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ttoo your love 💘
보스턴의 한 길거리. 백현은 욕을 짓씹었다. 씨발…. 그러게 안 한다니까. 좆같네 진짜. 남은 건 정장 바지주머니 속 한도 없는 블랙카드 한장이다. 달랑 카드 한장 남았다는 건 휴대폰도 뺏겼다는 것. 피로 불거진 손등 뼈가 주먹을 쥘 때마다 툭 튀어나왔다. 이러해도 저러해도 쓰라린 건 매한가지였다. 입꼬리가 터져 시원하게 욕을 발음할 수도 없었다.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다. 휴대폰이 없으니 비행기표를 당장 예약할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 남은 쥐새끼들한테 걸리면 끝이었다.
힘이 부치는대로 골목길에 몸을 대충 욱여넣어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뒤지겠네 씨발. 좀만 쉬다갈 심산이었다. 그럴 여유가 없는 걸 알면서도 진짜 백현은 죽을 맛이었다. 한국에 도착하면 당장 아버지를 뵐 작정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하나 있는 아들 구렁텅이로 처넣는 거냐고.
사실 백현의 호주머니 안 블랙카드는 백현의 재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궈낸 재력. 다만 백현의 아버지가 하는 것은 큰 사업이었다. 처음엔 일개 작은 사업인줄 알았더니만 백현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니 개인 건설 사업에서 왜 갑자기 시장 이름이 나오고 대통령 이름이 거론되냐고. 왜 헤드쿼터가 한국 땅도 아니고 미국땅에 있는 거냐고. 백현은 헛웃음을 쳤다.
백현의 아버지는 그런 제 아들이 제 뒤를 이었으면 했다. 개인 사기업에서 당연 우두머리의 뒤를 이을 차기는 현 우두머리의 핏줄이 되는 게 정서상 가장 들어맞았다. 그게 아니면 굳이 제 아버지가 힘들게 세워놓은 자리를 일개 다른 집안에게 넘겨주기는 힘들지. 그래서 다니던 고등학교도 거의 중퇴하고 몇년동안 사업만 배웠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근데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백현은 정치깡패의 현대판을 두 눈에서 보았다. 사업깡패.
뒤를 봐줄테니 좋지 않은 일들은 족보 이어져 대대로 이루어져 오는 정말 소수 남은 치들에게 맡기는 것. 깡패새끼들 이제 다 사라진 거 아니었냐고. 백현은 두 눈으로 보고도 이게 맞나 싶었다. 그래도 제 아버지 뜻을 거를 순 없었다.-그래도 아예 그런 사업을 하는 게 아니고 건설기업에서 소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어쨌든 헤드가 있는 미국으로 무턱대고 비행기 타고 날아갔다. 근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화가 잔뜩 난 사업깡패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갑자기 자신을 개패듯이 패질 않나. 영어로 뭐라 씨부렁 거리는데 백현은 까막귀가 아니라 다 듣긴 들었다.
미스터 변 비트레이드 어쩌구. 딱 봐도 제 아비에게 통수 맞은 멍청한 치들이 그가 애지중지 키우는 도련님한테 몰려와 질낮은 패악을 부리는 짓이었다. 백현은 이 악물고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맞았다. 어차피 대가리 수 눈으로 대충 따져도 20대 1인데 반항해봤자 이길리? 전혀 만무했다. 그저 빨리 원하는 반응 내주고 끝내자 이거였다. 그리고 잠깐 깡패새끼들 한눈 판 사이에 보스턴 골목길 사이로 뛰쳐들어 도망쳤다.
숨을 헉헉 내쉬었다. 가쁜 숨이 찬 날씨를 타고 하얗게 입김을 뿜어냈다. 개새끼들…. 그 놈들이 진짜 영악한 게 때린 곳만 때리고, 또 때렸다. 왠지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숨이 쉬기 어려운 게 갈비뼈 하나는 나간 것 같았다. 부러지지 않았더라도 금이 간 것 같은 기분. 그래도 낯선 타지에서 덩그라니 뒤지라는 법은 없었는지 저 멀리서부터 새하얀 빛이 이곳을 쬐어왔다.
