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강호 12
만일 유천기가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그는 벌써 만신창이가 되
어 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양보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유천기는 도를 거두었다. 그러나 해월은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
었다. 문득 해월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미타불....... 빈승이 졌소이다."
그는 합장하며 눈을 감고 말았다.
"대사의 도법도 무척 훌륭......."
말을 하려던 유천기는 흠칫했다. 아니 흠칫할 정도가 아니라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갑자기 해월이 손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힘껏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으깨어
지며 뇌수가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이... 이럴 수가......!"
유천기는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너무나 어이없게 죽어버린
해월을 내려다 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단 한 번의 패배가 이 스님을 죽음으로 이끌었단 말인가? 하물며
세속에 연연하지 않아야 할 불제자로서.......'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호의 생리에 대해 유
천기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실상 해월이 죽음을 택한 것은 자신으로 인해 소림의 명예가 실추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죽음으로써 사문에
속죄를 한 것이었다.
"아아! 대체 명예가 무엇이길래? 무공이 무엇이길래 이런 길을 택
한단 말인가?"
유천기는 한동안 멍하니 해월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회의를 금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해는 어느덧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어쨌든 일단 결정한 일이니 이 일로 중단할 수는 없다.'
그는 탄식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소림사의 산문 앞에 이를 때까지 그는 아무런 저지도 받
지 않았다.
유천기는 마침내 소림사의 웅장한 산문 앞에 이르렀다.
"......."
금빛 찬란한 편액은 석양을 받아 더욱 웅장하고 화려한 느낌을 주
고 있었다. 산문 앞에는 열여덟 명의 황색가사를 입은 중들이 엄
숙한 표정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다가가자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적개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천기는 내심 생각했다.
'세번째 관문이란 이들을 모두 물리쳐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때였다. 십팔 명의 황의승 중에서 한 명의 오순 가량의 중이 앞
으로 나오더니 합장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이관을 돌파하셨으니 이번에도 자신이
있겠지요?"
유천기는 그들이 이토록 빨리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데 대 해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동시에 그들이 지나치게 호전적이라는데 대해 역감이 이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해월이 죽음을 택한 것을 본 이후로는 사실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자 은근히 분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펴며 딱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느 분께서 가르침을 주시겠소?"
황의승려는 눈빛을 번쩍이며 말하였다.
"빈승은 소림의 일대제자인 해공(海空)이라 하오이다. 시주께서는
우리 십팔나한승(十八羅漢僧) 중에서 임의로 아무나 두 명을 택할
수 있소이다."
십팔나한승이라면 천하를 진동하는 소림의 호법무승이었다. 그들
은 소림사 비전의 나한대진(羅漢大陣)을 구성하는 자들로, 백팔나
한진에 속한 여섯 개의 소나한진(小羅漢陣)을 이루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무공은 가히 심후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강호상에서
도 일류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유천기는 초립을 벗지 않은 채 승려들을 둘러 보았다. 그들의 눈
에서는 하나같이 신광(神光)이 번쩍이고 있었으며 관자놀이가 불
룩 솟아있어 내외공(內外功)이 겸비된 일류고수들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소림에 시비를 걸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평소부터 귀
사를 흠모하여 방문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장족(掌足)
을 맞대는 일보다는 다른 방법을 원합니다......."
그 말에 해공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었다.
"강호에서는 일이 없으면 삼보전(三寶殿)에 오르지 않으며, 또한
오는 자는 선하지 않다 하였거늘 어찌 마음에도 없는 겸양의 말씀
을 하시오?"
유천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사의 말씀은 날 격동시켜 기어이 손속을 쓰게 하려는 것 같소
이다. 불문의 사람으로서 어찌 속인처럼 감정을 내세우는지 모르
겠소이다."
"소림은 아직까지 타인의 시비를 받아 본 적이 없소이다. 시주께
서 행하신 일은 생각치 않고 억지만 부린다는 것은 소림을 너무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오?"
