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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성경 이야기, 어떻게 읽을까?
일자: 2023년 7월 30일 주일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https://youtu.be/a9GOW11NMV4
설교의 목적: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진다. 성경에 중심을 둔다고 하지만 성경을 읽는 사람이 그 성경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읽어 내느냐에 따라 기독교 신앙의 색깔은 많이 달라진다. 성경에 담겨 있는 많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들려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해석에 따라서 그 이야기는 온갖 색채를 띠게 된다. 어쩌면 독자는 성경 이야기를 읽기 전에 이미 결정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이 말은 보고 싶지 않은 것과 모르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하나의 성경이라는 경전을 가진 교회가 다양한 교파로 나뉘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이 설교에서 나는 성경이야기를 읽는 몇 가지 방식을 소개하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내가 쓴 책 ‘하나님의 경륜’에서 성경 이야기를 읽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소개할 것이다.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의 기독교회가 왜 난관에 봉착했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길로 나가가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님이 그 계시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나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설교 개요
1.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까?
2. 권선징악의 교훈서
3. 내려놓음의 지혜서
4. 그리스도의 예표
5. 천국입성을 위한 매뉴얼
6. 한 가지 부족한 것
7.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1.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까?
지난 주일에 저는 ‘다양한 모습으로 있는 하나의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기독교회에는 다양한 교파가 있습니다. 그 기원과 역사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기독교회의 역사를 훑어볼 때 교파의 탄생은 정치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신앙적으로 새로운 각성을 한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로 태어난 교회들이 그렇고 존 웨슬리의 감리교회나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각성은 교회에 생명력을 공급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다양한 교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만 각 교파가 추구하는 신앙에는 공통점도 많습니다. 동시에 각 교파에는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생명력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주님이 교회들 안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좀더 자세하게 기독교인들의 언행을 살펴볼 때 같은 성경을 읽고 배우는 사람들 사이에 조화되기에 어려워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평가와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평가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2013년 부산에서 WCC 제10차 총회가 열리면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후자는 2020년에 국회에 이 법안이 처음 발의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두 사안에 대해 개신교회의 입장을 보면 겉으로는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분명히 다른 목소리도 존재합니다. 속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잠잠히 있는 사람도 있고 괜히 나섰다가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언제나 개혁과 갱신을 주장한 사람들에게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다른 입장을 가진 두 진영의 사람들 중에 어느 한쪽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진실을 추구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른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저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읽기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즉, 성경 이야기에서 읽어 내는 메시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는 어떤 사람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설교에서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보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그 타당성을 검토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다투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접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성경 이야기, 어떻게 읽을까?’입니다. 저는 먼저 제가 그 동안 성경 이야기를 읽고 이해한 방식에 대하여 되돌아보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권선징악의 교훈서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는 권선징악의 교훈서입니다. 저도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분임을 기억하며 성경을 읽었고 지금도 그렇게 읽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명심보감처럼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윤리의 지침이며 바른 행위를 가르쳐주는 규범집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따라야 할 모범을 발견하고 피해야 할 악행들에 대하여 경고를 받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영웅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며 악한 인물들의 패망을 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금하는 일과 성경이 명하는 일을 구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므로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서 이전에 세워진 명령이 나중에는 변경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에는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는 할례를 행하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 외에 다양한 규례와 행동지침이 율법서에 소개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의 글에서 절기나 할례는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것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헛되게 하는 일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명령으로 지켜야 할 규범이 이제는 따르면 안 되는 규범이 되었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성경의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함정에 빠진 교회들이 더러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제칠일안식일교회가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는 안상홍증인회라고도 하는 ‘하나님의교회’교파가 그렇습니다. 이 교파를 창시한 안상홍 씨도 안식일교회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런 부류에 해당합니다.
이런 오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 규범집으로 읽을 때 일어나기 쉽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무엇이며 우리가 따르면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규범의 이유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뒤따를 때 성경의 규범은 오늘날에도 합당하고 적절한 지침으로 바르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에 나오는 계명들에 대하여 설명하실 때 바로 그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짚어 주셨습니다. 살인 금지 계명에 대해서는 그 행위를 유발하는 미워하는 마음을 관리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간음 금지 계명에 대해서도 그 행위를 일으키는 마음 속의 음욕을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규범집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입니다.
