어른은 "얼굴"로 인식한다. 실제 얼굴과 도화지에 무질서하게 그어놓은 선은 깊은 골짜기가 가로 놓인 서로 다른 지평이다. 너무 먼 다른 지평을 같은 대상으로 인식하기 위해 골짜기를 메우는데 0.1초도 걸리지 않는다. 순식간 두뇌 프로세서가 작동했다. 심지어 누구를 표현한 것인지도 알 수 있다.
3차원 현실을 평면으로 납작하게 만든 일이나 2차원 그림을 보고 현실의 입체를 상상하는 것이 '예술'이란 이름의 인간 고유의 활동이다. 3차원 표현에서 2차원 표현으로 건너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후 사람들은 2차원 그림을 더 압축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혁명적 발상을 하게 됐고 글자가 탄생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글자를 잘 다루고 잘 쓰며 남이 쓴 것을 상상 속에서 빠르게 입체로 복원하거나 정돈된 개념으로 떠올리는 사람이 권력을 집행하는 실무자로 기득권을 누렸다.
텍스트 작성과 텍스트 해석은 오랜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잘 훈련된 자는 <칼레의시민>을 보지 않고 서술된 문장만으로도 감동을 받는다. 이런 사람을 '문자형인간'으로 부르기도 한다. 모두 문자형인간은 아니다. 해방 이후 한국의 학교는 문자형인간의 육성을 목표로 설정했다. "공부해서 출세하라"가 학생 및 학부모가 받아들이는 현실적인 교육목적이다.(20세기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
이제 문제가 되는 건 학생들이 문자형인간으로 자신을 훈련시켜도 출세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부터다. 그건 경제의 악화로 인한 3포/5포/7포 세대 언급과 다른 문제다. 본질은 사회적 권력(정치적 권력과 구분하여)을 획득하는데 문해력과 글쓰기 능력이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깨달음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올 수도 있고, 돈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권력에 봉사하며 사회운용의 중추 역할을 하는 중간 간부가 문자형인간일 필요가 없다는 건 보이지 않는 혁명의 결과다. 나향욱 교육부기획관의 문제 발언은 철저히 과거 패러다임을 배경으로 한다. 나 기획관의 주인인 권력은 과거 패러다임에서 민중을 개돼지로 생각"했다". 과거 패러다임이다.
(이제 리스본으로 이동~ 공항에서 시간보낼 때 이어서 갑니다)
6.
보이지 않는 혁명의 결과란 디지털 문명 전환이다. 자본 권력은 더 이상 매뉴얼 전달을 위해 문자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된다. 공장을 가동하여 대량생산을 하던 시대(3차산업혁명)는 노동자의 문해력이 필수 사항이었다. 농기구를 이용하여 육체노동을 하는 농민(농노)은 글을 읽거나 쓸 필요가 없지만 공장에서 기계를 다뤄야 하는 노동자는 매뉴얼 숙지를 위해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를 일선에서 관리하고 감당해야 하는 중간관리자가 텍스트에 능통해야만 했던 것.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매뉴얼이 단순해지고(GUI; 모니터의 그림 아이콘을 터치만 하면 원하는 작동이 가능해진 맥OS 인터페이스나 윈도우즈 시스템을 말함)더 나아가 음성으로 기계를 작동시키고 아예 혼자 움직이는 자동차의 구현은 머지 않아 사실상 매뉴얼에서 텍스트의 완전한 축출을 볼 것이다.
나는 이것이 4차산업혁명의 근본 내용이라고 본다. 창의성 운운은 4차산업혁명을 이용한 새로운 돈벌이를 위한 눈가림일 뿐이다. 그리고 4차산업혁명은 완전한 디지털 문명으로 전환을 알린다.