"하하하하......!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오! 소림이 무림의 태산
북두라 하여 매사에 공정하고 대의가 분명한 줄 알았는데 이제보
니 애매한 누명을 씌워 사람을 몰아 세우는 것이 능사인 모양이구
료? 관문을 설치한 것은 누구이며, 이제와서 또 관문을 돌파한 것
을 죄로 몰고 있으니 그럼 소림을 공경하는 것은 귀사의 사람에
대해서는 언제나 양보만 하라는 말이 아니요?"
유천기의 말은 사리가 정연하고도 날카로왔다. 사실 그의 말에는
잘못이 없었다.
"......!"
승려들은 모두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언뜻 반박할 말이 없었
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공은 본래 해월과는 남다른 사이였다. 그는 해월의 비보
를 들은 후 복수심에 타올랐기 때문에 어떤 소리도 지금 귀에 바
로 들려오지 않았다.
"아미타불......! 시주는 그럼 입만으로 본사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대하고 찾아왔단 말이오? 그렇다면 애당초부터 사정을 하였다면
몰라도 지금은 너무 늦었소이다."
사태는 점점 좋지 않게 되어가고 있었다. 더욱이 해공의 얼굴에는
이미 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마침내 유천기는 오기가 치밀었다.
'좋다. 소림이 얼마나 콧대가 높은지는 모르나 이렇게 핍박한 다
면 나도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다.'
사실 그는 이때쯤 신물을 꺼내려 했으나 지금에는 그런 마음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좋소! 그렇다면 대사께서 직접 하교하시기 바라오. 더불어 다른
네 분께서도 함께 손을 쓰시기 바라오."
그의 말은 소림의 나한승들에게는 그야말로 미친 말로 들렸다. 동
시에 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안색이 붉그락
푸르락 해졌다.
특히 해공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분기탱천하여 고함
쳤다.
"건방진 수작! 먼저 빈승을 꺾은 뒤에 큰 소리를 쳐도 늦지 않소!"
그는 성격이 화급하여 소림사 내에서 경원의 대상이었다. 분기탱
천한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거구를 날리며 유천기를 향
해 덮쳤다.
위이이잉!
그는 태산압정(泰山壓頂)의 일식으로 선장을 휘둘러 왔다. 그야말
로 광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적어도 수백 근의 힘이 담겨있는 공격
이었다.
유천기는 내심 독한 마음을 먹었다.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전에는 광오함을 깨우쳐 주지 못하리라!'
다음 순간 그는 머리를 짓눌러 오는 선장을 피할 생각도 않고 오
히려 적수공권으로 선장을 잡아채 갔다. 그것은 광오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한승들의 눈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
다. 윙! 하고 떨어지던 선장이 갑자기 무형의 힘에 막히기라도 한
듯 위로 급격히 퉁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어 유천기의 몸이 선
장을 따라 쫓아갔다.
"억!"
해공은 경악성을 발했다. 유천기가 그의 선장을 덥썩 움켜쥐더니
그대로 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선장은 굵기가 오리알 만한 묵철로
된 단단하기 그지없는 병기였다. 하물며 해공이 진기를 주입하고
있어 휘어 버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이... 이럴 수가......?"
해공은 눈을 크게 뜨고 엿가락처럼 휘어져 버린 선장을 멍청히 바
라 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으으으......."
그의 이마에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는 휘어진 선장을 빼
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더욱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갑자
기 선장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더욱 심하게
구부러지며 해공의 몸을 한 바퀴 휘감아버린 것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선장의 열기로 인해 호구가 타들어 갔다. 그러나
이미 선장에 몸이 감겨 있어 손을 뗄 수조차 없었다. 그 바람에
해공은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구슬픈 비명을 지르고 말
았다.
"으아아아악!"
이때였다.
"귀하! 손에 정을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득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유천기는 한 줄기
부드러운 경력이 자신의 배후로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겉으로는 부드러운 경력이었으나 몸 가까이 이르자 전신을
칭칭 휘감으며 전신 혈맥을 토막토막 끊어낼 듯한 무서운 기세로
쇄도하는 것이 아닌가?