이곳을 순찰하던 주위 경찰이든, 아님 다른 시민이든. 누구든 나 좀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다줘라. 딱 그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들어온 건 저보다 반뼘이나 작은 어린 여자애였다. 백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재수가 없으려나. 왜 하필. 그래서 백현은 그저 죽은 척 했다. 그냥 지나가라. 제발 그냥 지나가라. 하지만 그 여자애는 좀처럼 자리를 뜨질 않았다. 그러다가 곧 휴대폰을 키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그대로 나와봐. 엄마아빠한테는 말 하지 말고. 익숙한 언어였다. 한국어.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할지. 백현은 숨을 색색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몇번씩 무식하게 저를 부축하겠다고 제 팔을 들고 어깨에 두르게 한 후에 힘을 주는데 백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프다. 존나 아프다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백현 성격에 쌍욕을 지껄이면서 그랬을법도 한데 이상하게 입이 쉽게 열리지가 않았다.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두 눈이 올망졸망하게 뜨여 눈꼬리가 축 떨어져 있었다. 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멀리서 남자애 하나가 다가오더니 익숙하게 자신을 부축했다. 부상자를 부축하는 자세부터가 백현은 알 수 있었다. 얘 운동하는 남자애구나. 뒤늦게 도착한 남자의 부축을 받고, 반대편에서는 제 손을 잡고 쫑쫑 걸어오는 여자애의 체온을 느꼈다. 별로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러나 백현은 여자애에게 잡힌 제 손을 내치지 않았다. 힘들게 자리를 옮겨 도착한 곳은 풀빌라의 형색을 갖춘 호텔이었다.
백현의 머릿속에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민자는 아니고. 여행 온 건가. 이 집안도 오질나게 돈 많나보네. 따뜻한 공간 안으로 들여져 소파에 엉거주춤 눕혀졌을 때 백현의 의식은 거의 희미해졌다. 그저 저를 보고 놀란 중년의 여자와 남자가 나와서 제 옷을 벗겨 확인하고. 어린 여자애와 남자애를 다시 방으로 이끄는 것까지가 백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그 작은 여자애는 뒤를 돌아 저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쪽 눈만 슬쩍 작게 떠 그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애는 아직도 울상이었다. 그 작은 얼굴을 마지막으로 백현은 눈을 감았다.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거실화를 신고 직직 끌어지는 마찰음이 러그 위에 닿자마자 사라진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백현이 곧장 외투를 벗었다. 괜히 답답한 마음이 당장 해소되지가 않았다. 기분이 급저하된다. 모든 까닭은 방금 전 들렀던 본가에 있다. 약혼따위니 뭐니. 어디서 그렇게 여자를 뽑아 오는지. 그것도 참 능력이고 재주다.
아직 아버지와 어머니는 백현의 교제 사실을 모른다. 물론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백현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셔츠 단추를 상복부까지 풀어내렸다. 방에는 작은 이물감이 이불을 잔뜩 뒤집어 쓰고 있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다가가니 머리카락만 빼꼼 내밀고 잠들어 있는 채이가 있다. 꿉꿉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해소되는 기분이 든다. 머리끈 자국이 남아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몇번 만지작거리던 백현이 채이를 깨웠다.
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비몽사몽하는 채이를 당겨 일으킨다. 대충 불만소리를 내며 꿍꿍거리는 작은 몸을 한가득 끌어안았다. 제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이불째 채이를 들어 잔머리를 넘겨준다. 이불 안에서 꽁꽁 싸매진 팔을 들어올린 채이가 앞을 허우적거리며 백현의 옷깃을 잡아챘다. 몇번 킁킁대더니 제가 맡기에 익숙한 향이었는지 다시 흐응... 하면서 가슴팍에 기대고 숙면에 취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현은 채이를 재울 생각이 없다. 벌써 점심을 넘긴 시간대였거니와 이기적이게도 이 좋지 않은 기분을 해소시키기 위해 백현에겐 채이가 필요했다. 살살 흔들어 깨웠다. 아기를 대하듯. 엄지손가락으로 눈밑과 애굣살을 살살 쓸어줬다. 슬그머니 눈꺼풀을 다시 뜨기 시작한 채이에게 한번의 입맞춤은 덤이었다. 입술이 아닌 볼에 향한다.