규범집에 어떤 계명이 있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신호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읽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 규범집에 기록된 계명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행동에 옮기려 한다면 예수께서 붙들려온 여인에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실 때 거기서 가장 먼저 돌을 던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이런 저런 규범을 배우고 그것을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성숙하면서 그 규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나면 그 규범을 더 바르게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도 어린 시절에 배운 규범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든다면 그는 공동체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 사회는 어린 시절에 배운 단순명료한 규범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내려놓음의 지혜서
어떤 사람들에게 성경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지혜서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저는 어떤 기독교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성경 이야기에서 하나의 교훈을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것은 자력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교훈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핵심 이야기이며 복음의 진수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사도 바울이 언급한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집중합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붙들고 사는 규범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판단하며 복음의 진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복음의 진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모든 것을 하려고 들면 쉬지 못하고 마침내 내부로부터 고갈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는 아마 현대인들이 그만큼 염려와 걱정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려고 자기를 잃어버린 채 노력하다가 지친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는 은혜의 복음이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위로와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내 영혼아,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기쁨과 평화와 만족 가운데 살아가자!’
성경 이야기의 주제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율법주의에 매여 사는 삶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한 암시라고 전제합니다. 그런 틀로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성경의 오묘한 비밀을 깨달았다고 자부하며 기뻐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으로 기뻐하며 흥분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을 때 그 전까지 저의 삶을 평가하자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가운데 버거운 걸음을 내딛으며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욕심과 염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일깨워주는 지혜의 교본이 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불교에서 해탈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내면적이며 개인적인 특성을 보입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추구하는 내면의 평화(inner peace)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만이 다른 점입니다.
이런 신앙은 개인의 삶에는 중요하지만 이런 신앙만을 추구하면 신자는 공적인 영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개인의 삶과 내면의 상태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결과 끊임없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평안과 충만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애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게 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은혜 안에서 사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형벌을 받아 끊임없이 돌을 굴려 산으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와 같은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회가 어떤 지역에 공적인 영역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신앙의 강조점을 여기에 두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개인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을 때는 공적인 영역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를 가질 수도 없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정치환경이나 제도개선 등의 영역에서 기여를 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예표
성경 이야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사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39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을 읽을 때 해석의 지침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이야기를 예수님의 일생과 연관지어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설교자들은 여자의 후손과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과 이삭, 요셉과 모세, 그리고 이어지는 모든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읽으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은유와 상징이 되고 그 이야기 자체에 담긴 교훈과 의미는 간과되기 쉽습니다. 때로는 이야기를 비틀어 억지로 그리스도와 연관지으려는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예수님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소개했습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베드로는 시편 16편과 110편, 그리고 신명기 18장과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바로 그 말씀들을 이룬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사도들은 설명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가 단지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이야기에는 그 자체로 교훈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도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설명한 까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다시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 유익은 성경 이야기들이 신자에게 교훈과 책망을 주고 신자의 삶을 바르게 하고 의롭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를 단지 그리스도의 예표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에 머물러 있기 쉽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진리의 길을 이해하고 그 길을 따르려는 용기를 내고 실천하는 바로 그것이 구원의 길임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기 어렵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 이야기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훈과 책망을 받고 삶을 바르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배타적이 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성경을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만 읽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도식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구원은 성경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진리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용기와 지혜를 받아서 삶 속에 실천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진실과 자비와 공동선을 추구하게 하여 결국 신자들을 너그럽고 포용적이며 공공의 유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부르짖는 신자일수록 더 배타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다는 요한복음의 설명은 예수님의 삶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신 바로 그 진리를 행하시는 모습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성경은 우리의 삶을 위한 가이드와 지혜가 됩니다.
5. 천국입성을 위한 매뉴얼
어떤 사람들은 성경 이야기를 천성 입성을 위한 매뉴얼로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성경 이야기는 그리스도 재림의 때를 암시하는 종말의 신호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성경을 구원의 책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때 구원은 천성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천성에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공중으로 들림 받아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천상에 이르기 위한 나그네의 삶이며 이 세상은 심판으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로 나누어 생각하며 지상에서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영원한 삶에 비하면 그림자에 해당하며 진짜의 삶은 육신을 떠나 영원한 천국에서 비로소 시작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사상을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라고 부릅니다.
