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에게 속가의 혈연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외로움이 수행의 힘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빈 바리때 같은 것입니다. 빈 바리때에 채우는 향기로운 공양물이 수행정진입니다”
비갠 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고명인은 고개를 돌려 혜국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혜국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생가지가 찢어진 나무를 보면 어딘지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이 느껴지지요. 어머니를 잃은 사람을 보면 그런 불균형이 느껴집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스님의 어머니께서는 생존해 계십니까.”
“출가한 승려에게 속가의 혈연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스님들에게도 어머니의 부재는 큰 외로움이지요. 그런 외로움이 수행을 더 잘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구요.”
“외로움이 수행의 힘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수행자에게 외로움은 빈 바리때 같은 것입니다. 비어 있으니 채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빈 바리때에 채우는 향기로운 공양물이 바로 수행정진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수행자의 공양을 향적(香績)이라 합니다.”
고명인은 혜국의 은유적인 말의 매력에 빠졌다. 수행을 오래 한 자는 언행에 향기가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사실 이 석종사를 창건한 것도 저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습니다.”
혜국은 그 이유를 얘기하기 위해 현재 제주도의 남국선원을 맡고 있는 자신의 상좌 얘기부터 꺼냈다. 상좌는 만능 운동선수였다. 태권도도 잘하고 스케이트는 선수로도 활동한 적이 있을 만큼 힘이 넘치고 거친 청년이었다. 그런 상좌의 힘을 혜국은 참선공부로 승화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는 상좌를 불러 말했다.
“너 나하고 봉암사에서 3년만 같이 공부하자.”
“예.”
그러나 상좌는 대답만 해놓고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혜국은 봉암사 선방에서 한 철을 안거한 뒤 해제 때 상좌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혜국은 상좌를 만났다. 혜국은 약속을 어긴 상좌를 추궁했다.
“너는 은사하고 약속한 것도 헌신짝 버리듯 하는 놈이냐.”
“죄송합니다.”
“앞으로 공부는 어찌 할 것이냐.”
“스님, 사실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사전에 말해야 될 것이 아니냐.”
“스님은 벌써 선방에 들어가시고 난 뒤였습니다. 오히려 때를 기다렸다가 스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습니다.”
듣고 보니 상좌의 사정도 딱한 데는 있었다. 이북 출생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 남한 땅에 정착하여 9남매를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형제자매 모두가 시집 장가도 못가보고 죽어 상좌 혼자 남아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계신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 거동을 못하게 되자 자신이 병간호를 하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혜국은 용서하는 대신에 한 가지 다짐을 받았다.
“40살이 되기 전에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를 이를 만큼 참선할 자신이 있느냐. 있다면 네 어머니는 내가 책임지마. 나는 13살에 출가해서 어머니를 한번 모시지 못했다. 그러니 네 어머니를 내 어머니처럼 모실 것이다.”
상좌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어머니를 잊고 40살이 되기 전에 한 손바닥에서 깨침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는 혜국의 다그침에 대답을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40살이 되기 전에 불도(佛道)를 이루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백일 동안 시간을 줄 테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해라.”
“그러겠습니다.”
상좌는 백일이 지난 뒤, 그러니까 혜국이 봉암사 선방으로 다시 들어와 있을 때 답변을 했다.
“스님, 참선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상좌의 어머니를 맡고 난 혜국은 난처해졌다. 찾아보아도 상좌의 어머니를 모실만한 마땅한 절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혜국은 자신이 직접 절을 지으려고 절터를 찾기 시작했다.
해제일이 가까워지자 절터가 더 간절해졌다. 그러던 중 선방에서 꾸벅꾸벅 조는데, 해인사 장경각에서 경험한 것처럼 노사 고경이 또 등 뒤에서 튀어나와 혀를 차며 말했다.
“끌끌끌. 중원 땅에 지가 살던 땅을 놓고 어딜 찾아. 공부를 오죽 못했으면 지가 살던 데를 못 찾아가.”
고경의 꾸중을 듣고 있는 동안 절터의 풍경이 뇌리를 스쳤다. 산자락이 허물어진 자리에 양철지붕의 촌가가 있고, 촌가 마당 풀밭에는 탑이 흩어져 뒹굴고 있었다. 혜국은 뇌리의 영상이 지워지기 전에 고경에게 물었다.
