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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장소 : 전남 완도군 청산도 슬로길 1~5코스 트레킹
산행일자 : 2023. 11. 12.(일)
산행코스 : 범바위입구 ~ 재내매골 다락논 ~ 장기미해변/공룡알해변 ~ 말탄바위 ~ 권덕리 ~ 따순기미 ~ 바람구멍 ~ 읍리해변 ~ 읍리앞개 ~ 당리해변 ~연애바위 입구 ~ 화랑포공원 ~ 당리입구 ~ 도락리 청산빌리지펜션 (13km, 4시간 반 소요)
산행참석 : 19 백두.
<백두산우회 19주년 청산도 2일차(12일) 일정>
- 06:30 아침식사 및 짐정리.
- 07:30 범바위 입구로 이동(버스)하여 트레킹 시작.
▶ 청산도 슬로길 1~5코스 트레킹
- 12:00 숙소에 도착하여 트레킹 종료.
점심식사 및 주변정리.
- 14:20 숙소 출발하여 도청항으로 이동.
- 15:00 청산도 도청항 출발.
- 16:00 완도항 도착하여 서울로 출발.
- 22:00 서울 도착.
< 산행 및 트레킹 지도>
어제는 청산지맥이라고도 불리는 청산도 7산 종주를 하면서 쾌청한 날씨 덕분에 청산도의 빼어난 '청산여수(靑山麗水)'를 즐겨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19주년 기념연을 하는 시간에는 매서운 북풍까지 불어와 일찍 실내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바람에 예전같은 기억의 상실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 청산도에서의 2일차 일정인 청산도의 슬로길 11개 코스 중에서 백미 구간인 1~5코스 트레킹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한다.
<청산도 슬로길>
청산도 슬로길은 청산도 주민들의 마을 간 이동로로 이용되던 길로써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하여 슬로길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2010년 전체 11코스 42.195km에 이르는 길이 조성되었다.
1코스(5.71km) 미항길 - 동구정길 - 서편제길 - 화랑포길
2코스(2.10km) 사랑길
3코스(4.54km) 고인돌길
4코스(1.80km) 낭길
5코스(5.54km) 범바위길 - 용길
6코스(4.56km) 구들장길 - 다랭이길
7코스(8.07km) 돌담길 - 들국화길
8코스(4.10km) 해맞이길
9코스(3.20km) 단풍길
10코스(2.67km) 노을길
11코스(1.20km) 미로길
슬로길은 1코스부터 시작하여 청산도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걷게 설계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중 백미로 알려진 1~5코스를 걷기로 한다. 그리고 완도로 나가는 배편이 오후 3시에 예약되어 있고, 걸어야 하는 코스의 거리가 주어진 시간에 비해 다소 빠듯하다. 또한 점심식사까지 해야 하는 일정이라, 부득이 5코스 종점에서 시작하여 역으로 진행하는 것이 점심식사를 예정하고 있는 숙소가 도청항에 가까운 도락리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대처가 수월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버스로 5코스의 종점 부근인 범바위 입구로 이동하여 트레킹을 시작하기로 한다. 또한 1~5코스의 길이가 20km 정도로, 주어진 5시간 안에 걷는 것이 어려울 듯하여, 일부 코스를 변형하고 축약하여 청산도 슬로길의 대강만 맛보기로 한다.
지난밤의 과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회원님들의 수고로 차려진 아침식사를 마치고,
찬바람을 무릅쓰고 마당에서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 트레킹 출발 지점인 범바위입구로 향하는데 ,
세차게 불어오는 북풍으로 완도로 가는 배의 출항 여부에 대한 우려가 트레킹에 나서는 산꾼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트레킹 출발지점인 범바위 입구에 도착하니 매섭게 몰아치는 찬바람이 백두들을 더욱 움츠려들게 하지만,
청산도 슬로길과 명품길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장된 백두들은 청계리 범바위 입구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슬로길 5코스(5.54km) 범바위길·용길>
슬로길 5코스는 범바위길(권덕리 마을회관~권덕리 삼거리~낚시터 입구~말탄바위~범바위~범바위주차장)과 용길(범바위주차장~칼바위전망대~공룡알해변(장기미)~해녀바위~범바위입구 삼거리~매봉산 등산로 입구~청계리 중촌돌샘)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제 청산도 7 산 종주길에서 범바위를 다녀왔기에 해당 구간을 해안 벼랑길인 명품길(공룡알/장기미해변~말탄바위)로 변형하여 걷기로 한다.
공룡알해변으로 알려진 장기미해변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르는데,
좌측 양중리 방향으로 어제 올랐던 대봉산도 건너다 보이더니,
호랑이를 머리에 얹은 도깨비 모양의 청계리 표지석을 지나,
<청계리(淸溪里)>
입주 당시에 마을의 지세가 노루가 뛰어노는 형국과 같다고 하여 장곡등(獐谷嶝)이라고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 22대 고종 13년 1876년 완도군이 설군(設郡)되면서 청계리라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범바위 삼거리에서 우측 범바위 방향을 두고 좌측 장기미 해변 방향으로 진행한다.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룬 농로를 따르면,
우측 재내매골 다락논 건너편으로 어제 멋진 조망을 보여줬던 보적산이 보이고,
좁은 경작지, 농업용수 확보의 어려움 그리고 척박한 토지 등 농업에 불리한 청산도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개발한 청산도 구들장논이 억척스럽게 살아온 청산도 주민들의 애환을 느끼게 한다.
