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특집
내용+형식 외 2편
-I assuage my pain with great aplomb1)
신 동 재
회중석에 앉아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다
정의로움이 말투라면 그 목사님의 말투였다
그는 불의한 삶에 대해서 호통을 치고 있다
정의롭지만 좀처럼 정들기 어려운 그 목사님은
회중석을 보며 이렇게 외쳤다
정의!
정직!
사기꾼!
그리고
위선자!
나는 그 말을 마친 그의 양어깨를 한참 쳐다보았다
연보함에 헌금 봉투를 넣는데
문득 나의 이마가 풀칠 된 것처럼 한 켠이 답답했다
엘리야가 그 목사님 같은 분이라면
기꺼이 미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회를 걸어 나온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다가
목사들의 언행에 실망해 떠났던 한 모태신앙 평론가의 글이 떠올랐다
“내용+형식”
그날 주일 설교는 다 잊어먹고 오직 평론가의 말만 되뇌었다
스크린도어가 닫히지 않아 20분째 정차 중인 지하철 안에서
나는 정말
집이 있는 부천으로 가고 있는 건가 한참 동안 생각했다
1) 나는 내 아픔을 매우 침착히 달랬지
화신과 허션
화신과 허션이 걷는다 세게 부딪친다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
다 화신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허션은 삼배구고두례를 한다
화신은 당황스럽다 화신은 21세기인이고 허션은 18세기인이다
만날 수 없는 둘이 만나고 있다 만날 수 없는데 부딪치고 눈치
까지 살피고 있다 눈치를 살필 만큼 높은 사람은 황제 말고 누
가 있을까 아 황제 아닌데 황제 같은 사람들도 살피는 것이 좋
을 듯하지 깊이 숙여야 그래야 칼날을 피할 수 있지 화신과 허
션이 서로를 극진하게 대우한 까닭 대체 화신이 누구시길래 화
신은 왜 이렇게 황제를 닮았나요?
화신‘들’은 복수이고 허션은 단수이다 화신은 보통 명사이고
허션은 고유 명사이다 질투의 화신, 물욕의 화신, 권력의 화신,
그 숫자만 세는 숫자의 화신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
다 많은 재물을 모은 이가 허션이었다 허션의 성姓은 니오후루
다 니오후루는 만주어로 늑대라는 뜻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늑대로 불렸다 온통 늑대들이 횡행한다 21세기의 한국인이든
18세기 만주족이든
화신은 허션에서 나왔다 화산이 허션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
는 화신은 많지 않다 방금 그 말을 들은 화신은 표정 하나 바
뀌지 않고 덤덤하다 화신들은 자신은 화신인지 모르기 때문이
다 허션은 50세에 목을 매 죽었다 가경 황제가 허션의 재산을
몰수했더니 청나라 총예산의 12년치였다고 한다 12년치가 있어
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 그 정도는 되어야 늑대라 불릴 수 있
다 허션의 재산을 빼앗은 가경 황제는 그것으로 사치를 부렸다
허션은 황제 같아 보이는 사람 외 삼배구고두례를 하지 않았다
황제 같은 대접을 받는 화신들은 어느새 황제처럼 변해 있다
황제 같다는 말이 욕으로 들리지 않는 화신을 뺏고 싶다 뺏을
수 없지만 뺏고 싶다고 하는 뺏음의 화신이 방금 출현했다
열기
발신자 없는 메일을 연다
너는 화면을 뚫고 허공에 나열됐고
문장이 된 까닭을 말했다
제목이 본문이 되고
본문이 제목이 되는 것이 시라면
공무원도 시인일 걸
구름에게 이것을 하시오 꽃에게 저것을 하지 마시오
공문도 시가 되는 날이 있을 것 같다
시킨 대로 하지 않으면
메일 제목으로 불려갈 것 같아서
태그되고 퇴근될 것 같아서
너는 생기가 없어진 불평을 수집하러 간다
휴지통에 수북한 네 시 정각을 모으러
그걸 화사하게 희사喜捨하는 것이 너의 장래희망
너는 메일의 활자가 되었지
키보드가 손가락을 치기 시작할 때 그것을 참고 터져 죽었지
답장을 쓰는 메일의 번진 자국이 되었지
오후에 박히다가 쏟은 식곤증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푸른빛 습관을 줘
빽빽한 숫자도 낭송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공무원의 일과日課
하지 않다가도 스쳐가는, 십 년 전 서류철 속 법령들이 우리의 습관
습관을 집계하는 것도, 유서를 쓰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해본다
시킨 것을 한다, 시킨 것을 한다 입 안에 침을 모은다
<산문>
교사들의 죽음, 학교, 그리고 시
지난 7월 18일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비극은 동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내게 큰 충격과 슬픔의 정동을 주었다. 이후 한 기자회견에서는 다른 기간제 선생님의 죽음 소식이 유족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며칠 전 방송에서는 경기도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두 교사가 6개월을 두고 극단 선택을 한 충격적인 소식도 전해졌다. 이런 비극이 벌어진 정확한 원인은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제도와 법의 허점 속에서 교육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부당하게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었던 일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학교는 원형적 체험이 형성되는 곳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체험에는 학교의 선생님들이 끼치는 영향이 지대할 것이다. 그들이 적절히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은 당장 보이지 않지만 미래의 한국시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 어린이들 중 누군가는 미래 시인이 되고 시를 읽는 사람이 될 것이기에.