“노장님, 거기가 어딥니까.”
“방금 네가 본 곳이다.”
“지명을 알아야 찾아가지 않겠습니까.”
“인연 따라 찾아가 봐.”
비몽사몽간이었지만 혜국은 절터의 풍경을 잊을 수 없었다. 해제를 하고 난 혜국은 걸망을 지고 나섰다. 봉암사를 걸어내려 와 가은에서 무작정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충주행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혜국은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충주행 버스에 올랐다. 구불구불한 새재를 넘어가니 바로 충청도 땅이었고, 한두 시간 더 달리자 충주가 나타났다. 혜국에게 충주는 생면부지의 도시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산천초목이라는 부동산 사무실이 첫눈에 들었다. 혜국은 산천초목 부동산 사무실로 들어가 다짜고짜 물었다.
“산자락이 허물어지고 양철지붕의 촌가가 있고 탑이 흩어져 있는 땅이 있습니까.”
“사람을 찾습니까, 땅을 찾습니까.”
“땅을 찾습니다.”
그제야 부동산 사무실 주인이 일어나 혜국을 맞았다. 탁발을 온 승려로 알고 있다가 땅을 찾는다는 말에 반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 땅이 있습니다. 3년 전에 내놓은 땅인데 길이 없어 안 팔리는 땅입니다.”
혜국은 부동산 사무실 주인을 앞세우고 양철지붕의 촌가와 허물어진 탑이 있는 그곳으로 갔다. 과연 그 땅은 봉암사 선방에서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혜국은 환희심이 나 부동산 사무실 주인에게 매달렸다.
“이 땅을 사겠습니다.”
“에이, 스님. 이런 땅은 사지 마십시오. 길도 없는 이런 산자락에 어찌 사시려고 합니까. 저는 스님에게 욕먹기 싫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 땅 한 평에 얼마입니까.”
“육천 원입니다.”
혜국은 부처님을 모시게 될 절터를 나름대로 예우하고 싶었다. 그래서 깎지 않고 오히려 평당 값을 500원씩 더 주겠다고 마음속으로 계산했다.
“사장님, 5백 원씩 더 보태서 육천오백 원에 사겠습니다.”
“뭐라고요.”
“더 드려야 한데 돈이 없어 5백 원밖에 올려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부동산 사무실 주인은 아주 만족해했다. 그러면서도 혜국을 흘깃 보던 그는 ‘또라이가 왔구만’ 하는 그런 얼굴 표정을 지었다. 그때 혜국이 우여곡절 끝에 사들인 땅은 8백여 평이 될까 말까 했다.
혜국이 먼저 한 일은 상좌 어머니를 모셔 오는 일이었다. 상좌가 어머니를 잊고 참선공부만 매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상좌 어머니에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외진 산속에 모셔와 보니 상좌 어머니가 외로움을 타는 것이었다.
‘이왕 이곳에다 내 인생을 걸 바에는 절집 돈으로 학교 다닌 빚이나 갚자.’
상좌 어머니의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은 사정이 딱한 누군가를 데려와 함께 살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혜국은 아들이나 딸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 자식이 출가하여 의지할 데가 없어진 어머니 5명과 고아 5명을 데려왔다. 그러자 상좌 어머니의 외로움은 해결됐는데, 이제는 아이들의 학비가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없이 혜국은 마을일을 나가 노임을 벌어들였다. 새벽예불 끝내고 아침공양을 마치면 예비군복으로 갈아입고 쏜살 같이 마을로 내려갔다. 노임은 어른이 1만3천원, 조수가 8천원이었는데, 혜국은 초보자이면서도 일을 잘한다고 하여 1만 2천원을 받았다. 5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나니 6만원을 계산하여 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예비군복을 입은 혜국을 ‘김씨’라고 불렀다.
“김씨, 5천원만 내시오. 저 밑에 길을 좀 닦아서 리어카도 올라다니게요.”
혜국은 5일 동안 일한 임금 6만원을 전부 내놓았다.
“아니, 5천원만 주라니까 6만원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소. 머리가 돌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이오.”