<청산도 구들장 논>
완도군 청산도 구들장 논은 일견 산간․도서지역에서 볼 수 있는 다랑이 논과 다를 바 없는 계단식 논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구들장 논 하단부가 흙이 아닌 돌로 되어 있는 매우 특별하고 놀라운 논이다. 일본 다랑이 논 학회, 나가지마(中島) 와세다 대학 명예교수는 2013년 청산도 답사 후 “구들장 논은 한국의 보물(寶物)”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구들장 논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들장 논은 전통주택의 온돌방에서 볼 수 있는 얇고 넓은 돌 판인 구들장을 인근에 위치한 돌산에서 가져다가 돌기둥 위에 가지런히 깔고, 구들장 사이의 간격을 작은 돌과 진흙으로 채워서 물이 새지 않도록 하고, 그 위에 다시 40-50센티 정도 흙을 쌓아 물을 가둘 수 있도록 만들어진 논이다. 다시 말해, 논이 될 수 없는 “돌밭을 일구어서 논으로 만들어낸 인공 논”이라고 할 수 있다. 구들장 논은 이미 국내·외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돌밭이 논으로 변화되었고, 그 오랜 세월을 견뎌 왔을까?
해답은 과학적인 농·토목 기술과 독창적인 물 관리 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빗물과 수원을 함양하고 있는 산림과 산지를 보호하고, 여기서 모아진 청정자연수가 계곡을 통해서 또는 용출수의 형태로 산 아래 가장 위쪽 논으로 유입되게 되어 있다. 유입된 물은 위쪽 논부터 모든 논들을 거쳐 가장 아래 논까지 적신 후 배수된다. 가장 놀라운 것은 경작자가 물 사용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만약, 논에 물이 필요하지 않을 경우 아래 논으로 물을 바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작자는 밭으로 선택 사용 또는 논·밭 겸용을 결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들장 논의 물 관리는 논 하단부 통수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구들장 논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이기도 하다.
통수로는 우리나라 전통주택의 불길이 통하는 길인 방고래와 비슷한 모양으로, 한국 전통건축 기술인 온돌문화와 농·토목 기술인 영농문화가 융합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통수로 구멍으로 논 하단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개수와 규모는 논의 필지에 따라 다르다. 아이들이 쉽게 들어갈 정도로 크게 만들어진 통수로도 있다. 논 하단부의 크고 작은 구멍과 같은 통수로의 외형적 특징이 방문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성곽 같은 계단식 논, 마을 돌담과 어우러져 청산도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낮은 토심으로 인해 경작 시 구들장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농기계 대신 소를 이용하여 쟁기질하는 전통영농방식이 남아 있다. 구들장 논의 구조적 특징으로 인해 친환경농업이 가능하며 생태계 회복에도 기여하고 있다. 실제로 청산도 상서리 구들장 논에는 ‘긴꼬리투구새우’가 살고 있다. ‘긴꼬리투구새우’는 청정지역 논에서 서식하는 갑각류로 잡초 성장억제, 해충방제 등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측 밭에 심어진 노란 열매가 열린 나무가 감귤이냐 유자냐를 놓고 '궁금하면 500원' 내기를 걸며,
완만한 내림길을 따르는데,
앞쪽으로 상도와 여서도가 떠있는 바다가 나타나더니,
이내 좌측으로 명풍 2길이 시작되는 갈림길과 초가지붕 원두막이 있는 장기미해변 쉼터를 지나면,
<장기미 해변>
슬로길 5코스 용길에 자리 잡은 장기미 해변은 일명 공룡알 해변이라고도 부른다. 큰 바위들이 흡사 공룡알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장기미 해변 주변의 범바위와 마찬가지로 강한 자성으로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고 자석이 달라붙는 신비의 몽돌을 볼 수 있다.
쉼터 바로 아래에 강한 자성을 띠는 신비의 몽돌이 쌓인 장기미해변/공룡알해변에 도착하는데,
볕이 좋았으면 적당하게 달궈진 공룡알에 앉아 파도에 씻기는 자갈소리를 감상하며 근심걱정도 씻어내고 싶지만,
을씨년스런 날씨에 '나도 다녀가오!' 하는 기념사진만 가지고,
널린 공룡알들과 '부화하는 날 다시 찾으마' 약속을 남기고는 장기미 해변을 뒤로한다.
재내매골 좌측으로 이어진 슬로길을 따라 거슬러 오르다 보면 의자 대신 공룡알이 놓인 쉼터가 나오고,
계곡가의 너럭바위 쉼터를 지나서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슬로길을 오르면,
'ㅓ'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의 범바위주차장 방향 슬로길을 두고 좌측 명품 1길로 들어서서,
해안선 위쪽 사면을 따라 걷기에 불편하지 않은 작은 오솔길을 따르면,
가드로프가 둘러진 칼바위전망대가 나오는데,
내려다 보이는 장기미해변 건너편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바다로 돌출된 바위해안이 칼바위이고,
장기미해변에서 해안 바위절벽 위로 목섬 입구까지 명품 2길이 이어져 있다.
아찔한 바닷가 벼랑길에 설치된 가드로프가 트레커의 마음을 조금은 느긋하게 하는 명품길을 따르는데,
봉우리에서 보던 바다와는 또다른 심색의 바다가, 도발해오는 바위들의 도전에도 평온한 바다의 넉넉함이 느껴지고,
잘 조성된 식물원을 걷는 듯한 기분에 젖어 점점 따스해지는 벼랑길을 따르는데,
앞쪽으로 마치 봉수대를 닮은 구조물이 호기심을 자극하여 걸음을 서둘러,
명품길 이정표가 세워진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의 봉수대 모양 구조물이 있는 능선을 들르러 좌틀하면,
봉수대 모양의 구조물은 명품길을 조성하며 만든 전망바위 쉼터의 조형물이다.