'음......!'
유중강(柔中剛)의 그 힘은 가히 무서운 것이었다. 유천기는 이제
껏 그렇게 무서운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빙글 돌리며 장력을 날렸다.
"......!"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류의 대결이 훨씬
더 살기띈 대결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형무음(無形無音)의 격돌이
끝난 후 유천기는 비틀거렸다. 그는 중심을 잡으며 상대방을 바라
보았다.
상대도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도 무척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타난 자는 손에 종이로 된 섭선(攝扇)을 쥐고 있었는데, 영준하
게 생긴 이십대 가량의 청년문사였다.
얼굴이 여자처럼 희었으며, 한 쌍의 눈에는 내심을 헤아릴 수 없
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일신에 산뜻한 남삼(藍衫)
을 입고 있는 그는 풍류남아와 같은 기도를 흘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명가의 기품이 담담히 흐르는 청년이었다.
남삼문사는 유천기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대협께서 사정을 보아 주셔서 감읍합니다."
유천기는 한눈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는 마주 포권하며 말했
다.
"대협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시오. 오히려 이 사람이 양보를
받아 감격하고 있소이다."
그 말에 남삼문사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친근감이 들게 했다.
"우제는 남궁력(南宮靂)이라 합니다. 대협의 성함은?"
유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불초는 무명인이라 이름이 없습니다. 상심인이라 불러 주시면 고
맙겠소이다."
남궁력은 약간 검미를 움직였으나 곧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아, 본래 상심인 대협이셨군요. 앞으로 많은 지도를 바라겠습니다."
유천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은 기도가 출중하여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대체 어떤 자일까?'
이때, 산문 안으로부터 일단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대
부분 황색 법의(法衣)를 입은 승려들이었는데, 유독 홍색 가사를
입은 눈썹이 희고 미간에 붉은 점이 나 있는 노승이 눈길을 끌었다.
그가 중인을 대동하고 나타나자 나한승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마 매우 신분이 높은 고승인 것 같았다.
이때 남삼서생이 홍색가사의 노승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사형, 나오셨습니까?"
그 말에 유천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자가 소림의 제자였단 말인가? 그런데 어린 나이에 저 노승을
사형이라 부르다니.......'
이때 노승은 남궁력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제인가?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로.......?"
이때 한 나한승이 다가가 나직하게 뭐라고 말을 전했다. 그러자
노승의 눈길이 유천기에게로 옮겨졌다. 그의 눈길을 받자 유천기
는 마치 폐부까지 투시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무슨 일로 폐사를 방문하셨는지?"
노승의 음성은 낮았으나 마치 종이 울리는 것처럼 유천기의 고막
을 울렸다. 그것은 내공이 지극히 정순하다는 증거였다.
유천기는 이쯤해서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하고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은 숭녕도에서 왔습니다. 귀사의 한 분의 노선배님을 방문하
러 왔습니다."
그 말에 노승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유천
기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주위의 중들의 안색도 크게
변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노승은 합장불호를 외우더니 말했다.
"아미타불....... 빈승은 백인(白忍)이라 하오이다. 폐사에서 달
마원(達磨院)의 수좌를 맡고 있소이다. 청컨데 시주께서는 신물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
유천기는 소매 속에서 하나의 작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혈옥
(血玉)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고기였다. 혈옥어를 본 순간 백
인선사는 급히 머리를 숙였다.
"아미타불! 틀림 없습니다. 그럼 시주께서는 빈승을 따르십시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신물 하나만으로 소림의 달마원주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유천기를 직접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유천기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초립 사이로 남궁력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하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백료선사(白了禪師)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사백님을 만나시겠다는 말씀이오.......?"
유천기는 가슴이 섬뜩하는 것을 느꼈다. 소림방장 백료선사의 눈
빛이 찰라적이긴 하였으나 그의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금세 그의 눈빛은 물처럼 고요하게 가라 앉았다.
"그렇습니다."