"일어나 채이야."
"...어, 어엉?"
"언제까지 잘래?"
"말하면 더 자두 돼?"
백현이 듣기에 꽤 깜찍한 대답이었다. 아니. 결국 제 몸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이를 가뿐히 안아들어 침대를 벗어났다. 채이를 꽁꽁 싸매고 있던 극세사 이불을 걷어내자 움찔한다. 추워?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주며 물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제 뺨을 두어번 짝짝 내리친 채이가 엉금엉금 백현의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런 채이를 막은 건 백현이었다.
"씻을거야.."
"밥 먼저 먹을래?"
"아니.. 나 다시 집에 가야지."
"내일 간다며."
"...내가 언제 그랬어어.."
"안 속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낸 백현이 채이의 눈꼬리에 입술을 한번 맞댔다. 하품을 쩍쩍 하면서 눈을 잔뜩 비비곤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다. 채이가 사라진 공간에서 백현은 쇼파에 등을 기대고 더이상 제 무릎 위에 앉힐 인영이 없어 다리를 꼬았다. 쇼파 헤드에 머리를 기대곤 그 사이로 팔을 끼워넣어 제 약지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살살 만지며 둥글게 굴렸다.
그때 휴대폰이 한번 더 반짝거렸다. 발신자가 누군지 진작에 눈치챈 것처럼 백현은 휴대폰의 전원버튼을 눌러 밝게 비춰지는 화면을 어둡게 꺼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또 시작이시네.
"제대로 버티고 오면 졸업하기 전까진 터치 안 하시겠다면서."
그 소리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린 백현이 꼬여진 쪽의 발을 까딱거렸다. 백현은 제 아버지와 일종의 거래를 한 것이다. 네 역량을 내게 톡톡히 보여주면 그때라도 학교를 다시 가든 말든 상관 안하마. 무얼 하든 신경도 안쓰마. 대신 졸업하기 전까지만이다. 졸업 후에는 너도 슬슬 준비해야 할 것이야.
백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긍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채이를 다시 보는 게 급급했으니까. 졸업하면 언제든 채이를 제 아버지에게 소개시켜줄 자신이 있었으니까.
근 3일만에 자취방에 들렀다.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다보니 벌써 해는 지고 있었고 오랜만에 격하게 움직인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기분이었다. 이정도면 체력부족이야 진짜. 허리를 주먹으로 콩콩 때리며 침대에 누웠다. 집에 잘 들어갔냐는 백현의 연락에 답장했다. 방금 전까지 집에 들어가는 거 두 눈으로 다 확인한 사람이. 주체할 수 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요즘따라 생각해보면 그랬다. 막연하게 내가 고등학생 때는 백현이랑 이렇게 될 줄이야 알았을까. 처음 내게 무서운 얼굴로 말하던 그 모습이 이제는 오히려 굉장히 낯설었다. 갑자기 휴대폰에서 울리는 진동에 다급히 들어보이면 그새를 못참고 영상통화가 수신되고 있다. 침대에 누워 그대로 슬라이드를 넘기고 카메라 렌즈에 눈만 들어올려 비췄다. 뭐해? 단촐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떨어졌다.
"나 이제 옷 갈아입구..."
"아까 들어가서 뭐했어."
"뭐하긴. 빨래하고, 청소하고... 귀찮다. 그냥 자고 싶어.."
"혼자 잘 수 있겠어?"
"뭐야.. 이젠 완전 어린애 취급이네."