전망바위에서 본 범바위.
<범바위(전 범바구 전설)>
아주 오랜 옛날 호랑이가 청산도에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호랑이가 권덕리 산고개 재에서 바위를 향하여 "엉"하고 소리를 내어 포효를 하니, 이곳 바위의 울림이 호랑이가 우는 소리보다 크게 울려 호랑이는 '나 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여기에 살고 있구나' 하고 도망쳐서 그 후부터 청산도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범바위"라 부르고 있다.
전망바위에서 본 장기미해변 방향.
서쪽 말탄바위 방향.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별로 말을 탄 것 같지 않은 바위를 확인해 보려 가던 길을 다시 이어가다가,
걸어온 명품길이 끝나고 다시 슬로길 5코스로 접어드는 범바위 갈림길에서 말탄바위 방향으로 좌틀하여,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조망이 빼어난 말탄바위 정상에 오르게 된다.
<말탄바위>
해변에 우뚝 선 바위가 고개를 쳐든 말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청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서쪽 화랑포와 당락리 방향.
북동쪽 범바위 방향.
동쪽 장기미해변 방향
말탄바위에서 권덕리 방향으로 내려서는데,
좌측 낭떠러지 위에서의 해안절벽과 서쪽 화랑포 방향 조망이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며,
걷고 있는 슬로길 5코스와 4코스의 분기점인 권덕리도 내려다 보이고,
순간순간 변하는 해안 절경을 조망하며 잘 정비된 슬로길을 따라 내려가,
철망 울타리를 통과하여 나가면 슬로길 5코스 범바위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범바위길>
권덕리 마을회관에서부터 범바위까지 이르는 길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범바위와 말탄바위 중심으로 청산도를 여러 각도에서 바다와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슬로길이다. 말탄바위로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면 권덕리 마을과 해변, 아름다운 청산도의 풍광이 이제껏 걸어온 길과 어우러져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시멘트 포장 농로를 따라 권덕리 마을로 진행하면,
좌측 권덕리 방파제 건너편으로 당락리 화랑포 새땅끝이 목을 쭉 뻗어 바다를 헤엄치는 거북이처럼 보이고,
슬로길 5코스 범바위길이 끝나고 4코스 낭길이 시작되는 권덕리 마을로 들어서서,
<권덕리>
처음에는 읍리에 속해 있었으며 범바위가 있어서 호암동으로 불리다가 고종 37년 1900년경에 권덕포라 하였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읍리에서 분리되면서 권덕리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남쪽 바닷가에는 어족이 풍부하고 수심이 깊은 천해의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하여 1996년부터 유료 관광낚시터로 지정되어 외래 낚시꾼들이 모여들고 있어 어촌계의 소득 증대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슬로길 4코스 낭길(1.8km)>
낭길은 구정리에서 권덕리까지 이어지 낭떠러지 길로 하늘에 떠 있는 듯 바다에 떠 있는 듯, 모호한 경계선을 따라 걷는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코스 : 읍리해변방파제~바람구멍~따순기미~권덕리해변~권덕리마을회관
슬로길 4코스에 속하는 권덕리 해변을 지나면,
본격적인 4코스 낭길로 접어드는 들머리가 나온다.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 좌측 해안 사면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르면,
가드로프가 설치된 좁은 벼랑길도 지나,
슬로길 진행방향을 표시하는 화살표가 우리가 가는 방향이 역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누가 왜 쌓았는지, 왠지 구구절절한 사연이 서려있을 듯한 돌탑도 지나면,
좌측 해안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며 당락리 새땅끝 방향 조망이 멋진 곳이 나오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 지명이 따순구미로 표시되어 있다. '따순구미'라는 지명은 지난해 걸었던 영산기맥의 끝자락인 '다순금'과 같은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고,
<따순구미>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한 아늑한 구미(바닷가나 강에 물이 뭍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 만, 후미)로 다순구미라고도 불린다.
따순구미에서 바라본 가야 할 당락리 화랑포 새땅끝 방향 조망.
잠시 더 벼랑길을 따르니 '바람구멍'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바람구멍>
오래전 돌을 쌓아 만들 길에 생긴 구멍으로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고, 시집을 못 가거나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이 앞에서 치마밑으로 바람을 넣으면 소원한 일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변의 바우틈에 손을 대어 보았으나 별다른 바람의 기미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걸음이 느린 것은 아니지만 마음만은 '느림의 미학'을 느끼며 걸은 낭떠러지길이 끝나고 숲길로 들어서니,
길 옆으로 돌담이 이어지며 걷는이의 마음을 한결 느리게 하더니,
슬로길 4코스 낭길의 종착지가 가까웠는지 오솔길이 끝나고 시멘트포장 농로로 들어서서 내려가면,
<낭길(Nang-gil)>
낭길은 구정리에서 권덕리까지 이어지 낭떠러지 길로 하늘에 떠 있는 듯 바다에 떠 있는 듯, 모호한 경계선을 따라 걷는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슬로길 4코스 낭길과 3코스 고인돌길의 분기점인 읍리해변 방파제에 도착하니 정자와 슬로길 스탬프, 안내판 등이 있다.
<슬로길 3코스 고인돌길(4.54km)>
청산도 역사문화 자료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길로, 당리를 감싸 안은 청산진성, 고인돌, 하마비, 초분 등 청산도의 오랜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길이다.