방장실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유천기는 선방 안에
감도는 은은한 향(香) 내음을 맡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내
려다 보았다. 그는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실은 생각에 잠기
고 있었다.
'무엇인가? 이 느낌은....... 이 선방 안은 겉으로는 차분히 가라
앉아 보이지만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백료선사는 마치 활불(活佛)과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다소 뚱뚱
한 편으로 눈은 반쯤 감고 있었다. 얼굴에는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다만 그 미소는 어쩐지 석화(石化)되어 있
는 것처럼 보였다.
백료선사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백시주는 알고 있소? 사백께서 정상인이 아닌 것을?"
유천기는 흠칫했다.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아연하
다가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아미타불....... 이 일은 본사의 명예와 깊은 관련이 있는지라
외인이신 시주께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주께서 사백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아
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천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생은 선사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
만 후배는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미타불......."
백료선사는 침중하게 불호만 외우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언뜻
고통스런 표정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
다.
"숭녕도에서 오셨다면 의당 명을 받아야 도리겠지만 빈승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유천기는 눈썹을 꿈틀했다.
"후배는 이 일의 원인을 꼭 알아야겠소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사
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말이 만약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실로 중대한 사태를
야기시켰을 것이다. 백료선사가 누구인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
림사의 장문방장이자 동시에 옥환맹의 맹주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사람은 현무림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닌게 아니라 백료선사의 감겨있던 눈이
그 순간 떠졌다. 그의 눈에서는 무서운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
신광은 무쇠라도 꿰뚫을 듯 했다.
그러나 유천기는 이미 마음을 정한 바 있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분명 무슨 일인가
가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옥환맹의 회동과도 관련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는 소림에 대해 한 가닥 의혹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애당초 소
림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
들로 인해 도리어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백료선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폐사는 불문의 정토요. 따라서 시시비비에 휘말리는 것은 원치
않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시비를 거는 것을 방임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의 말투에는 은근한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유천기는 일
단 마음 먹은 이상 굽히려 들지 않았다.
"후배 역시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두는 바이
오."
"......!"
선방 안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유천기는 추호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실상 그는 용담호혈이나 다름없는 곳에 있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
다.
백료선사는 문득 탄식했다.
"시주께서 정녕 그러시다면 빈승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소이
다. 그러나 시간을 주시오."
그것은 타협이었다. 유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사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그럼 언제쯤 전갈을 주시겠습니까?"
백료선사는 신중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본사에서는 중대한 회합이 벌어지고 있소이다. 시주
께서는 맹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유천기는 담담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후배는 이만......."
"아미타불....... 지객당(知客堂)에 거처를 마련하도록 이르겠소
이다. 모쪼록 양해하시기를......."
유천기는 포권지례를 한 후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방장실 밖에서
한 명의 중년승려가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나오자 허리를 숙이며 말
했다.
"빈승은 해상(海相)이라고 합니다. 폐사에서 지객을 담당하고 있
습니다. 빈승을 따라 오십시오."
해상이 안내한 곳은 소림이 손님을 위해 마련하고 있는 정사 가
구축되어 있는 곳이었다. 유천기는 잠시 후 조용한 정실로 안내되
었다.
그곳은 소림 경내에서 약간 격리된 곳으로, 선방의 구조와는 양식
이 조금씩 틀린 방사가 몇 채 화원과 인공가산을 끼고 형성되어
있었다.
해상은 그를 두 개의 정실이 달린 방사로 안내한 뒤 공손히 말했
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지객당의 광자(廣字) 돌림의 제자가 대기하
고 있으니 언제라도 부르십시오. 다만......."
그는 약간 거북한 듯이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되도록이면 밖으로 나가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폐사
에서는 외인에 한해 당분간 경내를 다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
다."
그것은 일종의 유폐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유천기는 내심 반 감이
치밀었다.
"불문에 이토록 비밀이 많을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해상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변명했다.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소승도 다만 시키는 대로 할 따름
입니다."
유천기는 그와 더 이상 이야기해 보아야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차갑게 말했다.
"알겠소이다. 대사."
첫댓글 감사합니다.