"나는 이채이 없음 잠 안오는데."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는다. 웃음이 터질랑말랑했다. 휴대폰을 대충 거치대에 올리고 입고있던 후드티를 벗어내렸다. 대충 침대 위에 올려진 잠옷용 티셔츠를 손에 들고 목을 찾는다. 찬기가 바로 낳는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티셔츠의 목구멍에 머리를 집어넣으려 하기도 잠시. 시야에 들어오는 이질감에 슬쩍 나시의 앞섬을 쥐고 벌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슴에 잔뜩 남은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새겨져 있다. 설마설마 하는 마음에 반대편의 얼굴을 본다.
"...이게 다 뭐야!"
"옷 빨리 입어 채이야. 춥다."
"말 돌리지 말고! 이거 뭐냐구!"
"뭐긴."
"너 나 몰래 무슨 짓을 한거야! 나 자는동안!"
"자는동안에도 좋다고 낑낑거리던데."
순식간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원망스레 쳐다보아도 이미 잔뜩 새겨진 자국은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충 티셔츠에 몸을 구겨넣어 몸을 덮었다. 안 그래도 중증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왜 너는 하필이면 내 가슴을 제일 좋아하는 거냐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앙 다물었다. 화면에 비치는 놈을 잔뜩 째려보아도 소용 없었다.
"또 입 잔뜩 튀어나왔네 이채이."
"짜증나아...."
"얼른 입 집어넣어."
"..싫어! 왜 다 네 맘대로야!"
"지금 찾아가서 직접 입 넣어줘?"
"...아니이.."
내가 듣기에 꽤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놈이었다. 직접 찾아와서 불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집어넣어주는 척 잔뜩 괴롭힐 그 흑심을 모르지 않았다. 안으로 입술을 앙 물어 집어넣었다. 괜히 입을 다시면서 목을 울렁이는 백현의 모습이 두 볼을 붉게 만들었다. 대체 왜 저렇게 쟤는...
"얼른 자 채이야."
"..왜 나 재우려고 해?"
"그럼."
"나 빨리 재우고 다른 거 할일 있어?"
"어떻게 해줘."
"아니 그냥... 조오금 섭섭해서."
"뭐가 섭섭해. 다시 갈까?"
"됐거든!"
"말해봐. 잔뜩 이뻐해줄게 이채이."
"...어떻게?"
"안아줘야지."
괜히 혼자 누워있는 침대가 서늘하긴 했다. 근 삼일동안 큰 품 안에 꼭 잠겨서 잤는데. 혼자 자려하니까 옆자리가 휑한게 인형이나 베개따위를 끌어 모아도 그 넓찍한 품에는 비교도 되지 못했다. 입을 꾹 말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도 백현이도 피곤할거야. 혼자 자야지. 이불을 목 끝까지 가득 끌어 모으고 옆으로 누웠다.
"아니야... 나 그냥 재워줘."
"옆에 없는데 어떻게 재워줘."
"으응.. 잘, 잘.."
"또 그러네."
"빨리... 응?"
"자꾸 잘 해달래. 버릇 안좋아지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 재워달라고 했지. 혼내달라고 한거 아닌데...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듯이 엎드려 누운 백현이 수화기에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대고 또 입술을 모아 휘, 바람소리를 냈다. 몰래 감은 눈을 다시 들어올리자 두 눈이 마주쳤다.
"금방 잠들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나 빨리.. 노래 불러줘. 노래. 응?"
잔뜩 잠긴 목소리로 곰곰히 생각하는 듯하던 백현이 소곤소곤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른한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정신이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이채이."
"...."
"자?"
"...."
아니라고. 아직 안 잔다고. 나 아직 네 목소리 들린다고 답을 해야하는데 도무지 입이 벌려지지가 않았다. 간혹가다 무거운 눈꺼풀만 꿈뻑거리며 흐릿한 시야를 응시했다.
"잘자."
"...."
"난 또 이채이 그리면서 잠도 못자게 생겼네."