코스 : 읍리앞개~서편제 촬영가옥~청산진성계단~읍리안길~고인돌공원~청룡공원~읍리해변방파제
읍리해변의 슬로길 4코스와 3코스 분기점 전경.
슬로길 3코스는 이곳 읍리해변에서 읍리 마을 이곳저곳으로 이어져 고인돌공원과 서편제 촬영가옥등 역사문화 자료를 둘러보는 코스로 이어져 다시 읍리앞개 서편으로 돌아 나오게 되는데, 우리는 배 출항시각에 맞춰야 하는 제약으로 역사문화 자료가 있는 마을안길은 생략하고 지름길인 읍리앞개 해안을 따라 3코스와 2코스 분기점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봄철 유채꽃이 만발하여 방문객이 많을 때는 붐볐을 매점이 추워진 날씨로 문을 열지 않았고,
읍리해변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읍리마을로 이어지는 슬로길을 두고 지름길인 읍리앞개 해변으로 들어서서,
<읍리(邑里)>
신라시대에 읍을 설치하였다고 하나 고증할 수 없고, 읍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하여 속명으로 읍범미리(邑汎味里), 읍기(邑基) 또는 향교동(嚮校洞)이라고 불렸으나, 1759년 여지도서(與地圖書) 호구총수(戶口總數) 기록을 보면 읍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을 이름을 읍리(邑里)라고 부르고 있다.
물소리 대신 몽돌 구르는 소리가 청아한 해변을 최대한 느리게 걸어,
읍리앞개 해변의 서쪽 끝으로 진행하여,
해변을 벗어나 작은 소공원으로 이어지는 데크목 다리를 건너면,
슬로길 3코스와 2코스 사랑길의 분기점인 읍리앞개 소공원에 도착하게 된다.
<슬로길 2코스 사랑길(2.1km)>
당리에서 구장리를 잇는 해안절벽길로 숲의 고즈넉함과 해안절경의 운치를 즐길 수 있으며, 좋은 사람과 함께 걸으면 걷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청산도 사람들은 연애바탕길이라 부른다.
코스 : 연애바위 입구~모래낭길(당리재)~읍리앞개 (2.1km)
읍리앞개 해변에서 들려오는 조약돌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행복해질 수 있는 쉼터에서,
간식을 나누자며 배낭을 열어보니 트레킹 이틀째 임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먹거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먹거리가 풍성해지니 입도 넉넉해지며 저마다 꺼내놓는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며 따사로운 가을햇살을 즐긴다.
읍리앞개 쉼터에서의 따사로운 가을볕을 뒤로하고 슬로길 2코스 사랑길로 들어서면,
잠시 전에 걸었던 4코스 낭길과는 달리 해안선을 따라 제법 널찍한 길이 이어지더니,
이내 좁은 오솔길로 바뀌며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새땅끝 방향 멋들어진 해안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고,
해안선 비탈면의 경사가 완만해서 그런지 별다른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오솔길을 따르는데,
좌측으로 보이는 당리 화랑포 방향 풍경이 캘린더의 사진인 듯 보이더니,
따르는 사랑길은 사랑을 나누기에 좋아 보이는 좁은 돌담 사이로 접어들며,
이내 당락리 마을에서 당리해변으로 넘나드는 당리재/모래남길에 도착하여,
슬로길 2코스는 직진의 당리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두고 좌틀하여 당리 화랑포공원 방향으로 이어진다.
<당리>
최초의 지명은 알 수 없으나 1759년의 여지도서 및 강진현에 청산도가 속할 당시의 호구총수(1789년)에 의하면 당리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고종 3년(1866년) 당리진을 설치하여 당리에 관망대와 봉화대를 설치하고 외곽에 성을 쌓고 각각 동문, 서문, 남문을 두어 고종 32년 1895년 파진될 때까지 인근 신지면, 소안면, 고금면 약산을 관할하였다 하여 일명 진말이라 하였고, 1895년 마을 이름이 "진리(鎭里)"라 나오며 당시 이장은 김권숙(22대)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마을이름 일람표를 보면 당리와 도락리를 합구시켜 당합리라 하였고, 1896년 2월 3일 완도가 군으로 됨에 따라 당리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돌아본 당리재 날머리 전경.
미리 점심을 준비하려는 분들은 이곳 당리재에서 숙소가 있는 당락리를 향해 직진의 당리 마을 방향으로 진행하고,
예정된 코스를 걸으려는 분들은 좌틀하여 화랑포공원 방향 슬로길로 들어서서 호젓한 오솔길을 따르는데,
오솔길은 너무 심심하다며 누군가가 바위들을 흩어 놓았고,
"어쭈구리, 사랑길이라더니 고생길이구먼!"
누군가의 외침대로 평이하던 오솔길이 주의가 필요한 암릉길로 바뀌더니,
바위 비탈길에는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마음만은 사랑받는 느낌으로 걸을 수 있고,
그렇게 짧은 바위벼랑 구간을 지나 다시 오솔길로 접어들어 잠시 더 진행하면,
사랑길 안내판이 있는 원두막 쉼터를 지나게 되고,
<사랑길/Salang Gil(Street of Love)>
사랑길은 화랑포에서 읍리앞개를 잇는 해안 절벽길이다.
길이 험해 남녀가 같이 가면 손을 잡아주고 서로에게 의지하여 걷게 되니 그 추억이 연애의 바탕이 된다고 하여 지어졌다.
옛날 청산도의 불타는 청춘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연애바탕길'이라고 부른다.