역사는 일방적인 추동으로는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알려 준다. 자본가가 양질의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해 문해교육을 공교육을 통해 추진했다는 것 만으로 근대에 들어와 어린이청소년의 학생만들기가 성공한 것이 아니다. 즉 텍스트를 잘 다루면 입신양명할 수 있다고 꼬득인다고 해서 모두 학교로 몰려간 것은 아니다.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든 교육받고 싶다는 평등교육의 욕망이 실현되는 시민혁명의 성공이 공교육의 전면화와 일반화를 불러왔다. 양쪽의 요구가 일치했던 것이다.
디지털 문명의 전환도 마찬가지다. 과거 자본은 대중이 물건을 소비하는 존재로만 있기를 바라다가 생산성 한계에 부딪히자 수십 년 전부터 대중의 프로슈머 전환을 추진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래학자로 불린 앨빈 토플러. 그의 제3의물결이 세상에 나온 건 1980년이다. 당시 토플러는 30년 안에 학교가 사라질 것이라 예언했지만 학교는 겉보기에 건재하다.
다만 자본의 입장이 아닌, 억압에 저항하고 근본적인 평등과 개인의 존중을 요구하는 대중의 출현으로 더욱 능동적인 생산소비자(프로슈머)의 전면화, 일반화가 가능해졌다. 그에 따른 현실태가 텍스트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출현이다. 텍스트에 능통한 세대는 텍스트를 거부하고 무엇으로 정보전달과 학습을 할 수 있냐고 강하게 저항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먹지도 못할 거 텍스트는 어디다 쓸 거냐고요...?"
4차산업혁명은 평면 이미지를 flatting해서 1차원 선으로 전환한 것을 다시 한번 flatting하는 작업이다. 선을 압축하면(사실은 분해하면) 무엇이 도출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신분제 폐지 이후 대중에게 가해진 억압기제가 무엇인지 살펴야 가능하다.
7.
돈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고전적이다. 1000년 전에도 엽전 소유 여부는 삶의 질을 좌우했다. 5천년 전에도 조개화폐 소유를 둘러싼 갈등과 좌절, 다른 편의 환희가 있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것을 열망하거나 반대로 지독하게 가난해서 열패감을 가질 수 있으나 소유의 문제가 삶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건 아니었다. 현재 한국이라면 편의점의 유통기한 경과한 음식물만 먹어도 굶지 않으며, 구청 복지담당직원에게 떼를 쓰면 기본적 의식주가 해결된다. 이건 극단적 예시고 단군 이래 부모보다 가난한 자식 세대이다보니 어린이청소년 및 청년들은 목숨의 부지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위기는 보리고개를 걱정하던 시절보다 심각하다.
기본적인 삶의 동력을 가능성에서 찾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면 살아갈 수 있고 자신에게서 가능성이 상실됐다고 생각하면 살 수 없다. 이제는 '살 수 없음'의 개념이 심정지와 같은 물리적 목숨의 상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신과 진단과 약물복용 상태가 살 수 없음을 말한다. 정신과 의사는 과거 힐러와 카운셀러의 역할을 동시에 짊어졌지만 현재는 장의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삶의 의지를 상실한 사람에게 사회적인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고 시신 관리를 하는 것에 빗대어 말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리질리언스(resilience;회복탄력성)가 과거 TV예능의 힐링 언급처럼 유행어로 자리 잡는 배경은 여기에 있다.
청년들은 회복이 필요한 상태로 전락하고, 회복을 담당하는 전문가가 따로 양성되는 사회에 와있다.
청년들은 자신의 가능성 상실이 앞 세대에 의해 생긴 일이라고 믿고 있다. 몸에 불을 붙이며 독재에 저항해서 제도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경제적 부를 독점하고 다음 세대의 몫까지 차지함으로써 자신들(청년들)의 가능성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부모 세대가 깔고 앉아 있는 방석을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고, 구체적 현실태는 '권위 뭉개기'로 나타난다. 나이든 직급이든 통장잔고든 권위를 이루는 요소에 대해 부정적이며 공격적이다.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이미 그런 집은 천연기념물 수준이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대하는 형식적 룰은 크게 달라졌다.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의 방문을 열고 귀가를 보고하면 아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구두보고를 승인하는 모습이지만 둘 사이의 애정은 흔들림 없다. 이런 서술이 자식이 버르장머리 없다는 지적이 아니며 과거 집 밖에 있던 변소가 집 안의 bath room으로 변한 생활모습을 짚는 것과 같다.