사건 다다음날, 사건이 있던 초등학교에 갔다. 이름도 영정도 없는 테이블 3개 위에 국화꽃을 놓고 진심으로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었다. ‘명복을 빕니다’는 말은 이제 상투어처럼 사용되지만, 죽은 이의 명복을 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그의 ‘살아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복되게’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기 때문에. 정교회(orthodox church)에는 빵과 포도주로 나누는 성만찬 의식을 살아있는 사람들이, 먼저 떠난 이들, 천국에 있는 이들과 나누는 잔치로 보는 신학이 존재한다고 한다. 떠난 이들을 직접 볼 수 없지만, 그들이 ‘복되게’ 지내고 있다는 안도감, 그들을 생각하며 내 삶을 더 뜨겁게 살겠다는 다짐. 그런 성만찬이야말로 그야말로 ‘명복’을 비는 행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 이후 매주 토요일이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교사들이 하는 집회가 흡사 정교회 성만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복을 빈다’는 교사들의 말과 행동들이 학교와 이 세계를 더 좋게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
신동재 대구 출생. 2021년 《현대시》 등단.
신인특집
하늘과
땅
사이에
뭐가 있더라? 외 2편
변 혜 지
인부는 먼저 공사를 진행 중이다. 푸른 초원 위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집을 짓는 것은 나의 오래된 소망이었다. 벽돌로만 집을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해주겠다고. 인부는 내가 가진 것을 아주 조금만 받겠다고 말해주었다. 땀을 흘리며 줄눈을 바르는 인부의 목덜미가 아름답고, 부지런히 구름을 캐내는 희고 푸른 하늘이 아름답고, 이 모든 아름다움은 오후에 상장했다가 저녁이 되면 폐지될 예정이다. 아름답다는 말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생각을 그만두는 마음 한편에 앉혀두고서. 기다려. 얌전한 개가 된 생각에게 명령한다. 지급 대금을 공란으로 남겨 둔 인부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그는 내게 첫눈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하늘로 가지를 뻗은 나무가 땅을 그러쥐듯이, 한쪽 무릎을 푸른 초원에 단단히 뿌리박은 채, 내게 구애해올지도 모른다. 인부는 어느새 절반 이상의 공사를 완성했고, 나의 붉은 벽돌집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초원에서 자란 것들은 나의 아름다운 초원,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어항 속의 열대어의 마음을 가진 채. 나는 지불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어쩌면 인부는 내가 지불할 수 없는 것을 대금란에 적을지도 모른다. 붉은 벽돌집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 나머지, 내 것을 송두리째 빼앗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갈지도. 인부는 나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간다. 당신의 집이 완성되었습니다. 기다리세요. 그는 계약서의 공란에 적었다. 집은 내가 앉기에 좋았으며, 웅크려 누울 수 있을 만큼 안락했다. 이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면 되겠다. 그렇지?
ZERO
하나의 문이 등 뒤에 놓여있다.
희재 마지막 밤이야.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작은 아가리를 가진 식탐 많은 7W 전구로부터. 나방과 딱정벌레의 무덤으로부터. 세계 의 명운은 당신에게 달렸으니 눈을 감고 곤두박질하시길 바랍니다. 눈을 뜨면…….
희재 세계로부터 그런 편지를 받았으니까.
겨울, 야외 캠핑장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희재가 말한다. 희재를 위해 떠나온 여행이었다. 월동 준비를 마치지 못한 곤충들이 불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스스로 마지막 퍼즐의 조각이 되기 위해서.
화로 속의 불길이 장작에게 손을 뻗듯이, 나는 희재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 내가 돌본 희재의 마음들은 재빨리 자라서 나이 먹은 자식들처럼 떠난다. 그러나 축하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희재 해 봐. 말 해 봐. 말 좀 해 봐. 말을 좀 해 봐. 나한테 뭐라고 말을 좀 해 봐
불이야. 나는 먼 산을 가리키며 말했던 것인데, 불붙은 산이 거기에 있었다. 희재가 불길보다 더 환한 연기에 눈을 빼앗긴 동안
희재를 향해 열린 문 속으로 내가 뛰어들었다.
희재 열어. 문 열어. 문 좀 열어. 문 좀 열어 봐. 제발 문 좀 열어 봐… … .
바깥에서 문고리를 붙잡은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동안 문 안쪽의 내가 문을 잠그고 영원히 서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이었다.
모자의 일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겁거나
모자 속에 무언가를 넣고 너는 걷는다. 충분히 생을 반복하지 못한 어린 영혼으로서, 나는 네가 모자 속에 무엇을 넣고 다니는지 궁금해한다. 짐이거나 한낱 밈이거나 보잘것없는 신이거나.
네 뒤통수인 줄 알았는데 함석 지붕이어서.
손목인 줄 알았던 것이 녹물이 줄줄 흐르는 철봉이어서.
입술인 줄 알았던 것이 줄기가 푹푹 들어가는 녹색
스펀지여서. 삶이 절실해질 때 내가 미웠어.
그것은 모자의 사정
이전 생에서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나는 무거워지기로 한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너는 충분히 가벼워지기로 한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정정하려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움켜쥐게 돼.
충분히 곤두설 것.
쉽게 우그러질 것.
불행하자. 우리가 충분히 자랑스러워질
딱 그만큼만.
그것이 모자의 일.
<산문>
지속가능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자꾸 잊어버린다. 얼굴을 잊어버려도 사랑은 계속된다.
‘걔가 누구였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잊은 척하는 버릇이 내게 있다.
지속가능한 사랑…….
그런 말을 중얼거리다가 책을 펼치면 페이지 속의 모든 단어가 바뀌어 있을 때가 있다.
변혜지 서울 출생.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