이내 슬로길 1코스와 2코스가 나뉘는 연애바위입구에 도착한다.
초분 안내판이 있는 화랑포 공원 전경.
<초분(草墳)>
초분(草墳, 또는 초빈)은 섬 지역에서 행해지던 장례문화의 하나로,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 풀 등으로 엮은 이영을 덮어두었다가, 3~5년 후 뼈를 골라 땅에 묻는 방식을 말한다. 초분을 하는 이유는 부모님을 바로 매장하는 것은 불효라고 생각하였고, 실질적으로는 장지를 빨리 구할 수 없었기 때문 등이라고 한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도서지방은 물론 육지에서도 행해졌는데, 일제강점기 화장(火葬)이 권장되면서부터는 남해와 서해의 일부 도서에서만 행해졌다고 한다. 179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뒤에는 법적으로 금지되기도 했다. 청산도에서는 1980년대까지는 섬 전체에서 시행되었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도락리와 도청리 일부 지역에서 밭이나 산언덕에서 초분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초분의 유래는 상주가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갑자기 상을 당하거나 가족묘지(선산)에 매장하고자 할 경우 또는 정월에 땅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풍습에 따라 행해졌다고 한다.
지금부터 걷게 될 슬로길 1코스는 전체가 포장도로인데,
화랑포 전망대 방향의 화랑포길로 들어서서 햇볕에 노출된 1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면,
좌측 보적산 방향으로 오늘 걸어온 해안이 시원스레 조망되고,
여름이면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가 필수품이 될 듯 보이는 화랑포길 도로를 따르면,
화랑포 주변 바다와 해안선 조망이 멋진 전망쉼터를 지나게 되는데,
"청산도는 쉼이다"라는 쉼표 위의 문구가 왠지 아우성으로 들리는 이유는,
쉬라고 해서 쉬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쉼이니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외부의 자극이나 쉬어야 할 이유가 없이 쉬는 게 진정 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쉼은 뭔데?
가야 할 화랑포 전망대 방향의 해안 조망.
돌아본 보적산 방향.
아쉽게도 쉬지 못한 쉼터를 뒤로하고 포장도로를 잠시 더 따르면,
도로가 턴하여 서쪽 해안으로 이어지는 슬로길 남단 지점을 지나는데, 좌측 땅끝 방향으로 오솔길 등로가 이어져 있어서 다녀오고 싶지만 혹여 앞서간 분들의 기다림이 길어질까 그만두고 따르던 화랑포길을 이어간다.
<화랑포길>
파도가 이는 모습이 마치 꽃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화랑포(花浪浦)에는 탁 트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슬로길 1코스 마지막 지점인 화랑포에는 잠시 걸음을 쉬어갈 수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푸른 바다와 하얀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일상의 답답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슬로길 최남단 지점을 지나 화랑포 서쪽해안을 따라 이어진 슬로길을 따르는데,
지도에 화랑포 전망대로 표시된 지점을 지나려니 앞서 갔던 두규형이 땅끝지점으로 이어진 길로 알바를 다녀왔다며 의기양양하게 다시 앞질러 가고,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화랑포는 파도가 마치 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화랑포(化郞浦)>
진의 설치와 동시에 역대 진수(鎭守, 僉使)와 무사, 선비들은 따뜻한 봄이나 가을이면 기생들을 데리고 산과 바닷가를 찾아 풍월을 즐기게 되었는데, 서남쪽 1.5㎞지점 산등성이에서 화창한 봄날 오후쯤에 바다물결이 꽃과 같이 아리따운 낭자와 같아 취홍에 못 이겨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냈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곳 지명을 화랑포(化郞浦)라 전해오고 있으며, 또한 이곳은 아름다운 물결, 바둑알처럼 크고 작은 갯돌, 신비스런 바위, 연애바탕이 있어 지금도 여름철이면 피서객 및 낚시꾼들이 찾아드는 유명한 관광지로 변하여왔다.
지도에 표시된 화랑포 전망대를 지나 내리막으로 바뀐 슬로길을 따르는데,
좌측 보길도 방향으로 갖가지 색깔의 바다에 떠 있는 소안도와 대모도, 소모도가 나란히 조망되더니,
지도에 표시된 지점보다 북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설치된 '화랑포 전망대' 안내판을 지나고,
<화랑포 전망대>
파도가 이는 모습이 마치 꽃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화랑포(花浪浦)는 아름다운 물결, 바람처럼 크고 작은 갯돌, 신비스런 바위, 연애바탕 등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1866년 청산진(青山鎭)의 역대 진수(鎭守)와 무사, 선비들이 화창한 날을 잡아 이곳에서 풍월을 즐기며 자연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낸 이후부터 화랑포라 전해지고 있다.
철 지난 국화와 단풍으로 장식된 멋들어진 화랑포길을 잠시 더 따르면,
잠시 전에 반대 방향으로 지났던 슬로길 2코스와 1코스의 분기점인 화랑포공원을 지나게 된다.
<화랑포(化郞浦)>
진의 설치와 동시에 역대 진수(鎭守, 僉使)와 무사, 선비들은 따뜻한 봄이나 가을이면 기생들을 데리고 산과 바닷가를 찾아 풍월을 즐기게 되었는데, 서남쪽 1.5㎞지점 산등성이에서 화창한 봄날 오후쯤에 바다물결이 꽃과 같이 아리따운 낭자와 같아 취홍에 못 이겨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냈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곳 지명을 화랑포(化郞浦)라 전해오고 있으며, 또한 이곳은 아름다운 물결, 바둑알처럼 크고 작은 갯돌, 신비스런 바위, 연애바탕이 있어 지금도 여름철이면 피서객 및 낚시꾼들이 찾아드는 유명한 관광지로 변하여왔다.
