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어린이가 얼마 전에 발목을 다쳤다. 사실 다쳤다 정도의 단순한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발목 뼈가 똑 부러져서 철심을 두 개나 박고 왔다. 체육시간에 공을 밟고 넘어지면서 다치다니. 어떻게 학교 수업시간에 그렇게 다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다...
이 어린이가 교사의 지도를 무시하고 딴짓하거나 까불어서 밟고 넘어진 것도 아니고 친구들 공 주워주려고 네트 앞에 나와있다가 넘어졌다. 심지어 학생선수라서 매달 전국대회를 한번씩 나가던 학생이었다. 하교하면 체력훈련하랴 학원다니랴 바쁜 이 어린이. 아무래도 결석이 잦으면 공부에 소홀하게 되니 걱정이 되어 학생선수도 학생이니까 운동하는만큼 공부도 열심히 해야한다고 강조하면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하겠노라 다짐하는 학생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더 쓰였다.
다치고 일주일 정도는 진료-수술-입원으로 학교를 오지 못했고, 최근에는 깁스를 한 채로 휠체어와 목발에 의존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다. 보건선생님께서는 통깁스를 오래 하니 다리 근육이 다 빠질까봐 걱정이라고 하셨는데, 이 어린이에게는 그런 면을 강조하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겨드랑이쪽 근육이 더 튼튼해지겠다고 얘기해주었다.
"통깁스 풀면 바로 재활도 할거구 그러면 운동도 다시 하면 되지."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 또 지난 오늘, 체육시간에 플라잉 디스크 연습을 하고 게임활동을 했다. 멀리 있는 지점까지 가장 적은 횟수로 플라잉디스크를 던져 도달하는 게임이었다. 마치 이 스포츠와 유사하지 않니? 본능적으로 발문을 던졌더니 아이들 입에서 골프라는 대답이 나오고, 깁스한 학생에게로 눈이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아차, 우리반 골프 선수가 발을 다쳐서 뒤에 앉아있었지...
다리를 다친 골프선수와, 발목이 아픈 학생 둘은 앉아서 쉬고 있고, 나머지 친구들은 땡볕 아래서 열심히 플라잉 디스크를 던지면서 연습을 했다. 그런데 어느샌가 보니 쉬던 학생 두 명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리 붓기가 심해져서 보건실에 누워있으려고 갔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정신을 모아 체육수업을 진행했다. 사실 땡볕에 운동장 수업이라 나도 땀이 줄줄 흐르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게임까지 무사히 잘 마쳤다고 생각했다.
너무 건강해서 약간 아쉬움이 남는 그런 점심식사를 마치고, 2교시 체육수업을 잊어버릴 때쯤 한 어린이가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뒷문으로 손짓한다. 발목이 좋지 않아 체육시간에 같이 쉬었던 다른 어린이다. 몰래 교실을 빠져나와 복도에서 하는 말이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ㅇㅇ이가 아까 골프 얘기 나오고 엄청 울었어요."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 그리고 그 애가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구나. 그 말을 듣고 나니 어린이가 학교에 다시 등교한 첫 날 어머니 말씀이 아른거린다.
"깁스 풀면 재활 들어가려구요. 운동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중요한 시기에 다치다보니까 본인도 마음이 많이 꺾여서.. 의지를 회복하는게 중요할 것 같아요."
"ㅇㅇ이가 그런 생각을 했구나. 그럼 선생님이 따로 얘기해볼게. 알려줘서 고마워."
근데 제가 말했다는건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어디서 들었다고 해주세요.
그래 너 얘기는 절대 안할게! 안심시켰다.
정신없는 5교시를 보내고, 쉬는시간에 마침 내 옆에 온 선수 어린이에게 체육시간에 골프 얘기 듣고 많이 속상했냐고 물으니 멋쩍어하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후의 말들은 뭐.. 신들린 것처럼 입이 움직였다. 딱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가끔은 사고가 생길 수 있다는 그런 사실을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으니까. 13살 이 어린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꾸준히 열심히 해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괜찮은 학생이 계속 트라우마에 갇혀있는 것이 싫었다. 이 애한테는 부상이 당장의 현실이고 넘기엔 너무 큰 벽같이 느껴지겠지만, 나에게는 이미 지나온 초등 시절이고 이때의 실패가 절대로 평생 가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지금은 시련이지만 이걸 잘 이겨내면 평생의 안주거리가 된다.
대회 실적을 더 쌓아서 선수 자격으로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어린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응원을 했다. 내가 이런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었나? 놀라웠다.
"ㅇㅇ아, 지금까지 전국대회 많이 나가봤지? 그러면 거기 온 애들이 서울 애들만 있어? 아님 전국에서 와?"