이원론 사상은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나누고, 육체와 영혼을 나누며, 이 세상과 육신의 삶을 영적인 삶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평가하는 사상입니다. 이원론 사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는 초기교회가 대항하여 싸운 가장 대표적인 이단사상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삶 속에 임하는 새로운 변화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회심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때 이 땅에 임하는 세상임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는 공동체의 변화된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초기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원동력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삶 가운데 임하였다는 확신에 있었습니다. 그 확신으로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공동체 안에서 실천할 때 세상에 신선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죽은 후에 들어갈 세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도피주의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으며 주님이 지금 자신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는 적극적인 믿음을 초대교회가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죽은 후에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세상이라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정의롭고 더 따뜻한 세상이 되도록 만들겠다는 결단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진짜는 저 세상에 있으며 어차피 이 세상은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 예비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상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순수하고 온전하며 신령한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와 착각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큰 원수입니다. 요한일서를 읽어보면 초기교회를 어지럽게 한 이단사상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당시에 교회를 어지럽게 한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적 가르침이었습니다(요한이서 1:7).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를 가장 어지럽게 하는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가 죽은 후에 영혼이 들어가는 영적인 세상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할 세상이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6. 한 가지 부족한 것
예수께 어떤 사람이 와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10:21). 그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슬픈 얼굴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 열성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배우고 읽는데 열심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사랑하신 ‘이 세상’입니다.
성경의 시작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창 1:1).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이 소개하는 바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 3:16).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신다고 선언합니다(계 21:5).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과 자신을 생각하지만 한 가지 ‘이 세상’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도 이 세상을 관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때 이 세상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배반할 때 이 땅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은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떼어질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것을 떼어내어 갈라지게 하는 것이 영지주의요 이원론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이 세상을 생명 충만한 곳으로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처음부터 계획하신 바로 그 모습으로 회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성경은 끊임없이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이 세상이 회복될 것임을 담은 희망을 그림으로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세상도 이 땅이며 이 땅의 회복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며 이 땅을 어지럽게 한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곧 구원이며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세상으로 만들라는 소임을 위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음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공존과 상생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교회가 구원을 천성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더 ‘순결’하고 더 ‘거룩’하고 더 ‘성경적인’ 가치관을 추구해야 한다고 움츠러드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고 더 소극적으로 해석하게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7.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그러면 성경은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옳은 길을 따르고 그른 길을 피해야 하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자신의 염려와 걱정을 내려놓는 지혜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성취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더 깊이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며 자라왔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하시는 이야기로만 이해하면 성경 이야기를 크게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 세상을 빠뜨린 성경읽기는 무대가 없는 연극과 같으며 허공에 집을 지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는 이유는 단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한 땅이 되게 가꿀 수 있는 품격과 실력을 갖추기 위함입니다.
저는 성경 이야기가 결국 무엇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셨고 사람에게 그것을 관리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곳은 이 세상이며, 우리가 결국 물려받는 새로운 세상도 새롭게 변화된 이 세상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한 땅이 되게 하는 길을 찾습니다. 그것이 옳은 길이며 그것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믿으며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이 위대한 임무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며 진리의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우리가 저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가꾸는 대리인이 되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경영하시려고 부르신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아담이며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모세와 다윗 등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오묘한 솜씨와 지혜로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을 회복하고 충만하게 하시기 위한 위대한 계획에 사람들을 초청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일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고 나선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대열에 우리 앞에 있으며 우리도 지금 그 성도들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읽기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현실에서 하나씩 이루기 위해서 이전에 걸어간 선배들의 족적을 관찰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실 지혜를 발견하는 활동입니다. 우리는 성경읽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대안적인 공동체를 이끌어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배웁니다.
그렇게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우리의 꿈이 하나님의 계시를 품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품격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더 너그럽고 더 거룩하며 더 포용적이고 더 따뜻하며 더 진실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환경은 조금씩 나아질 것이며 우리가 사는 땅에 하나님의 뜻이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의 구원은 커지고 우리가 누리는 영생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이며 성경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다음 시간에 다룰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말세나 종말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끝>.
참고의 글:
하나님의 경륜,
나는 왜 이 책을 썼는가?
https://cafe.daum.net/Wellspring/8Rmj/198?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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