화랑포 공원 전경.
<화랑포 공원>
화랑포 공원은 화랑포의 아름다운 물결, 바둑알처럼 크고 작은 갯돌, 신비스런 바위, 연애바탕 등 기암괴석이 어우러져있는 천혜의 절경을 감상하며 쉴 수 있는 곳이다.
'청산 愛 SAY' 글판.
화랑포 공원을 뒤로하고 슬로길을 따르면,
진행 방향으로 봄의 왈츠 세트장이 1.08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고,
좌전방 당락리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며,
좌측으로 대모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구불구불 이어지는 화랑포길을 잠시 더 따르면,
'피노키오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걸린 외딴 초가집을 지나게 된다.
<SBS드라마 피노키오 촬영지>
드라마 '피노키오'에서 향리도로 등장하는 청산도는 동화같은 풍경으로 두 주인공 달포(이종석)와 인하(박신혜)의 설렘과 순수함을 아름답게 전해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가보고 싶은 촬영지로 사랑받고 있다.
노란 유채꽃이 피는 봄이나 벼가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에 왔었더라면 좋았을 다락논길을 잠시 더 따르면,
좌측 아래로 숙소가 있는 도락리가 시원스레 내려다 보이고,
<도락리(道洛里)>
선조들이 마을에 이주 정착하면서 조선정조 13년 1789년에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당시 도의(道義), 유도(儒道)를 숭상하는 뜻에서 도장리(道長里)라 부르다가, 1876년 道樂里(청산진지), 1895년 도락리(道洛里)로 개서하여 불러오다가, 1914년 조선시대 유동만 이장당시 행정법정 호적대장 기록 때 지금 당리(堂里)와 도락리(道洛里)를 합구시켜 법정 행정구역상 당락리(堂洛里)라 하였다. 이후, 1896년 2월 3일 완도가 군으로 됨에 따라 도락리(道洛里)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슬로길 1코스 서편제길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면,
<서편제길>
한국영화 최초 100만 관객을 동원한 서편제의 명장면 주인공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걷는 장면이 촬영된 길이다. 봄에는 유채꽃과 청보리,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길에 수놓아지면 언덕 위에는 드라마 봄의왈츠 세트장이 한폭의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언덕 위에 이국적인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는데,
2006년에 방영된 KBS 월화 드라마 '봄의 왈츠'의 촬영세트장이다.
<슬로길 1코스 '봄의 왈츠' 촬영지>
당리마을 언덕에는 KBS 2TV 드라마 '봄의 왈츠'가 촬영된 곳으로 세트장으로 사용된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자리 잡고 있다. 봄이면 세트장을 배경으로 노란 유채와 초록 보리가 어우러진 그림과 같은 풍광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도락마을 전경 또한 일품으로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 주인공 김선아와 이동욱이 자전거 데이트와 캠핑 등 멋진 로맨스 장명을 연출했다.
지금은 밀물이라 보이지 않지만 도락리 앞바다에는 하트 모양의 개매기가 설치되어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개매기란 물 빠짐이 뚜렷한 바닷가에 돌담을 쌓아 썰물 때 물고기를 가두어 잡거나 말목을 박아 만조 시간에 그물을 올려 물이 빠지면 물고기를 잡는 전통 방식인데, 도락포구에 설치된 하트 개매기 체험장은 가로 50m, 세로 50m의 넓이로 1년을 상징하는 365개의 말목으로 되어있다.
하트 개매기는 250년 전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 얘기가 담겨 있다.
얘기는 조선 영조 46년(1770년), 제주사람 장한철이 쓴 ‘해양 문학의 백미’라고 일컫는 표해록(漂海錄)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장한철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제주도 사람 29명과 뭍으로 향한다. 하지만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한 일행은 그 후 류큐열도 호산도와 완도 소안도를 표류하다 구사일생으로 청산도에 이르렀다. 생존자 8명은 청산도 주민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운명처럼 한 여인을 만난다. 그 여인은 장한철이 조난당해 의식을 잃고 있을 때 꿈속에 나타나 물을 건네준 청산도 무녀 조 씨의 딸(20세)이었다.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장한철이 고향 제주도로 떠나면서 영영 이별을 하게 된다. 하트 개매기는 제주도로 떠난 장한철이 그리워 바닷가에 나가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을 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이 250년 뒤에라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말목 위에는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반사돼 시각적인 효과가 더하도록 반사판을 부착했다. 하트 개매기는 썰물 때 물이 빠지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루 두 차례 볼 수 있다. 하트 개매기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면 서편제 길의 봄의 왈츠 세트장에서 내려다보면 하트 형태가 가장 선명하고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봄의 왈츠 촬영지' 앞에서 하트 개매기가 있는 도락리포구를 배경으로.
시간이 빠듯한 여행객은 이런저런 볼거리를 둘러볼 엄두도 내보지 못한 채 다시 서편제길을 따르면,
좌측으로 보이는 초가집이 '서편제 쉼터 주막'이라 하여 들러서 막걸리 딱 한잔으로 기분을 내어 보고자 했는데,
서편제 공원에 세워진 흉상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김종식 전 완도군수 흉상이라 좀 요상스런 느낌이 들고,
김종식 전 완도군수의 흉상은 완도군 청산도 서편제 길에 설치되어 있는데, 2013년 설치 이후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흉상은 지난 2013년 김종식 군수가 재직 중에 청산면 주민 천여 명이 기금을 모아 제작됐다. 관이 아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라 오랜 비판에도 철거 등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김 완도군수는 2002년부터 2014년까지 내리 3 연임했다. 2018년에는 목포시장을 지냈고 2022년 지방선거에서 연임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펌)
좌측의 서편제 쉼터 주막으로 들어서니,
찾는이가 없어서 그런지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듯 보여 사라진 막걸리가 갑자기 더 생각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주막 마당에서 본 도락리포구 조망.