"전국에서 와요."
"그러면 그 애들은 다 서울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니?"
"음, 아마도 아니겠죠?"
"맞아. 선생님 생각에도 아닐 것 같은데. 각 지역마다 골프로 유명한 중학교 다 있을걸? 그리고 선생님은 너처럼 골프 잘 치는 애를 본 적이 없어. 심지어 열심히 하고 진심으로 해왔잖아. 대회도 많이 나갔었고. 깁스는 두 달 뒤면 풀거라고 하셨는데 중학교 입학준비는 10월이란 말이야. 지금 다쳐서 대회 못나가니까 중학교 특기자 입학은 포기해야한대?"
"그런건 아닌데 뺑뺑이 돌린다고 하니까 대회 성적이 부족하면 확률이 좀, 어려워진다고 했어요."
"그럼 아주 안되는건 아니네?
지금 이걸로 좌절하기엔 넌 너무 아까워. 선생님이 너를 봐서 알잖아. 열심히 하는데 또 잘하잖아. 사람이 살다보면 가끔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을 때가 있대. 이 부상을 이겨내고 더 강한 선수로 중고등학교-성인까지 활동을 계속해갈지, 부상이 생겼으니까 13살에 포기할지는 너의 마음가짐에 달린거야. 네 인생의 주인공이 너잖아. 네 인생을 어떻게 쓸지 결말을 너가 정할 수 있어. <김ㅇㅇ 13살에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포기하다> 이게 좋아? 아니면 <김ㅇㅇ 발목부상에도 불구하고 최고 기록> 이게 좋아?"
"어.. 뒤쪽이요?"
"그래, 선생님도 후자였으면 좋겠어. 선생님이 너 다친 날 보건실에서 <최선을 다해서 쉬라고, 그래야 빨리 낫는다>고 했지? 사람 마음이 몸에도 영향을 준대. 중학교 입학에 대회 성적이 들어간다고 하니까 당연히 조급하고 속상하고 초조하겠지만.. 일부러 최선을 다해서 좋게 생각하는거지. 그리고 선생님 생각에, 너가 잠깐 다리 다친걸로 특기자 입학을 못할 것 같지 않아. 주변에서 선수생활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라니 더더욱.
서울에, 그것도 이 ㅇㅇ구에 너만큼 실력있는 애들이 흔해?"
"아니용" ← (ㅋㅋㅋ)
"그니까~ 전국대회에서 만난 걔네들은 그 지역에서 중학교 가지 않을까? 멀리 서울까지 중학교 다니진 않을거아냐."
"음, 아무래도 그럴거같아요.."
"그래~ 수술하기 전까지만 해도 엄청 걱정하고 무서워했는데 지금은 학교도 다니고 있잖아. 목발도 처음엔 겨드랑이 아프다고 했는데 많이 익숙해졌지? 그거 봐. 너는 할 수 있는 애야. 해낼 수 있는 애라구. 너무 울고 속상해하지 말어. 최선을 다해서 낫고, 깁스 풀자마자 재활도 해. 다 해도 중학교 원서접수까지 시간 있어."
"넹" ← (휴!)
나의 초등학교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각 학년 선생님들마다 에피소드가 한 두 가지씩 떠오른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사건들 중에 이 기억이 나에게 남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나만 틀리게 노래부른 줄 알고 철렁하던 찰나, 나만 맞았다고 칭찬해주셔서 안심하고 으쓱했던 경험(1학년),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다가 실패해서 속상했던 기억(2학년), 선생님께 잘보이고 싶어서 괜한 말을 여쭈었다가 머쓱했던 경험(3학년) 등등. 내 선생님들은 당신의 제자가 서른이 되어서까지 이런걸 기억하리라고 짐작하셨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아주 사소한 기억들이다.
그렇다. 교사가 아무리 신경써서 말해도 학생들에게서 잊혀질 수 있고, 무심코 한 말도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 아마 오늘 내가 해준 말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오늘 말은 이 어린이에게 되도록 오래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의사도 아니고 프로골프선수도 아니라서 내 말은 그들이 하는 말과 같은 무게의 조언은 못될 것이다. 또 어쩌면 임시방편에 불과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그리고 어디까지나 내 학생이니까) 계속 공을 들이고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교직일기를 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지양하려고 하는데요.
여기 올려서 여러 사람이 잘되라고 같이 바래주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올려봅니당
이 어린이가 졸업할 즈음이 되면 이야기의 결말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첫댓글 감동입니다 선생님!
어린이에게도 오랫동안 기억될 한 마디가 될 것 같아요.
꾹꾹 써주시는 댓글에 힘을 얻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