무언가를 중얼이던 백현이 혼자 피식 웃더니 그대로 말소리가 끊겼다. 전화가 끊어졌나? 의문을 품기도 전에 완전히 졸음에 잠식된 정신이 서서히 멀어졌다. 다음날 끊어진 통화내역을 살펴보니 실제로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보다 거의 두배가량의 시간이 더 찍혀 있었다.
→채이 식탁에 샌드위치 두고갔어
→되게 잘자네 괜히 깨우고싶게
→오늘 학교 못데려다 줄 것 같아서 미안해 버스 타기 힘들면 오세훈 불러 내가 미리 말해놨어
→이따가 보자. 맞춰서 갈게
→사랑해 귀여운 이채이
"흐음..."
잔뜩 쌓인 부재중 연락을 확인했다. 괜히 뒤숭숭했다. 가뜩이나 오늘은 같이 듣는 수업도 없어서 매일 등교만 같이 하고 학교 내에서 각자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거의 보지 못하는 날이다. 쩝. 입을 다시고 볼을 긁적였다. 에이. 부르긴 뭘 불러. 오랜만에 버스 타고 좋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운 좋게 경수를 만났다. 벌써부터 무겁게 한쪽 팔에 전공책이 끼워져 있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인다.
"가방 들고왔으면서 뭣하러 손에 들고 와?"
"글쎄다."
"뭐야..."
"네 옆에 그 분은 어디 계시냐? 왜 안 와?"
"몰라. 오늘 못 데려다줄 것 같대."
"이채이 버림 맞았네."
"우씨!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마!"
얄밉게 빈정거리는 놈에게 주먹을 들어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아, 미안, 미안해. 그제서야 사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책 바뀌어서."
"책이 바뀌어?"
그렇구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근데 어떡해. 오늘 백현이 학교 안 와서. 내가 말하자 도경수가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천하의 변백현이 이채이만 학교에 떨구고 어딜 가셨나."
"...야!"
"뭐."
"..떨구고 간 것도 아니거든. 나 혼자 왔어.."
"그래. 그거나 그거나."
샌드위치는 가방 한켠에 그대로 자리했다. 이따가 수업 끝나고 나서 먹을 심산이었다. 자기는 강의실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마실 것 좀 사겠다며 갈거면 먼저 가라는 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따가 샌드위치 먹을거면 나도 미리 음료 사야지.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창가에 자리를 잠깐 잡았다. 곧 얼마 안가 울리는 진동벨의 놈의 몫인 아메리카노와 내 몫인 청포도 에이드를 손에 들었다. 아메리카노를 놈의 앞에 두고서 가방을 열었다. 너도 샌드위치 먹을래? 내가 건네자 고개를 저었다.
"아침 먹고 왔어."
"디게 빠르네..."
"니가 늦게 일어나는 거지."
참나. 실소를 터트렸다. 도경수 부지런한 거 누가 알아주나. 실없는 농담이 오고갔다.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참에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비추기 시작했다. 얼굴 하나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뭐야. 왜 저기 있는거지? 내가 걸음을 멈추자 옆에 나란히 서있던 도경수도 날 의아하게 바라보더니 내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변백현 아냐?"
"....맞는데."
"왜 저기 있대?"
야, 다가서려는 놈의 팔목을 붙잡았다. 잠깐, 잠깐만. 나를 내려다보는 놈의 시선을 대충 무시하고 몰래 한걸음 다가섰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백현이를 내가 착각할 리는 없잖아. 근데 왜.
"오빠."
"대충 없던 일로 해요."
"...."
낯선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모습은 필히 틀림없었다. 카페 내의 소음과 음악소리와 물려 잘 들리지는 않았다. 다만 여자의 입모양은 똑똑히 보았다. 오빠. 오빠? 오빠?! 아니 누군데!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굳어지다 못해 얼굴을 잔뜩 구기자 옆에 있던 도경수가 나를 따라 한걸음 다가서 귀를 기울였다. 괜히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침이 자연스레 꼴깍 넘어갔다.