쉼터 주막을 나와 다시 서편제길로 나서면 '서편제 촬영지'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고,
<서편제 촬영지>
이곳은 한국영화사상 120만 명의 관객을(서울 용산, 단성사 관람객 기준) 동원한 임권택 감독작품 "서편제" 촬영지로, 극 중 여주인공인 송하(오정혜)가 남도민의 정서가 담긴 진도 아리랑을 애절한 소리로 노래한 민족 고유의 향토색 짙은 장소이다. 영화 "서편제"는 영화진흥공사에서 주최하는 제3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신인여배우 주연상 등 6개 부분을 받았다. "서편제"는 광주, 강진, 보성, 해남, 진도 지방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애절하고 섬세한 소리로 여성적인 반면, 동편제는 운봉, 구례, 순창 지방에서 내려온 웅장하고 호탕하며 상쾌한 남성적인 소리를 특징으로 한다.
영화 <서편제>는 1993년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로 종로 3가에 있는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서울 관객 103만 명을 동원했고, 누적 관객수는 290만 정도이며, 국내 영화 사상 100만을 최초로 돌파한 영화이다. 당시 서구 문화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외시켰는데,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눈을 돌리게 한 영화로 한국적인 미를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작은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소설 <남도사람> 1부의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이다. 김명곤, 오정해, 김규철이 주연이었으며, 김명곤이 영화 시나리오와 각색을 맡았다. 그 후 김명곤은 문화체육부장관을 하기도 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유봉(김명곤)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소리꾼으로 한 때 아내와 아들을 두었지만, 아내가 아들(동호)을 낳으면서 죽었다. 이에 부모를 일찍 여의게 된 송화(오정해)를 수양딸로 삼아 동호(김규철)와 함께 판소리를 가르쳤다. 판소리 방랑에 불만을 품은 아들 동호(김규철)가 이탈하게 되자, 결국 송화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눈을 멀게하는 약을 달여서 먹여 송화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후에 유봉이 닭서리를 하다가 들켜 닭주인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하게 된 후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다. 유봉은 죽기 전 송화에게 자신이 너에 눈을 멀게 한 장본인이라고 고백을 한다.
송화는 유봉의 유언에 따라 판소리를 계속했으며, 이후 의붓 오빠인 동호와 재회를 했다가 다시 헤어지게 된다. 영화에서는 눈이 먼 송화가 길잡이 노릇을 하는 여자 아이가 등장하는데, 송화의 딸로 추측하는 시각도 있다.
영화의 주제음악은 가수 김수철이 만든 <천년학>이다. 영화의 히트로 앨범도 70만 장이 팔려 대박을 터트렸다.
김수철은 촬영기간인 5개월 동안 작곡을 못했다. 결국 임권택 감독이 내일모레 음악을 가지로 오라고 했고, 다음날 녹음실 도착할 때까지 작곡을 하지 못했다. 대금연주자가 악보를 달라고 했는데, 쓴 것이 없다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스튜디오 한켠에 있는 피아노 앞에서 25분간 써내려간 곡이 그 유명한 <천년학>이다.
이 영화의 히트로 인해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
영화의 장면마다 <진도아리랑> <심청가> <춘향가> 등 민요와 판소리가 등장했다. 송화가 심청가를 부를 때는 안숙선 명창이 소리를 대신해 찍었다. 나머지는 모두 오정해의 소리이다. 오정해는 김소희 명창의 제자(안숙선 명창도 제자)였다. 중국 상해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으로 온 올리버 스톤 감독이 오정해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참고로 오정해는 미스 춘양 출신이다.
아리랑의 뜻은 '아리다'가 어원이다. 아프다 애달프다. 슬프다 이런 뜻이다.
'아리'는 인도 남부지방의 언어에서 유래된 듯하다. 인도 남부 타밀족의 자장가 '딸라뚜'에서 "아리라 아리라 아라리오"라는 후렴구가 있다. 여기서 '아리'는 '상이함의 아픔'의 뜻으로, 우리의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는 뜻의 '아리다'와 같은 의미이다. 진도아리랑의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에서 '아리'는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중 아이를 달래는 의미에서 이별의 아픔을 표현한 것으로 진전 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펌)
서편제의 장면들과는 왠지 거리가 느껴지는 조형물.
청산도 서편제 촬영지 안내판.