권위의 해체를 위한 키는 문자를 당하격하시키는 데 있다. 근대는 권위가 문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문자에 대한 외면 및 공격은 지식관의 변화를 동시에 가져온다. 지식이 개인의 육체에 머문다는 게 근대의 이데올로기이며 책의 외피를 뒤집어 쓴 문자가 지식의 공급원 역할을 해왔다.
문해력을 기르는 일은 동시에 문해력을 격하시키는 작업이다. 집단으로 단위를 설정하고 본다면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는 일은 동시에 공부에서 낙오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일이다. 모두가 높은 수준의 문해력을 가지지 못한다면(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 공부하지 않으면 된다. 자신의 가능성이 지워지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말이다. 이건 20년 전 열등생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대세가 되었다. 학생들은 공부해서 시험점수 높게 받겠다는 친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토씨 다음에 글자를 띄어 쓰는 걸 모른다고 고백하는 40대 아저씨(무한도전의 멤버)는 12년 전 무한도전이 출범할 때는 조롱을 통한 대중의 카타르시스를 노렸겠지만, 같은 인물이 2018년에 문해력 평균 이하임을 고백하는 장면은 시청자와 한 몸이 되는 애정고백 씬이 되었다. 대중문화의 급격한 변화는 脫 text의 조류에 따른 것이다. 이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본디 우주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이다. 우리가 미시세계에 대해 인지할 수 없었을 때 세상은 아날로그의 변화량을 보였다. 출발점이 있고 도착점이 있고 도중에 거쳐야할 기점이 정해진 노선이 아날로그의 세계였고 그것은 우리의 세계였으며 구체적으로 권력의 층위가 고정된 세계, 순서가 정해진 세계, 서열이 고착화된 세계였다. 하지만 미시계로 들어가면 정반대의 디지털 세계가 이미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자본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영역이 전자(電子)의 세계로 옮겨가면서(컴퓨터, 휴대폰, 디지털 영상 등) 원하든 원치 않든 디지털의 세계로 갈 수밖에 없었고, 자본의 추동을 지켜보던 대중은 궁극적인 평등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기꺼이 디지털 문명을 받아들이고 텍스트에서 멀어지는 길을 간다. 늦게 지구에 온 지금의 어린이청소년 및 30대 초반 이하 성인들은 문해력의 낙후를 걱정하지 않게 된다. 문해력 보다는 이해력(이미지 해독 능력)을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이 없다면 다음 걸음이 없는 순례길은 지극히 아날로그의 세계다. 그곳에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스마트폰에 기록하거나 노선 및 숙박업소의 정보를 스마트폰에서 구한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결혼 여부, 나이가 얼마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장 만난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발송하는가만 중요하다. 문자가 아닌 음성언어다. 사운드다. 그리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스카트폰이든 DSLR 카메라든 사진은 디지털 점으로 구성된다. 즉석에서 지구촌 어디든 이미지는 이동되고 메시지도 전달된다. 동시에 저장되고 편집된다. 아니 저장되고 편집된 후 정보는 유통된다. 아니 그 순서를 정할 수 없다. 순서가 아무 의미도 없다.
디지털이 디지털이기 위해서 스스로 기득권과 권위를 던져버려야 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곁에 있는 어른이 권위를 버렸는지 못 버리고 안타까워 하는지에 따라 자신과 관계를 설정한다. 그래서 지금이 큰 갈림길이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겠는가.
아이들은 이미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다고 믿는다. 믿으면 바로 팩트가 된다. 되돌리거나 바꿀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