혜국은 이 일로 마을사람에게 머리가 돌았거나 좀 모자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혜국이 마을사람들에게 6만원을 내놓은 것은 언젠가 울력을 해서라도 절로 오르는 산길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노임을 받는 일 중에는 숲 가꾸기도 있었다. 마침 충주에는 숲을 시범적으로 잘 가꾼 산이 있었다. 식목일에는 행사도 치르는 숲이었다. 그날은 농림부장관이 내려와 숲 가꾸기 시범을 참관할 예정이었으므로 많은 일꾼들이 동원되었다. 혜국도 나가 일을 했다. 그런데 장관이 혜국의 등 뒤에 서서 묻고 있었다.
“저분이 누굽니까.”
“머리 깎은 걸 보면 교도소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마을사람들이 다 존경할 만큼 잘살고 있는 분입니다.”
“그렇습니까. 저 분은 스님이 아닙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보면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 산길을 닦고 있는 분입니다.”
“새벽에 길을 닦고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까. 저 분을 좀 만나게 해주세요.”
그런데 장관은 혜국을 보더니 땅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로 절을 했다. 마을사람들이 놀라고 관청의 관리들이 놀랐다. 그러자 장관이 말했다.
“제가 부처님 같이 모시는 스님입니다.”
이 사건으로 혜국은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동네에 유명한 스님이라고 소문이 났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일자리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혜국은 잠시 말머리를 돌려 그 장관을 만난 인연을 얘기했다. 군인들이 군화를 신고 법당으로 들이닥친 이른바 법란(法亂) 때였다. 다행히 봉암사는 스님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군인들이 들이닥치지는 못했다. 그때도 혜국은 봉암사에서 참선하고 있었는데, 서울 총무원의 재무부장스님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군인들에게 조계종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급보였다.
봉암사 수좌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한쪽은 총무원을 지키기 위해 상경하는 것이었고, 또 한쪽은 수좌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에 어둡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는 쪽이었다. 혜국은 후자를 택했다.
“정말 나 혼자 분신이라도 해서 바로 잡힌다면 그거라도 했을 겁니다. 그때 저는 봉암사산내 암자인 백련암에서 장작만 팼습니다. 중견스님들이 다 붙들리어 갔으니 가슴이 쓰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쓰린 마음으로 장작만 팼지요.”
그러던 어느 날 혜국에게 제주도 관음사 주지로 가라는 발령이 났다. 서울 총무원으로 올라가 항의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혜국은 주지 발령을 받기로 하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혜국의 나이 32살 때의 일이었다. 선거 때가 되자 혜국은 말사주지를 모아놓고 법란을 일으킨 정부에 대해서 반감을 표시했다.
“나는 산에만 살아서 세상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짓밟혔습니다. 힘을 합쳐 우리 힘을 보여줍시다.”
그리하여 혜국은 절의 조직과 아무 관련이 없는, 송광사 방장 구산에게 계를 받은 국회의원 후보를 밀었다. 혜국에게 협박이 가해졌으나 혜국은 피해 다니며 그 후보를 도왔다. 결국 그 후보는 유력한 후보를 제치고 당선이 되었다. 다음 선거에서는 어렵지 않게 또 당선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그가 농림부 장관 자리까지 올랐고, 일자리를 잃게 된 혜국은 바로 그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남의 직업을 똑 떨어뜨려놨으니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저희가 하겠습니다.”
혜국에 대한 좋은 평으로 절 땅은 8백 평에서 해마다 신도들이 사들여 지금은 2백 평이 모자란 십만 평으로 불어났다. 바로 그 터에 오늘의 석종사가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고명인은 절 땅의 얘기보다는 상좌 어머니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암자 마당을 나서면서 물었다.
“상좌 분의 어머니는 지금도 이 절에 계십니까.”
“아닙니다. 남국선원으로 가셨습니다. 할머니들 중에 두 분은 여기서 돌아가시어 제가 염하고 화장을 해드렸습니다. 또 두 분 할머니는 자식 스님들이 자리 잡혀 모셔갔습니다. 이곳으로 데려온 아이들도 다 커서 이번에 막내가 대학 졸업해서 나갔습니다.”
이윽고 고명인은 혜국에게 합장을 했다. 그러자 혜국도 짧게 합장하고는 암자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고명인과 헤어지는 혜국의 태도는 조금은 냉랭했다. 수좌들은 잔정을 군더더기로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