빠듯한 일정으로 서편제 안내판을 읽는 대신 사진으로 담아서 서편제길을 따르면,
서편제길 소나무 숲에는 청해진 전성시대(서기 828년 통일신라 흥덕왕 3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던 한내구 장군의 묘라고 추정되는 고분(古墳)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사당에 영정을 모시고 현재까지 당제를 모시고 있다고 하며,
서편제길 입구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1866년(고종 3년)에 축조된 청산진성을 2010년에 낮은 돌담으로 복원해 놓았고,
이내 슬로길 1코스 서편제길에서 동구정길로 들어서며 좌틀하여 도락리 방향으로 이어지는 당리입구에 도착하면,
당리입구 표지석과 이곳부터 청산도 슬로길 1코스 서편제길이 시작된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당리입구에서 좌틀하여 동구정길로 들어서면 도락리 마을과 포구가 시원스레 내려다 보이고,
<도락리(道洛里)>
선조들이 마을에 이주 정착하면서 조선정조 13년 1789년에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당시 도의(道義), 유도(儒道)를 숭상하는 뜻에서 도장리(道長里)라 부르다가, 1876년 道樂里(청산진지), 1895년 도락리(道洛里)로 개서하여 불러오다가, 1914년 조선시대 유동만 이장당시 행정법정 호적대장 기록 때 지금 당리(堂里)와 도락리(道洛里)를 합구시켜 법정 행정구역상 당락리(堂洛里)라 하였다. 이후, 1896년 2월 3일 완도가 군으로 됨에 따라 도락리(道洛里)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락리해변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탐스럽게 피어난 억새가 마중나와 있는데,
도락리해변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에는 동구정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동구정길>
도락리에 있는 동구정이란 오래된 우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길로 동구정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항상 같은 수위를 유지한다 하여 신비의 우물이라고도 불린다. 도락리 안길 속 아트 갤러리(2011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장관상 수상)를 지나 동구정에 다다르게 된다. 동구정은 도락리에 있는 마을 우물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항상 같은 수위를 유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만남의 장소로 이웃 간의 소식과 정보를 알 수 있었던 우물가는 현재 도보 여행자의 갈증을 풀어주는 휴식처가 되었다.
<서편제길>
한국영화 최초 100만 관객을 동원한 서편제의 명장면 주인공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걷는 장면이 촬영된 길이다. 봄에는 유채꽃과 청보리,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길에 수놓아지면서 한폭의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점점 거세게 불어오는 찬바람에도 오리들이 유유히 떠있는 도락리해변을 따르다가 좌틀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오늘 아침에 떠났던 숙소에 예정된 시각보다 일찍 도착하여,
먼저 와서 준비한 백두들의 정성이 담긴 점심식사를 한다.
점심식사를 먹고 주변정리까지 말끔하게 마친 후 하룻밤을 묵었던 청산빌리지에서 기념사진을 담고는,
그저 또 만나자는 인사를 건네고는 1km 남짓인 도청항까지의 슬로길을 이어 걷기로 한다.
담벼락에 꽃그림이 예쁜 도락리 동구정길을 따라,
청산도 슬로길 1코스 동구정길 안내판이 있는 마을 입구에서,
<동구정길>
도락리에 있는 동구정이란 오래된 우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길로 동구정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항상 같은 수위를 유지한다 하여 신비의 우물이라고도 불린다. 도락리 안길 속 아트 갤러리(2011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장관상 수상)를 지나 동구정에 다다르게 된다. 동구정은 도락리에 있는 마을 우물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항상 같은 수위를 유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만남의 장소로 이웃 간의 소식과 정보를 알 수 있었던 우물가는 현재 도보 여행자의 갈증을 풀어주는 휴식처가 되었다.
아름다운 항구길인 미항길로 접어들어 도청항을 향하면,
아름다운 항구 길이라는 미항길은 차도를 따라 도청항까지 이어지는데,
<미항길>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부터 선창(부둣가)을 따라 걷는 미항길은 관광객, 상인, 주민, 청산도 농특산물이 한데 모이는 길로 바닷가 삶의 활기가 넘치는 길이다.
도청항의 대표적인 풍경인 빨간색과 하얀색 등대를 지나 도청항에 내리게 되면 도청항 방문자센터가 있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2011년 새롭게 리모델링되었으며, 승선권 구매 및 관광안내를 받을 수 있고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린 청산도 어판장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궂은 날씨 탓인지 아니면 서울이 아니라서 그런지 인적이 드문 도청리의 마을길을 기웃기웃 이어가면.
이내 도청항 청산도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슬로길 5코스~1코스 걷기를 마감하고,
세찬 바람으로 오전에는 결항했으나 오후에는 운항을 한다고 하여 3시에 완도로 출항하는 배를 기다린다.
대합실 옆 수산물센터에서 전복과 해삼 등등을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이도록 해 주신 회장님께 감사드리며,
그로 인해 산산이 해체되어 입안으로 사라진 생명들의 명복도 빈다.
출항 20분 전에 완도행 배에 승선하여,
다시 찾을 것을 기약하며 알찬 청산도에서의 1박 2일을 마무리하고,
새찬 바람에도 무사히 완도항에 도착하여 서울로 향한다.
2004년에 우연찮게 만난 백두산우회가 청산도에서 19주년 기념 트레킹을 했는데,
아무런 연고나 이해관계가 없는 동호회가 그리도 긴 세월을 함께 한 것은 드문 일이다.
갑자기 몰아친 차가운 북풍으로 인해 이러저러한 지장이 있었지만,
그만한 추위야 수없이 견디며 산행을 이어온 백두들이라서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지만,
내년 20주년부터는 날짜를 조금 앞당기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세상살이가 별거 아니라서 이런들 저런들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지만,
모든 변화와 개혁에는 반드시 양보해야 하는 분들이 있기 마련이라,
관행으로 자리잡은 것을 바꾼다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기 좋은 말로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그래도 베어줘야 하는 살을 벨 때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다.
과연 우리 모두에게 양보와 희생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다시한번 찬찬히 확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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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나라 섬도 참 아름답습니다.즐 감했습니다.감사 감사 감사 드립니다.
백두19주년 청산도 여행 ….
다시 보니 아름답고 행복하고 사랑스럽네요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