"아시다시피 알면 곤란한 사람이 있어서."
"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오히려 같은 입장이네."
"하지만 다르죠."
"대체 뭐가?"
둘의 대화가 선명히 들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귀에 들어오는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걸음 더 바짝 다가가고 싶어도 그때는 들킬까봐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그저 내 손목을 잡고 카페 밖으로 이끄는 도경수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신경쓰지 마."
"...."
"궁금하면 따로 물어보면 되지."
"..물어보면 백현이가 말해줄까?"
"못 말해줄 건 또 뭔데."
"...."
"떳떳하지 못하면 말 못하는 거고. 떳떳하면 말 하는 거고."
"...."
설마 걔가 널 두고 바람을 피우겠어, 뭘 하겠어. 놈은 위로딴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차마 내 기분이 나아지지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강의실로 들어가기 전에 벤치에 잠깐 들러 몸을 앉혔다. 내가 백현이한테 받은 샌드위치를 대신 까준 녀석이 내 입에 물린다.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샌드위치가 들어온 입은 야무지게도 내용물을 씹었다. 그런 내 모습이 웃긴지 놈은 더이상 내 눈치를 보지 않고 막 웃어댔다.
맛있는 걸 먹어도 기분이 영 풀리질 않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기가 무섭게 우리가 앉아있던 앞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검은색의 가죽지갑이었다. 발끝에 떨어진 지갑을 주워들었다. 여자지갑인데? 고개를 뻗어 바라보자 이미 건물 안으로 사라진 인영은 다른 인파와 섞여 누군지 구분이 불가능했다.
"가다가 경비실 한번 들려야겠네."
"응. 근데 누구꺼지?"
혹시 아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괜히 죄 짓는 기분이었지만 몰래 지갑의 단추를 딸깍 하고 풀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학생증이었다. 학생증에 박혀있는 꽤 환한 미소의 얼굴이 익숙했다. 어디서 봤지. 어디서 봤더라... 왜 익숙한가 했더니 방금 전 카페에서 본 그 여자였다. 백현의 맞은편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자. 기분이 또 다시 다운되었다. 지갑을 쥐고 또 세상떠날 것처럼 표정을 굳히니 내 손에 들린 지갑을 낚아채간 도경수가 뭐야, 하면서 지갑을 훑어본다.
"아무것도 없는데 왜 갑자기, 어?"
"...왜?"
미간을 찌푸리며 어, 하고 탄성을 내지른 놈이 학생증이 들어있는 칸으로 얼굴을 빼내 꼼꼼히 훑어본다. 이제는 지갑이 아닌 학생증이 들린 놈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는 사람이야?
"이 누나 우리 과학회장인데."
"...학회장?"
그럼 니가 주면 되겠네. 지갑을 놈에게 맡겼다. 너 지갑 돌려주고 오던가. 내가 자리 맡아두고 있을게. 내 말에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벤치 앞에서 경로가 틀어진 도경수와 나는 서로 찢어졌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들어 전원을 켰다. 역시 도착한 연락은 없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1 19:5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1 20:1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1 20:5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1 20:5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2 00:0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2 00:1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2 09:1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2 17:3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3.23 02:17
첫댓글 하필 소개받은 여자가 같은 학교야... 근데 또 학회장... 채이 혼자 앓고 있다가 울 거 같아요 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4.03 17:5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4.20 00:3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4.30 06:3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5.09 01:0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5.22 07:3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5.30 15:4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8.27 01:0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8.28 22:1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8.29 22:5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8.31 15:4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06 11:0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07 00:3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07 23:5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12 19:2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17 02:0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19 10:3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21 00:4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2.06 07:2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1.15 12:0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1.29 14:4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2.01 23:4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2.09 04:4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2.12 12:2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2.17 21:5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3.12 16:0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4.23 01:0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4.23 01:1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4.23 01:3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4.23 01:4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5.29 04:2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5.31 20:2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6.11 20:4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8.28 15:0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9.08 01:0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12.27 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